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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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문제는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로마의 지위와 관련된 복잡한 정치적, 종교적 문제였다.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은 로마를 수도로 선언했지만, 교황 비오 9세와 프랑스 수비대의 반대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이탈리아는 로마를 점령했고, 교황은 바티칸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이로 인해 교황과 이탈리아 정부는 갈등을 겪었으며, 교황은 이탈리아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바티칸의 죄수"로 불렸다. 1929년 라테란 조약 체결로 바티칸 시국이 독립하면서 로마 문제는 해결되었고,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교회의 현대화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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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왕국군이 교황령의 수도 로마를 무력으로 점령한 로마 점령은 이탈리아 통일의 마지막 단계로, 이탈리아 왕국은 로마를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고 교황의 세속 통치를 종식시켰다. - 성좌의 대외 관계 - 아나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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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우파는 1849년 사르데냐 왕국 의회에서 시작된 이탈리아의 우익 정치 세력으로, 이탈리아 통일을 추구했으나 교회 관계 및 통일 방식에 대한 이견으로 분열되어 쇠퇴했고, 이탈리아 왕국 성립 후에는 균형 예산 정책을 추진하며 보수적 성향을 강화했으나 내부 분열과 지지 기반 약화로 정권을 잃은 후 자유 헌정당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자유 연합에 합류하며 소멸했다.
로마 문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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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문제 | |
분쟁 배경 | |
원인 | 이탈리아 왕국의 교황령 합병과 교황의 세속 권력 상실 |
주요 쟁점 | 교황의 지위와 권한, 교황령의 존속 여부, 교회 재산 문제 |
주요 사건 | |
1860년 | 이탈리아 왕국이 교황령 대부분을 합병 |
1870년 | 이탈리아 왕국이 로마를 점령하고 수도로 선포 |
1871년 | 이탈리아 정부, 교황에게 '보장법' 제안 (교황이 거부) |
1929년 | 이탈리아 왕국과 교황청 간 라테란 조약 체결, 바티칸 시국 건국으로 로마 문제 해결 |
관련 인물 | |
교황 | 비오 9세, 레오 13세, 비오 11세 |
이탈리아 왕국 국왕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움베르토 1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이탈리아 총리 | 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 베니토 무솔리니 |
결과 | |
교황의 세속 권력 종식 | 교황령 소멸, 교황은 바티칸 시국의 주권자로 지위 변경 |
라테란 조약 체결 | 이탈리아 왕국이 바티칸 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교황청에 대한 재정 지원 약속 |
영향 | |
이탈리아 정치 및 사회 | 가톨릭교회의 영향력 감소, 정교분리 원칙 확립 |
교황청 | 세속 권력 상실, 종교적 권위 강화 |
국제 관계 | 바티칸 시국의 독립으로 국제 사회의 새로운 주체 등장 |
2.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로마
1849년 로마 공화국이 교황령의 정부를 장악했으나, 프랑스 군대의 개입으로 교황 비오 9세가 권력을 회복하면서 로마 문제는 프랑스 내부 정치에서도 뜨겁게 논쟁되는 사안이 되었다.[2] 1859년 7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합의한 후, ''웨스트민스터 리뷰''의 "로마 문제"라는 기사에서는 교황령이 아드리아 해 연안 지역을 빼앗기고 로마 주변 영토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3] 이는 이듬해 현실이 되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교황령이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되고 로마가 수도로 선언되었으나, 나폴레옹 3세가 교황 비오 9세를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어 이탈리아 정부는 로마에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9월 협약 이후 정부는 토리노에서 피렌체로 이전했다. 교황은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로마에 대한 계획에 전적으로 반대했으며,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 교리가 선포되기도 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나폴레옹 3세는 로마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고, 이탈리아 정부는 세당 전투 이후 로마 점령을 결정했다.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교황에게 평화적 진입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교황은 이를 거부했다.[4]
라파엘레 카도르나 장군이 이끄는 이탈리아 군대는 로마로 진격하여 포르타 피아를 통해 입성했고, 로마와 라치오 지역은 주민투표 후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 3세는 20년 동안 로마의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했으며, 교황령 유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5]
2. 1. 로마 공화국 (1849)
1849년 2월 9일, 로마 공화국이 교황령의 정부를 장악했다. 그해 7월, 프랑스 군대의 개입으로 교황 비오 9세가 권력을 회복하면서 로마 문제는 프랑스 내부 정치에서도 뜨겁게 논쟁되는 사안이 되었다.[2] 같은 해 7월 3일, 주세페 가리발디의 로마 방위군은 자니콜로 언덕에서 루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게 항복하여, 로마 공화국은 단명으로 끝났다.2. 2. 이탈리아 왕국의 로마 수도 선언 (1861)
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의회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이탈리아 국왕으로 선포했고, 같은 해 3월 27일, 로마를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로 선언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가 교황 비오 9세를 보호하기 위해 크리스토프 레옹 루이 쥐쇼 드 라모리지에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수비대를 로마 공화국에 파견하여 주둔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정부는 로마에 들어갈 수 없었다.[4]2. 3. 아스프로몬테 전투 (1862)
1862년 8월 14일, 주세페 가리발디는 교황령이 이탈리아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프랑스가 보장한 것에 불만을 품고 아스프로몬테 전투를 일으켰지만, 이탈리아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2. 4. 9월 협약 (1864)
1864년 9월,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에 9월 협약이 체결되었다.[1] 이 협약은 로마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이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1]3. 교황령의 멸망과 로마 점령 (1870)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면서 나폴레옹 3세는 로마를 지키던 프랑스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다. 이는 이탈리아 왕국에게 교황령을 점령할 기회를 제공했다.[4]
프랑스 군대가 철수하자 이탈리아 내에서는 로마를 점령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이탈리아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교황 비오 9세에게 평화로운 로마 진입을 제안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교황은 이를 강하게 거절했다.[4]
결국 이탈리아 군대는 라파엘레 카도르나 장군의 지휘 아래 1870년 9월 11일 교황령 국경을 넘어 로마로 진격했다. 9월 19일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도달하여 로마를 포위했다. 비오 9세는 최소한의 저항만을 명령하여, 이탈리아의 로마 점령이 무력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9월 20일, 포르타 피아에서 성벽이 뚫린 후, 이탈리아 군대는 로마에 입성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군인 49명과 교황군 19명이 사망했다.[4] 이후 로마와 라치오 지역은 주민투표를 거쳐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이 사건으로 교황령은 멸망하고, 로마는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3. 1.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869-1870)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1869년 12월 8일부터 1870년 10월 20일까지 개최되었지만, 1870년 10월 보불전쟁이 발발하여 무기한 연기되었다.[1]3. 2. 로마 점령 (1870)
1870년 보불전쟁으로 교황령(752년-1870년)을 수호하던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이탈리아 왕국은 수상의 지휘 아래 교황령을 점령했습니다. [4] 이듬해 이탈리아 왕국은 로마로 수도를 옮겼습니다.[4]이탈리아 왕국군은 1870년 9월 11일 교황령 국경을 넘어 로마로 진격했고, 9월 19일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도달하여 도시를 포위했습니다.[4] 교황 비오 9세는 군대에 상징적인 저항만 하도록 명령하여, 이탈리아의 로마 점령이 무력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4] 9월 20일, 포르타 피아에서 성벽이 뚫린 후, 이탈리아 군대는 로마에 입성했습니다.[4]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군인 49명과 교황군 19명이 사망했습니다.[4] 이후 로마와 라치오 지역은 주민투표를 거쳐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습니다.[4]
같은 해 5월 13일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 보장법을 제정하여 교황의 지위를 보장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교황청은 가톨릭 교회가 특정 정치 권력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습니다. 교황 비오 9세는 이탈리아 정부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파문하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습니다.[4] 교황은 스스로를 "'''바티칸의 죄수'''" (1870년-1929년)라고 칭하며 이탈리아 왕국과의 관계를 단절했습니다.[4]
4. 바티칸의 죄수 (1870-1929)
1870년 보불 전쟁으로 교황령을 수호하던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령을 점령하고 이듬해 로마로 수도를 옮겼다. () 1871년 5월 13일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 보장법을 제정하여 교황의 지위를 보장하려 했다.
그러나 교황청은 가톨릭 교회가 특정 정치 권력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교황 비오 9세는 이탈리아 정부에 관여하는 자 모두를 파문하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교황 측은 이탈리아 왕국에 거부와 국정 불참을 호소했고, 이탈리아 왕국과 로마 교황의 대립으로 둘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교황은 스스로를 "'''바티칸의 죄수'''" (1870년 - 1929년)라고 칭했다.[9]
4. 1. 교황 보장법 (1871)
1871년 5월 13일 이탈리아 의회는 교황 보장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교황에게 이탈리아 왕과 유사한 특권과 영예를 부여했다. 여기에는 대사를 파견하고 받을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되었으며, 대사는 완전한 외교 면책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6] 이 법은 통일 이후 교황과의 적대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제정되었지만,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반성직자 정치인, 특히 좌파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동시에 이 법은 이탈리아 의회가 언제든지 수정하거나 폐지할 수 있는 법률에 교황청을 종속시켰다.교황 비오 9세와 그의 후임자들은 이탈리아 왕이 과거 교황령을 다스릴 권리나 이탈리아 정부가 교황의 특권을 결정하고 법을 제정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7] 성좌는 영적 관할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 어떠한 정치 권력으로부터도 명백히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며, 교황이 단순히 "이탈리아 왕의 채플린"으로 보이면 안 된다고 주장하며,[8] 비오 9세는 교황에게 연간 금전 지급을 제안하는 교황 보장법을 거부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교황의 이탈리아 국내외에서의 절대적인 이동의 자유를 거듭 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들은 바티칸의 벽 밖으로 발을 들이는 것을 거부했고,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세력의 보호를 받았다. 이는 변화된 상황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그 결과, "바티칸의 죄수"라는 묘사가 그들에게 적용되었고,[9] 1929년 라테란 조약이 바티칸 시국을 파시스트 정권하의 이탈리아로부터 독립된 국가로 설립함으로써 로마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4. 2. 검은 귀족
이탈리아 왕국이 아닌 성좌에 충성한 귀족들은 상복을 입은 것으로 여겨져 검은 귀족으로 알려졌다.[9]4. 3. 로마 탈출 계획
교황 비오 9세는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로마를 떠나 망명하는 것을 고려했다. 1848년 11월 재무 장관 펠레그리노 로시 백작 암살 사건 이후 변장을 하고 로마를 탈출하기도 했다.[10] 1862년 주세페 가리발디가 "로마 아니면 죽음"이라는 슬로건 아래 로마 점령을 위한 캠페인을 벌일 때, 비오 9세는 오도 러셀 경에게 이탈리아 군대가 진격할 경우 영국에서 정치적 망명을 허가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다. 오도 러셀 경은 필요하다면 망명을 허가하겠다고 확언했지만, 교황의 두려움은 근거가 없다고 확신시켰다.[10]로마 점령과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중단 이후에도 교황의 로마 탈출 소문이 돌았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율리우스 헤르만 모리츠 부쉬에게 교황 비오 9세가 망명을 요청해 왔으며, 자신은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11] 그러나 빌헬름 1세, 독일 황제는 프로이센이 가톨릭화될 것을 우려하여 동의하지 않았다.[11]
교황이 로마를 떠날 것이라는 소문은 몰타, 트렌토 등 구체적인 장소까지 언급되며 계속 퍼졌다.[12] 이러한 소문의 배경에는 바티칸이 보증법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유럽에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추정된다.[12]
하지만 비오 9세는 교황의 측근인 돈 보스코의 예언적인 조언에 따라 바티칸에 머물기로 결정했다.[14] 그는 스스로를 "바티칸의 죄수"라 칭하며 이탈리아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의 후임자들도 라테란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같은 입장을 유지했다.
5. 라테란 조약과 바티칸 시국 독립 (1929)
1929년 라테란 조약을 통해 로마 문제가 해결되었다. 교황청은 이전 교황령에 대한 이탈리아의 주권을 인정했고, 이탈리아는 바티칸 시국에 대한 교황의 주권을 인정했다. 교황청은 교황령 손실과 이탈리아 국가에 의해 몰수된 교회 재산에 대한 배상 요구를 보장법에 따라 지급되었을 금액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제한했다.[15] 이 조약으로 이탈리아 통일 운동 이후 이탈리아 왕국과 로마 교황청의 관계가 개선되고 바티칸 시국이 독립하게 되었다.
5. 1. 라테란 조약 (1929)
1929년 라테란 조약을 통해 로마 문제가 해결되었다. 교황청은 이전 교황령에 대한 이탈리아의 주권을 인정했고, 이탈리아는 바티칸 시국에 대한 교황의 주권을 인정했다.[15] 교황청은 교황령 손실과 이탈리아 국가에 의해 몰수된 교회 재산에 대한 배상 요구를 보장법에 따라 지급되었을 금액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제한했다.[15] 이 조약으로 이탈리아 왕국과 로마 교황청의 관계가 개선되고 바티칸 시국이 독립하게 되었다.5.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1965)
1962년, 90년 만에 무기 연기되었던 회의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재개되었다.6. 로마 문제의 영향과 현대적 의의
역사 소설 ''파비올라''와 ''쿼바디스''는 새롭게 형성된 이탈리아 왕국이 교황을 대하는 방식을 로마 제국의 초기 기독교 박해와 비교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16]
참조
[1]
서적
Washington University Studies: New series, Language and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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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hingto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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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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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été éditrice l'Union
2015-02-22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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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Text of the Lateran Treaty of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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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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