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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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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1820년에 태어나 1878년에 사망한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이자 초대 이탈리아 국왕이다. 그는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 참전했으며, 1849년 아버지의 퇴위로 사르데냐 왕국 왕위에 올랐다. 카밀로 카부르 백작을 총리로 임명하여 이탈리아 통일 운동인 리소르지멘토를 이끌었다. 크림 전쟁 참전을 통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과 남부 이탈리아 합병을 통해 이탈리아 왕국을 수립했다. 1861년 이탈리아 국왕으로 선포되었으며, 로마 점령을 통해 이탈리아 통일을 완성했다. 그는 여러 정부를 두었고, 말년에는 입헌 의회의 감독을 받으며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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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로마자 표기Vittorio Emanuele II
전체 이름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마리아 알베르토 에우제니오 페르디난도 토마소
별칭피에몬테 공
사보이아 공
출생일1820년 3월 14일
출생지사르데냐 왕국, 토리노, 카리냐노 궁
사망일1878년 1월 9일
사망지이탈리아 왕국, 로마, 퀴리날레 궁
매장일판테온
매장지이탈리아 왕국, 로마, 판테온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후에 파문)
서명
아버지카를로 알베르토 디 사보이아
어머니마리아 테레지아 다즈부르고-토스카나
통치 정보
작위사르데냐 국왕
이탈리아 국왕
사르데냐 왕 즉위일1849년 7월 28일
사르데냐 왕 퇴위일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왕 즉위일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왕 퇴위일1878년 1월 9일
선임 사르데냐 왕카를로 알베르토
후임 사르데냐 왕(폐지)
선임 이탈리아 왕(신설)
후임 이탈리아 왕움베르토 1세
사르데냐 왕 재위 기간1849년 3월 23일 ~ 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왕 재위 기간1861년 3월 17일 ~ 1878년 1월 9일
사르데냐 왕국의 총리아고스티노 키오도
클라우디오 가브리엘 데 라우나이
마시모 다젤리오
카밀로 카보우르
알폰소 페레로 라 마르모라
이탈리아 왕국의 총리카밀로 카보우르
베티노 리카솔리
우르바노 라타치
루이지 카를로 파리니
마르코 민게티
알폰소 페레로 라 마르모라
루이지 페데리코 메나브레아
조반니 란차
아고스티노 데프레티스
왕가사보이아 가문
가족 정보
배우자아델라이트 다즈부르고-로레나 (1842년 결혼, 1855년 사망)
로사 베르첼라나 (1869년 결혼, 귀천상혼)
자녀마리아 클로틸데
움베르토 1세
아마데오 1세
오도네 에우제니오 마리아
마리아 피아
왕실가사보이아 가문
기타
별칭조국의 아버지
슬로건VERDI

2. 생애

1850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배경에 전투 장면이 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초상화 (1848)


샤를 알베르 2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아버지


마리아 테레사 폰 에스터라이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어머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카리냐노 공 카를로 알베르토와 마리아 테레지아 폰 에스터라이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831년 먼 친척의 뒤를 이어 사르데냐 왕국 왕이 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 몇 년 동안 피렌체에서 살았으며 정치, 군사, 스포츠에 일찍부터 관심을 보였다. 1842년에는 사촌인 아델라이데 폰 에스터라이히와 결혼했다. 그는 사르데냐 왕이 되기 전에 "사보이 공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는 아버지인 샤를 알베르토 국왕 휘하에서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1848~1849년)에 참전하여 파스트렌고, 산타 루치아, 고이토, 쿠스토차 전투에서 최전선에서 싸웠다.

그는 아버지가 노바라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패한 후 퇴위하면서 1849년 사르데냐 국왕이 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즉시 오스트리아 제국군 사령관인 라데츠키로부터 비교적 유리한 휴전 협정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 조약은 피에몬테의 하원인 대의원회에서 비준되지 않았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클라우디오 가브리엘레 드 라우나이 총리를 해임하고 마시모 다제글리오로 대체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새로운 선거 후, 새로운 대의원회는 오스트리아와의 평화를 수락했다. 1849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제노바의 반란을 격렬하게 진압하여 반란군을 "비열하고 감염된 깡패 무리"로 규정했다.

1852년 그는 카부르 백작을 피에몬테-사르데냐의 총리로 임명했다. 카부르는 정치적 거장이자 이탈리아 통일에서 주요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현명한 선택으로 판명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곧 1850년대와 60년대 초 이탈리아 통일 운동인 "리스오르지멘토"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헌법과 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존중 때문에 특히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에서 인기가 많았다.

카를로 펠리체 비스카라가 그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초상화

2. 1. 어린 시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1820년 3월 14일 토리노에서 사보이아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다.[21] 그의 아버지 카를로 알베르토는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 출신으로, 살리카 법에 따라 1831년 사르데냐 왕위에 올랐다.[21] 어린 시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페르디난도 3세 밑에서 성장했다.

1842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사촌인 마리아 아델라이데와 결혼했다. 그녀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롬바르디아-베네토 총독라니에리(라이너 요제프) 대공의 딸이었다.

2. 2. 즉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1849년 3월 23일 아버지 카를로 알베르토가 노바라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패배한 후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했다.[21]

노바라 전투


1848년 혁명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정통주의 질서로 지배되던 유럽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특히 오스트리아 제국과 같은 다민족 국가에 큰 영향을 주었고, 롬바르디아-베네토 왕국에서 반오스트리아, 반합스부르크 가문 반란이 일어났다. 밀라노 전투를 통해 밀라노베네치아를 장악한 반란군은 주세페 가리발디도 참여하여 제국으로부터의 분리와 이탈리아 통치를 요구했다.

사르데냐 왕 카를로 알베르토는 반란군에 대한 공개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군대를 파병했고,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왕세자로서 파스트렌고 전투파스트렌고 전투/Battaglia di Pastrengoit와 고이토 전투고이토 전투/Battle of Goito영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밀라노에 입성했다. 하지만 카를로 알베르토는 공화주의 반란군을 의심하여 연합을 거부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으로 쿠스토차 전투에서 사르데냐 군은 패배하고 밀라노로 후퇴했다. 노바라 전투, 브레시아 전투, 베네치아 전투에서 반란군과 사르데냐 군은 각개격파 당하는 비극을 맞이했다.

전쟁 후, 카를로 알베르토는 퇴위하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에게 왕위를 양위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왕국을 이끌게 되었다.[21]

2. 3. 크림 전쟁 참전

1852년 카밀로 디 카보우르가 사르데냐 왕국의 수상에 취임하였다.[22] 카보우르는 사르데냐 왕국 단독으로 이탈리아 통일을 추진하기에는 왕국의 힘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영국이나 프랑스를 끌어들여 이탈리아 반도에서 오스트리아 세력을 몰아내려 하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조언에 따라 카부르는 크림 전쟁에 영국, 프랑스와 함께 참전했다.[23] 당시 러시아의 강대함과 전쟁 비용 때문에 카부르는 전쟁을 꺼렸다. 그러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영국, 그리고 무엇보다 프랑스와의 동맹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크림 전쟁을 위한 군대를 사열하다.


사르데냐 왕국은 영국과 프랑스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1만 5천 명의 원정군을 크림 전쟁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사르데냐 왕국군은 가장 치열한 전투 지역이었던 세바스토폴 요새에 대한 총공격에 투입되었고, 세바스토폴 공방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인 1856년 파리 조약에서 영국의 지지를 얻고 프랑스와 나폴레옹 3세와 좋은 관계를 맺은 카부르 백작은 프랑스 황제와 비밀 회담을 주선했다. 1858년, 그들은 플롬비에르레방(Plombières-les-Bains)(로렌)에서 만나 프랑스가 여전히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Kingdom of Lombardy–Venetia)을 지배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피에몬테의 전쟁을 지원하면 프랑스가 니스(Nice)와 사보이(Savoy)를 할양받는다는 데 합의했다.

3. 이탈리아 통일 전쟁

1859년,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공동작전은 성공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전쟁 희생자와 프로이센 군대의 동원에 대한 우려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빌라프랑카에서 비밀리에 조약을 맺어 피에몬테는 롬바르디아만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약속받았던 니스와 사보이아를 얻지 못했고,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를 유지하게 되어 피에몬테에게는 큰 좌절이었다. 이 조약은 피에몬테의 사전 동의 없이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전쟁 결과에 대한 여러 논쟁 후 카보우르는 사임했고, 국왕은 다른 고문을 찾아야 했다. 프랑스는 카부르가 총리로 복귀한 후 1860년 3월 토리노 조약이 체결되고 중부 이탈리아 공국에서 국민투표가 이루어지기로 프랑스와 합의가 이루어진 후에야 니스와 사보이를 얻었다.

같은 해 후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카스텔피다르도 전투에서 교황군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교황을 바티칸 시국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성공은 그를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하게 했으나, 1878년 사망 직전 해제되었다. 그 후 주세페 가리발디시칠리아나폴리를 정복했고, 피에몬테-사르디니아 왕국은 더욱 커졌다. 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왕국이 공식적으로 수립되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국왕이 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주세페 가리발디의 천 명의 원정 (1860-1861)을 지원했는데, 이는 이탈리아 남부의 두 시칠리아 왕국의 급속한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국왕은 가리발디가 프랑스의 보호를 받고 있는 교황령 아래 여전히 있는 로마를 공격할 준비가 된 것으로 보이자 그를 저지했다. 1860년, 지역 국민투표를 통해 토스카나, 모데나, 파르마, 로마냐는 피에몬테-사르디니아 왕국에 편입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교황군을 상대로 승리한 카스텔피다르도 전투 (1860) 후 마르케와 움브리아를 성공적으로 진군했다.

그 후 국왕은 테아노에서 가리발디를 만나 이탈리아 남부의 통제권을 받았다. 점령지에서 일련의 국민투표가 이어진 결과, 1861년 3월 17일, 통일된 이탈리아의 새로운 의회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가 초대 이탈리아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왕위를 계승한 후에도 자신의 칭호를 변경하지 않았다. 토리노가 새 국가의 수도가 되었다. 라치오, 베네토, 트렌티노만이 정복될 일이 남았다.

1859년, 완벽한 준비를 갖춘 사르데냐 왕국 군대는 마침내 11년 전의 복수를 위해 행동을 개시하여, 총동원령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자극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총동원령을 발동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 개시 당시 사르데냐군 7만 명에 대해 오스트리아군은 24만 명을 넘었고, 프랑스가 이전의 비밀 협약에 따라 15만 명의 원군을 보냈어도 여전히 양군을 웃도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증원에 혼란에 빠진 오스트리아군은 몬테벨로 전투에서 수적 우세를 살리지 못하고 패퇴했고, 더 나아가 가리발디 등 공화파 의용병이 알프스 사냥꾼Hunters of the Alps영어을 결성하자 오스트리아군은 바레세 전투Battle of Varese영어에서 그들에게도 패했다. 기세를 탄 사르데냐-프랑스 연합군은 오스트리아군을 사르데냐 국경에서 몰아낸 후 롬바르디아 평정을 건 전투에 임했다.

솔페리노 전투에서 사르데냐-프랑스 연합군은 격전 끝에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고, 오스트리아군은 롬바르디아에서 패주했다.

솔페리노 전투
환희에 찬 사르데냐군이었지만, 예상 이상의 전과와 자군 손실에 놀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롬바르디아만 사르데냐에 할양하는 형태로 전쟁을 끝내려고 단독 협상을 시작했다. 1860년 3월, 어쩔 수 없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토리노 조약Treaty of Turin영어을 체결하여 프랑스를 경유하는 형태로 롬바르디아 영유를 오스트리아에 인정시키는 것을 우선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정 위반으로 니스와 사보이아 할양을 프랑스로부터 취소하는 데에도 성공했고, 또한 이 프랑스의 배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행위에 의해 이탈리아 통일의 기운이 높아져, 그때까지 사르데냐 왕국에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던 중부의 파르마 공국, 모데나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이 주민 투표 결과 사르데냐 왕국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사르데냐 왕국은 교황령 레가치오네 지역을 점령하여 앞선 3개 공국과 합쳐 중부 이탈리아 통합주를 설립하는 등 대가를 얻었다.

후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니스와 사보이아 할양 이행을 조건으로 중부 이탈리아 연방의 합병을 프랑스에 승인받아 중부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합병했다. 베네토 영유는 되지 않았지만, 사르데냐 왕국은 크게 영토를 확장하여 이탈리아 지역의 3분의 1을 지배하는 강국으로 존재감을 더해갔다. 이탈리아 통일은 눈앞에 다가왔지만, 교황령의 잔여 지역과 두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처리를 둘러싸고 국내는 대립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결론을 내리기 전에 행동을 취한 것이 가리발디였다. 그는 알프스 사냥꾼의 일부를 재편성하여 적십자군을 창설하고 두 시칠리아의 농민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해 시칠리아 섬으로 밀항했다.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두 시칠리아군을 몰아내고 농민 반란군을 통합한 가리발디는 시칠리아 전역을 점령하고 "시칠리아의 민정관" 취임을 선언했다. 그대로 본토로 진입한 가리발디군이 수도 나폴리에 입성할 기세를 보이자, 공화 세력의 확장을 두려워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자신도 두 시칠리아로의 진군을 결심했다. 그 과정에서 교황령은 로마를 제외하고 모두 몰수되었기 때문에 교황으로부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파문을 받았지만, 이제 교회의 파문으로는 정세를 움직일 만한 힘이 없었다.

교황령 몰수를 마치고 두 시칠리아군과의 결전에 임하여 가리발디군과 함께 이를 격파하고 두 시칠리아 왕국을 멸망시켰다. 사실상 베네토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이탈리아 지배자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공화파와 왕당파라는 대립의 재연이 우려되었다. 사르데냐군과 가리발디군이 대치하는 가운데, 테아노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가리발디와의 면담에 응했다. 가리발디는 알현 자리에서 "여기에 이탈리아의 왕이 계신다!"라고 선언하고 모든 영토를 사르데냐 왕국에 헌상했다(Incontro tra Giuseppe Garibaldi e Vittorio Emanuele IIit). 가리발디의 결단으로 최악의 상황은 피해지고, 베네토와 로마를 제외한 이탈리아의 대부분이 통합되었다.

1861년 2월 18일, 사르데냐 왕국의 수도 토리노에서 제1회 이탈리아 국민 의회가 열리고, 한자리에 모인 유력 귀족들과 정치가들은 만장일치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이탈리아 국왕 즉위를 승인했다(이탈리아 왕국). 왕국의 수도는 투표에 의해 피렌체로 결정되었다.

3. 1.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1858년 여름, 카보우르는 나폴레옹 3세를 방문하여 플롱비에르 밀약을 맺었다. 이 밀약을 통해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기로 합의했다.[24] 사르데냐 왕국은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획득하고, 프랑스는 니스와 사보이아를 할양받기로 하였다.[24]

1859년 3월, 사르데냐 왕국은 동원령을 선포했고, 오스트리아는 이를 사르데냐 왕국이 군대를 해산할 것을 요구했지만, 사르데냐 왕국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로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마젠타 전투에서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이 승리했고,[24] 나폴레옹 3세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밀라노에 입성했다.[24] 솔페리노 전투에서 사르데냐-프랑스 연합군은 격전 끝에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전쟁 희생자와 프로이센 군대의 동원에 대한 우려로, 나폴레옹 3세는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빌라프랑카에서 비밀리에 조약을 체결하여 롬바르디아만 획득하게 되었다.[24][25]

1860년 3월, 토리노 조약을 체결하여 니스와 사보이를 프랑스에 할양하고, 중부 이탈리아 공국들의 합병을 승인받았다. 같은 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카스텔피다르도 전투에서 교황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교황을 바티칸 시국으로 몰아넣었다.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그 후, 주세페 가리발디시칠리아나폴리를 정복하면서, 테아노에서 가리발디를 만나 이탈리아 남부의 통제권을 받았다. thumb에서 주세페 가리발디를 만나는 모습.]] 가리발디는 "여기에 이탈리아의 왕이 계신다!"라고 선언하고 모든 영토를 사르데냐 왕국에 헌상했다.

1861년 3월 17일, 통일된 이탈리아의 새로운 의회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초대 이탈리아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3. 2. 남부 이탈리아 합병

1860년 주세페 가리발디는 천 명의 원정을 통해 시칠리아 섬과 나폴리를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리발디는 적십자군을 창설하고 두 시칠리아의 농민 반란군을 지원하며 시칠리아 전역을 점령, "시칠리아의 민정관" 취임을 선언했다. 가리발디의 비정규군 25,000여 명은 볼투르노강을 끼고 방어하던 나폴리 군대를 몰아내고 카푸아가에타의 요새를 점령하려 했으나, 사르데냐 군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교황령을 침공하여 움브리아와 마르케를 점령했다. 그는 카스텔피다르도 전투에서 교황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교황을 바티칸 시국으로 몰아넣었고, 이로 인해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이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테아노에서 가리발디를 만나 이탈리아 남부의 통치권을 넘겨받았다. 가리발디는 "여기에 이탈리아의 왕이 계신다!"라고 선언하며 모든 영토를 사르데냐 왕국에 헌상했다.
테아노의 악수


1861년 3월 17일, 토리노에서 열린 이탈리아 의회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선포했다. 수도는 토리노였으며, 이후 피렌체를 거쳐 1871년 로마로 천도했다.

3. 3.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발발하자, 이탈리아 왕국은 베네치아를 획득할 기회를 얻기 위해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다.[26] 이탈리아와 프로이센은 6월 20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탈리아 왕국군은 쿠스토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패배하였고,[26] 리사 해전에서도 해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의 승리로 인해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에게 베네치아를 양도하도록 강요하였고, 10월 12일 베네치아가 이탈리아에 양도되었다.[26]

이후 10월 21일22일에 걸쳐 베네치아에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는데, 투표 결과 64만 2천표 중 69표(0.01%)만이 합병에 반대하여 압도적인 찬성으로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이 결정되었다.[26][27]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 투표가 군사적 압력하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한다.[26]

3. 4. 로마 점령과 통일 완성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로마에서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다. 이 기회를 틈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로마 점령을 결정했다.[2]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군은 로마에 입성했고, 이로써 이탈리아 통일은 완성되었다.[2] 1864년 피렌체로 임시 수도를 옮긴 후, 1871년 7월 2일 로마를 새로운 수도로 정했다. 새로운 왕궁은 퀴리날레 궁전이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은 이탈리아는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을 통해 베네치아를 획득했다.[26] 이탈리아 전선에서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독일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하면서 베네토를 얻게 되었다. 1866년 베네토 주민투표를 통해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이 투표가 군사적 압력하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시사한다.[26] 64만 2천 표 중 69표(0.01%)만이 합병에 반대했기 때문이다.[27]

4. 통일 이후의 통치

에마누엘레 2세의 말년 통치는 입헌 의회의 감독 등 비교적 온화하고 조용한 것이 되었다. 전 부인의 사망 후에는 로자 테레자 베르체라나 구엘리에리라는 애첩과 동거하여 사생자 에마누엘레 알베르토를 낳았으며, 알베르토에게는 미라피오리 및 폰타나프레다 백작의 칭호와 영지를 하사하였다.

피우스 9세는 왕에 대한 파문은 죽기 직전에만 취소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에마누엘레 2세가 위독해지자 교황은 성사를 주기 위해 고위 성직자를 보냈다. 그러나 오랜 숙원으로 교황에 대한 불신감을 강하게 품게 된 에마누엘레 2세는 이 성직자로부터 성사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선정한 성직자로부터 성사를 받고 죽음을 맞이했다. 1878년, 57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에 막을 내렸고, 유해는 고대 로마 시대 다신교 신앙의 중심지였던 로마 시내 판테온(만신전)에 매장되었다.

판테온에 매장된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대립으로 인해, 1148년에 서거한 아메데오 3세 시대부터 사보이아 가문이 매장지로 삼아 온 오토콤브 수도원에 정식으로 매장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왕자 움베르토 1세가 아버지에 대한 배려로 생각해낸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야훼나 예수 밑에 묻힌 역대 당주와 달리, 파문당한 이단자인 에마누엘레 2세는 그들과 동등한 ''''''으로서 성대한 의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리스토리멘토가 신화화되는 과정에서 민중 사이에서도 에마누엘레 2세의 묘소를 참배하는 등 민간 신앙화의 움직임도 보였다.

1911년, 로마 중심부에 에마누엘레 2세를 기리는 성당(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알타레 델라 파트리아)이 건설되었고, 에마누엘레 2세에게는 della Patriait (국부)의 칭호가 추증되었다.

4. 1. 통일 이후의 과제와 정책

4. 2.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

4. 3. 말년과 죽음

에마누엘레 2세의 말년 통치는 입헌 의회의 감독 등 비교적 온화하고 조용한 것이 되었다. 전 부인의 사망 후에는 로자 테레사 베르체라나 구엘리에리라는 애첩과 동거하여 사생아 에마누엘레 알베르토를 낳았고, 그에게 미라피오리 및 폰타나프레다 백작의 칭호와 영지를 하사하였다.

교황 피우스 9세는 왕에 대한 파문은 죽기 직전에만 취소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에마누엘레 2세가 위독해지자 교황은 성사를 주기 위해 고위 성직자를 보냈다. 그러나 오랜 숙원으로 교황에 대한 불신감을 강하게 품게 된 에마누엘레 2세는 이 성직자로부터 성사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선정한 성직자로부터 성사를 받고 죽음을 맞이했다. 1878년, 57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에 막을 내렸고, 유해는 고대 로마 시대 다신교 신앙의 중심지였던 로마 시내 판테온(만신전)에 매장되었다.

판테온에 매장된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대립으로 인해, 1148년에 서거한 아메데오 3세 시대부터 사보이아 가문이 매장지로 삼아 온 오토콤브 수도원에 정식으로 매장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왕자 움베르토 1세가 아버지에 대한 배려로 생각해낸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야훼나 예수 밑에 묻힌 역대 당주와 달리, 파문당한 이단자인 에마누엘레 2세는 그들과 동등한 ''''''으로서 성대한 의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리스토리멘토가 신화화되는 과정에서 민중 사이에서도 에마누엘레 2세의 묘소를 참배하는 등 민간 신앙화의 움직임도 보였다.

1911년, 로마 중심부에 에마누엘레 2세를 기리는 성당(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알타레 델라 파트리아)이 건설되었고, 에마누엘레 2세에게는 델라 파트리아/della Patriait (국부)의 칭호가 추증되었다.

5. 유산과 평가

5. 1. 긍정적 평가

5. 2. 부정적 평가

5. 3. 현대적 의의

6. 가족 관계

1842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자신의 사촌 누이동생인 오스트리아의 아델라이데와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다.[4]

사진이름생일사망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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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클로틸데1843년 3월 2일1911년 6월 25일 (68세)나폴레옹 조제프(나폴레옹 왕자)와 결혼. 그들의 손자인 루이 나폴레옹 왕자는 보나파르트 왕가의 프랑스 제국 황위 계승자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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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1844년 3월 14일1900년 7월 29일 (56세)이후 이탈리아 국왕이 됨. 자신의 사촌인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와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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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오1845년 5월 30일1890년 1월 18일 (44세)이후 스페인 국왕이 됨. 마리아 비토리아 달 포초와 결혼했다가 이후 마리아 레티치아 보나파르트와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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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네 에우제니오 마리아1846년 7월 11일1866년 1월 22일 (19세)몬페라토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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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피아1847년 10월 16일1911년 7월 5일 (63세)포르투갈의 루이 국왕과 결혼.
카를로 알베르토1851년 6월 2일1854년 6월 28일 (3세)샤블레 공작, 유년기에 사망.
비토리오 에마누엘레1852년 7월 6일1852년 7월 6일유아기에 사망.
비토리오 에마누엘레1855년 1월 18일1855년 5월 17일제네바 백작, 유아기에 사망.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애인 로사 베르첼라나,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1869년 그는 그의 정부였던 로사 베르첼라나와 모르가나틱 결혼을 했다. 피에몬테어로 "벨라 로신"으로 알려진 그녀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1858년 미라피오리와 폰타나프레다 백작 부인이 되었다. 그들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

  • 비토리아 게리에리(1848년 12월 2일~1905년 12월 29일): 자코모 스피놀라, 루이지 스피놀라, 파올로 데시모네와 세 번 결혼했다.
  • 에마누엘레 알베르토 게리에리(1851년 3월 16일~1894년 12월 24일): 미라피오리와 폰타나프레다 백작.


브루클린 미술관 – 빅토르 에마뉘엘 2세 풍자화 – 토마스 나스트


모르가나틱 결혼을 한 두 번째 부인 외에도, 빅토르 에마뉘엘 2세는 여러 정부를 두었다.

1) 스투피니지의 라우라 본: 그녀와 사이에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 사산아(1852~1852).
  • 에마누엘라 디 로베르벨라(1853년 9월 6일~1896년).


2) 비토리아 두플레시 남작 부인: 그녀와 사이에 한 명의 딸을 두었다.

  • 마리아 사보이아르다 프로제티(1854~1885/1888).


3) 몬도비의 알려지지 않은 정부:

다음 자녀의 어머니이다.

  • 도나토 에트나(1858년 6월 15일~1938년 12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인이 되었다.


4) 토리노의 비르지니아 로: 두 명의 자녀의 어머니이다.

  • 비토리오 디 로(1861~1913년 10월 10일 토리노): 저명한 사진가가 되었다.
  • 마리아 피아 디 로(1866년 2월 25일~1947년 4월 19일 빈): 알레산드로 몬테쿠콜리 백작과 결혼했다.


5) 로살린다 인코로나타 데 도메니치스(1846~1916년): 한 명의 딸의 어머니이다.

  • 비토리아 데 도메니치스(1869~1935년): 알베르토 베네데티 박사(1870~1920년)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6) 안젤라 로사 데 필리포: 다음 자녀의 어머니이다.

  • 배우 도메니코 스카르페타(1876~1952년)

6. 1. 배우자

1842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자신의 사촌 누이동생인 오스트리아의 아델라이데와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다.[4] 마리아 클로틸데는 나폴레옹 조제프와 결혼했고, 그들의 손자인 루이 나폴레옹 왕자는 보나파르트 왕가의 프랑스 제국 황위 계승자였다. 움베르토는 이후 이탈리아 국왕이 되었으며,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와 결혼했다. 아마데오는 이후 스페인 국왕이 되었고, 마리아 비토리아 달 포초와 결혼했다가 이후 마리아 레티치아 보나파르트와 결혼했다. 오도네 에우제니오 마리아는 몬페라토 공작이었다. 마리아 피아는 포르투갈의 루이 국왕과 결혼했다. 샤블레 공작 카를로 알베르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제네바 백작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모두 유년기에 사망했다.

1869년에는 정부였던 로사 베르첼라나와 모르가나틱 결혼을 했다.[4] 그녀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1858년 미라피오리와 폰타나프레다 백작 부인이 되었다. 비토리아 게리에리는 세 번 결혼했고, 에마누엘레 알베르토 게리에리는 미라피오리와 폰타나프레다 백작이었다.

그는 모르가나틱 결혼을 한 두 번째 부인 외에도, 여러 정부를 두었다. 라우라 본과의 사이에서는 사산아와 에마누엘라 디 로베르벨라를 낳았다. 비토리아 두플레시 남작 부인과의 사이에서는 마리아 사보이아르다 프로제티를, 몬도비의 알려지지 않은 정부에게서는 도나토 에트나를 낳았다. 토리노의 비르지니아 로에게서는 저명한 사진가가 된 비토리오 디 로와 알레산드로 몬테쿠콜리 백작과 결혼한 마리아 피아 디 로를 낳았다. 로살린다 인코로나타 데 도메니치스와의 사이에서는 비토리아 데 도메니치스를, 안젤라 로사 데 필리포에게서는 배우 도메니코 스카르페타를 낳았다.

6. 2. 자녀

1842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고종사촌 겸 오촌 당이모인 아델라이트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과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다.[4]

사진이름생일사망기타
|120px]]마리아 클로틸데1843년 3월 2일1911년 6월 25일 (68세)나폴레옹 조제프 샤를 폴 보나파르트와 결혼, 2남 1녀. 루이 나폴레옹 왕자는 보나파르트 왕가의 프랑스 제국 황위 계승자였다.
|120px]]움베르토 1세1844년 3월 14일1900년 7월 29일 (56세)후임 이탈리아 국왕.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와 결혼하여 슬하 1남을 두었다.
|120px]]아마데오 1세1845년 5월 30일1890년 1월 18일 (44세)스페인 국왕. 마리아 비토리아 달 포초와 결혼했다가 이후 마리아 레티치아 보나파르트와 결혼하여 4남을 두었다.
|120px]]오도네 에우제니오 마리아 디 사보이아1846년 7월 11일1866년 1월 22일 (19세)몬페라토 공작. 요절.
|120px]]마리아 피아 디 사보이아 왕녀1847년 10월 16일1911년 7월 5일 (63세)포르투갈 루이스 1세와 결혼. 슬하 2남.
카를로 알베르토1851년 6월 2일1854년 6월 28일 (3세)샤블레 공작. 요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1852년 7월 6일1852년 7월 6일요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1855년 1월 18일1855년 5월 17일제네바 백작. 요절.



1869년에는 정부였던 로사 베르첼라나와 모르가나틱 결혼을 했다. 그녀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1858년 미라피오리와 폰타나프레다 백작 부인이 되었으며, 그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녀가 있었다.


  • 비토리아 게리에리(1848년 12월 2일~1905년 12월 29일): 자코모 스피놀라, 루이지 스피놀라, 파올로 데시모네와 세 번 결혼했다.
  • 에마누엘레 알베르토 게리에리(1851년 3월 16일~1894년 12월 24일): 미라피오리와 폰타나프레다 백작.


그 외에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여러 정부를 두었으며, 그들은 다음과 같다.

  • 스투피니지의 라우라 본: 사생아(1852~1852)와 에마누엘라 디 로베르벨라(1853년 9월 6일~1896년)를 낳았다.
  • 비토리아 두플레시 남작 부인: 마리아 사보이아르다 프로제티(1854~1885/1888)를 낳았다.
  • 몬도비의 알려지지 않은 정부: 도나토 에트나(1858년 6월 15일~1938년 12월 11일)의 어머니이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인이 되었다.
  • 토리노의 비르지니아 로: 비토리오 디 로(1861~1913년 10월 10일 토리노): 저명한 사진가)와 마리아 피아 디 로(1866년 2월 25일~1947년 4월 19일 빈)를 낳았다. 마리아 피아는 알레산드로 몬테쿠콜리 백작과 결혼했다.
  • 로살린다 인코로나타 데 도메니치스(1846~1916년): 비토리아 데 도메니치스(1869~1935년)를 낳았으며, 그녀는 알베르토 베네데티 박사(1870~1920년)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안젤라 로사 데 필리포: 배우 도메니코 스카르페타(1876~1952년)를 낳았다.

6. 3. 정부

오스트리아의 아델라이데(1822~1855)와 1842년에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다.[4] 마리아 클로틸데는 나폴레옹 조제프와 결혼했고, 움베르토는 이후 이탈리아 국왕이 되었으며,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와 결혼했다. 아마데오는 이후 스페인 국왕이 되었고, 마리아 비토리아 달 포초, 마리아 레티치아 보나파르트와 결혼했다. 오도네 에우제니오 마리아는 몬페라토 공작이었고, 마리아 피아는 포르투갈의 루이 국왕과 결혼했다. 카를로 알베르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1852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1855년)는 유년기에 사망했다.

1869년에는 정부였던 로사 베르첼라나와 모르가나틱 결혼을 했다. 그녀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1858년 미라피오리와 폰타나프레다 백작 부인이 되었다. 그들 사이에는 비토리아 게리에리와 에마누엘레 알베르토 게리에리가 있었다.

그는 여러 정부를 두었는데, 스투피니지의 로라 본은 사산아와 에마누엘라 디 로베르벨라를 낳았다. 비토리아 두플레시 남작 부인은 마리아 사보이아르다 프로제티를 낳았다. 몬도비의 알려지지 않은 정부는 도나토 에트나를 낳았다. 토리노의 비르지니아 로는 비토리오 디 로와 마리아 피아 디 로를 낳았다. 로살린다 인코로나타 데 도메니치스는 비토리아 데 도메니치스를, 안젤라 로사 데 필리포는 배우 도메니코 스카르페타를 낳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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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Italy and its Monarchy Yale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Excommunicating Politicians https://www.americam[...] 2004-09-27
[4] 웹사이트 Savoia http://www.sardimpex[...] 2023-09-00 #Dead Link이므로 날짜만 기록
[5] 서적 Notizia storica del nobilissimo ordine supremo della santissima Annunziata. Sunto degli statuti, catalogo dei cavalieri https://books.google[...] Eredi Botta
[6] 서적 Almanacco Toscano per l'anno 1855 https://books.google[...] Stamperia Granducale
[7] 웹사이트 Chevaliers de la Toisón d'Or - Knights of the Golden Fleece http://www.antiquesa[...] 2019-06-25
[8] 웹사이트 A Szent István Rend tagjai http://tornai.com/re[...] 2010-12-22
[9] 간행물 Hof- und Staats-Handbuch des Großherzogtum Baden https://digital.blb-[...] (출판사 정보 없음)
[10] 간행물 Hof- und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 Bayern https://www.digitale[...] (출판사 정보 없음)
[11] 서적 Le livre d'or de l'ordre de Léopold et de la croix de fer https://books.google[...] lelong
[12] 서적 Riddere af Elefantordenen, 1559–2009 https://books.google[...] Syddansk Universitetsforlag
[13] 웹사이트 The Royal Order of Kamehameha https://web.archive.[...] Official website of the Royal Family of Hawaii 2019-12-02
[14] 간행물 Almanaque imperial para el año 1866 https://books.google[...] 2020-04-29
[15] 간행물 Königlich Preussische Ordensliste https://babel.hathit[...]
[16] 서적 Staatshandbuch für den Freistaat Sachsen: 1865/66 https://books.google[...] Heinrich
[17] 간행물 Sveriges statskalender https://runeberg.org[...] 2020-05-02
[18] 웹사이트 Nichan ad-Dam, ou ordre du Sang, institué... - Lot 198 https://www.beaussan[...]
[19] 서적 The Knights of England https://archive.org/[...] (출판사 정보 없음)
[20] 웹사이트 367日誕生日大事典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2-11
[21] 서적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도서출판 개마고원 2001-03-10
[22] 서적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도서출판 개마고원 2001-03-10
[23] 서적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도서출판 개마고원 2001-03-10
[24] 서적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도서출판 개마고원 2001-03-10
[25] 서적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도서출판 개마고원 2001-03-10
[26] 서적 La cessione del Veneto - ricordi di un commissario piemontese incaricato alle trattative Academic Press
[27] 서적 1866: la grande truffa Venice Academic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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