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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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는 마쓰다이라 씨의 분가로, 마쓰다이라 지카우지의 서장자 마쓰다이라 노부히로를 초대 당주로 한다. 마쓰다이라 씨가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한 것과 달리, 마쓰다이라 향을 다스리는 토호에 머물렀다. 에도 시대에는 하타모토 신분으로 도쿠가와 쇼군 가를 배출한 마쓰다이라 씨의 직계 가문으로서 특별 대우를 받았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가계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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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지카사다는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문 출신으로, 마쓰다이라 노부카즈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상속받아 마쓰다이라 종가의 수장이 되었으며, 1713년 사망 후 아들 마쓰다이라 노부토시가 뒤를 이었다. -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씨 - 마쓰다이라 노부히로 (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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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가 | |
---|---|
기본 정보 | |
가명 |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가 |
가문 문장 | 、오삼동(五三桐) |
본성 | 칭・가모 씨(賀茂氏) 칭・아리와라 씨(在原氏) 칭・세이와 겐지(清和源氏)요시시게 류(義重流) 칭・후지와라 씨(藤原氏) |
시조 | 마쓰다이라 노부히로 |
종별 | 무가(武家) 사족(士族) |
출신지 | 미카와 국(三河国)가모 군)마쓰다이라 향(松平郷) |
근거지 | 미카와 국(三河国)가모 군)마쓰다이라 향(松平郷) |
주요 인물 | 마쓰다이라 노부히로(松平信博) |
2. 역사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문은 마쓰다이라 종가의 시조로 알려진 마쓰다이라 지카우지의 서장자 노부히로를 실질적인 시조로 본다. 노부히로의 동생인 마쓰다이라 노부미쓰가 평야 지역으로 진출하며 누카타군 이와즈 향(현 오카자키시 이와즈 정)으로 거점을 옮길 때, 본래 마쓰다이라 씨의 영지였던 산간의 마쓰다이라 향은 노부히로에게 양도되었다. 이로써 노부미쓰 계통의 안쇼 마쓰다이라 가(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출한 가문)에서 분가하여 노부히로 계통의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가 성립되었다. 처음에는 본래 영지를 계승했기에 적종가로 여겨졌을 수 있으나, 안쇼 마쓰다이라 가가 성장하면서 서종가로 불리게 되었다.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문은 평야로 진출하여 센고쿠 다이묘로 발전한 안쇼 마쓰다이라 가와 달리, 마쓰다이라 향만을 다스리는 토호 수준에 머물렀다. 16세기에는 주변의 오규 마쓰다이라 가의 영향 아래 놓일 정도로 세력이 약했으며, 당시 미카와 국의 유력 마쓰다이라 가문을 일컫는 18 마쓰다이라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에도 시대에는 440석 정도의 하타모토 신분이었으나, 도쿠가와 쇼군 가의 발상지인 마쓰다이라 향을 계속 소유하고 있었고, 시조 마쓰다이라 지카우지의 직계라는 점 때문에 특별 대우를 받았다. 고타이요리아이로서 다이묘급의 산킨코타이를 행하는 가문으로 인정받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가문은 단절되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이쇼·쇼와 초기의 당주 마쓰다이라 노부히로는 영화음악 작곡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2. 1.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의 성립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문의 실질적인 초대 당주는 마쓰다이라 종가의 시조로 알려진 마쓰다이라 지카우지(親氏, 14세기 후반 활동)의 장자로 여겨지는 마쓰다이라 노부히로(信広)이다. (《송평태랑좌위문가16대신고년대각서(松平太郎左衛門家16代信古年代覚書)》에서는 대수를 지카우지를 시작으로 계산하고 있다.)노부히로의 동생으로 여겨지는 마쓰다이라 씨 3대 당주 마쓰다이라 노부미쓰(信光)가 영지를 미카와 국 평야 지역으로 확장하여 누카타군 이와즈 향(岩津郷, 현재 오카자키시 이와쓰정)으로 거점을 옮겼다. 이때 마쓰다이라 씨의 본래 영지였던 산간 지역의 마쓰다이라 향은 장남인 노부히로에게 양도되었다. 이로써 노부미쓰 계통의 안쇼 마쓰다이라 가(安祥松平家,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마쓰다이라 종가, 이와즈 마쓰다이라 가[2]라고도 불림)에서 노부히로 계통의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고모토 마쓰다이라 가[1])가 분가하여 성립되었다. 다만, 이 가문이 서종가(庶宗家)라고 불리게 된 것은 분가인 안쇼 마쓰다이라 가(도쿠가와 씨)가 크게 성장한 이후의 일이다. 본래 영지를 계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초기에는 명실상부한 적종가(嫡宗家)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있다.
노부히로는 지카우지의 장인인 마쓰다이라 노부시게(信重)까지 마쓰다이라 향 영주들이 대대로 칭해 온 통칭인 '타로 자에몬노조(太郎左衛門尉)'를 계승하여 '마쓰다이라 타로자에몬(松平太郎左衛門)'이라 칭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가문은 '고모토 마쓰다이라 가'[1] 외에 '마쓰다이라 타로자에몬 가'라고도 불린다. 노부히로 이후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의 당주들은 대대로 '마쓰다이라 타로자에몬'을 통칭으로 사용하며 마쓰다이라 향을 계승했다.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문은 마쓰다이라 씨의 종가에 해당하지만, 평야 지역으로 진출한 안쇼 마쓰다이라 가가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로 발전한 것과 달리, 마쓰다이라 향만을 다스리는 토호(土豪)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6세기에는 인근 지역을 다스리던 마쓰다이라 씨의 일파인 오규 마쓰다이라 가(大給松平家)의 영향력 아래 놓일 정도로 세력이 약했으며, 당시 미카와 각지에서 번성했던 마쓰다이라 씨의 주요 가문들을 일컫는 '18 마쓰다이라(十八松平)'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이후 당주들은 안쇼 마쓰다이라 가의 마쓰다이라 지카타다(親忠), 마쓰다이라 키요야스(清康), 마쓰다이라 히로타다(広忠)를 섬겼으나, 3대에 걸쳐 당주가 전사하는 비운을 겪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긴 마쓰다이라 요시시게(尚栄) 역시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후로는 전장에 나가지 않고 마쓰다이라 향에서 은거했다.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으로 이봉될 때 마쓰다이라 향은 다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의 영지가 되었다.
에도 시대에 들어 요시시게의 아들 나오이에(直栄)는 1613년 이에야스를 배알하고 마쓰다이라 향 210석을 다시 하사받았다. 오사카 전투 이후에는 하야시조에 촌(林添村) 230석이 추가되어 총 440석을 영유하는 하타모토(旗本)가 되었다. 이때 과역(課役)을 면제받고, 매년 초 영지에서 에도로 참근(参勤)하도록 명받았는데, 이는 고타이요리아이(交代寄合)의 지위에 해당한다. 비록 석고는 적었지만, 도쿠가와 쇼군 가 발상지인 마쓰다이라 향을 대대로 영유해왔고 쇼군 가의 시조인 마쓰다이라 지카우지의 직계 가문이라는 점 때문에 특별한 격식을 인정받아 산킨코타이(参勤交代)를 행하는 다이묘 수준의 대우를 받은 것이다. 나오이에의 아들 노부마사(信正)는 가모 군 내에 200석을 하사받았지만, 아버지를 앞서 죽었다. 노부마사의 동생 노부카즈(信和)는 아버지의 유령(遺領)을 계승하여, 요리아이(寄合)가 되었다. 그러나 에도에 저택을 하사받지는 못하여, 에도에 머물 때는 분가인 에도 재부 하타모토의 마쓰다이라 지로자에몬 가[3] 또는 오쿠도노(奥殿)의 오규 마쓰다이라 씨 저택에 식객으로 머물렀다.
이처럼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는 메이지 유신 때까지 마쓰다이라 향을 영유하며 가늘고 길게 가명을 이어왔고, 그 명맥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이쇼·쇼와 초기의 당주 마쓰다이라 노부히로(松平信博)는 영화음악과 반주음악 작곡가로 활동했으며, 2007년에 사망한 당주 마쓰다이라 히로히사(松平宙史)는 다이이치칸교 은행 상무를 지냈다[5].
2. 2. 센고쿠 시대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문은 마쓰다이라 씨의 종가[1]에 해당하지만, 평야부로 진출한 이와쓰 마쓰다이라 씨(안쇼 마쓰다이라 가 또는 이와쓰 마쓰다이라 가[2])의 흐름이 센고쿠 다이묘로 발전해 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마쓰다이라 향만을 다스리는 토호 수준에서 더 성장하지 못했다. 16세기에는 주변 지역을 다스리던 마쓰다이라 씨의 일파인 오규 마쓰다이라 가의 영향력 아래 놓일 정도로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당시 미카와 각지에서 번성했던 마쓰다이라 씨의 주요 가문들을 일컫는 "18 마쓰다이라"에도 포함되지 못했다.그 후 당주들은 안쇼 마쓰다이라 가의 마쓰다이라 지카타다, 마쓰다이라 키요야스,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를 섬겼으나, 3대에 걸쳐 연속으로 전사하는 비운을 겪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긴 당주 요시시게(吉重) 역시 전쟁에서 중상을 입은 후로는 전장에 나서지 않고 마쓰다이라 향에서 은거했다.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으로 영지를 옮기면서 마쓰다이라 향은 잠시 다나카 요시마사의 영지가 되었다. 요시시게의 아들 나오나가(直栄)는 게이초 18년(1613년)에 이에야스를 배알하고 마쓰다이라 향 210석을 다시 하사받았으며, 오사카 전투 이후에는 하야시조에 촌(林添村)의 230석을 추가로 받아 총 440석을 영유하게 되었다. 이때 과역(課役)을 면제받고, 매년 정해진 시기에 영지에서 에도로 참근하도록 명받았다(고타이요리아이). 나오나가의 아들 노부카즈(信和) 대에 이르러 하타모토 중에서도 요리아이세키(寄合席)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에도에 저택은 하사받지 못했고, 에도에 들어갈 때는 분가인 에도 재부 하타모토의 마쓰다이라 지로자에몬 가[3] 또는 오쿠도노의 오규 마쓰다이라 씨의 저택의 식객 취급을 받았다.
2. 3. 에도 시대
에도 시대에 들어섰을 때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의 영지는 250석 남짓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로 이봉되었을 때 마쓰다이라 향은 잠시 다나카 요시마사의 영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요시시게의 아들 나오에이가 게이초 18년(161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알하여 마쓰다이라 향 210석을 다시 하사받았고, 오사카 전투 이후에는 하야시조에 촌 230석을 추가로 받아 총 440석 남짓을 영유하는 하타모토가 되었다. 이때 과역을 면제받고, 세초마다 영지에서 에도로 참근하도록 명받았다 (교대 합류).비록 영지 규모는 440석 남짓의 하타모토 신분에 머물렀지만, 도쿠가와 쇼군 가 발상의 땅인 마쓰다이라 향을 계속 영유해왔다는 점과 쇼군 가의 시조인 마쓰다이라 지카우지의 직계 가문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격식을 갖추어 우대받았다. 이 가문은 고타이요리아이로서 다이묘 수준의 산킨코타이를 실시하는 집안으로 여겨졌다.
나오에이의 아들 노부마사는 가모 군 내에 200석을 하사받았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노부마사의 동생인 노부카즈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요리아이가 되었다. 그러나 에도에 별도의 저택을 하사받지는 못하여, 에도에 머물 때는 분가인 에도 재부 하타모토 마쓰다이라 지로자에몬 가[3] 또는 오쿠도노의 오규 마쓰다이라 씨 저택에 식객으로 머물렀다.
2. 4.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문은 단절되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이쇼·쇼와 초기의 당주였던 마쓰다이라 노부히로(松平信博)는 영화 음악과 반주 음악의 작곡가로서 활동했다. 2007년에 사망한 당주 마쓰다이라 히로히사(松平坦久)는 다이이치칸교 은행의 상무를 지냈다.[5]3. 역대 당주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문의 대수는 《마쓰다이라 타로자에몬 가 16대 노부토시 연대 각서(松平太郎左衛門家16代信古年代覚書)》에 따라 초대 마쓰다이라 지카우지부터 기산한다.[1]
대수 | 당주 이름 |
---|---|
초대 | 마쓰다이라 지카우지 |
2대 | 마쓰다이라 야스치카 |
3대 | 마쓰다이라 노부히로[4] |
4대 | 마쓰다이라 나가카츠[4] |
5대 | 마쓰다이라 카츠시게[4] |
6대 | 마쓰다이라 노부요시[4] |
7대 | 마쓰다이라 치카나가[4] |
8대 | 마쓰다이라 요시시게[4] |
9대 | 마쓰다이라 나오요시 |
10대 | 마쓰다이라 시게후사 |
11대 | 마쓰다이라 노부후사[4] |
12대 | 마쓰다이라 치카사다 |
13대 | 마쓰다이라 나오즈미[4] |
14대 | 마쓰다이라 치카스케[4] |
15대 | 마쓰다이라 노부노리[4] |
16대 | 마쓰다이라 노부유키[4] |
17대 | 마쓰다이라 노부히로 |
18대 | 마쓰다이라 요리사이 |
19대 | 마쓰다이라 노부히데 |
20대 | 마쓰다이라 노부히로 |
21대 | 마쓰다이라 구스오 |
22대 |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
23대 | 마쓰다이라 히데오 |
24대 | 마쓰다이라 히로히사[5] |
25대 | 마쓰다이라 데루오[6] |
3. 1. 1대 마쓰다이라 지카우지
마쓰다이라씨 종가의 초대 당주로 알려진 인물이다.[1] 활동 시기는 14세기 후반 무렵으로 추정된다. 《송평태랑좌위문가16대신고년대각서(松平太郎左衛門家16代信古年代覚書)》에서는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문의 대수를 마쓰다이라 지카우지부터 시작하여 계산하고 있다.[1] 후대의 도쿠가와 쇼군 가는 지카우지를 시조로 여겼다.[2]3. 2. 3대 마쓰다이라 노부히로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문의 실질적인 초대 당주는 마쓰다이라 종가의 초대 당주로 알려진 마쓰다이라 지카우지(14세기 후반 무렵)의 서장자 노부히로이다. (《송평태랑좌위문가16대신고년대각서(松平太郎左衛門家16代信古年代覚書)》에서는 대수를 지카우지를 시작으로 계산하고 있다.)노부히로의 동생으로 여겨지는 마쓰다이라 씨 3대 마쓰다이라 노부미쓰가 영지를 미카와국 평야 지역으로 확장하여 누카타군 이와즈 향(오카자키시 이와즈 정)으로 거성을 옮겼을 때, 마쓰다이라 씨의 본래 영지인 산간 지역의 마쓰다이라 향은 서장자인 노부히로에게 양도되었다. 이로 인해 적자인 노부미쓰 계통의 안쇼 마쓰다이라 가(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이어진 마쓰다이라 종가, 이와즈 마쓰다이라 가라고도 함)[2]에서 분가하여 노부히로 계통의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고모토 마쓰다이라 가[1])가 성립되었다. 다만, 서종가라고 불린 것은 안쇼 마쓰다이라 가가 성장한 이후의 일이며, 본래 영지를 계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초에는 명실상부한 적종가로 여겨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노부히로는 지카우지의 장인인 마쓰다이라 노부시게 때부터 대대로 마쓰다이라 향 영주가 칭해 온 '타로 자에몬노조'라는 통칭을 이어받아, 종가로서 '마쓰다이라 타로자에몬'을 칭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가문은 '고모토 마쓰다이라 가'[1] 외에 '마쓰다이라 타로자에몬 가'라고도 불린다. 노부히로 이후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의 당주들은 '마쓰다이라 타로자에몬'을 역대 통칭으로 삼아 대대로 마쓰다이라 향을 계승했다.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문은 마쓰다이라 씨의 종가에 해당하지만, 평야 지역으로 진출한 이와즈 마쓰다이라 씨 계통이 센고쿠 다이묘로 발전한 것과 달리, 마쓰다이라 향만을 다스리는 토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6세기에는 인근을 다스리던 마쓰다이라 씨의 일파인 오규 마쓰다이라 가의 영향력 아래 놓일 정도였으며, 당시 미카와 각지에서 번성했던 마쓰다이라 씨 일족을 일컫는 '18 마쓰다이라'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4. 계도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문의 실질적인 초대 당주는 친씨류 마쓰다이라 가문의 초대 마쓰다이라 지카우지 (14세기 후반)의 장남으로 여겨지는 노부히로이다 (『마쓰다이라 타로자에몬 가 16대 노부토시 연대 각서』에서는 대수 기산을 지카우지로 하고 있다).
노부히로의 동생으로 여겨지는 마쓰다이라 씨 3대 마쓰다이라 노부미쓰가 영지를 미카와 국 평야부로 확장하여 누카타 군 이와쓰 향 (오카자키시 이와쓰정)에 거성을 옮겼을 때, 마쓰다이라 씨의 원래 영지인 산간부의 마쓰다이라 향이 장자인 노부히로에게 양도되면서 적자인 노부미쓰 계통의 마쓰다이라 본종가 (안쇼 마쓰다이라 가 또는 이와쓰 마쓰다이라 가[2])에서 분가된 노부히로 계통의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 (고모토 마쓰다이라 가[1])가 성립되었다. 다만, 서종가라고 불리는 것은 분가의 하나인 안쇼 마쓰다이라 가 (도쿠가와 가)의 성장 이후이며, 원래의 영지를 계승한 것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명실공히 적종가로 여겨졌다고 생각된다.
노부히로는 지카우지의 장인인 마쓰다이라 노부시게까지 대대로 마쓰다이라 향 영주가 칭해온 "타로 자에몬노조"의 통칭을 계승하여 종가로서 "마쓰다이라 타로자에몬"을 칭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 가문의 별명은 "고모토 마쓰다이라 가"[1]와 함께 "마쓰다이라 타로자에몬 가"라고도 불린다. 노부히로 이후의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 당주는 "마쓰다이라 타로자에몬"을 역대 통칭으로 하여 대대로 마쓰다이라 향을 계승했다.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문은 마쓰다이라 씨의 종가에 해당하지만, 평야부로 진출한 이와쓰 마쓰다이라 씨의 흐름이 센고쿠 다이묘로 발전해 가는 것에 반해, 마쓰다이라 향만을 영하는 토호에서 발전하는 일은 없었다. 16세기에는 인근을 영하는 마쓰다이라 씨의 일파, 오규 마쓰다이라 가의 영향 아래에 들어갈 정도였으며, 당시 미카와의 각지에서 번성했던 마쓰다이라 씨의 일족을 칭하는 "18 마쓰다이라"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 후 당주는 안쇼 마쓰다이라 가의 마쓰다이라 지카타다,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를 섬기며, 3대 연속으로 전사했다. 이에야스에게 섬긴 요시시게 또한 전쟁에서 중상을 입어, 그 후에는 전장에 나가지 않고 마쓰다이라 향에 한거했다. 이에야스가 간토로 이봉되었을 때 마쓰다이라 향은 다나카 요시마사의 영지가 되었다. 요시시게의 아들 나오에이는 게이초 18년 (1613년)에 이에야스를 배알하여 마쓰다이라 향 210석을 하사받았고, 오사카 전투 이후에는 하야시조에 촌 230석을 가증받아, 총 440석을 영유하게 되었다. 이때 과역을 면제받고, 세초마다 영지에서 에도로 참근하도록 명해졌다 (교대 합류). 또한 아들 노부마사는 가모 군 내에 200석을 하사받았지만, 아버지를 앞서 죽었다[7]. 노부마사의 동생 노부카즈는 아버지의 유령을 계승하여, 요리아이가 되었다. 에도에 저택은 하사받지 못했고, 에도에 들어갈 때는 분가인 에도 재부 하타모토의 마쓰다이라 지로자에몬 가[3] 또는 오쿠도노의 오규 마쓰다이라 씨의 저택의 식객 취급을 받았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가늘고 길게, 메이지 유신까지 마쓰다이라 향을 영유했으며, 가명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쇼와 초기의 당주 마쓰다이라 노부히로는 영화 음악의 작곡가로 활약했다. 2007년에 사망한 당주 마쓰다이라 히로히사는 다이이치칸교 은행 상무를 역임했다[5].
참조
[1]
문서
松平郷が旧西加茂郡挙母町(現豊田市)域に存在したことから、近代以後の郷土史家が呼称。松平郷松平家が旧・挙母町の中心集落となった加茂郡挙母郷を領有した歴史的事実はない。
[2]
서적
徳川家康に連なるのは安祥松平家だが、安祥家は分家で信光系の本来の惣領は岩津家とする説もある
新編岡崎市史
[3]
문서
由重の弟の松平重正から分かれた家。のち、重和の娘が次郎左衛門家の信久に嫁ぎ、信久の子の松平親貞は本家に養子に迎えられた。
[4]
서적
寛政重修諸家譜
[5]
뉴스
松平弘久氏死去 元第一勧業銀行常務
http://www.47news.jp[...]
全国新聞ネット
2007-11-06
[6]
간행물
三河松平郷 松平東照宮 権現祭り視察ツアー
http://www.jepc.com/[...]
日本イベントプロデュース協会
2012-04
[7]
문서
旗本・鈴木重次五男
[8]
문서
마쓰다이라 향이 옛 니시카모 군(西加茂郡) 고로모 정(현 도요타 시) 지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인해서 근대 이후의 향토사가가가 붙인 호칭이다. 그러나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가 옛 고로모 정의 중심이 집결된 가모 군 고로모 향을 영유한 역사적 사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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