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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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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두익은 만주 또는 함경북도 갑산군 출신으로,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에 합류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1940년 소련으로 건너가 제88독립저격여단에서 훈련을 받고 일본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수행했으며, 해방 후 김일성의 경호대에서 활동하며 신임을 얻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고 군 경력을 쌓아 1960년대부터 군단장, 총참모부 작전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19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에 군사 고문으로도 참여했다. 1962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을 거쳐 부원수까지 올랐다. 김일성 사망 후에도 김정일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2002년 사망하여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다.

2. 생애

리두익은 만주(혹은 함경북도 갑산군)에서 태어나,[7] 1930년대 후반부터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에 합류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1] 1937년 6월에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에 소년 전령병으로 입대하여 사령관 김일성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38년 8월에는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여 지린성 린장현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12월, 소련으로 건너가 제88독립저격여단 제1독립저격대대 부대원이 되었다.[1] 그는 붉은 군대의 88 독립 저격 여단()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함경북도지린성 일대에서 일본 점령군에 맞서 정찰 및 게릴라전을 수행했다.[1]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이 해방되자 38선 이북으로 귀국했다.[1] 해방 이후, 김일성의 경호대 제1소대장, 중대장을 역임하며 그의 신임을 얻었다.[1] 1948년 조선인민군 창설에 참여, 중대장과 대대장을 역임했다.[8][9] 1946년, 보안간부훈련대대 창설 요원으로 활동했고, 김일성의 부관으로 근무했지만, 1946년 6월 말 김일성의 명령으로 중앙보안간부학교에 교관으로 파견되었다. 1948년 8월에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중위로 임관했다.

한국 전쟁(북한에서는 "조국 해방 전쟁")에 참전하여 1951년 대대장을 역임했다.[2]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 전쟁에 종군했다. 종전 후 소련에서 합동 작전과 특수 작전 분야 군사 훈련을 받았고, 1956년 6월에 제24사단 제3연대장이 되었다.[2] 1958년 귀국 후 제3연대장, 제9사단 부사단장을 거쳐 1962년 2월에 제9사단장에 임명되었다.[2] 1963년 5월에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을 역임했다.[2]

1962년 10월 8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1998년까지 역임했다.[2] 1963년 중장으로 진급했다.[2]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제7군단장을 역임했고, 1967년부터 1968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베트콩의 군사 고문으로 활동했다.[2]

1968년 말, 조선인민군 내 숙청에 관여했으며, 같은 해 상장으로 진급했다.[2] 1970년 조선로동당 제5차 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2]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제2군단장,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제2군단 군단장, 1980년에는 제4군단 군단장을 역임했다.[3]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3]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 및 당 중앙군사위 위원이 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훈장 수여. 1985년 4월에 조선인민군 대장으로 임관.[3] 1988년 5월에 평양 ~ 개성 간의 고속도로 건설 책임자가 되었다. 1989년 9월, 인민군 간부 수양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1992년 4월에 조선인민군 차수가 되었고, 또한 2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후에는 정치 무대에서 모습을 감췄다.

1994년 7월 9일,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의 위원을, 95년 2월 25일에는 오진우 국가장의위원회의 위원을 역임했다. 1997년, 조선인민군 원수 최광 장의위원 명단 40명이 공식 발표되었을 때, 서열은 26위였다.[5] 10월, 병의 치료를 위해 베이징을 방문했지만, 망명을 희망한다는 소문이 돌았다.[6]

1992년 4월 20일 부원수로 진급했으며, 김일성 사망 후에도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및 김정일의 고문으로 활동했다.[4] 1994년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한 후에도 활동을 지속했다. 1997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치료를 받은 후, 1999년 이후 공개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4] 2002년 3월 13일에 사망했으며, 3월 15일 대성산에 안장되었다.[4]

2. 1. 항일 무장 투쟁과 조선인민군 창설

리두익은 만주(혹은 함경북도 갑산군)에서 태어나,[7] 1930년대 후반부터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에 합류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1] 1937년 6월에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에 소년 전령병으로 입대하여 사령관 김일성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38년 8월에는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여 지린성 린장현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12월, 소련으로 건너가 제88독립저격여단 제1독립저격대대 부대원이 되었다.[1] 그는 붉은 군대의 88 독립 저격 여단()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함경북도지린성 일대에서 일본 점령군에 맞서 정찰 및 게릴라전을 수행했다.[1]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이 해방되자 38선 이북으로 귀국했다.[1] 해방 이후, 김일성의 경호대 제1소대장, 중대장을 역임하며 그의 신임을 얻었다.[1] 1948년 조선인민군 창설에 참여, 중대장과 대대장을 역임했다.[8][9] 1946년, 보안간부훈련대대 창설 요원으로 활동했고, 김일성의 부관으로 근무했지만, 1946년 6월 말 김일성의 명령으로 중앙보안간부학교에 교관으로 파견되었다. 1948년 8월에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중위로 임관했다.

2. 2. 한국 전쟁과 군 경력

리두익은 빨치산파 중 한 명으로, 88 국제 여단에서 김일성과 함께 일본제국 관동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7] 해방 이후 김일성과의 인연으로 조선인민군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8][9] 1930년대 후반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하여 그의 경호대에서 활동했고, 붉은 군대의 88 독립 저격 여단( )에서 게릴라전 훈련을 받았다.[1] 1945년 일본 패전 후 38선 이북으로 귀국하여, 1946년 보안간부훈련대대 창설 요원으로 활동했고, 김일성의 부관을 거쳐 1948년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중대장, 대대장을 역임했다.[1]

한국 전쟁(북한에서는 "조국 해방 전쟁")에 참전하여 1951년 대대장을 역임했다.[2]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 전쟁에 종군했다. 종전 후 소련에서 합동 작전과 특수 작전 분야 군사 훈련을 받았고, 1956년 제24사단 제3연대장이 되었다.[2] 1958년 귀국 후 제3연대장, 제9사단 부사단장을 거쳐 1962년 제9사단장에 임명되었다.[2] 1963년 5월에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을 역임했다.[2]

1962년 10월 8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1998년까지 역임했다.[2] 1963년 중장으로 진급했다.[2]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제7군단장을 역임했고, 1967년부터 1968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베트콩의 군사 고문으로 활동했다.[2]

1968년 말, 조선인민군 내 숙청에 관여했으며, 같은 해 상장으로 진급했다.[2] 1970년 조선로동당 제5차 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3]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제2군단장,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제2군단 군단장, 1980년에는 제4군단 군단장을 역임했다.[3]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3] 1985년 대장으로 진급했고, 1980년대 말부터 1992년까지 평양 방어 사령부 사령관을 역임했다.[3]

1992년 4월 20일 부원수로 진급했으며, 김일성 사망 후에도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및 김정일의 고문으로 활동했다.[4] 1994년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한 후에도 활동을 지속했다. 1997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치료를 받은 후, 1999년 이후 공개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4] 2002년 3월 13일에 사망했으며, 3월 15일 대성산에 안장되었다.[4]

2. 3. 군부 내 숙청과 권력 강화

1968년 말, 리두익은 조선인민군 내 숙청에 관여하여 김일성 유일 지배 체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2] 그는 1968년 상장으로 진급했다.[2] 1970년 조선로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며 당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2] 1980년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6차 당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군사 분야 최고 의사 결정 기구에 참여했다.[3]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 및 당 중앙군사위 위원이 되었다.[5] 1982년 4월에는 김일성 훈장을 수여받았다.[5]

2. 4. 고위 군사 지도자

리두익은 1985년에 대장으로 진급했으며,[3] 1980년대 말부터 1992년까지 평양 방어 사령부 사령관을 역임하며 수도 방위를 책임졌다.[3] 1988년 5월에는 평양 ~ 개성 간의 고속도로 건설 책임자가 되었다. 1989년 9월에는 인민군 간부 수양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1992년 4월 20일에는 조선인민군 차수로 진급했다.[4] 김일성 사망 이후에도 김정일의 군사 고문으로 활동하며 권력을 유지했다.[4] 1994년 7월 9일,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의 위원을, 1995년 2월 25일에는 오진우 국가장의위원회의 위원을 역임했다. 1997년에는 조선인민군 원수 최광 장의위원 명단 40명이 공식 발표되었을 때, 서열은 26위였다.[5]

2. 5. 사망

리두익은 1997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치료를 받았으며,[4][6] 1999년 이후 공개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4] 2002년 3월 13일 숙환으로 사망했으며,[8][9][4]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치되었다.[8][9][4]

3. 평가

3. 1. 긍정적 평가 (더불어민주당 관점)

3. 2. 부정적 평가 (국민의힘 관점)

4. 기타

참조

[1] 서적 조선인민군 :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 한양대학교 출판부
[2] 웹사이트 Weekly Report on North Korea http://unikorea.go.k[...] 2002-03-25
[3] 웹사이트 Weekly Report on North Korea http://unikorea.go.k[...] 2002-03-25
[4] 웹사이트 Weekly Report on North Korea http://unikorea.go.k[...] 2002-03-25
[5] 뉴스 李斗益とは誰か(이두익 누구인가) http://m.chosun.com/[...] 1997-11-01
[6] 뉴스 北韓の李斗益次帥とは誰?(북한 이두익 차수 누군가) http://news.joins.co[...] 1997-11-02
[7] 웹인용 사라져 가는 북한의 `혁명1세대'들 https://www.hankyung[...] 2006-04-02
[8] 웹인용 뉴스 : 네이버 TV연예 https://m.entertain.[...] 2024-06-15
[9] 웹인용 북, 탈북자 스페인대사관 진입 함구 https://n.news.naver[...]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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