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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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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락리 전투는 1950년 7월 7일, 대한민국 육군 제6사단 제7연대 제2대대가 북한군 제15사단을 기습하여 섬멸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국군 최초의 육상전 승리로 평가받으며, 김종수 소령의 지휘 하에 400명의 병력으로 2,000명 규모의 북한군을 격파했다. 전투 결과, 북한군 1,000여 명의 사상자와 132명의 포로를 생포했으며, 다수의 무기를 노획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7연대에 부대 표창과 전 장병 1계급 특진을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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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전투 이름동락리 전투
캠페인한국 전쟁
분쟁한국 전쟁
날짜1950년 7월 7일
장소대한민국 충청북도 음성군
결과대한민국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국제 연합군
*
지휘관
지휘관 1임부택 중령
김종수 소령
지휘관 2박성철 소장
김치구 중좌
병력 규모
병력 1약 400명
병력 2불명
사상자
추가 정보 (한국어 문서)
전투 기간1950년 7월 4일 ~ 7월 10일
전투 장소충주시 신니면 문락리 동락 일대
지휘관 (한국어 문서)
지휘관 1 (한국어 문서)김홍일 제1군단장 소장
김종오 제6사단장 대령
임부택 제7연대장 중령
김용배 제1대대장 소령
김종수 제2대대장 소령
이남호 제3대대장 소령
박철원 대전차포중대장 대위
이만호 제2포대장 대위
백선엽 제1사단장 대령
최경록 제11연대장 대령
장근술 제1대대장 대리 대위
정영홍 제2대대장 소령
김재명 제3대대장 소령
김점곤 제12연대장 중령
신현홍 제1대대장 소령
이무중 제2대대장 소령
최영대 제13연대장 대령
김진위 제1대대장 소령
안광영 제2대대장 소령
최병순 제3대대장 소령
함병선 제6사단 2연대장 대령
이준식 수도사단장 준장
김석원 수도사단장 준장
지휘관 2 (한국어 문서)김광협 제2군단장 소장
김무정 제2군단장 중장 (7월 10일부터)
박성철 제15사단장 소장
김치구 제48연대장 중좌
이을선 제50연대장 총좌
이연섭 포병연대장 대좌
병력 (한국어 문서)
병력 1 (한국어 문서)군사 1714명
대포 48문
사상자 (한국어 문서)불명
사상자 2 (한국어 문서)1000명 전사
포로 97명
대포 14문 손실
중 · 경기관총 41정 손실
권총, 소화기 등 2000정 손실
장갑차 10대 손실
차량 80대 손실

2. 배경

1950년 7월 초, 김종오 대령이 이끄는 제6사단은 원주-제천 방어선을 제8사단에게 넘겨주고 충주로 이동했다. 이천으로 이동했던 제19연대가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을 받고 진천으로 후퇴하면서, 제2연대와 40km의 간격이 벌어졌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충주 중학교에서 재편 중이던 제7연대가 장호원으로 급파되었다. 이는 육군본부의 작전명령과도 일치하는 결정이었다.[1]

제7연대가 장호원으로 이동하던 중, 이미 북한군이 장호원을 점령하고 음성-충주 방향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제7연대의 선두 부대인 제2대대가 음성 북쪽 동락리에서 북한군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 무렵, 수원에 있던 육군본부는 평택으로 이동했고, 수원 외곽의 국군 주력 부대도 남쪽으로 철수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스트레일리아기의 오폭까지 발생하여 국군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1]

한편, 미국 지상군 선발대가 오산 북쪽에 배치되었고, 제24사단 본대가 부산에 도착하여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육군본부는 7월 5일을 기점으로 부대를 재정비하고 전선을 조정하려 했으나, 북한군이 오산 전투에서 승리하고 안성-평택을 위협하면서 육군본부는 대전으로 이동해야 했다.[1]

2. 1. 국군의 재편과 지연전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제6사단은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7월 1일 ~ 7월 3일 사이에 원주-제천 저지선을 이정일 대령의 제8사단에 인계하고, 사령부를 충주로 이동한 후 예하 연대를 이천-충주 간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이천으로 전진한 민병권 중령의 제19연대가 춘천에서 우회한 것으로 보이는 이청송 소장의 북한군 제2사단을 지연시키며 진천 방면으로 철수하면서, 함병선 대령의 제2연대와 40km의 간격이 생겼다.

사단장은 충주 중학교에서 재편 중인 임부택 중령의 제7연대를 장호원으로 진출시켜 이 공간을 메우려 했다. 이는 육군본부의 계획과도 일치하여, 육군본부는 7월 5일 작전명령 제20호로 제6사단에 죽산-장호원 선 확보를 지시한다.

제7연대는 7월 2일 신림(원주 남쪽 8km)에서 제8사단에 진지를 인계하고 7월 4일 밤 충주로 이동하던 중 사단장 명령으로 장호원으로 출동했다. 그러나 북한군이 이미 장호원을 점령하고 음성-충주 방면으로 진출하고 있었기에, 연대 선두의 김종수 소령이 이끄는 제2대대가 음성 북쪽 동락리 부근에서 북한군과 교전하게 되었다.

제7연대가 중앙로 요충지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의 남하를 저지하는 동안, 수원의 육군본부는 평택으로 이동하고, 수원 외곽 국군 주력 부대도 남쪽으로 철수했다. 오스트레일리아기의 오폭은 이들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1]

한편, 미 지상군 선발대가 오산 북쪽에 전개하고, 제24사단 본대가 부산에 도착하여 북상하고 있었다.

육군본부는 7월 5일 0시를 기해 부대를 정비하고 전선을 조정하여 작전 전환을 시도했다. 육군본부 직할 전 부대에 대한 작전 지휘 일부를 신설 제1군단에 이양하고, 지휘 기능을 상실한 사단을 통합하여 지휘 체계를 확립했다. 경부국도에 집중된 부대에 작전 지역을 할당하여 종적 지연전 개념에서 횡적 개념으로 전환했다.

육군본부는 제8사단을 단양, 제6사단을 충주, 신설 제1군단 예하 이준식 준장의 수도사단, 백선엽 대령의 제1사단, 이한림 대령의 제2사단 등 3개 사단을 음성-진천에 전개시켜 평택-안성 전투를 전개한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 소장의 미 제24사단과 연계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미 지상군 선발대를 격파하고 7월 6일 안성-평택을 위협하여, 육군본부는 대전으로 이동하고 제1군단 및 예하 부대들도 급히 이동했다.

제1군단 우익으로 음성을 방어하게 된 제1사단도 재편성 없이 음성으로 이동했다.

2. 2. 미군의 참전과 초기 전투

7월 4일 밤, 김종오 대령이 이끄는 제6사단은 장호원으로 이동 중이던 제7연대에게 장호원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북한군이 이미 장호원을 점령하고 음성-충주 방면으로 진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7연대의 선두 부대인 김종수 소령이 이끄는 제2대대가 음성 북방 동락리 부근에서 북한군과 마주치게 되었다.[1]

이때 수원의 육군본부는 평택으로 이동하고, 수원 외곽에 배치된 국군 주력 부대는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피아를 식별하지 못한 오스트레일리아기의 오폭은 국군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1]

한편, 미국 지상군의 선발대가 오산 북쪽에 배치되었고, 제24사단의 본대가 부산에 도착하여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1]

육군본부는 7월 5일 0시를 기해 부대를 정비하고 전선을 조정하여 작전의 전환점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육군본부는 직접 지휘하던 모든 부대에 대한 작전 지휘권 일부를 신설된 제1군단에 넘기고, 지휘 기능을 상실한 사단을 통합하여 지휘 체계를 확립하였다. 또한, 경부국도에 집중된 각 부대에 작전 지역을 할당하여, 이전까지의 종적인 지연전 개념에서 횡적인 개념으로 전환하였다.[1]

이에 따라 전선은 횡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육군본부는 제8사단을 단양에, 제6사단을 충주에, 그리고 신설된 제1군단 사령부 예하의 수도사단, 제1사단, 제2사단을 음성-진천에 각각 배치하여 평택-안성 전투를 벌인 윌리엄 F. 딘 소장이 이끄는 미 제24사단과 연계하려 하였다.[1]

그러나 북한군은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미 지상군 선발대를 격파하고 7월 6일에는 안성-평택을 위협하였다. 이로 인해 육군본부는 부대를 수습하기도 전에 대전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제1군단 사령부 및 예하 부대들도 급히 열차, 차량, 도보로 각자의 목표 지역으로 이동하였다.[1]

2. 3. 작전 계획

김종오 대령이 이끄는 제6사단은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7월 1일~7월 3일 사이에 원주-제천 간 저지선을 제8사단에 인계하고 충주로 이동했다. 예하 연대를 이천-충주 간에 전개하려 했으나, 춘천에서 우회한 북한군 제2사단을 지연시키며 진천 방면으로 철수한 제19연대 때문에 제2연대와 40km의 간격이 생겼다.

사단장은 충주 중학교에서 재편성 중인 제7연대를 장호원 방면으로 진출시켜 이 공간을 메우고자 했다. 이는 육군본부의 계획과도 일치하여, 육군본부는 7월 5일 작전명령 제20호로 제6사단에 죽산-장호원 선을 확보하게 했다.

제7연대는 7월 2일 신림(원주 남쪽 8km)에서 제8사단에 진지를 인계하고 7월 4일 밤 사단장 명령을 받고 장호원으로 출동했다. 그러나 북한군이 이미 장호원을 점령하고 음성-충주 방면으로 진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대 전위인 제2대대가 음성 북방 동락리 부근에서 적과 조우하게 되었다.

7월 4일 20:00, 김종오 제6사단장은 장호원을 거쳐 충주로 철수한 헌병대 및 강원도 전투 경찰대로부터 "북한군 제15사단이 3일 장호원을 침습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당시 제2연대는 충주 북쪽 남한강변, 제19연대는 이천, 제7연대는 충주 중학교에 집결하고 있었다.

사단장은 북한군이 남진할 경우 서부전선이 위급해질 것을 직감하고,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에게 장호원을 즉각 탈취하라고 명령했다. 연대장은 야간 이동이 무모하다고 판단하여 1개 대대로 적정을 확인한 후 대응책을 강구하겠다고 건의하여 사단장의 승인을 받았다.[1]

3. 전투 과정

제7연대는 춘천 및 홍천 전투와 신림 지역 전투에서 질서 있는 지연전을 수행했지만,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충주에 도착해서야 병력을 점검하고 부대를 정비할 수 있었다. 출동 전 확인된 병력은 장교 88명, 부사관과 병 1,626명이었고, 장비는 205mm(M-3) 6문, 57mm 대전차포 4문, 81mm 박격포 10문, 60mm 박격포 18문을 보유하고 있었다.[7] 이는 개전 초에 비해 장교 31명, 부사관과 병 784명, 도합 815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수치였다.

3. 1. [[7월 4일]]: 장호원 탈환 시도와 초기 교전

7월 4일 20:00 장호원을 거쳐 충주로 철수한 사단 헌병대 및 강원도 전투 경찰대로부터 '북괴 제15사단이 3일 장호원을 침습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북한군이 그대로 남진할 경우 서부전선이 위급하게 될 것임을 직감하고,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에게 '장호원을 즉각 탈취하라.'고 명령하였다.[7]

그러나 연대장은 야간에 북한군의 상황도 모르고 이동하는 것이 무모하다고 보고, 우선 1개 대대로 적정을 확인한 다음 대응책을 강구하겠다는 건의를 사단장에게 하여 승인받았다.

제7연대는 춘천 및 홍천 전투를 비롯하여 신림(원주 남쪽 8km) 지역 전투에 이르기까지 질서 있는 지연전을 펼쳤으나,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충주에 이르러서야 병력을 점검하고 부대를 정비할 수 있었다.

출동에 앞서 확인된 병력은 장교 88명, 부사관과 병 1,626명이었다. 개전 초와 비교하면 장교 31명, 부사관과 병 784명, 도합 81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장비는 205mm(M-3) 6문, 57mm 대전차포 4문, 81mm 박격포 10문, 60mm 박격포 18문을 보유하고 있었다.[7]

같은 날, 수원 함락이 임박했을 무렵, 인민군 대규모 종대가 수원에서 동쪽으로 37km 떨어진 장호원리에 침입했으며, 또 다른 종대가 수원에서 동쪽으로 37km 떨어진 이천으로 남하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2] 당시 수원과 충주 사이에는 90km의 간극이 발생했다.[2]

이에 정일권 참모총장은 제6사단과 제8사단에게 평택음성 – 충주 – 제천 선을 방어하도록 명령했다.[3]

7월 4일,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충주에서 정비 중이던 제7연대를 음성으로 파견했다.[3]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제2대대(대대장: 김종수 소령)를 동락리로 먼저 보내고, 연대 주력은 음성으로 진출시켰다.

이때, 음성 북방에 전개하고 있던 인민군은 제15사단(사단장: 박성철 소장)이었다.[4] 제15사단은 제50연대를 예비로 두고, 제49연대를 무극리에, 제48연대를 동락리에 전개했다.[4]

같은 날 밤, 임부택 중령은 인민군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제2대대를 장호원리를 향해 북상시켰다.[3] 제2대대는 동락리 서쪽 2km 지점의 모토원 부근에서 제48연대를 발견하고 매복 공격으로 격퇴했다.[3] 전장에는 장갑차 1대와 트럭 5대 등이 버려져 있었다.[3]

3. 2. [[7월 5일]]: 음성-무극리 전투

제7연대는 제1대대와 병행하여 무극리를 공격, 13:00에 무극리 동북쪽의 무명고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제1대대가 장갑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역습을 받자 백야리로 철수하였고, 이에 제2대대도 연대 명령에 따라 644고지(부용산, 가엽산 서쪽 5km)로 철수하였다. 제2대대는 북한군의 침공이 예상되는 산간로를 방어하고, 병암리-대소원 및 무극리-음성 간 북한군 상황을 보고하는 임무를 추가로 수행하게 되었다.[4]

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부대를 644고지로 이동시켜 사주방어와 경계를 강화했다. 김 소령은 쌍안경으로 병암리와 무극리, 그리고 충주와 음성으로 이어지는 두 갈래 길을 번갈아 살피다가 동락리에 시선을 집중했다. 동락리는 지난 밤 북한군과 처음 마주쳤던 곳이자 제3대대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었다.

제6중대의 윤수용 소위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대대장이 가리키는 곳은 어제 밤 적과 조우했던 마을이었다. 군인들이 바글거렸고, 학교 교정에는 10여 문의 야포가 포구를 충주로 향해 있었으며, 보병부대의 차총선이 질서정연하게 운동장을 채웠고, 노상에는 장갑차를 포함한 각종 차량 수십 대가 세워져 있었다."[5]

각 중대장은 북한군이 무방비 상태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대대장에게 즉시 공격할 것을 건의했다. 김종수 소령은 병력과 장비 열세에도 불구하고, 피난민들의 호소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선 행동 후 보고를 결심하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했다.[5]

명령



15:00, 명령 하달과 함께 각 중대는 3개 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부대장 허용우 대위는 잔류대장으로서 제5중대 1개 소대를 지휘하여 644고지를 방어했다.

17:00, 가장 먼 거리의 제6중대에서 총성이 울리자, 제5, 8중대가 동락 부락을 향해 소총 사격을 집중했다. 북한군은 경계병 없이 휴식을 취하거나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중 기습을 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북한군 포병이 제8중대 방향으로 포격을 가했지만, 아군과의 거리가 가까워 포탄은 멀리 떨어졌다.[5]

대대의 박격포 반장 신용관 중위는 포판 없이 포신을 고정하고 팔로 조준하여 3발을 발사했다. 이 포탄들이 북한군 포진지와 탄약 더미에 명중하여 연쇄 폭발을 일으켰고, 북한군의 병력과 탄약은 큰 피해를 입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북한군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대장은 국군 간 충돌을 우려하여 현 위치를 고수하고 경계를 강화하도록 명령했다.

3. 3. [[7월 6일]]: 국군의 후퇴와 방어선 재편

7월 6일, 제1대대는 무극리를 점령했지만, 인민군의 반격을 받아 무극리 남동쪽 백야리로 후퇴했다. 제2대대 또한 연대 명령에 따라 644고지(부용산, 가엽산 서쪽 5km)로 철수하여 산간로 방어와 함께 병암리-대소원, 무극리-음성 간 인민군 상황 보고 임무를 수행했다.[4] 임부택 중령은 제2대대를 동락리 남쪽 644고지에 배치하여 중간 지역의 방어를 강화했다.[4]

제2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644고지에 도착하기 전, 피난민들이 모여 있던 암자 앞에서 한 여인이 "국군이 적을 보고도 싸우지 않고 도망친다"며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마음 아파했다. 김 소령은 쌍안경으로 동락리를 살피며 지난 밤 적과 최초로 마주쳤던 곳이자 제3대대가 있을지도 모르는 그곳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당시 제6중대의 윤수용 소위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대대장이 가리키는 곳은 어제 밤 적과 조우했던 마을인데, 군인들이 바글거리고 있었으며 학교 교정에는 10여 문의 야포가 포구를 충주로 향하여 방열되어 있었고, 보병부대의 차총선이 질서정연하게 열을 지어 운동장을 꽉 메웠고 노상에는 장갑차를 포함한 각종 차량 수십 대가 세워져 있었다."

각 중대장은 인민군이 무방비 상태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대대장에게 어두워지기 전에 공격할 것을 건의했다. 김종수 소령은 병력과 장비 열세에도 불구하고, 피난민들의 절규와 각 중대장의 건의에 공격을 결심하고 선 행동 후 보고를 결의,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했다.

명령



15시, 명령 하달과 함께 각 중대는 3개 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했고, 부대장 허용우 대위는 잔류대장으로서 제5중대 1개 소대를 지휘하여 644고지를 방어했다.

대대장 김종수 소령과 81mm 박격포 반장 신용관 중위는 각기 포탄 2발씩을 메고 220고지로 이동했다. 제6, 7중대는 논과 밭, 3번 도로를 횡단해야 했기에 전진 속도가 느렸다.

17시 정각, 가장 먼 거리의 제6중대로부터 총성이 울렸고, 제5, 8중대는 동락리를 향해 소총 사격을 집중했다. 인민군은 경계병 없이 옷을 벗은 채 나무 그늘 밑에서 잠들어 있었고, 일부만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민가를 드나들고 있었다. 기습 사격을 받은 인민군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거나 도망쳤지만, 인민군 포병은 제8중대 쪽으로 포구를 돌려 사격했다.

각 중대가 인민군에게 가까이 접근해 있었기에 인민군 포탄은 멀리 떨어졌고, 포수들은 사거리 조정을 위해 포신을 높이 올렸다. 대대는 포판 미착으로 포탄을 쏘지 못하고 초조하게 지켜봐야 했다. 그때 피투성이가 된 부사수가 포판을 메고 뛰어왔다.

대대장은 신용관 중위에게 "적탄이 날아오기 전에 단 한 발로 포진을 괴멸시키지 않으면 우리가 전멸한다"며 사거리 300m 사격을 명령했다. 신용관 중위는 포각, 조준경 설치 없이 포신을 포판 위에 놓고 팔로 고저를 조정하며 1발을 날렸다.

마침 인민군도 거리 조정이 끝나 포탄을 장전하려는 순간, 신용관 중위가 발사한 제1탄이 포진 한가운데 떨어졌고, 제2탄, 제3탄이 야적 포탄에 명중해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병원, 탄약 상자는 풍진처럼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다.

어둠이 깔리면서 인민군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는 여전했다. 각 중대장은 소탕전을 건의했지만, 대대장은 아군 간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현 위치 고수 및 경계 강화를 명령했다. 한편, 동락리에 들어선 인민군 제48연대는 주민들로부터 한국군이 철수했다는 정보를 얻었으므로 이동 진형도 갖추지 않고 경계도 전혀 하지 않았다.[5]

3. 4. [[7월 7일]]: 동락리 전투 (음성 전투의 핵심)

김종수한국어 소령이 이끄는 제2대대는 7월 7일 13시경 무극리 동북쪽의 무명고지를 점령했으나, 백야리로 철수했던 제1대대가 북한군의 역습을 받자 연대 명령에 따라 644고지(부용산, 가엽산 서쪽 5km)로 철수했다.[1] 제2대대는 산간로 방어와 함께 병암리-대소원, 무극리-음성 간 북한군 상황 보고 임무를 수행했다.

김종수 소령은 동락리에서 북한군이 무방비 상태로 휴식 중임을 확인하고 공격을 결심했다.[1] 당시 제2대대는 300여 명의 소총병이었지만, 북한군은 5~6배 많은 병력에 중장비를 갖추고 있었다.[1] 김 소령은 신중을 기했으나, 중대장들의 건의와 피난민들의 호소를 떠올리며 공격을 결심, 선 행동 후 보고를 결정했다.

15시, 제2대대는 다음 명령을 하달받고 3개 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했다.[1]

명령



부대장 허용우 대위는 잔류대를 지휘하여 644고지를 방어했다. 제6, 7중대는 논과 밭, 3번 도로를 횡단해야 했기에 전진 속도가 느렸다.

17시, 제6중대의 총성을 시작으로 전투가 개시되었다. 제5, 8중대는 동락 부락을 향해 소총 사격을 집중했다. 북한군은 경계병 없이 옷을 벗고 잠을 자거나 저녁 식사 준비 중이었다.[1] 기습 사격에 북한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거나 도주 중 사살되었다. 북한군 포병은 제8중대 방향으로 포격을 가했으나, 제2대대의 박격포 공격으로 포진이 파괴되었다.

신용관 중위는 포판 없이 포신을 올려놓고 팔로 고저를 조정하며 1발을 발사, 북한군 포진 한가운데 명중시켰다. 이어진 2, 3탄은 야적된 포탄에 명중,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1]

어둠이 깔리면서 북한군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으나, 대대장은 국군 간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현 위치 고수 및 경계 강화를 명령했다.[1]

이때, 김재옥 동락초등학교 교사가 부용산으로 달려와 김종수 소령에게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였다.[1] 정보를 입수한 김종수 소령은 새벽에 기습공격을 감행, 북한군 1개 연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7월 8일 05시, 연대장은 제2대대로부터 "동락리에서 적 1개 연대 전멸"이라는 승전 보고를 받았다.[1]

3. 5. [[7월 8일]]: 전과 확인 및 전장 정리

7월 8일, 얕은 안개가 낀 동락리 일대는 폐허처럼 조용했다. 전날 격전으로 북한군 1개 연대가 전멸했고, 그들의 시체와 장비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1]

김종수 소령은 새벽 5시에 대대 작전장교 이우식 중위에게 연대에 전과를 보고하고 군수 지원을 요청하도록 했다. 제7중대는 계속 도로를 차단하고, 다른 3개 중대는 마을을 수색하며 숨어있는 북한군을 찾아냈다. 민가, 헛간, 밭고랑 등에 숨어있던 북한군 포로 97명을 생포했는데, 이들 중에는 북한군 제48연대 군수참모(소좌) 등 간부급 장교 5~6명도 포함되어 있었다.[1]

포로들의 진술에 따르면, 북한군 제15사단은 48연대(연대장 김치구), 49연대, 50연대(연대장 이을선), 포병연대(연대장 이연섭)로 구성되어 있었다. 7월 4일, 48연대는 병암리에서 충주 방면으로, 49연대는 무극리에서 음성 방면으로 진출할 계획이었으나, 국군과 충돌 후 후퇴했다가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동락리 주민들이 "국군이 차를 타고 도망쳤다"는 말에 속아 동락리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기습을 당한 것이었다. 투입 병력은 장갑차와 포병 지원 부대를 포함하여 2,000명이었는데, 이 중 1개 대대 규모 병력이 충주 방향으로 도주하다가 복병에 기습당해 1/3 병력을 잃고 679고지(수레의산) 방향으로 도주했다고 한다.[1]

김종수 소령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 시체 1,000여 구를 확인했고, 다수의 장비를 노획했다고 증언했다. 주요 노획 장비는 다음과 같다.[1]

장비 종류수량
122mm 곡사포6문
76mm 곡사포8문
중·경기관총41정
권총과 소화기2,000여 정
장갑차10대
사이드카20대
지프차20대
2 1/2톤 차40대
통신장비다수



포로와 노획 장비 후송을 위해 연대에서 차량 20여 대를 추가 동원했지만, 탄약과 보급품, 소화기 일부는 다 옮기지 못하고 현지에서 소각했다. 운전병이 부족하여 운전 경험이 있는 일반 장병까지 동원되었다. 이 전투에서 국군 측 피해는 박격포 부사수 부상 외에는 전무했으며, 노획한 북한군 장비가 모두 소련제임을 확인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당시 소련은 북한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한국전쟁을 일으켰으면서도 자신들과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허위 선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획품은 소련의 개입을 보여주는 중요한 물적 증거가 되었다.[1]

한편, 제3대대는 동락리에서 북한군 유기 시체 100여 구를 발견했고, 도주하는 북한군 30여 명을 추격하여 5명을 사로잡고 나머지를 사살했다. 제1대대는 북한군 소대 규모 병력의 정찰 활동을 감지했으나, 이들은 국군과 충돌하자 전투를 회피하고 숲속으로 사라졌다.[1]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오전 7시에 현장을 확인하고, 제3대대를 모도원 방면으로 진출시켜 북한군의 역습에 대비했다. 정보주임 김동명 대위에게는 포로와 노획 문서를, 군수주임 조한섭 대위에게는 노획 차량과 병력 수송 차량을 동원하여 장비 후송을 지시했다. 노획 장비 일부는 UN 총회로 보내지고 나머지는 대전에서 국민 앞에 전시되었다. 연대는 이 전투로 1계급 특진의 영광을 안았으며, 총참모장이 현장을 방문하여 특진 계급장을 달아주기도 했다.[1]

이날은 장비 후송과 전장 정리에 하루를 보냈다. 저녁 무렵, 제2대대를 644고지로, 제3대대를 가엽산 북쪽으로 철수시켜 배치를 조정하던 중, 사단장으로부터 제1사단이 음성지구를 방어하기 위해 증평에 도착했다는 소식과 함께 제1사단의 작전통제를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1]

4. 결과 및 영향

동락리 전투는 개전 이래 국군 최초의 육상전 승리였으나, 제1군단김홍일 소장의 명령에 따라 음성에서 철수하게 된 제1사단은 7월 13일부터 광원에 새로운 저지선을 형성하고 꼬리를 물고 뒤따른 북한군 제15사단과 대전하게 되었다. 북한군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여교사였던 동락초등학교의 교사 김재옥이었다.[1]

당초 북한군은 아군의 퇴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후방지역에 대한 침투를 기도하였던 것이지만 7월 4일 제7연대에 의하여 음성에서 저지된 이래 7월 8일에는 제1사단이 이어져 동지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북한군 최고 사령부는 제2군단 예하의 각 사단의 진출이 늦다는 이유로 7월 10일부로 군단장 김광협 소장을 파직시키고 군단참모장으로 좌천시켰으며, 전 중공군 포병 사령관을 지낸 바 있는 김무정 중장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여 채찍을 가하게 하였다.[1]

북한군 제15사단은 한때 광원 부근까지 육박하였으나, 제1사단의 완강한 저항과 미공군의 공중공격에 부딪혀 더 진격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7월 15일부터 사단과의 접촉을 끊고 동측방의 산간로를 따라 진로를 개척하려는 것으로 보였다.[1]

한편, 육군본부는 서부지역으로 집중되었던 북한군이 점차 중부-동부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7월 12일부로 김백일 대령이 이끄는 2군단 사령부를 함창에서 창설하여 지역 내의 제6, 8사단을 작전 통제케 하였다. 또한 육군본부 직할인 제17연대를 7월 17일부로, 제1군단 사령부 배속 하의 제1사단을 7월 22일부로 각각 2군단 지휘 하로 배속 전환케 하였다.[1]

따라서 제17연대와 제1사단은 함창으로 각각 하명된 일자에 이동하였는데, 화영장(보은 동쪽 23km)에서 북한군 제15사단과 조우하고 또 한 차례 격돌케 되었다.[1]

5. 평가

제6보병사단 7연대는 건군 이래 국군 최초로 부대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된 기록을 세웠다.[8]

6. 관련 인물

소속직책이름
제6사단사단장김종오 대령
제6사단 제7연대연대장임부택 중령
제6사단 제7연대 제2대대대대장김종수 소령
제2군단군단장김광협 중장
제2군단 제15사단사단장박성철 소장
제2군단 제15사단 제48연대연대장김치구 중좌


참조

[1] 서적 朝鮮戦争/韓国篇下巻
[2] 서적 朝鮮戦争/韓国篇下巻
[3] 서적 朝鮮戦争/韓国篇下巻
[4] 서적 韓国戦争第1巻
[5] 서적 韓国戦争第1巻
[6] 서적 朝鮮戦争/韓国篇下巻
[7] 문서 대한민국 국군
[8] 뉴스 전대원 일계급 특진 이뤄…귀신 잡는 해병 태어나다 https://www.nara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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