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모두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모두루는 고구려 광개토왕 시기에 북부여 수사로 파견되었던 인물이다. 그의 선조는 북부여 출신으로 동명성왕과 함께 고구려로 내려왔으며, 4세기 초에는 대형 염모가 활약하여 모두루 일족을 중흥시켰다. 1935년 중국 지안에서 발견된 '모두루 묘지'를 통해 그의 생애와 가문의 내력을 알 수 있으며, 묘지에는 고구려 시조부터 광개토왕에 이르기까지 고구려 왕실에 대한 충성심과 북부여 통치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묘지를 통해 모두루 일족이 고구려 발전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사자 - 창조리
    창조리는 고구려 국상으로서 봉상왕을 폐위하고 미천왕을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모용외의 침략에 대비하고 미천왕의 치세를 보좌하는 등 국정 운영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 대사자 - 을파소
    을파소는 고구려 고국천왕 때 국상으로 임명되어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진대법 실시를 건의했으며, 산상왕 때에도 국상직을 유지하다 203년에 사망했다.
  • 고구려의 귀족 - 연태조
    연태조는 고구려 말기 막리지 연자유의 아들이자 막리지를 역임한 귀족으로, 수나라와의 전쟁 이후 고구려 조정 내 권력 다툼 속에서 북방파를 이끌었으며 그의 사후 아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 고구려의 귀족 - 연남건
    연남건은 연개소문의 아들이자 고구려 장군으로, 형과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여 대막리지가 되었지만 강경한 대당 정책과 독단적인 통치로 귀족들의 반발을 사 결국 고구려 멸망의 원인이 되었으며, 당나라에 저항하다 패배 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 고구려의 관료 - 진 (고구려)
    진은 408년 사망한 고구려 인물로, 덕흥리 고분 묘지명을 통해 건위장군, 요동태수, 유주자사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한 사실이 알려졌으며, 출신에 대해서는 고구려인과 중국인이라는 주장이 대립한다.
  • 고구려의 관료 - 손대음
    7세기 중반 고구려 장수 손대음은 645년 당나라의 침공 당시 백암성 성주로서 당군에 항복하여 성을 넘겨준 후 당나라로부터 암주 자사에 임명되었으며, 중국식 이름으로 인해 낙랑군 유민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모두루 - [인물]에 관한 문서
牟頭婁 (모두루)
한글모두루
한자牟頭婁
로마자 표기Moduru
귀족 정보
이름모두루
원어 이름牟頭婁
작위고구려의 북부여수사
재임미상
전임자미상
공동 재위자미상
후임자미상
군주광개토대왕
군주 칭호태왕
개인 정보
국적고구려
성별남성
출생일미상
출생지미상
사망일미상
사망지미상
매장지미상
능묘미상
가문
아버지미상
어머니미상
배우자미상
형제자매미상
자녀미상
친인척미상
종교미상

2. 생애

모두루 묘지명에 따르면, 모두루의 선조는 북부여 출신으로 동명성왕과 함께 북부여에서 내려왔으며, 4세기 초 대형(大兄) 염모(冉牟)가 크게 활약하여 모두루 일가를 중흥시켰다고 한다. 모두루 가문의 관등은 대형이었다. 광개토왕 대에 모두루는 할아버지의 공으로 왕의 은혜를 받아 동명성왕과 모두루 일족의 출신지인 북부여의 수사로 파견되었다. 이후 임지에서 광개토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슬퍼하였다고 한다. 이밖에 모두루에 관해서는 묘지명의 결락으로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묘지명의 문맥으로 보아 염모 이후 모두루 일족이 왕권에 밀착되어 대대로 중용되었으며 세습적으로 북부여를 지배하였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모두루의 묘는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하양어두(下羊魚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수사(守事) 모두루 관련 묘지이다.

3. 모두루 묘지

모두루 묘지는 중국 지린성 통화시 집안시 하양어두(下羊魚頭)에 있는 고구려의 수사(守事) 모두루 관련 묘지이다.

1935년 지안에서 발견된 『모두루 묘지』는 약 800자로 이루어진 묘지로, 해독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대략적인 내용이 해명되었다.[1] 이에 따르면, 모두루 일족은 북부여 출신으로 추모왕을 따라 남하하여 대대로 고구려 왕을 섬겼다. 미천왕·고국원왕모용씨의 북부여 침공 시 염모가 활약하여 일족을 중흥시켰고, 이후 북부여 방면 지배는 대대로 염모의 자손이 계승했다. 광개토왕 대 모두루는 지방관으로 북부여에 부임했다가 광개토왕의 부고를 접했다.[1]

3. 1. 묘지명의 내용과 의미

모두루 묘지명에 따르면, 모두루의 선조는 북부여 출신으로 동명성왕과 함께 북부여에서 내려왔으며, 4세기 초에는 대형(大兄) 염모(冉牟)가 크게 활약하여 모두루 일가를 중흥시켰다고 한다. 그들의 관등은 대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 대에 이르러 모두루는 할아버지의 공으로 왕의 은혜를 받아 동명성왕과 모두루 일족의 출신지인 북부여의 수사로 파견되었다. 그 뒤 임지에서 광개토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슬퍼하였다고 한다.[1]

묘지명의 문맥으로 보아 염모 이후에 모두루 일족이 왕권에 밀착되어 대대로 중용되었으며 세습적으로 북부여를 지배하였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1]

모두루 묘지는 독특한 형식을 띠고 있으며, 모두루 본인뿐만 아니라, 선조 이래로 자신들의 가계가 고구려 왕에게 얼마나 충성을 다했으며 대를 이어 고구려 왕권을 지탱해 왔는지를 고구려의 시조부터 광개토대왕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선조의 사적과 겹쳐가며 서술하고 있다.[1]

모두루 묘지에 염모가 모용부와의 교전에서 활약한 것을 기록한 것처럼, 그들이야말로 이 당시 고구려 발전의 중심적인 담당자였으며, 고구려 왕권을 지탱한 핵심적인 존재였다.[1]

3. 2. 묘지명의 역사적 가치

모두루 묘지명에 따르면, 모두루의 선조는 북부여 출신으로 동명성왕과 함께 북부여에서 내려왔으며, 4세기 초에는 대형(大兄) 염모(冉牟)가 크게 활약하여 모두루 일가를 중흥시켰다고 한다. 그들의 관등은 대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모두루는 할아버지의 공으로 왕의 은혜를 받아 동명성왕과 모두루 일족의 출신지인 북부여의 수사로 파견되었다. 그 뒤 임지에서 광개토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슬퍼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 모두루에 관해서는 묘지명의 내용이 빠져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묘지명의 문맥으로 보아 염모 이후에 모두루 일족이 왕권에 밀착되어 대대로 중용되었으며 세습적으로 북부여를 지배하였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1]

1935년에 지안에서 발견된 『모두루 묘지』는 약 800자로 이루어진 묘지이다. 해독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두루 일족의 족조는 북부여인으로, 추모왕을 따라 남하했으며, 이후 대대로 고구려 왕을 섬겼다. 미천왕·고국원왕 대에 모용씨의 북부여 침공 시, 염모라는 자가 나타나 일족에게 중흥의 조와 같은 활약을 보였다. 그 무렵 일족에게 위임된 북부여 방면의 지배는 대대로 염모의 자손이 계승했으며, 광개토왕 대의 모두루에 이르러, 모두루는 지방관으로서 북부여에 부임했을 때 광개토왕의 부고를 접했다.[1]

『모두루 묘지』는 독특한 형식을 띠고 있으며, 모두루 본인뿐만 아니라, 선조 이래로 자신들의 가계가 고구려 왕에게 얼마나 충성을 다했으며 대를 이어 고구려 왕권을 지탱해 왔는지를 고구려의 시조부터 광개토왕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선조의 사적과 겹쳐가며 서술하고 있다.[1]

『모두루 묘지』에 염모가 모용씨와의 교전에서 활약한 것을 기록한 것처럼, 그들이야말로 이 당시 고구려 발전의 중심적인 담당자였으며, 고구려 왕권을 지탱한 핵심적인 존재였다.[1]

4. 모두루 가문과 북부여 통치

모두루 묘지명에 따르면, 모두루의 선조는 북부여 출신으로 동명성왕과 함께 남하하였다. 4세기 초, 대형(大兄) 염모가 크게 활약하여 모두루 가문을 중흥시켰으며, 이들의 관등은 대형이었다.[1] 광개토대왕 때 모두루는 할아버지의 공으로 왕의 은혜를 입어 북부여의 수사로 파견되었고, 임지에서 광개토왕의 죽음을 듣고 멀리서 애도하였다.[1]

1935년 지안에서 발견된 『모두루 묘지』는 약 800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독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대체적인 내용이 밝혀졌다.[1] 묘지명에는 모두루 가문이 대대로 고구려 왕을 섬겼으며, 특히 염모는 미천왕·고국원왕모용씨의 북부여 침공 시 큰 공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1] 또한 묘지명은 모두루 본인뿐 아니라 선조들의 업적을 함께 서술하며, 모두루 가문이 고구려 왕권에 충성을 다했음을 강조한다.[1]

4. 1. 북부여 통치의 의미

모두루의 선조는 북부여 출신으로 동명성왕과 함께 북부여로부터 내려왔다. 4세기 초에는 대형(大兄) 염모(冉牟)가 크게 활약하여 모두루 일가를 중흥시켰다고 하며, 이들의 관등은 대형이었다.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모두루는 할아버지의 공으로 왕의 은혜를 받아 동명성왕과 모두루 일족의 출신지인 북부여의 수사로 파견되었다. 이후 임지에서 광개토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슬퍼하였다고 한다. 묘지명의 문맥으로 보아 염모 이후에 모두루 일족이 왕권에 밀착되어 대대로 중용되었으며 세습적으로 북부여를 지배하였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