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예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text
조예는 조위의 제2대 황제이다. 조조의 손자이자 조비의 아들로, 226년에 즉위하여 239년까지 재위했다. 총명하고 결단력 있는 면모를 보였지만, 사치스러운 궁궐 건축과 대규모 토목 공사, 과도한 병력 충원 등으로 국고를 낭비하고 민생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군사적으로는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내는 등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지만, 말년에는 사마씨 세력의 발호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 3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아들이 어려 조방이 뒤를 이었다.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비의 황자 - 조림 (동해정왕)
조림은 위나라의 황족으로, 조비의 아들이자 동해정왕이며, 가정 폭력으로 악명이 높았고, 조예의 총애를 받았으며, 아들 조모는 황제가 되었다. - 205년 출생 - 플로티노스
플로티노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계승하여 일자로부터 세계가 유출된다는 일원론적 사상을 주장했으며, 그의 사상은 후대 철학과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 205년 출생 - 사마망
사마망은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촉한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서진 건국 후 요직을 역임하며 서진 발전에 기여했고 사후 의양성왕으로 불렸다. - 239년 사망 - 반준
반준은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 오나라의 관료로 유표와 유비를 거쳐 손권에게 귀순하여 뛰어난 통찰력과 강직한 성품으로 손권의 신임을 받았으며, 오나라의 안정에 기여하고 소부, 태상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 239년 사망 - 채염
후한 말 채옹의 딸인 채염(채문희)은 흉노에 납치되었다가 조조에 의해 귀환 후 재혼하였으며, 아버지의 저서 복원과 〈호가십팔박〉, 〈비분시〉 등의 작품을 통해 예술적 업적을 남겨 후대에 영감을 주고 수성과 금성의 크레이터 이름으로도 명명되었다.
조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황제 |
휘 | 조예 |
자 | 원중 |
시호 | 명황제 |
묘호 | 열조 |
출생 | 204년 또는 205년 |
사망 | 239년 1월 22일 (34세 또는 35세) |
매장지 | 고평릉, 낙양, 허난 성 |
통치 | |
왕조 | 조위 |
재위 기간 | 226년 6월 29일 – 239년 1월 22일 |
연호 | 태화 (太和): 227–233 청룡 (青龍): 233–237 경초 (景初): 237–239 |
왕위 계승 | |
전임자 | 조비 |
후임자 | 조방 |
왕세자 책봉 | 226년 6월 28일 |
평원왕 | 222년 3월 30일 – 226년 6월 28일 |
기공 | 221 – 222년 3월 30일 |
가문 | |
가문 | 조위 조씨 |
아버지 | 조비 |
어머니 | 문소황후 |
배우자 | |
배우자 | 우씨 명도황후 명원황후 |
자녀 | |
자녀 | 조음, 안평애왕 조경, 청하왕 조모, 번양왕 평원 이공주 기공주 |
이름 | |
성 | 조 (曹) |
이름 | 예 (叡) |
자 | 원중 (元仲) |
로마자 표기 | Cao Rui |
2. 생애
조위의 2대 황제인 조예는 205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할아버지 조조는 한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아버지 조비는 조조의 후계자였다. 어머니 견씨는 본래 원소의 아들 원희의 아내였으나 조조군에 사로잡힌 후 조비와 결혼했다.[3] 조예는 결혼 8개월 만에 태어나 출생에 대한 의혹이 있었으나, 조조는 이 손자를 매우 아껴 "너 때문에 내 업적이 삼대에 걸쳐 지속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보였다.[4] 위서(魏書)와 손성의 기록에 따르면 조예는 용모가 뛰어나고 위엄이 있었으며 머리카락이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고 한다.
220년 무덕후(武德侯)에 봉해졌고, 222년에는 평원왕(平原王)이 되었다. 그러나 221년 어머니 견씨가 아버지 조비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5] 조비와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한동안 황태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사냥터에서의 일화 등을 계기로 조비의 마음을 얻어[41] 226년 6월, 조비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곧이어 21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즉위 시 조진, 조휴, 사마의, 진군, 배잠 등의 보좌를 받았다.[41]
조예의 치세는 총명함과 잔혹함이 공존하는 등 여러 면에서 모순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는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지방의 책임자로 임명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하면서도 그들의 능력을 활용했다. 중요한 결정에서는 여러 관료의 의견을 구하는 신중함을 보였으나, 아버지 조비가 시행했던 황족 제후들의 권력 제한 조치를 조식 등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유지했는데[6], 이는 훗날 사마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사생활에서는 후궁 모씨를 황후로 책봉했으나 이후 총애가 곽씨에게 옮겨가면서 갈등 끝에 모황후에게 죽음을 내렸다.[9] 아들이 없어 조방과 조순을 양자로 삼았으며[10], 237년에는 자신의 묘호를 열조(烈祖)로 정하고 조부 조조와 부친 조비의 묘호까지 정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11] 이는 후사가 없는 자신의 사후 위상이 불안정해질 것을 염려한 행동으로 해석된다.
238년 말 병세가 위독해지자[12] 처음에는 숙부 조우 등에게 후사를 맡기려 했으나, 측근 유방과 손자의 개입으로 조상과 사마의를 후견인으로 정하는 혼란을 겪었다.[32] 239년 1월, 양자 조방을 황태자로 책봉한 당일 35세(혹은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13][14], 고평릉(高平陵)에 묻혔다.
2. 1. 어린 시절과 즉위
조예(曹叡)는 205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 조조는 한나라의 최고 권력자로서 헌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었고, 아버지 조비는 조조의 생존한 장남이자 후계자였다. 어머니 견씨는 본래 원소의 아들 원희의 아내였으나, 204년 9월 또는 10월에 조조의 군대에 의해 사로잡힌 후[3] 조비와 강제로 결혼하게 되었다. 견씨는 조비와 결혼한 지 8개월 만에 조예를 낳았는데, 이 때문에 조예가 실제로는 원희의 아들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조조는 손자 조예를 매우 아껴 항상 곁에 두도록 했으며, "너(조예) 때문에 내 업적이 삼대에 걸쳐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4] 위서(魏書)에 따르면 조예는 용모가 뛰어나고 위엄이 있었으며, 동진의 역사가 손성은 조예의 머리카락이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고 기록했다.조예는 220년, 15세의 나이로 무덕후에 봉해졌고, 이듬해에는 제공(齊公), 황초 3년(222년)에는 평원왕(平原王)이 되었다. 평원왕 시절, 그는 귀족의 딸인 모씨(毛氏, 모황후)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러나 221년 8월, 아버지 조비는 어머니 견씨에게 자결을 강요하여 죽음으로 내몰았다.[5]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과 불확실한 출생 배경 때문에, 조비는 조예를 탐탁지 않게 여겨 다른 부인 서희(徐姬)의 아이인 경조왕 조례(曹礼)를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다. 이로 인해 조예는 조비의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황태자로 책봉되지 못했다.[24]
조비가 조예를 후계자로 결정하게 된 계기는 사냥터에서의 일화로 전해진다. 어느 날 두 부자가 함께 사냥을 나갔는데, 조비가 어미 사슴을 쏘아 죽인 뒤 조예에게 새끼 사슴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조예는 눈물을 흘리며 "폐하께서 이미 그 어미를 죽였는데, 저는 차마 그 새끼를 죽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조비는 이 말을 듣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활과 화살을 내려놓았고, 조예를 기특하게 여겨 황태자로 삼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41]
황초 7년(226년) 6월, 조비는 병세가 위독해지자 마침내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조비는 곧 세상을 떠났고, 조예는 21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 즉위 과정에서 아버지 조비의 유언에 따라 조진, 조휴, 사마의, 진군, 배잠 등의 보좌를 받았다.[41] 어머니 견씨가 죽임을 당한 이후 조예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오로지 독서에만 몰두하였기 때문에, 황제에 처음 즉위했을 때 그의 풍모를 아는 사람은 유엽 등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2. 2. 통치와 정책
조예의 치세는 여러 면에서 모순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는 총명하고 유능한 군주였으나, 때로는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큰 연민을 보이는 동시에 극단적인 잔혹함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국가에 유익한 정책과 해로운 정책을 동시에 시행했다. 특히 아버지 조비가 시행했던 제후들의 권력 제한 조치를 조식 등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유지했는데[6], 이는 훗날 황족 세력이 약화되어 사마 가문의 집권을 막지 못하고 조위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황제 즉위 당시 젊은 성인이었던 조예는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아버지 조비는 조진, 진군, 사마의 세 명을 보좌역으로 남겼는데, 조예는 이들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각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전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중앙 권력을 장악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면서도 그들의 조언을 활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소수 측근에 의존하기보다 여러 관료의 의견을 폭넓게 구했으며, 대체로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여 제국에 큰 혼란을 초래하는 일은 피했다.
황초(黃初) 7년(226년) 5월, 문제가 세상을 떠나자 황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어머니 견씨를 황후로 추증하고 문소황후(文昭皇后)라는 시호를 내렸다.
같은 해, 오의 손권이 강하를 공격해왔다. 조예는 신하들의 구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문빙의 수비력을 믿고 손권의 기습 의도를 간파하여 직접적인 대규모 구원군 파견 대신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 순우를 보내 전선을 시찰하게 했다. 순우가 산에 불을 지르자 손권은 물러났으나, 별동대를 이끌던 손환(孫奐)에게 위군의 퇴로가 차단당해 강하군 고성(高城)을 빼앗기는 피해를 입었다.
227년, 서평에서 국영이 반란을 일으키자 학소와 위평을 보내 진압했다. 12월에는 신성 태수 맹달이 촉한의 제갈량과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사마의가 신속하게 출정하여 다음 해 정월에 맹달을 참수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228년 정월,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하자(1차 북벌) 조진과 장합을 보내 가정 전투에서 승리하여 격퇴했다. 조예는 2월에 직접 장안으로 행차하여 논공행상을 실시했다.
그러나 같은 해, 오의 주방이 거짓 투항하는 계략에 넘어가 조휴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오를 공격하게 했으나 석정 전투에서 대패하여 수만 명의 병사를 잃는 큰 손실을 입었다. 사마의와 장합 등이 이끌었던 강릉 공격과 가규 등이 나섰던 동관(東關) 공격도 실패로 돌아가면서 삼면 침공 계획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이 패배 직후, 위의 관서 지방 수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제갈량은 2차 북벌을 감행하여 진창성(陳倉城)을 포위했다. 조진이 미리 방비를 강화시킨 덕분에 수비장 학소는 불과 천여 명의 병력으로 20여 일간 제갈량의 공격을 막아냈다. 결국 제갈량은 군량 부족과 위 원군의 접근으로 철수해야 했으며, 추격에 나섰던 위의 왕쌍은 제갈량 군의 반격에 전사했다. 같은 해, 가규 등이 다시 오의 유수(濡須)를 공격했으나 또다시 패배했다.[25]
이후 손권과 제갈량의 계속되는 침공에 맞서 조예는 황족인 조진을 비롯해 사마의, 장합 등 조조 시대부터 활약한 노장들을 중용하여 방어에 나섰다. 1차 북벌 당시에는 직접 장안으로 행차하여 동요하는 민심을 다독이기도 했다.
229년, 제갈량은 3차 북벌을 단행하여 진식으로 하여금 무도(武都)와 음평(陰平) 두 군을 공격하게 했다. 옹주자사 곽회가 구원에 나섰으나 제갈량의 견제로 실패했고, 결국 촉한은 두 군을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30년, 대사마가 된 조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촉 정벌을 결정했다. 8월, 조진은 장안을 출발하여 자오곡(子午谷)을 통해 촉을 공격했고, 사마의는 형주 방면에서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 한중의 남정(南鄭)을 공격하는 양면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30일 이상 지속된 가을 장마로 인해 도로가 끊기고 보급에 차질이 생겨 결국 조예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같은 해, 오의 손포가 거짓 투항해오자 이를 맞이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손권의 계략에 빠져 큰 패배를 당했다.
231년, 제갈량이 4차 북벌을 감행했고(기산 전투), 조예는 두기 등을 파견하여 사마의를 지원했다. 이 전투에서 위군은 3천 명의 사상자를 냈고, 촉군은 군량 부족으로 철수했으나 추격에 나섰던 명장 장합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었다.[26]
232년 이후, 전예와 왕웅(王雄)에게 명하여 요동 지역에 여러 차례 군사 행동을 시도했으나, 장제는 신의를 잃는 행동이라며 비판했다. 조예는 이를 듣지 않았지만 결국 침공은 실패로 돌아갔다.
청룡 원년(233년), 조조의 묘정에 하후돈, 조인, 정욱 세 명을 공신으로 배향했다.[27] (다른 공신들은 이후 조방과 조환 대에 추가되었다.) 훗날 251년 사마의가 사망하자 특별히 조조의 묘정에 추가 배향되었는데, 이때 관직 서열에 따라 사마의가 공신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28]
234년, 오와 촉한이 동시에 위를 침공했다. 오군은 합비, 상양, 기산을 공격했는데, 특히 합비 포위 공격이 거세 위군이 고전했다. 만총은 합비를 포기하고 수춘에서 적을 맞이하자고 건의했으나, 조예는 합비, 상양, 기산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수비를 명하고 직접 대군을 이끌고 합비로 향했다. 장영(張穎) 등 수비군의 분전과 만총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오군의 공세는 거셌으나, 조예의 중앙군이 도착하기 전에 손권은 큰 피해를 우려하여 철수했다. 한편, 상양에서 철수하던 육손과 제갈근은 강하의 신시, 안륙, 석양을 기습 공격하여 위군 천여 명을 죽이고 안륙과 석양성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특히 석양에서는 위군이 백성들을 살해하고 성문을 닫는 참사가 벌어져 수천 명이 희생되었다.[29] 오장원에서 제갈량과 대치하던 사마의에게는 결전을 피하고 지구전을 펼치라는 조서를 내려 방어에 집중하게 했고, 결국 제갈량은 병사했다.[30][31]
경초 원년(237년), 칠묘(七廟) 제도를 정비하면서 조부 무제 조조에게 태조(太祖), 아버지 문제에게 고조(高祖)의 묘호를 올리고, 자신의 묘호를 열조(烈祖)로 정했다. 같은 해, 오의 손권이 주연에게 2만 명을 주어 강하를 침공하자 형주자사 호질이 이를 격퇴했다. 그러나 위군이 추격하자 주연은 800명의 병력으로 역습하여 위군을 크게 무찔렀다. (위지 '명제기' 기록. 오지 '주연전'에는 242년의 일로 기록됨)
경초 2년(238년), 요동의 공손연이 연왕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조예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마의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토벌하게 했다. 사마의는 성공적으로 반란을 조기에 진압했다. 손권이 공손연을 돕기 위해 보낸 원군은 공손연이 이미 패사한 뒤 도착하여, 위군을 격파하고 요동 주민 일부를 데리고 돌아갔다. 같은 해, 촉한의 요화가 침공해오자 곽회가 유익(游奕)과 왕윤(王贇)을 보내 막게 했으나, 조예는 병력 분산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조예의 우려대로 유익은 패배하고 왕윤은 전사했다.
2. 3. 죽음과 후계
237년이 되자 조예가 가장 총애하던 후궁은 모황후가 아닌 곽후였다. 그 해 9월, 조예가 곽후가 주최한 연회에 참석했을 때, 곽후는 모황후도 초대할 것을 청했으나 조예는 이를 거절하고 연회 소식이 모황후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소식이 새어 나가 모황후가 조예에게 연회에 대해 이야기하자, 조예는 크게 분노하여 소식을 전한 시종들을 처형하고 모황후에게 자결을 명령했다.[9] 모황후는 황후의 예우를 갖춰 매장되었고 그녀의 가족들은 여전히 존경받았다.조예는 많은 후궁을 두었으나 아들이 없어 조방과 조순을 양자로 삼았다. 235년 9월 23일 이들을 왕으로 봉했으며[10], 이들은 조예의 사촌의 아들들로 여겨지나 정확한 부모는 불분명하다. 237년 6월 또는 7월, 조예는 자신의 묘호를 '열조'(烈祖)로 정하고, 조조와 조비의 묘호까지 정하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했다.[11] 또한 조조, 조비, 자신의 사당이 영구히 철거되지 않도록 명령했는데, 이는 후사가 없고 양자들의 출신이 불분명하여 자신의 사후 묘호나 사당 관리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38년 12월 31일, 요동 정벌이 마무리될 무렵 낙양에 있던 조예는 병세가 위독해졌다.[12] 그는 등녀라는 무녀의 말을 믿고 신수를 구하는 등 미신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효과가 없자 등녀를 처형했다. 죽음을 직감한 조예는 처음에는 숙부인 연왕 조우를 대장군으로 삼아 하후헌, 조상, 조조, 진랑과 함께 어린 양자 조방을 보좌하게 하려 했다.[32]
그러나 조예의 측근이었던 유방과 손자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에 불만을 품고 있던 하후헌과 조조가 권력을 잡는 것을 꺼렸다. 조우 또한 겸손한 성격으로 섭정 자리를 고사했다. 유방과 손자는 조예의 침실로 들어가 조우 대신 그들과 가까운 조상을 등용하고, 사마의를 공동 섭정으로 세울 것을 권했다. 조예는 유방과 손자의 말에 따라 조상과 사마의를 등용하려 했으나, 도중에 생각을 바꿔 앞선 명을 정지시키는 칙령을 내렸다. 이에 유방과 손자가 다시 입궁하여 조예를 설득했다.[32]
조예가 다시 두 사람의 의견을 따르자 유방이 조서 작성을 재촉했다. 조예가 병이 깊어 힘들다고 하자 유방은 침상에 올라 조예의 손을 억지로 잡아 조서를 쓰게 했다. 완성된 조서를 가지고 나온 유방은 "조서에 따라 연왕 조우 등의 관직을 면한다. 궁중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선포했다.[32] 이로써 조우, 하후헌, 조조, 진랑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궁궐에서 쫓겨났다. 최종적으로 조상과 사마의가 후견인으로 정해졌다.
239년 1월 16일, 조예는 곽후를 황후로 책봉하여[13] 사후 황태후가 되도록 준비했다. 1월 22일, 조예는 7살 된 조방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같은 날 35세(혹은 33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조방이 황제로 즉위했으며, 조예는 2월 17일 고평릉(高平陵)에 매장되었다.[14]
3. 정책
조예는 아버지 조비의 유조를 받아 보좌하던 대신들을 각 지방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모든 정무를 직접 관장하며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켰다.[7] 초기에는 법률 정비에 관심을 기울여 가혹한 형벌을 줄이고 사형 관련 법령을 검토했으며,[7] 진군 등에게 명하여 새로운 법률 체계를 마련하도록 했다.[7] 또한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직접 밭을 가는 적전(籍田) 의식을 행하고, 관청의 창고를 열어 자립이 어려운 백성들을 구제했으며, 세금을 면제해주기도 했다.[7] 지방 순시를 통해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모습도 보였다.[7]
군사적으로는 뛰어난 결단력과 전황 예측 능력을 보여주었으며,[7] 촉한의 제갈량이나 동오의 손권과의 전쟁에서 중앙에서 전황을 통제하며 효과적인 방어 전략을 구사했다. 외부에 대한 적극적인 원정이 좌절된 이후에는 수세적인 입장에서 양국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주력했다.
인재 등용에 있어서는 공적과 능력을 중시하고 겉모습만 화려한 인물들을 배척했으며,[7] 아버지 조비와 달리 자신에게 직언하는 신하들을 비교적 관용적으로 대했다.[34] 예를 갖춰 대신들을 대우하기도 했다.[34]
그러나 통치 말기에는 여러 차례 대규모 궁궐 건축을 강행하여 국가 재정을 크게 악화시켰다.[7] 낙양과 허창에 궁궐을 짓고, 한 무제 시대의 조각상과 기념물을 옮겨오는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과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7] 농번기에도 농민들을 대거 징발하여 농촌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으며,[7] 이는 고당륭(高堂隆) 등의 신하들이 상소를 통해 비판하기도 했다.[7] 또한 후궁과 시녀의 수를 수천 명으로 늘리고, 심지어 아름다운 기혼 여성을 강제로 빼앗아 후궁으로 삼거나 병사들과 재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여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고 인신매매를 조장하기도 했다.[8] 이러한 사치와 민생 파탄은 사마광의 『자치통감』[33]이나 『진서』 등 후대 역사가들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말년에는 손권에게 말을 보내 진주, 비취 등 사치품과 교환하려 하기도 했다.[7]
3. 1. 군사
위서 명제기 등에 따르면, 조예는 군대를 동원하거나 중대한 사안을 논의할 때 뛰어난 결단력과 전황 예측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지략 있는 신하와 장수들이 그의 계책을 따랐다고 한다.[7]조예 즉위 초기에 직면한 주요 위협 중 하나는 촉한의 승상 제갈량의 북벌이었다. 제갈량은 유비 사후 국력 회복에 힘쓰며 동오와 동맹을 재건한 뒤, 227년부터 국력이 약한 촉한이 결국 조위에 흡수될 것을 우려하여 다섯 차례에 걸쳐 북벌을 감행했다. 이에 조예는 주로 장안으로 이동하여 군대의 사기를 높이고 보급선을 단축시키면서, 전선의 장수들에게 제갈량의 공격을 막도록 지시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는 중앙에서 전황을 신속하게 파악하며 효과적으로 방어 전략을 구사했다. 제갈량의 북벌은 234년 그의 사망으로 사실상 중단되었으나, 이후에도 촉한과의 국경 분쟁은 계속되었다.
동오와의 관계에서도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조예는 대체로 동오와의 국경 분쟁에서도 촉한과의 전쟁과 유사하게, 직접 전선 근처까지 이동하되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지휘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유능한 만총에게 동남부 국경 방어를 맡겨 여러 차례 위기를 넘겼다.
연도별 주요 군사 활동
- 226년: 손권이 강하를 공격하자, 조예는 손권의 의도가 기습임을 간파하고 문빙의 수비를 믿으며 증원군 파병 대신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 순우를 보내 병사들을 위로하게 했다. 순우가 도착하여 1천 명의 병력으로 산 위에서 횃불을 밝혀 대군처럼 위장하자, 조예의 예측대로 손권은 퇴각했다.[7] 다만, 손권의 별동대가 강하군 고성(高城)을 함락시키는 일도 있었다.
- 227년: 서평에서 국영이 반란을 일으키자 학소와 위평 등을 파견하여 진압했다.
- 227년 ~ 228년: 신성 태수 맹달이 제갈량과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사마의를 파견하여 신속하게 진압하고 맹달을 참수했다. 이는 촉한이 신성을 통해 위나라를 협공할 가능성을 차단하여, 이후 가정 전투에서의 승리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 228년: 제갈량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조예는 직접 장안으로 행차하여 서부 전선의 동요를 막고, 조진과 장합을 파견하여 가정 전투에서 촉군을 격파했다.
- 228년: 동오의 장수 주방의 거짓 투항 계략에 속아 조휴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오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석정 전투에서 대패하여 수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가규의 도움으로 조휴군은 전멸을 면했지만, 이는 조예의 판단 착오로 인한 큰 손실이었다. 같은 해, 가규 등에게 명하여 다시 오나라 영토인 유수(濡須)를 침공했으나 패배했다.[25]
- 228년: 조휴의 패배를 틈타 제갈량이 2차 북벌을 감행하여 진창성을 포위했다. 조진이 미리 성을 강화시키고 학소가 소수의 병력으로 20여 일간 성공적으로 방어하자, 제갈량은 군량 부족과 위나라 원군의 접근으로 퇴각했다. 추격에 나선 왕쌍은 전사했다.
- 229년: 제갈량의 3차 북벌 때, 진식이 무도와 음평 두 군을 공격했다. 옹주자사 곽회가 구원에 나섰으나 제갈량의 견제로 후퇴했고, 진식은 두 군을 점령했다.
- 230년: 대사마가 된 조진의 건의로 촉 정벌을 시도했으나, 30일간 이어진 가을 장마와 잔도 붕괴로 실패하고 철수했다. 같은 해, 오나라 손포의 거짓 투항 계략에 속아 위군이 출병했다가 손권에게 패배했다.
- 231년: 제갈량의 4차 북벌(기산 전투)이 있자, 사마의를 지원하여 대응했다. 위군은 3천 명의 손실을 입었으나, 제갈량은 군량 부족으로 퇴각했고, 추격하던 장합이 전사했다.[26]
- 232년: 전예와 왕웅(王雄)에게 요동의 공손연 세력을 공격하도록 했으나 장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다가 실패했다.
- 233년: 조조의 묘정에 하후돈, 조인, 정욱 등 3명을 공신으로 제사했다.[27]
- 234년: 오나라와 촉한이 동시에 위나라를 공격했다. 손권이 합비를 포위하자 만총은 합비를 포기하고 수춘에서 맞서 싸우자고 제안했으나, 조예는 "합비, 양양, 기산은 위의 중요한 방어 거점이므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이를 거부하고 직접 대군을 이끌고 합비로 향했다. 조예의 예측대로 손권은 위나라 중앙군이 도착하기 전에 큰 소득 없이 철수했다. 한편, 육손과 제갈근은 철수 도중 강하군의 신시, 안륙, 석양을 기습하여 위군 1천여 명을 죽이고 안륙과 석양성을 함락시키는 피해를 입혔다.[29] 또한, 오장원에서 제갈량과 대치하던 사마의에게는 결전을 피하고 지구전을 벌이다가 적이 퇴각할 때 추격하라는 지시를 내려 방어에 성공하도록 했다.[30][31] 제갈량은 이 전투 중 병사했다.
- 237년: 오나라 주연이 2만 명을 이끌고 강하를 침공하자 형주자사 호질(胡質)이 이를 격퇴했으나, 추격 과정에서 주연의 역습을 받아 위군이 패주했다.
- 238년: 요동의 공손연이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조예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마의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정벌을 명했다. 사마의는 양평(襄平, 현 랴오양시)을 포위하여 약 3개월 만에 함락시키고 공손연을 처형하여 요동을 평정했다. 이로써 위의 후방 위협이 제거되었다. 같은 해, 촉한의 요화가 침공했을 때 곽회가 병력을 분산시켜 대응하려 하자 조예는 위험성을 경고했고, 예측대로 위군은 패배하여 유익(游奕)이 패하고 왕윤(王贇)이 전사했다.
이처럼 조예는 중앙에서 전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때로는 직접 군대를 이끌거나 유능한 장수들에게 적절한 임무를 맡겨 여러 차례 위기를 극복하고 영토를 방어하는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조휴의 패배와 같은 실책도 있었다.
3. 2. 내정
조예는 아버지 조비의 유언에 따라 자신을 보좌하던 대신들을 각 지방으로 보내고, 모든 정무를 직접 관장하며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켰다. 그는 법률에 깊은 관심을 보여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을 줄이고, 사형 관련 법령을 검토하여 상당 부분을 개정하였다. 중요한 재판이 열릴 때마다 직접 방청하며 사법 과정에 관여했다. 229년에는 진군과 유소 등에게 명하여 한나라 시대의 법률을 정비하고 새로운 법률 체계를 마련하도록 했다.또한,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직접 밭을 가는 적전(籍田) 의식을 행했으며, 관청의 창고를 열어 자립이 어려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233년에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세금을 면제해주는 조치를 취했다. 여러 차례 지방을 순시하며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는 등 사회적 약자를 보살피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통치 말기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대규모 궁궐 건축을 강행하여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농번기임에도 농민들을 대거 징용하여 농촌 사회의 피폐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점은 고당륭(高堂隆)이 조예에게 올린 상소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조예의 치세는 여러 면에서 모순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는 총명하고 유능한 군주였으나, 국가 통치나 군사 작전에서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때로는 큰 연민을 보이면서도 극심한 잔혹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제국에 유익한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해로운 정책도 많았다. 아버지 조비가 시행했던 황족 제후들의 정치 참여를 엄격히 제한하는 정책을 조식 등의 지속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지했는데,[6] 이는 훗날 사마씨 세력이 성장했을 때 황실을 지킬 세력이 부재하게 만들어 조위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의 사당 이름을 정하기 전부터, 조예는 당시의 전통과 관습에 관한 사건에서 기이한 행동을 보인 것으로 기록되었다. 229년 8월 3일에는 환관이었던 양할아버지 조등을 魏高帝|위 고제중국어로 추존하기도 했다.[15]
232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 조숙(曹淑)이 사망하자,[16] 양부와 진군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17][18] 성인 여성의 장례 절차에 준하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렀다. 조숙에게 '평원 의공주'라는 시호를 내리고 사당을 세웠으며, 외척인 견황(甄黄)의 손자와 사후 혼인시키고 곽덕(郭德)을 양자로 삼아 후사를 잇게 하는 등[19]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237년 2월경, 상서로운 징조를 이유로 역법을 개정하여 기존의 정월(1월) 대신 축월(12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고, 연호를 '청룡'(靑龍)에서 '경초'(景初)로 변경했다.[20] 이 변경된 역법은 조예 사후 조방 대에 다시 원래대로 복구되었다.[21]
중앙에서는 진군이 정치를 보좌했지만, 진군 사후 조예의 정치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된 궁궐 건설 외에도, 병력 확보를 위해 병사 집안 간의 결혼을 장려하고, 심지어 민간인에게 시집간 여성을 강제로 징발하여 미혼 병사와 재혼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대신 노비를 보내도 좋다'거나 '징발된 여성 중 용모가 뛰어난 자는 후궁으로 들인다'는 등의 부칙은 인신매매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부유층은 돈으로 노비를 사서 아내 대신 보냈고, 빈곤층은 생계를 위해 처자식을 팔기도 했다. 대부분의 중신들이 이러한 정책에 반대했지만, 조예는 이를 강행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제갈량 사후 외적의 위협이 사라지자 조예가 해이해져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였다고 평가했다.[33] 반면 『집해』에서는 조예의 사치는 제갈량의 죽음 이전부터 시작되었으며,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민생을 어렵게 했다고 지적한다. 『진서』 역시 조예가 즉위 후 사리사욕을 채우고, 궁궐 건축 등으로 농업과 국방을 저해했으며,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했다고 혹평했다. 말년에는 손권에게 말을 밑천으로 하여 진주, 비취 등 귀중품과의 교환을 제안하기도 했다.
3. 3. 인사
조예는 아버지 조비와 달리 자신에게 간언하는 신하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의견을 꺾거나 처벌하지 않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곧은 소리를 좋게 받아들였다. 또한 예의를 갖추어 대신들을 우대했다.[34] 그는 공적을 세우거나 유능한 인물을 선발하여 등용했으며,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 없는 사람들을 싫어했다.이러한 조예의 인사 방침은 위지 노육전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하후현, 이승, 등양, 제갈탄, 유방의 아들 유희, 손자의 아들 손밀, 위진의 아들 위렬 등은 서로 인물을 평가하며 사총팔달(四聰八達, 4명의 총명한 인물과 8명의 통달한 인물)이나 삼예(三豫) 같은 등급을 매기고 명성을 얻으려 했다. 이들은 객관적인 평가보다는 내부적으로 등급을 정하고 소문을 퍼뜨려 명성을 조작하려 했다. 조예는 이러한 행태를 경박하다고 여겨 매우 싫어했으며, 이들 모두를 즉시 면직시키고 다시는 관리로 등용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조예는 이들을 가리켜 실속 없이 겉만 화려한 '화병'(畫餠, 그림의 떡)과 같다고 비판하며, 함부로 명성을 칭찬하는 당시 풍조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이는 구품관인법 도입 이후 점차 귀족화가 진행되던 시기의 세태를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노육이 조예에게 상소했다.
"명성은 특별한 인재를 찾는 데에는 부족할 수 있으나 평범한 선비를 얻는 데에는 유용합니다. 평범한 선비는 학문을 익히고 선을 본받아 명성을 얻게 되므로 그들을 무조건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신하된 자로서 특별한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부족할 수 있으니, 명성을 단서로 삼아 인물을 살피되 그 실상을 잘 조사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말로써 탄핵하고 상주하면 그 진실 여부를 공적으로써 증명하게 했습니다. 지금은 관리의 성적을 평가하는 법이 폐지되고 비난과 칭찬이라는 평판에 따라 등용과 퇴출이 결정되니, 진실과 거짓이 뒤섞이고 허와 실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조예는 노육의 상소를 받아들여 즉시 관리의 성적을 평가하는 제도를 마련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조예는 사마의, 조진, 진군, 유방, 손자 등 능력 있는 대신들을 전적으로 신뢰했으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소수의 의견에 치우치지 않고 여러 관료의 조언을 구하는 신중함을 보였다.[34] 그는 아버지 조조가 임명한 섭정들(조진, 진군, 사마의)의 조언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을 지방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전권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통치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조예의 인사는 몇 가지 문제점도 안고 있었다. 그는 조식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조비가 시행했던 황족 제후들의 관직 겸임 금지 조치를 계속 유지했다.[6] 이는 결과적으로 조예 사후 황족 세력이 약화되어 사마씨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빌미를 제공했고, 조위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조예가 면직시킨 필궤, 하안, 이승, 정밀, 환범 등은 조예 사후 조상의 도움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나, 이후 고평릉의 변에서 사마의에게 제거되었다.
4. 평가
유엽은 조예를 처음 만났을 때 "진 시황이나 한 무제와 같은 풍모를 지녔으나, 이 두 사람에는 약간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신비는 "총명하다고 칭찬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어둡고 졸렬하지도 않다"고 다소 유보적인 평가를 내렸다.
『삼국지』의 편찬자 진수는 조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37]
: 명제는 침착하고 굳세며 결단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었으며, 마음에 임하여 행동하며, 백성들에게는 군주의 지극한 기개를 갖고 있었다. 그 당시 백성들은 생활이 피폐하고 온 천하는 분열되었으나, 명제는 선조의 빛나는 대업을 먼저 생각하거나, 왕업의 기틀을 다지지 않고 진시황이나 한 무제를 급히 모방하여 궁전을 지었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관점으로서 헤아리면 이는 아마도 중대한 결함일 것인저!
또한 진수는 같은 책 삼소제기에서 조예가 사사로운 정에 사로잡혀 어린 조방에게 황위를 넘기고 후사를 한 사람에게 맡기지 않아 조상의 주살과 조방의 폐위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38]
『위서』의 편찬자 왕침은 조예가 용모와 위엄을 갖추었으며, 즉위 후에는 대신을 예우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며 참언을 막으려 노력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군사 및 중대사 결정에서 뛰어난 지략을 보였고, 기억력이 비상하여 신하들의 정보를 잘 파악했으며, 직언을 잘 받아들이고 낮은 신분의 상소까지 꼼꼼히 살폈다고 기록했다.
동시대의 역사가 손성은 조예가 뛰어난 외모와 침착함, 강인함, 결단력을 지녔으며, 정치를 직접 관장하고 예를 갖춰 대신을 대우하며 직언을 관용적으로 수용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손성은 "면전에서 지극한 간언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꺾어버리거나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임금이 갖고 있는 도량이 이처럼 위대하였다"고 칭찬하면서도, 동시에 덕행을 쌓고 기풍을 세우거나 황족을 이용해 왕권의 기초를 다지지 않아 결국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치고 나라를 지키지 못하게 된 점을 안타까워하며 비판했다.[39]
: 덕을 세우고 기풍을 내려줄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유성의 기초를 굳게 세우지 아니하였으니, 결국 대권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기에 이르렀고, 사직을 지킬 수 없었으니 슬픈 일이다!
종합적으로 조예는 할아버지 조조가 세운 위나라의 기틀 위에서 왕조를 안정시키고 명성을 높인 군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말년에 대규모 궁궐 건축 등으로 사치를 부렸고, 어린 후계자를 보위할 황족 세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 사마씨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결국 위나라가 진나라에 의해 찬탈당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의 치세는 총명함과 잠재력 미발휘, 연민과 잔혹함, 국가에 유익한 정책과 해로운 정책이 공존하는 역설적인 면모를 보였다. 특히 숙부인 조식 등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조비가 시행했던 제후들의 권한 제한 조치를 유지한 것은, 훗날 황족들이 사마씨를 견제하지 못하게 만든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6]
5. 가계
조예(曹叡)는 205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할아버지 조조는 당시 한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헌제를 허수아비로 세운 최고 권력자였으며, 아버지 조비는 조조의 살아있는 아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후계자로 여겨졌다. 어머니 견씨는 본래 원소의 아들 원희의 아내였으나, 204년 조조군에게 사로잡힌 후 조비와 강제로 혼인하게 되었다.[3] 조예는 이 혼인 후 약 8개월 만에 태어났기 때문에, 조비가 아닌 원희의 아들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 조조는 이 손자를 매우 아껴 곁에 두었으며, "네(조예) 덕분에 나의 업적이 3대에 걸쳐 이어질 수 있겠다"고 말할 정도였다.[4]
220년 조조가 사망하고 조위를 건국한 조비는 221년 어머니 견씨에게 자결을 명했다.[5]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과 출생에 대한 의혹 때문에 조예는 조비의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즉시 황태자로 책봉되지 못하고, 222년 3월 평원왕(平原王)에 봉해졌다. 평원왕 시절 그는 귀족 가문의 여성인 유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조예는 조비의 황후인 곽씨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곽황후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그의 지위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조비가 조예를 후계자로 여기게 된 계기 중 하나로 사냥 일화가 전해진다. 조비가 어미 사슴을 쏘아 죽인 후 조예에게 새끼 사슴을 쏘라고 명했으나, 조예는 눈물을 흘리며 "폐하께서 이미 어미를 죽였는데, 저는 차마 그 아들까지 죽일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조비는 활을 내려놓고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226년 6월, 병세가 위독해진 조비는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했고, 조비가 사망하자 조예는 21세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황제가 된 후, 조예는 첫 부인인 유씨 대신 총애하던 후궁 모씨를 227년 황후로 책봉했다.[9] 유씨는 궁궐에서 쫓겨났다. 조예는 모황후를 매우 아꼈으며 그녀의 친척들에게 명예직을 주었다. 그러나 조예는 많은 후궁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아기를 넘긴 아들이 없어서 후사를 잇지 못했다. 결국 235년 9월 23일, 친척의 아들로 추정되는 조방과 조순을 양자로 삼아 왕으로 봉했다.[10] 237년 6월 또는 7월, 조예는 자신의 묘호를 '열조(烈祖)'로 정하고, 할아버지 조조와 아버지 조비의 묘호까지 정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11] 또한 이들 세 명의 사당은 영구히 보존하도록 명했는데, 이는 자신의 불분명한 출신과 후계 부재로 인해 사후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간이 흘러 조예의 총애는 모황후에게서 곽후에게로 옮겨갔다. 237년 9월, 조예는 곽후가 주최한 연회에 모황후를 초대하라는 곽후의 청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연회 소식이 모황후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모황후가 조예에게 연회에 대해 묻자, 조예는 크게 분노하여 관련자들을 처형하고 모황후에게 자결을 명했다. 모황후는 황후의 예우를 갖춰 매장되었다.
238년 12월 31일 병세가 깊어진 조예는[12] 239년 1월 16일 곽후를 황후로 책봉하여[13] 사후 황태후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숙부인 조우를 중심으로 하후현(夏侯獻중국어), 조상, 조조(曹肇중국어), 진랑(秦朗중국어) 등에게 후사를 맡기려 했으나, 측근 유방(劉放중국어)과 손자(孫資중국어)의 개입으로 조상과 사마의가 공동 섭정이 되었다. 조우 등은 섭정에서 배제되었다. 239년 1월 22일, 조예는 양자 조방을 황태자로 책봉한 당일 사망했다. 조방이 뒤를 이었고, 조예는 2월 17일 고평릉(高平陵)에 안장되었다.[14]
구분 | 인물 | 비고 |
---|---|---|
배우자 | 평원왕비 유씨 (平原王妃 虞氏중국어) | 조예가 평원왕 시절 맞이한 첫 부인 |
명도황후 모씨 (明悼皇后 毛氏중국어) | ? ~ 237년. 조예의 총애를 받았으나 사사(賜死)됨. | |
명원황후 곽씨 (明元皇后 郭氏중국어) | ? ~ 264년. 조예 사후 황태후가 됨. | |
기타 후궁 | 재인 장씨, 재인 하씨, 재인 석영 등 다수 (천 명이라는 기록도 있음) | |
친자 | 조경 (清河王 曹冏중국어) | 청하왕. 226년 사망.[40] |
조목 (繁陽王 曹穆중국어) | 번양왕. 229년 사망. | |
조은 (安平哀王 曹殷중국어) | 안평애왕. 231년 ~ 232년. 명도황후 모씨 소생. | |
제공주 (齊公主중국어) | 이도(李韜중국어)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음. 이후 임개(任愷중국어)와 결혼. | |
림분공주 (臨汾公主중국어) | 상세 불명. | |
조숙 (平原懿公主 曹淑중국어) | 평원 의공주. 232년 출생, 요절. 명원황후 곽씨 소생. | |
양자 | 조방 (曹芳중국어) | 제왕(齊王). 조예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됨. 종제 조해의 아들로 추정. |
조순 (曹詢중국어) | 진왕(秦王). 종제 조해의 아들로 추정. | |
조상 | 조조 | 할아버지 |
조비 | 아버지 | |
문소황후 견씨 | 어머니 | |
무선황태후 변씨 | 할머니 | |
형제자매 | 동향공주 | 이복 여동생 |
6. 기타
『삼국지』 명제기(明帝紀)에는 조예가 경초 3년(239년)에 36세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역산하면 그의 출생 연도는 건안 9년(204년)이 된다. 『삼국지집해』의 저자 노필은 조예가 아버지 조비로부터 특별히 냉대를 받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조예의 실제 아버지가 조비가 아니라 조조의 경쟁자였던 원소의 차남 원희일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3] 조조가 기주를 함락시킨 후 조비가 원희의 아내였던 견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이때 이미 견씨가 원희의 아들인 조예를 임신하고 있었고, 조비는 그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아 양육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삼국지』 명제기에 기록된 향년(享年, 사망 당시 나이) 36세가 잘못된 기록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많다. 예를 들어, 『삼국지』의 주석가인 배송지는 조예의 향년은 34세가 옳다고 주장했다. 이 경우 조예는 206년생이 되며, 생물학적 아버지가 조비라는 점에 문제가 없게 된다.
조예는 재위 기간 중 당시의 전통이나 관습에 어긋나는 기이한 행동을 보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조등 추존: 229년 8월 3일, 조예는 자신의 양증조부이자 환관이었던 조등을 "위 고제"(魏高帝|위고제중국어)로 추존했다.[15] 이는 중국 역사상 환관이 황제로 추존된 유일한 사례이다.
- 딸 조숙(曹淑)의 장례: 232년 2월 15일, 태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딸 조숙이 사망하자,[16] 조예는 양부 등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접 장례 행렬에 참여하겠다고 고집했다. 양부는 조예가 아버지 조비와 할머니 변황후의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점을 지적하며 만류했지만, 조예는 이를 듣지 않았다.[17] 또한 진군 등 다른 신하들의 간언도 무시하고, 어린아이의 장례임에도 성인 여성의 장례 의식에 따라 치르도록 명령했으며, 조정 관리들에게 상복을 입도록 했다.[18] 조예는 조숙에게 "평원 의공주"(平原懿公主)라는 시호를 내리고 사당을 세우도록 명했다. 더 나아가 어머니 견씨 집안의 죽은 손자(견황의 손자)를 조숙과 함께 묻고 사후에 제후로 봉했으며, 명원황후 모씨의 친척인 곽덕(郭德)을 죽은 부부의 양자로 삼아 성을 견씨로 바꾸고 평원후(平原侯)에 봉해 공주의 지위를 잇게 했다.[19]
237년 2월경,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조예는 달력을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기존에 사용하던 달력에서 동지 다음 달인 축월(丑月, 음력 12월)을 새로운 정월(正月), 즉 한 해의 시작으로 삼았다. 이 변경은 율리우스력으로 237년 4월 11일 이후 효력이 발생했으며, 연호 역시 '청룡'(靑龍)에서 '경초'(景初)로 바꾸었다.[20]
조예 사후, 그의 뒤를 이은 조방은 이러한 변경을 다시 되돌려 인월(寅月, 음력 1월)을 정월로 삼고 새해의 시작으로 정했다.[21]
- ''태화'' (太和) 227년–233년
- ''청룡'' (青龍) 233년–237년
- ''경초'' (景初) 237년 2월 12일 – 240년 2월 9일
참조
[1]
서적
Cao Rui's biography in vol.03 of Sanguozhi
Sanguozhi
226-06-13
[2]
서적
Cao Pi's biography in Sanguozhi
Sanguozhi
226-03-00
[3]
문서
The 8th month of Jian'an Era 9
204-09-12
[4]
서적
Sanguozhi, vol.03, with annotation from Wei Shu
Sanguozhi
[5]
서적
Lady Guo's biography in Sanguozhi
Sanguozhi
[6]
문서
Cao Zhi's case
[7]
서적
Weilüe annotation in Sanguozhi, vol.03
Sanguozhi
[8]
서적
Weilüe annotation in Sanguozhi, vol.03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vol.03
Sanguozhi
227-11-27
[10]
서적
Sanguozhi, vol.03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vol.03, with Sun Sheng's annotation
Sanguozhi
[12]
서적
Sanguozhi, vol.03
Sanguozhi
[13]
서적
Sanguozhi, vol.03
Sanguozhi
[14]
서적
Sanguozhi, vol.03
Sanguozhi
[15]
서적
Sanguozhi, vol.03
Sanguozhi
[16]
서적
Tang Kaiyuan Zhanjing, vol.13
Tang Kaiyuan Zhanjing
[17]
서적
Sanguozhi, vol.25
Sanguozhi
[18]
서적
Sanguozhi, vol.22
Sanguozhi
[19]
서적
Sanguozhi, vol.05, with Sun Sheng's annotation
Sanguozhi
[20]
서적
Sanguozhi, vol.03
Sanguozhi
237-04-11
[21]
서적
Sanguozhi, vol.4
Sanguozhi
239-12-13
[22]
서적
三国志 魏書明帝紀
三国志
[23]
서적
魏書 明帝紀、文帝紀
三国志
[24]
서적
魏略
[25]
서적
太平御覽、水経注
[26]
서적
晋書
晋書
[27]
서적
三国志 巻三 魏書 明帝紀
三国志
[28]
서적
三国志 巻四 魏書 三少帝紀 斉王紀
三国志
[29]
서적
三国志 呉志 陸遜伝、諸葛瑾伝、建康実録、四庫全書
[30]
서적
漢晋春秋
漢晋春秋
[31]
서적
晋書、水経注、太平御覧
[32]
서적
献帝春秋、魏略
[33]
위키소스
資治通鑑
[34]
문서
楊阜、高堂隆
[35]
서적
魏末伝
[36]
서적
2012
[37]
문서
原文「沈毅剛識、任心而行。蓋有君人之至概焉。于時百姓彫弊、四海分崩、不先聿修顕祖、闡拓洪基、而遽追秦皇・漢武、宮館是営、格之遠猷。其殆疾乎」
[38]
문서
原文「情繋私愛、撫養嬰孩、傳以大器、託付不専、必参枝族、終于曹爽誅夷、斉王替位」
[39]
문서
『原文「優礼大臣、開容善直、雖犯顔極諫、無所摧戮、其君人之量、如此偉也。然不思建徳垂風、不固維城之基、至使大権偏拠、社稷無衛、非夫」
[40]
문서
『六代論』を著した[[曹冏]]とは別人。
[41]
서적
자치통감 삼국지
살림출판사
200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