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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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는 17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앙리 2세 드 콩데 친왕의 아들이자 앙리 4세의 종질이다. 30년 전쟁, 프롱드의 난, 프랑스-스페인 전쟁,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등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로크루아 전투에서의 승리로 명성을 얻었으며, 튀렌과 함께 프랑스군을 이끌며 유럽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675년 군에서 은퇴하여 샹티이 성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1686년 사망했다. 그의 후손들은 현재 유럽의 여러 왕가에 속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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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2세 드 부르봉콩데는 1588년에 태어나 사후 콩데 공이 되었으며, 앙리 4세 암살 후 프랑스 왕위 계승 서열에 올랐고, 샤를로트 마르그리트 드 몽모렌시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리슐리외에 의해 투옥되기도 했다. - 아기에 공작 - 루이 1세 드 콩데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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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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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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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 |
작위 | 콩데 공 |
별칭 | 그랑 콩데 |
출생일 | 1621년 9월 8일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파리 |
사망일 | 1686년 12월 11일 (65세)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퐁텐블로 궁전 |
매장지 | 발레리, 생토마 교회 |
종교 | 가톨릭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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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 |
가문 | 부르봉-콩데 가문 |
아버지 | 앙리, 콩데 공 |
어머니 | 샤를로트 마르그리트 드 몽모랑시 |
배우자 | 클레르 클레망스 드 마이예-브레제 |
자녀 | 앙리 쥘, 콩데 공 루이, 부르봉 공작 |
군사 경력 | |
소속 | 프랑스 육군 |
참전 전투 | 30년 전쟁 프랑스-스페인 전쟁 (1635년-1659년) 로크루아 전투 렌스 전투 프라이부르크 전투 필립스부르크 공성전 (1644년) 뇌르틀링겐 전투 (1645년) 마르디크 포위전 (1646년) 됭케르크 공성전 (1646년) 프롱드의 난 레텔 전투 (1650년) 블레노 전투 에탕프 전투 (1652년) 포부르 생 앙투안 전투 아라스 전투 랑드르시 공성전 (1655년) 발랑시엔 전투 (1656년) 됭 전투 드볼루션 전쟁 브장송 공성전 (1668년) 돌 공성전 (1668년) 그레이 공성전 (1668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톨하위스 전투 세네프 전투 |
작위 계승 | |
작위 | 콩데 공 |
재임 기간 | 1646년 12월 26일 – 1686년 12월 11일 |
이전 | 앙리 |
이후 | 앙리 쥘 |
문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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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앙리 2세 드 콩데 친왕과 샤를로트 마르그리테 데 몽모랑시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프랑스의 국왕인 앙리 4세의 종질이다. 1621년부터 1646년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앙갱 공작(Duc d'Enghien) 칭호를 받았다.[1] 19세의 나이에 30년 전쟁에 참전하였다.
아버지는 그가 역사, 법학, 수학을 예수회의 부르주 학교에서 6년 동안 공부하도록 철저한 교육을 받게 했다. 그 후 그는 파리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17세에 아버지가 부재 중일 때 그는 부르고뉴를 통치했다.
아버지는 그가 1640년 군에 입대하기 전에 리슐리외 추기경의 조카딸인 클레르 클레망스 드 마이예 브레제와 약혼시켰다. 국왕의 침실 시종인 프랑수아 푸사르의 딸 마르트 뒤 비장과 사랑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3세였던 약혼녀와 결혼하도록 아버지에게 강요당했다.[1] 그녀는 남편에게 세 아이를 낳았지만, 앙귈렘은 나중에 그녀가 다른 남자들과 간통했다고 주장하며 샤토루에 가두었지만, 그 주장은 널리 믿지 않았다.
1642년 아르망 장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 추기경으로부터 플랑드르(스페인령 네덜란드)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659년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피레네 조약이 체결되면서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프랑스로 귀환하게 된다.
1668년 부르고뉴 총독으로 임명된 이후에 스페인의 자치령으로 있던 프랑슈콩테 정복에 나섰다. 그렇지만 아헨에서 체결된 평화 조약인 엑스라샤펠 조약에 따라 상속 전쟁이 종식되면서 프랑스는 프랑슈콩테를 스페인에 반환하게 된다.
1672년 루이 14세가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을 일으켰고, 1673년 빌럼 3세 판 오라녜(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가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과 동맹 관계를 맺고 반격에 나서면서 프랑스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은퇴한 이후에도 그의 인기는 계속되었고 여러 문인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학술, 예술에 관한 논의를 벌였다. 1686년 퐁텐블로 궁에서 향년 6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 1. 30년 전쟁 (1618년 ~ 1648년)
1642년 21세에 프랑스 추기경 리슐리외로부터 플랑드르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1643년 로크루아 전투에서 프란시스코 데 멜로가 이끄는 스페인 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 이 승리로 프랑스는 100년 만에 전 유럽의 존경을 받는 위치로 올라섰다. 같은 해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동하여 모젤을 공략하고 독일군을 라인강 건너편으로 후퇴시켰다.
1644년에는 튀렌 백작과 함께 독일로 진군하여 바이에른군 사령관 프란츠 폰 메르시와 프라이부르크 전투에서 격돌하여 큰 피해를 입었으나 승리했다.[6] 이 전투에서 콩데 공은 지휘봉을 적의 요새에 던져 넣고, 백병전을 휘두르며 콩데 연대의 선두에 서서 돌격하여 그것을 되찾아 왔다는 일화가 있다.
1645년 튀렌과 합류하여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메르시를 사살하고 승리하였으며,[7] 1646년에는 스페인 군의 눈앞에서 됭케르크 요새를 포위하여 점령했다.
2. 2. 프롱드의 난 (1648년 ~ 1653년)
1648년부터 1653년까지 일어난 프롱드의 난에서 콩데 공은 초기에는 가스통 도를레앙 공작 진영을 지원했지만, 루이 14세와 쥘 마자랭에 의해 진압되면서 국외로 추방당했다.[2]콩데 공은 군인으로서 뛰어난 활약을 했지만, 프랑스 궁정은 이를 오히려 두려워하여 그가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루이 13세 사후, 어린 루이 14세의 섭정이었던 왕대비 앙느 도트리슈는 콩데 공을 신임했다. 그러나 1647년부터 파리 고등법원이 재상 마자랭이 제정한 새로운 세금에 대해 공격을 시작하고, 그 대립이 궁정 혁명으로까지 번지면서, 왕실 군사의 핵심이었던 콩데 공의 입지는 미묘해졌다.[8]
30년 전쟁이 끝난 직후인 1648년에 프롱드의 난이 발발했다. 1649년 1월, 왕대비가 루이 14세, 마자랭,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루이 13세의 동생)을 데리고 파리를 탈출하여 생드니로 피신할 때 콩데 공은 호위로서 따랐다. 콩데 공 파는 “소재상들”(le Petit Metre)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하는 프롱드 세력과 대립했다. 콩데 공은 2월에 8천 명의 군대로 파리를 포위하고, 3월에 왕실을 파리로 입성시켰다. 그러나 그의 동생인 콩티 공작 알망 드 부르봉이 프롱드 측과 시민들에게 지지받아 파리 군 총사령관이었기 때문에 마자랭에게 미움을 받았다. 1650년 1월, 콩데 공은 콩티 공작 및 매형이자 누이 앙느 쥬누비에브 드 부르봉의 남편인 롱귀유 공작 앙리 2세와 함께 국사범으로 체포되었다.[8]
1651년 2월, 마자랭이 주변의 압력으로 망명하고, 프롱드 측에 의해 콩데 공이 석방되자, 그는 파리를 떠나 보르도로 남하했다. 기옌, 푸아티에, 앙주 등 프랑스 남서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옛 적국 스페인과 연락을 취했다. 왕대비는 콩데 공에게 그만두라고 설득했지만, 콩데 공은 “조금 더 빨랐다면 화의도 좋았겠지만, 이렇게까지 온 이상 파리로 돌아갈 수는 없다”라며 거절하고, 내란을 다시 불붙였다. 스페인 군과 보르도, 몽토방 등 각지에서 모은 병력을 합쳐 5천에서 6천 명의 병력을 이끈 콩데 공은 루이 14세를 비롯한 궁정 사람들을 쫓아 전투를 벌였다.[8]
1652년 4월 7일, 루아르 강 강변에서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튀렌과 대등하게 싸웠으나, 포격을 받고 패배하여 튀렌을 놓치고 말았다. 그 후 튀렌을 추격하여 파리로 북상, 에탕프의 반란군과 합류하여 7월 2일 파리의 생탕투안 문에서 튀렌과 다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콩데 공은 열세에 놓였으나, 앙느 마리 루이즈 돌레앙이 파리의 문을 열어준 덕분에 입성하여 파리 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콩데 공은 “이 군대는 우스꽝스러워서 풍자시로 만들 수밖에 없다”라고 스스로 평가했을 정도로, 규율도 훈련도 되어 있지 않은 군대였다.[8]

스페인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콩데 공은 파리를 탈출했고, 대신 루이 14세가 파리로 귀환했다. 1653년 3월, 파리 고등법원은 콩데 공에게 결석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프롱드의 난은 망명지에서 귀국하여 권력을 되찾은 마자랭의 기량으로 종식되었다.[9]
2. 3. 프랑스-스페인 전쟁 (1635년 ~ 1659년)
프롱드의 난이 진압되면서 국외로 추방당한 콩데 공은 1653년부터 1659년까지 프랑스-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군 진영에 참전했다.[10] 주로 스페인군을 이끌고 튀렌 자작이 지휘하는 프랑스군과 도시 쟁탈전을 반복했다.[10]전반적으로 프랑스군이 우세했고, 스페인군이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에 콩데 공은 점차 밀리게 되었지만, 1653년에는 로크루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로크루아를 함락시켰고, 1657년 4월에는 캉브레를 포위하려는 튀렌의 진영을 기병 2000명으로 외부에서 돌파하여 시가지로 진입하는 등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다.[10]
그러나 크롬웰이 통치하는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동맹을 맺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658년 5월, 칼레에서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과 합류하여 적군이 완전히 우세해졌다.[10] 같은 해 6월 14일, 콩데 공은 네덜란드 총독 후안 호세와 함께 잉글랜드-프랑스 연합군에 포위된 덩케르크를 구원하기 위해 사구 전투를 벌였으나, 튀렌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당했다.[10] 덩케르크는 프랑스군에 함락되었고, 콩데 공은 계속되는 튀렌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패배를 거듭했다.[10]
1659년,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피레네 조약이 체결되면서 튀렌이 점령한 네덜란드의 도시들은 프랑스에 넘어갔고, 스페인의 패권은 막을 내렸다. 콩데 공은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프랑스로 복귀했다.[10]
2. 4.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1672년 ~ 1678년)
1672년 루이 14세가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을 일으키자, 루이 2세는 튀렌 자작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에 합류하여 라인 강을 건너 네덜란드를 침공했다.[11] 1673년 빌럼 3세 판 오라녜(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가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과 동맹을 맺고 반격에 나서면서 프랑스는 위기에 빠졌다.[11]1674년, 몽 근교 스네프에서 약 4만 5천 명의 병력으로 6만 명으로 알려진 빌럼 3세 판 오라녜의 군대와 격돌했다. 후위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나, 혼란을 수습한 적의 견고한 진영에 맞서 자신과 부하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말이 쓰러져 세 번이나 말을 갈아탔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다. 종군했던 한 장교는 "전의를 잃지 않은 자는 콩데 공 한 사람뿐이었다"라고 증언했다. 프랑스 측은 전사자 7천 명, 포로 5천 명을 기록했고, 적의 피해도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이 스네프 전투에서 승리한 후, 오데나르데를 포위한 빌럼 3세 판 오라녜에게 접근하여 포위를 풀게 했다.[11]
1675년 5월부터 6월에 걸쳐 아들 앙리 3세와 함께 샘브르 강과 마스 강 유역을 제압하여 제국군과 네덜란드군을 분단시켰다. 8월, 튀렌 전사 후 알자스 지방으로 가서 단 두 번의 설영으로 명장 라이몬도 몬테쿠콜리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러나 이것을 마지막으로 루이 2세는 군에서 물러나 샹티이 성에 은퇴했다.[11]
2. 5. 은퇴와 죽음
1675년 라인강 전역 이후, 콩데는 과로와 쾌락으로 조기에 지쳐 통풍에 시달리면서 샹티이 성에서 은퇴 생활을 했다.[11] 말년에 콩데는 부르달루, 니콜, 보스위에와 교류하며 종교적 수행에 전념했다.1686년 중반, 그의 유일한 손자인 루이 드 부르봉은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부인의 장녀인 루이즈 프랑수아즈와 결혼했다. 같은 해,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퐁텐블로에서 천연두에 걸렸는데, 콩데는 그녀의 회복을 위해 간호했고, 루이 14세가 그녀를 만나는 것을 막았다.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회복했지만, 콩데는 그녀를 간호하다 병을 얻었다고 한다.
1686년 11월 11일 퐁텐블로 궁에서 65세로 사망하여 발레리에 묻혔다. 부르달루는 그의 임종을 지켰고, 보스위에는 그의 만가를 낭송했다.
은퇴 후에도 그는 몰리에르, 라신, 부알로, 라 퐁텐 등과 교류하며 학문과 예술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다.[11]
3. 유산
콩데 공 루이 2세는 17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뛰어난 전술과 전략으로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특히 로크루아 전투에서의 승리는 그의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군사 전략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여전히 연구되고 있다. 그는 튀렌과 함께 30년 전쟁을 프랑스에 유리하게 이끌었다.
프롱드 기간 동안에는 처음에는 마자랭을 지지했지만, 나중에는 귀족 반대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프롱드의 난이 실패한 후 스페인 군대에서 복무하며 아라스, 발랑시엔, 덩케르크에서 프랑스군과 싸웠다. 1659년 피레네 조약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 다시 군사 지휘권을 받았다.
합스부르크 왕위 계승 전쟁 동안 프랑슈콩테를 정복했고,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에서 튀렌과 함께 프랑스군을 이끌었다. 1675년 튀렌이 사망한 후 지휘권을 맡아 황제군의 침략을 격퇴한 것이 그의 마지막 전투였다.
콩데 대공이 사망하자 루이 14세는 "내 왕국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그의 후손들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벨기에 왕가에 속해 있다. 그는 영화 바텔에서 줄리안 글로버가 연기했다.
4. 가족 관계
1641년, 루이는 리슐리외 추기경의 조카딸인 클레르 클레망스 드 마이유브레제와 왕궁(팔레 루아얄)에서 결혼했다.[1] 이 결혼식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 오스트리아의 안,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이 참석했다. 루이는 국왕 침실 시종의 딸인 마르트 뒤 비장과 사랑에 빠졌지만, 아버지의 강요로 13세의 클레르 클레망스와 결혼해야 했다.[1]
두 사람 사이에서는 세 명의 자녀가 태어났지만, 앙귈렘(루이 2세)은 나중에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간통했다고 주장하며 샤토루에 가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널리 믿어지지 않았다.[1] 생시몽 공작은 그녀가 평범하고 무뚝뚝했지만, 끊임없는 학대 속에서도 덕, 경건함, 온화함을 지녔다고 칭찬했다.[1]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앙리 쥘 드 부르봉(콩데 공 앙리 3세) | 1643년 7월 29일, 파리 | 1709년 4월 1일, 파리 | 콩데 공작, 엥기앙 공작. 팔라티나트 공녀 안과 결혼하여 자녀를 둠. |
루이 드 부르봉 | 1652년 9월 20일, 보르도 | 1653년 4월 11일, 보르도 | 부르봉 공작, 유년기에 사망. |
엑스 드 부르봉 | 1657년, 브레다 | 1660년 9월 28일, 파리 | 부르봉의 마드무아젤, 유년기에 사망. |
5. 평가
콩데 공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30년 전쟁에서 로크루아 전투와 랑스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프랑스의 군사적 위상을 높였다.[2] 그러나 개인적인 야망과 귀족 계급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프롱드의 난에 가담하여 프랑스 사회에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3]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는 콩데 공이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화에 기여했지만, 귀족 특권 옹호라는 한계 또한 지닌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프랑스의 국력을 강화하는 데는 기여했지만, 프롱드의 난 가담은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참조
[1]
서적
Relation de la Cour de France
https://archive.org/[...]
Mercure de France
[2]
서적
Cultural Exchange in Early Modern Europe
CUP
2007
[3]
서적
Exile, Imprisonment, or Death: The Politics of Disgrace in Bourbon France, 1610-1789
OUP
2017
[4]
서적
Relation de la Cour de France
https://archive.org/[...]
Mercure de France
[5]
웹사이트
[6]
서적
ルイ十四世の世紀(一)
岩波文庫
[7]
문서
ヴォルテール、P36 - P40、ウェッジウッド、P489 - P497、P502 - P503、P524 - P525、P543。
[8]
문서
ヴォルテール、P53 - P69。
[9]
문서
ヴォルテール、P69 - P77、友清、P15 - 23。
[10]
문서
ヴォルテール、P80 - P88、P97 - P101、友清、P26 - P36、P40。
[11]
문서
ヴォルテール、P124 - P126、P141 - P146、P154 - P173、友清、P118、P139 - P143、P196 - P197、P201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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