이명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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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명좌는 덕흥대원군의 7대 사손으로,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되었으나 사후 신원 회복된 인물이다. 1681년에 태어나 172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1722년 신임사화 당시 노론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역모 혐의를 받았다. 국청에서 고문을 받고 장세상에게 은화를 전달하여 환국을 도모했다는 자백을 하였고, 결국 참형에 처해졌다. 이후 영조 때 혐의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1724년 신원이 회복되었다. 1900년 고종은 그의 제사를 5대 종손에게 받들도록 했다.
이명좌는 1681년(숙종 7) 2월 22일에 태어나 1721년(경종 1) 식년시 생원에 급제하여 진사를 지냈다.[1] 1722년(경종 2) 노론 우6인(又六人) 중 한 명으로 임인사화(壬寅士禍) 때 목호룡이 경종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는 이른바 삼급수(三急手)의 고변으로 종조(從祖) 충정공 이홍술과 연좌되어 8월 4일 옥에 하옥되었다.[1]
[1]
서적
조선왕조실록, 경종 2년 임인(1722,강희 61) 8월17일(경오) 이명좌 공초
2. 생애
1722년 8월 17일 국청에서 처음에는 사실을 숨겼으나, 형문(刑問)을 받자 다음과 같이 자복하였다.
> 조송이 처음에 종조(從祖)의 의막(依幕)에 가서 은화 3백 냥을 받았고, 제가 또 조송의 생질(甥姪) 이세복으로 하여금 종조의 집에 가서 4백 냥을 가져가게 하였으니, 전후에 낸 것이 합하여 700냥이 됩니다. 모두 조송에게 보내어 장세상에게 쓰도록 하여 환국(換局)을 도모하게 하였습니다. 제가 김시정과 정우관을 찾아가서 보고 그의 밀어(密語)를 따라 묻기를, ‘환국(換局)하는 일을 어떻게 도모하겠는가?’ 하니, 정우관이 이르기를, ‘장세상에게 들여 보낸 은화(銀貨)는 내전(內殿)에서 도모한 일이 있는데, 멀지 않아 일이 성사(成事)되면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니, 상세하게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김시태가 와서 말하기를, ‘시사(時事)에 좋은 기회가 있는 것이 명확하다. 오늘 저녁에 그대 집의 대감(大監)께서 마땅히 패초(牌招)받는 일이 있을 것이니, 요동(搖動)하지 말고 속에 융복(戎服)을 입고 소로(小路)를 따라 예궐(詣闕)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바야흐로 영상(領相)의 의막(依幕)에 도로 나가서 또한 이 일을 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벌써 종조(從祖)의 은화를 내어 장세상에게 전송(轉送)하고, 또 정우관을 보고 장세상이 도모하는 일을 물었으니, 궁금(宮禁)에 교통(交通)하며 환국(換局)을 도모하는 모의에 동참(同參)한 것이 적실(的實)합니다.”[1]
이러한 자복을 하고 이날 참형으로 원통하게 향년 42세로 별세하였다.[1]
영조 때 임인년 옥안에 대한 재논의에서 민진원은 “이명좌는 은(銀)을 내어 궁궐 안과 내통했다는 것으로 승복했는데, 이것은 역모했다고 자복한 사람과는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영조는 “무고라고 하는 것은 문목 이외에 잡언(雜言)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고와는 다르다.”라고 하며, 적몰된 가산을 돌려주도록 하였다.[2]
1724년(영조 1년) 영조의 명으로 신원(伸寃)이 회복되고 적몰된 가산도 돌려받았다.[2]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이명좌는 덕흥대원군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도정궁 사손 증 참판 이세정(李世禎)이며, 어머니는 부제학 심유(沈攸)의 딸인 증 정부인 청송 심씨이다. 부인은 감찰 박대수(朴大需)의 딸이다.[1]
1681년(숙종 7) 2월 22일에 태어나 1721년(경종 1) 식년시 생원에 급제하여 진사를 지냈다.[1]
2. 2. 신임사화 연루와 처형
1722년(경종 2) 노론 우6인(又六人) 중 한 명으로 임인사화(壬寅士禍) 때 목호룡이 경종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는 이른바 삼급수(三急手)의 고변으로 종조(從祖) 충정공 이홍술과 연좌되어 이해 8월 4일 국청(鞫廳)에서 옥에 하옥되었다.[1]
1722년 8월 17일 국청에서 문목(問目)을 내었으나, 처음에는 사실을 숨기고 바른 대로 고하지 않았다. 김시태와 대질시켜 서로 쟁변(爭辨)할 즈음에 의심할만한 단서가 있어 형문(刑問)을 하였다. 한 차례 형문(刑問)하자 거의 다 실토(實吐)하였지만, 아직도 숨기고 있어 두 차례 형문(刑問)하니, 바른대로 공초(供招)하였다.[1]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조송이 처음에 종조(從祖)의 의막(依幕)에 가서 은화 3백 냥을 받았고, 제가 또 조송의 생질(甥姪) 이세복으로 하여금 종조의 집에 가서 4백 냥을 가져가게 하였으니, 전후에 낸 것이 합하여 700냥이 됩니다. 모두 조송에게 보내어 장세상에게 쓰도록 하여 환국(換局)을 도모하게 하였습니다. 제가 김시정과 정우관을 찾아가서 보고 그의 밀어(密語)를 따라 묻기를, ‘환국(換局)하는 일을 어떻게 도모하겠는가?’ 하니, 정우관이 이르기를, ‘장세상에게 들여 보낸 은화(銀貨)는 내전(內殿)에서 도모한 일이 있는데, 멀지 않아 일이 성사(成事)되면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니, 상세하게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김시태가 와서 말하기를, ‘시사(時事)에 좋은 기회가 있는 것이 명확하다. 오늘 저녁에 그대 집의 대감(大監)께서 마땅히 패초(牌招)받는 일이 있을 것이니, 요동(搖動)하지 말고 속에 융복(戎服)을 입고 소로(小路)를 따라 예궐(詣闕)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바야흐로 영상(領相)의 의막(依幕)에 도로 나가서 또한 이 일을 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벌써 종조(從祖)의 은화를 내어 장세상에게 전송(轉送)하고, 또 정우관을 보고 장세상이 도모하는 일을 물었으니, 궁금(宮禁)에 교통(交通)하며 환국(換局)을 도모하는 모의에 동참(同參)한 것이 적실(的實)합니다.”하였다.[1]
이러한 자복을 하고 이날 참형으로 원통하게 향년 42세로 별세하였다.[1]
영조 때 임인년 옥안에 대한 재논의에서 민진원은 “이명좌는 은(銀)을 내어 궁궐 안과 내통했다는 것으로 승복했는데, 이것은 역모했다고 자복한 사람과는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영조는 “무고라고 하는 것은 문목 이외에 잡언(雜言)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고와는 다르다.”라고 하며, 적몰된 가산을 돌려주도록 하였다.[2]
2. 3. 사후 복권과 평가
李明佐중국어는 임인사화에 연좌되어 억울하게 죽었으나, 1724년(영조 1년) 영조의 명으로 신원(伸寃)이 회복되고 적몰된 가산도 돌려받았다.[2] 1900년(광무 4년) 고종은 5대 종손 이재철에게 李明佐중국어의 제사를 받들도록 명하였다.[1]
3. 가족 관계
관계 이름 비고 할아버지 이홍일 도정궁 사손(嗣孫) 숙부 이세기 생숙부 증 승지 이홍달에게 출계 숙부 이세상 아버지 이세정 증 참판, 도정궁 사손 어머니 청송 심씨 증 정부인, 부제학 심유의 딸 남동생 이명회 도정궁 사손, 임인옥사 연좌 남동생 이명진 남동생 이명협 남동생 이명익 종숙 증 이조참의 이세희에게 출계, 이홍술 양손자, 임인옥사 연좌 조카 이형규 여동생 조종하에게 출가 여동생 윤덕순에게 출가 여동생 한성도에게 출가 부인 박대수의 딸
참조
[2]
서적
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 2년 임인(1722,강희 61) 9월21일(계묘) 영종 을사년에 임인년의 옥안에 대해 다시 논의한 내용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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