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성왕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동명성왕은 고구려를 건국한 인물로, 다양한 역사 기록과 신화에서 다르게 묘사된다. 그의 생애는 반(半) 전설적인 이야기로 전해지며, 탄생 설화는 부여, 고구려, 백제의 건국 신화와 연결되어 있다. 주몽은 부여에서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하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사후에는 조상신으로 숭배받았다. 동명성왕은 고구려의 발전과 영토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고씨 성을 사용하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명성왕은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시조로 숭배받고 있으며,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동명성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한국어 이름 | hangul: 추모성왕 / 동명성왕 hanja: 鄒牟聖王 / 東明聖王 rr: Chumo Seongwang / Dongmyeong Seongwang mr: Ch'umo Sŏngwang / Tongmyŏng Sŏngwang |
출생 이름 | hangul: 추모 / 고주몽 hanja: 鄒牟 / 高朱蒙 rr: Chumo / Go Jumong mr: Ch'umo / Ko Chumong |
신상 정보 | |
계승 | 고구려의 왕 |
통치 기간 |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
이전 | 왕국 건국 |
이후 | 유리명왕 |
출생일 | 기원전 58년(?) |
사망일 | 기원전 19년(?) |
왕가 | 고씨 / 해씨 |
가문 유형 | 씨족 |
어머니 | 유화부인 |
배우자 | 예씨 소서노 |
자녀 | 유리왕 |
출생지 | 북부여 |
사망지 | 홀본, 고구려 |
매장지 | 력포구역, 평양시, 북한 |
이름 | |
한국어 | hangul: 추모 hanja: 鄒牟 |
다른 표기 | "주몽", "중모", "도모"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됨 |
한자 (추모) | 鄒牟 |
한자 (추모성왕) | 鄒牟聖王 |
한자 (동명성왕) | 東明聖王 |
한자 (추몽) | 鄒蒙 |
한자 (중모) | 中牟 |
한자 (고) | 高 |
한자 (중해) | 衆解 |
한자 (상해) | 象解 |
기타 정보 | |
관련 드라마 | 주몽 |
2. 생애
동명성왕에 대한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 신화적 요소가 섞여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 기록들은 부여, 고구려, 백제가 모두 같은 조상을 둔다고 주장하는 동명왕 전설과 얽혀 있다.[3] 고구려 건국 신화는 광개토대왕릉비를 포함한 고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에서 동명성왕의 생애에 대한 다양한 버전들을 찾아볼 수 있다.
주몽이라는 이름은 사서에 등장하지만, 기원전 37년 고구려 건국 외에 그의 생애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거의 없다.[40] 414년 건립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시조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온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로 알에서 태어났다"라는 구절이 있고, 1145년 편찬된 『삼국사기』에도 주몽에 대한 기록이 있다.[40]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 편찬보다 700년 이상 전의 이야기이므로, 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등의 신화적인 내용이 주를 이룬다.[40]
고구려의 기록은 극소수만 남아있으며, 대부분 유실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추모는 북부여에서 태어나 홀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건설했다. 이후 홀본 동쪽 언덕으로 가서 사망했다.[1][18]
삼국사기에 따르면, 비류와 온조는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와 소서노의 아들이다. 소서노는 홀본 출신 연타발의 딸로, 우태 사후 과부가 되었다. 동명성왕이 홀본에 도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고 소서노와 결혼했다.[5] 소서노는 동명성왕을 도와 고구려 건국에 기여했고, 동명성왕은 그녀의 아들들을 친자식처럼 키웠다. 그러나 동명성왕의 친아들 유리명왕이 태자로 책봉되면서 소서노는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 비류는 유리명왕에게 불만을 품고, 동명성왕 사후 숙청을 두려워하여 온조 및 소서노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 새 왕국을 세웠다.[5]
2. 1. 탄생 설화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명왕편》은 추모성왕(동명성왕)의 탄생 설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주몽 설화는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했기 때문인지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 설화와 고구려의 건국 설화가 비슷하다. 역사학계에서는 부여의 동명왕과 고구려의 주몽을 다른 인물로 본다. 주몽은 햇빛에 의해 임신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선비족을 통합한 단석괴도 햇빛에 의해 임신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52]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해모수가 주몽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해모수의 '해'는 태양을 뜻하며, 이는 하늘의 자손을 의미한다. 따라서 해모수는 고구려의 천손의식이 의인화된 결과물로 해석할 수 있다.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河伯)에게는 유화(柳花), 훤화(萱花), 위화(葦花)라는 어여쁜 세 딸이 있었다. 이들은 더위를 피하여 청하(읍루 (현재의 선양시: 철령 남쪽 60리)의 웅심연(熊心淵)에서 놀고 있었다. 이때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오다가 연못 안의 세 처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했다. 훤화와 위화는 돌아갔으나, 유화는 해모수와 만나게 되었다.
하백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와 술법을 겨루어 그의 능력을 시험해 본 뒤, 해모수와 유화의 결혼을 인정하고 유화를 하늘나라로 보내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해모수를 의심했던 하백은 꾀를 써서 해모수를 다시 시험해보기로 하였다. 가죽부대에 들어 있던 해모수를 주머니에 묶어 가둔 뒤에 올려보냈으나, 물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술에서 깬 해모수가 크게 노하여 홀로 승천하였다.
이에 하백은 유화에게 크게 노하여 귀양을 보냈다. 이후 동부여의 왕 금와왕이 우연히 우발수(優渤水)로 나들이를 갔다가 유화를 만나고, 그녀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궁궐로 데려왔다. 그런데 그녀를 향하여 햇빛이 계속해서 비치는 기이한 일이 계속되더니, 마침내 그녀는 잉태하였다. 하지만 유화가 5되나 되는 커다란 알을 낳자, 금와왕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겨 유화로부터 알을 빼앗아 돼지우리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돼지들은 이 알을 먹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소중히 하였다. 그 뒤 금와는 소와 말이 짓밟도록 알을 길가에 버리기도 하였는데, 소와 말들이 알을 피해가자, 이번에는 새들이 쪼아 먹도록 들판에 놓아 두었다. 하지만 새들은 오히려 알을 품어 주었다. 때문에 금와는 도끼로 알을 내리쳐보기도 했지만 알은 온전하였다. 금와왕은 하는 수 없이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었다.
유화는 그 알을 따뜻하게 덮어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아이 하나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 아이는 날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라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이에 이 아이의 이름을 부여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인 “주몽”이라고 지었다. 주몽은 대소 왕자 등 금와왕의 7명의 아들보다 능력이 출중하여 그들의 시기를 받았고, 호시탐탐 그를 죽이려 하였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백제 원조(遠祖) 도모왕은 하백의 딸이 일정(日精)에 감응하여 태어났다고 한다. 이는 주몽 설화와 유사하다.[3]
2. 2. 동부여 탈출과 고구려 건국
부여에서 자란 주몽은 총명하고 활을 잘 쏘아 촉망받았으나, 금와왕의 아들 대소 등이 그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려 하자 화를 피하여 이주하였다.[3]대소의 위협에서 벗어난 주몽은 남쪽으로 향하여 졸본에 정착, 졸본 부여왕(이름 미상, 건국 설화 중 다른 설화에는 연타발)의 둘째 딸(이름 미상, 건국 설화 중 다른 설화에는 소서노)과 결혼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37년, 주몽은 졸본 부여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건국했다.[53] 주몽의 원래 성씨는 아버지인 해모수에 따른 '해'씨였으나, 태조왕 당시 계루부 고씨가 집권하자 정통성을 위해 시조의 성씨를 '고'씨로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고'씨로 성을 바꾼 후, 국가의 위상을 일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영토확장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53] 주몽은 영토확장을 위해서는 우선 변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변방에 살고 있던 말갈족 부락을 평정하여 말갈족이 더 이상 국경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기원전 36년에는 훈강(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沸流國, ‘송양국’이라고도 한다)의 왕 송양(松讓)에게 활쏘기 경쟁으로 이겨서 항복을 받아내어 ‘옛 땅을 회복했다.’라는 뜻의 고구려말인 다물(多勿)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도주로 삼았다.
비류국을 정복한 주몽은 기원전 34년 졸본성과 궁궐을 완성하여 나라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기원전 32년에는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를 보내 태백산(백두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였으며, 기원전 28년에는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를 정복하였다.
기원전 24년 가을 음력 8월에 부여에 남아있던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죽었다. 대소는 금와의 일곱 아들 중 맏이였는데, 주몽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금와는 주몽에게 말을 돌보라고 명령했다. 말을 기르는 동안 주몽은 일부러 느린 말에게는 더 많은 먹이를 주고 빠르고 재능 있는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매력이 없고 여위게 만들었다. 금와가 주몽 등과 함께 사냥을 갔을 때, 주몽은 여윈 말과 적은 수의 화살을 받았지만, 그의 여윈 말은 더 빨랐기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사냥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이 사냥 사건은 대소가 주몽을 죽이려는 욕망에 더욱 불을 지폈다. 커져가는 위협을 본 유화는 주몽에게 떠나 다른 곳에서 그의 능력을 발휘하라고 요청했다.[3]
주몽과 그의 세 친구 — 오이(烏伊|오이중국어), 마리(摩離|마리중국어), 협보(陜父|협보중국어) — 는 대소가 보낸 기병대에 쫓겨 동부여에서 탈출했다. 주몽과 그의 일행은 엄사수(또는 엄사강; 淹㴲水|엄사수중국어)에 도착했지만, 강을 건널 다리를 찾지 못했다. 기병대가 접근하자 주몽은 강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자신을 천제(天帝|천제중국어)의 아들이자 하백의 외손이라고 선언했다.[3] 주몽의 부름에 답하여, 물고기와 자라가 강에서 떠올라 주몽이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만들었고, 추격대가 도착할 즈음에는 사라졌다.[3]
죽음을 면한 추모는 모둔곡(모둔골, 毛屯谷|모둔곡중국어)에서 각기 다른 옷을 입은 세 사람을 만났다. 추모는 그들을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 여기고, 각 사람에게 성을 하사했다. 삼베 옷을 입은 자는 극재사(克再思|극재사중국어), 승려복을 입은 자는 중실무골(仲室武骨|중실무골중국어), 물풀 옷을 입은 자는 소실묵거(少室默居|소실묵거중국어)로 불렸다. 추모는 모두에게 역할을 부여했고, 함께 홀본천(홀본강, 忽本川|홀본천중국어)에 도착했다. 추모는 산에 궁궐을 짓고 싶어 했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비류수(沸流水|비류수중국어) 근처에 초가집을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새로 건국한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라고 지었고, 21세(기원전 37년)에 성을 고씨로 바꾸었다.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합류했다.[3][5]
2. 3. 고구려의 발전과 영토 확장
주몽은 부여에서 금와왕의 아들 대소 등의 시기를 받아 남쪽으로 이동하여 기원전 37년 졸본에서 고구려를 건국했다.[53] 초기에는 '해'씨였던 주몽의 성씨는 고구려 태조왕 때 계루부 고씨 집권 후 '고'씨로 바뀌었다.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주몽은 변방의 말갈족 부락을 평정하고,[3] 기원전 36년에는 훈강(비류수) 상류의 비류국(沸流國) 왕 송양(松讓)을 굴복시켜 국명을 다물(多勿)로 바꾸고 송양을 그곳의 도주로 삼았다.[6]
기원전 34년에는 졸본성과 궁궐을 완성하고,[7] 기원전 32년에는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를 보내 태백산(백두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였다.[8] 기원전 28년에는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를 정복하는 등[9] 영토를 크게 넓혔다.
3. 죽음과 유산
기원전 19년 4월, 유류와 그의 어머니 예씨가 부여에서 도망쳐 고구려에 도착하자, 동명성왕은 유류를 태자로 임명했다.[12] 그해 9월, 동명성왕은 39세(만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용산(龍山)에 묻혔으며, 사후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13]
고구려는 동명성왕 사후에도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여 705년 동안 존속했으며, 668년 신라-당나라 연합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28명의 고씨 왕조 군주가 통치했다. 발해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으며, 동명성왕의 현대 후손들은 여전히 "고(高)"씨 성을 사용한다.
고구려에서 동명성왕은 조상 신으로 숭배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횡성 고씨, 중국의 요양 고씨, 일본의 고려씨는 동명성왕을 시조로 여긴다.
3. 1. 죽음과 추모왕릉
동명왕릉은 졸본 근처의 용산에 마련되었으며, 시호는 추모성왕(東明聖王)이라고 하였다. 훗날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할 때 함께 평양으로 옮겨왔다고 추정된다.[54]기원전 19년 9월, 동명성왕은 40세로 사망하여 용산에 장사지내졌으며, 시호는 동명성왕으로 정해졌다.
동명성왕의 능묘는 평양직할시 력포구역에 추정 능묘가 존재하며, 東明王陵|동명왕릉중국어이라고 불린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의 구성 고분이다. 원래는 집안에 있던 것을 427년 평양 천도와 함께 옮겨졌다. 능묘는 한 변이 32m, 높이 11.5m이며, 주변에는 중문, 제사당, 석상 등이 설치되어 있다. 현실 내부에는 29종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1993년 5월 14일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정비가 이루어져 부지 면적 약 220ha, 왕릉 구역, 정릉사 구역, 배분 구역이 정비되었다.
3. 2. 유산과 후계
소서노는 홀본 출신 연타발(延陀勃)의 딸로,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優台)와 혼인하였으나 우태 사후 과부가 되었다. 동명성왕이 홀본에 도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고 소서노와 결혼하였다.[5]소서노는 동명성왕을 도와 고구려 건국에 기여하였고, 동명성왕은 그녀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친자식처럼 키웠다. 그러나 동명성왕의 친아들 유리명왕이 예씨로부터 고구려에 와 태자로 책봉되면서 상황이 변하였다. 비류는 유리명왕이 건국에 기여한 바가 없다고 불만을 품고, 동명성왕 사후 숙청을 두려워하여 온조 및 소서노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 새 왕국을 세웠다.[5]
고구려는 705년 동안 존속하며 28명의 고씨 왕조 군주가 통치했고, 668년 신라-당나라 연합에 의해 멸망했다. 발해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으며, 동명성왕의 후손들은 "고(高)"씨 성을 사용한다.
동명성왕은 고구려에서 조상 신으로 숭배되었다.
오늘날 횡성 고씨, 중국 요양 고씨, 일본 고려씨는 동명성왕을 시조로 여긴다.
기원전 19년 5월, 아들 유리가 어머니 예씨와 함께 부여에서 도망쳐 오자, 동명성왕은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같은 해 9월, 동명성왕은 40세로 사망하여 용산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으로 정했다.
4. 역사적 평가와 의의
동명성왕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반(半) 전설적이며, 역사적 사실과 신화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렵다. 이러한 기록들은 부여, 고구려, 백제의 동명왕 전설과 섞여 있어 더욱 복잡하다.[3] 고구려 건국 신화는 광개토대왕릉비를 포함한 고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가 | 인물 | 출생/발견 장소 | 탄생 설화 | 강 도하 설화 | 건국 위치 | 출처 |
---|---|---|---|---|---|---|
부여 | 부여 동명 | 고리 또는 탁리(橐離|탁리중국어) | 처녀(또는 후궁)가 성령에 의해 임신하여 알을 낳았다. 왕은 소년을 죽이려 했지만 짐승들이 보호했다. | 왕은 동명의 활쏘기 솜씨를 질투하여 동명을 죽이려 했다. 동명은 남쪽으로 도망쳐 이엄수(또는 이엄강; 施掩水|이엄수중국어)에 도착, 활로 강에 화살을 쏘았고,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 동명은 부여에 도착하여 왕이 되었다. | 삼국지[14] 논형[15] |
백제 | 부여 동명 | 색리(索離|색리중국어) 또는 고려 | 처녀(또는 후궁)가 성령에 의해 임신하여 알을 낳았다. 왕은 소년을 죽이려 했지만 짐승들이 보호했다. | 왕은 동명의 활쏘기 솜씨를 질투, 동명은 남쪽으로 도망쳐 엄체수(또는 엄체강) (淹滯水|엄체수중국어)에 도착, 활로 강에 화살을 쏘았고,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 동명은 부여에 도착하여 왕이 되었다. | 북사[16] 수서[17] |
고구려 | 추모 | 북부여 | 추모는 하늘과 하백(강의 신의 딸)의 아들이었고 알에서 태어났다. | (어머니에 의해) 가라는 명령을 받고 부여의 엄리대수(또는 대엄리강) (奄利大水|엄리대수중국어)에 도착, 강에 명령을 내리자 갈대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 비류곡의 홀본에 도착하여 산에 수도를 세웠다. | 광개토대왕릉비[18] |
고구려 | 주몽 | 부여 | 하백의 딸은 햇빛에 의해 임신하여 알을 낳았다. 왕은 알을 깨뜨리려 했지만 짐승들이 보호했다. | 부여 사람들은 주몽의 활쏘기 솜씨를 질투했고, 어머니는 도망가야 한다고 했다. 주몽은 두 동료와 남동쪽으로 도망쳐 강에 도착, 강에 명령을 내리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 주몽은 보술수(또는 보술강; 普述水|보술수중국어)에 도착하여 서로 다른 옷을 입은 세 사람을 발견했다. 주몽과 추종자들은 흘승골성 (紇升骨城|흘승골성중국어)에 고구려를 세우고 성을 고씨로 바꿨다. | 위서[19] |
고구려/당 | 부여 동명 | 동명은 정신에 의해 사천(㴲川|사천중국어)을 건너 나라를 세웠다. |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연남생의 묘비.[20] | |||
고구려/당 | 주몽 | 주몽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패수중국어)에 도착하여 수도를 건설했다. |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연남생의 묘비. | |||
신라 | 혁거세 | 나정(蘿井|나정중국어) | 소별도리가 나무 사이에 앉아 우는 말을 보았다. 그가 다가가자 말은 사라졌지만 알을 남겨두었다. 그는 알을 깨뜨렸고 혁거세를 발견했다. | |||
삼국사기 | 금와 | 곤연(곤연|蘿井중국어) | 해부루가 연못에 갔을 때 그의 말이 바위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바위를 치우고 금와를 발견했다. | 금와왕의 아들 대소가 기병을 보내 주몽을 추격했다. | 삼국사기[3] | |
삼국사기 | 동명성왕 (주몽) | 동부여 | 해모수와 잠자리를 함께 했던 유화는 햇빛에 의해 임신하여 알을 낳았다. 금와왕은 알을 깨뜨리려 했지만 짐승들이 보호했다. | 금와왕의 아들 대소는 주몽을 질투하게 되었다. 주몽은 남쪽으로 도망쳐 엄사수(淹㴲水|엄사수중국어)에 도착, 자신의 신성한 권위를 선포하며 강에 기도했고,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 주몽은 졸본천에 도착했지만 궁궐을 지을 돈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비류수(沸流水|비류수중국어) 옆의 초가집에 살면서 고구려를 세웠다. 그는 성을 고씨로 바꿨다. | 삼국사기[3] |
이러한 신화들의 유사성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시사한다.
- 동명왕 전설은 부여, 고구려, 백제 등 부여계 왕국들 사이에서 변형되어 공유되었다.
- 부여 건국 이전에 부여 북쪽에 고대 왕국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 동명왕과 주몽은 고구려에서 별개 인물로 여겨졌지만, 장수왕 통치 이전에는 전설이 혼합되었다. 고구려 건국 이후 부여와 고구려 왕족 간 혼인을 통해 정통성을 주장하고 부여를 복속시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또는 의도적으로 섞였을 것으로 보인다.
- 동부여는 선비족 침략 이후 건설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부여로 돌아가지 않고 북옥저로 도망쳐 동부여를 세웠다. 동부여 신화 추가는 고구려가 정통성을 주장하고 동부여를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했거나, 통일신라 또는 고려 시대에 추가되었을 수 있다.
- 《위서》의 묘사는 《삼국사기》 기록과 가장 유사하다. 《위서》가 쓰여질 때까지 동부여 관련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신화가 완성되었다.
- 《삼국사기》가 쓰여질 당시 동명왕과 주몽은 동일 인물로 여겨져 주몽의 칭호를 동명왕으로 사후에 변경했다. 금와왕 이야기는 신라 혁거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에 남아있는 기록은 극소수이며, 수 세기에 걸쳐 많은 기록들이 유실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주몽은 북부여에서 태어났다. 그는 홀본에 도착하여, 홀본 서쪽에 위치한 산에 도읍을 건설했다. 왕위에 싫증이 난 후, 그는 홀본 동쪽 언덕으로 가서 그곳에서 사망했다.[1][18]
'삼국사기'에 따르면, 중국 왕조에서 기록된 이전의 책들에서, 고구려의 역사에 불일치가 있는데, 그들은 옛 고구려(古高句麗|고고구려중국어)와 신 고구려(新高句麗|신고구려중국어)를 동일하게 취급하는 반면, 소수맥(小水爲|소수맥중국어)과 동옥저와 관련된 사건들을 분리했다. 옛 고구려는 고조선 멸망 직후 한나라에 의해 점령당해 기원전 107년 현도군에 속한 현이 되었다. 반면에 신 고구려는 주몽에 의해 건국되었다. 기원전 82년에 신 고구려는 한나라 군현을 공격했으며, 현도군이 원래 위치에서 고구려 북서쪽 지역으로 쫓겨나게 하는 데 책임이 있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주몽은 기원전 82년에 군대를 지휘할 만큼 나이가 많았는데,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가 실제로는 705년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징후가 있다.
- 고자의 묘비에는 고구려의 역사가 70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42년 건국으로 추정)[21]
- 신라는 서기 670년에 고구려의 역사를 800년으로 인정했다. (기원전 130년경 건국으로 추정)[22]
- 당나라는 서기 668년에 고구려의 역사를 900년으로 인정했다. (기원전 232년경 건국으로 추정)[23]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광개토대왕을 추모왕의 17세손이라고 한다. 이것을 17세손의 의미로 본다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 광개토대왕은 동명성왕의 12세손이라고 하는 것과 비교하여 5대나 많다. 그래서 《삼국사기》는 신라 왕실에 연관된 경주 김씨의 김부식이 편찬한 것으로, 신라를 띄우기 위해 고구려의 건국 연도를 신라의 자칭 건국 연도(실제로는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보다 뒤로 미루었다는 설도 있었지만, 현재는 비문의 17세를 "17대째"의 의미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몽이라는 이름은 사서에 실존하지만, 그의 생애에 관한 확실한 사료는 거의 없으며,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것 외에,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40]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대왕릉비』에 "시조 추모왕을 돌아보니 성스러운 시조왕은 북부여에서 천제의 아들, 어머니는 하백의 딸로서 알에서 태어났다"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으며, 1145년에 성립된 조선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에도, 주몽에 대한 기록이 있다.[40] 그러나 『삼국사기』 편찬보다 700년 이상 전의 이야기이므로, 그에 기록된 것은 지극히 신화적인 이야기이며, 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 하나만 보더라도, 대략 사실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40]
부여의 동명왕 전설과 고구려의 주몽 전설의 공통 구조는, 양자의 민족적 동일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조 전설을 동일하다고 간주하지 않고, 고구려의 시조 전설에 난생형 설화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과, 광개토대왕릉비문과 『위서』 고구려전에 "동명왕"의 표현이 보이지 않는 것 등에서, 동명왕 전설의 구성을 바탕으로 고구려 독자적인 요소를 더한 시조 전설이 만들어져, 후의 『삼국사기』에서 동명성왕과 주몽이 동일시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4. 1. 다양한 기록과 해석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명왕편》은 추모성왕(동명성왕)의 탄생 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주몽 설화는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하면서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 설화와 비슷해졌는데, 역사학계에서는 부여의 동명왕과 고구려의 주몽을 다른 인물로 본다. 주몽은 햇빛에 의해 임신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선비족을 통합한 단석괴 역시 비슷한 전설을 가지고 있다.[52]《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해모수가 주몽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해'는 태양을 뜻하며, 천손(天孫)을 의미한다. 따라서 해모수는 고구려의 천손의식이 의인화된 결과물로 해석할 수 있다.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河伯)의 딸 유화가 청하(현재의 선양시 부근)의 웅심연(熊心淵)에서 놀고 있을 때,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내려와 유화와 만나게 되었다. 하백은 해모수의 능력을 시험한 뒤 유화를 하늘나라로 보냈으나, 의심을 거두지 않고 해모수를 가죽부대에 가두었다. 해모수는 크게 노하여 홀로 승천했고, 하백은 유화에게 벌을 내려 귀양 보냈다.
동부여의 왕 금와왕은 우발수(優渤水)에서 유화를 만나 궁궐로 데려왔다. 유화는 햇빛을 받아 잉태하여 커다란 알을 낳았다. 금와왕은 알을 불길하게 여겨 버렸으나, 동물과 새들이 알을 보호했다. 금와왕은 알을 깨뜨리려 했지만 실패하고 유화에게 돌려주었다.[52]
유화가 알을 따뜻하게 하자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발백중으로 쏘았고, 부여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의 “주몽”이라 불렸다. 주몽은 금와왕의 아들들의 시기를 받았고, 유화는 주몽에게 동부여를 떠나라고 충고하였다.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동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엄리대수(淹利大水)에 이르렀다. 주몽이 “나는 천제의 손자이며, 강의 신의 외손자이다.”라고 하자, 자라와 물고기가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어별성교).[52]
《속일본기》에 따르면, 백제 원조(遠祖) 도모왕은 하백의 딸이 일정(日精)에 감응하여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는 주몽 설화와 유사하다.
《논형》, 《위략》 등 중국 사료에는 부여의 시조로 동명(東明)을 들고 있다. 동명의 부여 건국 과정은 주몽의 고구려 건국 과정과 일치하여, 동명왕은 부여의 시조이고 동명성왕은 주몽과 동명왕이 겹쳐진 후세의 명칭이라는 견해가 있다.[57]
『삼국유사』에서 북부여가 서기전 59년에 건국되었다고 한 것은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설화와 부여 건국설화를 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부여국의 건국 시기는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로 보아야 한다.[58][59]
추모에 대한 기록은 반(半) 전설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역사적 사실과 신화의 경계에 대한 논쟁이 있다. 이 기록들은 부여, 고구려, 백제의 동명왕 전설과 섞여 있다.[3] 고구려 건국 신화는 광개토대왕릉비를 포함한 고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죽음을 면한 추모는 모둔곡(모둔골, 모둔곡|毛屯谷중국어)에서 세 사람을 만나 성을 하사했다. 삼베 옷을 입은 자는 극재사(극재사|克再思중국어), 승려복을 입은 자는 중실무골(중실무골|仲室武骨중국어), 물풀 옷을 입은 자는 소실묵거(소실묵거|少室默居중국어)로 불렸다. 추모는 이들과 함께 홀본천(홀본강, 홀본천|忽本川중국어)에 도착했다. 추모는 비류수(비류수|沸流水중국어) 근처에 초가집을 짓고 살면서 고구려를 건국하고, 21세(기원전 37년)에 성을 고씨로 바꾸었다.[3][5]
기원전 37년, 재위 원년, 추모는 말갈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3]
추모는 비류강에서 채소 잎을 보고 비류국(沸流國)에 도착했다. 비류국의 왕 송양(松讓)은 추모에게 복종을 요구했지만, 활쏘기 시합에서 추모가 승리했다.[3] 기원전 36년 6월, 송양은 추모에게 항복했고, 추모는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라고 개명하고 송양을 다물후(多勿侯)로 임명했다.[6]
기원전 34년 7월, 성곽과 궁궐 건설이 완료되었다.[7] 기원전 32년 10월, 추모는 오이와 부를 분노(扶芬奴)에게 보내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했다.[8] 기원전 18년 11월, 왕은 부위염(扶尉猒)에게 북옥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부위염은 북옥저를 고구려에 복종시켰다.[9]
기원전 24년 8월, 유화가 동부여에서 사망하여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금와의 대비로서 사당이 세워졌다.[10] 10월, 추모는 금와에게 감사의 표시로 사신을 보냈다. [11]
기원전 19년 4월, 유류(儒留)와 그의 어머니가 부여에서 도망쳐 고구려에 도착했고, 추모는 유류를 태자로 임명했다.[12] 9월, 추모는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용산(龍山)에 묻혔으며,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13]
국가 | 인물 | 출생 또는 발견 장소 | 탄생 설화 | 강 도하 설화 | 건국 위치 | 출처 |
---|---|---|---|---|---|---|
부여 | 부여 동명 | 고리 또는 탁리(탁리|橐離중국어) | 처녀(또는 후궁)가 성령에 의해 임신하여 알을 낳았다. 왕은 소년을 죽이려 했지만 짐승들이 보호했다. | 왕은 동명의 활쏘기 솜씨를 질투하여 동명을 죽이려 했다. 동명은 남쪽으로 도망쳐 이엄수(또는 이엄강; 이엄수|施掩水중국어)에 도착, 활로 강에 화살을 쏘았고,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 동명은 부여에 도착하여 왕이 되었다. | 삼국지[14] 논형[15] |
백제 | 부여 동명 | 색리(색리|索離중국어) 또는 고려 | 처녀(또는 후궁)가 성령에 의해 임신하여 알을 낳았다. 왕은 소년을 죽이려 했지만 짐승들이 보호했다. | 왕은 동명의 활쏘기 솜씨를 질투, 동명은 남쪽으로 도망쳐 엄체수(또는 엄체강) (엄체수|淹滯水중국어)에 도착, 활로 강에 화살을 쏘았고,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 동명은 부여에 도착하여 왕이 되었다. | 북사[16] 수서[17] |
고구려 | 추모 | 북부여 | 추모는 하늘과 하백(강의 신의 딸)의 아들이었고 알에서 태어났다. | (어머니에 의해) 가라는 명령을 받고 부여의 엄리대수(또는 대엄리강) (엄리대수|奄利大水중국어)에 도착, 강에 명령을 내리자 갈대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 비류곡의 홀본에 도착하여 산에 수도를 세웠다. | 광개토대왕릉비[18] |
고구려 | 주몽 | 부여 | 하백의 딸은 햇빛에 의해 임신하여 알을 낳았다. 왕은 알을 깨뜨리려 했지만 짐승들이 보호했다. | 부여 사람들은 주몽의 활쏘기 솜씨를 질투했고, 어머니는 도망가야 한다고 했다. 주몽은 두 동료와 남동쪽으로 도망쳐 강에 도착, 강에 명령을 내리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 주몽은 보술수(또는 보술강; 보술수|普述水중국어)에 도착하여 서로 다른 옷을 입은 세 사람을 발견했다. 주몽과 추종자들은 흑승골성 (흘승골성|紇升骨城중국어)에 고구려를 세우고 성을 고씨로 바꿨다. | 위서[19] |
고구려/당 | 부여 동명 | 동명은 정신에 의해 사천(사천|㴲川중국어)을 건너 나라를 세웠다. |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연남생의 묘비.[20] | |||
고구려/당 | 주몽 | 주몽은 해를 품고 패수(패수|浿水중국어)에 도착하여 수도를 건설했다. |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연남생의 묘비. | |||
신라 | 혁거세 | 나정(나정|蘿井중국어) | 소별도리가 나무 사이에 앉아 우는 말을 보았다. 그가 다가가자 말은 사라졌지만 알을 남겨두었다. 그는 알을 깨뜨렸고 혁거세를 발견했다. | |||
삼국사기 | 금와 | 곤연(곤연|蘿井중국어) | 해부루가 연못에 갔을 때 그의 말이 바위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바위를 치우고 금와를 발견했다. | 금와의 아들 대소가 기병을 보내 주몽을 추격했다. | 삼국사기[3] | |
삼국사기 | 동명성왕으로의 주몽 | 동부여 | 해모수와 잠자리를 함께 했던 유화는 햇빛에 의해 임신하여 알을 낳았다. 금와는 알을 깨뜨리려 했지만 짐승들이 보호했다. | 금와의 아들 대소는 주몽을 질투하게 되었다. 주몽은 남쪽으로 도망쳐 엄사수(엄사수|淹㴲水중국어)에 도착, 자신의 신성한 권위를 선포하며 강에 기도했고,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 주몽은 졸본천에 도착했지만 궁궐을 지을 돈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비류수(비류수|沸流水중국어) 옆의 초가집에 살면서 고구려를 세웠다. 그는 성을 고씨로 바꿨다. | 삼국사기[3] |
이러한 신화의 유사성을 통해 다음을 추정할 수 있다.
- 동명왕의 전설은 부여, 고구려, 백제 등 부여 기원을 가진 왕국들 사이에서 변형되어 공유되었다.
- 부여의 창건 전에 존재했던 부여 북쪽에 고대 왕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동명과 추모는 고구려에서 별개의 존재로 여겨졌지만, 장수왕 통치 이전에는 전설이 혼합되었다. 고구려 건국 이후 많은 부여와 고구려 왕족들이 혼인하여 정통성을 주장하고 부여를 굴복시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또는 의도적으로 섞인 것으로 보인다.
- 동부여는 선비족의 침략 이후에 건설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부여로 돌아가지 않고 북옥저로 도망쳐 동부여를 세웠다. 동부여의 신화 추가는 고구려가 정통성을 주장하고 동부여를 굴복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했거나, 통일 신라 또는 고려 시대에 추가되었을 수 있다.
- 《위서》의 묘사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야기와 가장 유사하다. 《위서》가 쓰여질 때까지 동부여와 관련된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신화가 완성되었다.
- 《삼국사기》가 쓰여질 당시 동명과 추모는 동일 인물로 여겨져 추모의 칭호를 동명으로 사후에 변경했다. 금와의 이야기도 신라의 혁거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에 남아있는 기록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수많은 기록들이 수 세기에 걸쳐 유실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추모는 북부여에서 태어났다. 그는 홀본(忽本)에 도착하여, 홀본 서쪽에 위치한 산에 도읍을 건설했다. 왕위에 싫증이 난 후, 그는 홀본 동쪽 언덕으로 가서 그곳에서 사망했다.[1][18]
'삼국사기'에 따르면, 중국 왕조에서 기록된 이전의 책들에서, 고구려의 역사에 엄청난 불일치가 있는데, 그들은 옛 고구려(고고구려|古高句麗중국어)와 신 고구려(신고구려|新高句麗중국어)를 동일한 실체로 취급하는 반면, 소수맥(소수맥|小水爲중국어)과 동옥저와 관련된 사건들을 분리했다. 옛 고구려는 고조선 멸망 직후 한나라에 의해 점령당해 기원전 107년 현도군에 속한 현이 되었다. 반면에 신 고구려는 추모에 의해 건국되었다. 기원전 82년에 신 고구려는 한나라 군현을 공격했으며, 현도군이 원래 위치에서 고구려 북서쪽 지역으로 쫓겨나게 하는 데 책임이 있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추모는 기원전 82년에 군대를 지휘할 만큼 나이가 많았는데,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가 실제로는 705년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징후가 있다.
- 고자의 묘비에는 고구려의 역사가 70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42년 건국으로 추정)[21]
- 신라는 서기 670년에 고구려의 역사를 800년으로 인정했다. (기원전 130년경 건국으로 추정)[22]
- 당나라는 서기 668년에 고구려의 역사를 900년으로 인정했다. (기원전 232년경 건국으로 추정)[23]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광개토대왕을 추모왕의 17세손이라고 한다. 이것을 17세손의 의미로 본다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 광개토대왕은 동명성왕의 12세손이라고 하는 것과 비교하여 5대나 많다. 그래서 《삼국사기》는 신라 왕실에 연관된 경주 김씨의 김부식이 편찬한 것으로, 신라를 띄우기 위해 고구려의 건국 연도를 신라의 자칭 건국 연도(실제로는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보다 뒤로 미루었다는 설도 있었지만, 현재는 비문의 17세는 "17대째"의 의미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몽(朱蒙)이라는 이름은 사서에 실존하지만, 그의 생애에 관한 확실한 사료는 거의 없으며,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것 외에,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40]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대왕릉비』에 "시조 추모왕을 돌아보니 성스러운 시조왕은 북부여에서 천제의 아들, 어머니는 하백의 딸로서 알에서 태어났다"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으며, 1145년에 성립된 조선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에도, 주몽에 대한 기록이 있다.[40] 그러나 『삼국사기』 편찬보다 700년 이상 전의 이야기이므로, 그에 기록된 것은 지극히 신화적인 이야기이며, 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 하나만 보더라도, 대략 사실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40]
온조왕도 참조
"동명"을 시조로 하는 건국 신화·시조 전설은 부여·고구려·백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지만, 고구려·백제 모두 부여족에 해당되는 등, 『삼국사기』 편찬의 12세기에 『삼국지』가 인용한 동명왕의 부여 건국 신화를 모방하여 창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징으로는 왕의 정치적 권위의 원천을 하늘에 귀속시키고, 동시에 농업 생산을 좌우하는 하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를 『삼국사기』에 기초하여 기술한다.
백제의 온조 왕조는 부여를 성씨로 하고, 그 왕도 또한 부여라고 칭하고 있다. 과거 중국의 동북 지역에 있었던 부여가 남하하여 한반도의 남서부에 왕조를 개창한 것은 대략 상상할 수 있지만, 의거하는 문헌에 따라 이견이 있어 일괄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41].『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 또는 주몽이라고 한다[41]。주몽은 북부여에서 도망쳐 와 그 땅의 부여 왕에게 비범한 재능을 인정받아 그 왕녀를 아내로 맞아 즉위하고 비류, 온조라는 두 왕자가 태어났지만, 과거 주몽이 북부여에 있었을 때 선처(先妻)가 낳은 태자가 나타났기 때문에, 두 왕자는 신변의 위험을 감지하고 나라를 탈출하여 10명의 신하를 데리고 남쪽으로 향했다. 마침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도읍할 땅을 찾으려 하니, 형 비류는 해변에 머물지만, 10명의 신하는 간언하여 도읍을 정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비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미추홀이라는 곳으로 갔다. 거기서 동생 온조가 위례성에 즉위하여 백제를 건국했다[41].부아악, 미추홀 등의 지명을 현재의 지명에 비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한반도를 종단하는 부여의 남하를 나타내는 기록이다. 위례성이 대한민국서울한강의 남쪽 지역을 가리킨다는 데에는 거의 이견이 없으며, 서울올림픽주경기장 등이 있는 강남에 초기 백제의 토성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41].이에 관해 이나바 이와키치는 "태강 6년(285년) 선비의 모용씨에게 습격당한 부여의 잔당은 장백산의 동옥저로 도망갔다 하니, 그것이 전출하여 대방에 들어간 것이 곧 백제일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42]。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분주에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월군의 딸을 얻어 두 아들을 낳았다는 기사가 있다[43]。
"두 아들"은 온조와 비류를 말하며, 이노우에 히데오는 "월군"에 대해 "중국저장성사오싱 지방인가"라고 주석하고 있다[43]。 즉, 저장성 사오싱의 딸이 랴오닝성단둥시환런 현에 와서 주몽과의 사이에 백제의 시조가 되는 온조와 비류를 낳는다. 바이겐싱(산시 사범대학) 및 게지용(정저우 대학)은 시안에서 출토된 당나라 시대 백제인 묘지의 석문에서 망명 백제 귀족에게 "초국 랑야"를 籍貫|적관중국어으로 하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43].산둥반도에서 강남에 이르는 중국 연안부와 백제의 관계를 고려할 때, 중국 연안에서 동해를 건너온 집단, 산둥에서 요동을 거쳐 한반도에 도달했다고 생각되는 집단과 같은 행적을 따른 집단과의 관련성이 지적되고 있다[43]。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설에서는 기원전 37년에 건국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원봉 6년(기원전 75년)에 현도군이 폐지되었을 때, 고구려후로서 자립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 32년에 고구려후는 고구려왕으로 승격되었지만, 이것은 한나라 조정으로부터 받은 칭호이며, 자칭으로는 전설대로 기원전 37년에 실질적으로 왕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여겨진다. 《일본서기》 천지천황기에서는 668년의 고구려 멸망이 중모왕의 건국으로부터 정확히 700년째였다고 하며, 역산하면 건국은 기원전 32년이 된다. 《신당서》 고구려전, 《당회요》 고구려에서는 고종이 질문한 시어사 가언충(가증의 아버지, 가지의 할아버지)의 말로서, 한나라 시대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900년이라고 하지만, 왕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건국을 기원전 37년으로 하는 한편, 보장왕 본기에서는 신당서와 마찬가지로 한나라 시대의 건국으로부터 900년이라고 기록하고, 신라 본기에서 문무왕 10년(670년)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한 책명서에서는 태조의 중모왕으로부터 800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부여의 동명 전설과 고구려의 주몽 전설의 공통 구조는, 양자의 민족적 동일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조 전설을 동일하다고 간주하지 않고, 고구려의 시조 전설에 난생형 설화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과, 광개토왕릉비문과 『위서』 고구려전에 "동명"의 표현이 보이지 않는 것 등에서, 동명 전설의 구성을 바탕으로 고구려 독자적인 요소를 더한 시조 전설이 만들어져, 후의 『삼국사기』에서 동명성왕과 주몽이 동일시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4. 2. 한국사에서의 의의
동명성왕은 기원전 37년 고구려를 건국한 왕으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 대한 확실한 역사적 자료는 부족하며, 대부분 신화적인 이야기에 의존하고 있다.[40]광개토대왕릉비에는 동명성왕이 북부여에서 온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로서 알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40]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에도 동명성왕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이는 신화적인 요소가 강하며, 동명성왕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40]
부여, 고구려, 백제는 모두 "동명"을 시조로 하는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다. 이는 이들 국가가 모두 부여족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신화는 12세기에 삼국지에 나오는 동명왕의 부여 건국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신화는 왕의 권위를 하늘과 연결하고, 농업 생산을 관장하는 하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특징을 보인다.
백제의 온조왕 왕조는 부여를 성씨로 사용하고, 그 왕도 역시 부여라고 불렀다. 이는 중국 동북 지역에 있던 부여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한반도 남서부에 왕조를 세웠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관련 문헌마다 내용이 달라 정확한 설명은 어렵다.[41]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아버지는 동명성왕(추모 또는 주몽)이다.[41] 동명성왕은 북부여에서 도망쳐 와 그 지역 부여 왕의 딸과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왕 두 왕자를 낳았다. 그러나 동명성왕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태자가 나타나자, 두 왕자는 나라를 떠나 남쪽으로 향했다. 온조왕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했다.[41] 위례성은 대한민국서울한강 남쪽 지역으로 추정되며, 서울올림픽주경기장 등이 있는 강남 지역에 초기 백제의 토성 유적이 남아있다.[41]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동명성왕이 졸본부여에서 월군의 딸을 얻어 두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43] "두 아들"은 온조왕과 비류를 가리키며, 월군은 중국저장성사오싱 지방으로 추정된다.[43] 이는 중국 연안에서 동해를 건너온 집단과 백제의 관련성을 시사한다.[43]
전설에 따르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었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75년에 현도군이 폐지되면서 고구려후로서 자립한 것으로 보인다. 32년에 고구려후는 고구려왕으로 승격되었지만, 이는 한나라 조정으로부터 받은 칭호이며, 자칭으로는 기원전 37년에 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668년 고구려 멸망이 동명성왕 건국으로부터 700년째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역산하면 건국은 기원전 32년이 된다. 신당서와 당회요에서는 고구려의 역사를 900년으로 보지만, 삼국사기에서는 기원전 37년 건국과 900년 역사를 함께 기록하고 있다. 신라 기록에서는 고구려 역사를 800년으로 언급한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광개토대왕이 동명성왕의 17세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12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으로 편찬되어 고구려 건국 연도를 늦추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현재는 비문의 17세를 "17대째"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후한서 부여전에는 동명성왕과 관련된 건국 신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여의 동명 전설은 논형과 삼국지 부여전(위략 인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서에는 부여전이 없어지고 고구려전에서 고구려 시조 전설이 전해진다. 이 전설은 동명 전설에 하백(수신)의 외손, 난생 설화가 추가되어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왔으며, 이름을 주몽이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의미한다. 고려 시대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성왕과 주몽을 동일시했고,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는 고구려 시조를 동명왕과 동일시했다. 삼국유사에서는 동명왕(주몽)을 단군의 아들로 묘사하여 민족 통합의 상징으로 여겼다.
부여의 동명 전설과 고구려의 주몽 전설은 민족적 동일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구려 시조 전설에 난생 설화가 포함된 점, 광개토왕릉비문과 위서 고구려전에 "동명" 표현이 없는 점 등을 고려하여, 동명 전설을 바탕으로 고구려 고유의 요소를 더한 시조 전설이 만들어졌고, 삼국사기에서 동명성왕과 주몽이 동일시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5. 대중문화 속 동명성왕
2006년~2007년 MBC 드라마 《주몽》에서 송일국이 동명성왕 역을 맡았다. 2010년~2011년 KBS1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이덕화가, 2007년~2008년 애니메이션 《한자왕 주몽》에서는 이석주가, 2017년 KBS 드라마 《한국사기》에서는 조장호가 동명성왕을 연기했다.
MBC은 2006년 5월부터 2007년 3월까지 개국 기념 드라마로 81부작 드라마 《주몽》을 방영했다. 이 드라마는 역사 기록과 신화에서 요소를 가져와 신화보다 더 현실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부여 왕족의 버릇없는 의붓아들 주몽이 자기 발견의 여정을 시작하고, 부여의 지도자가 되지만, 의붓 형제들의 배신 이후 부여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그렸다. 주몽은 생부 해모수가 이끌었던 무장하고 군사적으로 유능한 게릴라 부대를 재건하여 고대 고조선 유민들을 구출하고 규합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중국 제국의 압제에 맞서 싸우며, 마침내 새로운 국가 고구려의 왕으로 등극한다.
KBS1은 2010년부터 2011년까지 ''근초고왕''(다른 제목: ''The King of Legend'')을 방영했다. 이 드라마에서 주몽은 소서노와 졸본 세력에게 고구려의 권력을 나누어 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폭군으로 묘사된다. 유리명왕이 나타나 주몽의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자, 소서노와 그의 모든 부하와 하인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고구려"를 떠나 "고구려보다 훨씬 더 강력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2017년부터 KCTV는 SEK 스튜디오에서 김경호가 감독한 역사 애니메이션 ''고주몽''을 방영했다.[24][25][26][27] 이 애니메이션은 주몽이 같은 핏줄의 작은 나라들을 규합하여 고구려를 강력한 국가로 건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모수와 유화가 가정을 이루는 때부터 주몽이 태어나기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처음 10편에서는 주몽이 태어나 탈출한 부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28] 첫 번째 에피소드는 2017년 1월 1일에 방영되었으며, 현재까지 24개의 에피소드가 방영되었다.[29] 대한민국 네티즌들은 북한 애니메이션의 퀄리티 발전에 놀라움을 표했다.[30]
6. 가계
- 아버지: 해모수(解慕漱) -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해모수왕(解慕漱王)으로 등장하며,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는 천제(天帝)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 어머니: 하유화(河柳花, ?~24)
- 왕후: 예씨 부인(禮氏夫人) - 고구려(高句麗) 건국 이전에 맞이한 첫 번째 부인이다.
- 왕후: 소서노(召西奴, 66~6) - 졸본부여(卒本扶餘)의 공주(公主)이자 동명성왕(東明聖王)과 결혼하여 왕후(王后)가 되었다.
- ** 아들: 유리명왕(瑠璃明王, 38~18 재위:19~18) - 고구려(高句麗)의 2대 국왕(國王)이다.
- ** 며느리: 송씨부인(松氏夫人) -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이다.
참조
[1]
웹사이트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http://encykorea.aks[...]
2021-09-11
[2]
논문
From Koguryo to Tamna: Slowly riding to the South with speakers of Proto-Korean
2013
[3]
웹사이트
Samguk Sagi Book 13 History of Goguryeo Part 1 Section 1
http://db.history.go[...]
2021-09-08
[4]
서적
Shoku Nihongi
[5]
웹사이트
Samguk Sagi Book 23 History of Baekje Part 1 Section 1
http://db.history.go[...]
2021-09-15
[6]
웹사이트
Samguk Sagi Book 13 History of Goguryeo Part 1 Section 2
http://db.history.go[...]
2021-09-13
[7]
웹사이트
Samguk Sagi Book 13 History of Goguryeo Part 1 Section 6
http://db.history.go[...]
2021-09-14
[8]
웹사이트
Samguk Sagi Book 13 History of Goguryeo Part 1 Section 8
http://db.history.go[...]
2021-09-14
[9]
웹사이트
Samguk Sagi Book 13 History of Goguryeo Part 1 Section 10
http://db.history.go[...]
2021-09-14
[10]
웹사이트
Samguk Sagi Book 13 History of Goguryeo Part 1 Section 11
http://db.history.go[...]
2021-09-15
[11]
웹사이트
Samguk Sagi Book 13 History of Goguryeo Part 1 Section 12
http://db.history.go[...]
2021-09-15
[12]
웹사이트
Samguk Sagi Book 13 History of Goguryeo Part 1 Section 13
http://db.history.go[...]
2021-09-15
[13]
웹사이트
Samguk Sagi Book 13 History of Goguryeo Part 1 Section 14
http://db.history.go[...]
2021-09-15
[14]
웹사이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2021-09-12
[15]
웹사이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2021-09-12
[16]
웹사이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2021-09-12
[17]
웹사이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2021-09-12
[18]
웹사이트
Gwanggaeto Stele
http://db.history.go[...]
2021-09-16
[19]
웹사이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2021-09-13
[20]
웹사이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2021-09-12
[21]
웹사이트
Tombstone of Go Ja
http://db.history.go[...]
2021-09-18
[22]
웹사이트
Samguk Sagi Book 6 History of Silla 6 Section 103
http://db.history.go[...]
2021-09-18
[23]
웹사이트
New Book of Tang
http://db.history.go[...]
2021-09-18
[24]
뉴스
North Korea releases new animation episodes on Goguryeo kingdom founder
https://www.koreatim[...]
2018-10-05
[25]
뉴스
북한 만화영화 '고주몽' 인기몰이…"하나의 핏줄" 강조
https://www.yna.co.k[...]
2017-01-28
[26]
웹사이트
기다리는 《고주몽》의 련속편들
http://www.uriminzok[...]
[27]
뉴스
[취재파일] 북한 TV에 등장한 '주몽'
https://news.sbs.co.[...]
2017-01-06
[28]
웹사이트
력사만화영화 《고주몽》 새로 창작
http://www.uriminzok[...]
2016-12-13
[29]
웹사이트
고주몽 제1부 (Go Jumong Part 1)
https://www.youtube.[...]
2019-05-06
[30]
뉴스
북한은 왜? <北, 최신만화영화 <고주몽> 제작 수준은?>
http://imnews.imbc.c[...]
2017-02-06
[31]
문서
고구려어에 성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어와 베트남어에서 "蒙"자는 평성 동운으로, "解"자는 상성 해운으로 읽힌다.
[32]
논문
A Comparison of the Korean and Japanese Approaches to Foreign Family Names
http://www.sciea.org[...]
동아시아문화교섭학회
2014
[33]
뉴스
삼국사기 권제이십팔 백제본기 제육
http://db.history.go[...]
국사편찬위원회
[34]
뉴스
삼국사기 권제십팔 고구려본기 제육
http://db.history.go[...]
국사편찬위원회
[35]
웹사이트
의자왕 義慈王
http://terms.naver.c[...]
한국인문고전연구소
[36]
뉴스
광개토왕 廣開土王
https://terms.naver.[...]
한국人文古典研究所
[37]
뉴스
유화부인 柳花夫人,?~?
https://www.doopedia[...]
[38]
뉴스
하백 河伯
https://www.doopedia[...]
[39]
뉴스
하백(河伯)
http://encykorea.aks[...]
[40]
서적
韓流時代劇と朝鮮史の真実
扶桑社
2013-08-08
[41]
뉴스
魏志「東夷伝」における原初の北東アジア諸民族に関する論攷
http://id.nii.ac.jp/[...]
島根県立大学
2001-03-30
[42]
서적
朝鮮史・満洲史
平凡社
1941
[43]
뉴스
濊倭同系論
古代文字資料館
2021-07
[44]
문서
고구려 등 조류를 숭배하던 민족에서는, 알이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45]
문서
삼국사기는 광개토왕을 19대 왕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보다 2대 적은 수치이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의 계보는 여러 단계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광개토왕 시대에는 후대 삼국사기의 계보가 완성되지 않아, 두 명의 왕이 추가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46]
문서
삼국사기, 광개토왕릉비, 모두루 묘지명
[47]
문서
삼국사기
[48]
문서
삼국유사
[49]
문서
삼국사기
[50]
웹사이트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책봉하다
https://db.history.g[...]
[51]
문서
삼국사기 권제13
[52]
문서
삼국사기 권제13
[53]
문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권
기원전 37년
[54]
서적
[55]
문서
백제 시조 비류왕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설명
[56]
뉴스
고구려는 언제 건국되었을까?
http://www.ohmynews.[...]
[57]
논문
주몽 연구, 부여건국시조신화고
[58]
논문
夫餘國의 신화적 변동과 東明神話의 시·공간적 推移
고려사학회
[59]
논문
부여의 변천과 동부여 문제
[60]
뉴스
[시론] 日王발언과 한.일 관계..李道學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https://news.naver.c[...]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