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나오노리 (16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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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나오노리(1642년)는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로, 1642년 에치젠 오노번의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모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5세에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았으나, 히메지번으로의 부임을 앞두고 에치고 무라카미번으로 이봉되었다. 이후 히메지번으로 복귀했으나, 오이에 소동에 연루되어 영지가 삭감되고 분고 히타번, 데와 야마가타번, 무쓰 시라카와번으로 잦은 이봉을 거치며 '이사 다이묘'라는 별명을 얻었다. 1695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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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나오노리 (164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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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결성 마쓰다이라 가문 |
이름 | 마쓰다이라 나오노리 |
이명 | 후지마쓰마루 (유명), 나오노리 (초명), 나오모토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중기 |
생일 | 간에이 19년 10월 28일 (1642년12월 19일) |
사망일 | 겐로쿠 8년 4월 25일 (1695년5월 27일) |
계명 | 천우원전철선도가대거사 |
묘소 | 후쿠시마현시라카와시 엔묘지의 시라카와 번 다이묘 가문 묘소 |
관위 | 종사위하시종, 야마토노카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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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정보 |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미쓰→이에쓰나→쓰나요시 |
가문 | 결성 마쓰다이라 가문 |
부모 | 아버지: 마쓰다이라 나오모토, 어머니: 호리 씨 |
배우자 | 정실: 마쓰다이라 나오마사의 장녀・고마히메 계실: 히가시조노 모토카타의 딸・정 측실: 무라카미 씨 |
자녀 | 모토치카, 노부토미, 도모키요, 혼다 다다사다, 이쿠라 |
번주 경력 | |
번 | 하리마히메지번 번주→에치고무라카미번 번주→하리마히메지번 번주 (재임)→분고히타 번 번주→데와야마가타번 번주→무쓰시라카와번 번주 |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나오모토 파 당주 대수 | 2 |
히메지번 번주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재봉) 대수 | 2 |
무라카미번 번주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 해당 정보 없음 |
히메지번 번주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 해당 정보 없음 |
히타 번 번주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 해당 정보 없음 |
야마가타번 번주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 해당 정보 없음 |
시라카와번 번주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대수 | 1 |
기타 | |
특기 사항 | 해당 정보 없음 |
2. 생애
1642년(간에이 19년), 에치젠 오노번주 마쓰다이라 나오모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나오모토는 데와 야마가타번을 거쳐 하리마 히메지번으로 영지를 옮기라는 명을 받았지만, 히메지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1648년(게이안 원년) 8월 17일 나오노리는 불과 5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받았다.[1] 그러나 히메지는 에도 막부에게 있어서 서쪽 지방을 억누르는 요지였기 때문에, 어린 나오노리에게는 부적절하다고 판단되어, 다음 해인 1649년(게이안 2년) 6월 9일에 에치고 무라카미번으로 영지가 변경되었다.[1]
무라카미번에서 나오노리는 무라카미성에 삼중 망루를 신설하고 조카마치를 정비하는 등 번의 기틀을 다졌다. 1662년부터는 사무라이 저택을 확장하고 성곽을 개수하는 공사도 실시했다.[1] 1654년과 1655년에는 검지를 실시하여 무라카미번의 공칭 15만 석을 21만 석으로 늘렸다. 그러나 이는 과도한 세금 징수로 이어져, 농민들이 이웃 쇼나이번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잇따랐다. 이 때문에 개수 공사는 빈민 구제책의 일환이기도 했다.[1] 1663년 무라카미성에 천수가 완성되었고, 성이 있는 가규산 기슭에 저택 이하쿠마루도 지어 조원에 몰두하면서 계실 딩과 함께 이하쿠마루에 살았다.[1]
나오노리는 성장하면서 다카다번주 마쓰다이라 미쓰나가, 4대 세이이타이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숙부 오오세이산요 호시나 마사유키, 로주 (후에 다이로) 사카이 다다키요 등 유력 인사들과 교류하며 가문의 안정을 도모했다.[1]
1667년(간분 7년) 8월 19일, 사카키바라 마사미치와의 교대로 히메지번으로 복귀했다.[1] 히메지번에서는 엔교지에 아버지의 묘를 세우고, 사찰 건립 및 기증에 힘썼다.[1]
1679년(엔포 7년), 다카다번에서 오이에 소동(에치고 소동)이 일어나자, 나오노리는 사촌 형인 이즈모 히로세번주 마쓰다이라 지나이에와 함께 소동 조정을 의뢰받았다. 이들은 일족을 대표하여 소동을 조정하고, 다이로 사카이 다다키요 등과도 상담했지만, 결국 조정은 실패했다.[1] 1681년(덴와 원년) 6월,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재정으로 다카다번이 개역되자, 나오노리는 지나이에와 함께 막부로부터 실책을 지적받고 영지를 7만 석으로 삭감당했으며, 폐문 처분을 받았다. 1682년(덴와 2년) 2월 10일 폐문은 해제되었지만, 분고 히타번으로 영지가 변경되었다.[1]
이후로도 나오노리는 1686년(조쿄 3년) 7월 13일 데와 야마가타번으로, 1692년(겐로쿠 5년) 7월 27일 무쓰 시라카와번으로 옮겨지는 등 잦은 이봉을 겪었다. 비록 시라카와번에서 15만 석으로 복귀했지만, 잦은 이봉으로 인해 가문은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고, 나오노리는 '''이사 다이묘'''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1] 시라카와번에서는 가신들의 봉록을 삭감하고, 영민들에게 과도한 연공을 징수하는 등 재정난에 허덕였다.[1]
1695년(겐로쿠 8년) 나오노리는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2. 1. 어린 시절과 가독 상속
1642년(간에이 19년), 에치젠 오노번주 마쓰다이라 나오모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아버지 나오모토는 데와 야마가타번을 거쳐 하리마 히메지번으로 영지를 옮기라는 명을 받았지만, 히메지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1648년(게이안 원년) 8월 17일에 불과 5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했다.[1]
그러나 히메지는 에도 막부에게 있어서 서쪽 지방을 억누르는 요지였기 때문에, 어린 나오노리에게는 부적절하다고 판단되어, 다음 해인 1649년(게이안 2년) 6월 9일에 에치고 무라카미번으로 영지가 변경되었다.[1]
2. 2. 무라카미번 시대
1648년 아버지 나오모토가 히메지번으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여 불과 5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했다.[1] 그러나 히메지는 서쪽 지방을 억누르는 요지였기 때문에, 어린 나오노리에게는 부적절하다고 판단되어 1649년 무라카미번으로 옮겨졌다.[1]나오노리는 무라카미번에서 무라카미성에 삼중 망루를 신설하고 조카마치를 정비했다. 1662년부터 사무라이 저택 확장 및 성곽 개수 공사를 실시했다.[1] 1654년과 1655년에는 검지를 실시하여 무라카미번의 공칭 15만 석을 21만 석으로 늘렸다. 그 결과 과도한 세금에 시달리는 농민들이 이웃 쇼나이번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잇따랐기 때문에, 개수 공사는 빈민 구제라고도 한다. 1663년 무라카미성에 천수가 완성되었고, 성이 있는 가규산 기슭에 저택 이하쿠마루도 지어 조원에 몰두하면서 계실 딩과 함께 이하쿠마루에 살았다.[1]
나오노리는 성장하면서 일족이나 막부 요인들과 교제를 가지며 가문의 안정을 위한 정보 수집을 꾀했다. 사촌 형인 다카다번주 마쓰다이라 미쓰나가, 4대 세이이타이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숙부 오오세이산요 호시나 마사유키, 로주 (후에 다이로) 사카이 다다키요의 저택에 문안을 가거나 선물을 헌상하기도 했다.[1]
1667년 성인이 된 후, 사카키바라 마사미치와의 교대로 히메지로 복귀했다.[1]
2. 3. 히메지번 복귀와 오이에 소동
松平 直矩|마쓰다이라 나오노리일본어는 1667년(간분 7년) 8월 19일, 사카키바라 마사미치와 교체되어 히메지번으로 복귀했다.[1] 히메지번에서는 엔교지에 아버지의 묘를 세우고, 사찰 건립 및 기증에 힘썼다.[1]1679년(엔포 7년), 다카다번의 오이에 소동(에치고 소동)이 일어나자, 사촌 형인 이즈모 히로세번주 마쓰다이라 지나이에와 함께 소동 조정을 의뢰받았다. 나오노리는 지나이에와 함께 일족을 대표하여 소동을 조정하고, 친분이 있던 다이로 사카이 다다키요와 오메쓰케 와타나베 쓰나사다 등과 상담하며 조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공의에 의한 평정에서 일단 소동 당사자들을 다이묘에게 맡기는 결정이 내려졌다.[1]
1681년(덴와 원년) 6월,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다시 재정을 내려 다카다번이 개역되자, 6월 27일에 나오노리는 지나이에와 함께 막부로부터 실책을 지적받았다. 영지를 절반 이하인 7만 석으로 삭감당하고 폐문 처분을 받았으며, 1682년(덴와 2년) 2월 10일에는 폐문은 풀렸지만 분고 히타번으로 영지를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다.[1]
2. 4. 잦은 이봉과 사망
1648년 8월 17일, 불과 5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했다.[1] 그러나 히메지는 에도 막부에게 있어서 서쪽 지방을 억누르는 요지였기 때문에, 어린 나오노리에게는 부적절하다고 판단되어 다음 해인 1649년 6월 9일에 에치고무라카미번으로 이봉되었다.[1]성장하면서 일족이나 막부 요인들과 교제하며 가문의 안정을 위한 정보 수집을 꾀했다.[1] 1667년 8월 19일, 사카키바라 마사미치와의 교대로 히메지로 복귀했다.[1]
1679년 오이에 소동(에치고 소동)이 일어나자, 마쓰다이라 미쓰나가로부터 마쓰다이라 지나이에와 함께 소동 조정을 의뢰받았다.[1] 지나이에와 함께 일족을 대표하여 소동을 조정하고, 친밀했던 다이로 사카이 다다키요 등과 상담하며 조정을 시도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1] 결국 1681년 6월,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재정으로 다카다번이 개역되자, 6월 27일에 지나이에와 함께 불찰을 막부에 지적받아 영지가 절반 이하인 7만 석으로 삭감되고 폐문 처분을 받았다.[1] 다음 해인 1682년 2월 10일, 폐문은 풀렸지만 분고히타번으로 이봉되었다.[1]
1686년 7월 13일, 3만 석 가증으로 데와 야마가타번으로 옮겨졌다.[1] 1692년 7월 27일에는 5만 석 가증으로 무쓰시라카와번으로 옮겨져, 격식상으로는 종전의 15만 석으로 복귀했지만, 생애에 걸쳐 여러 차례 이봉을 거듭한 결과 가문에 막대한 빚을 지게 되어 '''이사 다이묘'''라는 별명이 붙여졌다.[1]
1695년 사망, 향년 54세.[1]
3. 인물 및 일화
『토개구수기』에는 "미소년을 사랑하는 것은 이 몸의 일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성인에게도 한 번의 실수는 있는 법인데, 하물며 범인(성인 따위가 아닌 일반인)이랴. 게다가 편애하는 마음이 없으니 해가 될 리 없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미소년을 좋아하지만, 이런 일은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성인조차 한 번의 실수는 있다'는 것이며, 하물며 범인(성인 따위가 아닌 일반인)이랴. 게다가 극단적으로 그 길을 폭주하는 것도 아니니 (번정상) 별 문제 될 것은 아니다"라고 하며, "당시 칭찬받는 장수라고 세상에서 이야기했다"라고도 한다.[1]
노, 무용, 가부키, 조루리에 조예가 깊은 문화인이기도 했으며, 와카(일본 전통 시)와 그림 솜씨도 상당했다고 한다.[1] 무라카미 번주 시절에는 매사냥, 은어 잡기, 망둥어 낚시에 열중했으며, 에도에서도 배놀이와 노, 조루리 등 유흥을 즐겼다. 와카는 아스카이 마사아키에게, 그림은 가노 야스노부에게 배웠다. 야스노부의 형 가노 탄유와도 친분이 있었으며, 만지 2년 (1659년 6월 6일)에 탄유에게 금니사자 병풍을, 28일에는 4폭짜리 후지산 그림을 의뢰하여 각각 12일과 7월 9일에 받았다는 내용이 자신의 일기 『야마토노카미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4. 관력
5.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마쓰다이라 나오모토 | (1604-1648) |
어머니 | 호리 씨 | |
정실 | 코마히메 | 마쓰다이라 나오마사의 장녀 |
계실 | 정 | 토엔 모토카타의 딸 |
측실 | 다나카 씨 | |
측실 | 무라카미 씨 | |
딸 | 이쿠 | 홋타 마사치카의 정실 |
차남 | 마쓰다이라 모토토모 | (1679-1729) |
삼남 | 마쓰다이라 노부토미 | (1680-1721), 마쓰다이라 미쓰나가의 양자 |
사남 | 마쓰다이라 토모키요 | (1682-1721), 오타 마쓰다이라 가문 |
칠남 | 혼다 타다사다 | 혼다 타다치카의 양자 |
양녀 | 사텐 | 토엔 모토카타의 딸, 교고쿠 타카스미의 정실 |
6. 관련 작품
- 스기모토 소노코의 소설 『이사 다이묘의 웃음』 (고단샤, 고단샤 문고, 1991년)
- 도바시 아키히로의 소설 『이사 다이묘 삼천리』 (가도카와 하루키 사무소 시대 소설 문고, 2016년). 2019년에 『이사 다이묘!』로 영화화됨.
- 영화 『이사 다이묘!』 (2019년 공개, 출연: 오이카와 미츠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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