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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콘드라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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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만 콘드라첸코는 러일 전쟁 당시 뤼순 요새 방어를 지휘한 러시아 제국의 군인이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공병 학교를 졸업하고 참모대학교를 거쳐 군 경력을 쌓았다. 1903년 뤼순에 도착하여 요새를 재정비하고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했으며, 포트 아서 공방전에서 러시아군의 방어를 이끌었다. 그는 요새 축성 전문가로서, 뤼순 요새를 근대적인 요새로 변모시켰고, 일본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격퇴했다. 1904년 12월 동계관산 북보루에서 일본군의 포탄에 맞아 전사했으며, 그의 용맹함은 러시아와 일본 양측으로부터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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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콘드라첸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만 콘드라첸코
이름로만 이시도로비치 콘드라첸코
로마자 표기Roman Isidorobichi Kondratenko
우크라이나어 표기Роман Ісидорович Кондратенко
출생과 사망
출생1857년 10월 12일
출생지트빌리시, 캅카스 총독부, 러시아 제국 (현재의 조지아)
사망1904년 12월 15일 (47세)
사망지뤼순, 만주
군 복무
소속러시아 제국 육군
복무 기간1877년 – 1904년
최종 계급육군 중장
지휘제7 동시베리아 소총 사단
주요 참전 전투러일 전쟁
여순항 포위전

2. 생애

로만 콘드라첸코는 티플리스(현재 조지아의 수도)에서 우크라이나인 출신 퇴역 육군 소령의 열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형의 도움으로 폴로츠크(현재 벨라루스에 위치)에 있는 폴로츠크 사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공립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1877년 우등으로 졸업하고 군사공병기술대학교인 니콜라예프 공학 연구소에 입학하여 프라포르시크를 받고 제1 카프카스 공병 대대에 배속되었다. 1879년 군사 공병 학교에, 1884년에는 참모대학교에 입학했다. 1882년부터 1894년까지 공병 부서에서 복무한 후, 1895년에 연대 지휘관, 1901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아무르 군관구 참모장으로 근무했다. 1903년 포트 아서에 주둔한 제7 동시베리아 소총 여단을 지휘했으며, 여단은 제7 동시베리아 소총 사단으로 확장되었고 콘드라첸코는 중장으로 진급했다.[1]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로만 콘드라첸코는 티플리스(현재 조지아의 수도)에서 우크라이나인 출신 퇴역 육군 소령의 열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형의 도움으로 폴로츠크(현재 벨라루스에 위치)에 있는 폴로츠크 사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공립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다.[1] 1877년 우등으로 졸업하고 현재 군사공병기술대학교인 니콜라예프 공학 연구소에 입학했다. 프라포르시크 계급을 받고 제1 카프카스 공병 대대에 배속되었다.[1] 1879년 군사 공병 학교에 입학했고, 1884년에는 참모대학교에 입학했다.[1]

1882년부터 1894년까지 공병 부서에서 복무한 후, 1895년에 연대 지휘관을 받았고, 1901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아무르 군관구 참모장으로 근무했다. 1903년, 포트 아서에 주둔한 제7 동시베리아 소총 여단을 지휘하게 되었으며, 이후 여단은 제7 동시베리아 소총 사단으로 확장되었고 콘드라첸코는 중장으로 진급했다.[1]

그의 아버지는 우크라이나인 출신의 퇴역 소령이었으며, 귀족화된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후손이었다. 집안은 가난하여 어린 시절부터 일을 해야 했다. 형의 도움으로 폴라츠크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74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니콜라예프 공병 학교(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877년 공병 학교를 졸업하고 중위로 임관한 후 공병으로 진출했다. 처음에는 고향인 트빌리시에 주둔하는 제1공병대대에 배속되었다. 1879년, 공병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근대 요새 축성 기술과 전술을 배우며 러시아 군 최고의 요새 축성 권위자가 되었다.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바투미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축성 기술을 실전에 적용했다. 1884년, 3등 성 스타니슬라프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대령으로 승진했다. 바투미에서는 하청업자의 사기를 당했지만, 상사의 이해를 얻어 큰 문제로 번지지 않았고, 참모 본부 아카데미에 추천되었다.

1885년, 참모 본부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1886년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1886년부터 1894년까지 빌뉴스 군관구 참모부에서 근무하며 대령으로 승진했다. 1895년, 우랄 군관구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지만, 곧 제20저격 연대장이 되었다. 1900년 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설치된 건군 위원회 업무로 옮겼지만, 일본과의 관계 악화에 따라 극동으로 부임했다.

2. 2. 뤼순 요새 사령관 부임

1903년 포트 아서에 도착한 콘드라첸코는 수개월에 걸쳐 이미 거대한 요새를 재조직하고 개선하여 일본 제국과의 다가올 분쟁에 대비했다.[1] 그는 러일 전쟁 발발 전 참모부 관할 당직 장관으로 아무르 군관구로 전임했고, 1903년 11월에는 소장으로 승진하여 여순 요새 방위 임무를 맡는 제7 동시베리아 저격 여단장(1904년에 사단으로 승격)에 취임했다.[1] 그러나 이전 요새 축성 책임자가 예산을 사적으로 유용했기 때문에 여순 요새의 주요 부분은 미완성이었다.[1] 그는 동료에게 "어디에 요새가 있다는 것인가. 여순에는 요새라고 부를 만한 시설은 어디에도 없다"라고 쓴 편지를 보낼 정도로 낙담했다.[1]

콘드라첸코는 취임 다음 날부터 습격이 예상되는 일본군으로부터 여순을 방위하기 위해 스스로 요새 축성의 진두 지휘에 나섰다.[1] 여순 요새 사령관 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스테셀 중장은 콘드라첸코의 능력을 신뢰하여 대부분의 요새 방위 작전 계획을 일임했기 때문에, 요새 축성 및 방위 계획에 관한 그의 전문적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고, 여순 요새를 단기간에 영구 방루로 굳혀진 근대 요새로 변모시켰다.[1]

2. 3. 뤼순 공방전

1903년 포트 아서에 도착한 콘드라첸코는 수개월에 걸쳐 요새를 재조직하고 개선하여 일본 제국과의 분쟁에 대비했다. 포트 아서 공방전이 시작된 후, 그는 러시아 방어의 중심이었으며, 가장 어렵고 위험한 지역에서 방어군을 직접 지휘하고 전투 피해로 인한 요새 수리를 감독했다.[1]

콘드라첸코는 육군과 러시아 제국 해군 병력을 모두 능숙하게 활용하여 네 차례의 일본군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며, 아나톨리 스토셀 장군과 콘스탄틴 스미르노프 중장 다음으로 포트 아서의 실질적인 지휘관 역할을 했다.[1]

1904년 일본 제3군의 뤼순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항상 전선에 서서 부하 장병들을 고무했다. 뤼순항 내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 (뤼순 함대)에서 함재포를 육상으로 옮겨 각 요새에 배치하여 포격력을 높였다. 또한 보루에서 기관총에 의한 십자포화나 수류탄, 지뢰,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일본군 보병의 총검 돌격을 막았다. 탄약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해군에서 잉여 무기를 전용하고, 기뢰를 적병을 향해 던져 떨어뜨리거나, 대포에 어뢰를 장전하여 포격하는 등의 전법도 고안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스테셀로부터 서훈권 대행의 권리를 받은 콘드라첸코는 공적이 있는 장병에게 직접 훈장을 수여하여 격려했다. 부하 장병들도 그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 필사적으로 싸웠다.

12월 5일 203 고지가 함락되어 일본군의 포격으로 뤼순 함대가 전멸했지만, 그의 투쟁심은 쇠퇴하지 않았고, 장병들을 격려했기에 병사들의 사기도 높았다. 12월 15일, 동계관산 북보루의 장병들을 격려하기 위해 콘드라첸코 자신이 시찰을 방문했다. 한 병사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격려하며 그 자리에서 떠나려던 순간, 일본군의 28cm 곡사포 포탄의 직격을 받아 전사했다.[2] 콘드라첸코의 전사는 장병들에게 충격을 주어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고 한다. 스테셀이 뤼순 개성 및 항복을 신청한 것은 1905년 1월 1일이었다.

3. 평가 및 영향

로만 콘드라첸코는 포트 아서 공방전에서 러시아군 방어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일본과 러시아 양측으로부터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군 굴지의 명장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2] 1903년 포트 아서에 도착한 그는 일본 제국과의 분쟁에 대비하여 요새를 재조직하고 개선하였다. 포트 아서 공방전에서 그는 직접 방어군을 지휘하고 요새 수리를 감독하는 등 실질적인 지휘관 역할을 수행하며 네 차례의 일본군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1]

1904년 12월 2일, 콘드라첸코는 자신이 방어하던 요새의 탄약고가 일본군 야포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전사하였다.[1] 그의 사망 18일 후, 아나톨리 스토셀 장군과 알렉산드르 포크는 포트 아서를 일본군에 항복시켰다.

전후 콘드라첸코 장군의 시신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일본군은 그의 용기를 기리기 위해 그가 전사한 자리에 화강암 사당을 세웠다.[2]

콘드라첸코 장군의 사당

3. 1. 긍정적 평가

포트 아서 공방전에서 러시아군 방어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일본과 러시아 양측으로부터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군 굴지의 명장"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2]

콘드라첸코는 1903년 포트 아서에 도착한 후, 일본 제국과의 분쟁에 대비하여 요새를 재조직하고 개선하였다. 포트 아서 공방전에서 그는 직접 방어군을 지휘하고 요새 수리를 감독하는 등 실질적인 지휘관 역할을 수행하며 네 차례의 일본군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1]

전장에서는 용맹하면서도 평소에는 과묵하고 온후한 성격으로,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며 지휘 계통이 혼란했던 뤼순 요새 내에서 조정을 잘 했다.[3]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더불어 부하 장병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우리 장군"이라 불리며 따랐고, 동료들로부터 높은 평가와 신뢰를 받았다.

전쟁 후, 그의 용기를 기리기 위해 일본군은 그가 전사한 자리에 화강암 사당을 세웠다.[2]

3. 2. 비판적 평가

일본과 러시아 양측으로부터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군 최고의 명장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전사한 장소에는 뤼순 요새가 함락된 후 콘드라첸코의 용맹을 기리기 위해 일본군이 기념비를 건립했으며, 현재도 존재한다.[2] 전장에서는 용맹하면서도 평소에는 과묵하고 온후한 성격으로, 타인의 의견을 잘 경청하며 지휘 계통이 혼란했던 뤼순 요새 내에서 조정을 잘 했다.[3]

뛰어난 군인으로서 자질을 지녔고, 스스로 진두지휘하며 부하 장병과 고락을 함께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장병 한 명 한 명에게 마음을 쓰는 그를 부하 장병들은 "우리 장군"이라고 부르며 따랐고, 동료들로부터의 평가와 신뢰도 높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콘드라첸코는 독단적인 경향이 있어 요새에서 출격하여 야전을 벌일 것을 자주 주장했다는 비판도 있다. 콘드라첸코의 사단은 7월 3일에 와이토우산(歪頭山)・젠산(剣山)에 공격을 가해 참호에 숨은 일본군 앞에서 큰 손해를 입었다. (이 때, 러시아군의 전법을 모방한 일본군은 기관총 좌석을 구축하여 십자포화를 가해 러시아군을 격퇴했다). 만약 콘드라첸코가 뤼순 요새의 총사령관이었다면, 무모한 출격으로 자멸했을 가능성도 있다.[4]

장신에 흰 피부의 미남이었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스테셀(Stessel) 부인은 그를 특히 마음에 들어하여 여러 번 유혹했다고 전해진다. 스테셀은 "아내와 콘드라첸코를 단 둘이 있게 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막료들에게 부탁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4. 사후

전쟁 후, 콘드라첸코 장군의 시신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일본군은 콘드라첸코의 용기를 기리기 위해 그의 죽음의 자리에 화강암 사당을 세웠다.[1]

5. 훈장

훈장수여 년도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3등급
1884년
성 안나 훈장
성 안나 훈장 3등급
1889년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2등급1892년
-- 성 안나 훈장 2등급1892년
성 블라디미르 훈장
성 블라디미르 훈장 4등급
1899년
성 게오르기 훈장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1904년
성 게오르기 훈장
성 게오르기 훈장 3등급
1905년
-- 검이 달린 성 안나 3급 훈장1889년
-- 검이 달린 성 스타니슬라프 2급 훈장1892년
-- 검이 달린 성 블라디미르 4급 훈장1899년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o-Japanese War
[2] 서적 2019
[3] 서적 坂の上の雲 文春文庫 1999
[4] 서적 「坂の上の雲」では分からない旅順攻防戦―乃木司令部は無能ではなかった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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