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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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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경은 촉한의 인물로, 젊은 시절 임안에게 학문을 배우고 하종과 함께 주역을 공부했다. 유비가 익주를 장악한 후 의조종사로 임명되었으며, 유비 사후 유선 아래에서 간의대부, 좌중랑장, 대홍려, 태상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그는 과묵하고 낮은 자세를 유지했으며, 천문학에 정통했으나 교주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지식을 드러내지 않았다. 80세에 사망했으며, 한영의 시경에 대한 주석인 한시장구를 저술했으나 후계자는 없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을 보좌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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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경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두경
로마자 표기Du Qiong
Boyu (伯瑜)
출생160년대 (추정)
출생지익주촉군 성도현
사망250년 (80대)
사망지알 수 없음
자녀두진
직업관리, 천문학자, 점술가
관직
주군유장 → 유비 → 유선
태상알 수 없음
대홍려알 수 없음
좌중랑장알 수 없음
간의대부알 수 없음

2. 생애

두경(杜瓊)은 촉군 성도(현재 쓰촨성 청두) 출신으로, 젊은 시절 임안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천문학과 점술에 능통했다.[1] 그는 유장과 유비를 차례로 섬겼으며, 유비가 촉한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3][16] 유선의 치세 동안에는 간의대부, 대홍려, 태상 등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며[5][15] 제갈량 사후에는 황제의 명을 받들기도 했다. 그는 과묵하고 신중한 성품으로 강완, 비의 등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6][15] 천문 지식을 바탕으로 조위의 흥기를 예견하기도 했다.[9][15] 말년에는 『시경』 주석서인 『한시장구』(韓詩章句) 저술에 힘썼으며,[11] 연희 13년(서기 250년) 80여 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0][15]

2. 1. 초기 생애와 학문

두경(杜瓊)은 촉군(蜀郡) 성도(成都) 출신으로, 현재의 쓰촨성 청두이다. 그는 젊은 시절 임안에게 가르침을 받아 하종과 함께 ''주역''을 공부했으며, 도참과 같은 술법에도 능통했다. 또한 천문학과 점술에 정통했다.

194년에서 214년 사이, 익주 (현재의 쓰촨성과 충칭 지역)의 태수였던 유장은 두경을 조서(從事)로 등용했다.[1]

214년,[2] 군벌 유비가 유장으로부터 익주를 점령한 후, 그는 두경을 행정부의 의조종사(議曹從事)로 임명했다.[3]

2. 2. 유비와 유선을 섬기다

유비익주를 평정한 후 을 겸임하자, 두경을 의조종사(議曹從事)로 삼았다.[15][3] 이는 214년 유비가 유장으로부터 익주를 장악한 후의 일이다.[2][3]

건안 25년(220년), 조비후한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자, 두경은 양천후 유표(劉豹), 청의후 상거(向擧), 편장군 장예·황권, 대사마속 은순(殷純), 익주 별가종사 조작(趙莋), 치종종사 양홍, 종사좨주 하종, 권학종사 장상(張爽)·윤묵·초주 등 여러 신하들과 함께 유비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하는 상소를 올렸다.[16] 그는 점술서를 인용하며 유비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유비는 이를 받아들여 221년 촉한을 건국했다.

유비가 223년에 사망한 후,[4] 그의 아들 유선이 황위를 계승하자 두경은 계속해서 촉한에 봉사했다. 유선의 치세(223년 ~ 263년) 동안 두경은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되었고, 이후 좌중랑장(左中郎將), 대홍려(大鴻臚), 태상(太常) 등의 직책을 차례로 역임했다.[15][5] 촉한승상이었던 제갈량이 234년에 사망했을 때, 유선은 두경에게 조서를 가지고 가서 제갈량의 무덤 앞에서 낭독하도록 명했다.

두경은 과묵하고 신중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공적인 업무 외에는 동료들과 거의 교류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6] 당시 촉한의 중신이었던 강완과 비의는 모두 두경을 존경하고 높이 평가했다.[6]

2. 3. 예언과 죽음

두경은 천문학에 정통했지만, 처음에는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지 않았다.[7] 그는 성품이 조용하고 과묵하여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15] 장완비의 등 동료들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15][6]

후배 학자인 초주가 두경에게 천문학에 대해 자주 물었으나, 두경은 천문학을 깊이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과 알게 된 후 비밀을 누설하게 될까 걱정되어 하늘을 관찰하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답했다.[15][8]

어느 날 초주가 주군이 말한 '도고(塗高)'가 조위를 의미한다는 예언에 대해 묻자, 두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위(魏)'는 궁궐 문 양쪽의 높은 망루를 뜻하기도 하는데, 이는 길가에 높이 솟아 있다. 현인들이 이를 중의법으로 사용한 것이다."[15][9] 또한 두경은 "옛날에는 관직명에 '조(曹)' 자를 쓰지 않았는데, 한나라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서기관을 '속조(屬曹)', 경비병을 '시조(侍曹)'라 부르게 되었다. 이것이 아마 하늘의 뜻일 것이다"라고 덧붙이며, 조씨(曹氏)가 다스리는 위나라가 한나라를 대체할 것임을 암시했다.[15][9]

훗날 초주는 두경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촉한이 위나라에 항복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내놓았다.[15] 촉한이 멸망한 후 사람들이 초주의 예언 능력에 감탄하자, 초주는 "스스로 추론한 것이지만 그 근원은 두경 선생의 말에 있으며, 내가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15][13]

두경은 연희 13년(서기 250년)에 80여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5][10] 그는 평생에 걸쳐 한영의 『시경』에 대한 주석서인 『한시장구』(韓詩章句)를 10만 자 이상 저술했으나,[11] 제자를 두지 않아 그의 학문, 특히 도참과 같은 술법은 후대에 전수되지 못했다.[11]

3. 저술

《한시장구》韓詩章句|한시장구중국어 10여만 글자를 저술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전수하지 않아 그의 학술을 이어받은 사람은 없었다.

4. 평가

두경은 겸손한 성격으로 말을 아꼈으며, 문을 닫고 세속과 관계하려 하지 않았다. 장완비의는 모두 두경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5. 삼국지연의에서의 두경

삼국지연의》에서는 제80회, 제85회, 제100회에 걸쳐 등장한다. 정사 기록에서 보이는 예언가로서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제80회에서는 제갈량유비를 황제 자리에 오르게 하려고 일부러 병을 핑계로 유비를 자신의 집으로 불렀을 때, 병풍 뒤에 숨어 있던 여러 문무 관료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제85회에서는 위나라조비사마의맹달, 맹획, 손권, 가비능 등을 포섭하고 조진에게 명하여 다섯 방면으로 각각 10만 군사를 이끌고 촉한을 침공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에 후주 유선이 크게 놀라 황문시랑 동윤과 간의대부 두경에게 승상 제갈량이 조회에 나오지 않는 이유를 알아보도록 명했다. 두경은 동윤과 함께 승상부를 찾아갔으나, 제갈량은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두경은 유선에게 돌아가 직접 승상부를 방문할 것을 건의했고, 유선은 제갈량을 찾아가 위나라의 침공에 대한 대책을 듣게 된다. (이때 제갈량은 조운, 마초, 위연, 이엄을 보내 조진, 가비능, 맹획, 맹달을 각각 막도록 하고, 등지손권에게 보내 동맹을 다시 강화하는 계책을 세웠다.)

제100회에서는 장수로 등장하여, 제갈량의 명령에 따라 위연, 장억, 진식과 함께 기곡으로 출진했다. 제갈량은 등지를 보내 위나라 군대의 매복을 조심하라고 당부했지만, 위연과 진식은 이를 비웃고 대비 없이 진군하다가 사마의가 설치한 복병에 걸려 크게 패배했다. 두경은 장억과 함께 겨우 포위망을 뚫고 나온 위연과 진식을 구출하고 추격해 오는 위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이후 기산으로 돌아와 위연, 장억, 진식과 함께 제갈량에게 죄를 청했다. 제갈량은 패배의 책임을 물어 진식을 처형하고 위연은 후방으로 보냈다.[17]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2
[2] 서적 Zizhi Tongjian vol. 67
[3] 서적 Sanguozhi vol. 42
[4] 서적 Zizhi Tongjian vols. 69–70
[5] 서적 Sanguozhi vol. 42
[6] 서적 Sanguozhi vol. 42
[7] 서적 Sanguozhi vol. 42
[8] 서적 Sanguozhi vol. 42
[9] 서적 Sanguozhi vol. 42
[10] 서적 Sanguozhi vol. 42
[11] 서적 Sanguozhi vol. 42
[12] 서적 Sanguozhi vol. 42
[13] 서적 Sanguozhi vol. 42
[14] 문서 160년대
[15] 서적 삼국지》촉서 권42 두주두허맹래윤리초극전
[16] 서적 삼국지》권32 촉서 선주전
[17] 서적 삼국지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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