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키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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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우리키우스는 6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는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 황제가 되었으며, 페르시아 내분 기회를 활용하여 호스로 2세를 복위시키고 동방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롬바르드족과 아바르족에 맞서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에 총독부를 설치하는 등 서방 정책도 추진했다. 그러나 긴축 정책과 군사적 무리수로 인해 군대의 반란을 초래하여 폐위된 후 처형되었고, 그의 죽음은 동로마 제국에 혼란을 가져왔다. 그는 군사 및 행정 개혁을 통해 제국의 기틀을 다졌으며, 저서 《스트라테지콘》은 군사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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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키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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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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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우리키우스 |
로마자 표기 | Mauricius |
재위 기간 | 582년 8월 13일 – 602년 11월 27일 |
공동 황제 | 테오도시우스 (590–602) |
이전 | 티베리우스 2세 |
이후 | 포카스 |
출생 | 539년 |
출생지 | 카파도키아 아라비수스 (현재의 튀르키예 카흐라만마라슈 주 아프신) |
사망 | 602년 11월 27일 (63세) |
사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현재의 튀르키예 이스탄불) |
매장지 | 성 마마스 수도원 |
배우자 | 콘스탄티나 |
가족 | |
자녀 | 마리아 테오도시우스 티베리우스 issue_link: '#Family' issue_pipe: '외 다수' |
아버지 | 파울루스 |
정치 | |
전체 이름 (588년 이전) | 티베리우스 마우리키우스 |
전체 이름 (588년 이후) | 마우리키우스 노부스 티베리우스 |
칭호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마우리키우스 노부스 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 |
종교 | 칼케돈 기독교 |
2. 생애
카파도키아 출신의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티베리우스 2세의 사위로, 582년 티베리우스 2세가 죽으면서 후계자로 지명되어 황제가 되었다.[17] 즉위 후에도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하여 우위를 점했다.
- '''황제 즉위 (582년):''' 티베리우스 2세의 건강 악화로 카이사르에 임명된 후, 그의 사위로서 황제 자리에 올랐다.
- '''페르시아와의 전쟁 (582년 ~ 591년):''' 즉위 후 지속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호스로 2세를 지원하여 591년 비잔티움에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마무리했다.[21]
- '''발칸 반도에서의 군사 작전 (591년 이후):''' 페르시아와의 휴전 이후,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을 공격하여 602년 아바르족을 제국 편으로 만드는 성과를 거두었다.[22]
- '''서방 정책:''' 롬바르드족의 침입으로 피폐해진 이탈리아에 라벤나 총독령을 설치하고,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도 총독령을 설치하여 제국의 행정 체계를 개편했다.[1] 이는 훗날 테마제도의 토대가 되었다.


- '''종교 정책:''' 단성론에 관대했지만, 칼케돈 공의회의 지지자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와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세계 총대주교' 칭호 사용 문제로 충돌했다.[23]
- '''긴축 정책과 군사적 무리수:''' 티베리우스 2세의 낭비로 인한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긴축 정책을 펼쳤으나, 이는 병사들과 신민들의 반발을 샀다.[23] 588년 군사 임금 삭감 발표로 페르시아 전선에서 병사들의 반란이 일어났고,[23] 599년에는 아바르족에게 포로로 잡힌 비잔틴 군인들의 몸값 지불을 거부하여 포로들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23]
- '''몰락과 죽음 (602년):''' 계속되는 자금 부족으로 군대에 다뉴브강 너머에서 겨울을 나도록 명령했으나, 지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포카스가 이끄는 반란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했고, 마우리키우스는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26]
포카스가 황제로 즉위했지만, 사위인 호스로 2세는 장인인 마우리키우스의 원수를 갚는 것을 대의명분으로 출병하여 비잔틴-사산 전쟁이 시작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카파도키아 출신의 장군으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539년 카파도키아의 아라비소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바울이었다. 그는 형제 페트루스와 누이 테옥티스타와 고르디아를 두었는데, 고르디아는 나중에 장군 필리피쿠스와 결혼했다.[3][4] 그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 디코루스 이후 황제들과는 달리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했다.[3][4]처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노타리우스로 와서 티베리우스의 비서로 일했는데, 티베리우스는 당시 황실 근위대인 엑스큐비토르의 사령관(코메스 엑스큐비토룸)이었다. 574년 티베리우스가 카이사르로 임명되자 마우리키우스는 그의 뒤를 이어 코메스 엑스큐비토룸으로 임명되었다.
577년 말, 군 경력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 동부 군대의 총사령관인 ''마기스테르 밀리툼 오리엔템''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진행 중이던 전쟁에서 사산 제국에 맞서 유스티니아누스 장군의 뒤를 이었다. 동시에 제국의 최고 명예 칭호인 ''파트리키오스'' 계급으로 승진했다.
578년 메소포타미아에서의 휴전이 끝나고, 마우리키우스는 티그리스 강 양쪽에서 공격을 감행하여 아푸몬 요새를 점령하고 싱가라를 약탈했다. 580년, 비잔틴의 아랍 동맹국인 가산 왕조는 사산 왕조의 아랍 동맹국인 라흐미드족에 승리했으며, 비잔틴의 습격은 다시 티그리스 강 동쪽으로 침투했다.
581년, 알-문디르 3세 휘하의 가산 왕조 군대의 지원을 받은 마우리키우스의 작전은 크테시폰을 목표로 했다. 연합군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아나타 요새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베트 아라마예 지역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유프라테스 강 위의 다리가 페르시아인에 의해 파괴된 것을 발견했다.
마우리키우스의 진격에 대응하여, 사산 제국의 장군 아다르마한은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작전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다르마한은 오스로에네를 약탈했고, 수도인 에데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그는 군대를 유프라테스 강에 있는 칼리니쿰으로 진격시켰다. 마우리키우스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후퇴는 지친 군대에게 고된 과정이었다. 마우리키우스와 알-문디르는 원정 실패에 대해 서로 비난을 주고받았으나, 칼리니쿰에서 아다르마한을 격파했다.
알-문디르는 마우리키우스로부터 반역 혐의를 받았다. 마우리키우스는 알-문디르가 비잔틴의 계획을 페르시아인들에게 알려주었고, 그들이 유프라테스 강 위의 다리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연대기 작가 요한 에페소스는 이 주장이 거짓이라고 명시했다.
마우리키우스와 알-문디르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편지를 썼고, 황제는 그들을 화해시키려 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직접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여 알-문디르의 유죄를 티베리우스에게 설득했다. 알-문디르는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고, 이는 비잔틴과 가산 왕조 사이에 전쟁을 촉발했다.
582년 6월, 마우리키우스는 콘스탄티나 근처에서 아다르마한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달, 티베리우스 황제는 병에 걸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티베리우스는 두 명의 후계자를 지명했는데, 마우리키우스는 콘스탄티나와 약혼했고, 게르마누스는 카리토와 결혼했다. 계획은 제국을 둘로 나누는 것이었으나, 니키우의 요한에 따르면 게르마누스는 왕좌를 거절했다. 8월 5일, 티베리우스는 마우리키우스를 ''카이사르''로 지명하고 "티베리우스"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마우리키우스는 8월 13일 황제로 대관되었다. 티베리우스는 마우리키우스를 ''아우구스투스''와 왕좌의 유일한 후계자로 선언했고, 8월 14일 사망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유일한 황제가 되었고, 가을에 콘스탄티나와 결혼했다.
2. 2. 황제 등극과 통치
카파도키아 출신의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티베리우스 2세의 사위로, 582년 티베리우스 2세가 죽으면서 후계자로 지명되어 황제가 되었다.[17] 즉위 후에도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하여 우위를 점했다.588년 제국 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2년 이상 페르시아와 싸웠다. 그 와중에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내전이 일어나 호르미즈드 4세가 살해당하고 그의 아들 호스로 2세가 비잔티움으로 피신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호스로 2세를 지원하여 591년 비잔티움에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마무리했다.[21]
페르시아와의 휴전으로 여유가 생기자, 마우리키우스는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을 공격하여 602년 아바르족을 제국 편으로 만드는 성과를 거두었다.[22]
서방에서는 롬바르드족의 침입으로 피폐해진 이탈리아에 새로운 행정기구를 세우고 라벤나에 총독을 임명했다. 또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도 총독령으로 만들었다. 이 두 총독령(''exarchate'')의 민간행정기구는 군 장교들이 장악했는데, 이는 훗날 비잔티움 제국의 테마제도의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1]
종교적으로는 단성론에 관대했지만, 칼케돈 공의회의 지지자였다. 그는 롬바르드족으로부터 로마를 방어하려던 교황 그레고리오 1세와 충돌했다.[23]
2. 2. 1. 동방 정책
마우리키우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황제가 된 이후에도 우위를 점했다. 588년 제국 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제국군은 2년 이상 페르시아와 싸웠다.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내전이 일어나 호르미즈드 4세가 살해당하고 그의 아들 호스로 2세가 비잔티움으로 피신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호스로 2세를 지원하여 591년 비잔티움에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마무리했다.[21]590년, 파르티아 형제인 비스탐과 빈두이는 호르미즈드 4세를 몰아내고 호스로 2세를 왕으로 만들었다. 전 페르시아 사령관 바흐람 쵸빈은 호르미즈드 4세에 반란을 일으킨 후 왕좌를 차지하겠다고 주장하며 호스로를 격파했다. 호스로와 두 파르티아인은 비잔틴 궁정으로 도망쳤다. 상원은 만장일치로 반대했지만, 마우리키우스는 호스로가 3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왕좌를 되찾도록 도왔다. 591년 존 미스타콘과 나르세스 장군 휘하의 비잔틴-페르시아 연합군은 블라라톤 전투에서 간자크 근처에서 바흐람 쵸빈의 군대를 격파했다. 승리는 결정적이었고, 마우리키우스는 호스로의 재즉위로 마침내 전쟁을 성공적으로 종결시켰다.[21]
그 후, 호스로는 동맹을 맺기 위해 황제에게 입양되었다. 그러나 비잔틴 주교들은 호스로를 개종시키는 데 실패했다.[21] 호스로는 서부 아르메니아를 반과 세반까지, 마르티로폴리스, 티그라노케르트, 만지케르트, 아니, 예레반을 포함한 주요 도시를 제국에 할양함으로써 마우리키우스에게 보상했다. 마우리키우스의 조약은 동부 지역에 새로운 현상 유지를 가져왔다. 비잔틴은 제국이 이전에 달성한 적이 없는 정도로 확장되었다. 새로운 "영구적 평화" 기간 동안 페르시아에 대한 공물을 면제함으로써 수백만 개의 솔리두스가 절약되었다.[21]
2. 2. 2. 서방 정책
마우리키우스는 롬바르드족의 침입으로 피폐해진 이탈리아에 새로운 행정기구를 세우고 라벤나에 총독을 임명했다. 또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도 총독령으로 만들었다. 이 두 총독령(''exarchate'')의 민간행정기구는 군 장교들이 장악했는데, 이는 나중에 비잔티움 제국에서 운영한 테마제도의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1]579년 서고트 왕국에서 내란이 발생하자, 마우리키우스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헤르메네길드 왕자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서고트 왕 레오비길드에게 30,000 솔리두스를 받고 헤르메네길드를 버렸다. 이후 헤르메네길드의 처자(잉군드·아타나길드 모자)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했다. 잉군드는 도중에 사망했고, 아타나길드만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동로마 궁정에서 양육되었다.[1]
아타나길드는 프랑크 왕국의 분국 아우스트라시아와의 외교 교섭에 등장하기도 했다. 잉군드가 아우스트라시아 왕 지기베르트 1세와 왕비 브룬힐트의 장녀였고, 브룬힐트 자신도 서고트 왕 아타나길드의 차녀였기 때문이다.[1]
후에 아타나길드는 마우리키우스의 조카 플라비아 율리아나와 결혼하여 아들 알데발트를 낳았다. 알데발트는 훗날 서고트 왕으로 즉위하는 에르비그의 아버지이다.[1]
2. 2. 3. 종교 정책
58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요한네스 4세 네스테우테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구가 ‘세계 총대주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교황 펠라지오 2세와 대립하였다. 2년 뒤에는 더욱 강력한 교황인 교황 그레고리오 1세와 대립하였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마우리키우스에게 요한네스 4세를 징계하라고 요청하였으나 황제는 이를 거절하고 로마 교황과 대립하였다.2. 3. 긴축 정책과 군사적 무리수
티베리우스 2세의 낭비로 국고가 줄어들어 어려움을 겪은 마우리키우스는 예산 절감을 위해 긴축 정책을 폈다. 그러나 지나친 긴축 정책은 병사들과 신민들의 인기를 잃게 만들었다.[23]588년의 군대 폭동과 599년의 아바르족 포로 학살 사건은 모두 마우리키우스의 긴축 정책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588년에는 군사 임금을 4분의 1 삭감한다고 발표하여 페르시아 전선에서 병사들의 심각한 반란을 초래했다.[23] 599년에는 아바르족에게 포로로 잡힌 12,000명의 비잔틴 군인을 해방시키기 위한 작은 몸값 지불을 거부하여 포로들이 살해되기도 했다. 포카스라는 장교가 이끄는 항의하는 군사 대표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굴욕을 겪고 거절당했다.[23]
2. 4. 몰락과 죽음
602년, 마우리키우스는 계속되는 자금 부족으로 군대에 다뉴브강 너머에서 겨울을 나도록 명령했다. 지친 병사들은 황제의 명령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마우리키우스는 상황 판단을 잘못했는지, 병사들에게 겨울 숙영지로 돌아가는 대신 새로운 공세를 시작하라고 거듭 명령했다. 병사들은 마우리키우스가 더 이상 군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하사관(백인대장) 포카스를 지도자로 추대했다.[26] 이들은 마우리키우스가 퇴위하고 그의 아들 테오도시우스나 장군 게르마누스를 후계자로 선포할 것을 요구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황제는 가족들을 데리고 니코메디아로 향하는 전함으로 도시를 떠났다. 테오도시우스는 페르시아인들의 지원을 구하도록 지시받고 육지에 내려졌지만,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포카스는 11월에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여 황제로 즉위했다. 그의 군대는 마우리키우스와 그의 남은 가족을 생포하여 칼케돈의 에우트로피우스 항구로 데려갔다.[26]마우리키우스는 602년 11월 27일 에우트로피우스 항구에서 살해되었다. 폐위된 황제는 자신의 다섯 어린 아들이 처형되는 것을 지켜본 후, 스스로 참수되었다.[26]
황후 콘스탄티나와 그녀의 세 딸은 잠시 목숨을 부지하여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몇 년 후, 콘스탄티나가 포카스에 대한 음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자 이들 모두 에우트로피우스 항구에서 처형되었다. 마우리키우스와 콘스탄티나의 일가족 전체는 마우리키우스의 누이 고르디아가 세운 성 마마스 수도원 또는 네아 메타노이아에 묻혔다.[26]
3. 유산
마우리키우스는 유능한 황제이자 군사령관으로 평가받지만, 긴축 정책과 군사적 무리수로 인해 몰락했다. 통찰력, 공공 정신, 용기를 지녔으며, 페르시아, 아바르족, 슬라브족과의 전쟁에서 군사 및 외교적 능력을 보여주었다.[27] 그의 행정 개혁은 테마 제도의 기반이 되었다.
과학과 예술을 장려했으며, 군사 저서인 ''스트라테지콘''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합동 전술 이론을 담고 있어 군사학적으로 높게 평가받는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스트라테지콘''이 다른 장군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27]
하지만 마우리키우스는 결정의 인기를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역사가 C. W. 프리비테-오턴은 판단력을 과신하고 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결점은 그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룩한 제국의 안정을 무너뜨렸다.
마우리키우스의 죽음은 동로마 제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의 죽음 이후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발발하여 제국은 약화되었고, 슬라브족이 발칸 반도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이슬람 세력의 발흥으로 이어졌다. 역사가 A. H. M. 존스는 마우리키우스의 죽음을 고대 시대의 종말로 보았는데, 이후 제국이 겪은 혼란이 사회와 정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3. 1. 군사 및 행정 개혁
마우리키우스는 제국의 서방에서 롬바르드족의 침입으로 피폐한 이탈리아에 새로운 행정기구를 세웠고 라벤나에 총독을 임명했다. 또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도 총독령으로 만들었다. 이 두 총독령(''exarchate'')의 민간행정기구는 군 장교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는 나중에 비잔티움 제국에서 운영한 테마제도의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27]그는 군사 저서인 ''스트라테지콘''의 저자로 전통적으로 불리며, 군사계에서 합동 전술 이론으로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유일하게 정교한 것으로 칭송받고 있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현재 ''스트라테지콘''이 그의 형제 또는 그의 궁정의 다른 장군의 작품이라고 믿고 있다. 그의 행정 개혁은 그를 선견지명이 있는 정치가로 드러내는데, 이는 그의 사후 수 세기 동안 지속되었고, 군사 구역으로서 테마의 도입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27]
3. 2. 외교적 업적
마우리키우스는 사산 제국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종결짓고, 발칸 반도에서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을 몰아내는 등 외교적, 군사적 업적을 이루었다.572년부터 591년까지 이어진 비잔틴-사산 전쟁에서 마우리키우스는 577년 동로마 제국 동부 군대의 총사령관인 ''마기스테르 밀리툼 오리엔템''으로 임명되어 유스티니아누스 장군의 뒤를 이었다. 그는 582년 콘스탄티나 근처에서 아다르마한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4][15]
590년, 바흐람 쵸빈이 호스로 2세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마우리키우스는 호스로 2세를 지원하여 591년 블라라톤 전투에서 바흐람 쵸빈의 군대를 격파하고 호스로 2세를 복위시켰다. 이로써 오랜 전쟁은 종결되었고, 호스로 2세는 반과 세반까지의 서부 아르메니아와 마르티로폴리스, 티그라노케르트, 만지케르트, 아니, 예레반을 포함한 주요 도시를 제국에 할양했다.[6] 비잔틴 제국은 이전에 달성한 적이 없는 정도로 영토를 확장했으며, 페르시아에 대한 공물도 면제받게 되었다.[22]
발칸 반도에서는 568년 카르파티아 분지에 도착한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의 침입에 맞서 싸웠다. 591년 동부 국경에서 승리한 후, 마우리키우스는 발칸에 집중하여 여러 차례 원정을 시작했다. 592년 싱기두눔(현대 베오그라드)을 탈환하고, 593년에는 프리스쿠스 장군이 다뉴브강 남쪽에서 슬라브족, 아바르족, 게피드족을 격파했다. 598년에는 아바르족의 본토 내에서 보복 원정을 허용하는 조약을 체결했고, 599년과 601년에는 비잔틴군이 아바르족과 게피드족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602년에는 슬라브족이 왈라키아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겪었고, 비잔틴군은 다시 다뉴브강을 방어할 수 있게 되었다.[22]
한편, 마우리키우스는 롬바르드족의 침입으로 피폐해진 이탈리아에 새로운 행정기구를 세우고 라벤나에 총독을 임명했다. 또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도 총독령으로 만들었다. 이 두 총독령(''exarchate'')의 민간 행정 기구는 군 장교들이 장악했는데, 이는 나중에 비잔티움 제국에서 운영한 테마제도의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3. 3. 역사적 평가
마우리키우스는 유능한 황제이자 군사령관으로 평가받지만, 지나친 긴축 정책과 군사적 무리수로 인해 결국 몰락했다. 그는 통찰력, 공공 정신, 용기를 지녔으며, 페르시아, 아바르족, 슬라브족과의 전쟁에서 군사 및 외교적 능력을 보여주었다.[27] 그의 행정 개혁은 테마 제도의 기반이 되어 제국 행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마우리키우스는 과학과 예술을 장려했으며, 군사 저서인 ''스트라테지콘''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합동 전술 이론을 담고 있어 군사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스트라테지콘''이 마우리키우스가 아닌 다른 장군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27]
하지만 마우리키우스는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인기가 없는지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역사가 C. W. 프리비테-오턴은 마우리키우스가 자신의 판단력을 과신하고 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결점은 결국 그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룩한 제국의 안정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우리키우스의 죽음은 동로마 제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의 죽음 이후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발발하여 제국은 약화되었고, 슬라브족이 발칸 반도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이슬람 세력의 발흥으로 이어졌다. 역사가 A. H. M. 존스는 마우리키우스의 죽음을 고대 시대의 종말로 보았는데, 이후 제국이 겪은 혼란이 사회와 정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4. 가족 관계
이름 | 생몰년 | 비고 |
---|---|---|
테오도시우스 | 583/585년 8월 4일 – 602년 11월 27일 이후 | 테오도시우스 2세[24] (408–450)의 통치 이후 황제의 치세에서 태어난 최초의 상속자였다. 587년에 카이사르, 590년 3월 26일에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
티베리우스 | 602년 11월 27일 사망 | |
페트루스 | 602년 11월 27일 사망 | |
파울루스 | 602년 11월 27일 사망 | |
유스티누스 | 602년 11월 27일 사망 | |
유스티니아누스 | 602년 11월 27일 사망 | |
아나스타시아 | 605년경 사망 | |
테오크티스타 | 605년경 사망 | |
클레오파트라 | 605년경 사망 |
12세기 연대기 작가 미카엘 시리아인과 다른 동방 자료에서는 딸 미리암/마리아가 호스로 2세와 결혼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비잔틴 그리스 자료에는 없어 전설로 추정된다.[25]
그의 형제 페트루스 (550년경 – 602년)는 ''쿠로팔라테스''가 되었고, 마우리키우스와 같은 시기에 살해되었다. 페트루스는 아레오빈두스 (550년경 출생)의 딸인 아나스타시아 에어로빈다 (570년경 출생)와 결혼하여 딸을 두었다. 마우리키우스의 조카 멜리테네의 도미티안은 아마도 페트루스의 아들일 것이다.
마우리키우스는 539년에 훗날 원로원 의원 파울루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는 여동생 테오크티스타(542년 - 582년 이전 사망), 고르디아(550년 - 602년 이후)가 있으며, 남동생 페트루스(545년경 - 602년)가 있다. 일설에는 다미아나라는 자매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친족으로 아나톨리아 출신의 도미티아누스(550년경/564년 또는 - 602년 1월 12일(1월 10일경?))라는 인물이 있는데, 조카(남동생 페트루스의 아들)라는 설과 부계 숙부의 아들(즉, 사촌. 숙부 테오도루스와 그의 아내 에크디키아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지만, 조카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선대 황제 티베리우스 2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딸 콘스탄티나의 남편이었던 마우리키우스가 582년, 장인의 죽음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와 직접적인 혈연 관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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