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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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와는 1764년 6월 30일부터 1772년 12월 10일까지 사용된 일본의 연호이다. 고사쿠라마치 천황의 즉위와 함께 개원되었으며, '밝은 조화'를 의미한다. 이 시기에는 에도 막부의 통치, 자연재해, 문화적 변화 등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했으며, 메이와 대화재와 메이와 대쓰나미와 같은 재난이 잇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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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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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와 | |
존속 기간 | 1764년 6월 2일 ~ 1772년 12월 10일 |
이전 | 호레키 |
다음 | 안에이 |
막부 | |
쇼군 | 도쿠가와 이에하루 |
천황 | |
천황 | 고사쿠라마치 천황 |
천황 | 고모모조노 천황 |
2. 연혁
- 호레키 14년 6월 2일(1764년 6월 30일) ~ 메이와 9년 11월 16일(1772년 12월 10일)
- 메이와(明和)는 《상서》 〈요전〉의 "百姓昭'''明'''協'''和'''萬邦"(백성이 밝고 똑똑해져 만방을 화평하게 하다.)[12]에서 따온 글자이다.
- 고사쿠라마치 천황의 즉위에 맞춰 연호가 개원되었으며, 조선 통신사의 방문을 고려하여 당초 예정보다 4개월 연기되었다.
- 메이와 9년에는 메이와 대화재를 비롯한 여러 재해가 발생하여 "메이와 9년은 폐가 되는 해"라는 말이 생겼다. (메이와(明和)와 폐가(迷惑)의 일본어 발음이 비슷함을 이용한 언어유희)
2. 1. 개원(改元)
호레키 14년 6월 2일(1764년 6월 30일), 고사쿠라마치 천황의 즉위에 맞춰 "밝은 조화"를 뜻하는 메이와(明和)로 연호를 개원하였다.[8][3]당초 개원 예정일은 1월 28일이었으나, 조선 통신사의 일본 방문 기간 중 개원은 행정 및 외교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어 4개월 연기되었다.[8]
메이와 9년 11월 16일(1772년 12월 10일), 안에이로 개원되었다.[8]
2. 2. 주요 사건
- 메이와 원년
- * 12월 : 나카센도를 따라 덴마 소동이 발발.[1]
- 메이와 2년
- * 9월 : 고몬메긴 발행.[1]
- 메이와 5년
- * 고몬메긴 통용 정지.[1]
- 메이와 8년
- * 여름 : 야마시로노쿠니 우지를 중심으로 오카게마이리가 대유행.[1]
- 메이와 9년
- * 2월 : 메이와 대화재 (에도 3대 화재 중 하나).[1] 이 해는 재해가 끊이지 않아 "메이와 9년은 폐가 되는 해"라고 불림.[5][1]
- * 9월: 고몬메긴의 실패를 교훈 삼아 남료이주은을 발행. 이로부터 “분(分)”, “주(朱)”를 단위로 하는 계수 은화가 저량 은화를 능가하는 시대가 시작.[1]
- 1766년 (메이와 3년): 쇼군을 몰아내려는 반란 계획 진압.[4]
- 1770년 (메이와 7년): 태풍으로 교토의 신축 황궁 파괴.[5]
- 1770년 (메이와 7년): 꼬리가 매우 긴 대혜성(렉셀 혜성)이 여름과 가을 밤하늘을 밝힘.[5]
- 1770년 (메이와 7년): 일본에서 15년간 지속된 가뭄의 시작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함).[5]
- 1772년 (메이와 9년 2월 29일): 메이와 대화재 발생. 약 8km 너비, 24km 길이의 지역이 파괴됨. 사찰과 신사 178곳, 다이묘 저택 127채, 일반 주택 878채, 번사(사무라이) 주택 8705채, 상인 주택 628구역 파괴, 6,000명 이상 사망 추정.[5]
- 1772년 (메이와 9년 6월 4일): 간토 지방에 폭풍 발생, 홍수 및 농작물 피해.[5]
- 1772년 (메이와 9년 6월 19일): 강력한 홍수와 강풍을 동반한 또 다른 폭풍으로 에도에서만 약 4000채의 집이 무너짐.[6]
- 메이와 2년, 니시키에(일본 목판화) 탄생.[1]
- 메이와 3년 6월, 도사번에서 에도로 파견되는 사무라이의 비단 옷 착용 일부 허용 (배를 이용하는 사무라이는 목면 옷 유지).[1]
- 메이와 4년, 명화사건(에도 막부가 산켄 다이니 등 존왕론자들을 탄압한 사건).[1]
- 메이와 4년, 도사번에서 忌中(기중)이나 묘참 중인 미록(微禄) 무사들이 사용하는 갓 재료 변경 (죽순갓에서 이(藺草)로 만든 깊게 엮은 갓).[11]
- 메이와 5년 9월, 니가타 명화 소동. 에치고 나가오카 번 번정에 불만을 품은 니가타 시민들이 마을 관리들을 축출하고 약 2개월간 자치 실시.[1]
- 메이와 7년 7월 28일: 전국에서 오로라 관측.[1]
- 메이와 8년 3월 10일: 오키나와현 이시가키섬을 메이와 대쓰나미가 덮침.[1]
3. 문화
1764년(메이와 원년)은 고사쿠라마치 천황의 즉위로 연호가 "밝은 조화"를 뜻하는 메이와(明和)로 바뀐 해이다.
이 시대의 문학에는 에도 주민(에도꼬(江戸っ子))들의 집합적인 특징을 일반화된 간략한 설명으로 추출하려는 집중적인 시도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특성(에도꼬 카타기(江戸っ子気質))은 에도꼬와 "세련된" 외관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 즉 에도가 아닌 사람들(예: 간사이 지역의 상인이나 먼 지방 출신의 사무라이) 사이의 대조를 그리기 위해 사용되었다. 때로는 에도꼬 카타기가 자랑스럽게 제시되기도 했고,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3]
연도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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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와 원년 12월 | 중산도(中山道)를 따라 전마소동(伝馬騒動)이 발발하였다. |
메이와 2년 | 니시키에(錦絵, 일본 목판화)가 탄생하였다. |
메이와 2년 9월 | 오문은(五匁銀)이 발행되었다. |
메이와 3년 6월 | 도사번(土佐藩)에서 에도로 파견되는 사무라이의 비단 옷 착용이 일부 해금되었다(선박을 이용하는 사무라이는 목면 옷 그대로).[10] |
메이와 4년 | 메이와 사건(明和事件)(에도 막부가 야마가타 다이니(山県大弐) 등 존왕론(尊王論)자들을 탄압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
메이와 4년 | 도사번(土佐藩)에서 忌中(기중)이나 묘참(墓参り) 중인 미록(微禄)의 무사들이 사용하는 갓(忌中傘)의 재료가 야마우치 토요스케(山内豊敷) 사망 시 죽순갓에서 이(藺草)로 만든 깊게 엮은 갓으로 바뀌었다.[11] |
메이와 5년 | 오문은(五匁銀) 운용이 중지되었다. |
메이와 5년 9월 | 니가타 메이와 소동(新潟明和騒動)이 발생하였다. 에치고 나가오카 번(越後長岡藩)의 번정에 대한 불만을 터뜨린 니가타 시민들이 마을 관리들을 축출하고 약 2개월 동안 시민 자치를 실시하였다. |
메이와 7년 7월 28일 (1770년 9월 17일) | 전국에서 오로라가 관측되었다. |
메이와 8년 3월 10일 | 오키나와현 이시가키섬을 메이와 대쓰나미(明和の大津波)가 덮쳤다. |
메이와 8년 여름 | 야마시로국 우지(宇治)를 중심으로 오가케마이리(お蔭参り)가 유행하였다. |
메이와 9년 2월 | 메이와 대화재(明和の大火)(메구로 행인자카(目黒行人坂)의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에도의 화재(江戸の火事) 3대 화재 중 하나이다. 이 해는 재해가 잇따라 발생하여 “메이와 9년은 폐해의 해”라고 불리기도 했다. |
메이와 9년 9월 | 오문은(五匁銀)의 실패를 교훈 삼아 남료이주은(南鐐二朱銀)을 발행하였다. 이로부터 “분(分)”, “주(朱)”를 단위로 하는 계수 은화가 저량 은화(秤量銀貨)를 능가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
4. 인물
다케노우치 시키부, 야마가타 다이니는 메이와 4년에 사망하였다. 아오키 곤요는 메이와 6년에, 스즈키 하루노부는 메이와 7년에 사망하였다.
4. 1. 출생
메이와 8년(1771년) 고카쿠 천황4. 2. 사망
연도 | 인물 | 추가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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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와 원년 | 도쿠가와 무네하루 | 향년 69세 |
메이와 원년 | 도쿠가와 무네타다 | 고산케 이치하시가 초대 당주, 향년 44세 |
메이와 4년 | 다케노우치 시키부 | |
메이와 4년 | 야마가타 다이니 | 향년 42세 |
메이와 4년 | 타케우치 케이지 | 향년 55세 |
메이와 4년 | 야마우치 토요시키 | 향년 53세 |
메이와 6년 | 아오키 곤요 | |
메이와 7년 | 스즈키 하루노부 | |
메이와 8년 | 도쿠가와 무네타케 | 고산케 타야스가 초대 당주, 향년 55세 |
5. 서력 대조표
(갑신(甲申))
(을유(乙酉))
(병술(丙戌))
(정해(丁亥))
(무자(戊子))
(기축(己丑))
(경인(庚寅))
(신묘(辛卯))
(임진(壬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