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나 보 바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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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나 보 바르디(1914–1992)는 이탈리아 출신의 브라질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 미술관 큐레이터였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활동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브라질로 이주하여 건축 활동을 이어갔다. 브라질에서 그는 상파울루 미술관(MASP)을 설계했고, 유리 집, SESC 폼페이아 공장, 테아트로 오피시나 등 다양한 건축물을 설계했다. 그의 건축은 브라질의 문화와 자연을 반영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간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두었다. 보 바르디는 가구 디자인, 드로잉, 저술 활동도 활발히 펼쳤으며, 브라질 건축과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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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 보 바르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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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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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Achillina Bo |
출생 | 1914년 12월 5일 |
출생지 | 로마, 이탈리아 |
사망 | 1992년 3월 20일 |
사망지 | 상파울루, 브라질 카사 데 비드루 |
배우자 | 피에트로 마리아 바르디 |
로마자 표기 | Lina Achillina Bo |
직업 | |
직업 | 건축가 |
학력 | |
출신 대학 | 로마 사피엔자 대학교 |
주요 작품 | |
주요 건축물 | 상파울루 미술관 테아트로 오피시나 카사 두 베닌 세스 폼페이아 카사 데 비드루 (유리의 집) |
주요 프로젝트 | 해당 사항 없음 |
경력 | |
소속 | 해당 사항 없음 |
2. 생애
리나 보 바르디는 1914년 로마에서 태어나 1939년 로마 건축 대학을 졸업하고 건축가의 길을 걸었다.[4]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하여 나치 독일에 저항하는 운동에 참여했다.[7] 1946년 피에트로 마리아 바르디와 결혼했다.[6]
전후 바르디 부부는 남아메리카로 이주하여 브라질에 정착했다.[19] 1951년 브라질 시민권을 취득하고, 모룸비 지역에 첫 건축 작품인 "유리의 집(Casa de Vidro)"을 완공했다.[21]
1947년 아시스 샤토브리앙의 제안으로 피에트로 마리아 바르디가 미술관 설립을 맡게 되면서, 리나 보 바르디는 상파울루 미술관(MASP) 설계를 담당했다.[8] 1968년 완공된 상파울루 미술관(MASP)은 독특한 구조와 전시 방식으로 유명하다.
1977년 설계한 쎄시 폼페이아(SESC Pompéia)는 기존 공장 건물을 재활용한 "레저 센터"로,[13][19] 노동과 장인 정신을 중시하는 보 바르디의 철학을 보여준다.
보 바르디는 건축 외에도 보석, 의상, 무대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1992년 유리의 집(Casa de Vidro)에서 생을 마감했다.[4]
2. 1. 이탈리아 유년기 (1914-1946)
1914년 로마에서 태어난 아킬리나 보는 어릴 때부터 예술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건축가의 꿈을 키웠고, 1939년 로마 건축 대학을 졸업했다.[4] 졸업 후 밀라노로 이주하여 건축가 카를로 파가니와 함께 일했으며, 지오 폰티와 협업하여 건축 저널리즘 분야에서 활동했다.[5]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1942년에 개설한 자신의 설계 사무소는 1943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6][19]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잡지와 신문에 삽화를 그리며 활동을 이어갔고, 1944년부터 1945년까지는 도무스지의 부국장을 역임했다.[6][19]
전쟁 중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하여 나치 독일에 맞서는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7] 1945년에는 도무스지의 의뢰로 이탈리아 전역을 돌며 전쟁으로 파괴된 건축물을 기록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카를로 파가니, 사진작가 페데리코 파텔라니, 브루노 제비와 함께 주간지 A를 창간하기도 했다.[7]
1946년, 로마로 돌아와 예술 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피에트로 마리아 바르디와 결혼했다.[6]
2. 2. 브라질 정착과 건축 활동 (1946-199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바르디 부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탈리아에서의 삶에 어려움을 느껴 남아메리카로 여행을 떠났다.[19] 리우에서 브라질 건축가 협회(IAB)의 환영을 받은[4] 리나 보 바르디는 브라질에 제2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녀는 브라질에서 빠르게 다시 활동을 시작했고, 이 나라는 그녀의 창의적 사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남편과 함께 잡지 ''하비타트(Habitat)''를 공동 창간했는데,[4] 이는 인간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도록 설계된 이상적인 실내 공간을 "서식지"로 개념화한 보 바르디의 생각을 반영했다.1947년, 아시스 샤토브리앙은 남편 피에트로 마리아 바르디에게 미술관 설립 및 운영을 제안했다. 리나 보 바르디는 리우를 선호했지만, 상파울루가 위치로 선택되었다. 상파울루 미술관(MASP)은 10월 2일에 설립되었으며, Diários Associados 본사 2층에 임시 사무실을 마련했다. 보 바르디는 이 건물 여러 층을 미술관으로 개조하는 설계를 했다.[8] 그녀는 또한 상파울루 아베니다 아르바로 데 카르발류에 있는 Diários Associados의 새로운 본사를 설계했으며, 브라질 보석을 사용하여 보석을 디자인했다. 또한, 브라질에 도착한 직후 상파울루 남부의 처녀림 일부인 모룸비에 있는 자신의 집을 설계하기 시작했다.[9]
1948년, 루치안 코른골드가 설계한 건물 18층에 스튜디오 다르테 팔마가 설립되어 피에트로 마리아 바르디, 보 바르디, 지안카를로 팔란티(1951년까지), 발레리아 피아센티니 시렐(골동품 담당)이 함께 일하게 되었다.[4]
1950년, 보 바르디와 지안카를로 팔란티는 Diários Associados 건물 내 MASP 박물관 공간을 재설계하여, 엘 리시츠키, 도이체 베르크분트, 프랑코 알비니의 작업과 같은 전간기 아방가르드 예술적 실천에 뿌리를 둔 전시 디자인으로 전환했다.[10]
1951년, 자신의 첫 번째 건축물인 모룸비 지역의 "유리 집"을 완성하고,[21] 같은 해에 브라질 시민권을 취득했다. 유리의 집은 이탈리아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브라질 문화에 몰입하면서 그녀의 창의적 사고는 더욱 표현주의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평론가 로완 무어는 유리의 집이 “주변 사람, 사물과 상호작용“한다며 리나 보 바르디의 건축이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고 잃어버린 감각을 탐색, 회복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고 평했다.[50]
1955년, 상파울루 대학교 건축 및 도시 계획 학부의 강사가 되었다.[4] 1957년에 "건축 이론 교육에 대한 예비 기여"라는 원고를 제출하여 정규직을 얻고자 했다.[11]
1959년, 극작가 마르팀 곤칼베스와 협력하여 이비라푸에라에서 바히아를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는 V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중심부에서 브라질 바히아 주의 예술 작품, 공예품, 음악, 이미지를 전시했다.[12]
1977년, SESC 폼페이아 공장을 설계했는데, 보 바르디는 '문화'라는 단어가 너무 무겁다고 느껴 이 장소가 휴식을 취하고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포츠 및 문화 센터 대신 "레저 센터"라고 불렀다.[13][19]
1989년, 74세의 보 바르디는 상파울루 대학교에서 그녀의 작품을 처음으로 전시하는 영예를 얻었다.[14]
보 바르디는 보석, 의상, 세트 디자인을 제작하기도 했다.[19]
1992년 3월 20일, 카사 드 비드루에서 사망했다.[4] 사망 당시 새로운 상파울루 시청과 베라 크루스를 위한 문화 센터 설계를 남겼다.
2. 3. 브라질 시민권 취득과 주요 작품 활동
보 바르디는 1951년에 브라질 시민권을 취득했고, 같은 해 모룸비 지역에 자신의 첫 건축 작품인 "유리의 집(Casa de Vidro)"을 완공했다.[21] 이 집은 이탈리아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브라질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녀의 창의적인 사고는 점차 표현주의적으로 변화했다.1955년, 보 바르디는 상파울루 대학교 건축 및 도시 계획 학부의 강사가 되었다.[4] 1957년에는 "건축 이론 교육에 대한 예비 기여"라는 원고를 제출하여 정규직을 얻고자 했다.[11]
1959년, 보 바르디는 극작가 마르팀 곤칼베스와 함께 이비라푸에라 공원에서 바히아를 주제로 한 전시회를 기획했다. 이 전시회는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중심부에서 브라질 바히아 주의 예술 작품, 공예품, 음악, 이미지를 선보였다.[12] 이 전시회는 이후 상파울루 미술관(MASP)의 '크리스탈 이젤'로 이어지는 중요한 디자인 전환점이 되었다.[12]
1947년, 아시스 샤토브리앙은 피에트로 마리아 바르디에게 미술관 설립 및 운영을 제안했고, 보 바르디는 상파울루 미술관(MASP) 설계를 맡았다. 보 바르디는 Diários Associados 본사 2층에 임시로 마련된 미술관을 여러 층으로 확장하는 설계를 했다. 초기 스케치는 MoMA 건물의 외관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최종적으로는 실내 디자인에 집중했다.[8] 1968년에 완공된 상파울루 미술관(MASP)은 보 바르디의 대표작 중 하나로, 독특한 구조와 '크리스탈 이젤'을 활용한 전시 방식으로 유명하다.
1977년, 보 바르디는 쎄시 폼페이아(SESC Pompéia)를 설계했다. 보 바르디는 '문화'라는 단어 대신 스포츠 및 문화 센터를 "레저 센터"라고 불렀다.[13][19] 쎄시 폼페이아(SESC Pompéia)는 기존 공장 건물을 재활용하여 만든 공간으로, 노동과 장인 정신을 중시하는 보 바르디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
보 바르디는 건축뿐만 아니라 보석, 의상, 무대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19] 1992년 3월 20일, 보 바르디는 유리의 집(Casa de Vidro)에서 사망했다.[4]
3. 주요 작품
리나 보 바르디는 다양한 건축물을 설계했으며, 그중 대표적인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작품명 | 완공 연도 | 설명 |
---|---|---|
-- -- 카사 지 비드로(Casa de Vidro) | 1951년 | 마타 아틀란티카 열대 우림 속에 위치한 보 바르디 부부의 자택이다. 필로티 구조를 통해 건물 아래로 풍경이 흐르도록 설계되었으며,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한 초기 사례 중 하나이다. |
바르디의 보울(Bardi's Bowl) | 1951년 | 의자 |
-- 상파울루 미술관(MASP) | 1968년 | 아시스 샤토브리앙의 초대로 설계한 건물이다. 프리스트레스트 콘크리트를 사용한 단순하고 기념비적인 형태가 특징이며, 74미터 길이의 매달린 볼륨과 4개의 빨간색 콘크리트 기둥으로 구성된다. 건물 중앙의 열린 공간은 아베니다 파울리스타에 광장을 제공하고, 도시 저지대의 전망을 가리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
-- -- -- 쎄시 폼페이아(SESC Pompéia) | 1986년 | SESC의 의뢰로 상파울루의 옛 공장을 레저 및 레크리에이션 센터로 재개발한 프로젝트이다. 기존 구조와 새로운 콘크리트 타워를 결합하고, 공중 통로로 연결하여 독특한 공간을 만들었다. |
테아트로 오피시나(Teatro Oficina) | 1991년 | 상파울루의 불에 탄 사무실 건물을 트로피칼리아 운동 극단을 위한 극장으로 개조한 프로젝트이다. 페인트칠된 비계로 구성된 가변 공간을 통해 배우와 관객, 무대와 무대 뒤의 구분을 없앴다. |
솔라 두 운냥(Solar do Unhão) | 1959년 | 바이아 주에 위치한 설탕 공장을 공예 박물관으로 개조한 프로젝트이다. |
카이피라스, 카피아스: 파우 아 피케(Caipiras, Capiaus: Pau a Pique) | 1984년 | 전시회 |
3. 1. 유리의 집 (Casa de Vidro, 1951)

1951년 리나 보 바르디는 상파울루를 둘러싼 마타 아틀란티카 열대 우림 속에 남편과 함께 살기 위해 "Casa de Vidro"(유리 주택)를 설계했다. 보 바르디는 자신의 저술에서 시골 건축을 칭찬한 것과 일치하는 부지의 거친 풍경을 높이 평가했다.[18] 이 구조는 가정 건축에서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한 초기 사례 중 하나이다.[19] 7,000제곱미터 부지에 위치한 이 건물은 오스왈도 브라트케의 스튜디오 하우스, 오스카 아메리카노와 마리아 루이사 아메리카노를 위한 그의 프로젝트와 함께 모룸비 지역의 처음 세 주택 중 하나였다.[2][18]
이 건물은 보 바르디의 첫 번째 건축 프로젝트이자, 이탈리아 모더니즘에 대한 브라질 언어를 찾으려는 첫 번째 시도였다.[18] 그녀는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의 판스워스 하우스와 찰스 & 레이 임스의 케이스 스터디 하우스 8번과 같은 미국 모더니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이 두 작품은 모두 당시 널리 알려졌다. 또한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열린 ''브라질 빌드'' 박람회에 소개된 버나드 루도프스키의 안뜰 주택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20]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모더니즘을 브라질의 구조에 맞춰 맥락화하고, 지역 형태를 그대로 따라하기보다는 그 형태의 아이디어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디자인에 통합하여 지역 환경을 기념하고자 했다.[1]
집의 주요 부분은 가늘고 둥근 기둥이 있는 얇은 철근 콘크리트 슬래브 사이에 수평으로 배치되어 있다. 기둥은 필로티로, 건물 아래로 풍경이 흐르게 한다. "유리 주택"이라는 이름은 구조물이 지면 위를 떠다니는 듯한 느낌과 대형 유리 패널 때문에 붙여졌다.[18] 내부의 주요 생활 공간은 아래 정원의 나무가 집의 중심부까지 자라도록 허용하는 안뜰을 제외하고 거의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집에는 식당, 서재, 독립형 벽난로 주변의 휴식 공간 등 다양한 기능에 할당된 구역이 있지만, 모두 유리를 통해 보이는 숲의 풍경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론적으로는 유리 패널이 수평으로 열리지만,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도록 유도하는 발코니는 없다.
생활 공간은 집의 절반에 불과하다. 나머지 절반은 언덕 꼭대기, 거실의 북쪽에 있는 단단한 땅에 자리 잡고 있다. 침실이 좁은 안뜰을 향하고 있으며, 그 반대편에는 직원 구역의 텅 빈 벽이 있다. 부엌만이 이 구역을 가로지르며 하인과 안주인이 공유하는 공간이며, 다양한 노동 절약 장치가 갖춰져 있다.
이 집은 모룸비의 남은 부지를 판매하기 위한 개발업자의 캠페인 모델이 될 것이며, "건축과 자연"이라는 슬로건은 보 바르디의 주요 작품 주제를 반영했다.[18]
3. 2. 상파울루 미술관 (Museu de Arte de São Paulo, MASP, 1968)
상파울루 미술관(MASP)은 리나 보 바르디의 대표작 중 하나로, 1957년부터 1968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아시스 샤토브리앙의 초대로 미술관 설립에 참여하게 된 보 바르디 부부는 그의 도움으로 방대한 예술 컬렉션을 수집했다.[6]보 바르디는 이 미술관을 "가난한 건축"이라 칭하며, 단순하면서도 기념비적인 형태를 추구했다. 장식이 없는 프리스트레스트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날것 그대로의 효율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건물은 74미터 길이의 매달린 볼륨을 특징으로 하며, 4개의 선명한 빨간색[22][23][24] 콘크리트 기둥이 건물을 지탱하고 있다. 지상층 위아래로 2층의 갤러리가 있다. 건물의 열린 중간 부분은 상파울루의 주요 거리인 아베니다 파울리스타에 광장을 개방하고, 도시 저지대의 전망을 가리지 않도록 설계되었다.[25]
보 바르디는 "크리스탈 이젤"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전시 방식을 고안했다. 회화 작품들은 거친 돌로 조각된 콘크리트 블록에 설치된 개별 유리 시트에 걸려 있었고, MASP 피나코테카(Pinacoteca)의 대략적인 격자 형태로 배열되었다.[12][26] 이러한 비연대기적 순서의 예술 작품 배치는 관람객에게 기존 질서에 대한 이해와 제시된 것 사이의 불협화음을 만들어, 예상치 못한 경험을 제공하고자 한 보 바르디의 의도를 반영한다.[27]
3. 3. 쎄시 폼페이아 (SESC Pompéia, 1977)
쎄시 폼페이아(SESC Pompéia)는 1977년 리나 보 바르디가 설계한 시설로, 원래 '문화'라는 단어가 무겁다고 여겨 스포츠 및 문화 센터 대신 "레저 센터"라고 불렸다.[13][19] 이 설계는 비싼 재료보다는 노동과 장인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건축가가 장인과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보 바르디의 신념을 반영한다.[19]SESC 폼페이아([Centro de Lazer Fábrica da Pompéia]])는 보 바르디의 가장 크고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였으며, 적응적 재사용(Adaptive Reuse)의 초기 사례이다.[1][7] 상파울루에 있는 이 부지는 이전 강철 드럼 및 냉장고 공장이었으며, 노동 계층을 위한 레저 및 레크리에이션 센터로 재개발되었다. SESC는 1940년대에 노동자에게 건강 서비스와 문화 활동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된, 전국 노조와 관련된 브라질의 비정부 기구이다.[30] 1977년부터 1986년까지 여러 단계에 걸쳐 완공되었으며, 보 바르디는 기존 구조와 그녀가 설계한 추가 시설을 결합했다.[1]
프로젝트 초기 단계에 부지를 방문한 후, 보 바르디는 지역 주민들과 전직 공장 노동자들이 이미 기존 구조를 사교 공간이자 축구, 댄스 그룹, 연극을 위한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 그녀는 이러한 사용을 유지하고 확대하고자 했다. 보 바르디는 오래된 석고를 벗겨내고 모래 분사하여 이전 공장의 거친 콘크리트를 드러냈다.[7] 그녀의 설계는 공중 통로로 공장 건물과 연결된 새로운 콘크리트 타워를 추가했다. 거친 창문은 공장 벽에서 뚫려 있었고, 내부에 부착된 밝은 빨간색 슬라이딩 스크린으로 덮여 있었다.[1]
보 바르디는 이 프로젝트가 문화 및 스포츠 센터가 아닌 레저 센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문화"라는 용어가 강한 의미를 가지며 사람들에게 문화 행사를 개최하도록 강제할 수 있으며, "스포츠"라는 용어는 본질적으로 이미 경쟁적인 문화에 해로운 경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31] 현재 건물에는 극장, 체육관, 수영장, 스낵바, 레저 공간, 레스토랑, 갤러리, 워크숍을 포함한 많은 활동실이 있다.[7]
SESC 폼페이아는 브라질의 20년간의 군사 독재 이후에 지어졌으며, 브라질 문화를 반영하지 않는 건축물을 만들었다.[28] SESC 폼페이아는 브라질 문화의 영향을 주로 받은 새로운 건축 언어의 한 예로 여겨진다.

3. 4. 테아트로 오피시나 (Teatro Oficina, 1984)
테아트로 오피시나는 1984년 리나 보 바르디에 의해 설계되었다. 그녀는 상파울루의 불에 탄 사무실 건물을 극장으로 개조하는 의뢰를 받았다.[32] 이 건물은 1960년대 후반 트로피칼리아 운동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동명의 극단(Teatro Oficina)을 위해 설계되었다. 트로피칼리아는 변화를 추구하며 브라질이 식민지 시대를 벗어나는 방식을 모색했다. 그들은 극장을 사용하여 브라질의 유산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보 바르디는 새로운 공간을 거의 전적으로 페인트칠된 비계로 설계했다. 이 디자인은 극장 공간에서 세트의 건설을 연상시킨다. 이 극장은 기존의 좌석이 없어 시야가 좋지 않다. 건축 평론가들은 이것이 극장 경험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강렬함으로 극장 경험을 향상시킨다고 언급했다. 무대 중앙에는 무거운 나무 의자들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무대는 매우 좁다. 처음에는 이 극장은 실험적인 연출가인 제 셀소를 위해 설계되었으며, 그는 이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가 LSD를 복용한 경험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 극장은 종종 공간을 활용하는 실험적인 공연자들이 사용한다. 극장의 디자인은 관객이 무대에서 벌어지는 행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도록 설계되었다.[32]3. 5. 솔라 두 운냥 (Solar do Unhão, 1959)
솔라 두 운냥(Solar do Unhão)은 살바도르의 주요 문화 센터이다. 과거 사탕수수 공장이었던 이곳은 바이아 주 주지사의 초청으로 브라질 북동부에 새로운 미술관을 설립하라는 리나 보 바르디의 제안으로 설립되었다.[28] 보 바르디는 이 미술관을 통해 브라질 북동부의 원시 미술과 그 디자인의 실용적인 특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미술관 디자인은 살바도르의 문화를 반영하면서도 지역의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보여준다.[28]솔라 두 운냥은 17세기 브라질 고등 법원 판사였던 페드루 운하웅 카스텔루 브랑쿠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29] 보 바르디는 이 사탕수수 공장을 현대 미술관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의뢰받았다. 공사는 1959년부터 1963년까지 진행되었다.[29]
보 바르디는 17세기 건물의 역사성을 존중하면서도 현대적인 디자인을 접목했다. 그녀는 기존 건물을 복원하되, 향수에 젖거나 맥락을 무시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식민지 시대 외관은 그대로 유지하고, 추상적인 기하학적 형태와 전통적인 재료가 대조를 이루는 현대적인 계단을 추가했다.
솔라 두 운냥은 박물관이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보 바르디의 신념을 반영한다. 박물관 건립 초기에는 지역 주민들에게 예술과 역사를 교육하는 다양한 수업이 열렸다. 보 바르디는 박물관이 과거의 묘소가 아니라, 지식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4. 디자인 및 기타 활동
리나 보 바르디는 건축 디자인뿐만 아니라 가구 디자인, 드로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1948년 잔카를로 팔란티와 함께 스튜디오 다르테 팔마를 설립하여 파우 브라질(Pau Brasil Ltda.)에서 제작한 압착 목재나 플라스틱으로 된 경제적인 가구를 디자인하고, 상파울루 미술관의 첫 번째 본부를 꾸몄다.[19] 1950년대에는 금속 프레임에 시트와 등받이를 덧댄 가구를 디자인했으며, 1951년 금속 프레임 안락 의자가 대표적이다.[19] 2012년 이탈리아 가구 브랜드 아르페는 이 의자를 500개 한정판으로 재현했다.[34] 1967년 작 ''카데이라 베이라 데 에스트라다''(길가 의자)는 브라질 북동부 토착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의 단순함과 재료의 절제를 담아냈다.[35]
보 바르디는 6천 점이 넘는 드로잉을 남겼다. 그는 드로잉을 통해 생각을 표현하고 세상을 이해했다.[37] 초기에는 화려한 색채를 사용했지만, 점차 분석적인 관찰과 작도를 시도했다.[37] 비트루비우스 이론을 공부하고 역사적 건축물 작도 교육을 받으면서 구성, 원근화법 등을 익혔다.[37] 세계대전 이후 수채화와 과슈를 사용하여 낭만주의와 합리주의를 오가는 그림을 그렸다.[37] 1940년 잡지 『도무스』 특별호에 '시칠리아 해변의 집'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카를로 파가니와 협력했는데, 이는 이론과 상상을 '행위'와 융합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보 바르디의 초기 프로젝트 중 하나이다.[15][16]
4. 1. 가구 디자인
1948년, 리나 보 바르디는 잔카를로 팔란티(1906–77)와 함께 스튜디오 다르테 팔마(Studio d'Arte Palma)를 설립하여 파우 브라질(Pau Brasil Ltda.)에서 제작한 압착 목재나 플라스틱으로 된 경제적인 가구를 디자인했다. 이들은 이 공방을 통해 상파울루 미술관의 첫 번째 본부를 꾸몄다.[19] 1950년대에 보 바르디는 금속 프레임에 시트와 등받이를 덧댄 가구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장 유명한 디자인은 1951년에 제작된 금속 프레임의 안락 의자이다.[19] ''피아네타 디자인''은 1951년에 그녀의 디자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지만, 초기 디자인 원형은 단 두 개만 남아있고 처음에는 생산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33] 2012년, 이탈리아 가구 브랜드 아르페(Arper)는 500개 한정판 볼 체어를 재현했다. 아르페는 리나 보와 P.M. 바르디 연구소와 심층적인 대화를 통해 크기, 내부 구조, 실내 장식 디테일(스티칭의 품질과 크기까지), 시트의 부드러움에 이르기까지 초기 반복 디자인을 평가했으며, 의자의 둥근 강철 프레임을 제자리에 고정하기 위해 배치된 작은 가죽 덮개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부 사항을 신중하게 재해석했다. 아르페는 브라질 모더니즘 디자인의 이정표가 될 색상의 다양한 해석 방식을 탐구했다.[34]이후 1967년작 ''카데이라 베이라 데 에스트라다''(Cadeira Beira de Estrada, 길가 의자)는 브라질 북동부 여행 중 관찰한 토착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의 단순함, 재료의 절제와 거친 느낌을 담아 비공식적인 미학을 구현했다. 그녀는 디자인에 합판과 브라질산 목재를 자주 사용했다.[35] 보 바르디는 각 객체가 고유의 "자연스러운 논리"를 나타내기를 원했다.[19]
4. 2. 드로잉
리나 보 바르디는 6천 점이 넘는 드로잉을 남겼으며, 이 드로잉들은 상파울루에 있는 그의 집에 보관되어 있다.[37] 보는 드로잉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세상을 이해했다. 그의 드로잉은 대부분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연관되어 있다.[37]보 바르디의 드로잉은 크게 두 가지 스타일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는 화려한 색채를 사용한 표현 방식을 사용했지만, 점차 분석적인 관찰과 작도를 시도했다.[37] 그는 벽과 벽 사이의 공간을 표현하는 포셰를 그릴 때 주황색 과슈를 사용하는 등 과감한 색채 선택을 보여주었다.[37] 또한, 비트루비우스의 이론을 공부하고, 역사적 건축물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작도 교육을 받으면서 구성, 원근화법, 화법기하를 익혔다.[37]
세계대전 이후, 보는 수채화와 과슈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그림을 그렸다. 낭만주의와 합리주의를 오가며 전통적 양식과 근대적 양식을 혼합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중세 유럽의 만화처럼 줄거리를 설명하거나, 1점 투시, 축측 투영법 등 다양한 공간 표현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일상의 모습을 함께 담아냈다.[37]
1940년에는 잡지 『도무스』 특별호에 '시칠리아 해변의 집'이라는 미완성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카를로 파가니와 협력했다. 이는 보 바르디의 초기 프로젝트 중 하나로, 이론과 상상을 '행위'와 융합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유토피아적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는 풍경과 통합되고 풍부한 역사적, 문화적 상상을 사용하여 건설된 지중해 주택 설계를 담고 있었으며, "계획, 평면, 원근법 및 원근 단면도 등 '파격적인' 도면을 통해 매우 개인적인 그래픽 언어 사용 방식을 보여주었다."[15][16] 보 바르디의 독특한 표현 스타일은 아버지 엔리코 보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시칠리아 해변의 집'의 그래픽 도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17]
5. 영향과 유산
리나 보 바르디가 사망하기 2년 전인 1990년에 리나 보 바르디 재단(Instituto Lina Bo e P.M. Bardi영어)이 설립되어 브라질 문화와 건축 연구를 장려하고 있다.[38][2]
노먼 포스터, 올라퍼 엘리아슨, 길버트 앤 조지 등 수많은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리나 보 바르디에게 영감을 얻은 작품을 제작했다.[2] 세지마 가즈요는 2009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보를 집중 조명하기도 했다.[2]
2013년 영국 문화원은 리나 보 바르디 재단과 협력해 영국에서 브라질로 여행하는 건축가들을 위한 리나 보 바르디 펠로우쉽 프로그램을 개설했다.[40]
2014년 구글 두들은 리나 보 바르디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했다.[41]
2015년 영국의 가디언지의 건축 평론가 로완 무어는 리나 보 바르디가 설계한 테아트로 오피시나(1991)를 10대 극장 건축물로 선정했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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