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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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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선부는 중국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의 후손으로, 당나라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의 조상은 북위 말기에 고구려로 망명하여 정착했으며, 이후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 시기에 두선부의 아버지 두졸이 당에 투항하면서 당나라로 이주했다. 두선부는 당나라에서 관직을 역임했으며, 묘지가 중국 뤄양시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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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선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두선부
원어명豆善富
한글 표기두선부
한자 표기豆善富
일본어 표기 (히라가나)とう ぜんふ
일본어 표기 (가타카나)(정보 없음)
로마자 표기Du Seonbu
기본 정보
휘(暉)
출생684년
사망741년 (58세)
사망 장소당나라 낙양
매장 장소하남현 재택향 망산
국적당나라
사망 원인병사
성별남성
가족아버지: 두졸
관직 정보
소속 국가당나라
직책충무장군섭우금오위랑장상주국
임기 시작(정보 없음)
임기 종료(정보 없음)
군주(정보 없음)
이전(정보 없음)
이후(정보 없음)

2. 가계와 출신 배경

중국 허난성 뤄양시에서 발견된 두선부의 묘지에는 그의 가계와 생애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3] 이 묘지는 현재 카이펑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묘지 기록에 따르면 두선부의 조상은 본래 북위 시대 중국에서 활동하였으나, 6대 조상인 북위 장군 할두릉보번이 북제고환에게 패배하여 사망하자 그의 일족이 고구려망명하였다.[4] 고구려로 망명한 이후에는 성씨를 '두'(豆)로 바꾸었으며,[4][3] 고구려 내에서 높은 정치적 지위를 누렸던 것으로 추정된다.[3]

이후 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하자, 두선부의 아버지인 두졸(豆卒)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당나라항복하였다.[4] 이로 인해 두선부 일가는 다시 당나라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두졸은 당나라로부터 관직을 제수받았다.[4] 두선부 본인 또한 당나라에서 활동하며 악목자해□검교□□□군사(岳牧子解□檢校□□□軍事)직과 충무장군섭우금오위랑장상주국(忠武將軍攝右金吾衛郞將上柱國)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4]

2. 1. 중국계 조상

중국 허난성 뤄양시에서 두선부의 묘지가 발견되었으며, 이 묘지에는 그의 가계와 생애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묘지는 현재 카이펑시 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3]

묘지명 기록에 따르면, 두선부의 조상은 원래 핑링(산시성 셴양시) 지역에서 살았다. 그러나 한나라 시대에 옌먼 태수를 지냈던 18대 조상 통(通)이 전란을 피해 삭야로 이주하였고, 이후 그의 후손들은 그곳에서 대대로 정착했다. 북위 시대에 이르러서는 할두릉(紇豆陵)이라는 성씨를 하사받았다.[4]

두선부의 6대 조상은 북위의 장군이었던 할두릉보번이다. 그는 북제고환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할두릉보번의 남은 일족은 고구려망명하였고, 이때부터 성씨를 '두(豆)'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구려 내에서 두씨 가문은 높은 정치적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3][4]

시간이 흘러 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하자, 두선부의 아버지인 두졸(豆卒)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당나라 군대에 항복했다. 이로 인해 두선부의 가족은 당나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당나라 조정은 투항한 두졸을 우대하여 관료로 등용하였고, "리무 이저우 □□ 제군사(利武 伊州 □□ 諸軍事)"라는 직책과 함께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하였다.[4]

2. 2. 고구려 망명

두선부의 묘지 기록에 따르면, 그의 조상은 본래 산시성 핑링에 살았으나, 한나라 때 옌먼 태수를 지낸 18대 조상 통이 전란을 피해 삭야로 이주하여 대대로 살았다.[4] 이후 북위 시대에 할두릉씨라는 성을 하사받았다.[4]

북위 말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3] 두선부의 6대 조상인 북위 장군 할두릉보번이 북제고환에게 패하여 전사하자, 그의 일족은 고구려망명하였다.[4] 고구려로 망명한 후에는 성씨를 "두(豆)"로 바꾸었으며,[4][3] 고구려 내에서 높은 정치적 지위를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3]

이러한 중국계 인물의 고구려 망명은 비단 두선부 가문만의 일은 아니었다. 서진 말기의 혼란기나 동위서위가 대립하던 시기 등 북중국 지역의 정치적, 군사적 혼란이 극심할 때마다 망명 행렬이 이어졌다.[1] 이는 당시 고구려가 북중국의 정세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1] 망명자들의 출신 배경 역시 풍홍과 같은 국왕부터 모용평 같은 고위 관료, 최비, 강과 같은 지방관과 그들의 속료(동수, 송황), 한상과 같은 호족, 그리고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1] 두선부의 조상처럼 기존의 권력 기반을 상실하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 고구려로 망명한 경우가 많았다.[1]

시간이 흘러 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하자, 두선부의 아버지인 두졸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당나라항복하였다.[4] 이로 인해 두선부 일가는 다시 당나라로 이주하게 되었다.[4] 당나라 조정은 투항한 두졸을 우대하여 관료로 등용하였고, "리무 이저우 □□ 제군사"라는 직책과 함께 "자금어"를 하사하였다.[4]

3. 생애

두선부의 생애는 중국 허난성 뤄양시에서 발견된 그의 묘지 기록을 통해 주로 알려져 있다.[3] 묘지 기록에 따르면, 그의 조상은 본래 산시성 핑링 출신이었으나 한나라 때 18대 조상 통이 전란을 피해 삭야로 이주했고, 북위 때 할두릉씨 성을 하사받았다.[4]

두선부의 6대 조상인 북위 장군 할두릉보번이 북제고환에게 패하여 전사한 후, 남은 일족은 고구려망명하여 '두(豆)'씨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4] 두씨 일족은 고구려에서 높은 정치적 지위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3]

이후 고구려-당 전쟁 시기에 아버지 두졸이 형제들과 함께 당나라항복하면서 두선부 일가도 당으로 이주하게 되었다.[3][4] 두선부는 당나라에서 악목자해□검교□□□군사(岳牧子解□檢校□□□軍事), 충무장군, 섭우금오위랑장(攝右金吾衛郞將), 상주국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4] 741년 뤄양의 황성 내 우위율부(右衛率府) 관사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4]

그의 묘는 허난현 쯔저향 망산에 있으며,[4] 출토된 묘지는 현재 카이펑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3]

3. 1. 당나라 투항

두선부의 6대 조상인 북위 장군 할두릉보번은 북제고환에게 패하여 전사하였고, 이후 남은 일족은 고구려망명하여 '두(豆)'씨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4] 시간이 흘러 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하자, 두선부의 아버지인 두졸(豆卒)은 형제들과 함께 당나라항복하였다.[3][4] 이로 인해 두선부 일가는 당나라로 이주하게 되었다.[3] 두졸당나라로부터 우대를 받아 관료로 채용되었으며, "리무 이저우 □□ 제군사"라는 관직과 "자금어(紫金魚)"를 하사받았다.[4]

3. 2. 당나라에서의 활동

고구려-당 전쟁 시기, 아버지 두졸이 형제들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면서 두선부 일가는 당으로 이주하게 되었다.[4] 아버지 두졸은 당나라에서 관료로 활동하며 우대를 받았다.[4]

두선부는 당나라에서 활동하며 악목자해□검교□□□군사(岳牧子解□檢校□□□軍事)직을 비롯하여 충무장군, 섭우금오위랑장(攝右金吾衛郞將), 상주국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4]

741년,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던 중 병을 얻어 뤄양의 황성 내 우위율부(右衛率府) 관사에서 사망하였다.[4] 그의 묘는 허난현(河南縣) 쯔저향(梓澤鄉) 망산(邙山)에 마련되었다.[4]

3. 3. 사망

741년, 두선부는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던 중 병을 얻어 뤄양의 황성 우위율부 관사에서 사망하였다.[4] 그의 묘는 허난현 쯔저향 망산에 마련되었다.[4] 사망 당시 그는 "악목자해 □ 검교 □□□ 군사", "충무장군", "섭우금오위 낭장", 상주국 등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4]

4. 역사적 배경과 의의

중국계 이민이 고구려로 망명한 것은 북중국의 정치적 혼란과 관련이 있다. 서진 말기의 혼란, 동위서위의 대립 등 군사적,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시기에 지속적으로 고구려로 망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는 고구려 역시 북중국의 정치적, 군사적 혼란의 영향권 아래 있었음을 보여준다[1]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계 이민들의 본국에서의 지위는 국왕(풍홍), 정부 고관(모용평), 지방관(최비, 강과)과 그들의 관리(동수, 송황), 호족(한상),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계층을 아우른다[1]。 이들 중국계 이민들은 본국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망명'하는 형태를 보였으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잃고 고구려로 망명한 두선부의 조상 일족 역시 이러한 사례에 해당한다[1]

참조

[1] 뉴스 5호16국·남북조 상쟁기 이주민과 고구려·백제 http://contents.nahf[...] 국사편찬위원회
[2] 뉴스 한국 고대사회 外來人의 존재양태와 사회적 역할 https://cms.dankook.[...] 檀國大學東洋學硏究院 2017-07
[3] 뉴스 「豆善富 墓誌銘」과 그 一家에 대한 몇 가지 검토 https://www.kci.go.k[...] 慶熙大学 2015
[4] 뉴스 두선부묘지(豆善富墓誌) http://encykorea.aks[...]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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