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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관 (문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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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류관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문화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371년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에서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조선 개국 후 개국원종공신으로 내사사인 등을 역임했다. 세종 시대에는 우의정을 지냈으며, 《태조실록》과 《고려사》 편찬에 참여했다. 황희, 맹사성과 함께 세종 시대의 명재상으로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한양 천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저서로는 《하정집》 등이 있으며, 서울 동대문구에는 그의 호를 딴 하정로가 있다.

2. 생애

류관은 1371년(공민왕 20년)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여러 관직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였다. 조선 개국 후에는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책봉되었으며, 1406년에는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1]

조선 건국 이후에는 내사사인, 병조의랑, 세자우필선, 사헌부 중승, 판교서, 성균관 대사성, 세자우보덕 겸 예문춘추관 편수관, 좌산기상시, 보문각 직제학, 형조전서 겸 보문각 직제학 경연청 시강관, 이조전서, 집현전 직학사, 경연 시강관, 중추원부사, 도평의사사, 보문각 학사, 지경연사, 조례상정도감 판사, 강원도 도관찰출척사, 사헌부 대사헌, 승녕부 윤, 계림부윤, 종묘사직 불상고로 문화현 유배, 성균관 생도 교훈, 전라도 도관찰사,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 춘추관사, 세자좌부빈객, 판공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1]

1409년부터 1413년까지 《태조실록》 편찬에, 1419년부터 1424년까지 《고려사》 수정에 참여하는 등 조선 초기 역사서 편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424년(세종 6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직하였고, 1426년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후에는 후학 양성에 힘썼다.[1]

황희, 맹사성과 함께 조선 세종 대의 3대 청백리로 불리며, 그의 호를 딴 하정로동대문구에 있다.[1]

2. 1. 고려 말 관직 생활

1371년(공민왕 20년)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 말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비서성 교감(秘書省 校勘), 상서성 주부(尙書省 主簿), 춘추관 검열(春秋館 檢閱), 예문관 공봉(藝文館 供奉), 북부령(北部令) 겸 진덕박사(進德博士), 예의랑(禮儀郞), 판도사 좌랑(判圖司 佐郞), 시 전보도감 판관(試典寶都監 判官), 전의시승(典儀寺丞), 예의정랑(禮儀正郞), 전리정랑(典理正郞), 소부 소윤(少府少尹), 전교부령(典校副令), 봉산군수(鳳山郡守), 성균관 사예(成均館 司藝), 전농부정(典農副正) 겸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전농정(典農正) 겸 경력사 경력(經歷司 經歷) 등을 역임하였다.[1]

2. 2. 조선 개국 이후 활동

1371년(공민왕 20년) 과거에 급제하여 조선 개국 후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1] 1406년 공안부 판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1] 1409년 8월 28일부터 1413년 3월 22일까지 예문관 대제학과 춘추관지사로 《태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419년 9월 20일부터 1424년 8월 11일까지 《고려사》 수정(修正)에 참여하였다.[1] 1424년(세종 6년) 우의정이 되고 그 이듬해 사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26년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하였다.[1] 조정에서 물러난 후에는 후학 양성에 힘썼다.[1]

그는 한양 천도상소문, 논무악 정도소를 올려 한양 천도론을 강력히 주장하여, 개경 복귀 후 태조에게 상소하여 한양 천도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1]

2. 3. 한양 천도 상소

류관은 오늘날 수도 서울 천도론을 상소한 한양 천도 상소문인 논무악 정도소(論毋岳 定都疏)를 올려 한양 천도론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개경 복귀 후 태조에게 상소하여 한양 천도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1]

3. 사후

류관은 1669년(현종 10) 정계서원(程溪書院)에 배향되었으나, 이 서원은 1871년(고종 8) 훼철되었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는 류관을 기려 명명한 하정로(夏亭路)와 비우당교(庇雨堂橋)가 있다. 《류관 선생 묘》는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동오리에 있으며, 1981년 7월 16일 경기도 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되었다.

3. 1. 시호 및 배향

시호는 문간(文簡)이다.[1] 1669년(현종 10) 정계서원(程溪書院)에 배향되었으나,[1] 이 서원은 1871년(고종 8) 훼철되었다.[1]

3. 2. 유적

1669년(현종 10) 정계서원(程溪書院)에 류관이 배향(配享)되었으나, 이 서원은 1871년(고종 8) 훼철(毁撤)되었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는 류관을 기려 명명한 하정로(夏亭路)와 비우당교(庇雨堂橋)가 있다.

류관 선생 묘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동오리에 있으며, 1981년 7월 16일 경기도 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되었다.

4. 성품

류관은 성품이 소탈하고 청렴결백하여 사후 청백리에 기록되었으며, 평생 학문에 힘써 경전과 역사에 밝고 시문(詩文)을 잘 지었다.

그는 청백리로 소문난 인물로, 베옷과 짚신으로 검소하게 생활했다.[1] 음식은 밥과 국, 나물이면 충분하다고 여겼으며, 귀한 손님에게도 탁주 한 사발과 소금에 절인 콩, 무 조각으로 대접했다.[2] 높은 벼슬에 올랐음에도 동대문 밖에서 담장 하나 없는 초가집에 살았다. 장마가 한 달 넘게 이어져 천장에서 비가 새 방 안으로 쏟아지자, 류관은 태연하게 우산을 받쳐 들고 비를 피했다. 그러면서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비를 어떻게 버티겠소?"라며 걱정했다.[3] 이 집은 우산정(雨傘亭) 또는 우산각(雨傘閣)이라 불렸는데, 훗날 6대손 이수광이 비우당(庇雨堂)이라고 고쳐 불렀다.

5. 저작

저서로는 《하정집》(夏亭集)》과 《하정유집》(夏亭遺集)》이 있다. 오늘날 수도 서울이 있게 한 ‘태조조 논무악 정도소’는 한양 천도 상소문으로, 탁월한 입지로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야 한다는 내용이다.[1]

6. 일화

류관은 청백리로 소문난 인물로, 베옷과 짚신으로 검소하게 살았으며[1], 밥과 국, 나물만으로 식사하고 귀한 손님에게도 탁주 한 사발과 소금에 절인 콩, 무쪽으로 대접했다.[2] 높은 벼슬에 있었음에도 동대문 밖에 담장 하나 없는 초가집에서 살았다. 장마철에 비가 새자 우산을 받쳐 들고 태연하게 비를 피하면서,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비를 어떻게 버티겠소?"라며 걱정했다.[3] 이 집은 우산정(雨傘亭) 또는 우산각(雨傘閣)이라 불렸는데, 훗날 외6대손 이수광이 비우당(庇雨堂)이라 하였다.

7.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증조부류성비(柳成庇)좌우위상장군(左右衛上將軍)
조부류식(柳湜)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상호군(上護軍)
아버지류안택(柳安澤)초명(初名) 류안택(柳安宅), 삼사판관(三司判官), 증(贈) 좌의정(左議政)
어머니동래 정씨(東萊鄭氏)
류림(柳臨)전농시정(典農寺正), 류사눌(1375년 ~ 1440년)의 아버지
부인안씨(安氏)
장남류맹문(柳孟聞)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차남류중문(柳仲聞)대호군(大護軍)
삼남류계문(1383년 ~ 1445년)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안숙공(安肅公)
사남류이문(柳異聞)만호(萬戶)


참조

[1] 서적 조선의 마에스트로 대왕 세종 샘터사 2008
[2] 서적 노자 1 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가 나들목 2003
[3] 서적 조선의 어머니 탈무드가 묻다 루덴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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