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다다카타 (18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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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다다카타는 1812년에 태어나 1859년에 사망한 인물로, 에도 시대 후기의 다이묘이자 막부의 로주를 역임했다. 그는 소자반, 지샤부교를 거쳐 두 차례 로주에 임명되었으며, 미국과의 개국 문제에서 온건 개국파의 입장을 보였다.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과 관련된 정치적 갈등 속에서 로주에서 면직되었고, 안세이 대옥으로 근신 처분을 받던 중 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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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다다카타 (1812년) | |
---|---|
기본 정보 | |
씨족 | 사카이 씨 (가가쿠노카미 사카이 가문), 후지이 마쓰다이라 가문 |
묘소 | 도쿄도후추 시 다마 정 다마 霊園 → 이케가미 혼몬지 나가노 현우에다 시의 간교지 |
계명 | 대원원전경예용진지도대거사 |
시호 | 신사이 |
신호 | 알 수 없음 |
막부 | 에도 막부 소자반 겸 지샤부교, 오사카 조다이, 노주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나리, 도쿠가와 이에요시, 도쿠가와 이에사다 |
번 | 시나노 국우에다 번주 |
시대 | 에도 시대 후기 |
생년월일 | 분카 9년 7월 11일 (1812年8월 17일) |
사망일 | 안세이 6년 9월 14일 (1859年10월 9일) |
개명 | 다마스케 (어린 시절 이름), 다다마사 (처음 이름), 다다카타 |
관위 | 종5위하・좌위문좌, 종4위하・시종, 이가노카미 |
아버지 | 사카이 다다자네 |
어머니 | 니시오 다다쓰구 딸 류히메 |
양아버지 | 마쓰다이라 다다마나부, 마쓰다이라 다다나리 딸 미쓰와카 |
배우자 | 정실: 마쓰다이라 다다마나부 양녀 미치코 측실: 이노우에 씨, 마에다 씨, 아오키 씨 |
자녀 | 마쓰다이라 다다아키, 요시, 마쓰다이라 다다아쓰, 아키코, 도이 다다나오, 마쓰다이라 다다타카, 고칸인, 모가미 요시아키 실 |
형제자매 | 아야히메, 다다카타, 니시오 다다우케, 아즈마히메, 사카이 다다나오, 미야케 야스나오, 사카이 다다쓰구 정실, 모모, 구조 히사타다 실 |
2. 생애
1812년 하리마국 히메지번주 사카이 우타노카미 타다자네의 차남으로 에도에서 태어났다. 1829년 후다이 다이묘이자 노중 역임자가 많은 우에다번(후지이 마쓰다이라 가) 5대 번주 마쓰다이라 타다나리의 양자가 되었고, 1830년 타다나리가 은거하면서 가독을 이었다.
이듬해 영내 농촌을 순회하며 우에다가 벼농사에 불안정한 반면 뽕나무 재배에 적합하다고 판단, 양잠 장려를 지시하여 생산량과 품질 향상을 목표로 했다. 1832년 우에다 산물 개회소를 설치, 번 차원에서 견사와 직물의 품질 검사를 실시하고 품질 향상과 함께 과세를 통해 번 재정을 개선하려 했다.
덴포 대기근 당시 가신을 파견하여 쌀을 매입하고 영민 구제에 힘썼으나, 우에다 마쓰다이라 가문은 16만 냥의 부채를 지게 되었다. 고구마 재배 장려, 짚떡, 고사리 가루 제법 보급 등의 노력도 했다. 1836년 가신들에게 3개년 멘부치를 명했다. 대기근 경험을 바탕으로 우에다번은 양잠업과 견직물 산업 진흥에 매진, 누에 품종 개량이 거듭되었다.[1]
1834년 소자반에 임명되었고, 1838년에는 지샤부교에 임명되었다.[3] 미즈노 다다쿠니의 란학자 탄압을 비판했기 때문에, 1843년 소자반과 지샤부교에서 해임되었다.[3] 같은 해 미즈노 다다쿠니도 실각했기 때문에, 1844년 지샤 부교와 소자반에 재임명되었다.[3]
1848년 로주로 발탁되었다.[3] 1853년 우라가로 내항하여 국서를 교부해 온 미국 동인도 함대 제독 매튜 C. 페리로부터의 개국 요구에 대해, 노중 수좌 아베 마사히로는 여러 다이묘와 조정으로부터 의견을 구하고,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해방 참여로 임명했지만, 다다카타는 이에 반대했다.[3] 다다카타는 외교 문제등을 조정으로부터 일임받은 막부가 굳이 조정, 여러 다이묘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은 막부의 당사자 능력 상실을 내외에 알리는 어리석은 책략이라고 주장했다.[3]
막말의 정국은 조정 공경과 외양 대번으로부터의 막정으로의 간섭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에, 다다카타의 우려는 납득할 만한 점이 있었다.[3] 후다이 다이묘 중진 가문 출신답게, 고산케 조차도 막정에 참여할 자격이 없으며, 완고한 성격의 나리아키는 막정에 혼란을 야기할 뿐이라고 경계하여, 나리아키의 해방 참여 취임에 반대했다.[3]
양이론을 주장하는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미국과 전쟁을 벌여 승리할수 있다고 보았지만, 다다카타를 포함한 온건 · 개국파는 당시 막부가 미국과 전쟁을 벌여 승리할 수 없을 것이며, 잘못하면 국토의 일부를 할양될 뿐이기에, 국서를 받아들이고 빨리 개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3] 적극적인 교역론을 주장하는 다다카타는, 교역 통신 승인으로 막각의 대세를 주도하고 있었다.[3]
해방 미토학 사상에 굳어진 나리아키와 적극 개국파인 다다카타는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았고, 양자의 대립은 격화되었다.[3]
교역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나리아키는 해방 참여 사직을 요청했고, 노중 수좌 아베 마사히로는 사태 수습을 위해 나리아키에게 양보하여 통상 통신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3] 1855년 나리아키는 다다카타와 마쓰다이라 노리마사 두 명의 노중 면직까지 요구했고, 아베 마사히로는 다다카타를 노중직에서 해임하고, 제감간으로 좌천시켰다.[3]
1857년, 호리타 마사요시의 요청으로 로주에 복귀했다.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대해서는 칙허 불요론(勅許不要論)을 주장하며 조기 체결을 추진했다.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쇼군 후계 문제에서는 처음에는 중립적인 입장이었으나, 이후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를 옹립하는 히토쓰바시 파에 가담했다가 난키 파로 돌아섰다. 이이 나오스케의 다이로 취임에 협력했으나, 이후 나오스케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났다.
1858년, 칙허 없이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책임을 지고 로주에서 면직되었다. 1859년, 안세이 대옥으로 근신 처분을 받았으며, 같은 해 급사했다. (암살설 존재)
2. 1. 초기 생애와 우에다 번주 시절
1812년 하리마국 히메지번주 사카이 우타노카미 타다자네의 차남으로 에도에서 태어났다. 1829년 같은 후다이 다이묘이자 노중 역임자가 많은 우에다번(후지이 마쓰다이라 가) 5대 번주 마쓰다이라 타다나리의 양자가 되었고, 1830년 타다나리가 은거하면서 가독을 이었다.이듬해 영내 농촌을 순회하며 우에다가 벼농사에 불안정한 반면 뽕나무 재배에 적합하다고 판단, 양잠 장려를 지시하여 생산량과 품질 향상을 목표로 했다. 1832년 우에다 산물 개회소를 설치, 번 차원에서 견사와 직물의 품질 검사를 실시하고 품질 향상과 함께 과세를 통해 번 재정을 개선하려 했다.
덴포 대기근 당시 가신을 파견하여 쌀을 매입하고 영민 구제에 힘썼으나, 우에다 마쓰다이라 가문은 16만 냥의 부채를 지게 되었다. 고구마 재배 장려, 짚떡, 고사리 가루 제법 보급 등의 노력도 했다. 1836년 가신들에게 3개년 멘부치를 명했다. 대기근 경험을 바탕으로 우에다번은 양잠업과 견직물 산업 진흥에 매진, 누에 품종 개량이 거듭되었다.[1]
2. 2. 첫 번째 로주 취임
덴포 5년 (1834년) 4월, 장군과 다이묘의 중계역인 소자반에 임명되었다.[3] 덴포 9년 (1838년)에는 소자반과 겸임으로 지샤부교에 임명되었다.[3] 미즈노 다다쿠니의 란학자 탄압을 비판했기 때문에, 덴포 14년 (1843년) 2월 22일에 소자반과 지샤부교에서 해임되었다.[3] 같은 해 윤 9월에 미즈노 다다쿠니도 실각했기 때문에, 고카 원년 (1844년) 12월 28일, 지샤 부교와 소자반에 재임명되었다.[3]4년간의 오사카성대를 거쳐 가에이 원년 (1848년) 10월, 로주로 발탁되었다.[3] 가에이 6년 (1853년) 6월, 우라가로 내항하여 국서를 교부해 온 미국 동인도 함대 제독 매튜 C. 페리로부터의 개국 요구에 대해, 노중 수좌 아베 마사히로는 여러 다이묘와 조정으로부터 의견을 구하고,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해방 참여로 임명했지만, 다다카타는 이에 반대했다.[3] 다다카타는 외교 문제등을 조정으로부터 일임받은 막부가 굳이 조정, 여러 다이묘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은 막부의 당사자 능력 상실을 내외에 알리는 어리석은 책략이라고 주장했다.[3]
막말의 정국은 조정 공경과 외양 대번으로부터의 막정으로의 간섭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에, 다다카타의 우려는 납득할 만한 점이 있었다.[3] 후다이 다이묘 중진 가문 출신답게, 고산케 조차도 막정에 참여할 자격이 없으며, 완고한 성격의 나리아키는 막정에 혼란을 야기할 뿐이라고 경계하여, 나리아키의 해방 참여 취임에 반대했다.[3]
양이론을 주장하는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미국과 전쟁을 벌여 승리할수 있다고 보았지만, 다다카타를 포함한 온건 · 개국파는 당시 막부가 미국과 전쟁을 벌여 승리할 수 없을 것이며, 잘못하면 국토의 일부를 할양될 뿐이기에, 국서를 받아들이고 빨리 개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3] 적극적인 교역론을 주장하는 다다카타는, 교역 통신 승인으로 막각의 대세를 주도하고 있었다.[3]
해방 미토학 사상에 굳어진 나리아키와 적극 개국파인 다다카타는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았고, 양자의 대립은 격화되었다.[3]
교역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나리아키는 해방 참여 사직을 요청했고, 노중 수좌 아베 마사히로는 사태 수습을 위해 나리아키에게 양보하여 통상 통신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3] 안세이 2년 (1855년) 6월 30일, 나리아키는 다다카타와 마쓰다이라 노리마사 두 명의 노중 면직까지 요구했고, 아베 마사히로는 8월 4일에 노리마사와 함께 다다카타를 노중직에서 해임하고, 제감간으로 좌천시켰다.[3]
2. 3. 두 번째 로주 취임과 안세이 대옥
안세이 4년(1857년), 호리타 마사요시의 요청으로 로주에 복귀했다.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대해서는 칙허 불요론(勅許不要論)을 주장하며 조기 체결을 추진했다.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쇼군 후계 문제에서는 처음에는 중립적인 입장이었으나, 이후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를 옹립하는 히토쓰바시 파에 가담했다가 난키 파로 돌아섰다. 이이 나오스케의 다이로 취임에 협력했으나, 이후 나오스케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났다.안세이 5년(1858년), 칙허 없이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책임을 지고 로주에서 면직되었다. 안세이 6년(1859년), 안세이 대옥으로 근신 처분을 받았으며, 같은 해 급사했다. (암살설 존재)
3. 가계
구분 | 내용 |
---|---|
친부 | 사카이 다다자네 |
친모 | 류키 - 니시오 다다유키의 딸 |
양부 | 마쓰다이라 다다노리 |
양모 | 고호인 - 마쓰다이라 다다즈미의 딸 |
정실 | 마쓰다이라 산센시[3] - 마쓰다이라 다다노리의 양녀, 마쓰다이라 다다노리의 딸 |
측실 | 이노우에 씨, 마에다 씨, 아오키 씨 |
장남, 차남 | 요절 |
3남 | 마쓰다이라 다다노리 (이노우에 씨 소생, 측실) - 가독 상속 |
4남 | 마쓰다이라 타다아츠 - 형 마쓰다이라 다다노리와 함께 미국 유학, 유니온 퍼시픽 철도 주임 측량사 등으로 활약 |
5남 | 도이 다다나오[3] - 미카와 국 가리야 번주 도이 도시노리의 양자 |
6남 | 마쓰다이라 다다타카 - 요절 |
장녀 | 요시 - 이노우에 마사나오 정실 |
차녀 | 쇼코 - 도자와 마사자네 정실 |
3녀 | 코칸인 - 호리 나오토라 정실, 후 이혼 |
양녀 | 모가미 요시토시 실 |
4. 평가 및 일화
- 요시다 쇼인의 밀항 사건으로 쇼인과 그의 스승 사쿠마 쇼잔이 투옥되었을 때, 개국파였던 다다카타는 두 사람에게 동정하여 구제하려 노력했다. 국원(国元) 칩거라는 가벼운 죄로 온건하게 처리했다.
- 다다카타는 두 번째 로주(老中) 취임에 즈음하여 사쿠마 쇼잔을 사면하려 움직였다. 안세이 4년(1857년) 7월, 우에다 번사 사쿠라이 준조와 츠네가와 사이하치로가 하기의 쇼인을 방문하여 쇼잔을 사면하려 하는 다다카타의 의향을 전했다. 쇼인은 이를 알고 다다카타를 깊이 존경했으며, 사쿠라이와 츠네가와를 통해 쇼잔의 사면을 거듭 요청했다. 안세이 4년 10월 29일, 가츠라 고고로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리고 나 혼자 우에다 후작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은 사쿠라이와 츠네가와 두 아들의 말이 귀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라고 적어 다다카타를 존경하는 심정을 토로했다.
- 안세이 4년(1857년), 다다카타는 산물회소를 국원(国元)과 에도에 설치하여 우에다번의 특산품인 생사를 에도로 출하하는 체제를 구축하고 생사 수출을 준비시켰다. 요코하마 개항과 동시에 생사 수출을 시작한 것도 우에다번이었다.
- 유훈은 "교역은 세계의 통도이다. 황국의 앞날은 교역에 의해 융성을 도모해야 한다. 세론이 시끄러워도 열어야 할 통도는 반드시 열겠다. 너희는 그 방법을 강구하라"였다. 아들 다다노리와 다다아츠는 이 유훈에 따라 폐번치현 후 미국으로 유학했다. 다다아츠는 미국의 토목 공학자로서 획기적인 측량법을 개발하여 전미에서 유명해졌다.
- 다다카타의 가신 중에는 게이오 3년(1867년)에 보통 선거에 의한 의회 정치 도입이나 인민 평등의 원칙을 건백한 아카마츠 코사부로가 있다.
5. 등장 작품
작품명 | 연도 | 제작사 | 배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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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사 존왕양이 | 1927년 | 닛카츠 | 가타오카 시도 |
야지키타 진도중 나카센도의 권 | 1960년 | 신토호 | 다테 쇼자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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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돈 | 2018년 | NHK 대하 드라마 | 노조에 요시히로 |
푸른 하늘을 꿰뚫다 | 2021년 | NHK 대하 드라마 | 가토 타다요시 |
꽃의 생애 이이 나오스케와 사쿠라다몬 | 1988년 | TV 도쿄 | 사타케 아키오 |
참조
[1]
서적
あらしの江戸城
中沢書房
1958
[2]
문서
桂小五郎に與ふる書
山口県教育委員会
1857-12-03 # 안세이 4년 10월 29일
[3]
문서
土井利教の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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