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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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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는 1677년 태어나 1766년 사망한 폴란드의 국왕이자 로렌 공작이다. 그는 1704년 스웨덴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했으나, 1709년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아우구스트 2세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후 딸 마리 레슈친스카가 프랑스 왕 루이 15세와 결혼하면서 프랑스와의 관계를 맺었고,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다시 왕위에 올랐지만, 1736년 아우구스트 3세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1737년 로렌 공작이 된 그는 뤼네빌에서 예술과 문화를 장려하며 계몽주의 사상을 전파했다. 낭시의 스타니슬라스 광장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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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의 초상화 (장 지라르데 그림)
칭호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첫 번째 통치1704년 7월 12일 – 1709년 7월 8일
대관식1705년 10월 4일 (폴란드)
이전 통치자아우구스트 2세
다음 통치자아우구스트 2세
두 번째 통치1733년 9월 12일 – 1736년 1월 26일
이전 통치자아우구스트 2세
다음 통치자아우구스트 3세
작위로렌과 바르 공작
재위1737년 7월 9일 – 1766년 2월 23일
이전 통치자프란츠 3세 스테판
다음 통치자프랑스에 귀속
출생일1677년 10월 20일
출생지르비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사망일1766년 2월 23일
사망지뤼네빌, 로렌 공국, 신성 로마 제국
매장지바벨 대성당, 크라쿠프
배우자카타지나 오팔린스카
자녀안나 레슈친스카
마리, 프랑스 왕비
본명스타니스와프 보구스와프 레슈친스키
왕가레슈친스키
아버지라파우 레슈친스키
어머니안나 야부워노프스카
종교로마 가톨릭교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의 서명

2. 생애

1697년 아우구스트 2세의 즉위 승인 문서에 서명했다.[6] 1703년 스웨덴의 지원을 받던 사피에하 가문이 조직한 리투아니아 동맹에 가입했다.[6]

1704년 대북방 전쟁에서 스웨덴 칼 12세의 지원으로 폴란드 왕이 되었으나,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이 패하면서 표트르 1세의 지원으로 복위한 아우구스트 2세에게 쫓겨났다.[6][7] 이후 츠바이브뤼켄 공국을 받았다.[6]

1725년 딸 마리 레슈친스카가 프랑스 루이 15세와 결혼했다.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 지원으로 복위했지만, 1736년 아우구스트 3세에게 다시 쫓겨났다.[6]

1737년 로렌 공작이 되었고, 1738년 리지나와 레슈노 영지를 매각 후 프랑스 뤼네빌로 이주했다.[2] 1750년 뤼네빌에 Académie de Stanislas|스타니슬라 아카데미프랑스어낭시에 Bibliothèque municipale de Nancy|낭시 시립 도서관프랑스어을 설립했고,[2] 만년에는 장자크 루소와 논쟁을 벌였다.[2]

2. 1. 초기 생애

1677년 르부프(현재의 우크라이나 르비우)에서 포즈난 주의 주지사를 역임했던 라파우 레슈친스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1697년 주선관 신분으로 아우구스트 2세의 국왕 즉위 승인 문서에 서명했다.[6] 1703년 스웨덴의 지원을 받던 사피에하 가문이 조직한 리투아니아 동맹에 가입했다.[6]

2. 2. 첫 번째 왕위 (1704년 ~ 1709년)

1704년 대북방 전쟁 중 폴란드를 침공한 스웨덴의 칼 12세의 지원을 받아 아우구스트 2세를 몰아내고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했다.[6] 그해 7월 2일, 스웨덴은 뇌물과 군사력을 동원하여 6명의 성직자와 수십 명의 슈라흐타를 모은 집회에서 스타니스와프를 국왕으로 선출했다.[6] 몇 달 후 아우구스트 2세의 기습으로 스타니스와프는 스웨덴군 진영으로 피신했지만, 1705년 9월 24일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했다.[6] 전통적인 폴란드의 왕권 상징물은 작센에 있는 아우구스트 2세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칼 12세는 자신이 선택한 꼭두각시 국왕을 위해 새로운 왕관과 홀을 준비했다.[6]

국왕이 된 스타니스와프 1세는 칼 12세와 동맹을 맺고, 러시아 차르국과 싸우는 스웨덴을 지원했다.[6] 그는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헤트만 이반 마제파가 전황의 가장 중요한 국면에서 차르 표트르 1세를 배신하도록 유도했으며, 소규모 부대를 스웨덴군 지휘하에 두었다.[6]

그러나 스타니스와프 1세의 지위는 전적으로 칼 12세가 이끄는 스웨덴군의 군사적 성공에 의존했으며,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칼 12세가 패배하면서 스타니스와프의 국왕으로서의 권위도 사라졌다.[6] 표트르 1세의 지원으로 아우구스트 2세가 복위했다.[7]

이후 스타니스와프는 크라소 군단을 따라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로 퇴각했다. 스타니스와프 1세는 국왕 칭호를 유지한 채 폴란드 왕위에서 물러났고, 그 대가로 팔츠-츠바이브뤼켄을 받았다.[6]

2. 3. 프랑스 왕실과의 인연

1725년 그의 딸 마리 레슈친스카가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2. 4. 두 번째 왕위 (1733년 ~ 1736년)

1733년 아우구스트 2세가 사망하자, 스타니스와프의 사위인 루이 15세는 장인이 폴란드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지지하며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6] 스타니스와프는 마부로 변장하여 중앙유럽을 지나 1733년 9월 9일 바르샤바에 도착했다.[6] 다음 날, 폴란드 의회는 많은 사람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스타니스와프를 다시 국왕으로 선출했다.[6]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과거 칼 12세의 야심에 협력했던 스타니스와프를 인정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즉시 항의하며,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전 국왕 아우구스트 2세의 아들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아우구스트 3세)를 지지했다.[6]

1734년 6월 30일, 피터 레이시 장군이 이끄는 2만 명의 러시아 군대는 아우구스투스 3세를 바르샤바의 왕으로 선포한 후,[6] 스타니스와프와 그의 지지자들(수석 주교, 프랑스와 스웨덴 공사 포함)이 프랑스 군의 보호를 기다리며 있던 단치히를 포위했다.[6] 단치히 포위전은 1734년 10월에 시작되어, 1735년 3월 17일에는 부르카르트 크리스토프 폰 뮌니히 원수가 레이시 장군을 대신했다.[6] 1735년 5월 20일, 프랑스 함대가 나타나 2,400명의 병사를 베스터플라테에 상륙시켰다. 이 소규모 프랑스 군은 일주일 후 러시아 군에 맞섰지만, 결국 항복했다.[6] 이것은 프랑스 군과 러시아 군이 처음으로 교전한 전투였다.[6] 1735년 6월 30일, 그단스크는 135일간의 포위 끝에 무조건 항복했고, 러시아 군은 8,000명의 손실을 보았다.[6]

한편, 스타니스와프는 소작농으로 변장하여 이틀 전에 탈출, 쾨니히스베르크에 나타났다. 그는 지지자들에 의한 정치 연맹을 조직하고, 파리로 폴란드 공사를 급파하여 최소 4만 명의 프랑스 군을 파견해 작센을 침략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6] 우크라이나에서도 미코와이 바질리 포토츠키 백작이 스타니스와프를 지지하는 5만 명의 군대를 준비했으나, 러시아 군에 의해 격파되었다.[6]

1736년, 스타니스와프는 다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위를 물러났다.[6]

2. 5. 로렌 공작 (1737년 ~ 1766년)

1737년 로렌 공작이 되었으며, 1738년 알렉산데르 유제프 수우코프스키(Aleksander Józef Sułkowski) 백작에게 리지나(Rydzyna)와 레슈노(Leszno)의 영지를 매각하고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 뤼네빌로 이주했다.[2] 뤼네빌에 정착하여 뤼네빌 성에서 궁정을 열었는데, 이곳은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2]

1750년에는 뤼네빌에 Académie de Stanislas|스타니슬라 아카데미프랑스어를, 낭시에 Bibliothèque municipale de Nancy|낭시 시립 도서관프랑스어을 설립했다.[2] 그는 남은 생애 동안 과학과 자선 활동에 전념했으며, 장 자크 루소와의 논쟁에 참여했다.[2] 또한 폴란드 계몽주의의 가장 중요한 정치 논문 중 하나인 ''Głos wolny wolność ubezpieczający''를 출판했다.[2]

만년에는 그의 가까운 친구였던 헝가리 출신의 프랑스 원수 라디슬라스 이그나스 드 베르체니가 그의 영지에서 함께 지내며 그를 보살폈다.

1766년 2월 23일 88세의 나이로 뤼네빌에서 화재로 인한 화상으로 사망했다. 2월 5일 뤼네빌에 있는 궁전의 벽난로 근처에서 잠을 자다가 옷에 불이 붙어 화상을 입었다. 며칠 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상처로 사망했다. 그는 폴란드 국왕 중 가장 장수한 인물이었다.[4]

3. 가족 관계

배우자카타르지나 오팔린스카
장녀안나 레슈친스카 (1699년 ~ 1717년)
차녀마리아 레슈친스카 (1703년 ~ 1768년) - 루이 15세와 결혼


참조

[1] 웹사이트 Stanisław I - king of Poland https://www.britanni[...] 2019-04-11
[2] 논문 The Polish Question as a Political Issue within Philosophical Dispute: Leszczyński versus Rousseau https://www.academia[...] 2014-01-01
[3] 서적 Dictionnaire critique et documentaire des peintres, sculpteurs, dessinateurs et graveurs de tous les temps et de tous les pays. Tome 2 https://gallica.bnf.[...]
[4] 웹사이트 Stanisław Leszczyński - Szkolnictwo.pl https://www.szkolnic[...] 2019-04-11
[5] 서적 Złota księga szlachty polskiéj: Rocznik IVty https://books.google[...] Jarosław Leitgeber 2018-08-01
[6] 웹사이트 Stanislaus I.
[7] 문서 출처 정보 부족
[8] 문서 출처 정보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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