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히로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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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는 미카와 마쓰다이라 씨족의 7대 당주로, 1526년에 태어나 1549년에 사망했다. 그는 어린 시절 센쇼마루, 센치요, 지로자부로로 불렸으며, 아버지 기요야스가 암살된 후 가신들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이마가와 씨족과의 동맹을 통해 오카자키 성에 자리 잡았으나, 오다 씨족과의 갈등을 겪었다. 그는 오다이노카타와 결혼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낳았으며, 이후 이혼 후 재혼했다. 히로타다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으며, 사후 그의 아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대납언의 지위가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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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히로타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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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
일본어 표기 | 松平 広忠 |
로마자 표기 | Matsudaira Hirotada |
출생 | 1526년 6월 9일 |
사망 | 1549년 4월 3일 |
사망 장소 | 아이치현오카자키시 |
별명 | 센마쓰마루 (千松丸, 유년기 이름) 다케치요 (竹千代, 유년기 이름) 센치요 (仙千代, 유년기 이름) 지로사부로 (次郎三郎, 통칭) 사부로 (三郎, 통칭) 오카자키 사부로 (岡崎三郎, 통칭) |
계명 | 오세이도칸다이고지 (応政道幹大居士) |
묘소 | 아이치현오카자키시가모다정의 다이주지 외 |
증정 관위 | 증 종2위대납언 |
가문 정보 | |
씨족 | 마쓰다이라 씨 |
아버지 |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
어머니 | 아오키 지쿠고노카미의 딸 하루히메 |
배우자 | 정실: 미즈노 오다이 (미즈노 다다마사의 딸) 계실: 마키히메 (도다 야스미쓰의 딸) |
자녀 | 다다마사 에사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치바히메 (아라카와 요시히로의 아내) |
관직 | |
직책 | 마쓰다이라 씨 당주 |
이전 |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
이후 | 도쿠가와 이에야스 |
임기 시작 | 1535년 |
임기 종료 | 1549년 |
군사 정보 | |
충성 | 이마가와 씨 |
부대 | 마쓰다이라 씨 |
지휘 | 오카자키 성 |
전투 | 안조 성 공방전 (1540년) 아즈키자카 전투 (1542년) 아즈키자카 전투 (1548년) |
2. 생애
마쓰다이라 기요야스의 아들로 태어난 히로타다는 어린 시절 센쇼마루, 센치요, 지로자부로 등으로 불렸다. 1535년 아버지 기요야스가 암살된 후, 충신 아베 사다요시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이마가와 씨와 동맹을 맺고 오카자키 성을 거점으로 삼았으나, 이는 오다 씨와의 갈등을 불러왔다.
1540년, 오다 노부히데가 안조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히로타다는 미즈노 타다마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1541년에는 미즈노 타다마사의 딸 오키치와 결혼하여 이듬해 아들 마쓰다이라 다케치요를 얻었다.
1542년,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함께 제1차 아즈키자카 전투에 참전했으나 오다 노부히데에게 패배했다. 1543년에는 삼촌 마쓰다이라 노부타카가 오다 노부히데에게 가담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544년에는 장인 미즈노 타다마사와의 불화로 오키치와 이혼하고, 도다 야스미쓰의 딸 마키히메와 재혼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다이에이 6년(1526년) 4월 29일, 히로타다는 미카와 마쓰다이라 씨족의 7대 당주 마쓰다이라 기요야스의 아들로 태어났다.[4][5]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6][7] 어린 시절에는 '''센쇼마루''', '''센치요''', '''지로자부로''' 등으로 불렸다. 유년기의 이름은 '''다케치요'''라고 전해지지만, 다른 설도 여럿 전해진다.[15]덴분 4년(1535년), 히로타다가 10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가 가신인 아베 마사토요에게 살해당하는 사건(모리야마 붕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히로타다가 사실상 가독을 상속받아 안쇼 마쓰다이라 가문 제4대 당주가 되었다. 가독 상속 직후,[16] 오다 노부히데가 미카와를 침공했다. 오다 군은 총 8천 명, 마쓰다이라 군은 700[17]~800[18]명 정도였으며, 숙부인 마쓰다이라 야스다카가 지휘를 맡았다. 마쓰다이라 군은 고리키 시게나가[19] 등 많은 이들이 전사했지만, 오다 군도 고전하여 결국 화의를 맺었다(이다노 전투).
무라오카 미키오는 "마쓰다이라기(松平記)"에서는 오다 군이 마쓰다이라 노부사다를 당주로 옹립하기 위해 출병했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화의를 맺었다고 기록하면서, 그 직후 노부사다가 오카자키에 입성한 것으로 되어 있어 전투 기사 자체가 허구라고 주장한다.[20]
2. 2. 오카자키 성 추방과 귀환
히로타다는 큰아버지인 사쿠라이 마쓰다이라 당주 마쓰다이라 노부사다와 대립하여 안쇼 마쓰다이라 가문의 가독을 위협받았다. 덴분 4년(1535년)경, 노부사다는 본거지 오카자키 성을 점령했고, 히로타다는 추방되었다.[16] 히로타다는 중신 아베 사다요시 등과 함께 기라 모치히로에게 의지하여 도망쳤다. '미카와 이야기' 등에 따르면, 이세 국 고베로 도망쳤다고 한다.히로타다는 기라 모치히로의 보호 아래에서 원복(성인식)을 치르고, 모치히로에게서 한 글자를 하사받아 '''히로타다'''로 개명했다.[21] 히로타다는 기라 모치히로를 통해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도토미 국 가케즈카를 거쳐 미카와 국 무로 성에 들어갔다.[21]
이 사이에, 후다이 가신들이 히로타다의 오카자키 성 귀환을 바라고 있었고, 아베 사다요시와 오쿠보 다다토시 등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여러 책에서 엿보인다. 숙부 마쓰다이라 노부타카도 히로타다를 지원하는 방침이었던 듯하며, 오쿠보 등과 함께 히로타다의 귀환을 지원하고 있다.[25] 덴분 연간에 히로타다는 노부사다로부터 오카자키 성을 탈환했다.
2. 3. 오다 가문과의 항쟁
히로타다의 후반생은 미카와로 진공하는 오다 씨와의 싸움으로 점철되었다. 덴분 9년(1540년), 오다 군이 안쇼 성으로 침공하여 6월에 합전이 벌어졌다(제1차 안쇼 전투).[26] 이 전투에서 성주 대리인 마쓰다이라 나가이에가 전사했다(자결이라는 설도 있다).《간에이 제씨계도전(寛永諸家系図伝)》에는 오다 가문에 의한 안쇼 공격에 대한 기술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안쇼 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마쓰다이라 도시나가, 마쓰다이라 다다쓰구 등이 방어하여 적이 물러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쇼 성 함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어느 쪽이든 서미카와에서의 오다 씨의 세력은 확대되고 있었던 듯하다.
덴분 10년(1541년), 미즈노 다다마사의 딸인 오다이노 가타와 혼인했다.
덴분 11년(1542년),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미카와에서 오다 씨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고, 오다 노부히데도 이에 대항하기 위해 병사 4천 명을 이끌고 안쇼로 출진하여 8월에 양측이 격돌했다(제1차 아즈키자카 전투). 이 전투에서 오다 노부히데가 승리했다.(다만, 이 싸움에는 허구설도 있다.)
같은 해 12월 26일, 적남(嫡男)인 다케치요(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탄생했다.
《간세이후(寛政譜)》에 따르면, 히로타다는 마쓰다이라 노부타카를 중용했지만 권세를 휘두르며 방자해져, 마쓰다이라 지카나가나, 동생 야스다카의 유령(遺領)을 빼앗았다. 그리고 "오카자키의 노신들"이 노부타카의 횡포를 경계했다고 한다. 히로타다는 노부타카가 이마가와 씨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간 틈을 타 처자식과 가신을 오카자키에서 추방하고, 덴분 12년(1543년)경, 노부타카는 가미와다 성주인 마쓰다이라 다다미치, 사카이 다다나오 등과 함께 오다 노부히데와 통하여 모반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안쇼에서 오다 세력과 합전했으며, 노부타카와도 싸웠다.
오다이노 가타의 형이자 미즈노 씨 당주인 미즈노 노부모토는, 덴분 13년(1544년)에 이마가와 씨와 절연하고 오다 씨에게 붙었다. 이 때문에 히로타다는, 같은 해 9월에 이마가와 씨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오다이노 가타와 이혼했다. 덴분 14년(1545년)에는 사쿠라이 마쓰다이라 가문의 마쓰다이라 기요사다·이에쓰구 등을 공격했다.(히로하타노와테 전투)
덴분 14년(1545년) 9월, 오다 씨의 영향 아래에 있던 안쇼 성에 침공했지만 패배하여, 혼다 다다토요가 대신하여 전사했다.
히로타다는 오다 씨의 미카와 침공에 대항하는 대가로 다케치요를 인질로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도다 야스미쓰의 배신으로 다케치요는 오다 측에 납치되었다.
2. 4. 최후
天文일본어 18년(1549년) 3월 6일에 히로타다는 사망했다.[41] 『오카자키 시사 별책』에는 3월 10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다른 사료에 나타나지 않아 오기로 추정된다.[42]히로타다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설 | 주요 내용 및 근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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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설 | "미카와 이야기", "마쓰다이라기" 등에서 주장.[41] "무덕대성기", "이에타다 일기 증보", "창업기 고이", "열조성적", "도쿠가와 실기", "조야구문포갈" 등도 병사설을 지지함. |
이와마쓰 야야 암살설 | "오카자키 영주 고기"에서 주장.[41] 『오카자키 시사 별책』도 이 설을 채택함. 아케치 겐자부로는 오다 노부히데가 배후에서 조종했을 가능성을 제기.[41] |
반란으로 인한 암살설 | "미카와 도센기"에서 주장. 덴분(天文) 18년 3월, 히로타다가 매사냥을 나갔을 때 "오카자키 영분 와타리 마을의 반란"이 일어났다고 기록. 오다 노부히데의 계략이라고도 함.[41] |
한쪽 눈 야하치 암살설 | "미카와 도센기"에서 주장. 히로타다가 오카자키성에 있을 때, 한쪽 눈 야하치가 무라마사 칼로 살해했고, 가미무라 신로쿠가 야하치를 처단했다는 내용.[41] |
(1544년 이혼)
무라오카 간키는 『마쓰다이라기』에서 이와마쓰 야야의 습격 자체는 인정하지만, 습격과 히로타다의 죽음을 직접 연결하는 사료는 후대에 편찬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오다 노부히데가 관여했다 하더라도 당시 오다 측에 있던 다케치요를 이용하지 않은 점이 부자연스럽다며, 이와마쓰 야야의 습격과 히로타다의 죽음은 인과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즉, 병사설에 의문을 제기할 이유가 없다고 하며 암살설을 부정한다.[42]
최근 역사 드라마에서는 마쓰다이라 가문의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암살설을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 NHK 대하 드라마 "도쿠가와 이에야스"(1983년)와 "어떻게 할까 이에야스"(2023년)에서도 암살설을 채택했다.
3. 가족 관계
오다이노 카타 1528년 1602년 10월 13일 미즈노 타다마사,
오토미노 카타1541년 결혼, 154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출산,[40] 1544년 이혼. 두 번째 부인 마키히메 도다 야스미쓰 오다이노 카타와 이혼 후 재혼. 측실 오히사노 카타 오규-마쓰다이라 가문
마쓰다이라 노리마사측실 히라하라 씨족 측실 오미유노 카타 측실 나이토 씨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