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다 슈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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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쿠다 슈세이는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출신의 일본 작가로,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오자키 코요의 영향을 받아 문학을 시작했으나, 자연주의와 사소설적 경향을 혼합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아라조타이', '곰팡이', '거친 사람' 등이 있으며,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여성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작품은 일본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영화로도 각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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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다 슈세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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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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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도쿠다 스에오 |
출생일 | 1872년 2월 1일 |
출생지 |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요코야마초 |
사망일 | 1943년 11월 18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혼고구 |
묘지 | 고다이라 영원 |
국적 | 일본 |
직업 | 소설가 |
언어 | 일본어 |
학력 | |
모교 | 제4고등학교 중퇴 |
문학 활동 | |
장르 | 소설 |
사조 | 자연주의 문학 |
주요 작품 | |
가족 | |
자녀 | 도쿠다 가즈호 |
2. 생애
도쿠다 슈세이는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의 옛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1] 그는 자신보다 네 살 많고 이미 문인으로 자리 잡았던 오자키 코요를 스승으로 삼아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1903년 코요가 사망한 후, 도쿠다는 스승의 낭만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자연주의와 고백적인 사소설 스타일을 결합하기 시작했다.
1908년 발표한 新世帯|아라조타이일본어는 젊은 노동자 부부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그렸으며, 이후 1910년 足迹|아시아토일본어를 발표했다. 1911년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黴|카비일본어를 발표했는데, 이는 일본 사소설 장르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1915년에는 あらくれ|아라쿠레일본어를 발표하며 자연주의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26년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도쿠다는 여러 젊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그의 후기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연재된 仮装人物|가소 진부츠일본어와 1941년부터 집필했으나 완성하지 못한 縮図|슈쿠즈일본어는 그의 대표적인 후기작으로 알려져 있다.
2. 1. 초기 (출생 ~ 문단 데뷔)
1872년 2월 1일[3](메이지 4년 12월 23일)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요코야마정에서 가가번 가로요코야마 씨의 가신이었던 도쿠다 운페이(徳田雲平)의 여섯째(3남)로 태어났다.[1] (다음 해 달력 변경으로 양력 생일이 오지 않아, 평생 생일은 12월 23일로, 나이는 세는나이로 셈했다.) 아버지 운페이는 아키오가 태어나기 전 농가에 주기로 약속했으나, 태어난 얼굴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4] 메이지 유신 이후 지록공채로 가세가 기울어 어려운 생활을 하던 몰락 무사 가문의 막내로 태어났으며, 스스로 "숙명적으로 그림자 옅은 삶을 이 세상에 받았다"고 표현했다. 4세 때 생가를 떠나 여러 곳을 이사하며 자랐고, 몸이 약해 초등학교(현재의 가나자와 시립 바바 초등학교)에도 1년 늦게 입학했다. 그는 수필 『추억하는 대로』에서 "나는 어릴 적부터 고독했다. 우울의 벌레가 온몸에 깃들어 있었다"라고 회고했다.초등학교 시절 한 학년 아래에 이즈미 교카가 있었으나, 당시에는 서로 얼굴만 아는 정도였다. 1888년 (메이지 21년) 제4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독서에 열중했으며, 이듬해 상급생의 권유로 소설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학과 중에서는 영어와 한문 성적이 뛰어났다.[5]
1891년 (메이지 24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제4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이듬해인 1892년 (메이지 25년), 친구 기류 유유와 함께 도쿄로 가서 당대 유명 작가인 오자키 고요의 문하생이 되려 했으나, 먼저 그의 문하에 있던 이즈미 교카로부터 오자키가 부재중이라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우편으로 보낸 원고마저 "감이 아직 덜 익었을 때는 까마귀도 쪼지 않는다"는 평과 함께 반송되었다.[6] 기류 유유가 복학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 후, 도쿠다는 오사카에 있는 맏형에게 의지하는 등 여러 지역을 떠돌며 군청 고용원, 신문 기자, 영어 교사 등으로 일하며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갔다. '추성(秋聲)'이라는 필명은 1893년 (메이지 26년) 자유당 기관지 "호쿠리쿠 자유 신문"의 편집을 맡았을 때 쓰기 시작한 사기(私記) "추성록"에서 비롯되었다.[7]
2. 2. 중기 (자연주의 문학 확립)
1903년 스승 오자키 고요가 사망하고 겐유샤가 쇠퇴하며, 러일 전쟁 이후 문단에 자연주의 문학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도쿠다 슈세이의 문학적 자질은 새로운 시대의 사실주의적 경향과 만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06년에는 혼고구 모리카와초로 이사하여 평생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8]1908년, 이전에 살던 고이시카와구 오모테마치 근처 술집을 모델로 한 중편 『신세대(新世代)』(아라조타이)를 "국민신문"에 연재하며 자연주의 작풍으로 본격적인 전환을 알렸다. 이 작품은 젊은 노동자 계층 부부의 좌절감을 다루었다. 같은 해 단편집 『추성집』[9]과 1909년 단편집 『출산』[10]을 통해 단편 작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으며 자연주의 문단의 주요 작가로 자리 잡았다.[11] 이때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서술 방식 등 슈세이 특유의 문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12][13]
1910년에는 아내 하마를 모델로 한 『족적(足迹)』(소쿠세키)[14][15]를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했다. 이듬해인 1911년, 자신의 결혼 과정과 이후의 무기력한 생활을 소재로 한 사소설 『곰팡이(黴)』(카비)를 나쓰메 소세키의 추천으로 "도쿄 아사히 신문"에 연재했다. 이 작품은 일본 사소설 장르의 전형적인 예시로 꼽힌다. 처음에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으나[16], 1912년 『곰팡이』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자 "와세다 문학", "신초" 등에서 호평하며 문단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뒤이어 『족적』도 단행본 출간과 함께 재평가받으면서, 슈세이는 시마자키 도손, 다야마 가타이와 함께 일본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다졌다.[17]
이 시기 슈세이는 『노파』(1909), 『새 가게』(1910), 『환약』(1911), 『눈물』(1912) 등 뛰어난 단편들을 발표하며 냉정한 관찰과 리얼리즘을 보여주었다. 평범한 서민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내며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추구했다.[18] 평론가 이쿠타 나가에는 슈세이를 "태어난 자연파"라고 평가하며 그의 자연주의가 타고난 성격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분석했다.[19]
자연주의 문학 운동이 저물어 가던 다이쇼 시대에도 슈세이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13년에는 몸값을 치르고 나온 게이샤 출신 유녀의 애욕 생활을 그린 『짓무름(爛)』(타다레)[20]을 발표했고, 1915년에는 본능에 따라 여러 남자를 거치는 기 센 여성의 반생을 그린 장편 『거친 사람(あらくれ)』(아라쿠레)을 발표하며 자연주의 작풍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춰 서민의 모습을 그리는 데 뛰어난 작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21]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슈세이의 자연주의가 『신세대』에서 시작되어 『족적』, 『곰팡이』, 『짓무름』을 거쳐 『거친 사람』에서 정점에 달했다고 평가했다.[22]
다이쇼 초기의 단편들, 특히 『나막신의 밑창』(1913), 『애달픔』(1914), 『여자』(1915) 등 객관 소설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도 있다.[23][24] 특히 창녀에게 무시당한 노인의 복수를 그린 『나막신의 밑창』은 불필요한 묘사 없이 진실된 생명력과 의미를 담아낸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꼽힌다.[25]
2. 3. 후기 (통속 소설 집필 ~ 만년)
1915년 (다이쇼 4년) 발표한 장편 소설 『아라쿠레』(あらくれ|아라쿠레일본어)는 본능에 충실하며 여러 남자를 거치는 기가 센 여성의 반생을 그려 자연주의적 작풍의 절정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21]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라쿠레』를 통해 슈세이가 새로운 문학적 정점에 도달했다고 평했다.[22]그러나 다이쇼 시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슈세이는 한동안 작가로서 침체기를 겪었다.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모더니즘 문학이 문단의 주류로 부상하면서 1930년(쇼와 5년)부터는 작품을 발표할 지면을 거의 얻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시기 슈세이는 댄스를 배우고 댄스홀을 드나들었다.
1926년 아내가 사망한 이후, 슈세이는 여러 젊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후기 작품 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1935년부터 1938년까지 발표된 『가장 인물』(仮装人物|가소 진부츠일본어)과 1941년부터 연재되었으나 미완으로 남은 『축도』(縮図|슈쿠즈일본어)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다.
1930년 5월에는 오랜 문우였던 타야마 가타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하여 그의 임종을 지켰다.[36] 1931년(쇼와 6년) 여름에는 고이시카와 하쿠산의 게이샤였던 코바야시 마사코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훗날 『축도』의 여주인공 모델이 되었다.
슈세이 자신은 이 시기를 "예술 방면에서도 그림자가 옅어지고 있었다"고 회고하며, "재기의 작업은 쉽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그는 "그 자신의 낡고 낡아진 자연주의로부터 재건해야만 했다"고 당시의 심경을 밝혔다.[37]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슈세이를 격려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1932년(쇼와 7년) 5월, 무로 사이세이, 나카무라 부라오, 이부세 마스지, 후나하시 세이이치, 오자키 시로, 아베 토모지, 사카키야마 준, 나라자키 츠토무 등 여러 문인들이 '추성회'를 결성하였고, 같은 해 7월에는 기관지 '아라쿠레'를 창간했다. 또한 그해 가을에는 시마자키 도손의 제창으로 '도쿠다 슈세이 후원회'가 조직되어 색지나 단자쿠(短冊, 시나 글을 적는 길고 좁은 종이) 기증 등을 통해 슈세이를 후원했다.
문단의 격려와 후원에 힘입어 슈세이는 다시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연재한 『가장 인물』(仮装人物|가소 진부츠일본어)은 작가 자신의 30세 연하 제자와의 연애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후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1941년에는 게이샤의 세계를 그린 마지막 장편 소설 『축도』(縮図|슈쿠즈일본어)의 연재를 시작했다. 이 작품은 슈세이 문학의 집대성으로 평가받았으나, 당시 일제 검열 당국의 압력으로 인해 연재가 중단되어 미완으로 남았다.
3. 작품 세계
1895년 박문관 편집부에 취직한 후 이즈미 쿄카의 권유로 오자키 코요 문하에 들어갔다. 1896년 피차별 부락 출신 여성을 다룬 《겨우살이》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이후 이즈미 쿄카, 오구리 후요, 야나가와 슌요와 함께 '홍문 사천왕'으로 불렸으나, 겐유샤 특유의 희작적 경향과는 다른 수수하고 진솔한 작풍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1900년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한 《구름의 행방》이 출세작이 되었다.
1902년 오자와 하마와 사실혼 관계를 시작했고[8], 1903년 스승 오자키 코요가 사망하면서 겐유샤는 쇠퇴했다. 러일 전쟁 이후 자연주의 문학이 대두되면서, 그의 사실적인 문학적 자질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08년 중편 《새로운 세대(아라조타이)》를 발표하며 자연주의 작풍으로의 전환을 알렸고, 같은 해 단편집 《추성집》[9]과 이듬해 단편집 《출산》[10] 등을 통해 단편 작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으며 자연주의 문단의 주요 인물로 자리 잡았다[11]. 이때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특유의 서술 방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12][13].
1910년 아내를 모델로 한 《족적(소쿠세키)》[14][15], 1911년 자신의 결혼 생활을 소재로 한 사소설 《곰팡이(카비)》를 나쓰메 소세키의 추천으로 발표했다. 이 두 작품은 처음에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으나, 1912년 단행본 출간 이후 높은 평가를 받으며 시마자키 토손, 타야마 가타이와 함께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16][17]. 그의 작품은 평범한 서민의 일상을 냉정하게 관찰하며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18]. 이쿠타 나가에는 그를 "태어난 자연파"라고 칭했다[19].
다이쇼 시대에 들어서도 《란(타다레)》(1913)[20], 《아라쿠레》(1915) 등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통해 자연주의 작풍의 절정을 보여주었으며, 여성의 삶을 그리는 데 뛰어난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21][22]. 이 시기 단편 소설에서도 《나막신의 밑창》(1913) 등 뛰어난 객관 소설을 발표하며 기량을 보여주었다[23][24][25].
그러나 1917년 이후로는 통속 소설을 다작하면서 문학적으로는 다소 침체기를 겪었다는 평가도 있다[27][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집필 활동을 이어갔으며[29], 그의 통속 소설 중 다수가 영화나 연극으로 만들어지는 등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30][31]. 다이쇼 말기에는 《차장 부부의 죽음》(1924), 《꽃이 핀다》(1924) 등 뛰어난 단편을 발표하며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32].
3. 1. 주제와 특징
도쿠다 슈세이는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스승 오자키 코요의 낭만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러일 전쟁 이후 새롭게 대두된 자연주의 문학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구축했다.[1][8] 그의 문학은 시마자키 토손, 타야마 가타이 등과 함께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했으며,[17] 특히 현실을 꾸밈없이 그려내는 사실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슈세이는 평범한 서민들의 일상, 특히 여성의 삶과 내면 심리를 객관적이고 냉정한 관찰을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21] 그는 대상을 냉소하거나 감격하지 않고, 세상의 한 단면을 조용히 포착하여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18] 이쿠타 나가에는 이러한 슈세이의 작가적 성향을 두고 "태어난 자연파"라고 평가하기도 했다.[19]
그의 작품에서는 결혼 생활의 무력감(≪곰팡이(黴)≫[11]), 게이샤나 유녀의 애욕(≪짓무름(爛)≫[20], ≪축도(縮図)≫), 본능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거친 사람(あらくれ)≫) 등 다양한 여성들의 삶이 주요 소재로 다루어진다. 특히 ≪거친 사람(あらくれ)≫은 그의 자연주의 작풍의 절정으로 평가받는다.[21] 또한 젊은 노동자 부부의 좌절(≪신세대(新世代)≫)이나 도시 하층민의 생활 등 평범한 사람들의 현실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소설 역시 슈세이 문학의 중요한 특징이다. 결혼 생활을 다룬 ≪곰팡이(黴)≫는 일본 사소설의 대표적인 예시로 꼽히며,[11] 후기작인 ≪가장 인물(仮装人物)≫에서는 30세 연하의 제자 야마다 준코와의 관계를,[33] 미완성 유작인 ≪축도(縮図)≫에서는 게이샤와의 관계를 그리는 등 자신의 사생활을 작품의 소재로 삼기도 했다.[37]
문체 면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뒤섞는 독특한 기법이 특징적이다. 노구치 후지오가 '도치(倒置)'라고 불렀고 마쓰모토 토오루가 '교착하는 시간'이라고 평한[12][13] 이 기법은 그의 작품에 복잡성과 깊이를 더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3. 2. 주요 작품
도쿠다 슈세이는 자연주의 문학과 사소설 경향의 작품을 다수 남겼다. 그의 문학은 주로 평범한 서민, 특히 여성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주요 작품들은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경우가 많았다.1908년 발표된 《신세대》(新世代|아라조타이일본어)[8]는 고이시카와 오모테마치 시절 살던 집 근처 술집을 모델로 한 중편 소설로, 젊은 노동자 계층 부부의 좌절감을 다루었다. 이 작품은 도쿠다가 오자키 코요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연주의로 작풍을 전환하는 첫 번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1]
1910년에는 아내 하마를 모델로 한 《발자취》(足迹|아시아토일본어)[14][15]를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했다. 시골에서 상경한 여성이 결혼 후 집을 뛰쳐나오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이듬해인 1911년에는 작가 자신의 결혼 과정과 무기력한 결혼 생활을 소재로 한 사소설 《곰팡이》(黴|카비일본어)를 나쓰메 소세키의 추천으로 도쿄 아사히 신문에 연재했다.[1] 이 작품은 일본 사소설 장르의 전형적인 예시로 꼽힌다. 《발자취》와 《곰팡이》는 발표 당시 큰 반향을 얻지 못했으나, 1912년 《곰팡이》가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문단의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뒤이어 《발자취》도 재평가받으며 도쿠다는 시마자키 토손, 타야마 가타이와 함께 자연주의 문학의 주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16][17]
다이쇼 시대에 들어서도 그는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1913년 발표한 《짓무름》(爛|타다레일본어)[20]은 과거 게이샤였던 유녀(遊女)의 애욕 생활을 그렸으며, 1915년 발표한 장편 소설 《거친 사람》(あらくれ|아라쿠레일본어)[1]은 본능에 따라 여러 남자를 거치는 강인한 여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자연주의 작풍의 절정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도쿠다는 여성의 삶을 깊이 있게 그려내는 작가, 이른바 "유전(流転) 소설"의 대가로도 알려지게 되었다.[21]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도쿠다의 자연주의 문학이 《신세대》에서 시작되어 《발자취》, 《곰팡이》, 《짓무름》을 거쳐 《아라쿠레》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했다.[22]
이후 잠시 침체기를 겪었으나,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연재한 《가장 인물》(仮装人物|가소 진부츠일본어)[1]은 작가 자신이 경험한 30세 연하 제자와의 연애를 바탕으로 쓰여진 후기 대표작이다. 1941년에는 게이샤의 세계를 소재로 한 마지막 장편 소설 《축도》(縮図|슈쿠즈일본어)[1]를 집필하기 시작했으나, 당시 검열 문제로 인해 미완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도쿠다 슈세이 문학의 집대성으로 평가받는다.
장편 소설 외에도 다수의 뛰어난 단편 소설을 발표하여 단편 작가로서의 재능도 인정받았다. 그의 단편들은 주로 서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냉정한 시선으로 관찰하며 담담하게 그려내는 특징을 보인다.[18] 대표적인 단편집으로는 고향 가나자와를 소재로 한 《도쿠다 슈세이-가나자와 시리즈》와 슈세이기념관에서 발행한 《도쿠다 슈세이 단편 소설 걸작집》 등이 있다. 특히 1913년 발표된 단편 《나막신의 밑창》(下駄の歯)은 창녀에게 무시당한 노인의 복수심을 그린 작품으로,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묘사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25]
주요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작품명 (원제) | 주요 내용 및 의의 |
---|---|---|
1908 | 《신세대》 (新世代|아라조타이일본어) | 술집 배경, 젊은 노동자 부부의 좌절. 자연주의 전환 첫 작품. |
1910 | 《발자취》 (足迹|아시아토일본어) | 아내를 모델로 한 여성의 삶. 《곰팡이》와 함께 자연주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음. |
1911 | 《곰팡이》 (黴|카비일본어) | 작가 자신의 결혼 생활 바탕. 사소설의 전형적인 예시. 문단적 성공을 거둠. |
1913 | 《짓무름》 (爛|타다레일본어) | 전직 게이샤였던 유녀의 애욕 생활. |
1915 | 《거친 사람》 (あらくれ|아라쿠레일본어) | 본능에 충실한 강인한 여성 묘사. 자연주의 작풍의 절정. "유전 소설"로 평가받음. | |
1935~1938 | 《가장 인물》 (仮装人物|가소 진부츠일본어) | 작가 자신의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한 후기 대표작. | |
1941 | 《축도》 (縮図|슈쿠즈일본어) | 게이샤의 세계를 그린 마지막 장편. 검열로 미완. 슈세이 문학의 집대성으로 평가됨. |
4. 평가 및 영향
도쿠다 슈세이는 러일 전쟁 이후 대두된 자연주의 문학의 흐름 속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가이다.[11] 그의 문학은 신문학의 사실적인 경향과 어우러져, 특히 평범한 서민의 일상을 냉정한 관찰과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그려내는 데 뛰어났다. 그는 대상을 "냉소하지도 않고 별다른 감격도 없이 세상의 한 단면을 잘라내어, 묵묵히 자리를 잡고 바라보며"[18]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쿠타 나가에는 이러한 슈세이의 자연주의가 작가의 "본래의 성격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아 "태어난 자연파"라고 평했다.[19]
특히 다이쇼 시대에 들어서는 『란(타다레)』[20], 『아라쿠레』 등 시정에 살아가는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춘 이른바 "유전 소설"을 통해, 여성을 그리는 데 뛰어난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21]
만주 사변 이후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쇠퇴하고 문예 부흥의 기운이 일자, 슈세이는 '마을의 댄스 플로어' 등의 단편을 발표하며 문학적 부활을 이루었다.[38] 이후 만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가장 인물』[40] 등을 발표하며 꾸준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일본 펜클럽 창립에 참여했으며, 1937년에는 제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41] 1942년에는 일본 문학 보국회 소설부 회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장편 소설이 될 뻔했던 『축도』는 게이샤의 세계를 그렸다는 이유로 태평양 전쟁 중 정보국으로부터 시국에 맞지 않는다는 판정을 받아 발금 처분을 당해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42]
슈세이의 많은 작품은 일본에서 영화로 각색되어 대중에게 알려졌으며[2], 사후인 1947년에는 그의 고향 가나자와시의 우타쓰 산 정상 부근에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이 기념비에는 시인 무로 사이세이가 쓴 글이 새겨져 있으며, 건축가 타니구치 요시로가 설계했다.
4. 1. 당대 평가
나쓰메 소세키는 도쿠다 슈세이의 작품 『아라쿠레』에 대해 "어디를 잡아도 거짓 같지 않다", "도쿠다 씨의 작품을 읽으면 항상 현실감은 이것인가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현실 그 자체를 쓰고 있지만, 그 뒤에 철학이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고바야시 히데오는 슈세이의 후기 대표작인 『가장 인물』에 대해 "이 기묘한 연애 소설의 급소라고 할 만한 부분을, 비평가 근성을 발휘해서 찾아내려고 해도 좀처럼 찾아내지 못한다. 모든 곳에서, 호리병 박 뱀장어이다"라고 평하며 작품의 난해함 혹은 파악하기 어려운 핵심을 언급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슈세이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1947년 기념 강연회에서는 "일본 소설은 겐지 이야기에서 이하라 사이카쿠로, 사이카쿠에서 슈세이로 도약한다"고 말했으며, 만년인 1967년에는 "일본 소설은 사이카쿠에서 모리 오가이, 소세키로 도약했다고 하기보다는, 사이카쿠에서 쇼세이로 도약했다고 하는 편이, 나에게는 더 좋게 생각하는 견해이다. 오가이, 소세키 등은 미숙한 시대의 미발달 작가가 아니었을까"라고 적으며 슈세이를 일본 소설사의 중요한 인물로 강조했다.
4. 2. 후대 평가
일본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11][17] 그의 작품은 현대 일본 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작품이 일본에서 영화로 각색되었다.[2]나쓰메 소세키는 도쿠다 슈세이의 작품 『아라쿠레』에 대해 "어디를 잡아도 거짓 같지 않다", "도쿠다 씨의 작품을 읽으면 항상 현실감은 이것인가라고 생각하게 된다"라고 현실 묘사의 탁월함을 인정하면서도, "현실 그 자체를 쓰고 있지만, 그 뒤에 철학이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고바야시 히데오는 후기 대표작 『가장 인물』에 대해 "이 기묘한 연애 소설의 급소라고 할 만한 부분을, 비평가 근성을 발휘해서 찾아내려고 해도 좀처럼 찾아내지 못한다. 모든 곳에서, 호리병 박 뱀장어이다"라고 평하며 작품의 난해함 혹은 깊이를 언급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도쿠다 슈세이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1947년 가나자와시에서 열린 슈세이 문학비 제막 기념 강연회에서는 "일본 소설은 겐지 이야기로 시작해서 사이카쿠로 도약하고, 사이카쿠에서 쇼세이로 도약한다"라고 말하며 일본 문학사에서 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만년인 1967년에는 "일본 소설은 사이카쿠에서 오가이, 소세키로 도약했다고 하기보다는, 사이카쿠에서 쇼세이로 도약했다고 하는 편이, 나에게는 더 좋게 생각하는 견해이다. 오가이, 소세키 등은 미숙한 시대의 미발달 작가가 아니었을까"라고 적으며 슈세이를 모리 오가이, 나쓰메 소세키보다 높게 평가하는 듯한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1947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우타쓰 산 정상 근처에 세워졌다. 이 기념비에는 시인 무로 사이세이가 쓴 글이 새겨져 있으며, 건축가 타니구치 요시로가 설계했다.

4. 3. 논란
도쿠다 슈세이는 대필 문제로 자주 거론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지방 신문 연재 통속 소설이나 번역, 번안, 입문서 등에서 제자나 다른 무명 작가의 작품을 자신의 필명으로 발표했다는 의혹을 받았다.[51] 그러나 근래 연구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쓴 원고를 그대로 발표한 것이 아니라 슈세이가 직접 내용을 상당히 수정하고 다듬어서 발표한 것으로 밝혀졌다.[52]한편, 슈세이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비판 정신을 보여주기도 했다. 관동 대지진 직후에는 단편 소설 『파이어건』을 발표하여, 유언비어에 현혹되어 소화기를 폭탄으로 오인하는 박사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했다.[53][54] 또한 1934년 일본 정부가 문예 통제를 위해 문단 인사들을 모아 개최한 문예 간담회 첫 회합에서, 슈세이는 "일본 문학은 서민 계급 사이에서 일어나 서민 계급의 손으로 오늘날까지 발전해 왔으므로, 지금 정부로부터 보호받는다는 것은 이상하며 그럴 필요도 없다"고 발언하여 정부의 통제 시도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 일화는 히로쓰 가즈로의 글 "도쿠다 씨의 인상"에 기록되어 있다.[53][54]
참조
[1]
웹사이트
徳田秋声 (Tokuda Shūsei)
https://kotobank.jp/[...]
2021-09-13
[2]
웹사이트
徳田秋声 (Tokuda Shūsei)
http://www.kinenote.[...]
2021-09-14
[3]
문서
ウィキペディア「[[明治4年]]」を参照。但し、一般的に秋声の生年月日は1871年12月23日に西暦換算されている。
[4]
문서
野口冨士男「德田秋聲の近親者」(『德田秋聲の文學』1979年、筑摩書房)によれば、4番目の妻。八木書店版全集別巻の年譜でも野口説を踏襲。
[5]
문서
榎本隆司「秋聲ノートII―西洋文学の受容―」(早稲田大学教育学部「学術研究」28号、1979年)。
[6]
문서
徳田秋声『光を追うて』二十一、1938年。
[7]
문서
徳田秋聲年譜(「徳田秋聲全集」別巻、2006年、八木書店)。
[8]
문서
東京都史跡、《徳田秋声旧宅》として現存する。
[9]
문서
易風社刊。収録作17篇のうち、『罪へ』([[マクシム・ゴーリキー|ゴーリキー]]原作)と『老音楽家』(原作:[[グリルパルツァー]]作『ウィーンの辻音楽師』)の2篇は翻案。
[10]
문서
左久良書房刊。収録作13篇のうち、『盲人』は[[ウラジミール・コロレンコ|コロレンコ]]作『盲音楽師』の翻案。
[11]
간행물
「足迹」の位置 : 秋声像の一側面
https://hdl.handle.n[...]
北海道大学教養部人文科学論集編集委員会
[12]
문서
「過去から現在にさかのぼつていく「倒叙」の手法は、ともすれば平板におちいりやすい日常の身辺的な素材を取扱つても不思議な立体感を構成している点において、独特の効果を発揮している」(野口冨士男『德田秋聲傳』1965年、筑摩書房)。
[13]
서적
徳田秋聲
笠間書院
[14]
문서
「かねてから『新世帯』を「アラ・ジョタイ」「シン・ジョタイ」と読む人があり、『足迹』も「ソクセキ」「アシアト」と両方に読まれているが、徳田一穂の『四篇の校閲』(雪華社版『秋聲全集』第四巻)によれば、生前の秋聲自身二様に読んでいたので、「読み方などには、余り拘らなくても、いいと思ふ」とのことである」(野口冨士男『德田秋聲傳』)。
[15]
문서
松本徹は、『足迹』が「時間の倒叙」を本格的に用いた最初の作品であり、「独特で大胆な、省略と要約、そしてそれらと捩りあはせた描写、また、時間の錯綜」によって「秋聲の文学が、紛れやうのない独自性を露はにしたのは、『足迹』においてであらう。(中略)際だつた独自性となると、やはりこの長編を第一に挙げなければならない」としている(松本徹『徳田秋聲』1988年、笠間書院)。
[16]
문서
野口冨士男『德田秋聲傳』。
[17]
문서
和田謹吾、前掲論文。
[18]
서적
自然主義の研究
東京堂
[19]
문서
生田長江「德田秋聲の小説」(「新潮」1911年11月)。
[20]
문서
野口冨士男は、「『爛』が一個の独立した中篇小説としてすぐれた技巧の冴えと高い完成度を示していることは否み得ない。円熟という意味では、むしろ『足迹』や『黴』よりも上位に置かれるべき名作」と評している(野口冨士男『德田秋聲傳』1965年、筑摩書房)。
[21]
문서
こうした評価の例としては、野口冨士男・和田芳恵「対談・秋聲を追って」(『德田秋聲ノート 現実密着の深度』中央大学出版部、1972年)。
[22]
문서
川端康成『日本の文学』9 「徳田秋声(一)」解説、1967年、中央公論社。
[23]
간행물
自然主義文学の方法 : 徳田秋声を中心に
https://hdl.handle.n[...]
弘前大学人文社会学会
[24]
문서
吉田精一『自然主義の研究』下。
[25]
문서
処女峰「四月文壇の作と評論」(『文章世界』1913年5月、博文館)。
[26]
문서
「時事新報」に1920年/大正9年10月から1921年/大正10年3月まで173回掲載。八木書店「徳田秋聲全集」第13巻解題によれば、「第一回掲載のときの表題のルビは『どこまで』。第二回以降はすべて『いづこまで』」とあり、「いづこまで」を正しい読みとしている。
[27]
문서
これらの通俗長編小説群は、大勢の家族(秋声は4男3女のほかに、妻の係累や親戚の書生など大所帯を抱えていた)を養い生活の糧を得るためのやむを得ぬ創作として、従来は論評の対象にすらされなかったが、そうした見方は近年訂正されつつある(「徳田秋聲全集座談会」(「徳田秋聲全集」別巻、月報43)、2006年、八木書店)。
[28]
문서
広津和郎「德田秋聲論」(「八雲」第3輯、1944年、小山書店)。
[29]
문서
『呪詛』(「新家庭」、大正10年1月~大正11年4月)、『萌出るもの』(「婦人之友」、大正10年6月~12月)、『前生涯』(「福岡日日新聞」、大正10年10月~大正11年5月)、『灰燼』(「中外商業新報」、大正10年11月~大正11年7月)の計4本。「婦人之友」の連載を終えると同時に『暁の明星』(「家庭界」、大正11年2月~4月)にとりかかる精力的な仕事ぶりであった(「徳田秋聲全集」別巻、徳田秋聲年譜)。
[30]
문서
通俗小説からの映画化作品は、日活映画『誘惑』(監督・小口忠、1917年6月10日封切)、松竹キネマ映画『断崖』(監督・牛原虚彦、1921年9月1日封切)、松竹キネマ映画『二つの道』(監督・池田義臣、1923年2月11日封切)。舞台化作品は、『誘惑』(1917年)、『路傍の花』(脚色・真山青果、1919年)、『断崖』(1921年)、『二つの道』(脚色・真山青果、1923年)、『蘇生』(1925年)など。秋声の通俗長編小説の映画化・舞台化についての論考は、紅野謙介「『大阪毎日新聞』と映画と徳田秋聲」(「徳田秋聲全集」第37巻、巻末解説、2004年、八木書店)が詳しい。
[31]
문서
前掲座談会(「徳田秋聲全集」別巻、月報43)。
[32]
문서
広津和郎、前掲論文。
[33]
문서
松本徹によれば、大正15年3月から昭和3年4月までの間に「順子もの」と呼ばれる短編を29編書いている(松本徹『徳田秋聲』、1988年、笠間書院)。
[34]
문서
榎本隆司「徳田秋声」(吉田精一編『近代作家の情炎史』、1971年、至文堂)。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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咽頭癌が再発して重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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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名作家の作品など大量に発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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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作家の臨終・墓碑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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徳田さんの印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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早稲田大学国文学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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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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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人の作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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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鉢は飛び越えられたのか
20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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泉鏡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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