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레슈친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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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아 레슈친스카는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의 딸로, 1725년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폴란드 왕가의 다산 능력이 결혼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결혼 후 9년간 루이 15세와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으나, 루이 15세의 관심이 멀어지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문화 예술 후원자로서 활동하며, 7개 국어를 구사하는 등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으며, 65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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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레슈친스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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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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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프랑스 왕비 |
재위 기간 | 1725년 9월 4일 – 1768년 6월 24일 |
출생일 | 1703년 6월 23일 |
출생지 | 트셰브니차, 실레시아, 신성 로마 제국 |
사망일 | 1768년 6월 24일 (65세) |
사망지 | 베르사유 궁전, 프랑스 왕국 |
매장지 | 생드니 대성당, 프랑스 |
배우자 | 루이 15세 (1725년 결혼) |
자녀 | 파르마 공작부인 루이즈 엘리자베트 앙리에트 드 프랑스 마리 루이즈 드 프랑스 프랑스 왕태자 루이 (1729-1765) 앙주 공작 필리프 루부아 공작부인 아델라이드 빅투아르 드 프랑스 루부아 공작부인 소피 테레즈 드 프랑스 생드니 수도원장 루이즈 드 프랑스 |
가문 | 레슈친스키 가문 |
아버지 |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 |
어머니 | 카타지나 오팔린스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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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폴란드어 | Maria Karolina Zofia Felicja Leszczyńska (마리아 카롤리나 조피아 펠리치아 레슈친스카) |
프랑스어 | Marie-Caroline-Sophie-Félicité (마리-카롤린-소피-펠리시테) |
폴란드어 발음 (IPA) | /ˈmarja lɛʂˈt͡ʂɨj̃ska/ |
프랑스어 발음 (IPA) | /maʁi lɛɡzɛ̃ska/ |
왕실 칭호 | |
경칭 | 폐하 |
호칭 | 전하 |
대안 | 가장 높고 강력하며 뛰어난 공주 |
2. 생애
1709년 폴란드가 스웨덴군의 침략을 받아 부왕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그의 가족은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이들은 스웨덴, 오스만 제국 등 여러 곳을 떠돌다가 프랑스의 도움으로 알자스의 작은 마을에 정착했다.[4]
1725년 9월, 21세의 마리아 레슈친스카는 16세의 루이 15세와 결혼했다. 당시 섭정이었던 오를레앙 공이 사망한 후 실권을 잡은 부르봉 공은 상속자를 많이 낳을 수 있는 나이 든 왕녀를 찾고 있었고, 마리아가 최종적으로 선택되었다. 마리아가 선택된 이유는 폴란드 왕실의 다산력뿐만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있던 그녀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왕비가 되게 해준 자신의 은혜에 보답하여 매우 순응적이고 협조적일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마리아는 훗날 부르봉 공의 실각을 막으려고 단 한 번 정치적 시도를 했다.[4]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왕과 가장 가난한 공주의 결혼은 당시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궁정에 들어온 후 마리아는 종종 폴란드인이라는 뒷말과 비아냥을 견뎌야 했다.
결혼 후 처음 9년 동안은 부부간의 금실이 매우 좋았다. 마리는 조용하고 상냥했으며,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그녀는 매년 1명꼴로 아이를 낳아 총 9번의 출산을 하여 왕비의 소임을 다했다. 그러나 헌신적인 아내에게 싫증을 느낀 루이 15세는 아내에 대한 애정이 식어버려 여러 명의 정부를 두게 되었다. 마지막 아이를 낳고 나서 루이 15세는 사실상 마리아와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4]
마리아 레슈친스카는 슬하에 2남 8녀를 두었으며, 그중 7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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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엘리자베트 | 1727년 8월 14일 | 1759년 12월 6일 (32세) | 파르마 공작 필리포와 결혼. 슬하 1남 2녀. |
앙리에트 | 1727년 8월 14일 | 1752년 2월 10일 (24세) | 프랑스의 루이즈엘리자베트와 쌍둥이 자매. 미혼. |
루이즈 | 1728년 7월 28일 | 1733년 2월 19일 (4세) | 요절. |
루이 페르디낭 | 1729년 9월 4일 | 1765년 12월 20일 (36세) | 왕세자. 후임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의 아버지. |
필리프 | 1730년 8월 30일 | 1733년 4월 7일 (2세) | 앙주 공작. 요절. |
아델라이드 | 1732년 3월 23일 | 1800년 2월 27일 (67세) | 미혼. |
빅투아르 | 1733년 5월 11일 | 1799년 6월 7일 (66세) | 미혼. |
소피 | 1734년 7월 17일 | 1782년 3월 3일 (47세) | 미혼. |
테레즈 | 1736년 5월 16일 | 1744년 9월 28일 (8세) | 요절. |
루이즈 마리 | 1737년 7월 15일 | 1787년 12월 23일 (50세) | 수녀가 됨. |
궁정 행사에서 제외된 마리는 자신의 처지에 별 불평 없이 매일 시녀들과 미사에 참례했고, 방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자수를 놓고 악기를 연주하며 시간을 보냈다. 친한 친구들과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녀의 낙이었다. 마리는 궁정의 음모에 연루되지 않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다가 65세에 루이 15세보다 6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2. 1. 초기 생애와 망명
레슈친스키 가문의 일원인 마리아 카롤리나 조피아 펠리치아 레슈친스카(비에니아바)[1]는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와 그의 아내인 카타르지나 오팔린스카 (오팔린스키 가문)의 둘째 딸이었다. 그녀는 언니 안나 레슈친스카를 두었는데, 안나는 1717년 폐렴으로 사망했다.[2] 마리아는 슐레지엔 지방의 추셰브니차(독일어: 트레브니츠)에서 태어났다.마리아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정치적 불운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아버지 스타니스와프는 마리아가 태어난 다음 해인 1704년에 스웨덴 국왕 칼 12세에 의해 폴란드 왕으로 옹립되었지만, 1709년에 칼 12세가 러시아 제국에 패배하면서 왕위를 잃고 가족은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타니스와프의 불운한 정치 경력은 훗날 그의 딸 마리아가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신부로 선택되는 이유가 되었다. 정치적 연줄이 없었던 마리아는 프랑스인들에게 국제 동맹의 부담에서 자유로운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1709년, 스웨덴 군대가 폴란드에서 군사적 우위를 잃으면서 스타니스와프는 폐위되었고, 가족은 스웨덴 스카니아의 크리스티안스타드에서 칼 12세의 보호를 받았다.[3] 피난 중에 마리는 가족과 헤어졌는데, 나중에 마구간 구유에 숨어 있는 유모와 함께 발견되었다. 다른 설에 따르면, 그녀는 오래된 광산 갱도의 동굴에 있었다고도 한다.[3] 스웨덴에서 가족은 과부 왕비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헤드비그 엘레오노라의 환영을 받았고, 크리스티안스타드 주변 귀족 영지에서 인기 있는 구성원이 되었다. 1712년에는 과부 왕비의 온천인 메데비를 공식 방문하기도 했다.[3] 이 시기에 마리는 스카니아 억양의 스웨덴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1714년, 칼 12세는 가족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츠바이브뤼켄에서 살도록 허락했고, 그들은 츠바이브뤼켄의 수입으로 생활을 지원받았다. 그들은 1718년 칼 12세가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3] 이후 츠바이브뤼켄은 칼 12세의 사촌에게 넘어갔다. 스타니스와프는 프랑스 섭정인 오를레앙 공작과 로렌 공작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스웨덴 여왕이 중재자 역할을 했다.[4]
1718년, 로렌 공작의 지원으로 가족은 프랑스에 합병된 알자스 지방의 비스부르에 정착했다. 이곳은 루이 14세의 조카이자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미성년 통치 기간 동안 섭정이었던 필리프 2세 오를레앙 공작이 제안한 곳이었다. 가족은 프랑스 섭정의 비용으로 큰 타운 하우스에서 소박하게 살았다.
당시 비스부르에서의 생활 방식은 왕족에게는 매우 낮은 수준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작은 집에 살았고, '명예 경호원' 역할을 하는 소규모 수행원에게 급여를 지불할 수 없었으며, 전 여왕 카타르지나의 보석은 채권자에게 담보로 잡혀 있었다.[5]
어머니 카타르지나와 할머니 안나 레슈친스카는 망명과 지위 상실에 대해 씁쓸함을 느꼈고, 이는 때때로 망명의 원인으로 비난했던 스타니스와프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그러나 마리는 아버지와 가까웠고, 그와 대화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마리는 "침묵 속에서 고통을 감수하고 자신의 어려움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치게 하지 않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어린 마음에 더 이상 행복을 요구하지 않는 여성의 성숙함"을 부여하는 "심오하고 강렬한 경건함"을 발전시켰다고 한다.[5]
2. 2. 프랑스 왕비가 되다
1725년 9월, 21세의 마리아 레슈친스카는 16세의 루이 15세와 결혼했다. 당시 섭정이었던 오를레앙 공이 사망한 후 실권을 잡은 부르봉 공은 상속자를 많이 낳을 수 있는 나이 든 왕녀를 찾고 있었고, 마리아가 최종적으로 선택되었다.[4] 마리아가 선택된 이유는 폴란드 왕실의 다산력뿐만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있던 그녀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왕비가 되게 해준 자신의 은혜에 보답하여 매우 순응적이고 협조적일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4] 실제로 마리아는 훗날 부르봉 공의 실각을 막으려고 단 한 번 정치적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왕과 가장 가난한 공주의 결혼은 당시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궁정에 들어온 후 마리아는 종종 폴란드인이라는 뒷말과 비아냥을 견뎌야 했다.
1723년, 부르봉 공작은 루이 15세의 미성년 기간 동안 프랑스의 섭정이 되었다. 섭정은 그의 연인 마담 드 프리에 의해 지배받았다. 마리아와 부르봉 공작 간의 결혼 협상이 있었는데, 마담 드 프리는 평판이 좋지 않은 마리아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이 결혼을 선호했다.[4] 그러나 루이 15세(당시 15세)의 결혼이 우선시되면서 이 협상은 곧 뒷전으로 밀려났다. 루이 15세는 이미 몇 년 전에 미래의 아내로 프랑스에 온 인판타 마리아나 빅토리아와 약혼한 상태였다. 그녀는 겨우 다섯 살이었기에, 수년 동안 아이를 기대할 수 없었다.[4] 왕이 병에 걸리자 후계자 없이 죽고 왕위가 오를레앙 가문으로 넘어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는 왕위가 오를레앙 가문보다는 스페인 가문으로 넘어가기를 선호했던 부르봉 공작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은 전망이었다.[4] 결국 루이 15세의 약혼은 파기되었고 인판타는 스페인으로 돌려보내졌으며, 이는 스페인 측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부르봉 공작과 마담 드 프리는 국왕과 마리아의 즉각적인 결혼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마리아 레슈친스카는 젊은 국왕과의 결혼에 적합하다고 여겨진 99명의 유럽 공주 명단에 있었다. 마리아는 처음에는 가톨릭 공주였기 때문에 명단에 포함되었지만, 너무 가난하다는 이유로 명단이 99명에서 17명으로 줄었을 때 제외되었다.[4]
그러나 그녀보다 더 선호되었던 후보들은 모두 여러 가지 이유로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마리아 레슈친스카는 정치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고 양쪽 모두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동맹이 없었기 때문에, 부르봉 공작과 마담 드 프리, 그리고 플뢰리 추기경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선택으로 떠올랐다.[4] 플뢰리 추기경은 마리아가 연결고리가 없어 그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를 선택하는 것을 받아들였고, 부르봉 공작과 마담 드 프리는 그녀가 개인적인 권력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그들의 지위에 빚을 지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마리아는 마침내 건강한 성인 가톨릭 공주로 결혼 직후 아이를 낳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마담 드 프리는 마리아의 초상화를 그려서, 의도적으로 국왕이 가장 좋아하는 어머니의 초상화와 닮게 만들었다. 그 초상화를 보여주자, 루이 15세는 감명을 받아 "그녀가 그들 중 가장 사랑스럽다!"라고 외치며, 이 결혼에 열광하게 되었다.[5]

공식적인 제안은 1725년 4월 2일에 이루어졌다. 결혼 발표는 왕실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마리아의 아버지인 스타니스와프는 짧은 기간 동안만 군주였고, 그녀는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서 프랑스 여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4] 귀족들과 궁정은 미래의 여왕을 떠오르는 침입자로, 대신들은 스페인과 러시아와의 외교적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으로, 일반 대중은 프랑스가 "이 결혼으로 영광도 명예도, 부도 동맹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 처음에는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5] 결혼 전에는 신부가 못생기고 간질 환자이며 불임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1725년 5월 6일, 마리아는 신체 검사를 받아 간질을 배제했고, 그녀의 생리와 임신 능력에 대한 안심할 수 있는 보고서를 받았다.[4] 결혼 계약에서 그녀에게는 이전에 스페인 공주에게 주어졌던 것과 동일한 조건이 주어졌고, 따라서 그녀는 반지와 보석에 50000USD, 결혼 시 250000USD, 그리고 연간 미망인 수당 20000USD을 보장받았다.
2. 3. 결혼 생활과 자녀
1725년 9월, 21살의 나이에 당시 16살이던 루이 15세와 결혼하였다. 당시 섭정 오를레앙 공이 죽은 후 실권자가 된 부르봉 공은 상속자를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나이 든 왕녀를 물색하다가 마리를 최종적으로 선발하였다. 굳이 그녀를 선택한 이유는 폴란드 왕실의 다산력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의 극빈함 때문이기도 하였다. 즉, 딱한 처지에 있던 마리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왕의 배우자가 될 수 있게 해준 자신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매우 순응적이고 협조적일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마리는 훗날 부르봉 공의 실각을 저지하려고 딱 한 번 정치적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4]결혼 후 처음 9년 동안은 부부간의 금실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마리는 조용하고 상냥하였으며, 독실한 로마 가톨릭교도였다. 그녀는 폴란드 왕실의 다산력을 인정받았듯이 매년 1명꼴로 아이를 낳아 총 9번의 출산을 하여 상속자를 생산해야 하는 왕비의 소임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헌신적이고 얌전한 아내에게 점차 싫증을 느끼게 된 루이 15세는 아내에 대한 애정이 식어버려 정부를 여러 명 두게 되었다. 마지막 아이를 낳고 나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나누는 형식적인 말 몇 마디 외에는 일생동안 아내에게 단 한 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았고, 사실상 두 사람은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4]
마리아 레슈친스카의 가상 결혼은 1725년 8월 15일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 루이 15세는 그의 사촌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르 피외가 대리했다. 결혼을 위해 마리아의 폴란드 이름은 프랑스어인 "마리"로 변경되었다. 그녀의 성은 프랑스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웠지만, 평민들은 여전히 흔히 사용했다. 그녀는 클레르몽 양, 일곱 명의 시녀, 두 명의 시종, 수많은 시종과 페이지들의 긴 행렬을 이끌고 왔지만, 왕실 결혼을 위해 외국 공주가 도착할 때 통상적으로 행해지는 개선 행진, 외교적 인사, 기타 공식적인 축하는 받지 못했다.[5] 마리는 처음부터 대중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는데, 퐁텐블로에서 결혼식으로 향하던 길에 ''관대함''을 베푼 것이 그 예시이다.
루이와 마리는 1725년 9월 4일 퐁텐블로 성에서 결혼 전날 처음 만났다. 마리는 22세였고 루이는 15세였다. 그들은 만났을 때의 로앙 추기경의 편지와 부르봉 공작의 목격담을 바탕으로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관계는 처음에는 매우 행복하고 목가적이었고, 8년 동안 루이 15세는 아내에게 충실했다. 왕의 절친한 친구인 리슐리외 공작은 회고록에서 루이 15세가 마리 레슈친스카에 대한 "진정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아내가 항상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첩을 들이는 것에 처음에는 반대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안달했으며, 22세의 아내를 둔 것에 기뻐했고, 그녀의 외모에 대한 비판을 용납하지 않았다.[5]
1727년 8월 베르사유에서 마리는 루이즈 엘리자베트와 앙리에트라는 쌍둥이를 낳았다. 루이 15세는 기뻐하며, 자신이 아버지가 될 수 없다고 말해졌지만,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의 제1 재상인 플뢰리 추기경은 불쾌해하며 왕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왕의 여행에 동행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고, 베르사유에 머물러야 한다고 결정했다.[5] 1년 후, 왕의 실망 속에서 또 다른 딸인 마리 루이즈가 태어났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왕세자인 루이가 1729년 9월 4일에 태어나 왕가의 남자 계승을 확립하는 데 실패한 역사를 가진 나라를 안도하게 했다.
마리는 10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중 7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그들은 모두 그녀를 특히 딸들에게 미덕의 본보기로 여겼다. 마리는 차분한 성격으로 그들에게 많은 애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5] 하지만 그녀의 아이들의 편지와 같은 수많은 동시대 기록들은 다정하고 세심한 어머니임을 보여준다. 뤼느 공작과 시녀인 무쉬 원수 부인 또는 변호사 바르비에와 같은 가까운 친구들은 회고록에서 "여왕은 자녀들을 다정하게 사랑했다"고 언급했으며, 그들에게 "포옹과 키스"를 해주고 그들의 교육을 감독했다고 한다. 그녀는 또한 퐁트브로에서 볼 수 없었던 어린 딸들에게 정기적으로 선물을 보내고 편지를 썼다. 일기에 따르면, 마리 레슈친스카는 개인적인 문제로 자녀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아플 때마다 직접 간호했다.
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
---|---|---|---|
루이즈 엘리자베트 | 1727년 8월 14일 | 1759년 12월 6일 (32세) | 파르마 공작 필리포와 결혼. 슬하 1남 2녀. |
앙리에트 | 1727년 8월 14일 | 1752년 2월 10일 (24세) | 프랑스의 루이즈엘리자베트와 쌍둥이 자매. 미혼. |
루이즈 | 1728년 7월 28일 | 1733년 2월 19일 (4세) | 요절. |
루이 페르디낭 | 1729년 9월 4일 | 1765년 12월 20일 (36세) | 왕세자. 후임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의 아버지. |
필리프 | 1730년 8월 30일 | 1733년 4월 7일 (2세) | 앙주 공작. 요절. |
아델라이드 | 1732년 3월 23일 | 1800년 2월 27일 (67세) | 미혼. |
빅투아르 | 1733년 5월 11일 | 1799년 6월 7일 (66세) | 미혼. |
소피 | 1734년 7월 17일 | 1782년 3월 3일 (47세) | 미혼. |
테레즈 | 1736년 5월 16일 | 1744년 9월 28일 (8세) | 요절. |
루이즈 마리 | 1737년 7월 15일 | 1787년 12월 23일 (50세) | 수녀가 됨. |
2. 4. 정치적 역할과 말년
마리는 아버지로부터 부르봉 공작에게 항상 충실하라는 조언을 받았고, 1725년 12월 17일 부르봉 공작, 마담 드 프리, 파리 드 베르네가 플뢰리 추기경을 몰아내려 했을 때 처음으로 정치에 개입하려 했다.[4] 그들의 지시에 따라 여왕은 국왕을 자신의 침실로 불렀고, 부르봉 공작은 국왕에게 교황과의 분쟁에서 프랑스의 실패에 대해 플뢰리를 비난하는 로마 주재 대사의 보고서를 제시했다. 부르봉은 국왕에게 답장을 써야 할지 물었고, 국왕은 플뢰리가 없는 상태에서는 거절했다. 플뢰리 추기경은 자신을 깎아내리려는 음모를 알고 궁을 떠났고, 공작과 드 프리는 플뢰리가 부재한 틈을 타 그를 수도원에 가두려고 계획했으며, 마리에게 부재중인 플뢰리가 수도원에 들어가 궁정에서 물러나고 싶어한다고 루이 15세에게 알리는 임무를 맡겼다.[4] 이로 인해 국왕이 부르봉에게 마담 드 프리와 파리 드 베르네를 내쫓거나 수상직에서 물러나라는 선택지를 제시하면서 위기가 발생했다.[4]1726년 6월, 플뢰리는 국왕을 설득하여 부르봉 공작을 수상직에서 해임했다. 마담 드 프리는 즉시 여왕에게 부르봉을 지지하는 국왕에게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5] 그녀는 반대했지만 동의했고, 그 문제에 대해 국왕에게 열정적으로 이야기했지만, 플뢰리의 사전 조치로 인해 국정에 여성이 참여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국왕이 그녀의 정치 개입 시도에 매우 부정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5] 부르봉 공작 내각이 몰락한 다음 날, 루이 15세는 마리 여왕에게 앞으로 플뢰리 추기경의 지시를 따르도록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부디, 마담, 필요하다면 저는 프레주 대주교가 저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말하는 모든 것을 제가 루이인 것처럼 믿으라고 명령합니다."[5]
1726년 사건 당시 국정에 참여하려 했던 마리의 시도는 루이 15세와의 관계에 위기를 초래했고, 그녀는 카리냐노 공주에게 조언을 구했다.[4] 공주의 조언은 프랑스 여왕으로서 마리의 의무는 정치적 음모나 책략에 연루되는 것이 아니라 미덕과 경건함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고, "가톨릭 군주"의 롤 모델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었다.[4] 마리 여왕은 그 조언을 받아들여 남은 생애 동안 따랐고, 다시는 정치 활동에 관여하지 않았다.[4]
마리는 플뢰리 추기경과 화해했고, 그와 서신을 통해 연락을 유지했으며, 국왕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조언해 달라고 겸손하게 부탁했다.[4] 플뢰리와 마리는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시켰고, 국왕에게의 요청이 해롭지 않다고 판단될 때 그녀를 자주 지원했다. 1726년 이후 그녀의 정치 활동은 루이 15세에게 친구에게 연금이나 승진을 요청하는 것으로 제한되었고, 종종 플뢰리 추기경을 중재자로 활용하여 이를 달성했다.[4]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733–1736) 동안 그녀는 아버지의 폴란드 왕위 옹립을 지지했고,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4] 플뢰리 추기경이 아버지의 옹립을 지지하도록 최선을 다했지만, 그녀는 추기경에게 프랑스가 그녀의 왕조적 지위를 높이고자 했기 때문에 전쟁을 원한 적이 없으며, 그로 인해 그녀가 무고한 희생자라고 표명했다.[4] 전쟁 후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 국왕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로렌 공국을 받았고, 로렌 공작이 된 아버지의 죽음 이후 공국은 프랑스에 편입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마리 여왕은 궁정에서 소위 경건파를 수동적으로 지지했고, 파리 고등법원과의 갈등에서 주교를 지지했으며, 국왕과의 갈등에서 예수회에 동정을 표했다.[4]
마리 레슈친스카 여왕은 처음에는 왕실에서 존경받지 못했는데, 그녀는 천한 신분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왕조적 지위가 부족하고 연줄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고, 개인적 또는 정치적 영향력을 얻지 못했다.
마리 레슈친스카 여왕은 여왕으로서 엄격하게 격식을 갖춘 궁정 예법에 따라 의례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베르사유 궁정 생활이 요구하는 수많은 공식적인 의무를 정기적으로, 그리고 꼼꼼하게 수행했다. 그녀는 자신의 위신을 높이고 궁정 귀족들의 존경을 얻기 위해 의례적인 폼과 궁정 행사를 중시했다. 그녀의 뒤를 이은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러한 규칙 중 많은 부분을 무시했고, 전임자인 마리 레슈친스카 여왕과는 달리 자신의 왕조적 지위는 출생으로 분명하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와 위신을 높일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존경을 잃지 않으면서 예법을 완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4]
마리는 문화와 예술 후원자로서 큰 역할을 했다. 여왕은 화가 샤를-앙투안 코이펠의 후원자였는데,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에 34개의 종교 그림을 의뢰했고, 장-마르크 나티에에게 1748년에 그녀가 마지막으로 앉은 초상화를 그리도록 의뢰했는데, 이는 이례적으로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프랑스 실내 디자인에 폴란드 스타일 침대를 소개하고 대중화시킨 사람이었다. 요리 측면에서 마리는 프랑스에서 렌즈콩을 먹는 것을 유행시켰고, 1735년에는 요리사들과 함께 현재 유명한 프랑스 고기 페이스트리인 "부셰 아 라 렌"을 발명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또한 에노 대통령과 드 뤼네는 마리 여왕이 모국어인 폴란드어 외에도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라틴어, 스웨덴어, 영어를 포함한 7개 국어를 구사하여 외국 대사들을 접대할 때 매우 유용하다고 언급했다. 루이 15세의 아내는 음악을 매우 좋아하여 오르간, 하프시코드, 기타를 연주했으며 열렬한 조각가이자 화가였다. 마리는 또한 자수와 바느질에도 능숙하여 자신의 작품을 가난한 교회에 기증했으며, 알렉시스 시몽 벨, 피에르 고베르, 장 루이 토크, 샤를 반 루, 모리스 캥탱 드 라투르, 아상트 리가우드와 같은 많은 다른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그녀가 베르사유 생활에 기여한 주요 사항은 매주 열리는 폴란드 합창 콘서트였다.
마리 여왕은 단순하고 위엄 있는 가톨릭 여왕으로서의 역할과 명성을 유지했다. 그녀는 가톨릭 신앙의 본보기 역할을 했고, 빈민과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관대함으로 평가받았으며, 여기에는 작업장 설립, 생계 프로그램, 빈민을 위한 재정 지원, 고아원 및 병원 지원 등이 포함되어 그녀를 여왕으로서 평생 동안 대중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를 끌게 했다.[4]
3. 가계도
사진 | 이름 | 출생 | 사망 | 기타 |
---|---|---|---|---|
![]() | 루이즈 엘리자베트 | 1727년 8월 14일 | 1759년 12월 6일 (32세) | 파르마 공작 필리포와 결혼. 슬하 1남 2녀. |
![]() | 앙리에트 | 1727년 8월 14일 | 1752년 2월 10일 (24세) | 루이즈 엘리자베트와 쌍둥이 자매. 미혼. |
![]() | 루이즈 | 1728년 7월 28일 | 1733년 2월 19일 (4세) | 요절. |
![]() | 루이 페르디낭 | 1729년 9월 4일 | 1765년 12월 20일 (36세) | 왕세자.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의 아버지 |
![]() | 필리프 | 1730년 8월 30일 | 1733년 4월 7일 (2세) | 앙주 공작. 요절 |
![]() | 아델라이드 | 1732년 3월 23일 | 1800년 2월 27일 (67세) | 미혼. |
![]() | 빅투아르 | 1733년 5월 11일 | 1799년 6월 7일 (66세) | 미혼. |
![]() | 소피 | 1734년 7월 17일 | 1782년 3월 3일 (47세) | 미혼. |
테레즈 | 1736년 5월 16일 | 1744년 9월 28일 (8세) | 요절. | |
![]() | 루이즈 마리 | 1737년 7월 15일 | 1787년 12월 23일 (50세) | 수녀가 됨. |
참조
[1]
문서
Polski Słownik Biograficzny
[2]
서적
Stanislas, le roi philosophe
Michel Lafon
[3]
서적
Hedvig Eleonora
Wahlström & Widstrand
[4]
서적
Queenship in Europe 1660–1815: The Role of the Consort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서적
Princesses Ladies & Salonnières of the Reign of Louis XV
https://archive.org/[...]
Kegan Paul, Trench, Trubner & Co.
[6]
문서
La duchesse de Châteauroux et ses soeurs
http://www.gutenberg[...]
Paris
[7]
서적
Kvinnor vid maktens sida : 1632–1772
Nordic Academic Press
[8]
서적
Passionate Minds: Emilie du Châtelet, Voltaire, and the Great Love Affair of the Enlightenment
Three Rivers Press
[9]
서적
Voltaire's Tormented Soul. A Psychobiographic Inquiry
Lehigh University Press
[10]
서적
Złota księga szlachty polskiéj: Rocznik IVty
https://books.google[...]
Jarosław Leitgeber
2018-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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