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쇼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요시다 쇼인은 조슈번의 하급 무사로, 일본 에도 시대 말기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이다. 1830년 출생하여 1859년 처형당하기까지, 그는 존왕양이 사상을 주창하며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쇼카손주쿠를 설립하여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등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을 길러냈으며, 해외 유학을 시도하고 정한론을 주장하는 등 격변하는 시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의 사상은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으로 이어져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쇼카손주쿠 - 시나가와 야지로
시나가와 야지로는 조슈 번 출신 무사로, 존왕양이 운동에 참여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내무대신을 역임했으나 선거 간섭으로 사임한 후 국민협회를 창당하고 사망 후 욱일대수장 1등을 수여받았다. - 쇼카손주쿠 - 다마키 분노신
에도 시대 말기 조슈번의 무사이자 교육자인 다마키 분노신은 쇼카손주쿠를 통해 요시다 쇼인, 노기 마레스케 등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존왕양이 운동에 헌신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쇼카손주쿠를 재건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으나 하기의 난 이후 제자들의 반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결하였다. - 요시다 쇼인 - 쇼카손주쿠
쇼카손주쿠는 요시다 쇼인이 운영하며 막부 말기 유신지사를 배출하여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미친 야마구치현 하기시의 사설 교육 기관으로, 건물은 쇼인 신사 경내에 남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 요시다 쇼인 - 다마키 분노신
에도 시대 말기 조슈번의 무사이자 교육자인 다마키 분노신은 쇼카손주쿠를 통해 요시다 쇼인, 노기 마레스케 등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존왕양이 운동에 헌신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쇼카손주쿠를 재건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으나 하기의 난 이후 제자들의 반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결하였다. - 스기씨 - 쇼카손주쿠
쇼카손주쿠는 요시다 쇼인이 운영하며 막부 말기 유신지사를 배출하여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미친 야마구치현 하기시의 사설 교육 기관으로, 건물은 쇼인 신사 경내에 남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 스기씨 - 가토리 미와코
가토리 미와코는 1843년에 태어나 1921년에 사망한 인물로, 구사카 겐즈이의 아내였으며 가토리 모토히코와 재혼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 모리 가문의 시녀로 활동했다.
요시다 쇼인 | |
---|---|
기본 정보 | |
이름 | 요시다 쇼인 |
본명 | 스기 도라노스케 |
통칭 | 도라지로 |
출생일 | 1830년 9월 20일 |
출생지 | 하기, 나가토국 |
사망일 | 1859년 11월 21일 |
사망지 | 에도 |
사망 원인 | 참수 |
국적 | 일본인 |
다른 이름 | 도라지로 |
직업 | 학자 |
시대 | 에도 시대 |
부모 | 스기 유리노스케 (아버지), 고다마 다키 (어머니) |
친척 | 스기 우메타로 (형제), 고다마 요시코 (자매), 오다무라 히사 (자매), 스기 쓰야 (자매), 가토리 미와코 (자매), 스기 도시사부로 (형제), 다마키 분노신 (삼촌), 요시다 다이스케 (양아버지) |
학문적 조언자 | 야마다 유스케, 사쿠마 쇼잔, 아사카 곤사이, 미야베 데이조, 야마가 소스이 |
직장 | 메이린칸, 쇼카손주쿠 |
주목할 만한 학생 | 다카스기 신사쿠, 기도 다카요시, 아카네 다케토, 이토 히로부미, 구사카 겐즈이,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
혁명가 정보 | |
이름 | 요시다 쇼인 |
![]() | |
통칭 | 요시다 도라지로 |
출생 년도 | 1830년 9월 20일 |
출생지 | 나가토국 |
사망 년도 | 1859년 11월 21일 |
사망지 | 에도 |
사상 | 존왕양이 |
활동 | 도막 |
소속 번 | 조슈번 |
수상 | 증 정4위 |
투옥 | 노야마 감옥, 덴마초 감옥 |
재판 | 참수형 (죄상: 마나베 아키카쓰 암살 계획) |
형장 | 덴마초 감옥 |
묘 | 사쿠라야마 신사, 쇼인 신사, 야스쿠니 신사 |
무사 정보 | |
이름 | 요시다 쇼인 |
![]() | |
시대 | 막말 |
출생 | 1830년 9월 20일 |
출생지 | 나가토국 하기 촌 |
사망 | 1859년 11월 21일 |
사망지 | 에도 덴마 정 |
별명 | 휘: 노리카타(矩方) 통칭: 도라지로(寅次郎) |
묘소 | 사쿠라산 신사(桜山神社), 쇼인 신사(松陰神社),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 |
관위 | 증 정4위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모리 다카치카 |
번 | 조슈번 |
씨족 | 스기 씨 → 요시다 씨 |
부모 | 친부: 스기 유리노스케, 숙부(양부) : 다마키 분노신 |
형제 | 스기 민지, 가토리 미와코 |
2. 생애
요시다 쇼인은 1830년 9월 20일(분세이 13년 음력 8월 4일) 조슈번 하기 성하 마쓰모토무라(현재의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번사(藩士) 스기 유리노스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도라노스케(寅之助)였으며, 요시다 가에 양자로 입적하면서 다이지로(大次郎)로 개명했다. 통칭은 도라지로(寅次郎), 휘는 노리카타(矩方), 자는 기케이(義卿), 호는 쇼인(松陰) 외에 니주이치이치 맹시(二十一回猛士)이다.
니주이치이치 맹시의 '니주이치(二十一)'는 스기(杉)를 파자하면 '十', '八', '彡'으로 총 21이 되고, 요시다(吉田)는 '士'(十과 一), '十', '口'로 21, '回'가 된다는 의미이다.[7]
쇼인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형 스기 우메타로와 함께 농사일을 하며 《사서오경》을 읽고, "문정 10년의 칙령"[10], "신국 유래"[11], 라이 산요의 시 등을 복창하며 교육받았다. 밤에도 형제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책을 읽게 했다.
쇼인은 1834년 숙부이자 야마가류 병학 사범인 요시다 다이스케의 양자가 되었고, 이듬해 다이스케가 사망하자 숙부인 다마키 분노신이 연 마쓰시타 촌숙(松下村塾)에서 지도를 받았다. 9세 때 명륜관의 병학 사범에 취임했고, 11세 때 번주 모리 요시치카에게 어전 강의를 훌륭하게 해내 재능을 인정받았다. 13세 때에는 조슈 군을 이끌고 서양 함대 격멸 훈련을 실시했다. 15세에는 야마다 마타스케에게서 나가누마류 병학 강의를 받아 야마가류와 나가누마류를 모두 수학했다.
1850년 규슈 히라도번에 유학하여 하야마 사나이(葉山左内)에게서 수학했다.[12] 하야마 사나이는 해방론자로, 아편전쟁에서 청이 패배한 원인을 서양의 군사력과 아편, 기독교로 인한 내정 혼란으로 보고, 서양 병학 도입과 내정 강화를 주장했다.[12] 쇼인은 하야마 사이에게서 『변비적안』과 위원의 『성무기부록』을 빌려 베껴 쓰며 큰 영향을 받았다.[12]
이후 에도로 가서 사쿠마 쇼잔, 아사카 곤사이 등에게서 서양 군사 과학을 공부했고,[12] 1851년에는 히고번의 미야베 데이조와 야마가 소스이에게서도 수학했다.[13]
1852년 미야베 데이조 등과 도호쿠 여행을 계획했으나 탈번하여 미토번에서 아이자와 마사시사이를 만나고, 아이즈번에서 닛신칸 등을 견학했다. 구보타번에서는 소마 다이사쿠 사건 현장을 방문했고, 쓰가루번에서는 쓰가루 해협을 통과하는 외국 선박을 견학하려 했다. 요네자와번에서는 교육과 영민들의 따뜻함에 감탄했다.[14][15][16] 에도로 돌아온 후 탈번죄로 사적 박탈과 세록 몰수 처분을 받았다.
1853년 매슈 페리가 우라가에 당도하자 스승 사쿠마 쇼잔과 함께 흑선을 관찰하고 서양 문명에 감명을 받았다. 이후 해외 유학을 결심하고 가네코 시게노스케와 함께 나가사키에 정박 중이던 예핌 푸차친의 러시아 군함에 승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854년 페리가 재차 당도하자 가네코 시게노스케와 함께 밀항을 시도했으나 거부당하고 자수하여 덴마초 로야시키에 투옥되었다.[19] 막부 내에서 사형 논의가 있었으나 가와지 세이모 등의 반대로 국거칩거 처분을 받고 조슈로 이송되어 노야마 옥에 유폐되었다. 이곳에서 도미나가 유린 등을 만나고 동료 수감자들을 위해 《논어》, 《맹자》를 강의하여 『강맹여화』를 탄생시켰다.[20]
1855년 출옥 후 스기 가에 유폐되었으나, 1856년 "무교전서" 강의를 시작했다.[21] 1857년 숙부가 주재했던 마쓰시타 촌숙을 계승하여 구사카 겐즈이,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등 많은 인재를 교육했다.[22] 쇼인은 제자들의 장점을 파악하고 키우는 교육을 했으며, 등산이나 수영 등도 함께 하는 "살아있는 학문"을 추구했다.
1858년 막부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자 격분하여 마나베 아키카쓰 요격책을 제안했으나 번에 거절당했다. 이후 오하라 시게토쿠와 함께 후시미 요가책을 계획했으나 제자 대부분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에 쇼인은 초망궐기론을 주창하고 막부 타도까지 주장하게 되었다.[24] 결국 장주번에 의해 위험 인물로 간주되어 다시 노야마 옥에 유폐되었다.
1859년 안세이 대옥에 연좌되어 에도로 이송, 덴마초 로야시키에 투옥되었다. 평정소에서 로쥬 암살 계획을 자백하여[25] 사형을 선고받고 1859년 11월 21일(안세이 6년 10월 27일) 처형되었다. 향년 29세였다.
2. 1. 출생과 가계
분세이 13년(1830년) 음력 8월 4일 조슈번의 하급 무사 스기 유리노스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56] 어렸을 때 이름은 도라노스케(虎之助)였다. 요시다 가문의 양자가 된 후, 다이지로(大次郎)로 개명했으나 보통 도라지로(寅次郞)로 불렸다. 본명은 노리가타(矩方)이며, 자(字)는 기케이(義卿), 호(號)는 쇼인(松陰)이다.1834년, 다섯 살 때 야마가류(山鹿流) 병학사범(兵學師範)이었던 숙부 요시다 다이스케(吉田大助)의 양자가 되었다. 다음 해 양부가 죽자 여섯 살 어린 나이에 가직인 병학사범을 승계해 요시다 가문을 이어받았다. 그 후 또 다른 숙부 다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이 세운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공부했다. 열한 살 때 번주(藩主)에게 〈무교전서(武敎全書)〉를 강의하여 재능을 인정받았다.[57]
이후 혹독하고 엄격한 교육 과정을 거친 쇼인은 열아홉 살에 병학사범으로 독립해 조슈번의 하급 무사로 지배 계층에 합류했다.[58]



일본 조슈(長州) 지방 하기(萩)에서 스기 도라노스케(杉寅之介)로 태어난 그는 검소한 사무라이였던 스기 유리노스케(杉友之介, 1804~1865)와 그의 아내 코다마 타키(児玉瀧, 1807~1890) 사이의 둘째 아들이었다.
스기 도라노스케는 네 살 때 요시다 다이스케에게 입양되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스기 가문에서 어린 아들을 입양하는 과정은 쇼인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확립된 관습이었다. 재정적 파산을 피하기 위해 스기 가는 타마키 가와 요시다 가라는 두 개의 추가적인 사무라이 가계를 관리했다. 장남이 스기 가문의 상속자가 되고, 어린 스기 가의 아들들은 타마키 가와 요시다 가에 입양되어 상속자가 되었는데, 이는 스기 가문의 계승을 보호하기 위해 요시다 가의 당주와 대부분의 세대에서 타마키 가의 당주가 결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던 다이스케는 1년 후 28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다섯 살의 요시다 쇼인이 요시다 가의 상속자가 되었다.[1] 그의 집안은 다이묘의 무예 교육자이기도 했다.
쇼인의 어린 나이 때문에 요시다 가를 대표하는 교사로 네 명의 남성이 임명되었다. 쇼인의 삼촌인 타마키는 쇼인이 야마가(山鹿) 교관으로 훈련받을 수 있도록 교육을 앞당기기 시작했다. 1839년 아홉 살 때 명륜관(明倫館)에서 무예 교관에게 수업을 받았다. 열한 살 때에는 모리 다카치카 다이묘 앞에서 강연을 훌륭하게 해 그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어린 시절의 성씨는 스기(杉)였다. 아명은 토라노스케(寅之助)였다. 요시다 가에 양자로 들어가 다이지로(大次郎)로 개명하였다. 통칭은 토라지로(寅次郎)였다. 휘는 '''노리카타(矩方)'''이다. 자는 기케이(義卿), 호는 쇼킨(松陰) 외에 '''니쥬이치이치 맹시(二十一回猛士)'''이다.
안세이(安政) 원년 11월 20일, "니쥬이치이치 맹시설(二十一回猛子説)"에서 쇼킨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니쥬이치이치 맹시(二十一回猛子)의 "니쥬이치(二十一)"의 유래는, 스기(杉) 나무를 분해하면 "십(十)"과 "팔(八)"로 18, 삼(さんづくり)이 3이므로 총 21이 된다. 요시다(吉田)는 사(士, 십(十)과 일(一))와 십(十)으로 21, 로(口)와 구(口)로 회(回)라는 의미이다.[7]
문정 13년 8월 4일(1830년 9월 20일), 조슈(長州) 하기(萩) 성하 마쓰모토무라(松本村)(현재 야마구치현하기시)에서 조슈 번사(士) 스기 유리노스케(杉百合之助)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형 스기 우메타로(杉民治/梅太郎)와 함께 밭일을 나가 잡초를 뽑고 농사를 지으면서 사서오경(四書五経)을 소독(素読)하고, “문정 10년의 칙령(文政十年の詔)”[10], “신국 유래(神国由来)”[11] 등과 라이산요의 시 등을 아버지가 음독하고 형제가 복창하는 교육을 받았다. 밤에도 일하면서 형제에게 글을 가르치고 책을 읽게 했다.
그의 가족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스기 유리노스케(杉友之介) | 1804~1865 |
어머니 | 코다마 타키(児玉瀧) | 1807~1890 |
형 | 스기 우메타로(杉梅太郎) | 1828~1910 |
여동생 | 스기 요시코(杉好子) | 후에 코다마 요시코(児玉好子), 1832~1924 |
여동생 | 스기 히사(杉寿) | 후에 오다무라 히사(小田村寿), 1839~1881 |
여동생 | 스기 츠야(杉鶴夜) | 1841~1843 |
여동생 | 스기 후미(杉文) | 후에 카토리 미와코(香取美和子), 1843~1921 |
남동생 | 스기 토시사부로(杉利三郎) | 1845~1876 |
숙부 | 요시다 다이스케(吉田大介) | |
숙부 | 다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 |
2. 2. 수학과 유학
1850년 스무 살이 된 요시다 쇼인은 병학 연구를 위해 번주의 허락을 받고 유학을 떠나 규슈 히라도번에서 하야마 사나이(1796~1864)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59] 하야마 사나이는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원인이 아편과 기독교로 인해 중국이 혼란스러워진 것과 서구 열강의 군사력이 우수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서양 병학 도입과 내정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59]요시다 쇼인은 하야마 사나이에게서 책을 빌려 읽은 후 큰 영향을 받았고[59], 아이자와 야스시의 〈신론(新論)〉을 읽고 아편 전쟁의 전말을 공부해 국제 정세 흐름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57] 1851년 4월, 쇼인은 에도로 가서 여러 학자들에게서 서양 병학을 배웠다. 1852년엔 히고번의 미야베 테이조, 야마가 소수, 사쿠마 쇼잔에게 서양 학문을 배웠다.[60][61]
1852년 말, 요시다 쇼인은 미야베 테이조 등과 일본 동북부로 여행을 떠났으나, 조슈번 정부로부터 구두 허가만 받고 서면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출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는 범죄에 해당하는 탈번(脫藩) 행위였다. 그러나 쇼인은 여행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곳을 견학하며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쇼인은 미토번에서 아이자와 마사시사이와 만났고, 아이즈번에서 닛신칸과 도호쿠 광산 등을 견학했으며, 아키타번에서는 소마 대작 사건의 현장을 찾았다. 요네자와를 방문하는 등 많은 것들을 직접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1853년 초 4개월 간의 여행을 마치고 하기시로 돌아온 후 쇼인은 탈번죄로 녹봉을 몰수당하고 사무라이 신분을 박탈당했다.[62] 그러나 아버지 스기 유리노스케가 후견인이 된 후 10년 동안 일본 각지에서 공부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63]
가에이(嘉永) 3년(1850년) 9월, 규슈(九州)의 히라도번(平戸藩)에 유학하여 하야마 사이(葉山左内)(1796-1864) 밑에서 수련하였다.[12] 쇼인은 하야마 사이로부터 『변비적안』과 위원(魏源)의 『성무기부록(聖武記附録)』을 빌려 베껴 쓰며 큰 영향을 받았다.[12]
이후 쇼인은 에도(江戸)로 가서 여러 학자들에게서 서양 병학을 배웠다.[12] 가에이 4년(1851년)에는 교류가 깊었던 히고번(肥後藩)의 미야베 테이조(宮部鼎蔵)와 산가 소스이에게서도 배웠다.[13]
가에이 5년(1852년), 미야베 테이조 등과 함께 도호쿠(東北) 여행을 계획했지만, 탈번(脱藩)하였다. 이 도호쿠 유학에서는 미토번(水戸藩)에서 아이자와 마사사이(会沢正志斎)를 만나고, 아이즈번(会津藩)에서는 닛신칸(日新館)을 비롯하여 도호쿠 지역의 광산 등을 견학하였다. 쿠보타번(久保田藩)에서는 소마 다이사쿠 사건(相馬大作事件) 현장을 방문하여 모리오카번 남부가(南部家)의 통치를 혹평하였고, 쓰가루번(津軽藩)에서는 쓰가루 해협(津軽海峡)을 통과하는 외국 선박을 견학하려 하였다. 요네자와번(米沢藩)에서는 “요네자와 영내에서는 교육이 잘 이루어지고, 관소(関所) 통과와 숙박도 용이했다. 영민(領民)들은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무인 판매소(봉항상, 棒杭商)까지 있었다. 과연 명문가이다[14]”라고 놀라워했다.[15][16] 에도로 돌아온 후, 죄를 물어 사적(士籍) 박탈과 세록(世禄) 몰수 처분을 받았다.
2. 3. 밀항 시도와 투옥
1853년, 요시다 쇼인은 학업을 위해 에도로 갔다. 그해 7월, 미국의 페리 제독이 전함 4척을 이끌고 우라가에 나타나 개항을 요구했다. 초대형 대포를 장착한 미국 해군 증기선을 본 쇼인은 큰 충격을 받았고, 막번체제로는 서구 열강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해외 유학을 결심했다.[71] 그는 카네코 지게노스케와 함께 나가사키시에서 러시아 군함을 몰래 타고 해외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실패했다.1854년 3월, 페리 제독이 다시 나타나 개항을 압박하자 에도 막부는 가나가와 조약을 맺었다.[65] 이때 요시다 쇼인은 정박 중인 미국 군함에 밀항을 시도했으나, 1854년 3월 27일 도항이 거부되어 체포되었다. 조슈번으로 끌려간 쇼인은 노야마(野山)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토미나가 유린, 다카스 히사코 등과 교류하며 수형자들에게 논어와 맹자를 가르쳤다.[66]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맹차기(講孟箚記)》를 저술했다.


1851년, 요시다 쇼인은 일본 북동부를 여행하기 위해 떠났으나, 서면 허가를 받지 않고 떠나는 바람에 '번에서 도망치는 것'으로 간주되어 중죄인이 되었다. 1852년 하기로 돌아온 그는 사무라이 신분과 봉록을 박탈당했지만, 10년간 일본 어디에서든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받았다.[1]
1853년 1월 16일, 요시다 쇼인은 에도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했고, 매슈 페리가 일본에 도착한 시기와 맞물렸다.[1] 사쿠마 쇼잔은 막부에 서양의 방식을 배우기 위해 인재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낼 것을 청원했지만 거절당했고, 이에 쇼인과 사쿠마는 쇼인이 페리의 배에 몰래 타 서양으로 유학 갈 것을 결심했다.[1]
요시다와 그의 친구는 시모다에서 페리의 흑선(Black Ships)에 승선 허가를 얻으려 했으나, 한밤중에 몰래 배(USS Powhatan(1850))에 오르려다 발각되어 거절당했다. 그들은 막부 군인들에게 감금되었고, 에도와 하기의 감옥으로 이송되어 가택 연금을 선고받았다.[2]
2. 4. 쇼카손주쿠와 후학 양성
1855년 요시다 쇼인은 석방되었으나 곧바로 가택 연금 처분을 받았다. 1856년 쇼인은 자기 집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열어 《무교전서》 강의를 시작했다.[67] 같은 해 숙부 다마키 분노신이 설립한 쇼카손주쿠를 인수해 1857년에 학장으로 취임했고, 하급 무사들을 교육해 약 80여 명의 제자를 배출했다.[61] 이때 그의 제자였던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이노우에 가오루, 기도 다카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등은 존왕양이 지도자로서 이후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었다.안세이 4년(1857년) 쇼인은 숙부가 주재했던 마쓰시타무라 숙을 계승하여 스기가 부지에 쇼카손주쿠를 개설하였다. 쇼카손주쿠에서 쇼인은 쿠사카 겐즈이, 타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요시다 도시마로, 이리에 규이치, 마에하라 이치세이, 시나가와 야지로, 야마다 아키요시, 노무라 야스시, 와타나베 코조, 가와타 기지로(河北義次郎) 등을 교육하였다.[22]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고로는 명륜관 시절 제자이며 마쓰시타무라 숙에는 입숙하지 않았다). 쇼인은 제자들의 장점을 간파하고 그것을 본인에게 알려 키우는 교육 방식을 택했다. 예를 들어 이토 히로부미에게는 “그대는 장래 큰 정치가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23] 쇼인의 쇼카손주쿠는 스승이 제자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쇼인이 제자와 함께 의견을 나누고 문학뿐 아니라 등산이나 수영 등도 하는 “살아있는 학문”이었다고 한다.
2. 5. 안세이 대옥과 처형
1858년 막부 대로로 취임한 이이 나오스케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천황의 허락 없이 체결하자, 각지에서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외치는 지사들이 들고 일어나 막부 반대 운동이 활발해졌다.[68] 요시다 쇼인은 조슈번 무사들을 동원해 마나베 아키카쓰를 암살하려 했으나, 제자인 다가스키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등이 동조하지 않아 실행하지 못했다.1858년 9월, 막부는 존왕파 지도자 우메다 운빈을 체포하고 안세이 대옥을 일으켜 반막부 세력을 탄압했다. 쇼인 역시 체포되어 1858년 12월 26일 조슈번 노야마 감옥에 투옥되었고, 1859년 6월 에도로 압송되었다. 감옥에서도 막부 타도 운동을 계속하며 오하라 시게토미에게 막부 토벌을 제안하는 등 여러 계책을 냈지만, 제자들의 외면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결국 1859년 11월 21일(안세이 10월 27일) 에도의 덴마 감옥에서 처형되었다.[68] 29세의 짧은 생애였다. 그의 시신은 나무통에 담겨 매장되었으나, 후에 제자들이 이장했다.[69]
죽기 전 요시다 쇼인은 이탁오의 책을 읽으며 죽음의 의미를 생각했다. 그는 "충의란 귀신이 없는 사이에 차를 끓여 먹는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제자들을 꾸짖었고, "대장부가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으면 푸른 하늘을 향해 뭐라고 할 것인가?"라는 시를 남겼다.[68]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고, 조슈번 수뇌부나 번주까지 움직여 새로운 국면을 열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평소 강조했던 간사(諫死), 즉 죽음으로 간언한다는 생각을 실천한 것이다.[68]
사세구는 다음과 같다.
1859년, 요시다 쇼인은 에도 감옥에서 암살 음모를 자백하고 계속 반란을 모의했다. 10월 15일, 최후의 시를 읊고 이틀 후 사형 선고를 받았다. 11월 21일, 참수형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처형 집행인 야마다 아사에몬은 그가 고귀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했다.
처형 후, 이토 히로부미와 그의 동지들이 처형 장소 근처에 매장했다. 1863년, 그의 지지자들이 에도 와카바야시에 다시 매장했다.
3. 사상
요시다 쇼인은 제자들에게 항상 정보를 수집하여 미래를 판단하는 자료로 삼으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쇼인의 “飛耳長目(히지초모쿠)”이다. 쇼인은 스스로 도호쿠 지방에서 규슈 지방까지 발로 뛰며 각지의 동향을 살폈다. 하기의 야마야마 감옥에 갇힌 후에는 제자들에게 정보 수집 역할을 맡겼다. 조슈번에는 주요 번에 정보 탐색자를 파견할 것을 건의했고, 에도와 나가사키에서 유학하는 이들에게는 “보지상(報知賞)”을 특별히 지급하라고 주장했다. 쇼인의 시대에 대한 뛰어난 예견은 “飛耳長目(히지초모쿠)”에 크게 기인한다.
쇼인은 왕양명(王陽明)이 창시한 양명학(陽明学)에 감화되어 스스로 행동했다. 『전습록(伝習録)』은 양명학 입문서로서 막말 일본에서도 유명했다.
쇼인의 삶과 죽음은 남송(南宋) 말기 군인 문천상(文天祥)과 같다고 평가받는다. 쇼인은 자신이 지은 “정기의 노래(正気の歌)”를 불렀는데, 이 노래의 사상은 막말·메이지 유신의 존왕양이 사상이 되었고, 쇼와 시대 군인들에게까지 이어졌다.[29]
- '''위원(魏源)'''
: 청나라의 사상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맞선 청나라 정치가 린쩌슈(林則徐)의 측근이다. 린쩌슈가 전시(戰時)에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당시 세계 정세를 저술한 『해국도지(海国図志)』에서 위원은 “이(夷)의 장기를 배워 이를 제압한다(夷の長技を師とし以て夷を制す)”라고 말하며, 외국의 선진 기술을 배워 침략을 막는다는 사상을 밝혔다. 이는 요시다 쇼인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3. 1. 존왕양이
「초망(草莽)」은 『맹자』에서 풀숲에 숨어 사는 은자를 가리키며, 비유적으로 일반 대중을 가리킨다. 「굴기(崛起)」는 일제히 일어서는 것을 의미하며, 「야인들이여, 일어서라」는 뜻이다.안세이 대옥에 투옥되기 직전(1859년 4월 7일) 요시다 쇼인은 벗인 기타야마 야스요(北山安世)에게 보낸 서간에서 “지금의 막부와 제후들은 모두 이미 취객이므로 붙들고 갈 방도가 없다. '''초망굴기'''의 인물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본번의 은혜와 천조의 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초망굴기의 힘을 빌려 가까이는 본번을 유지하고, 멀리는 천조의 중흥을 보좌한다면, 필부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신주(神州)의 큰 공을 세운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기록하며 처음으로 사용했다.
3. 2. 일군만민론
요시다 쇼인은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을 주장했다. 이는 천황 아래 모든 백성이 평등하다는 의미로, 존왕양이 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69][70][71]쇼인은 '초망굴기(草莽崛起)'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초야에 묻힌 인재들이여, 떨쳐 일어나라'는 뜻이다. 1859년 안세이 대옥으로 투옥되기 직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사용하며, 당시 막부와 다이묘들은 이미 무능력하니 초야의 인재들이 일어나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쇼인은 『유수록』에서 일본이 군비를 확충한 후 홋카이도(당시 에조)를 개척하고, 캄차카반도와 오호츠크해를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류큐 왕국(현재 오키나와현)을 복속시키고, 조선을 압박하여 조공을 바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더 나아가 만주, 타이완, 필리핀(당시 스페인령 동인도)까지 점령해야 한다는 팽창주의적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쇼인의 주장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대외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다.[28]
3. 3.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
요시다 쇼인은 수감 생활 중 《유수록(幽囚錄)》을 썼는데, 이 책에서 그는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즉시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제후를 봉건해 캄차카반도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오키나와와 조선을 정벌한 후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루손 일대의 섬들을 노획해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55] 이러한 그의 사상은 훗날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배경이 되는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55]《유수록》에서 쇼인은 홋카이도(당시의 에조지), 류큐왕국(현재의 오키나와현으로 당시에는 반독립 국가였다), 조선의 일본에 대한 속국화, 그리고 당시 청의 영토였던 만주와 타이완, 스페인령 동인도라 불렸던 필리핀,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캄차카반도와 오호츠크해 연안이라는 태평양 북동부 연안에서 유라시아 대륙 내륙에 이르는 영토를 일본이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8] 비록 쇼인이 이러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외교·군사 전략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제자들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의 중심에서 활동하면서 그의 사상은 일본의 아시아 진출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다.[28]
3. 4. 교육관
요시다 쇼인은 기존 교육자들과 달리 신분이나 남녀 구별 없이 교육 대상을 정했다. 1856년 자기 집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열어 《무교전서》 강의를 시작했고,[67] 같은 해 숙부 다마키 분노신이 설립한 쇼카손주쿠를 인수해 1857년 학장으로 취임했다. 하급 무사들을 교육하여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이노우에 가오루, 기도 다카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등 존왕양이 지도자들을 배출했으며, 이들은 이후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었다.[61]쇼인은 쇼군이나 번주 같은 기존 통치자들이 외국의 위협에 무능하여 권위를 잃었다고 주장하며, 오직 천황만을 믿고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일본을 구원하려면 부나 관직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자들이 봉기해야 하며, 이 봉기는 결연한 의지를 품은 소수 사무라이가 지도하고 모인 군중들을 천황에 대한 충성심으로 하나로 묶음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국가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 정도의 헌신을 사무라이에게 요구했다.[61]
요시다 쇼인은 자신을 “僕(보쿠)”라 칭하고, 제자들을 “君(쿤)”이라 부르며 서로 존중하는 관계를 쌓았다.[8] 이러한 정신은 제자인 이토 히로부미(初代내각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제3·9대 내각총리대신)에게 계승되어 현대 일본 의회에서도 “君(쿤)”이라는 존칭이 사용되고 있다.[9]
그는 “천하는 만민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이다”라고 주장하며, 향교명륜관의 전 학두(學頭) 산현 다이카(山県太華)와 논쟁을 벌였다. 여기서 “한 사람의 천하”란 천황이 국가를 지배하는 것을 의미하며, 천황 밑에 만민은 평등하다는 것이다.
쇼인은 제자들에게 항상 정보를 수집하여 미래의 판단 자료로 삼으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쇼인의 “飛耳長目(히지초모쿠)”이다. 그는 도호쿠 지방에서 규슈 지방까지 직접 발로 뛰며 각지의 동향을 살폈고, 하기의 야마야마 감옥에 갇힌 후에는 제자들에게 이 역할을 맡겼다. 또한 장주번에 주요 번에 정보 탐색자를 파견할 것을 건의했고, 에도와 나가사키에서 유학 중인 자에게는 “보지상(報知賞)”을 특별히 지급하라고 주장했다.
초망굴기일본어(草莽崛起)는 ‘초야에 묻혀 있던 인재들이여, 떨쳐 일어나라’는 뜻이다. 쇼인은 안세이 대옥(安政の大獄)으로 투옥되기 직전(1859년 4월 7일), 벗 기타야마 야스요(北山安世)에게 보낸 서간에서 “지금의 막부와 제후들은 모두 이미 취객이므로 붙들고 갈 방도가 없다. '''초망굴기'''의 인물을 바랄 뿐이다."라고 하였다.
쇼인은 1853년 9월, 친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양 오랑캐에게조차 빈민원, 병원, 육아원과 같은 시설이 있어 백성을 이롭게 하는데, 번영한 대일본 제국에 오히려 이러한 제도가 없다니, 어찌 큰 결점이 아니겠는가’라며 백성을 위한 복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쇼인의 어록은 다음과 같다.
- 입지상특이 (뜻을 세우려면 남들과 다른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 속류여의난 (세속의 여론에 흔들려서도 안 된다)
- 불사신후업 (죽은 뒤의 고통을 걱정하지 마라)
- 차투목전안 (눈앞의 안락은 일시적인 것임을 알라)
- 백년일순이 (백 년의 세월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 군자물소찬 (너희들은 부디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마라)
- 지성인즉동자자자왈유라 (진정한 성실함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진정한 성실함이 있다면 행동하라)
4. 사후 평가와 영향
유신삼걸 중 하나인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와 과격파 유신지사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기병대 수장이었던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유신의 주요 인사들은 쇼인의 죽음으로 분기했다. 한편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창한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 훗날 커다란 정치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요시다 쇼인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69]
아베 신조 총리는 2006년 9월에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한다고 밝혔다.[69] 일본의 우익 단체 중 쇼콘주쿠(松魂塾)라는 학당이 있는데, 그의 이름과 그가 활약하던 학당에서 쇼(松)라는 글자를 따온 것이다. 이처럼 쇼인의 정신을 기리고, 그의 학맥이 계승될 만큼 현대 일본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쇼카손주쿠에는 쇼인을 모신 신사가 세워져 성역화되기도 하였다.
다카스기 신사쿠,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은 쇼인의 제자들로, 훗날 널리 알려졌다. 쇼카손주쿠 출신 생존자 거의 대부분이 메이지 유신에서 장교가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1882년, 요시다 쇼인은 도쿄 세타가야구 와카바야시에 있는 쇼인 신사(松陰神社)에 합사되었으며, 현재의 신사 본전은 1927년에 건립되었다.[3] 그의 출생지인 야마구치현 하기시에도 신사가 있다(山口県萩市椿東1537). 1888년 요시다 쇼인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고, 1889년에는 사후에 정4위(正四位)를 추서받았다.
쇼인 대학(尚絅大学)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일본에는 쇼인이라는 이름이 포함된 다른 두 개의 대학이 있지만, 그와는 관련이 없다.[4]
2015년 1월 4일부터 12월 13일까지 방영된 NHK 대하드라마 「꽃을 피우다(花燃ゆ, Hana Moyu)」에서는 요시다 쇼인의 여동생 스기 후미(杉文) 역을 이노우에 마오가, 요시다 쇼인 역을 이세야 유스케가 연기했다.
4. 1. 긍정적 평가
요시다 쇼인은 맹자의 초망(草莽) 개념을 사용하여, 백성들이 스스로 떨쳐 일어나는 '초망굴기(草莽崛起)'를 주장했다.[36] 이는 당시 부패한 막부와 번(藩)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백성의 힘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보여준다.쇼인은 백성을 위한 복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36] 서양에는 빈민원, 병원, 육아원과 같은 시설이 있는데, 일본에는 그러한 제도가 없음을 지적하며, 백성을 이롭게 하는 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몸은 비록 무사시 들판에 朽칠지라도, 남겨둘지니 대화의 정신(大和魂)"[36]이라는 단가를 남겨, 조국 일본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였다. 또한 "죽임을 당한 나를 애석하게 여길 사람은, 그대를 숭배하고 액운을 쫓아라"[38][39]라는 유서를 통해 자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드러냈다.
쇼인의 인품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남아있다. 시나가와 야지로는 그를 "온순하고 화를 내는 일이 없는 작은 체구의 사람"이라고 평했다.[36] 세고 가쿠타로는 "키가 작고 등이 굽었으며, 용모가 못생기고 피부가 검었고, 코가 높고 천연두 흉터가 있었다. 말씨는 매우 상쾌했고, 모습은 온화해 보였다."라고 묘사했다.[47] 와타나베 코조는 "키가 크지 않았고, 마른 체형이었으며, 안색은 희었다. 천연두 흉터가 있었다."라고 전했다.[48]
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쇼인은 매우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고, 과식을 경계했으며, 서화나 골동품에도 관심이 없었다.[48] 제자들에게는 엄격했지만, 동시에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을 가르쳤다. 특히 여성 교육에 대한 열정이 컸으며, 항상 좋은 책이 없는 것을 걱정했다.[48]
쇼인의 마지막 모습은 매우 당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형 집행 당시, 그는 관리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나는 지금 나라를 위해 죽는다"라며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48] 그의 의연한 태도는 막부 관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48] 노무라 야스시는 "선생님은 인정이 많고, 사람을 대할 때 온화하셨지만, 정의의 극치는 무정한 일을 감행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평가했다.[50]
4. 2. 부정적 평가
요시다 쇼인은 외모와 성격, 언행 등 다양한 측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외모: 세고 가쿠타로는 쇼인의 키가 작고 등이 굽었으며, 용모가 못생기고 피부가 검었다고 평가했다.[47] 와타나베 코조는 쇼인이 마른 체형에 천연두 흉터가 있었다고 증언했다.[48] 마사키 타이조는 쇼인이 "못생겼고, 이상할 정도로 천연두 흉터가 남아 있었다"고 평가했다.[48]
- 성급함: 조슈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은 쇼인이 "일에 너무 서두른다"고 지적했다.[49]
- 극단적인 언행: 쇼인은 유서에서 "몸은 비록 무사시 들판에 朽칠지라도, 남겨둘지니 대화의 정신(大和魂)"[36], "죽임을 당한 나를 애석하게 여길 사람은, 그대를 숭배하고 액운을 쫓아라"[38][39]와 같은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 무모함: 시모다 옥중에서 지었다고 전해지는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대화의 정신(大和魂)"[41]이라는 단가는 쇼인의 무모함을 보여주는 예시로 언급되기도 한다. (단, 이 단가는 위작 또는 후세의 창작이라는 설도 있다.[42])
4. 3. 현대 일본에서의 영향
유신삼걸 중 하나인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와 과격파 유신지사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기병대 수장이었던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유신의 주요 인사들은 쇼인의 죽음으로 분기했다.[69]2006년 9월, 아베 신조 총리는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한다고 밝혔다.[69] 일본의 우익 단체 중 쇼콘주쿠(松魂塾)라는 학당이 있는데, 그의 이름과 그가 활약하던 학당에서 쇼(松)라는 글자를 따온 것이다. 이처럼 쇼인의 정신을 기리고, 그의 학맥이 계승될 만큼 현대 일본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쇼카손주쿠에는 쇼인을 모신 신사가 세워져 성역화되기도 하였다.
다카스기 신사쿠, 가쓰라 고로,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최소 다섯 명의 쇼인 제자들은 훗날 널리 알려졌으며, 손주쿠 학당 출신 생존자 거의 대부분이 메이지 유신에서 장교가 되었다. 다카스기는 1864년 막부군이 장주를 정복하는 데 실패했을 때 소총 부대를 이끌고 싸웠고, 이는 곧 도쿠가와 막부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1882년, 요시다 쇼인은 도쿄 세타가야구 와카바야시에 있는 쇼인 신사(松陰神社)에 합사되었으며, 현재의 신사 본전은 1927년에 건립되었다.[3] 그의 출생지인 야마구치현 하기시에도 신사가 있다(山口県萩市椿東1537). 1888년 요시다 쇼인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고, 1889년에는 사후에 정4위(正四位)를 추서받았다.
쇼인 대학(尚絅大学)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일본에는 쇼인이라는 이름이 포함된 다른 두 개의 대학이 있지만, 그와는 관련이 없다.[4]
2015년 1월 4일부터 12월 13일까지 방영된 NHK 대하드라마 「꽃을 피우다(花燃ゆ, Hana Moyu)」에서는 요시다 쇼인의 여동생 스기 후미(杉文) 역을 이노우에 마오가, 요시다 쇼인 역을 이세야 유스케가 연기했다.
요시다 쇼인은 항상 자신을 겸손하게 “僕(보쿠)”라 칭하고, 제자들을 존경하는 의미로 “君(쿤)”이라 부르며 서로 존중하는 관계를 쌓았다.[8] 이러한 정신은 이토 히로부미(初代내각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제3·9대 내각총리대신)에게 계승되어, 현대에도 의회에서 “君(쿤)”이라는 존칭이 사용되고 있다.[9]
일본 국회 상원 전례록에는 "의원은 의장 또는 위원회 회의실에서는 서로 존칭으로 '군'을 사용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국회에서 '군'으로 부르는 것이 정착된 것은 요시다 쇼인의 영향이다.[52][8][9]
5. 저서
6. 관련 인물
요시다 쇼인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쇼카손주쿠(松下村塾) 문하생이거나 쇼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인물들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과 그 이후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름 | 설명 |
---|---|
다카스기 신사쿠 | 조슈 번사. 쇼카손주쿠 문하생으로, 훗날 기병대를 이끌고 막부 타도에 앞장섰다. |
가쓰라 고로 | 조슈 번사. 쇼카손주쿠 문하생은 아니지만, 요시다 쇼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훗날 메이지 유신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
이노우에 가오루 | 조슈 번사. 쇼카손주쿠 문하생으로, 훗날 메이지 정부의 요직을 맡았다. |
이토 히로부미 | 조슈 번사. 쇼카손주쿠 문하생으로, 스승에게 "장래 큰 정치가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훗날 일본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요시다 쇼인의 정신을 계승하여 현대 일본 의회에서도 "군(君)"이라는 존칭이 사용되고 있다.[9]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조슈 번사. 쇼카손주쿠 문하생은 아니지만, 요시다 쇼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훗날 일본의 제3·9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요시다 쇼인의 정신을 계승하여 현대 일본 의회에서도 "군(君)"이라는 존칭이 사용되고 있다.[9] |
구사카 겐즈이 | 조슈 번사. 쇼카손주쿠 문하생이자 요시다 쇼인의 매제(여동생 가토리 미와코와 혼인). |
요시다 도시마로 | 조슈 번사. 쇼카손주쿠 문하생. |
이리에 구이치 | 조슈 번사. 쇼카손주쿠 문하생. |
마에바라 잇세이 | 조슈 번사. 쇼카손주쿠 문하생. |
시나가와 야지로 | 조슈 번사. 쇼카손주쿠 문하생. |
야마다 아키요시 | 조슈 번사. 쇼카손주쿠 문하생. |
노무라 야스시 | 조슈 번사. 쇼카손주쿠 문하생. |
와타나베 고조 | 조슈 번사. 쇼카손주쿠 문하생. |
가와타 기지로(河北義次郎) | 조슈 번사. 쇼카손주쿠 문하생. |
가토리 모토히코 | 조슈 번사. 요시다 쇼인의 매제(여동생 가토리 히사와 가토리 미와코와 혼인). 초대 군마현 현령. |
가토리 미치아키 | 요시다 쇼인의 조카(여동생 히사와 가토리 모토히코의 차남). 대만 교육의 선구자로, 육씨선생 중 한 명이었으나 대만에서 살해당했다. |
요시다 고조 | 요시다 쇼인의 조카. 요시다 가문 11대손. 메이지·다이쇼 시대 교육자. |
노기 마레스케 | 요시다 쇼인의 숙부 다마키 분노신의 가문을 이었다. |
오다무라 도라지로 | 요시다 쇼인의 여동생 히사의 증손자. 전 아시아대학 교수. 사단법인 국민문화연구회 초대 이사장. |
오다무라 시로 | 요시다 쇼인의 여동생 히사의 증손자. 일본회의 부회장, 메이세이사 사장. |
스기 미치스케 | 요시다 쇼인의 형 스기 우메타로(민치, 슈도)의 손자. 스기 가문 8대손. 실업가. |
7. 관련 장소
- 야마구치현 하기시에는 요시다 쇼인의 출생지, 노야마 옥, 마쓰시타무라주쿠가 있으며, 사후 100일째에 유발을 묻은 유발塚인 쇼인묘지(시 지정 사적), 1890년에 세워진 쇼인신사(현사)가 있다.[3]
- 시즈오카현 시모다시에는 페리 함대에 승선하여 밀항을 시도했던 장소가 있으며, 요시다 쇼인 관련 사적이 많이 남아 있다.
- 도쿄도 아라카와구의 풍국산 회향원 묘지에는 처형 직후 매장된 요시다 쇼인의 묘비가 현재도 남아 있다.
- 도쿄도 세타가야구 와카바야시에는 1882년에 쇼인신사가 창건되었으며, 1927년에 건립된 현재의 신사 본전이 있다.[3]
-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 고덴마초의 쥬시공원에는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 덴마초 로야시키 터가 있으며, 「요시다 쇼인 종언의 지비」와 「류혼비」가 있다.
- 야마구치현 하기시 쓰바키히가시의 요시다 쇼인 탄생지에는 제자인 가네코 시게노스케와 함께 페리 함대를 바라보는 모습을 조각한 동상이 있다.
- 이바라키현 미토시의 나가이 마사스케 저택 터에는 「요시다 쇼인 미토 유학의 지」 비석이 세워져 있다.[27]
- 지바현 마쓰도시 가미혼고의 혼푸쿠지에는 「요시다 쇼인 탈번의 길」 비가 세워져 있다.
-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 아라마치 쓰지니시에는 「요시다 쇼인 숙박의 지」 비석이 있다.
8. 대중문화 속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은 여러 대중 매체에서 다양하게 묘사되었다.
; 소설
:* 시바 료타로의 소설 《세상에 살아가는 날날》에서는 요시다 쇼인을 다루고 있으나, 역사적 사실과 다른 묘사나 허구가 포함되어 있다.[53]
:*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요시다 쇼인》
:* 도몬 후유지의 소설 《소설 요시다 쇼인》
; 만화
:* 미나모토 타로의 만화 《풍운아들》
:* 아메세 시오리의 만화 《송영에 기대어》
:* 소니시 켄지의 만화 《고양이고양이 일본사》 제3권 (TV 애니메이션판 성우는 고바야시 유)
:* 다이 산코의 만화 《단돈 외전・장주편》
; 영화
:* 2010년 영화 《옥에 피는 꽃》(감독: 이시하라 코, 배우: 마에다 린료)
; 텔레비전 드라마
:* 1969년 드라마 《요시다 쇼인》 (KTV, 배우: 다카하시 코지)
:* 1977년 NHK 대하드라마 《화신》 (배우: 시노다 사부로)
:* 1991년 드라마 《불꽃처럼 요시다 쇼인》(일본 텔레비전, 배우: 카자마 토오루)
:* 2000년 드라마 《창천의 꿈 쇼인과 신작·신세기로의 도전》 (NHK, 배우: 나카무라 하시노스케)
:* 2010년 NHK 대하드라마 《료마전》 (배우: 나마세 카츠히사)
:* 2013년 NHK 대하드라마 《야에의 벚꽃》 (배우: 오구리 슌)
:* 2015년 NHK 대하드라마 《화연》 (배우: 이세야 유스케)
; 가요곡
:* 1976년 노래 《요시다 쇼인 이야기》 (츠보이 노리오 작사·작곡·노래) - 요시다 쇼인을 소재로 한 코믹송이나, 가사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는 허구이다.[54]
:* 1988년 노래 《요시다 쇼인》 (호시노 테츠로 작사, 하마구치 쿠라노스케 작곡, 오가타 다이사쿠 노래) - 2016년 시마즈 아야가 커버했다.
; 무대
:* 2022년 무대 《막말 선라이즈》
; 창가
:* 창가 《아아 요시다 쇼인》 (마야마 하야토 작사)
참조
[1]
서적
Revolutionary Origins of Modern Japan
Stanford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Yoshida Shōin: The Revolutionary and Teacher Who Helped Bring Down the Shogunate
https://www.nippon.c[...]
2015-02-04
[3]
웹사이트
Shoin Jinja official website
http://www.shoinjinj[...]
2015-12-02
[4]
웹사이트
建学の精神
http://www.shoin-u.a[...]
2015-12-02
[5]
간행물
『官報』第1683号「叙任及辞令」
1889-02-12
[6]
문서
「松蔭」の表記割れもある
[7]
서적
吉田松陰 留魂録
徳間書店
[8]
논문
近世における一人称代名詞「僕」の使用をめぐって : 江戸中期の徂徠学派 〈山県周南〉 から幕末の へ
https://cir.nii.ac.j[...]
2020-03
[9]
웹사이트
国会では女性も男性も「くん」で呼んでいる理由|TBSテレビ
https://topics.tbs.c[...]
2024-10-05
[10]
문서
11代将軍・徳川家斉を太政大臣に任じた詔書
[11]
문서
賀茂神社の神官・玉田永教が論じた国体論
[12]
논문
葉山佐内の思想に関する一考察―「思想家」吉田松陰誕生前史
http://id.nii.ac.jp/[...]
中央大学法学部
[13]
문서
「兵法者の生活」第六章.幕末兵法武道家の生涯 二.山鹿素水の業績
[14]
문서
羽前(長井・寒河江)は毛利氏の遠祖・大江広元が地頭を務めた地
[15]
서적
東北遊日記
1852-03-25
[16]
문서
イザベラ・バードの置賜地方評
[17]
편지
宮部鼎蔵宛
1853-06-16
[18]
시
1859-01-07
[19]
문서
1854-03-28
[20]
서적
草莽論
ちくま学芸文庫
[21]
서적
吉田松陰全集1
岩波書店
[22]
문서
村塾の双璧、松門四天王
[23]
웹사이트
伊藤博文の生涯(伊藤博文と吉田松陰)
http://www.yoshida-s[...]
2024-10-05
[24]
논문
[25]
논문
[26]
문서
松陰神社前と吉良
[27]
웹사이트
吉田松陰水戸留学の地
https://g.co/kgs/kJM[...]
[28]
문서
伊藤博文と日韓併合
[29]
서적
日本の歷史を貫く柱
PHP文庫
[30]
서적
吉田松陰全集 第12巻 渡邊嵩蔵
[31]
문서
松陰自身による改題
[32]
문서
王猛の諫言と五胡十六国
[33]
서적
講孟余話
[34]
문서
松陰神社に伝わる副簡
[35]
문서
ウラジオストク上陸と極東共和国
[36]
문서
「留魂録」冒頭の歌。(十月念餘日)
[37]
문서
実際には刑執行前に書簡に記され、松陰の手になる実物が現存する。
[38]
문서
「留魂録」末尾の歌。
[39]
문서
当該歌が有名だが、全部で五首が「留魂録」には記される。
[40]
서적
武士道
[41]
서적
日本人の心はなぜ強かったのか
[42]
문서
「萩松陰神社神靈」一覧
[43]
문서
下田市柿崎にある「吉田松陰先生像」土台部分に同歌が刻まれている(静岡県文化政策課)。
[44]
웹사이트
吉田松陰 | 近代日本人の肖像
https://www.ndl.go.j[...]
[45]
서적
吉田松陰全集
大和書房
1931-04-00
[46]
웹사이트
ご利用について|近代日本人の肖像
https://www.ndl.go.j[...]
[47]
서적
唱義聞見録
[48]
서적
吉田松陰全集
[49]
서적
逸話文庫 : 通俗教育. 志士の巻
[50]
서적
松陰とその門下
[51]
웹사이트
杉氏系譜
http://www2.harimaya[...]
[52]
웹사이트
参議院先例録:関係法規等:参議院
https://www.sangiin.[...]
2024-10-05
[53]
문서
司馬は吉田松陰を子供のころから嫌いだったと述べており、偏見による矮小化が随所に見られる。
[54]
뉴스
「ゴールデン☆ベスト」をリリースした“つボイノリオ”にロングインタビュー!【6】
https://www.walkerpl[...]
ウォーカープラス
2012-07-08
[55]
웹사이트
요시다 쇼인 [Yoshida Shōin, 吉田松陰(길전송음)]
https://terms.naver.[...]
[56]
웹사이트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 - 막번 체제가 낳은 광기의 사상가
https://terms.naver.[...]
[57]
웹사이트
요시다 쇼인 Yoshida Shoin , 吉田松陰
https://100.daum.net[...]
[58]
웹사이트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 - 막번 체제가 낳은 광기의 사상가
[59]
논문
葉山佐内の思想に関する一考察―「思想家」吉田松陰誕生前史
http://id.nii.ac.jp/[...]
中央大学法学部
2015-00-00
[60]
문서
「兵法者の生活」第六章.幕末兵法武道家の生涯 二.山鹿素水の業績(P217-220)
[61]
웹사이트
스러진 시대정신의 소유자, 요시다 쇼인 - 에도시대의 지사(1830년 ~ 1858년)
https://terms.naver.[...]
2011-12-30
[62]
웹사이트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 - 막번 체제가 낳은 광기의 사상가
https://terms.naver.[...]
[63]
서적
Revolutionary Origins of Modern Japan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1-00-00
[64]
서적
한 권으로 보는 일본사 101 장면
가람기획
1998-11-20
[65]
서적
한 권으로 보는 일본사 101 장면
가람기획
1998-11-20
[66]
서적
草莽論
ちくま学芸文庫
2018-00-00
[67]
서적
吉田松陰全集1
岩波書店
[68]
서적
이탁오 평전
글항아리
2022-00-00
[69]
뉴스
(특파원 칼럼) 요시다 쇼인과 아베 신조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6-09-24
[70]
서적
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
지혜나무
2014-00-00
[71]
서적
일본사를 움직인 100인
https://100.daum.net[...]
청아출판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