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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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속은 촉한의 장수로, 유비, 제갈량 등을 섬겼다. 형주 종사로 유비를 따라 익주로 들어가 군사 고문으로 활약했으며, 제갈량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북벌에 참여했으나 가정 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유비는 마속을 과대평가했으나, 제갈량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마속의 죽음은 읍참마속이라는 고사로 전해지며, 제갈량은 그의 죽음을 애석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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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년 출생 - 왕기 (백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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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거는 위나라의 관료이자 문장가로, 조비와 조예 시대에 산기상시를 지냈으며 조상의 전횡을 풍자하는 시를 통해 이름을 알렸고, 사후 위위로 추증된 인물이다. - 촉한의 무관 - 장남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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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속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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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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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속 |
로마자 표기 | Ma Su |
자(字) | 유상(幼常) |
출생 | 190년 |
출생지 | 형주양양군의성 |
사망 | 228년 (38세) |
사망지 | 한중 |
사인 | 사형 |
국적 | 후한 → 촉나라 |
친척 | 마량(형), 마빙(조카), 세 명의 형제 |
관직 | |
주요 경력 | 종사 → 면죽현령, 성도현령, 월수태수 → 참군 |
참군 임용 시작 | 223년 |
참군 임용 종료 | 228년 |
참군 상관 | 제갈량 |
참군 군주 | 유선 |
월수태수 임용 군주 | 헌제/유비(219년부터) |
성도현령 임용 군주 | 헌제 |
면죽현령 임용 군주 | 헌제 |
면죽현령 전임 | 비시 |
종사 임용 군주 | 헌제 |
기타 정보 | |
직업 | 정치가, 장군 |
주요 전투 | 가정 전투 |
적수 | 장합 |
2. 생애
후베이성 샹양시 의성현 출신으로,[3] 자는 유상(幼常)이다. 형제 다섯 명 모두 재능으로 명성이 높아 '마씨오상(馬氏五常)'이라 불렸으며, 그중 막내였다. 맏형은 마량이다.[3] 키는 8척(약 1.84m)이었고, 총명하며 군사 전략에 대한 지식이 깊었다고 전해진다.[4]
209년경 형 마량과 함께 유비를 섬기기 시작하여,[27] 유비의 익주 정벌에 참여했고, 이후 면죽현령, 성도현령, 월수태수 등을 역임했다.[27][5] 그는 뛰어난 재능으로 제갈량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나,[7][28] 유비는 임종 시 제갈량에게 마속을 중용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8][28]
유비 사후 제갈량의 참군(參軍)이 되어 밤낮으로 군사 문제를 논의했으며,[9][29] 제갈량의 남정 때는 남방 민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심공(心攻)' 전략을 조언하여 남방 안정에 기여했다.[30]
228년 제1차 북벌 때, 제갈량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속을 선봉으로 발탁하여 가정 수비를 맡겼다.[31] 그러나 마속은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산 위에 진을 쳤다가 장합에게 수원(水源)을 끊기고 대패하였다.[31] 이 패배로 북벌은 실패로 돌아갔고, 제갈량은 군율을 세우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처형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고사성어로 유명하다.[33] 당시 마속의 나이는 39세였다.[32] 다만 《삼국지》 마량전에는 옥중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33] 처형설과 옥사설이 함께 전해진다. 마속의 처형을 두고 후대 역사가 습착치 등은 제갈량의 인재 등용 실패와 가혹한 처사였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제갈량의 신임
마속(馬謖)은 현재의 후베이성 이청인 샹양시 의성현 출신이다.[3] 형제 다섯 명 중 막내였으며, 형제 모두 재능과 명성이 뛰어나 자(字)에 공통적으로 '상(常)' 자가 들어가 '마씨오상(馬氏五常)'으로 불렸다. 특히 맏형인 마량이 가장 뛰어난 인물로 알려졌다.[3] 마속은 키가 8척 (약 1.84m)에 달했으며, 사교성이 좋고 총명하며 전문 지식이 깊었다고 전해진다.[4]209년경 형 마량과 함께 유비 휘하에 들어가 형주 종사(從事)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27] 당시 유비는 유기의 뒤를 이어 형주 자사(刺史)였다. 211년 유비를 따라 익주로 들어갔으며,[3] 유비와 유장 (군벌) 분쟁 시에는 방통, 법정 등과 함께 군사 고문으로 활동했다.[6] 익주 평정 후에는 면죽현령(緜竹―), 성도현령을 거쳐 월수태수(越巂太守)로 임명되었다.[27][5] 월수군은 토착 부족들이 많아 통치가 어려운 지역이었는데, 218년 소족(叟族) 수장 고정(高定)의 반란을 이엄의 도움으로 진압하기도 했다.[5][6]
마속은 재능과 기량이 뛰어나고 군사 전략 논의를 즐겨 제갈량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7] 제갈량은 마속을 매우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다.[7] 그러나 유비는 223년 임종 직전, 제갈량에게 "마속은 말만 앞설 뿐 실제 능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니 중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8][28] 그럼에도 제갈량은 유비 사후 마속을 참군(參軍)으로 삼아 밤낮으로 군사 전략을 함께 논의할 정도로 신뢰했다.[9][29]
225년(건흥 3년), 제갈량이 남중 정벌에 나설 때, 마속은 수십 리를 배웅하며 "남중의 만족들은 험준한 지형을 믿고 오랫동안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무력으로 잠시 굴복시킨다 해도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心攻)이 중요합니다."라고 조언했다.[30] 제갈량은 이 조언을 받아들여 맹획을 칠종칠금 고사처럼 여러 차례 사로잡고 풀어주며 마음을 얻는 데 주력했고, 그 결과 제갈량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방 지역은 안정될 수 있었다.[30]
2. 2. 제갈량의 남정 조언
유비 사후, 제갈량은 유비가 "마속은 머리는 좋지만 실행력이 없으니 군대의 지휘는 맡겨서는 안 된다"라고 유언하며 중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28], 마속의 비범한 재능과 군략을 논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참군(參軍)으로 삼아 밤낮으로 전략을 논의했다.[29]225년(건흥 3년), 제갈량이 옹개, 맹획 등이 일으킨 남중의 반란을 정벌하려 할 때[30], 마속은 수십 리를 배웅하며 제갈량에게 조언했다.[10] 제갈량이 "오랫동안 함께 작전을 세웠는데, 이제 당신의 현명하고 숙련된 계획을 빌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자[10], 마속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남중은 수도와 거리가 멀고 지세가 험하여 오랫동안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무력으로 그들을 꺾는다 해도, 우리가 떠나면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지금 주군께서는 온 국력을 기울여 북벌을 준비하고 계시는데, 만약 남쪽 사람들이 정부의 힘이 약해졌다고 느끼면 즉시 다시 반란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종족을 멸족시키는 것은 인자한 방식이 아닐뿐더러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제가 배운 용병술에 따르면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최상이요, 성을 공격하는 것은 최악이다. 심리전이 최고이며, 무력전이 최악이다'라고 했습니다. 부디 그들의 마음을 얻는 데 집중하십시오."[11][30]
제갈량은 마속의 조언을 전적으로 받아들여[30], 남정 기간 동안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고 일곱 번 놓아주는 이른바 '칠종칠금' 전략을 통해 남쪽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했다.[12] 그 결과, 제갈량이 살아있는 동안 남방은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안정되었으며[12], 이는 남정의 성공과 촉한의 후방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30]
2. 3. 가정 전투와 읍참마속
227년 제갈량이 제1차 북벌을 시작했다. 228년 제갈량은 조운과 등지가 위나라 군 주력을 기곡(箕谷)으로 유인하는 동안, 본대는 기산(祁山) 방면으로 나아가 옹주 서부를 점령하려 하였다.[37] 당시 많은 장수들은 경험 많은 위연이나 오의가 선봉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제갈량은 주변의 반대[35]에도 불구하고 마속에게 중책인 선봉 부대의 지휘를 맡겼다.[13]마속의 군대는 가정(街亭, 현재의 간쑤성 친안 현)에서 장합이 이끄는 위나라 군대와 마주쳤다. 마속은 제갈량의 지시와 다르게[37] 물 공급원을 확보하는 대신 산 위에 진을 쳤다.[14][15] 그는 고지대가 전략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으나, 이는 병력 이동과 보급에 어려움을 초래하는 결정이었다. 부장 왕평은 물길이 끊기고 포위될 위험을 경고하며 산 아래에 진을 칠 것을 여러 차례 간언했지만, 마속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38] 다만 왕평에게 1,000명의 병력을 주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14][15]
왕평의 우려대로 위나라 장수 장합은 마속 군대의 물 보급로를 차단하고 산 위를 포위 공격했다.[39] 물 부족으로 고통받던 촉군은 전투 의지를 상실하고 쉽게 무너졌으며, 마속은 대패하여 달아났다.[40] 오직 왕평만이 1,000명의 병사로 북을 치며 질서정연하게 방어 태세를 유지하자, 장합은 매복을 의심하여 섣불리 추격하지 않았다. 왕평은 이 기회를 이용해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며 안전하게 퇴각했다.[37][16][17]
가정에서의 참패는 제1차 북벌 전체의 실패로 이어졌고, 제갈량은 점령했던 지역들을 포기하고 한중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16][17] 마속은 전투에서 살아남았으나 패전의 가장 큰 책임을 물어 체포되었다.[19] 이막 등이 마속의 재능을 아까워하며 구명을 청했지만,[41] 제갈량은 군율의 엄정함을 보이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처형을 명했다. 이때 마속의 나이는 39세였다.[32] 정사 《삼국지》 기록에는 차이가 있어, 마속전에는 '옥에 갇혀 죽었다(獄中物故)'[33][36]고 되어 있고, 제갈량전과 왕평전에는 처형(戮, 誅殺)되었다고[31] 기록되어 있다. 향랑전에는 마속이 도망쳤다는 기록[18]도 있어 옥사설과 처형설이 나뉜다. 일반적으로는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처형을 명했다는 일화와 함께 처형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마속은 처형 직전 제갈량에게 유서를 남겼다. "명공(제갈량)께서는 저를 아들처럼 여기셨고, 저 또한 명공을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옛날 순 임금이 곤을 처형했지만 그의 아들 우를 등용했던 것처럼, 부디 저의 자식들을 돌봐주시어 우리의 평생 관계가 이것으로 훼손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죽더라도 황천에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20] 제갈량은 마속의 처형을 집행하며 많은 병사들 앞에서 함께 눈물을 흘렸고, 이후 마속의 제사를 직접 지내고 남은 가족들을 책임지고 돌보았다.[21][25][26] 이 사건에서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벤다'는 의미의 '''읍참마속'''(泣斬馬謖) 또는 제갈량휘루참마속(諸葛亮揮淚斬馬謖)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33]
마속의 처형을 두고 후대의 평가는 엇갈렸다. 마속의 절친한 친구였던 향랑은 마속이 도망쳤을 때 이를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아 연좌되어 관직을 박탈당했다.[18] 훗날 강완이 제갈량에게 "지략 있는 선비를 죽인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제갈량은 "손자가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법을 엄정하게 적용했기 때문이다. 지금 천하가 아직 통일되지 않았고 전쟁이 막 시작된 상황에서 법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어떻게 적을 토벌할 수 있겠는가?"라고 답하며 눈물을 흘렸다.[22] 반면, 역사가 습착치는 유비가 생전에 마속을 중용하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제갈량이 그를 선봉으로 삼았다가 실패하자 처형한 것은 인재가 부족했던 촉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가혹한 처사이며, 제갈량의 인재 등용과 판단 착오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비판했다.[23]
마속과 함께 부장 이성과 장휴도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고, 황습 등 다른 장수들도 병사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반면, 왕평은 위기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응하여 피해를 최소화하고 군기를 유지하려 노력한 공을 인정받아 토구장군(討寇將軍)으로 승진했다.[24] 제갈량 자신도 가정 전투 패배의 총체적 책임을 지고 황제 유선에게 스스로 강등을 요청하여 우장군으로 직위가 낮아졌다.[24]
3. 평가
유비는 마속이 실제 능력에 비해 말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고 평가했지만, 고향에서는 형 마량에 버금가는 인재로 인정받았으며 제갈량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장완 역시 마속을 지모 있는 선비라 칭하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22]
가정 전투에서의 패배 후, 마속은 군율에 따라 처형될 위기에 처했다. 마속의 오랜 친구였던 향랑은 마속이 도주했을 때 그를 고발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18] 마속은 결국 체포되어 처형 선고를 받았고,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망설였지만 군법의 엄정함을 위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19] 제갈량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마속을 처형하고 백성들에게 사죄했다.
마속은 처형 직전 제갈량에게 편지를 남겼다. "현명하신 주군께서는 저를 아들처럼 여기셨고, 저 또한 주군을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부디 곤을 처형하고 그의 아들 우가 위업을 이룬 것처럼, 저의 죽음이 대의에 부합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오랜 인연이 이 일로 손상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죽더라도 황토를 원망하지 않겠습니다."[20] 마속의 죽음에 많은 병사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21]
훗날 강완은 한중에서 제갈량에게 마속의 처형에 대해 물었다. "과거 초나라가 성득신을 죽였을 때 진 문공이 크게 기뻐했습니다. 천하가 아직 통일되지 않은 지금, 지략 있는 선비를 죽였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답했다. "손자가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법을 공정하고 엄격하게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양간(楊干)이 법을 어지럽혔기에 위강(魏絳)은 자신의 마부마저 죽였습니다. 지금 천하는 분열되어 있고 전쟁이 막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법을 저버린다면 어떻게 적들을 제압할 수 있겠습니까?"[22] 이는 법 집행의 불가피성을 강조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습착치는 제갈량의 결정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촉나라는 외진 곳에 위치하여 인재가 부족한데, 귀중한 인재를 법을 명분으로 처형했으니 어찌 대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 유비는 생전에 마속에게 중책을 맡기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제갈량은 이를 어기고 마속을 중용했다. 이는 유비의 충고를 무시한 것이거나, 유능한 인재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죽인 것이다. 마속의 재능과 그릇을 헤아려 적절한 임무를 맡겼어야 했다. 이런 점을 볼 때 제갈량을 지혜롭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라고 주장하며, 제갈량의 인재 등용 방식과 판단력에 의문을 제기했다.[23]
마속의 처형과 함께 이성(李盛), 장휴(張休)도 처형되었고, 황습(黃襲) 등은 병사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반면, 왕평은 피해를 최소화하고 마속의 잘못된 판단을 막으려 노력한 공을 인정받아 토구장군(討寇將軍)으로 승진했다. 제갈량 자신도 패배의 책임을 지고 황제 유선에게 스스로 강등을 요청하여 받아들여졌다.[24]
결과적으로 마속은 제갈량과 황제 유선에 의해 제1차 북벌 실패의 주요 책임자로 지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마속 사후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잘 보살폈으며, 직접 마속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25][26]
4. 삼국지연의에서의 마속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사서와 달리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하는 제갈량의 남정 시기에 처음 등장한다. 마속은 상복을 입고 유선의 사자로 제갈량에게 와서 형 마량의 죽음을 알리고, 그대로 제갈량의 군대에 합류하여 남정에서 공을 세운다.
이후 제갈량이 제1차 북벌을 시작하기 전에 거짓 소문을 퍼뜨려 위나라의 사마의를 실각시키는 공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위나라 군대가 연이어 패배하자 사마의는 다시 복직하게 된다. 사마의가 가정으로 진군해 오자, 마속은 자신이 이를 막겠다며 자원한다. 이때 마속은 만약 임무에 실패하면 자신의 가문 전체가 참수당해도 좋다는 각서까지 쓴다. 부장 왕평이 산 위에 진을 치는 것은 위험하다고 반대했지만, 마속은 ‘보급로가 끊기면 오히려 아군이 죽기 살기로 싸울 것’이라며 고집을 부려 산 위에 진을 쳤다. 결국 이 결정은 큰 패배로 이어졌고, 마속은 이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제갈량의 명령에 따라 참수당한다.
5. 가계
- 넷째 형: 마량
6. 관련 작품
참조
[1]
문서
Ma Su's biography in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2]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Brill
[3]
문서
Sanguozhi vol. 39
[4]
문서
Xiangyang Ji vol. 0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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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Sanguozhi vol. 4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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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angy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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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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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志ハンドブック
陳舜臣監修
[29]
위키소스
三國志/卷39#馬良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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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39#馬良
[31]
위키소스
三國志/卷43#王平
[32]
위키소스
三國志/卷39#馬良
[33]
위키소스
三國志/卷39#馬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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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演義/第091回
[3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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