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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누스 투로넨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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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티누스 투로넨시스는 4세기 로마 제국 시대에 활동한 기독교 성직자로, 316년경 판노니아(현재 헝가리)에서 태어나 397년(또는 400년) 투렌의 캉드에서 사망했다. 그는 군 복무 중 양심적 병역 거부를 실천하고, 거지에게 망토를 나눠주는 일화로 유명하다. 이후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의 제자가 되어 수도원을 설립하고 투르의 주교가 되었으며, 이교 사원 파괴, 이단자 사면 운동 등 활발한 종교 활동을 펼쳤다. 그는 서방 교회의 축일인 11월 11일에 기념되며,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수호 성인으로 숭배받고 있다. 그의 생애와 관련된 기적, 유물, 예술 작품 등은 그의 숭배를 더욱 확산시켰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교회와 지명에 그의 이름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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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누스 투로넨시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 (라틴어)Martinus Turonensis 마르티누스 투로넨시스
존칭 접두사성인
이름마르탱 드 투르
출생일316년 또는 336년
사망일397년 11월 8일 (60–81세)
출생지헝가리, 사바리아, 판노니아 속주 (현재)
사망지프랑스, 캉데
기념일11월 11일 (로마 가톨릭교회, 루터교, 성공회)
11월 12일 (동방 정교회)
숭배하는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직함주교 및 고해 사제
시성일공식적인 절차 이전
상징외투를 거지에게 나누어 주는 말 탄 남자, 외투를 반으로 자르는 남자, 불의 구체, 거위
수호 성인가난, 알코올 중독, 말타, 바흐리야, 거지, 벨리 마나스티르, 브라티슬라바 대교구, 부에노스 아이레스, 부르겐란트, 기병, 교회 소년 소녀 여단, 디부르크, 에딩겐, 기수, 에르푸르트, 포이아노 델라 키아나, 프랑스, 거위, 말, 호텔 관리인, 여관 주인, 코르트레이크, 마인츠 교구, 몬테마뇨, 올페, 오렌세, 피에트라산타, 스위스 용병, 병참 장교, 알코올 중독 치료자, 기수, 타알, 바탕가스, 투렌, 보카우에, 불라칸, 로텐부르크-슈투트가르트 교구, 군인, 재단사, 위트레흐트, 포도 재배자, 와인 제조업자, 비례, 와인 양조업자, 비스만스도르프 및 비야도스, 토레 디 모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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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르티노
시모네 마르티니 그림

2. 생애

로마 제국령 판노니아 주의 솜버트헤이(당시 Savaria, Sabaria|사바리아la)에서 316년경 태어났다.[2][29] 아버지는 로마군 장교였으며,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 북부 파비아(당시 Ticinumla)에서 성장했다.[29][2] 15세에 로마군에 입대하여 갈리아아미앵 등지에서 복무했다.[29][2]

군 복무 중이던 아미앵에서 추위에 떨던 거지에게 자신의 망토를 반으로 잘라 나누어 준 일화는 유명하다. 그날 밤 꿈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자신이 그 거지였음을 알렸고, 이는 마르티누스가 세례를 받고 군에서 제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24][7] 마르티누스가 가졌던 망토의 절반은 '성 마르티누스의 망토'로 불리며 프랑크 왕국 역대 국왕의 예배당에 보관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카페 왕조 명칭은 망토를 뜻하는 라틴어 'cappala'에서 유래했으며, 예배당을 뜻하는 영어 'chapel'이나 프랑스어 'chapelle' 역시 망토를 보관하던 장소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25]

제대 후, 마르티누스는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의 제자가 되기 위해 푸아티에로 향했으나, 당시 아리우스파의 영향력 때문에 티레니아해의 갈리나리아 섬(현 알벵가 섬)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361년, 힐라리우스가 복귀하자 마르티누스도 돌아와 푸아티에 근교 리구제에 서방 교회 최초의 수도원 중 하나인 리구제 수도원을 세웠다.[22][5]

371년(또는 372년), 투르의 주교로 선출되었다.[2] 주교가 된 후에도 마르무티에 수도원을 세우고 검소한 생활을 이어가며, 투르 지역의 기독교화에 힘썼다. 그는 전도 활동과 병자 치유로 명성을 얻었으며,[24] 교구를 순회하며 사목 활동에 힘썼다. 또한 독일 트리어까지 가서 로마 황제에게 죄수들의 사면을 청하기도 했다. 특히 이단으로 몰린 프리스킬리아누스의 사형 집행을 막으려 노력했으나 실패하자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진다.[7]

콜마르의 성 마르티누스 교회


397년(혹은 400년)경, 캉드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투르에 안장되었고, 그 자리에는 성당이 세워졌다. 이 성당은 순례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종교 개혁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파괴와 재건을 반복했다. 1860년에는 성 마르티누스의 묘소 유적에서 유해 일부가 발견되어 현재 성당 내에 보존되어 있다.[27]

서방 교회에서의 축일은 11월 11일이다.[23]

2. 1. 초기 생애와 군 복무

마르티노는 서기 316년경[2] 로마 제국 판노니아 속주의 사바리아(Savariala, 현 헝가리 솜버트헤이)에서 태어났다.[29] 그의 아버지는 로마군 보조군의 군사 호민관으로 복무한 고위 장교였으며,[2] 이후 이탈리아 북부 티치눔(Ticinumla, 현 파비아)에 정착하여 마르티노는 그곳에서 성장했다.[29][2]

10세 때 마르티노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기독교 교회에 나가 예비 신자가 되었다.[29] 당시 기독교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 제국 내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아 합법적인 종교가 되었으나,[29] 여전히 제국 동방에 신자가 집중된 소수 종교였다. 특히 군인들 사이에서는 미트라교 신앙이 더 널리 퍼져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제국 전역에 성당 건설이 활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아직 소수의 종교였다.

퇴역 장교의 아들이었던 마르티노는 15세에 기병대 알라로 징병되었다.[29][2] 18세 무렵(약 334년 또는 354년)에는 갈리아(현 프랑스)의 사마로브리바(Samarobrivala, 현 아미앵)에 주둔했다.[29][2] 그는 노티티아 디그니타툼에 등재된 중기병 부대인 '암비아넨스 카타프락투스 기병'(catafractarii Ambianensesla)에서 복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부대는 황제의 정예 기병 호위대의 일부였을 수 있으며,[2] 의장 부대의 성격이 강해 실제 전투에 참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전해진다.[30]

마르티노의 군 복무 시절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아미앵에서 겪은 일화이다. 어느 매우 추운 날, 아미앵 성문 근처에서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거지를 만난 마르티노는 자신의 군용 망토를 칼로 잘라 반을 나누어 주었다. 그날 밤, 그는 꿈속에서 자신이 나누어 준 반쪽 망토를 걸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예수는 천사들에게 "아직 예비 신자인 마르틴이 나에게 이 옷을 입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슐피키우스, 2장).[7] 이 경험은 마르티노의 신앙심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고, 그는 18세에 세례를 받았다.[7][24]

마르티노의 전기 작가인 술피키우스 세베루스에 따르면, 마르티노는 세례를 받은 후에도 약 2년 동안 군 복무를 계속했다고 하나, 역사가들이 그의 정확한 제대 시점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2세(재위 337-361)와 율리아누스(재위 355-360) 황제 치하에서 복무한 것으로 보인다.[3] 술피키우스 세베루스는 갈리아 속주의 보르베토마구스(Borbetomagusla, 현 독일 보름스)에서 전투를 앞두고 마르티노가 당시 황제였던 율리아누스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신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제대를 결심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급료 수령을 거부하며 "나는 그리스도의 병사입니다. 싸우는 것은 저에게 허용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비겁죄로 기소되어 투옥되었으나, 그는 무장하지 않은 채 전투 선봉에 서겠다고 자원했다. 그의 상관들이 이를 받아들이려 했으나,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침략자들이 평화를 요청하여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고, 마르티노는 군 복무에서 해방되었다.

2. 2. 양심적 병역 거부와 종교 활동

마르티누스의 전기 작가인 술피키우스 세베루스에 따르면, 마르티누스는 군 복무 중 갈리아 속주보름스(Borbetomagusla, 현재 독일 보름스)에서 갈리아족과의 전투를 앞두고 자신의 신앙 때문에 싸울 수 없다고 결심했다. 그는 "저는 그리스도의 병사입니다. 따라서 저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라고 선언하며, 당시 카이사르였던 율리아누스에게서 급여를 받는 것을 거부했다.[31] 이 일로 명령 불복종과 비겁죄로 기소되어 투옥되었지만, 마르티누스는 무장하지 않은 상태로 군대 선봉에 서겠다고 자원했다. 그의 상관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계획이었으나,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갈리아족이 평화를 제의하면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고, 마르티누스는 군 복무에서 해제되었다.[32] 대한성공회에서 만든 《성공회 소성인전》에서도 마르티노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 무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봉에 섰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군 복무를 마친 마르티누스는 자신의 성소를 따라 Caesarodunum|카이사로두눔la(오늘날 프랑스의 투르)으로 가서, 삼위일체 신앙의 주요 지지자였던 푸아티에의 힐라리오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33][4] 그러나 당시 황실에 널리 퍼져 있던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했던 힐라리오가 푸아티에에서 추방되자, 마르티누스도 이탈리아로 향했다.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알프스 산적을 개종시키고 악마와 맞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꿈의 계시를 받고 고향 판노니아로 돌아가 어머니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을 개종시켰으나 아버지는 설득하지 못했다. 일리리아에서는 아리우스파에 대한 열성적인 반대 활동 때문에 미움을 받아 쫓겨나야 했다.[4] 일리리아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밀라노의 아리우스파 대주교인 아욱센티우스에 의해 도시에서 추방당했다. 초기 기록에 따르면, 마르티누스는 리구리아 해의 갈리나라 섬(오늘날 알벵가 섬)으로 피신하여 한동안 은수자로서 생활했다.

서기 361년, 스승 힐라리오가 추방에서 풀려나 자신의 관할 구역으로 돌아오자, 마르티누스는 그와 다시 합류했다. 그는 푸아티에 근처에 리귀제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는 서방 교회 최초의 수도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5][22] 이 수도원은 곧 많은 제자들을 끌어모으며 푸아티에 주변 지역의 복음 전파 중심지가 되었다.[5][15]

2. 3. 투르의 주교

371년, 마르티노는 투르의 두 번째 주교였던 리토리우스를 계승하여 주교로 서임되었다.[2] 그는 올바른 품행으로 투르 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주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주교 서임 과정은 다소 독특했는데, 병자를 돌봐달라는 시민들의 요청으로 투르에 갔다가 사실은 주교로 추대하기 위한 계획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마지못해 주교직을 수락했다고 전해진다.[2]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주교가 되기를 원치 않아 거위 헛간에 숨었으나 거위들이 우는 바람에 발각되었다고도 한다. 이 과정에서 그의 모습이 다소 흐트러져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대다수 시민의 지지로 주교가 되었다.

주교가 된 마르티노는 이교 신앙의 잔재를 없애는 데 열정적이었다. 그는 이교 신전과 제단, 우상들의 파괴를 지시했다. 당시 갈리아 지역에 깊이 뿌리내린 드루이드교 신앙과의 충돌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 “어떤 마을에서 마르티노가 매우 오래된 이방 종교의 신전을 파괴하고 신전 가까이에 있는 소나무를 베려고 하자, 그곳에 있던 이교도들의 사제와 그를 따르는 신도들이 반대하며 훼방을 놓았다. 그들은 신전이 파괴되는 동안 주님의 권세에 눌려 잠자코 있었지만, 소나무가 베어지는 것에는 참지 못했다.”[35]

이교도들은 자신들이 신성시하는 전나무를 베는 조건으로, 나무가 쓰러지는 방향에 마르티노가 서 있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마르티노는 이를 받아들였고, 나무를 베었을 때 기적적으로 나무가 그를 비껴 쓰러졌다고 한다.[36]

마르티노는 주교좌 성당보다는 루아르강 건너편에 직접 세운 마르무티에 수도원에서 주로 생활했다. 그는 나무로 지은 작은 수도실에 머물렀고, 다른 수사들은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에서 생활했다. 그는 교구 사목에도 열정적이어서, 매년 교구 내 본당들을 방문했는데, 주로 걷거나 당나귀, 배를 이용했다. 그는 수도 공동체를 계속 설립하며 투르에서 샤르트르, 파리, 오툉, 비엔 등 먼 지역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비엔에서는 눈병을 앓던 놀라의 바울리노를 기도로 치유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33]

또한 마르티노는 죄수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청원을 거절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황제를 포함한 당국자들은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만나기를 피하려 했다고 한다.

당시 히스파니아갈리아 교회는 프리실리아누스주의라는 금욕주의 종파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33] 제1차 사라고사 교회회의에서 프리실리아누스와 추종자들은 이단으로 단죄받았고, 이타키우스 주교 등은 마그누스 막시무스 황제에게 이들을 고발했다. 마르티노는 프리실리아누스주의에 반대했지만, 이단 문제를 세속 법정에서 다루고 사형에 처하는 것에는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암브로시오와 함께 트리어의 황궁으로 가서 황제에게 프리실리아누스의 사형을 막아달라고 간청했다. 처음 황제는 마르티노의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마르티노가 떠난 후 이타키우스의 설득에 넘어가 385년 프리실리아누스와 추종자들의 참수를 명령했다.[7] 마르티노는 이 소식을 듣고 깊이 슬퍼하며, 히스파니아에서의 박해 중단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황제의 압력이 있기 전까지 이타키우스와의 교류를 거부했다.

마르티노는 397년 갈리아 중부의 캉데생마르탱에서 선종했다.

안토니 반 다이크가 그린 ''성 마르티노가 거지에게 외투를 나누어 주는 장면'', c. 1618

3. 성 마르티노의 외투

엘 그레코가 그린 '''성 마르티노와 걸인'''.


마르티노는 로마 제국 군인으로서 갈리아(현재의 프랑스)에서 복무하던 중 환시를 체험했는데, 이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되었다. 어느 추운 날, 마르티노가 아미앵 시 성문에 이르렀을 때,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거지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측은지심을 느껴 자신의 군용 외투를 칼로 잘라 절반을 그 거지에게 나눠주었다. 그날 밤, 마르티노는 꿈속에서 자신이 준 외투 반쪽을 걸친 예수를 보았다. 그는 예수께서 천사들에게 “마르티노는 아직 예비신자에 불과하지만 나에게 이 옷을 입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7][37]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마르티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외투가 온전하게 복구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꿈은 마르티노의 신앙심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고, 그는 18세에 세례를 받게 되었다.[7][37]

마르티노가 간직했던 외투의 나머지 절반은 유명한 성유물이 되어 투르 인근 마르무티에 수도원에 있는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 군주들의 기도실에 보관되었다.[29] 중세 시대에 ‘성 마르티노의 기적의 망토’(cappa Sancti Martinila)라고 알려진 이 성유물은 프랑스 국왕이 전투에 나갈 때 직접 가지고 나갔으며, 서약을 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 이 외투는 679년 왕실 보물 창고에서 처음 기록되었으며, 798년 또는 799년 샤를마뉴에 의해 생드니 대성당의 수사들에게 양도된 뤼자르슈 궁전에 옮겨졌다.[38]

성유물함에 보관된 이 외투(cappa)를 관리하는 사제를 cappellanula라고 불렀는데, 이후 군대에서 복무하는 모든 사제를 cappellanila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를 프랑스어로는 chapelains프랑스어라고 번역했는데, 여기서 군종 사제를 뜻하는 영어 단어 채플린(chaplain영어)이 유래했다.[39] 이와 비슷하게, 성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작은 임시 성당을 '작은 외투'를 의미하는 capellala라고 불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단어는 원래의 외투와의 연관성을 잃고, 특정 공동체나 신자 집단을 위해 마련된 작은 규모의 예배 장소, 즉 경당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 채플(chapel영어)의 어원이 되었다.[40]

4. 성인 숭배와 유산

마르티누스는 397년 갈리아의 캉드생마르탱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후, 푸아투 지역 주민들과 투르 주민들 사이에 그의 시신을 안치할 장소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다. 결국 투르 주민들이 밤중에 마르티누스의 시신을 루아르강에 준비된 배로 옮겨 투르로 운반했으며, 강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기록에 따르면 "2,000명의 수도승과 거의 같은 수의 흰 옷을 입은 처녀들이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고 한다. 시신은 투르 시 외곽의 작은 숲에 묻혔고, 그 자리에 투르의 생마르탱 대성당이 세워졌다.

투르의 성지는 중세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시설 중 하나로 발전했으나, 이후 여러 차례 화재와 노르만족 바이킹의 약탈을 겪었으며, 프랑스 종교 전쟁과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파괴되고 철거되었다. 1860년 12월, 옛 성당 터에서 마르티누스의 무덤 유적이 발견되었고, 이는 그의 숭배를 다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이 유물들은 새로 지어진 성당 내부에 보관되어 있다.[27]

서방 교회에서 그의 축일은 11월 11일이며[23], 이 날은 그의 사망일, 매장일 또는 생일 등으로 여겨진다.[24]

4. 1. 성인 숭배

마르티노에 대한 숭배는 중세 시대에 널리 퍼졌으며, 특히 루아르 강과 마른 강 사이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이 지역은 르 루아 라뒤리와 지스버그가 마르티노를 기념하는 지명이 가장 조밀하게 축적된 곳으로 언급한 바 있다.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는 일찍이 "그리스도가 알려진 곳이라면 어디든 마르티노를 존경한다"고 선언했다.[8]

성 페르페투스 주교가 461년 투르에 취임했을 때, 마르티노의 즉위 후임자인 브리시우스가 지은 마르티노 무덤 위의 작은 예배당은 이미 몰려드는 순례자들을 수용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페르페투스는 길이가 38m, 폭이 18m이고 120개의 기둥이 있는 더 큰 바실리카를 건설했다. 마르티노의 시신은 그의 은둔지인 캉드생마르탱의 작은 예배당에서 투르로 옮겨졌고, 그의 석관은 새로운 바실리카의 높은 제단 뒤에 다시 안치되었다.[9] 오텡의 유프로니우스 주교(472–475)가 기증한 큰 대리석 덩어리가 무덤 위에 놓여 높은 제단 뒤에 모인 신자들에게 보이게 했다. 베르너 야콥센은 바실리카 아트리움에 머무는 순례자들에게도 이것이 보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일반적인 배치와 달리, 아트리움은 교회 뒤편, 앱스의 무덤 근처에 위치했으며, 앱스 벽의 ''페네스트렐라''(작은 창)를 통해 보였을 것이다.

성 마르티노의 인기는 프랑스의 여러 왕가가 그를 숭배한 데에도 기인한다. 6세기 살리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 1세는 알레마니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면 세례를 받겠다고 약속했고, 성 마르티노의 중재 덕분에 승리했다고 믿었다. 그는 이후 알라릭 2세를 물리치는 등 여러 승리 역시 성 마르티노 덕분이라고 여겼다. 성 마르티노에 대한 헌신은 메로빙거 왕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7세기 초 다고베르 1세는 금세공인 성 엘리지우스에게 금과 보석으로 무덤 신전을 만들도록 의뢰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오 주교는 성 마르티노의 기적적인 행적으로 가득 찬 영향력 있는 ''생애''를 저술하고 배포했다. 마르티노에 대한 숭배는 메로빙거 왕조의 뒤를 이은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도 이어졌다. 마르티누스가 가지고 있던 망토 조각은 "성 마르티누스의 망토"로 불리며 프랑크 왕국의 역대 국왕 예배당에 보관되었다. 프랑스어 'chapelle', 영어 'chapel'(예배당)이라는 단어는 망토(라틴어 'cappa')를 보관하던 장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25]

투르의 성지 예배당은 중세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기관 중 하나로 발전했다. 샤를마뉴는 그의 친구이자 고문인 알쿠인에게 수도원장 직위를 수여했다. 알쿠인의 서사실에서는 필사본의 가독성을 높인 명확하고 둥근 글씨체인 카롤링거 소문자가 개발되었다.

그러나 이 수도원은 여러 차례 화재로 파괴되었고, 853년과 903년에는 노르만 바이킹에게 약탈당했다. 994년에 다시 불탔으나, 생 마르탱의 재무 담당자인 에르베 드 부쟁세에 의해 재건되어 20년 만에 완공되었다. 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확장된 투르의 생 마르탱 성지는 순례의 주요 경유지가 되었다. 1453년에는 샤를 7세아녜스 소렐이 기증한 화려한 새 성유물함으로 마르티노의 유해가 옮겨졌다.

프랑스 종교 전쟁 중인 1562년, 대성당은 개신교 위그노에게 약탈당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폐지되고 축성 해제된 후 마구간으로 사용되다가 결국 완전히 철거되었다. 수도원 재건을 막기 위해 부지를 가로질러 두 개의 거리가 건설되었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들은 1802년에 팔렸다.

투르의 생 마르탱 대성당


생 마르탱의 무덤


1860년 레오 뒤퐁 (1797–1876)의 발굴을 통해 이전 수도원의 규모가 밝혀졌고 일부 건축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성 마르탱의 무덤은 1860년 12월 14일에 재발견되었으며, 이는 19세기에 성 마르탱에 대한 대중적인 숭배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27]

마르탱의 프랑스 내 인기가 다시 높아진 것은 1870-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관련이 깊다. 이 전쟁의 군사적, 정치적 위기 속에서 나폴레옹 3세프랑스 제2제국이 무너지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선포되었다. 파리가 프로이센군에 의해 포위되자 프랑스 정부는 잠시 투르로 이전했고(1870년 9월~12월), 투르는 실질적인 수도 역할을 했다. 이 시기 마르티노는 군사적 성인이자 프랑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다.

특히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들은 마르티노를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들은 나폴레옹 3세 정권의 붕괴를 신의 징벌로 해석했으며, 수년간의 반성직주의로 인해 국가가 잘못된 길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사제들은 정치적 안정을 위해 회개와 종교로의 복귀를 설교했고, 파괴된 투르의 옛 생 마르탱 대성당 탑들은 전통적인 가톨릭 프랑스의 쇠퇴를 상징하게 되었다.

전쟁 중 정부가 투르로 이전하면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성 마르탱의 무덤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무덤은 조제프-이폴리트 기베르 대주교가 세운 임시 예배당으로 덮여 있었다. 성 마르탱 숭배는 성심에 대한 국가적 헌신과도 연결되었다. 파테이 전투에 참전한 울트라몬타니즘 성향의 가톨릭 교황 주아브 병사들이 들었던 사크레쾨르(성심) 깃발은 전투 전날 밤 성 마르탱의 무덤에 놓였다. 깃발에는 "예수의 마음이여 프랑스를 구원하소서"라고 적혀 있었고, 뒷면에는 투르의 카르멜 수녀회 수녀들이 "성 마르탱, 프랑스를 보호하소서"라고 수놓았다. 프랑스군이 파테이에서 승리하자 많은 신자들은 이를 신의 은총과 마르티노의 중재 덕분으로 여겼다. 1870년대의 대중적인 찬송가는 마르탱의 외투, 즉 "프랑스의 첫 번째 깃발" 아래 국가를 보호한다는 주제를 강조했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세속주의, 불가지론, 반성직주의의 영향으로 많은 남성들이 교회를 떠났지만, 마르티노는 남성 성인으로서 이러한 경향의 예외적인 존재였다. 가톨릭 우파는 군 복무 중인 남성들에게 마르티노를 원칙적인 행동의 남성적 모델로 제시했다. 그는 용감한 전사였고, 가난한 이에 대한 의무를 알았으며, 자신의 재산을 나누고, 군 복무를 수행하며, 정당한 명령에 따르고, 세속 권위를 존중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1870년대 투르의 성 마르티노 묘지로 향하는 행렬은 교회와 군대의 협력을 보여주는 장이 되었다. 정복 차림의 육군 장교들이 군사 호위병 역할을 하며 성직자들을 상징적으로 보호했다. 그러나 반성직주의자들은 이러한 공공 종교 행렬을 시민 공간에 대한 침해로 간주했다. 1878년, 투르의 임시 시장 M. 리비에르는 반성직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 성 마르티노를 기리는 11월 행렬을 금지했다.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대통령의 뒤를 이어 공화주의자인 쥘 그레비가 대통령이 되면서 국가적인 반성직주의 공세가 강화되었다. 이에 맞서 푸아티에의 루이-에두아르-프랑수아-데지레 피 주교는 보수주의자들을 규합하여 1879년 11월 행렬을 위한 대규모 시위를 계획했다. 피 주교는 성 마르티노가 현대 사회의 변화를 멈추게 하고 종교와 세속이 융합된 프랑스를 건설하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갈등은 군대 내 교회의 권력을 둘러싼 보수주의자와 반성직자 사이의 더 큰 갈등을 반영했다. 1874년부터 평시에도 군대에 군목 배치가 허용되었지만, 반성직자들은 군목들을 군주주의자이자 반혁명가로 여겼다. 보수주의자들은 이에 대응하여 단명한 생 모리스 군단을 창설하고, 무보수 자원 군목에게 재정 지원을 제공하는 노트르담 데 솔다트(Notre Dame de Soldats) 단체를 만들었다. 1880년, 입법부는 프랑스 군대의 군목 수를 줄이는 반성직자 법안인 뒤보 법안을 통과시켰다. 반성직자 입법자들은 군목 대신 지휘관이 군인들에게 도덕적 지원을 제공하고 "애국적 공화주의"에 따라 훈련을 감독하기를 원했다.

성 마르티노는 오랫동안 프랑스 왕가의 유산과 연관되어 왔지만, 르네 프랑수아 르누 투르 대주교(1896–1913)는 그를 특별히 "공화주의적" 수호성인으로 연결시키려 노력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군목으로 복무했던 르누는 성 마르티노를 강력히 지지하며 프랑스의 모든 승리가 그에게 기인한다고 믿었다. 그는 군대를 성 마르티노의 외투("프랑스의 첫 번째 깃발")와 프랑스 삼색기("옛것과 새로운 것의 연합의 상징")와 연결시켜, 성 마르티노 숭배를 제3 공화국과 결합시키려 했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한 긴장은 프랑스에서 반성직주의를 다시 불러일으켰고, 교회와 공화국 사이의 균열을 심화시켰다. 결국 1905년, 르네 발데크-루소와 에밀 콩브의 영향력과 바티칸과의 관계 악화가 맞물려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성 마르티노의 인기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다시 높아졌다. 반성직주의는 수그러들었고, 사제들은 군목으로 프랑스 군대에 복무했으며, 5,000명 이상의 사제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1916년, 아쑴시온회는 투르로 전국 순례를 조직하여 프랑스 전역에서 사람들을 모았다. 프랑스 교구들에서 성 마르티노에 대한 헌신이 증폭되었고, 수호성인에게 특별 기도가 드려졌다. 휴전 협정이 성 마르티노 축일인 1918년 11월 11일에 서명되자, 프랑스 국민들은 이를 프랑스 문제에 대한 그의 중재의 징표로 여겼다.

성공회미국 성공회의 성인 달력에서는 11월 11일을 마르티노의 축일로 기념한다.[10][11][23] 이 날은 그의 사망일, 매장일, 또는 생일 등으로 여겨진다.[24]

1871년 급진적인 파리 코뮌 이후 보수적인 가톨릭 신앙이 부활하면서, 교회는 성 마르탱을 위한 새로운 대성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건축가 빅토르 라루는 고딕 리바이벌 대신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을 혼합한 신-비잔틴 양식을 선택했다. 새로운 투르의 생 마르탱 대성당은 이전 부지의 일부에 세워졌으며, 1886년에 착공하여 1925년 7월 4일에 축성되었다.[12] 1860년에 발견된 성 마르티노 묘소의 파편들은 현재 이 성당 안에 보관되어 있다.[27]

4. 2. 유산

마르티노에 대한 숭배는 중세 시대에 널리 퍼졌으며, 특히 루아르 강과 마른 강 사이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는 "그리스도가 알려진 곳이라면 어디든 마르티노를 존경한다"고 선언했다.[8] 그는 거지의 수호성인(망토를 나눠준 일화 때문에), 양모 직공과 재봉사(망토 때문에), 미국 육군 병참 부대, 거위(주교직을 피하려 숨었을 때 거위 울음소리 때문에 발각되었다는 전설 또는 거위의 이동 시기와 축일이 겹치기 때문), 포도 재배자 및 여관 주인(축일이 늦은 포도 수확 시기와 관련), 그리고 프랑스의 수호성인이다.[13] 또한 2021년 봄, 이탈리아 주교들에 의해 이탈리아 자원봉사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수호성인이라는 점 외에도, 판노니아 출신으로 로마 갈리아에서 활동한 그의 국제적인 배경 때문에 "유럽 전역의 영적인 다리"로 묘사되기도 한다.[24]

마르티노의 삶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는 아미앵 성문 앞에서 추위에 떠는 거지에게 자신의 군용 망토를 반으로 잘라 나눠준 이야기이다. 그날 밤 꿈에 예수 그리스도가 그 망토 반쪽을 입고 나타나 "아직 예비신자인 마르틴이 나에게 이 옷을 입혔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7][24] 이 사건은 그의 세례와 군 제대의 계기가 되었다. 그가 간직했던 망토 조각(cappa Sancti Martini|카파 상크티 마르티니la)은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들의 중요한 성유물이 되어 마르무티에 수도원 예배당에 보관되었고, 전투에 가지고 나가거나 맹세에 사용되었다.[25] 이 성유물을 관리하던 사제를 '카펠라누스'(cappellanus|카펠라누스la)라 불렀고, 이는 군대 사제를 뜻하는 '채플린'(chaplain영어)의 어원이 되었다. 또한 성유물을 보관하던 작은 교회를 '카펠라'(capella|카펠라la, 작은 망토)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채플'(chapel영어)이라는 단어가 유래했다.[25]

마르티노의 유해는 투르에 안장되었고, 그 무덤 위에 세워진 작은 예배당은 곧 주요 순례지가 되었다. 성 페르페투스 주교는 5세기에 길이 38m, 폭 18m의 더 큰 바실리카를 건설했으며,[9] 이는 중세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성소 중 하나로 발전했다. 샤를마뉴는 알쿠인을 수도원장으로 임명했고, 이곳의 서사실에서는 카롤링거 소문자가 개발되었다. 대성당은 화재와 노르만족의 약탈을 겪었으나 여러 차례 재건되었고, 1453년에는 샤를 7세와 아그네스 소렐이 기증한 새 성유물함에 유해가 안치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종교 전쟁 중 위그노에 의해 약탈당하고, 프랑스 혁명 때 폐지되어 대부분 철거되었다. 1860년 레오 뒤퐁의 발굴로 무덤이 재발견되면서 마르티노에 대한 숭배가 부활했고, 빅토르 라루의 설계로 새로운 투르의 생 마르탱 대성당이 1886년부터 1925년에 걸쳐 건설되었다.[12][27]

성 마르티노는 프랑스 왕가와 깊은 관련이 있다. 클로비스 1세는 자신의 승리를 마르티노의 덕으로 돌렸고,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걸쳐 그의 숭배는 지속되었다. 다고베르 1세는 성 엘리지우스에게 금과 보석으로 무덤 신전을 만들도록 의뢰했다. 투르의 그레고리 주교는 그의 생애와 기적을 기록하여 숭배를 확산시켰다. 마르티노의 인기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 다시 높아졌다. 그는 군사적 성인이자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프랑스 제3공화국의 수호성인으로 간주되었다. 보수 가톨릭 진영은 그를 전통적 가치와 남성적 미덕의 모델로 제시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휴전 협정이 그의 축일인 1918년 11월 11일에 체결되자, 많은 프랑스인들은 이를 마르티노의 중재로 여겼다.

그의 축일인 11월 11일은 서유럽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전통과 함께 기념된다.[23] 과거에는 이날부터 크리스마스까지 40일간의 단식 기간(Quadragesima Sancti Martini|콰드라게시마 상크티 마르티니la)이 시작되었으며, 단식 전날에는 큰 잔치를 벌였다.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는 아이들이 등불을 들고 행진하는 전통(de: Laternelaufen)이 있으며, 거위 요리를 먹는다. 벨기에 일부 지역에서는 성 니콜라우스 대신 성 마르티노가 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다. 포르투갈에서는 '마구스투스'(magustospt)라 불리는 모임에서 을 구워 먹고 와인을 마시며, 이날의 따뜻한 날씨를 '성 마르티노의 여름'(Verão de São Martinhopt, Veranillo de San Martínes)이라 부른다. 폴란드 포즈난에서는 '성 마르티노의 크루아상'(Rogal świętomarcińskipl)이라는 특별한 빵을 먹는다. 몰타에서는 아이들이 축일 전날 밤 침대 옆에 둔 가방이 다음 날 과일로 채워져 있다고 한다.

포즈난에서 성 마르티노 축일을 위해 구운 ''로갈 쉬비엥토마르친스키''


마르티노의 영향력은 아일랜드에도 미쳤다. 그의 마르무티에 수도원은 켈트족 선교사들의 훈련장이었으며, 성 니니안은 마르무티에에서 공부하고 마르티노에게 교회를 헌정했다. 성 콜룸바누스도 그의 무덤에서 기도했다고 전해진다.[14] 마르틴 루터는 성 마르티노 축일에 세례를 받아 그의 이름을 따랐으며, 많은 루터교 교회가 성 마르티노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성공회미국 성공회의 성인 달력에서도 11월 11일에 그를 기념한다.[10][11]

수많은 교회가 투르의 성 마르티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런던 트라팔가 광장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교회, 벨기에 이프르의 성 마르티노 대성당, 헝가리 솜버트헤이의 교회,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성당과 흐로닝언의 마르티니케르크, 독일 카이저슬라우테른의 성 마르티노 교회, 폴란드 포즈난의 교회 등이 대표적이다.[17]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보카우에, 불라칸 등 여러 도시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16] 핀란드의 마르틸라와 라이시오 시의 문장에도 그의 모습이 등장한다.

슬로바키아 세니차의 문장에 묘사된 성 마르티노


핀란드 마르틸라의 문장에 있는 투르의 마르티노


핀란드 라이시오의 문장에 있는 투르의 마르티노


투르의 그레고리 등 초기 기록에는 없지만, 마르티노는 투렌 지역에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을 확산시킨 인물로 여겨지며, 특히 셰냉 블랑 품종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 그는 미국 육군 병참감의 수호 성인이기도 하며, 그의 이름을 딴 군사 훈장이 있다.[20] 네덜란드 영화 피와 정열(1985)은 성 마르티노 조각상을 주요 소재로 다룬다.

샤르트르 대성당스테인드글라스 창문(베이 20)에는 그의 생애가 40개의 패널로 묘사되어 있다.[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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