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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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는 첼리스트이자 보로딘 현악 사중주단의 창립 멤버인 발렌틴 베를린스키의 딸로, 변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피아니스트이다. 13세에 영화에 출연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이후 음악 활동에 전념했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의 영향을 받았으며, 1990년대 초 파리로 이주하여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협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파리 에콜 노르말 드 뮤직에서 교편을 잡았고, 2011년에는 남편 아르튀르 앙셀과 피아노 듀오를 결성하여 음반을 발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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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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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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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류드밀라 발렌티노브나 베를린스카야 |
로마자 표기 | Lyudmila Valentinovna Berlinskaya |
출생일 | 1960년 |
출생지 | 모스크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련 |
직업 | 콘서트 피아니스트 |
2. 일대기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는 저명한 첼리스트이자 보로딘 현악4중주단의 창설자인 아버지 발렌틴 베를린스키와 변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과 친분이 있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 러시아의 수많은 저명한 예술가 및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성장하는 특별한 환경을 누렸다.[2] 다섯 살에 피아노를 시작하여 그네신 음악학교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전문 교육을 받았으며, 14세부터 아버지의 보로딘 현악4중주단과 협연하고 15세에 오케스트라 데뷔를 하는 등 일찍부터 연주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2] 소련 전역을 순회하며 연주 경험을 쌓았고, 10대 후반에는 유리 바쉬멧, 빅토르 트레티아코프 등 유명 음악가들과 협연하며 소련 주요 도시의 무대에 섰다.[2]
13세에는 영화 위대한 우주 여행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며, 직접 부른 영화 삽입곡은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에서 널리 불리고 있다.[6] 그러나 이후 영화계의 제안을 거절하고 음악가의 길에 전념했다.[2] 15세 때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눈에 띄어 그의 각별한 후원을 받게 되었고,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여기며 예술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2] 리히터가 주관한 푸시킨 미술관의 «12월의 밤» 페스티벌에 참여하며 경험을 쌓았고, 그의 조언에 따라 주요 국제 콩쿠르에는 참가하지 않았다.[2]
리히터의 집에서 만난 젊은 지휘자 블라디미르 지바와 결혼하여 첼리스트로 활동 중인 아들 드미트리 베를린스키를 두었으나[6], 후에 이혼했다. 1990년대 초, 안톤 4중주단의 제1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안톤 마탈레프와 재혼하여 파리로 이주했다.[2][7] 파리 이주 후에는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정기적으로 협연하는 등 국제 무대에서 활동을 넓혔으며, 파리 시의 지원으로 '러시아 뮤지컬 살롱' 페스티벌을 창설하기도 했다.[2] 안톤 마탈레프와의 사이에는 딸 마샤 마탈레프가 있으며, 안톤 마탈레프는 2002년 사망했다.[2]
파리를 중심으로 런던, 암스테르담, 베네치아 등 세계 주요 도시의 유명 공연장에서 독주회 및 실내악 연주회를 가지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2] 뛰어난 실내악 연주자로 인정받아 여러 유명 연주자 및 실내악단과 협연했으며, 특히 쇼스타코비치 음악의 권위자로 평가받는다.[2] 2001년에는 자신의 두 번째 페스티벌인 "파리 봄 뮤지컬"을 창설했고,[2] 이후 루아르에셰르 지역의 "라 클레 데 포르트" 페스티벌 공동 예술감독을 맡는 등 페스티벌 기획자로서도 활동하고 있다.[2]
연주 활동과 병행하여 2006년부터 파리 에꼴 노르말 드 뮤직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으며,[2] 2009년에는 아버지 발렌틴 베를린스키를 기리기 위해 '베를린스키 협회'를 설립했다.[2] 2011년부터는 프랑스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앙셀과 피아노 듀오를 결성하여 음반 발매 및 활발한 연주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2]
2. 1. 어린 시절과 교육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는 변호사인 어머니와 첼리스트이자 보로딘 현악4중주단의 창설자인 아버지 발렌틴 베를린스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친분이 있던 많은 러시아 예술가와 지식인들 속에서 성장하는 특별한 환경을 누렸다. 여기에는 작곡가 미치슬라프 와인버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알프레드 슈니트케, 소피아 구바이듈리나; 연주자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다니일 샤프란, 야코프 자크, 알렉산더 골든와이저, 야코프 플리에르; 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 예프게니 스베틀라노프, 겐나디 로즈데스트벤스키, 드미트리 키타옌코; 화가 아나톨리 즈베레프, 니콜라이 실리스, 바딤 시두르, 블라디미르 렘포르트, 루스탐 함다모프, 드미트리 크라스노페브체프;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그리고 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이 포함된다.다섯 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1년 뒤에는 그네신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예프게니 키신과 니콜라이 데미덴코를 가르친 것으로 유명한 안나 칸토르에게 배웠다. 17세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미하일 보스크레센스키를 사사했다.
음악 교육과 병행하여 어린 나이부터 무대 경험을 쌓았다. 14세부터 보로딘 현악4중주단과 함께 공연했으며, 15세에는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데뷔했다. 이후 알렉산더 루딘, 알렉산더 크니아제프와 같은 젊은 음악가들과 함께 발트해에서 캄차카, 우크라이나에서 시베리아까지 소련 전역을 돌며 독주 및 실내악 순회공연을 했다. 17세부터는 유리 바쉬멧, 빅토르 트레티아코프와 같은 저명한 음악가들과 협연했으며, 19세에는 이미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니즈니 노브고로드 등 주요 도시의 최고 무대에 오르는 연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음악 활동 외에도 13세 때 발렌틴 셀리야노프 감독의 영화 Большое космическое путешествие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알렉세이 리브니코프가 작곡한 주제가 두 곡(Ты мне веришь или нет|티 므네 베리시 일리 녜트ru, Млечный путь|믈레치니 푸티ru)을 직접 불렀는데, 이 곡들은 오늘날까지도 러시아 라디오에서 자주 방송되는 인기곡이 되었다. 영화의 성공 이후 많은 출연 제의가 있었지만, 음악에 전념하기 위해 모두 거절했다.
15세 때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눈에 띄어 그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베를린스카야는 리히터를 영적인 아버지로 여기며 그의 예술 세계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는 리히터의 공식적인 페이지 터너로 활동하기도 했다. 리히터를 통해 유리 보리소프, 예프게니 므라빈스키, 갈리나 울라노바, 보리스 포크로브스키, 이반 코즐로브스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페터 슈라이어,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블라디미르 바실리에프, 스타니슬라프 네이가우스, 나탈리아 구트만, 올렉 카간, 인노켄티 스목투놉스키 등 당대의 위대한 예술가들과 교류할 기회를 얻었다.
그녀는 리히터가 푸시킨 미술관에서 창설한 '12월의 밤' 페스티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특히 1985년 페스티벌에서는 리히터와 함께 피아노 연탄을 연주했으며, 다른 해에는 벤저민 브리튼의 오페라 ''나사의 회전'' 공연에서 리히터를 대신하여 피아노 파트를 연주하기도 했다.
리히터는 베를린스카야에게 콩쿠르에 얽매이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녀는 파리와 피렌체 실내악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레오나르도 상을 받는 등 성과를 거두었지만, 스승의 조언에 따라 주요 국제 콩쿠르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2. 2. 초기 경력과 리흐테르와의 만남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는 변호사인 어머니와 첼리스트이자 보로딘 현악4중주단의 창설자인 아버지 발렌틴 베를린스키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친분을 통해 미치슬라프 와인버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 많은 러시아의 저명한 예술가 및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다섯 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1년 뒤 그네신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예프게니 키신과 니콜라이 데미덴코를 가르친 것으로 유명한 안나 칸토르의 지도를 받았다. 17세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미하일 보스크레센스키를 사사했다.
14세부터 보로딘 현악4중주단과 함께 무대에 섰으며, 15세에는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데뷔를 했다. 이후 알렉산드르 루딘, 알렉산드르 크니아제프와 같은 재능 있는 젊은 음악가들과 함께 소련 전역을 순회하며 독주 및 실내악 연주 활동을 펼쳤다. 17세부터는 유리 바쉬멧, 빅토르 트레차코프 등 유명 음악가들과 협연했고, 19세 무렵에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주요 문화 중심지의 권위 있는 공연장에서 활발히 연주하는 연주자로 인정받았다.
13세 때는 발렌틴 셀리야노프 감독의 영화 위대한 우주 여행 (러시아)에 주연 중 한 명으로 출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에서 알렉세이 리브니코프가 작곡한 두 곡의 히트곡(Ты мне веришь или нет?ru, Млечный путьru)을 직접 불렀으며, 이 곡들은 현재까지도 러시아 라디오에서 자주 방송되고 있다. 영화의 성공 이후 많은 출연 제의가 있었으나, 음악에 전념하기 위해 모두 거절했다.
15세 때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를 만나 그의 각별한 후원을 받게 되었다. 베를린스카야는 리흐테르를 정신적인 아버지로 여겼으며, 그의 창조적인 분위기 속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는 리흐테르의 연주회에서 악보를 넘겨주는 페이지 터너 역할을 하기도 했다. 리흐테르와의 관계를 통해 유리 보리소프, 예프게니 므라빈스키, 갈리나 울라노바,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등 다양한 분야의 저명한 예술가들과 교류할 기회를 얻었다.
베를린스카야는 리흐테르가 푸시킨 미술관에서 창설한 «12월의 밤» 페스티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이 페스티벌은 매년 미술관 전시 주제와 연계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1985년 페스티벌에서는 리흐테르와 함께 피아노 연탄곡을 연주했으며, 다른 해에는 브리튼의 오페라 ''Le Tour d'Ecrou'' 공연에서 리흐테르를 대신하여 피아노 파트를 연주하기도 했다.
콩쿠르 참가를 선호하지 않았던 리흐테르는 베를린스카야에게도 콩쿠르에 연연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녀는 파리와 피렌체 실내악 콩쿠르에서 1등상을 수상하고 레오나르도 상을 받는 등 몇몇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리흐테르의 조언에 따라 주요 국제 콩쿠르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리흐테르의 집에서 젊은 지휘자 블라디미르 지바를 만나 결혼했고, 아들 드미트리 베를린스키[6]를 낳았다. 아들 드미트리는 현재 전문 첼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2. 3. 영화 출연
13세 때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는 음악 경력에 있어 특별한 계기를 맞는다. 발렌틴 셀리야노프 감독의 영화 위대한 우주 여행에서 세 주연 중 한 명으로 출연한 것이다.[6]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며 당대 젊은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다. 영화의 주요 삽입곡인 알렉세이 리브니코프 작곡의 히트곡 두 곡(Ты мне веришь или нетru, млечный путьru)을 직접 불렀고, 이 곡들은 오늘날까지도 러시아 라디오에서 꾸준히 방송되고 있다. 이 영화의 성공 이후 여러 영화 출연 제의를 받았으나, 음악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모두 거절했다.2. 4. 프랑스 이주와 활동
1990년대 초, 두 번째 남편인 바이올리니스트 안톤 마탈레프와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2][7] 그는 안톤 4중주단의 제1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에비앙 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2] 파리 정착 후, 세계적인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정기적으로 유럽에서 협연을 시작했다.[2] 파리 시청에서 첫 번째 콘서트를 가진 후, 당시 시장 부인이었던 시라크 여사는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에게 '러시아 뮤지컬 살롱'(Salon Musical Russe프랑스어)이라는 페스티벌을 창설할 기회를 제공했다.[2]안톤 마탈레프와의 사이에서 1991년 딸 마샤 마탈레프를 낳았다. 안톤 마탈레프는 2002년에 사망했다.
1990년대는 활발한 콘서트 활동과 다양한 음악가들과의 교류로 가득 찬 시기였다.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는 런던의 위그모어 홀과 바비칸 홀, 암스테르담의 콘세르트헤보우,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과 살 가보, 모스크바 음악원,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브뤼셀과 마드리드의 왕립 아카데미 등 세계 유수의 공연장에서 독주회 및 실내악 연주회를 가졌으며, 수많은 국제 음악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뛰어난 실내악 전문가로서 그녀의 재능은 여러 저명한 연주자들의 협연 요청으로 이어졌다. 주요 협연 파트너는 다음과 같다.
악기 | 연주자 |
---|---|
첼로 | 고티에 카퓌송, 앙리 데마르케트, 데이비드 게링가스, 알랭 뫼니에, 파벨 곰지아코프, 필립 뮐러, 도미니크 드 빌리엥쿠르 |
바이올린 | 제라르 풀레, 사라 넴타누 |
비올라 | 제라르 코세 |
피아노 | 장-마르크 루이다, 프랑수아-레네 뒤샤블 |
클라리넷 | 폴 마이어 |
현악 4중주단 | 모딜리아니 4중주단, 올랜도 4중주단, 다넬 4중주단, 파인 아트 4중주단, 상트페테르부르크 4중주단, 아르데오 4중주단 |
목관 5중주단 | 모라게스 5중주단 |
쇼스타코비치 음악의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으로 간주되며, 유명 파트너들과 함께 그의 모든 피아노 실내악곡을 비롯하여 희귀하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까지 연주했다.
2001년, 자신의 두 번째 페스티벌인 "파리 봄 뮤지컬"(Printemps Musical à Paris프랑스어)을 창설했다. 파리의 여러 장소에서 열린 이 페스티벌에서는 알렉산드르 스크랴빈의 프로메테우스를 파리풍으로 재해석하여 발표했으며, 풀랑크의 ''오바드''(Aubade프랑스어)를 조지 발란신 이후 처음으로 파리에서 무용수와 함께 공연하여 주목받았다. 이후 루아르에셰르 지역에서 열리는 새로운 음악 페스티벌 "라 클레 데 포르트"(La Clé des Portes프랑스어, 문 열쇠)의 공동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이 페스티벌은 '포르트 드 샹보르 기업 클럽'의 주도로 창설되었다.
연주 활동과 병행하여 2006년부터 알프레드 코르토가 창설한 파리 에꼴 노르말 드 뮤직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08년 12월 15일 아버지 발렌틴 베를린스키가 사망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2009년 6월 '베를린스키 협회'를 설립했다.
2011년, 프랑스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앙셀과 함께 피아노 듀오를 결성했다. 2012년 봄, 차이콥스키의 작품을 담은 첫 앨범을 «사피르 프로덕션즈» 레이블로 발매하여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2014년에는 프로코피예프의 발레 음악을 편곡한 두 번째 앨범을 «멜로디아» 레이블로 출시했다. 이 음반은 소련 붕괴 후 멜로디아에서 전적으로 러시아 외부에서 녹음과 제작을 담당한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2. 5. 교육 활동 및 베를린스키 협회 설립
교육 분야에서는 피아니스트 활동과 병행하여 2006년부터 파리 에콜 노르말 드 뮈지크 알프레드 코르토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또한, 2008년 12월 15일에 사망한 아버지 발렌틴 베를린스키를 기리는 의미에서 2009년 6월에 베를린스키 협회를 창립했다.2. 6. 피아노 듀오 활동
2011년, 그녀는 남편이자 프랑스 피아니스트인 아르튀르 앙셀과 함께 피아노 듀오를 결성했다. 2012년 초봄, 그들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작품을 담은 첫 음반을 «사피르 프로덕션즈» 레이블로 발매했으며, 이 음반은 다수의 상을 받았다. 2014년에는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발레곡을 담은 두 번째 앨범을 «멜로디아» 레이블로 출시했는데, 이는 소련 붕괴 후 처음으로 멜로디아가 녹음과 연주를 전적으로 담당한 음반이었다.그들의 듀오 활동은 국제적인 주목을 받아, 음반은 여러 국제 언론으로부터 상을 받았고, 도쿄 스프링 페스티벌, 곰뮤 데 뮤지칼 드 그슈타드 등 유명 페스티벌과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프라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권위 있는 오케스트라로부터 초청받아 협연하고 있다.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와 아르튀르 앙셀은 함께 루아르 고성(Châteaux of the Loire) 지역에서 "La Clé des Portes[3]" 음악 축제를 공동으로 창설했다. 또한 두 대의 피아노와 네 손을 위한 레퍼토리에 중점을 둔 륑지 피아노-피아노 페스티벌도 설립했다.
교육 분야에서도 피아노 듀오 활동을 이어가, 2022년에는 전 세계 젊은 음악가들을 위한 피아노-피아노 아카데미를 설립했으며, 2023년부터는 파리 에꼴 노르말 드 뮤직에서 피아노 듀엣 전문 강좌를 열어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3. 주요 페스티벌
1989년 파리로 이주한 후,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는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유럽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시작했다.[2] 파리 시청에서 첫 콘서트를 마친 뒤, 당시 시장 부인이었던 시라크 여사의 제안으로 '살롱 뮤지칼 뤼스'(Salon Musical Russe프랑스어)라는 음악 축제를 창설할 기회를 얻었다.
2001년에는 파리의 여러 장소에서 열리는 두 번째 페스티벌인 '파리 봄의 음악'(Printemps Musical à Paris프랑스어)을 창설했다. 이 페스티벌에서는 알렉산드르 스크랴빈의 파리 창작곡 프로메테우스를 선보였고, 조지 발란신 이후 파리에서는 처음으로 무용수와 함께 풀랑크의 ''오바드''(Aubade프랑스어)를 공연하는 등 주목할 만한 무대를 마련했다.
4. 음반 목록
- 슈만: 《12월의 밤 1985》 -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 보로딘 사중주단,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 - 멜로디야
- 라흐마니노프: 《첼로 소나타, 보칼리제, 비창 삼중주》 - 발렌틴 베를린스키, 안톤 마탈라예프,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
- 글린카: 《피아노 곡, 육중주》 -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 보로딘 사중주단, 그리고리 코발레프스키 - 2003 - Europe Arts
- 슈니트케: 《현악 사중주 3번, 5중주, 피아노 사중주》 - 보로딘 사중주단,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 - 버진 클래식스
- 멘델스존, 야나체크, 슈트라우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 제라르 풀레,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 - 2009 - Saphir Productions
- 차이콥스키: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호두까기 인형》 -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 아르튀르 앙셀 - 2011 - Saphir Productions[4]
-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 《신데렐라》 -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 아르튀르 앙셀 – 2014 - 멜로디야[5]
- 스크랴빈: 《전주곡, 소나타 4 & 9, 불꽃을 향하여》, 율리안 스크랴빈,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 - 2015 - 멜로디야
류드밀라 베를린스카야는 라흐마니노프, 글린카, 슈니트케, 멘델스존, 야나체크, 슈트라우스, 차이콥스키, 프로코피예프, 스크랴빈, 리스트, 슈만, 베토벤, 메트너, 라벨 등 다양한 작곡가의 작품을 녹음하여 풍부한 음반 목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녀의 음반들은 클래시카(Classica)의 쇼크(Choc)상과 그라모폰(Gramophone)의 에디터스 초이스(Editor's Choice)를 포함하여 수많은 상을 받았다.
참조
[1]
웹사이트
Récital Roméo et Juliette - Prokofiev / Dunayevsky / Bernstein - Salle Cortot | Musique | Actualités - Artistik Rezo, agitateur de vie culturelle | Art et culture
https://web.archive.[...]
2019-03-26
[2]
웹사이트
Rencontre avec Ludmila Berlinskaïa, pianist
https://www.ventoux-[...]
2019-02-15
[3]
웹사이트
Le festival "La Clé des Portes" déclare son amour à la musique classique
https://culturebox.f[...]
Culture Box
2018-07-25
[4]
뉴스
Ludmila Berlinskaia & Arthur Ancelle présentent "La Clé des Portes", le 1er festival de musique classique de Talcy
http://www.tutti-mag[...]
2013-07-23
[5]
웹사이트
Classical Net Review - Prokofieff - Ballet Suites for Two Pianos
http://www.classical[...]
[6]
문서
ベルリンスカヤの息子は[[パヴェル・ゴムジアコフ]]、[[ナタリア・チャコヴスカヤ]]、[[ローラン・ピドゥ]]と共に学んだプロのチェロ奏者になっている。
[7]
문서
[[アントン弦楽四重奏団]]のヴァイオリン第一奏者。当時、[[エビアン・コンクール]]でグランプリを獲得したばかり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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