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 드 샤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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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르노 드 샤티용은 12세기 십자군 시대의 인물로, 안티오키아 공국의 공작이자 트란스요르단의 영주였다. 그는 비잔틴 제국과 키프로스를 침공하고 이슬람교도들을 잔혹하게 다루었으며, 휴전 협정을 어기고 카라반을 공격하는 등 약탈과 해적 행위를 일삼았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그는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에게 처형당했으며, 예루살렘 왕국의 멸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르노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며, 그의 생애에 대한 정보는 주로 적대적인 이슬람 작가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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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 드 샤티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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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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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헤브론과 몽레알의 영주 |
출생일 | 1124년경 |
사망일 | 1187년 7월 4일 |
사망 장소 | 히틴 |
종교 | 가톨릭교 |
통치 정보 | |
안티오키아 공 | 1153년 ~ 1160년 또는 1161년 (콘스탄스와 공동 통치) |
울트르주르댕 영주 | 1176년 ~ 1187년 (스테파니 드 밀리와 공동 통치) |
배우자 | 콘스탄스 스테파니 드 밀리 |
자녀 | 아녜스 당티오슈 알리스 |
아버지 | 에르베 2세 드 동지 |
어머니 | 라 페르테밀롱 영주 위그 르 블랑의 딸 |
기타 정보 | |
프랑스어 이름 | Renaud de Châtillon |
2. 생애
르노의 출신은 명확하지 않다. 1147년 이전 어느 시점에선가 십자군에 참가하여 팔레스타인으로 왔고 안티오키아 공국에서 일하다가 1153년 안티오키아의 콩스탕스와 몰래 결혼했는데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던 보두앵 3세는 레날드의 비천한 신분 때문에 이 결혼에 반대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1156년 레날드는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에게 자신의 공작위를 승인하는 대가로 아르메니아의 반란을 공격한다고 했다가 마누엘이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다며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인 키프로스를 침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티오키아의 라틴 총대주교 이메리가 이에 반대하고 원정비용을 대는 것을 거부했는데 레널드는 총대주교를 붙잡아 발가 벗기고 머리의 상처에 꿀을 발라 뜨거운 태양아래의 성채에 매달아 놓았다. 태양과 벌레에 시달린 결국 총대주교 이메리는 원정비용을 지급할 수밖에 없었다. 레날드의 군사들은 키프로스를 약탈하고 파괴하고 유린했다.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은 키프로스에 대한 복수로 군사를 일으켜 시리아로 진격해 왔다. 강력한 대군앞에 두자 레날드는 맨발로 벌벌 기면서 황제에게 자비를 구했고 1159년 황제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안티오키아를 동방 정교회로 개종할 것을 서약했다. 마누엘이 안티오키아에 입성했을 때 레날드는 굴종의 표시로 황제의 말을 끌고 입성했다.
이듬해 레날드는 이슬람군에 포로로 붙잡혔고 16년동안 알레포에 감금되었다. 그는 막대한 몸값을 주고 1176년 풀려났다. 이 때의 복수로 그는 평생동안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이슬람교도를 무자비하게 다뤘다.
아내 콩스탕스가 1163년 죽고 그는 또다른 부유한 미망인 스테파니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으로 사해 근처의 알 카라크 성채를 손에 넣었다. 이 성채는 다마스쿠스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통상로의 요충지였다. 이 성채의 영주로 있으면서 레날드는 적들과 이슬람 포로를 잔인하게 다루어 성채에서 밀어 바위로 떨어뜨리는 잔학 행위로 악명을 떨쳤다.
1177년 그는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와 함께 몽기사르 전투에 참가하여 살라흐 앗 딘을 물리치는 데 일조했다. 살라흐 앗 딘은 겨우 도망치고 십자군과 휴전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1181년 레날드는 휴전조약을 깨고 알 카라크 성채 근처를 지나던 카라반을 공격했고 살라딘은 이에 항의 했지만 보두앵 4세는 레날드를 통제 할 수 없었다. 결국 이듬해 이슬람과 기독교국가들과의 전쟁이 재개 되었다. 레날드는 홍해에 선단을 띄워 해적행위를 시작했고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 근처까지 유린하고 다녔다. 이 행위는 살라흐 앗 딘의 분노를 샀고 살라흐 앗 딘은 레날드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하고 카라크를 공격했다. 당시 카라크에서는 레날드의 양자 엥프레와 예루살렘 공주 이사벨은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 이때 트리폴리 백작 레몽의 도움으로 카라크는 함락되지 않았다.
1186년 시빌라와 뤼지냥의 기가 예루살렘 왕이 되자 왕국은 기의 "궁정파"와 트리폴리의 레몽, 이벨린가문의 귀족파로 나뉘었는데 레날드는 기의 편에 섰다. 그해 말 레날드는 또 다시 살라딘과의 휴전협정을 어기고 다마스쿠스와 이집트를 오가는 카라반을 공격했다. 티레의 기욤등 당시 기독교측 사료에는 이 카라반에 메카의 순례여행을 다녀오던 살라흐 앗 딘의 누이들이 있었고 레날드로부터 모욕을 당했다고 전해지지만 이슬람측 자료에는 이런 언급이 없다. 예루살렘의 왕 기는 레날드를 처벌하여 사라흐 앗 딘의 환심을 사려했으나 레날드는 자신의 땅은 자신이 주인이라며 처벌을 거부했고 살라흐 앗 딘은 두번이나 휴전협정을 어기고 이슬람의 성지를 모욕한 레날드를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목을 벨 것을 맹세했다.
1187년 7월 4일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 기와 레몽, 레날드, 성전 기사단, 병원기사단등 기독교 연합군과 하틴 전투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는 십자군의 전략적 실수로 기독교군의 몰살로 이어졌고 기와 레날드는 포로로 붙잡혔다. 살라흐 앗 딘은 기와 레날드를 자신의 천막으로 끌고 오게 했다. 살라흐 앗 딘은 레날드에게 협정위반을 준엄하게 꾸짖고 기 왕이 보는 앞에서 직접 그의 목을 쳤다. 기는 벌벌 떨면서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살라딘은 기를 살려주었다.
레날드는 당시에는 이슬람의 손에 순교된 전사의 이미지로 알려졌지만 현재는 포악한 강탈자, 해적질 및 수차례의 협정 위반과 비신사적 약탈행위로 예루살렘 왕국의 멸망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2. 1. 초기 생애와 십자군 참여
르노 드 샤티용은 프랑스 왕국의 돈지 영주 에르베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147년 이전 어느 시점에선가 제2차 십자군에 참가하여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갔다. 1153년 초에는 예루살렘 왕국의 왕 보두앵 3세의 군대에서 아스칼론 포위전에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르노는 안티오키아 공국에서 일하다가 1153년 안티오키아의 콩스탕스와 몰래 결혼했다.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2세의 외동딸이자 후계자인 콘스탄스는 1148년 6월 28일 이나브 전투에서 남편 푸아티에의 레이몽이 전사하면서 과부가 되었고, 보두앵 3세는 콘스탄스가 재혼하도록 설득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그의 후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콘스탄스는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가 제안한 후보도 거절했다. 보두앵 3세는 레날드의 비천한 신분 때문에 이 결혼에 반대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결국 승낙했다.
1156년 르노는 마누엘 1세 콤네누스에게 자신의 공작위를 승인하는 대가로 아르메니아의 반란을 공격한다고 했다가 마누엘이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다며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인 키프로스를 침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티오키아의 라틴 총대주교 이메리가 이에 반대하고 원정비용을 대는 것을 거부했는데, 르노는 총대주교를 붙잡아 발가 벗기고 머리의 상처에 꿀을 발라 뜨거운 태양아래의 성채에 매달아 놓았다. 태양과 벌레에 시달린 이메리는 결국 원정비용을 지급할 수밖에 없었고, 르노의 군사들은 키프로스를 약탈하고 파괴하고 유린했다.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은 키프로스에 대한 복수로 군사를 일으켜 시리아로 진격해 왔다. 강력한 대군앞에 르노는 맨발로 벌벌 기면서 황제에게 자비를 구했고 1159년 황제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안티오키아를 동방 정교회로 개종할 것을 서약했다. 마누엘이 안티오키아에 입성했을 때 르날드는 굴종의 표시로 황제의 말을 끌고 입성했다.
이듬해 레날드는 이슬람군에 포로로 붙잡혔고 16년동안 알레포에 감금되었다. 그는 막대한 몸값을 주고 1176년 풀려났다.
2. 2. 안티오키아 공작 시절
1153년 안티오키아의 콩스탕스와 몰래 결혼하여 안티오키아 공작이 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 보두앵 3세는 르노의 낮은 신분 때문에 이 결혼을 반대했다.1156년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인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약탈하고 파괴했다. 안티오키아의 라틴 총대주교 이메리가 원정 비용 지급을 거부하자, 르노는 이메리를 고문하고 감금했다.
이에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는 군사를 일으켜 시리아로 진격해 왔다. 르노는 1159년 마누엘 1세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안티오키아를 동방 정교회로 개종할 것을 서약했다. 마누엘 1세가 안티오키아에 입성했을 때 르노는 황제의 말을 끌고 입성했다.
1160년 또는 1161년 이슬람 군에 포로로 붙잡혀 16년 동안 알레포에 감금되었다가 1176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2. 3. 트란스요르단 영주 시절
르노는 안티오키아 공국에서 일하다가 1153년 안티오키아의 콩스탕스와 몰래 결혼했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 보두앵 3세는 르노의 비천한 신분 때문에 이 결혼에 반대했다.1156년 르노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에게 자신의 공작위를 승인해주는 대가로 아르메니아의 반란을 공격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마누엘 1세가 약속을 어기자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약탈, 파괴, 유린했다. 안티오키아의 라틴 총대주교 이메리가 원정 비용 지급을 거부하자, 르노는 이메리를 발가벗겨 머리 상처에 꿀을 바른 후 뜨거운 태양 아래 성채에 매달았다. 결국 이메리는 원정 비용을 지급했다.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는 키프로스 침공에 대한 복수로 군사를 일으켜 시리아로 진격했다. 르노는 마누엘 1세에게 자비를 구하며 1159년 배상금을 지불하고 안티오키아를 동방 정교회로 개종할 것을 서약했다. 마누엘 1세가 안티오키아에 입성했을 때 르노는 굴종의 표시로 황제의 말을 끌고 입성했다.
이듬해 르노는 이슬람군에 포로로 붙잡혀 16년 동안 알레포에 감금되었다가 1176년 막대한 몸값을 주고 풀려났다. 이때의 복수로 그는 평생동안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이슬람교도를 무자비하게 다뤘다.
1163년 아내 콩스탕스가 죽자, 르노는 사해 근처의 알 카라크 성채를 소유한 부유한 미망인 스테파니와 재혼했다. 알 카라크 성채는 다마스쿠스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통상로의 요충지였다. 르노는 알 카라크 성채의 영주로서 이슬람 포로를 잔인하게 다루며 악명을 떨쳤다.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와 함께 살라흐 앗 딘을 물리치는 데 일조했다. 살라흐 앗 딘은 십자군과 휴전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1181년 르노는 휴전 조약을 깨고 알 카라크 성채 근처를 지나던 카라반을 공격했다. 보두앵 4세는 르노를 통제할 수 없었고, 이듬해 이슬람과 기독교 국가들과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르노는 홍해에 선단을 띄워 해적 행위를 시작했고,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 근처까지 유린했다. 살라흐 앗 딘은 분노하여 르노에게 복수를 맹세하고 카라크를 공격했다. 당시 카라크에서는 르노의 양자와 예루살렘 공주 이사벨의 결혼식이 진행 중이었는데, 트리폴리 백작 레몽의 도움으로 카라크는 함락되지 않았다.
1186년 시빌라와 뤼지냥의 기가 예루살렘 왕이 되자, 르노는 기의 편에 섰다. 그해 말 르노는 또다시 살라딘과의 휴전 협정을 어기고 다마스쿠스와 이집트를 오가는 카라반을 공격했다. 티레의 기욤 등 기독교 측 사료에는 이 카라반에 살라흐 앗 딘의 누이들이 있었고 르노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전해지지만, 이슬람 측 자료에는 이런 언급이 없다. 르노는 자신의 땅은 자신이 주인이라며 처벌을 거부했고, 살라흐 앗 딘은 르노의 목을 벨 것을 맹세했다.
2. 4. 하틴 전투와 최후
르노는 1153년 안티오키아의 콩스탕스와 몰래 결혼하고, 1156년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인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약탈하였다. 1159년 황제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안티오키아를 동방 정교회로 개종할 것을 서약했다. 이듬해 이슬람군에 포로로 붙잡혔다가 1176년 풀려난 후, 알 카라크 성채를 손에 넣고 이슬람 포로를 잔혹하게 다뤄 악명을 떨쳤다. 1181년 휴전조약을 깨고 카라반을 공격했으며, 1186년 예루살렘 왕이 된 뤼지냥의 기의 편에 섰다.1186년 말 또는 1187년 초, 르노는 또다시 휴전협정을 어기고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가는 부유한 대상을 공격하여 약탈하고, 모든 상인과 가족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븐 알아시르는 이 대상에 무장한 사람들이 동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살라딘은 르노에게 배상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으나, 르노는 이를 거부하였다.[2] 살라딘은 기에게 사절을 보냈고, 기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르노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며 "그는 자신의 땅의 영주였고, 귀도 그의 땅의 영주였으며, 그는 사라센들과 휴전을 맺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살라딘은 르노를 직접 죽이겠다는 맹세를 하며 왕국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했다.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은 살라딘에게 대패하였고, 기와 르노는 포로로 붙잡혔다. 살라딘은 기에게 얼음 장미수가 담긴 잔을 건넸고, 기는 마신 후 르노에게 건넸다. 살라딘은 르노에게 협정위반을 꾸짖고 직접 그의 목을 쳤다. 르노는 당시에는 이슬람의 손에 순교된 전사의 이미지로 알려졌지만, 현재는 포악한 강탈자, 해적질 및 수차례의 협정 위반과 비신사적 약탈행위로 예루살렘 왕국의 멸망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3. 평가와 논란
르노의 생애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르노를 적대시했던 이슬람교도 작가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바하우딘 빈 샤다드는 샐라딘의 전기에서 그를 "괴물 같은 이교도이자, 끔찍한 박해자"라고 기록했다[3]. 샐라딘은 르노가 570년 메카 파괴를 시도했다고 여기며, 꾸란의 알-필 편(수라)에서 "코끼리"라고 불리는 에티오피아 왕에 비유했다. 이븐 알-아시르는 르노를 "프랑크인 중 가장 잔혹한 인물 중 하나이며, 가장 악마적인 인물 중 하나"라고 평가하며, "이슬람교도에게 가장 강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현대에도 르노를 적의 상징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2010년 화물기 안에 숨겨져 있던 두 개의 우편 폭탄 중 하나에는 분명 레노를 가리키는 "Reynald Krak"이라는 수신인 주소가 적혀 있었다.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르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대부분의 기독교도 작가들은 르노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기욤 드 티르(Guillaume de Tyr)의 영향을 받았다. 『에라클 수기(Eracles 연대기)』는 1186년과 1187년 연말에 르노가 카라반을 공격한 것이 "예루살렘 왕국의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밀턴에 따르면, 현대의 역사가들은 대개 르노를 "이슬람교도의 목표에 대한 것 이상으로 기독교도에게 해를 끼친 고독한 자객"으로 다루어왔다. 런시맨(Runciman)은 르노에 대해, 트랜스요르단을 통과하는 부유한 카라반을 앞에 두고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약탈자라고 말했고, 르노가 1180년에 합의된 휴전 기간 중에 카라반을 공격한 것은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정책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코브(Cobb)는 르노를 "샐라딘에게 있어서 무자비한 강적"이라고 설명하며, 르노의 도발적인 행동이 예루살렘 왕국에 치명적인 것이 된 샐라딘의 침공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독교도 작가들 중에는 르노를 순교자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기 드 루시냥(Guy de Lusignan)의 형제인 로부터 르노의 죽음을 들은 는, 그의 죽음 직후 레노에게 『안티오크 공 레노의 수난』이라는 제목의 책을 바쳤다. 이 수난 기록은 르노가 햇틴(히틴)에서 참십자가를 지키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해밀턴은 레노에 대해, 십자군 국가의 국경을 따라 존재하던 이슬람 국가들이 샐라딘의 손에 의해 통일되어 가는 상황을 여러 차례 저지하려고 했던 "경험이 풍부하고 책임감 있는 십자군 지도자"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코브는 이 해밀턴의 설명에 대해, 레노에 대한 "서면상의 악평"을 "불식시키려는 시도"라고 말하고 있다. 조티슈키(Jotischky)는 레노의 카라반 공격에 대한 해밀턴의 정당성 주장에 대해 언급하면서, 동시에 이 휴전 위반 행위는 샐라딘에게 침략의 구실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역사가 알렉스 말렛(Alex Mallett)은 레노의 해군 원정을 "십자군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 중 하나이면서도, 아직까지 가장 간과되고 있는 사건 중 하나"라고 부르고 있다.
3. 1. 부정적 평가
르노 드 샤티용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시각과 일부 긍정적인 시각이 공존한다.대부분의 무슬림 저술가들은 르노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바하우딘 이븐 샤다드는 자신의 저서에서 르노를 "괴물 같은 이교도이자 끔찍한 압제자"[3]라고 묘사했다. 이븐 알 아티르는 르노를 "가장 악마 같은 프랑크인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하며, 그가 무슬림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가졌다고 덧붙였다. 2010년에는 르노의 이름을 딴 우편 폭탄이 발견되기도 하는 등, 현대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역시 르노를 적의 상징으로 여긴다.
기독교 저술가들 사이에서도 르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존재한다. 티르의 빌헬름의 영향을 받은 12-13세기 기독교 저술가들은 르노의 무모한 행동이 예루살렘 왕국 멸망의 원인 중 하나라고 보았다. 근대 역사가들 역시 르노를 "기독교보다 [무슬림] 대의에 더 해를 끼친 독불장군"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런시먼은 르노를 약탈자로 묘사하며, 그의 탐욕과 무모함이 십자군 국가에 위기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일부 기독교 저술가들은 르노를 신앙을 위한 순교자로 옹호하기도 한다. 블루아의 피터는 르노에게 헌정하는 책을 통해 그의 죽음을 순교로 묘사했다. 현대 역사가 해밀턴은 르노를 "경험이 풍부하고 책임감 있는 십자군 지도자"로 평가하며, 그의 군사적 행동이 십자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한다.
3. 2. 긍정적 평가 (소수 의견)
르노 드 샤티용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몽기사르 전투에서 살라딘을 상대로 승리하는 데 기여하는 등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운 십자군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현대 역사가들 중 해밀턴은 르노를 십자군 국가의 국경을 따라 무슬림 영토를 통합하는 것을 여러 차례 저지하려 한 "경험이 풍부하고 책임감 있는 십자군 지도자"로 묘사한다. 그의 논평은 콥에 의해 르노의 "악평을 불식시키려는 시도"로 묘사된다. 역사가 알렉스 말렛은 르노의 해상 원정을 "십자군 역사상 가장 특별한 사건 중 하나이자 가장 간과된 사건 중 하나"라고 언급한다.
3. 3. 논란
르노 드 샤티용의 삶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무슬림 저술가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바하우딘 이븐 샤다드는 살라딘 전기에서 그를 "괴물 같은 이교도이자 끔찍한 압제자"라고 묘사했다.[3] 살라딘은 르노를 570년 메카를 파괴하려 했던 악숨 왕국의 왕과 비교하며, 꾸란의 알 필 수라에서 "코끼리"라고 불렸던 자와 비교했다. 이븐 알 아티르는 그를 "가장 악마 같은 프랑크인 중 한 명, 가장 악마적인 자"라고 묘사하며, 르노가 "무슬림들에게 가장 강한 적대감을 가졌다"고 덧붙였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여전히 르노를 그들의 적의 상징으로 여기며, 2010년 화물기에서 발견된 두 개의 우편 폭탄 중 하나는 명백히 그를 가리키는 "레날드 크락(Reynald Krak)"이라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12세기와 13세기에 르노에 대해 쓴 대부분의 기독교 저술가들은 르노의 정적이었던 티르의 빌헬름의 영향을 받았다. Estoire d'Eracles프랑스어의 저자는 1186년과 1187년 경계에서 일어난 르노의 대상 공격이 "예루살렘 왕국의 멸망의 이유"라고 주장했다. 근대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르노를 "기독교보다 [무슬림] 대의에 더 해를 끼친 독불장군"으로 다루었다. 런시먼은 그를 울트레조르당을 지나는 부유한 대상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던 약탈자로 묘사하며, 르노가 1180년 휴전 중에 대상을 공격한 것은 "그의 뜻에 반하는 정책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콥은 르노를 살라딘의 "끊임없는 숙적"으로 소개하며, 그의 도발적인 행동이 필연적으로 살라딘의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치명적인 침략으로 이어졌다고 덧붙인다.
일부 기독교 저술가들은 르노를 신앙을 위한 순교자로 여겼다. 루지냥의 제프리로부터 르노의 죽음을 알게 된 블루아의 피터는 그의 죽음 직후 그에게 책 (''안티오크의 레이날드 왕자의 수난'')을 헌정했다. ''수난''은 르노가 하틴에서 참십자가를 지켰다고 강조한다. 현대 역사가들 중 해밀턴은 르노를 십자군 국가의 국경을 따라 무슬림 영토를 통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한 "경험이 풍부하고 책임감 있는 십자군 지도자"로 묘사한다. 그의 논평은 콥에 의해 르노의 "악평을 불식시키려는 시도"로 묘사된다. 역사가 알렉스 말렛은 르노의 해상 원정을 "십자군 역사상 가장 특별한 사건 중 하나이자 가장 간과된 사건 중 하나"라고 언급한다.
4. 대중문화 속 르노 드 샤티용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이 감독을 맡고 2005년에 개봉된 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에서 르노 드 샤티용은 기 드 루지냥(Guy de Lusignan)과 템플 기사단과 함께 악역으로 등장한다. 브렌던 글리슨(Brendan Gleeson)이 연기한 르노는 영화 속에서 이슬람교도들과 의도적으로 갈등을 일으켜 이슬람교도들을 완전히 멸망시키려는 호전적인 기독교 광신자로 묘사된다.
5. 한국과의 관계 (추가)
참조
[1]
서적
The Rare and Excellent History of Saladin
[2]
서적
The Chronicle of Ibn al-Athir for the Crusading Period from Al-Kamil Fi'l-Ta'rikh
[3]
서적
The Rare and Excellent History of Sala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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