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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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거릿 대처는 1925년 링컨셔주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1950년과 1951년 총선에서 보수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59년 핀칠리 지역구에서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1970년 에드워드 히스 내각에서 교육과학부 장관을 지냈고, 1975년 보수당 당수가 되어 영국 최초의 여성 당수가 되었다. 1979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으며, 1990년까지 11년간 재임하며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인 대처리즘을 펼쳤다. 대처는 공공 부문 축소, 규제 완화, 노동조합 개혁, 조세 정책 변화 등을 추진했고, 포클랜드 전쟁 승리로 높은 지지를 얻기도 했다. 1990년 인두세 도입에 대한 반발과 유럽 통합에 대한 이견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며, 2013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정책과 리더십은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20세기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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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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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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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어 | 존경하는 |
이름 | 마거릿 힐다 대처 남작부인 |
존칭 접미어 | 가터 훈장(LG) 메리트 훈장(OM) 성 요한 기사단 부기사(DStJ) 추밀원(PC) 왕립 학회 회원(FRS) 왕립 화학회 명예 회원(HonFRSC) |
출생명 | 마거릿 힐다 로버츠 |
출생일 | 1925년 10월 13일 |
출생지 | 잉글랜드 링컨셔 주 그랜섬 |
사망일 | 2013년 4월 8일 |
사망지 | 잉글랜드 런던 |
안장 장소 | 런던 왕립병원 |
정당 | 보수당 |
배우자 | 데니스 대처(1951년 12월 13일 결혼, 2003년 6월 26일 사별) |
자녀 | 마크 캐롤 |
모교 | 옥스퍼드 대학교 서머빌 칼리지 (MA) |
수상 내역 | 전체 목록 |
아버지 | 앨프리드 로버츠 |
직업 | 법정 변호사 화학자 정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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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 재단 |
별칭 | 철의 여인 |
공직 | |
영국 총리 | 재임 시작: 1979년 5월 4일 재임 종료: 1990년 11월 28일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부총리 | 제프리 하우 (1989–90) |
전임 총리 | 제임스 캘러헌 |
후임 총리 | 존 메이저 |
영국 야당 대표 | 재임 시작: 1975년 2월 11일 재임 종료: 1979년 5월 4일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총리 | 해럴드 윌슨 제임스 캘러헌 |
부대표 | 윌리엄 휘틀로 |
전임 야당 대표 | 에드워드 히스 |
후임 야당 대표 | 제임스 캘러헌 |
보수당 대표 | 재임 시작: 1975년 2월 11일 재임 종료: 1990년 11월 28일 |
부대표 | 휘틀로 자작 |
보수당 의장 | 손크로프트 경 세실 파킨슨 존 검머 노먼 테빗 피터 브룩 케네스 베이커 |
전임 당대표 | 에드워드 히스 |
후임 당대표 | 존 메이저 |
장관 경력 | |
교육 과학부 장관 | 재임 시작: 1970년 6월 20일 재임 종료: 1974년 3월 4일 |
총리 | 에드워드 히스 |
전임 장관 | 에드워드 쇼트 |
후임 장관 | 레그 프렌티스 |
의회 비서관 | 재임 기간: 1961–1964 |
의회 비서관 소속 | 연금부 의회 비서관 |
그림자 내각 | |
그림자 장관 | 재임 기간: 1967–1970 소속 부서: 교육과학부 재임 기간: 1974–1975 소속 부서: 환경부 |
그림자 장관 | 재임 기간: 1967–1968 소속 부서: 연료 및 에너지 부 재임 기간: 1968–1969 소속 부서: 교통부 |
의회 경력 | |
귀족원 의원 | 지위: 세속 영주 임기 시작: 1992년 6월 30일 임기 종료: 2013년 4월 8일 임기 종류: 종신귀족 |
선거구 | 핀칠리 |
임기 시작 | 1959년 10월 8일 |
임기 종료 | 1992년 3월 16일 |
전임 의원 | 존 크라우더 |
후임 의원 | 하틀리 부스 |
2. 생애
1925년 10월 13일 링컨셔주 그랜샘에서 식료품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결혼 전 성은 '''로버츠'''(Roberts)이다.[327] 아버지 알프레드 로버츠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이자 알더맨이며, 무소속으로 1945년부터 1946년까지 그랜섬 시장을 역임한 지역 유지였다.[4] 대처의 생가는 대대로 감리교 신자였으며,[277] 아버지는 "검소 검약", “자기책임”, “자조노력” 정신을 강조했고, 이는 대처에게도 뚜렷하게 계승되었다.[327] 대처는 아버지를 매우 존경했으며, “인간으로서 필요한 것은 모두 아버지에게서 배웠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278]
어린 시절을 그랜샘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아버지는 식료품점 2곳을 운영했다.[327] 대처의 집은 가게 2층에 있는 방 세 개와 부엌뿐이었고, 욕실과 화장실은 안뜰에 있으며 다른 가족과 공용으로 사용하는 당시 영국 중산층의 일반적인 집이었다.[276] 일각에서 그녀 집안이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울 만큼 극도로 가난한 것처럼 묘사하지만, 그녀는 생각처럼 가난한 게 아니었다고 한다.[327] 1938년,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나치 독일에서 탈출한 십대 유대인 소녀에게 잠시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로버츠는 헌팅타워 로드 초등학교에 다녔고, 문법학교인 케스티번 앤 그랜섬 여자고등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과외 활동으로는 피아노, 필드 하키, 시 낭송, 수영, 걷기 등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민방공 서비스에서 방화 감시원으로 자원봉사했다.
옥스퍼드 대학교 시절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경제학에 심취해 있었으며, 이때 품은 경제에 대한 생각이 이후 대처리즘의 원류가 되었다.[7] 1943년 9월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하여[279] 섬빌 대학(Somerville College)에서 화학을 공부했다.[7] 대학에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의 ''길 없는 길''(The Road to Serfdom, 1944)과 같은 정치 저술의 영향을 받았는데,[12] 이 책은 정부의 경제 개입을 권위주의 국가로 가는 전조로 비난했다.[13]
옥스퍼드에 도착한 후, 로버츠는 X선 결정학자 도로시 호지킨(Dorothy Hodgkin)의 지도하에 연구를 시작했다.[7] 호지킨은 로버츠에게 항생제 펩타이드 그라미시딘 S(gramicidin S)의 구조를 결정하는 연구를 맡겼다.[7] 1947년 화학으로 2등급 학위를 받았고,[8] 졸업 후, BX 플라스틱스(BX Plastics)에서 연구 화학자로 일했고,[14] J. 라이온스 앤드 컴퍼니(J. Lyons and Co.)에서 연구 화학자로 일하며 아이스크림(ice cream)을 위한 유화제(emulsifier)를 개발하는 팀의 일원이었다고 한다.[280] 1951년 9월, 화학공업회(Society of Chemical Industry)의 ''식품 및 농업 과학 저널(Journal of the Science of Food and Agriculture)''에 "단층에서의 α-모노스테아린의 비누화"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14]
2. 1. 어린 시절
1925년 10월 13일 링컨셔주 그랜샘에서 식료품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결혼 전 성은 '''로버츠'''(Roberts)이다.[327] 아버지 알프레드 로버츠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이자 알더맨이며, 무소속으로 1945년부터 1946년까지 그랜섬 시장을 역임한 지역 유지였다.[4] 대처의 생가는 대대로 감리교 신자였으며,[277] 아버지는 "검소 검약", “자기책임”, “자조노력” 정신을 강조했고, 이는 대처에게도 뚜렷하게 계승되었다.[327] 대처는 아버지를 매우 존경했으며, “인간으로서 필요한 것은 모두 아버지에게서 배웠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278]어린 시절을 그랜샘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아버지는 식료품점 2곳을 운영했다.[327] 대처의 집은 가게 2층에 있는 방 세 개와 부엌뿐이었고, 욕실과 화장실은 안뜰에 있으며 다른 가족과 공용으로 사용하는 당시 영국 중산층의 일반적인 집이었다.[276] 일각에서 그녀 집안이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울 만큼 극도로 가난한 것처럼 묘사하지만, 그녀는 생각처럼 가난한 게 아니었다고 한다.[327] 1938년,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나치 독일에서 탈출한 십대 유대인 소녀에게 잠시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로버츠는 헌팅타워 로드 초등학교에 다녔고, 문법학교인 케스티번 앤 그랜섬 여자고등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과외 활동으로는 피아노, 필드 하키, 시 낭송, 수영, 걷기 등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민방공 서비스에서 방화 감시원으로 자원봉사했다.
2. 2. 대학 시절과 연구원
옥스퍼드 대학교 시절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경제학에 심취해 있었으며, 이때 품은 경제에 대한 생각이 이후 대처리즘의 원류가 되었다.[7] 1943년 9월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하여[279] 섬빌 대학(Somerville College)에서 화학을 공부했다.[7] 대학에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의 ''길 없는 길''(The Road to Serfdom, 1944)과 같은 정치 저술의 영향을 받았는데,[12] 이 책은 정부의 경제 개입을 권위주의 국가로 가는 전조로 비난했다.[13]옥스퍼드에 도착한 후, 로버츠는 X선 결정학자 도로시 호지킨(Dorothy Hodgkin)의 지도하에 연구를 시작했다.[7] 호지킨은 로버츠에게 항생제 펩타이드 그라미시딘 S(gramicidin S)의 구조를 결정하는 연구를 맡겼다.[7] 1947년 화학으로 2등급 학위를 받았고,[8] 졸업 후, BX 플라스틱스(BX Plastics)에서 연구 화학자로 일했고,[14] J. 라이온스 앤드 컴퍼니(J. Lyons and Co.)에서 연구 화학자로 일하며 아이스크림(ice cream)을 위한 유화제(emulsifier)를 개발하는 팀의 일원이었다고 한다.[280] 1951년 9월, 화학공업회(Society of Chemical Industry)의 ''식품 및 농업 과학 저널(Journal of the Science of Food and Agriculture)''에 "단층에서의 α-모노스테아린의 비누화"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14]
3. 정치 활동
1950년과 1951년 총선에서 로버츠는 노동당 지역구인 다트퍼드에서 보수당 후보로 출마했다. 지역 당은 그녀가 웅변가는 아니었지만 준비성이 철저했고 질문에 대한 답변이 두려움 없이 당당했기 때문에 후보로 지명했다. 예비 후보였던 빌 디즈는 "그녀가 입을 열자 나머지 우리는 꽤나 2류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20] 그녀는 당시 가장 젊은 여성 후보였기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950년 그녀는 전국에서 가장 젊은 보수당 후보였다. 두 번의 선거에서 모두 노먼 도즈에게 패했지만 노동당의 다수당 의석을 6,000석, 그 다음 1,000석 줄였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그녀는 부모님과 1951년 12월에 결혼한 미래의 남편 데니스 대처의 지원을 받았다.[20] 데니스는 아내의 변호사 자격 시험 공부를 지원했다. 그녀는 1953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조세법을 전문으로 삼았다. 같은 해 말에 쌍둥이 자녀인 캐롤과 마크가 제왕절개로 조산되었다.
3. 1. 하원 의원
마거릿 대처는 1950년과 1951년 총선에서 보수당 후보로 다트퍼드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두 번 모두 노먼 도즈에게 패배했다.[20] 당시 그녀는 가장 젊은 여성 후보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20] 1951년 12월, 데니스 대처와 결혼 후, 변호사 시험 공부를 시작하여 1953년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조세법을 전문으로 했다.[20] 같은 해 쌍둥이 자녀인 캐롤과 마크가 태어났다.1959년 총선에서 핀치리 지역구에서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21] 그녀의 첫 연설은 1960년 공공기관 (회의 참석) 법을 지지하는 내용이었으며, 이 법안은 지방 당국이 의회 회의를 공개적으로 열도록 요구하는 내용으로 통과되었다.[22] 1961년에는 매질을 사법적 체벌로 복원하는 것에 대해 보수당의 공식 입장에 반대하여 투표했다.
해럴드 맥밀런에 의해 1961년 10월 연금부 의회 사무차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는 해당 직책을 맡은 역사상 가장 젊은 여성이었다. 1964년 선거에서 보수당이 패배한 후, 주택 및 토지 담당 대변인을 거쳐 1966년 그림자 재무부 팀으로 이동했다. 1966년 보수당 대회에서 대처는 노동당 정부의 고세금 정책을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를 향한 발걸음"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남성 동성애를 비범죄화하는 법안[24], 데이비드 스틸의 낙태 합법화 법안[25], 토끼 사냥 금지[26]에 찬성표를 던졌고, 사형 유지[27]와 이혼법 완화에는 반대[28]했다.
1967년 미국 대사관의 국제 방문자 리더십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6주 동안 여러 미국 도시와 정치인, 기관들을 방문했다. 이후 그림자 내각의 연료 및 동력 대변인, 1970년 총선 전에는 그림자 교통 대변인, 그리고 교육 대변인을 역임했다.
1970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면서 에드워드 히스 내각의 교육과학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장관 재임 중, 대처는 학교의 무상 우유 급식 폐지 정책을 추진하여 '우유 도둑(Milk Snatcher)'이라는 비판을 받았다.[32] 그녀는 7세에서 11세 사이의 학생들에게 대한 무상 우유 급식을 폐지했으나,[31] 영양 목적으로 어린아이들에게 매일 의 우유를 제공하는 데는 동의했다.

3. 2. 보수당 당수
1974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패배했고, 1975년 2월 보수당 당수 선거가 실시되었다.[36] 대처는 당내 우파였던 키스 요셉을 지지했지만, 요셉은 여러 문제성 발언으로 인해 출마를 포기했다.[36] 이에 대처가 우파 후보로 출마했으며, 교육과학부 장관 경험밖에 없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히스를 꺾고 보수당 당수가 되었다.[36] 이는 영국 최초의 여성 보수당 당수 취임이었다.
대처는 당수 취임 후, 같은 해 영국을 포함한 35개국이 체결한 헬싱키 선언을 통렬하게 비판했다.[36]
소비에트 연방 국방부 기관지 〈크라스나야 즈붸즈다〉( 크라스나야 즈베즈다/Красная звездаru)는 1976년 1월 24일 자 기사에서 대처를 ‘철의 여인’이라고 비난했다.[329] 이 별명은 대처의 강경한 반공주의를 비꼬기 위한 것이었으나, 대처는 오히려 이 별명을 마음에 들어 했고, 모든 언론에서 다루어지면서 그녀의 대명사가 되었다.[329]
3. 3. 총리 재직 시절 (1979년 ~ 1990년)
1979년 총선에서 보수당을 승리로 이끌며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취임사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인용하며, "불화가 있는 곳에 화합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실을,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가져오게 하소서."라고 말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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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처리즘 ===
1979년부터 11년간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 재임한 마거릿 대처는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경제 정책인 대처리즘을 펼쳤다.
대처리즘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공공부문 축소 및 민영화: 통신(BT), 항공(BA), 자동차(BL), 상하수도, 전력, 가스, 철도 등 주요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여 경쟁을 촉진하고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
- 규제 완화: 금융 시장을 포함한 বিভিন্ন 분야의 규제를 완화하여 기업 활동의 자유를 확대하고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자 했다.
- 노동조합 개혁: 1984년-1985년 광부 파업을 강경 진압하는 등,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켜 노사 관계를 안정시키고 경제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
- 조세 정책: 소득세[291]와 법인세[292]율을 낮추고, 부가가치세율을 높여 세금 부담을 줄이고 경제 활동을 장려하고자 했다.
- 사회 복지 정책: 실업 급여 등 복지 혜택을 축소하여 복지 의존도를 낮추고, 근로 의욕을 높이고자 했다.
- 인두세 도입: 1990년 균등한 액수의 주민세(인두세)를 도입했으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철회되었다.[72]
대처의 정책은 토니 블레어 총리 시절의 영국의 경제 호황의 밑바탕이 됐다고 인정받고 있으나, 빈부 및 지역 격차, 영국 제조업의 붕괴를 초래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 외교 정책 ===

대처는 외교에서 냉전 시대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를 비롯한 주요 정상회담 국가들을 중심으로 서방 국가 정상들과 공동 보조를 맞추었고, 냉전 종식 과정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협력하여 냉전 종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296]

서로 다른 성격에도 불구하고, 대처는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과 빠르게 친분을 쌓았다. 그녀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유된 불신을 바탕으로 한 레이건 행정부의 냉전 정책을 강력히 지지했다. 1983년 레이건이 그레나다 침공에 대해 그녀와 상의하지 않았을 때 심각한 의견 차이가 발생했다.[108]
총리 취임 첫해에 그녀는 미국 핵 순항 미사일과 퍼싱 II 미사일을 서유럽에 배치하기로 한 NATO의 결정을 지지했고, 미국이 1983년 11월부터 RAF 그린햄 커먼에 160개 이상의 순항 미사일을 배치하도록 허용하여 핵무장 철폐 운동의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1986년 4월, 그녀는 리비아의 베를린 디스코텍 폭탄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리비아 폭격을 위해 미국 F-111이 영국 공군 기지를 사용하도록 허용했고, 유엔 헌장 제51조에 따른 자위권을 근거로 들었다.[112]
대처는 개혁적인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따뜻하게 반응한 최초의 서방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레이건-고르바초프 정상 회담과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시행한 개혁 이후, 그녀는 1988년 11월에 "[우리는] 더 이상 냉전 중이 아니며" 오히려 "냉전보다 훨씬 광범위한 새로운 관계"에 있다고 선언했다.[107] 그녀는 1984년 소련을 국빈 방문하여 고르바초프와 장관회의 의장 니콜라이 르지코프를 만났다.
1990년 8월 이라크 지도자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대처는 미국을 국빈 방문 중이었다.[115] 조지 H. W. 부시와의 회담에서 그녀는 개입을 권고했고,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몰아내기 위해 중동에 군대를 배치하도록 부시에게 압력을 가했다.[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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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세로
|이미지1=Thatcher at Oval Office desk with Carter.jpg
|alt1=대처와 지미 카터가 함께 앉아 있는 모습
|캡션1=지미 카터 대통령과 함께 백악관 집무실에서, 1979년
|이미지2=President Ronald Reagan and Prime Minister Margaret Thatcher of the United Kingdom.jpg
|alt2=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
|캡션2=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백악관 집무실에서, 1988년
|이미지3=Thatcher and Bush - 1990 - P14935-18A.jpg
|alt3=대처와 조지 H. W. 부시가 함께 서 있는 모습
|캡션3=부시 대통령과 함께 애스펀, 콜로라도에서, 1990년
}}
1982년 3월, 남대서양의 포클랜드 제도에서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했다. 대처 수상은 아르헨티나군의 포클랜드 제도 침략에 대해 즉시 함대와 폭격기를 포클랜드로 파병했고, 많은 함선을 잃었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아 2개월간의 전투 끝에 6월 14일 영국군은 포트 스탠리를 함락시키고 아르헨티나군을 몰아냈다. 대처 수상의 강경한 자세로 포클랜드를 탈환한 것은 영국 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때 “인명을 대가로 하더라도 우리 영국 영토를 지켜야만 한다. 왜냐하면 국제법이 무력 행사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298]”라고 말했다.
영국 경제의 침체로 지지율 하락에 어려움을 겪던 대처 수상은 전쟁 종결 후 “우리는 결코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선언했고, 지지율은 73%를 기록했다. 포클랜드 전쟁을 계기로 보수당은 대처 정권 출범 후 두 번째 총선에서 승리했고, 이를 계기로 대처 수상은 더욱 보수적이고 급진적인 경제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1982년 9월, 대처는 중국을 방문하여 영국과 중국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덩샤오핑은 “일국양제”의 요구를 굽히지 않고, 영국이 협상에 응하지 않을 경우 무력 사용이나 물 공급 중단과 같은 실력 행사도 있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처음에 영국 측은 임대 기간이 만료되는 신계만의 반환을 고려했지만, 영국의 영구 영토인 홍콩섬과 구룡반도의 반환까지 요구하는 맹렬한 덩샤오핑에게 압력을 받아 대처는 결국 굴복했다.
1984년12월 19일, 양국이 서명한 영국-중국 공동선언이 발표되었고, 영국은 1997년7월 1일에 홍콩의 주권을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하며 홍콩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가 될 것임이 명확해졌다. 이 양도 및 반환 결정은 포클랜드 전쟁 당시와는 대조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국내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
1986년 7월 코먼웰스 게임즈(Commonwealth Games) 대회에서는 대처 정부의 남아프리카 공화국(南アフリカ共和国)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정책에 항의하는 32개국이 대회를 보이콧했다. 영국 연방(イギリス連邦)에 속한 국가·지역들이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위해 경제 제재(経済制裁)를 지지했지만, 대처 정부는 영국의 무역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경제 제재에 반대했다.
대처와 그녀의 당은 1975년 국민투표[129]에서 EEC(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을 지지했고,[130] 1986년 단일 유럽 의정서를 지지하며 분담금에 대한 영국 할인을 얻어냈다.[130] 하지만 그녀는 이 조직의 역할은 자유 무역과 효과적인 경쟁을 보장하는 데 국한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EEC의 접근 방식이 소규모 정부와 규제 완화에 대한 그녀의 견해와 상충한다고 우려했다. 단일 시장이 정치적 통합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던 대처는 총리 재임 기간, 특히 1987년 세 번째 정부 출범 이후 더욱 두드러지게 유럽 통합에 반대했다.[131]
유로(ユーロ) 가입의 전 단계인 유럽통화협정(ERM, 欧州為替相場メカニズム) 가입에는 강하게 반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일이 잘 풀린다 해도 ERM 가입은 플러스가 되지 않고,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ERM 가입은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다."라고 대처는 생각했다. 앨런 월터스(アラン・ウォルターズ, 대처의 경제 고문)도 ERM 가입은 파운드화(スターリング・ポンド)에 대한 투기 공격의 압력을 강하게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ERM은 환율 안정은커녕 불안정 요소라고 하면서 ERM에 가입해서는 안 된다고 월터스는 생각했다.[297]
하지만 나이절 로슨(ナイジェル・ローソン), 재무장관(財務大臣)과 후임인 존 메이저(ジョン・メージャー) 등의 주장에 밀려 영국을 ERM에 가입시킨 것도 사실이다. 1990년에 ERM 가입의 이점은 환율 안정뿐만 아니라 금리 인하이기도 하다고 메이저는 주장했다. 더 나아가, 로슨 등과의 대립으로 표면화된 보수당 내부 항쟁에 대해 ERM 가입으로 보수당이 단결할 수 있고, 그것이 경제에도 좋은 영향을 주어 다음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메이저는 주장했다.[297] 최종적으로 대처는 메이저 등에게 양보하여 ±6.0%(변동폭)의 ERM 가입을 검토했고, 그 해 영국은 ERM에 가입했다.
대처는 젊은 시절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나치 독일과의 격렬한 전쟁을 경험했기 때문에 독일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독일 재통일에 있어서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대통령과 함께 강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대처는 “통일이 실현되면, 영웅이 된 헬무트 콜(Helmut Kohl)이 제2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의 독일 영토 전체를 요구할 것이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299] 또한 “콜은 독일이 분단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개하며, “베를린 장벽 붕괴 다음 날, 독일 연방의회(Bundestag)에서 서독 의원들이 자발적으로 독일 국가(Deutschlandlied)를 불렀다는 보고를 듣고 전율했다”고 말했다.[300]


=== 총리직 사임 ===
1990년 유럽 통합 여론이 나오자 마거릿 대처는 이를 반대하였다. 이후 대처는 줄곧 유럽 연합 참여 반대 입장을 고수하던 중 보수당 지도부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332] 그해 11월 보수당 당수 경선에 나섰다가 1차 투표에서 당선에 실패하자, 1991년 5월 보수당 당수직 및 총리직에서 사퇴하였다.
보수적이면서도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는 강한 자세로 세 번의 총선거를 승리로 이끈 대처는 재임 후반기에 인두세(community charge영어) 도입을 주장하여 영국 국민의 강한 반발을 받았고, 유럽 통합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도 영국이 유럽 통합에 뒤처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고, 1990년 11월 당수 선거에서는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획득했지만, 2위와의 득표율 차이가 15% 이상에 달하지 않아 규정에 따라 2차 투표가 실시될 상황에 이르자 구심력이 더욱 저하되어 11월 22일 수상 및 보수당 당수직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11월 28일 다우닝가 10번지(영국 총리 관저)에서 물러났고, 후임에는 존 메이저가 취임했다.
3. 3. 1. 대처리즘
1979년부터 11년간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 재임한 마거릿 대처는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경제 정책인 대처리즘을 펼쳤다.대처리즘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공공부문 축소 및 민영화: 통신(BT), 항공(BA), 자동차(BL), 상하수도, 전력, 가스, 철도 등 주요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여 경쟁을 촉진하고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
- 규제 완화: 금융 시장을 포함한 বিভিন্ন 분야의 규제를 완화하여 기업 활동의 자유를 확대하고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자 했다.
- 노동조합 개혁: 1984년-1985년 광부 파업을 강경 진압하는 등,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켜 노사 관계를 안정시키고 경제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
- 조세 정책: 소득세[291]와 법인세[292]율을 낮추고, 부가가치세율을 높여 세금 부담을 줄이고 경제 활동을 장려하고자 했다.
- 사회 복지 정책: 실업 급여 등 복지 혜택을 축소하여 복지 의존도를 낮추고, 근로 의욕을 높이고자 했다.
- 인두세 도입: 1990년 균등한 액수의 주민세(인두세)를 도입했으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철회되었다.[72]
대처의 정책은 토니 블레어 총리 시절의 영국의 경제 호황의 밑바탕이 됐다고 인정받고 있으나, 빈부 및 지역 격차, 영국 제조업의 붕괴를 초래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3. 3. 2. 외교 정책
대처는 외교에서 냉전 시대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를 비롯한 주요 정상회담 국가들을 중심으로 서방 국가 정상들과 공동 보조를 맞추었고, 냉전 종식 과정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협력하여 냉전 종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296]
서로 다른 성격에도 불구하고, 대처는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과 빠르게 친분을 쌓았다. 그녀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유된 불신을 바탕으로 한 레이건 행정부의 냉전 정책을 강력히 지지했다. 1983년 레이건이 그레나다 침공에 대해 그녀와 상의하지 않았을 때 심각한 의견 차이가 발생했다.[108]
총리 취임 첫해에 그녀는 미국 핵 순항 미사일과 퍼싱 II 미사일을 서유럽에 배치하기로 한 NATO의 결정을 지지했고, 미국이 1983년 11월부터 RAF 그린햄 커먼에 160개 이상의 순항 미사일을 배치하도록 허용하여 핵무장 철폐 운동의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1986년 4월, 그녀는 리비아의 베를린 디스코텍 폭탄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리비아 폭격을 위해 미국 F-111이 영국 공군 기지를 사용하도록 허용했고, 유엔 헌장 제51조에 따른 자위권을 근거로 들었다.[112]
대처는 개혁적인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따뜻하게 반응한 최초의 서방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레이건-고르바초프 정상 회담과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시행한 개혁 이후, 그녀는 1988년 11월에 "[우리는] 더 이상 냉전 중이 아니며" 오히려 "냉전보다 훨씬 광범위한 새로운 관계"에 있다고 선언했다.[107] 그녀는 1984년 소련을 국빈 방문하여 고르바초프와 장관회의 의장 니콜라이 르지코프를 만났다.
1990년 8월 이라크 지도자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대처는 미국을 국빈 방문 중이었다.[115] 조지 H. W. 부시와의 회담에서 그녀는 개입을 권고했고,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몰아내기 위해 중동에 군대를 배치하도록 부시에게 압력을 가했다.[116]
{{다중 이미지
|방향=세로
|이미지1=Thatcher at Oval Office desk with Carter.jpg
|alt1=대처와 지미 카터가 함께 앉아 있는 모습
|캡션1=지미 카터 대통령과 함께 백악관 집무실에서, 1979년
|이미지2=President Ronald Reagan and Prime Minister Margaret Thatcher of the United Kingdom.jpg
|alt2=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
|캡션2=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백악관 집무실에서, 1988년
|이미지3=Thatcher and Bush - 1990 - P14935-18A.jpg
|alt3=대처와 조지 H. W. 부시가 함께 서 있는 모습
|캡션3=부시 대통령과 함께 애스펀, 콜로라도에서, 1990년
}}
1982년 3월, 남대서양의 포클랜드 제도에서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했다. 대처 수상은 아르헨티나군의 포클랜드 제도 침략에 대해 즉시 함대와 폭격기를 포클랜드로 파병했고, 많은 함선을 잃었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아 2개월간의 전투 끝에 6월 14일 영국군은 포트 스탠리를 함락시키고 아르헨티나군을 몰아냈다. 대처 수상의 강경한 자세로 포클랜드를 탈환한 것은 영국 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때 “인명을 대가로 하더라도 우리 영국 영토를 지켜야만 한다. 왜냐하면 국제법이 무력 행사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298]”라고 말했다.
영국 경제의 침체로 지지율 하락에 어려움을 겪던 대처 수상은 전쟁 종결 후 “우리는 결코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선언했고, 지지율은 73%를 기록했다. 포클랜드 전쟁을 계기로 보수당은 대처 정권 출범 후 두 번째 총선에서 승리했고, 이를 계기로 대처 수상은 더욱 보수적이고 급진적인 경제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1982년 9월, 대처는 중국을 방문하여 영국과 중국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덩샤오핑은 “일국양제”의 요구를 굽히지 않고, 영국이 협상에 응하지 않을 경우 무력 사용이나 물 공급 중단과 같은 실력 행사도 있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처음에 영국 측은 임대 기간이 만료되는 신계만의 반환을 고려했지만, 영국의 영구 영토인 홍콩섬과 구룡반도의 반환까지 요구하는 맹렬한 덩샤오핑에게 압력을 받아 대처는 결국 굴복했다.
1984년12월 19일, 양국이 서명한 영국-중국 공동선언이 발표되었고, 영국은 1997년7월 1일에 홍콩의 주권을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하며 홍콩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가 될 것임이 명확해졌다. 이 양도 및 반환 결정은 포클랜드 전쟁 당시와는 대조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국내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
1986년 7월 코먼웰스 게임즈(Commonwealth Games) 대회에서는 대처 정부의 남아프리카 공화국(南アフリカ共和国)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정책에 항의하는 32개국이 대회를 보이콧했다. 영국 연방(イギリス連邦)에 속한 국가·지역들이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위해 경제 제재(経済制裁)를 지지했지만, 대처 정부는 영국의 무역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경제 제재에 반대했다.
대처와 그녀의 당은 1975년 국민투표[129]에서 EEC(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을 지지했고,[130] 1986년 단일 유럽 의정서를 지지하며 분담금에 대한 영국 할인을 얻어냈다.[130] 하지만 그녀는 이 조직의 역할은 자유 무역과 효과적인 경쟁을 보장하는 데 국한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EEC의 접근 방식이 소규모 정부와 규제 완화에 대한 그녀의 견해와 상충한다고 우려했다. 단일 시장이 정치적 통합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던 대처는 총리 재임 기간, 특히 1987년 세 번째 정부 출범 이후 더욱 두드러지게 유럽 통합에 반대했다.[131]
유로(ユーロ) 가입의 전 단계인 유럽통화협정(ERM, 欧州為替相場メカニズム) 가입에는 강하게 반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일이 잘 풀린다 해도 ERM 가입은 플러스가 되지 않고,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ERM 가입은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다."라고 대처는 생각했다. 앨런 월터스(アラン・ウォルターズ, 대처의 경제 고문)도 ERM 가입은 파운드화(スターリング・ポンド)에 대한 투기 공격의 압력을 강하게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ERM은 환율 안정은커녕 불안정 요소라고 하면서 ERM에 가입해서는 안 된다고 월터스는 생각했다.[297]
하지만 나이절 로슨(ナイジェル・ローソン), 재무장관(財務大臣)과 후임인 존 메이저(ジョン・メージャー) 등의 주장에 밀려 영국을 ERM에 가입시킨 것도 사실이다. 1990년에 ERM 가입의 이점은 환율 안정뿐만 아니라 금리 인하이기도 하다고 메이저는 주장했다. 더 나아가, 로슨 등과의 대립으로 표면화된 보수당 내부 항쟁에 대해 ERM 가입으로 보수당이 단결할 수 있고, 그것이 경제에도 좋은 영향을 주어 다음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메이저는 주장했다.[297] 최종적으로 대처는 메이저 등에게 양보하여 ±6.0%(변동폭)의 ERM 가입을 검토했고, 그 해 영국은 ERM에 가입했다.
대처는 젊은 시절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나치 독일과의 격렬한 전쟁을 경험했기 때문에 독일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독일 재통일에 있어서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대통령과 함께 강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대처는 “통일이 실현되면, 영웅이 된 헬무트 콜(Helmut Kohl)이 제2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의 독일 영토 전체를 요구할 것이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299] 또한 “콜은 독일이 분단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개하며, “베를린 장벽 붕괴 다음 날, 독일 연방의회(Bundestag)에서 서독 의원들이 자발적으로 독일 국가(Deutschlandlied)를 불렀다는 보고를 듣고 전율했다”고 말했다.[300]
3. 3. 3. 총리직 사임
1990년 유럽 통합 여론이 나오자 마거릿 대처는 이를 반대하였다. 이후 대처는 줄곧 유럽 연합 참여 반대 입장을 고수하던 중 보수당 지도부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332] 그해 11월 보수당 당수 경선에 나섰다가 1차 투표에서 당선에 실패하자, 1991년 5월 보수당 당수직 및 총리직에서 사퇴하였다.보수적이면서도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는 강한 자세로 세 번의 총선거를 승리로 이끈 대처는 재임 후반기에 인두세(community charge영어) 도입을 주장하여 영국 국민의 강한 반발을 받았고, 유럽 통합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도 영국이 유럽 통합에 뒤처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고, 1990년 11월 당수 선거에서는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획득했지만, 2위와의 득표율 차이가 15% 이상에 달하지 않아 규정에 따라 2차 투표가 실시될 상황에 이르자 구심력이 더욱 저하되어 11월 22일 수상 및 보수당 당수직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11월 28일 다우닝가 10번지(영국 총리 관저)에서 물러났고, 후임에는 존 메이저가 취임했다.
4. 정계 은퇴 이후
1992년 총선에서 하원을 떠나면서 자신의 생각을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혔다.[153] 하원을 떠난 후, 영국 전직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재단을 설립했다.[154] 마거릿 대처 재단의 영국 지부는 2005년 재정적 어려움으로 해산되었다.[155] 회고록 《다우닝가 10번지 시절》(1993)과 《권력의 길》(1995)을 출간했다.[156] 1991년, 런던 중심부 벨그라비아(Belgravia) 지역의 체스터 스퀘어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156]
1992년 7월 담배 회사 필립 모리스(Altria|Philip Morris)에 "지정학적 컨설턴트"로 고용되어 연봉 25만 달러와 재단에 연 25만 달러를 기부받았다.[157] 대처는 연설 한 번당 5만 달러를 받았다.[158]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독립의 옹호자가 되었으며,[159] 1991년 크로아티아 라디오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대해 언급하며, 서방 정부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분리 공화국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세르비아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군의 공격 이후 무기를 공급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160] 1992년 8월, 보스니아 전쟁 중의 민족 정화를 종식시킬 것을 촉구하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상황을 "히틀러와 스탈린의 만행"에 비유했다.[161]
상원에서 마스트리흐트 조약을 비판하며, "너무 과한 조약"이라고 묘사하고 "나는 결코 이 조약에 서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162] 세 주요 정당이 모두 조약에 찬성했으므로 국민이 국민투표를 통해 의견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163]
1993년부터 2000년까지 버지니아주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의 명예 총장을 역임했고,[164]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사립 버킹엄 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했다.[165][166] 1976년에 이 대학교의 개교식을 진행했었다.
1994년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 당수로 선출된 후, 대처는 블레어를 "노동당 당수로서 휴 게이츠켈 이후 아마도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고 칭찬하며, "그들의 전면 벤치 뒤에는 많은 사회주의가 보이지만, 블레어씨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변화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덧붙였다.[167]
1998년, 스페인이 체포하고 인권 침해 혐의로 재판을 받게 하려고 했을 때, 칠레의 전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석방을 촉구했다. 그녀는 포클랜드 전쟁 중 그의 영국 지원을 언급했다.[169] 1999년, 그녀는 그가 런던 근처 가택 연금 중일 때 그를 방문했다.[170]
2001년 총선에서 보수당 선거운동을 지지했고, 패배 후 보수당 당수 선거에서는 케네스 클라크보다 이언 던컨 스미스를 지지했다.[172] 2002년, 조지 W. 부시에게 사담 후세인 치하의 이라크 "미완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도록 격려했고,[173] 이라크 전쟁에 맞선 블레어의 "강하고 대담한 리더십"을 칭찬했다.[174]
2002년 4월에 출판된 "국가 경영: 변화하는 세계를 위한 전략"에서 사담이 축출될 때까지 중동에 평화는 없을 것이라고 썼다. 그녀의 책은 또한 이스라엘이 토지 대 평화를 거래해야 하며 유럽 연합(EU)은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없는", "전형적인 유토피아 프로젝트"라고 말했다. 그녀는 영국이 회원 자격 조건을 재협상하거나 아니면 EU를 탈퇴하고 북미 자유 무역 협정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75]
몇 차례의 경미한 뇌졸중 이후, 의사들은 더 이상 공개 연설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176] 2002년 3월, 의사의 권고에 따라 모든 예정된 연설 일정을 취소하고 더 이상 수락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2003년 6월 26일, 남편인 데니스 경이 사망했다.[177] 그의 시신은 7월 3일 런던의 모틀레이 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178]
2004년 6월 11일, 레이건의 국장 예배식에 참석했다.[179]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몇 달 전에 미리 녹음한 영상으로 조사를 전달했다.[180][181]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도서관에서 열린 대통령 추모식과 매장식에 참석했다.[182]
2005년, 블레어가 2년 전에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결정한 방식을 비판했다. 그녀는 여전히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기 위한 개입을 지지했지만, 과학자로서 무력을 사용하기 전에 항상 "사실, 증거, 그리고 증명"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10월 13일 런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 80세 생일을 축하했다. 여왕, 에든버러 공작, 알렉산드라 공주와 토니 블레어를 포함한 손님들이 참석했다.[183] 아베라본의 하우 남작 제프리 하우도 참석하여 "그녀의 진정한 승리는 한 정당이 아니라 두 정당을 변화시킨 것이었으며, 노동당이 결국 돌아왔을 때 대부분의 대처리즘은 불가역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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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2006년 미국 방문
|image1=Thatcher 2006 September 11 event.jpg
|alt1=딕 체니와 린 체니와 함께 서 있는 대처
|caption1=워싱턴 공식 추모식에 참석한 대처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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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2=도널드 럼즈펠드와 피터 페이스와 함께 웃고 있는 대처
|caption2=펜타곤에서 도널드 럼즈펠드와 페이스 장군과 함께
}}
2006년, 미국의 9.11 테러 5주년을 기념하는 워싱턴 공식 추모식에 참석했다. 그녀는 딕 체니 부통령의 손님이었으며 방문 중에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을 만났다.[185] 2007년 2월, 살아있는 영국 총리로는 처음으로 동상을 영국 의회에 세우는 영예를 얻었다. 청동 동상은 정치적 영웅인 윈스턴 처칠의 동상 맞은편에 세워졌으며, 2007년 2월 21일 대처가 참석한 가운데 공개되었다. 그녀는 하원 의원 로비에서 "철을 선호했을지도 모르지만 청동도 괜찮다... 녹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186]
상원 만찬에서 쓰러진 후, 저혈압을 앓고 있던 대처는[188] 2008년 3월 7일 검사를 위해 런던 중심부 세인트 토마스 병원에 입원했다. 2009년에는 넘어져 팔이 부러져 다시 입원했다.[189] 2009년 11월 말 공식 초상화 제막식을 위해 10번가 다우닝가로 돌아왔다.[190] 살아있는 전직 총리에게는 이례적인 영예였다.
2011년 7월 4일, 런던 주재 미국 대사관 외부에 세워진 로널드 레이건 동상 제막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했다.[191] 2010년 7월 19일 마지막으로 상원 회의에 참석했으며, 2011년 7월 30일 상원 사무실이 폐쇄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192]
대처의 딸 캐롤은 2005년 어머니가 치매를 앓고 있다고 밝혔다. 2008년 회고록에서 캐롤은 어머니가 "문장의 끝에 도달할 때쯤이면 문장의 시작 부분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고 썼다.[194] 그녀는 나중에 대화 중에 대처가 포클랜드와 유고슬라비아 분쟁을 혼동했을 때 어머니의 치매를 처음 알아차렸다고 회상하며, 남편 데니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반복해서 알려야 했던 고통을 회상했다.[195]
5. 사망
대처는 2002년 경미한 뇌졸중을 겪은 이후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자택에 칩거하였고, 2003년 남편 데니스가 사망하였다.[333] 2004년 6월 11일,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레이건의 국장 예배식에 참석,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몇 달 전에 미리 녹음한 영상으로 조사를 전달했다.[179][180][181] 2005년, 블레어가 2년 전에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결정한 방식을 비판했다.[183]
2006년, 미국의 9.11 테러 5주년을 기념하는 워싱턴 공식 추모식에 참석했다.[185] 2007년 2월, 살아있는 영국 총리로는 처음으로 동상을 영국 의회에 세우는 영예를 얻었다.[186] 2008년 3월 7일, 상원 만찬에서 쓰러진 후, 저혈압을 앓고 있던 대처는 검사를 위해 세인트 토마스 병원에 입원했다.[188] 2009년에는 넘어져 팔이 부러져 다시 입원했다.[189] 2009년 11월 말 공식 초상화 제막식을 위해 10번가 다우닝가로 돌아왔다.[190] 2011년 7월 4일, 런던 주재 미국 대사관 외부에 세워진 로널드 레이건 동상 제막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했다.[191]
대처의 딸 캐롤은 2005년 어머니가 치매를 앓고 있다고 밝혔다.[194] 2008년 회고록에서 캐롤은 어머니가 "문장의 끝에 도달할 때쯤이면 문장의 시작 부분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고 썼다.[194]
대처 여사는 2013년 4월 8일, 87세의 나이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196] 사망 증명서에는 사망의 주요 원인으로 "뇌혈관 사고"와 "반복적인 일과성 허혈 발작"이 기재되어 있었고, 부차적인 원인으로는 "방광 암"과 치매가 기재되었다.[197] 대처 여사 사망 소식에 대한 반응은 영국 전역에서 엇갈렸는데, 그녀를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평시 총리로 칭송하는 찬사부터 그녀의 죽음을 축하하는 공개적인 행사, 증오와 개인적인 비난의 표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198]
대처 여사의 장례식 세부 사항은 그녀와 미리 합의되었다.[199] 4월 17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교회 예배를 포함한, 정식 군사 의례가 포함된 의전 장례식을 치렀다.[200][201]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에든버러 공작이 장례식에 참석했는데,[202] 이는 여왕 재위 기간 중 그녀의 전임 총리의 장례식에 참석한 두 번째이자 마지막 경우였다.[203]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의 예배 후, 대처 여사의 시신은 남편의 시신이 화장되었던 모틀레이크에서 화장되었다. 9월 28일, 로열 첼시 병원의 마가렛 대처 병동에 있는 모든 성도 예배당에서 대처 여사를 위한 예배가 거행되었다. 비공개 의식에서 대처 여사의 유골은 남편의 옆에 있는 병원 부지에 안치되었다.[204][205]
대처의 서거 소식이 보도되자, 영국에서는 데이비드 캐머런 수상과 토니 블레어 전 수상을 비롯하여, 해외에서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일본의 아베 신조 전 총리,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등 현직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잇따라 깊은 애도를 표명했다.
6. 평가
사회학자 송호근은 기술관료적 성격을 갖는 정치인이라면 불가능했을 사회혁신을 특유의 정치력으로 밀어붙인, "카리스마적인 정치지도자" 중 한 명으로 대처 수상을 언급했다. 국민소득 1만 달러 시점에 분배구조와 복지개혁에 주력하며 노사협력 제도를 창안해 정착시키고, 사회적 투명성과 합리성을 증진하는 제도는 물론 상호신뢰를 높이는 각종 제도를 도입했던 선진국 지도자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337]
다만 민영화 남발과 각종 정책의 실책, 그리고 아들인 마크 대처의 범죄행위와 아파르트헤이트 및 칠레의 독재자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옹호 등으로 많은 비판이 있는 인물이며 마거릿 대처가 사망한 당일 영국에서는 축하 파티를 벌일 정도로 마거릿 대처를 부정적으로 보는 영국인들도 많다.[338]
개인적으로는 가정에 문제가 많았으며 자녀교육에 크게 실패했다. 아들 마크 대처는 무기 밀매, 쿠데타 조장, 내전 관여 등으로 인해 위험인물로 지목되었으며, 중동하고 아프리카 최대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보수당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한 노동당의 블레어 정권이 수립되자, 대처에 의해 폐지되었던 지방자치단체와 공기업이 부활하고, 민영화에 의한 서비스 저하에 대한 대책이 강구되었다. 또한 교육 정책에서도 대처 정권이 도입한 경쟁적인 중등학교가 사실상 폐지되고, 공립학교의 지위 향상이 도모되는 등, 대처리즘의 폐해 제거가 영국의 중요한 정책이 되었다(제3의 길). 그 복지 정책 또한 영국 폭동의 원인 중 하나라는 비판이 있다.[318]
"철의 여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게, 놀랍도록 우정을 소중히 했다고 전해지며, 대수술을 받은 그녀의 친구가 수술 후 눈을 뜨자 아내나 아이가 아닌, 수상인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319]
6. 1. 긍정적 평가
사회학자 송호근은 마거릿 대처를 기술관료적 성격을 갖는 정치인이라면 불가능했을 사회혁신을 특유의 정치력으로 밀어붙인, "카리스마적인 정치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그는 대처가 국민소득 1만 달러 시점에 분배구조와 복지개혁에 주력하며 노사협력 제도를 창안해 정착시키고, 사회적 투명성과 합리성을 증진하는 제도는 물론 상호신뢰를 높이는 각종 제도를 도입했던 선진국 지도자들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337]대처리즘은 케인즈주의, 복지 국가, 국유 산업, 그리고 경제의 엄격한 규제, 그리고 높은 세금이라는 중심 주제에 대체로 동의했던 전후 합의에 대한 체계적이고 결정적인 전환을 의미했다. 대처는 일반적으로 복지 국가를 지지하면서 남용을 없애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1982년에 매우 인기 있는 국민보건 서비스가 "우리 손에 안전하다"고 약속했다.
대처의 정책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통해 '영국병'을 극복하고 경제를 회복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대 실질 자산은 주택 가격 상승과 소득 증가로 인해 80% 증가했으며,[209] 그녀의 재임 기간 동안 주식을 소유한 성인의 수는 7%에서 25%로 증가했다.[209] 또한, 100만 가구 이상이 공영주택을 매입하여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자가 소유주 비율이 55%에서 67%로 증가했다.[209]
대처는 3번의 연속 총선에서 보수당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두 번은 압승이었다.[227] 총 4천만 표 이상이 그녀의 지도력 아래 당에 투표되었다.[228][229][230] 그녀의 선거 성공은 1987년 영국 언론에 의해 "역사적인 해트트릭"으로 불렸다.[231]
2002년 BBC 여론조사 ''위대한 영국인 100인''에서 생존 인물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232] 1999년, 타임은 대처를 20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233] 2015년, 스코티시 위도우즈의 여론조사에서 지난 200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선정되었다.[234] 2016년에는 BBC 라디오 4의 ''우먼스 아워 파워 리스트''에서 지난 70년 동안 여성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여성으로 선정되었다.[235][236] 2020년, 타임지는 대처의 이름을 올해의 여성 100인 명단에 포함시켰다.[237]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상대적으로 낮은 평균 지지율과는 대조적으로, 대처는 이후 회고적 여론 조사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했으며, YouGov에 따르면 영국 대중에게 "전반적으로 긍정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238] 2019년 YouGov 여론 조사에서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그녀를 영국 최고의 전후 지도자로 평가했다.[240] 이 여론 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4명이 넘는 영국인(44%)이 대처를 "훌륭한" 또는 "위대한" 총리라고 생각한다.[240] 그녀는 MORI가 주최한 139명의 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2011년 여론 조사에서 20세기 영국 총리 중 4위를 차지했다.[241] 1945년 이후 영국 역사와 정치를 전문으로 하는 82명의 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2016년 리즈 대학교 설문 조사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총리 중 2위를 차지했다.[242]
"철의 여인" 이미지와는 달리, 대처는 놀랍도록 우정을 소중히 했다고 전해진다. 대수술을 받은 그녀의 친구가 수술 후 눈을 뜨자 아내나 아이가 아닌, 수상인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319]
6. 2. 부정적 평가
마거릿 대처는 민영화 남발과 각종 정책의 실책, 그리고 아들인 마크 대처의 범죄행위와 아파르트헤이트 및 칠레의 독재자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옹호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는 인물이다.[338] 대처리즘으로 인해 빈부 격차가 커지고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비판을 받으며, 특히 1980년대 높은 실업률은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 복지 혜택 축소와 공공 서비스 민영화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비판도 존재한다.대처는 강경한 성격과 독단적인 정책 추진으로 인해 당내 갈등과 사회적 분열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민자에 대한 혐오 발언으로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켰으며,[338]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대한 제재를 반대하고, 넬슨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여 비판을 받았다.[338] 또한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옹호하고 그의 석방을 요구하여 비판을 받았다.[338]
노동당의 블레어 정권은 대처에 의해 폐지되었던 지방자치단체와 공기업을 부활시키고, 민영화에 의한 서비스 저하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다. 또한 교육 정책에서도 대처 정권이 도입한 경쟁적인 중등학교가 사실상 폐지되고, 공립학교의 지위 향상이 도모되는 등, 대처리즘의 폐해 제거가 영국의 중요한 정책이 되었다.[318] 그러나 그 복지 정책 또한 영국 폭동의 원인 중 하나라는 비판이 있다.[318]
6. 3. 한국의 시각에서 본 평가
마거릿 대처의 정책은 특히 더불어민주당과 같은 진보 진영에서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338] 이러한 관점은 1980년대 높은 실업률이 한국의 IMF 외환 위기 당시 대량 실업 사태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강조된다.[210][211]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민영화 남발과 아파르트헤이트 및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옹호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는다.[338]사회학자 송호근은 대처를 "카리스마적인 정치지도자" 중 한 명으로 언급하며, 기술관료적 성격의 정치인이라면 불가능했을 사회혁신을 특유의 정치력으로 밀어붙였다고 평가했다.[337] 그러나 대처의 정책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그 순이익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218], 정치 경제학자 수잔 스트레인지는 신자유주의적 금융 성장 모델을 "카지노 자본주의"라고 비판하며, 투기와 금융 거래가 산업보다 경제에서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견해를 반영했다.[219]
대처의 대처리즘은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반공주의, 대서양주의, 자본주의, 기업가 정신, 유럽회의주의, 세계화, 개인주의, 능력주의, 통화주의, 공급측 경제학, 민영화등을 포함한다.
그녀의 정책은 노동당의 블레어 정권이 수립된 이후, 대처에 의해 폐지되었던 지방자치단체와 공기업을 부활시키고, 민영화에 의한 서비스 저하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는 등, 대처리즘의 폐해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정책 변화를 가져왔다.[318]
7. 유산
8. 서훈
마거릿 대처는 1970년 국무장관이 되면서 국왕의 사법 고문(PC)이 되었다.[255] 1975년에는 칼턴 클럽의 명예 회원으로서 정회원 자격을 부여받은 최초의 여성이었다.[256]
총리 재임 중, 대처는 1979년 10월 24일 왕립 화학 연구소(FRIC)의 명예 펠로우(Hon.)[257], 1983년 7월 1일 왕립 학회 펠로우(FRS) 등 두 가지 명예 훈장을 받았다.[322] 왕립 학회 펠로우 선출은 당시 일부 펠로우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1991년 오더 오브 메리트(Order of Merit, OM) 훈장을 받았으며, 같은 해 조지 H.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훈장을 수여받았다.
1992년 린컨셔주 케스티번의 대처 남작으로서 종신 귀족 작위를 받고 상원 의원(보수당)이 되었다.[323]
1995년 가터 훈장(The Order of the Garter, LG)을 받았다.[324] 같은 해 5월에는 일본으로부터 훈일등 보관장을 수여받았는데, 이는 의례적인 서훈이 아닌 개인적인 공적에 의해 훈일등이 수여된 매우 드문 사례이다.
2007년 2월 21일에는 재임 중 전직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영국 의회 의사당 내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대처는 이 자리에서 "철의 동상(「철의 여인」을 걸고 있는)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동상도 좋지요. 녹슬지 않으니까요."라고 말하며 주변 사람들을 웃게 했다.[325]
미국에서는 1998년 레이건 대통령 재단으로부터 로널드 레이건 자유상을 받았고,[269] 2006년 헤리티지 재단의 후원자로 지명되었으며,[270][271] 마가렛 대처 자유 센터를 설립했다.[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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