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료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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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 료센은 모리 모토나리가 자신의 아들들을 깃카와 씨와 고바야카와 씨의 당주로 삼아 모리 씨를 중심으로 깃카와, 고바야카와 두 가문이 협력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이 체제는 모리 가문의 아키 지방 지배를 강화하고, 이후 주고쿠 지방의 패자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간에 '료센'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이후 도요토미 정권과의 관계 속에서 깃카와, 고바야카와 가문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가문은 영토가 축소되었지만, 료센 체제의 유산은 조슈 번의 정치 체제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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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깃카와씨 (모토하루류) - 깃카와 모토하루
깃카와 모토하루는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모리 모토나리의 차남으로, 깃카와 가문을 이어 모리 가문의 세력 확장에 기여한 무장이다. - 조슈번 - 메이린칸
메이린칸은 1718년 하기성에 설립된 에도 시대 조슈번의 번교로, 야마구치에도 분립되어 운영되었으며,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을 배출했고, 현재 하기 메이린칸 터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조슈번 - 하기성
하기성은 센고쿠 시대에 축조되어 에도 시대 조슈 번의 거성이었으며, 1608년에 완공되었고, 1863년 번청이 이전하면서 그 역할을 다했으며, 현재는 국가 사적 및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고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 모리 모토나리 - 이쓰쿠시마 전투
이쓰쿠시마 전투는 1555년 모리 모토나리가 스에 하루카타의 오우치 씨 군세를 이쓰쿠시마에서 기습하여 크게 승리한 전투로, 모리 씨가 주고쿠 지방의 패권을 장악하는 발판이 되었으며 뛰어난 전략과 무라카미 수군의 협력이 주요 요인이었다. - 모리 모토나리 - 호이다 모토키요
호이다 모토키요는 모리 모토나리의 아들로 태어나 호이다 모토스케의 양자가 되어 호이다 가문을 상속받았으며, 임진왜란 당시 모리 가문의 총대장으로 조선에 출병하여 활약하다가 사쿠라오 성에서 사망했다.
모리 료센 | |
---|---|
모리 료센 | |
개요 | |
종류 | 모리 씨의 가신단 |
봉록 | 1만 석 이상 |
가문 | 깃카와 씨 고바야카와 씨 |
상세 정보 | |
모리 료센 (毛利両川) |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모리 씨를 지지한 2개의 가문을 가리키는 말 |
해당 가문 | 깃카와 씨 고바야카와 씨 |
깃카와 씨 | 모리 모토나리의 차남인 깃카와 모토하루를 시조로 하는 가문 |
고바야카와 씨 | 모리 모토나리의 삼남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시조로 하는 가문 |
특징 | 모리 씨 일족으로서 높은 지위와 봉록을 받으며, 모리 씨의 군사 및 정치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 |
참고 | 모리 씨의 다른 일족인 모리 히로모토의 후손인 모리 씨 (분가)는 모리 료센에 포함되지 않음 |
2. 성립 배경
모리 모토나리는 친아들인 모토하루, 다카카게를 깃카와 씨, 고바야카와 씨의 당주로 삼았다. 당시 모리 씨는 아키의 국인 영주 맹주적인 지위에 있었지만, 그들을 강압적으로 지배할 만한 정치·군사력은 없었다. 깃카와, 고바야카와 양 씨도 모리 씨와 대등한 입장의 국인 영주였다. 모리 씨에 의한 아키의 완전 지배는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스에 하루카타를 쓰러뜨리고 오우치 씨를 멸망시킨 고지 연간(1555년 ~ 1558년) 이후 확립되었다.[1]
1557년 모리 모토나리가 적자인 다카모토에게 가독을 양도할 때,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모리 씨의 운영에 참여하여 자신을 보좌하는 것을 조건으로 다카모토는 가독 계승을 승낙했다. 같은 해 11월 25일 (1557년 12월 15일)에 모토나리는 다카모토, 모토하루, 다카카게 삼자에게 "모토나리 교훈장"을 내렸다. 모토나리는 모리 가문을 존속시키는 것을 첫 번째로 하고, 다른 성씨(깃카와, 고바야카와)는 당장의 것이며, 형제가 협력하여 모리 가문을 지키도록 설파했다. 이것이 모리 종가를 중심으로 깃카와, 고바야카와 양 씨가 이를 지지하는 "모리 료센" 체제의 성립 시기로 여겨진다.[1]
이후 다카모토를 고령의 모토나리가 후견하고, 모토하루, 다카카게가 이를 보좌하는 체제로 임한 모리 씨는 아마고 씨를 제압하여 산요·산인의 대부분을 제압했다. 다카모토의 요절, 모토나리의 병사 후에는 다카모토의 유아인 테루모토를 모리 씨 당주로 옹립함으로써 산인·산요의 패자·모리 씨의 기초를 쌓아갔다.[1]
덴쇼 13년 (1585년) 7월 21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보낸 서간에 "료센"이라는 말이 등장하여, 당시부터 "료센"이라는 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1]
2. 1. 모리 모토나리의 전략
모리 모토나리가 친아들인 모토하루, 다카카게를 깃카와 씨, 고바야카와 씨의 당주로 삼았을 당시 모리 씨는 아키의 국인 영주 맹주적인 지위에 있었지만, 그들을 강압적으로 지배할 만한 정치·군사력은 갖추지 못했고, 깃카와, 고바야카와 양 씨도 모리 씨와 대등한 입장의 국인 영주였다. 모리 씨에 의한 아키의 완전 지배가 확립되어 가는 것은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스에 하루카타를 쓰러뜨리고 오우치 씨를 멸망시킨 고지 연간(1555년 ~ 1558년)에 들어선 이후의 일이다.[1]고지 3년 (1557년), 모리 모토나리가 적자인 모리 타카모토에게 가독을 양도할 때,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모리 씨의 운영에 참여하여 자신을 보좌하는 것을 조건으로 다카모토는 가독 계승을 승낙했다. 같은 해 11월 25일 (1557년 12월 15일)에 모토나리는 다카모토, 모토하루, 다카카게 삼자에게 유명한 "모토나리 교훈장"을 내렸다. 모토나리는 모리 가문을 존속시키는 것을 첫 번째로 하여, 다른 이름(깃카와, 고바야카와)은 당장의 것이라는 것, 형제가 협력하여 모리 가문을 지키도록 설파했다. 이것이 모리 종가를 중심으로 깃카와, 고바야카와 양 씨가 이를 지지하는 "모리 료센" 체제의 성립 시기로 여겨진다.[1]
이후 다카모토를 고령의 모토나리가 후견하고, 모토하루, 다카카게가 이를 보좌하는 체제로 임한 모리 씨는 아마고 씨를 제압하여 산요·산인의 대부분을 제압했고, 다카모토의 요절, 모토나리의 병사 후에는 다카모토의 유아인 테루모토를 모리 씨 당주로 옹립함으로써 산인·산요의 패자·모리 씨의 기초를 쌓아갔다.[1]
덴쇼 13년 (1585년) 7월 21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보낸 서간에 "료센"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어, 당시부터 "료센"이라는 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1]
2. 2. 깃카와 가문과 고바야카와 가문의 역할
모리 모토나리가 친아들인 모토하루, 타카카게를 깃카와 씨, 고바야카와 씨의 당주로 삼았을 당시, 모리 씨는 아키의 국인 영주 맹주적인 지위에 있었지만, 그들을 강압적으로 지배할 만한 정치·군사력은 없었다. 깃카와, 고바야카와 양 씨도 모리 씨와 대등한 입장의 국인 영주였다. 모리 씨에 의한 아키의 완전 지배가 확립된 것은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스에 하루카타를 쓰러뜨리고 오우치 씨를 멸망시킨 고지 연간 이후였다.고지 3년 (1557년), 모리 모토나리가 적자인 타카모토에게 가독을 양도할 때,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모리 씨의 운영에 참여하여 자신을 보좌하는 것을 조건으로 타카모토는 가독 계승을 승낙했다. 같은 해 11월 25일 (1557년 12월 15일)에 모토나리는 타카모토, 모토하루, 타카카게 삼자에게 "모토나리 교훈장"을 내렸다. 모토나리는 모리 가문을 존속시키는 것을 첫 번째로 하여, 다른 성씨(깃카와, 고바야카와)는 당장의 것이라는 것, 형제가 협력하여 모리 가문을 지키도록 설파했다. 이것이 모리 종가를 중심으로 깃카와, 고바야카와 양 씨가 이를 지지하는 "모리 료센" 체제의 성립 시기로 여겨진다.
이후 타카모토를 고령의 모토나리가 후견하고, 모토하루, 타카카게가 이를 보좌하는 체제로 임한 모리 씨는 아마고 씨를 제압하여 산요·산인의 대부분을 제압했다. 타카모토의 요절, 모토나리의 병사 후에는 타카모토의 유아인 테루모토를 모리 씨 당주로 옹립함으로써 산인·산요의 패자·모리 씨의 기초를 쌓아갔다.
덴쇼 13년 (1585년) 7월 21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바야카와 타카카게에게 보낸 서간에 "료센"이라는 말이 등장하여, 당시부터 "료센"이라는 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3. 전개 과정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면서 주고쿠 공격의 위기에서 벗어났으나, 오다 정권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그 향방은 모리 가문의 미래에 큰 영향을 주었다. 1583년 기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후쿠하라 사다토시는 회의를 통해 다카카게는 하시바 히데요시(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모토하루는 시바타 가쓰이에 등 반(反) 히데요시 세력과 접촉하여 균형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2] 히데요시가 승리하면서 다카카게와 안코쿠지 에케이를 통해 모리 가문과 도요토미 정권의 관계가 강화되었다.[2]
1592년 조선 출병을 위해 히로시마 성에 들어간 히데요시는 모리 히데모토를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로 삼는 것을 승인했다.[3][4] 1597년 다카카게가 사망하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가독을 이으면서 "모리 료센"으로서의 고바야카와 가문은 소멸했다.
1599년 히데모토는 나가토 국 등 17만 석을 받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처럼 모리 가신이면서 독립 다이묘가 되었다.[3]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기카와 히로이에간의 영지 문제를 재검토하여 히데모토에게는 나가토 등 17만 석, 히로이에의 영지는 그대로, 다카카게의 유령은 모리 가문에 반환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6][7]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모토와 안코쿠지 에케이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계획에 따라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하여 서군에 가담하려 했다. 그러나 후쿠하라 히로토시 등 중신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내통하여 모리 가문의 존속을 꾀하기로 결정했고, 히로이에도 이에 동의했다. 이때 히데모토는 서군, 히로이에는 동군에 붙어 모리 가문의 존속을 도모했으나,[9] 연락 문제와 사전 작업 부족으로 모리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 패전 후 영지가 크게 줄었다.[10]
3. 1. 도요토미 정권과의 관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한 주고쿠 공격에 노출되었으나,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면서 위기를 벗어났다. 하지만 오다 정권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오다 정권의 향방은 모리 가문의 미래에 큰 영향을 주었다.1583년 6월 10일(덴쇼 11년 4월 20일), 기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후쿠하라 사다토시는 회의를 통해 다카카게는 하시바 히데요시(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모토하루는 시바타 가쓰이에 등 반(反) 히데요시 세력과 접촉하여 균형을 유지하고, 어느 쪽이 승리하든 오다 정권과의 충돌을 피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모리 료센 체제는 더욱 정치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 히데요시가 승리하면서 다카카게와 안코쿠지 에케이를 통해 모리 가문과 도요토미 정권의 관계가 강화되었다.[2]
히데요시는 시코쿠 정벌 후, 데루모토와 다카카게를 분리시키려 했다. 1592년 5월 22일(덴쇼 20년 4월 11일) 조선 출병을 위해 히로시마 성에 들어간 히데요시는 모리 히데모토를 데루모토의 양자로 삼는 것을 승인했다.[3][4] 한편, 기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데루모토에 의해 오키 국을 받아 수습되었으나, 양자 간에는 앙금이 남아 있었다.[5]
1595년(분로쿠 4년) 데루모토에게 아들 모리 히데나리가 태어나자, 1598년 히데요시 사망 직전 히데나리의 모리 가문 계승과 히데모토의 독립 다이묘화가 승인되었다. 1599년 히데모토는 나가토 국 등 17만 석을 받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처럼 모리 가신이면서 독립 다이묘가 되었다.[3]
1597년 다카카게가 사망하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가독을 이으면서 "모리 료센"으로서의 고바야카와 가문은 소멸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히데모토의 독립 다이묘화 과정에서 기카와 히로이에의 영지를 조정하려 했으나, 히로이에 등의 반발을 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문제를 재검토하여 히데모토에게는 나가토 등 17만 석, 히로이에의 영지는 그대로, 다카카게의 유령은 모리 가문에 반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 사건은 모리 가문에 혼란을 야기하고, 히로이에가 미쓰나리에게 반발하고 이에야스에게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다.[6][7]
이러한 상황에서 데루모토는 히데모토에게 "히데나리를 위해 다카카게, 모토하루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헌신해 달라"고 당부했다.[8] 이에 따라 조후 모리 가문(구 호이다 씨)이 기카와 가문과 함께 새로운 "료센" 역할을 맡게 되었다. 히로이에 역시 데루모토에게 충성을 맹세했다.[8]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모토와 안코쿠지 에케이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계획에 따라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하여 서군에 가담하려 했다. 그러나 후쿠하라 히로토시 등 중신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내통하여 모리 가문의 존속을 꾀하기로 결정했고, 히로이에도 이에 동의했다. 이때 히데모토는 서군, 히로이에는 동군에 붙어 모리 가문의 존속을 도모했다.[9]
하지만 연락 문제와 사전 작업 부족으로 모리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 패전 후 영지가 크게 줄었다.[10] 데루모토는 기카와 히로이에를 이와쿠니 번에, 모리 히데모토를 조후 번에 배치했다.[11] 이후 조슈 번은 막부의 허가를 받아 영지를 36만 9천 석으로 늘렸고,[12] 이와쿠니 번 영지도 6만 석으로 늘었다.
이후, 도요토미 정권에서 다이묘로 인정받았던 조후 모리 가문은 다이묘, 인정받지 못했던 이와쿠니 기카와 가문은 배신으로 신분이 고정되었다. 이로 인해 조후 모리 가문과 이와쿠니 기카와 가문은 모리 종가를 지지하면서도 경쟁하는 관계로 변했다.
3. 2. 세키가하라 전투와 감봉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는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내세워 서군에 가담시키려 했다. 그러나 모리 히데모토와 안코쿠지 에케이는 주요 중신들의 반발에 부딪혔다.[9] 7월 15일 후쿠하라 히로토시, 시시도 모토쓰구, 마스다 모토요시, 구마가이 모토나오 등 중신들은 비밀 회의를 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내통, 서군 패배 시 모리 가문의 존속을 도모하기로 결정했고, 기카와 히로이에도 이에 동의했다.[9] 히데모토는 서군, 히로이에는 동군에 붙어 모리 가문의 존속을 꾀했다.[9]하지만 히로이에와 히데모토의 연락 부족, 히로이에 측의 사전 작업 미흡으로 서군이 패배하자, 모리 가문은 아키 8개국 112만 석에서 스오, 나가토 2개국 29만 8천 석으로 대폭 감봉되었다.[10] 데루모토는 동쪽 수비로 스오 이와쿠니 3만 석에 히로이에를, 서쪽 수비로 나가토 조후 6만 석에 히데모토를 배치했다.[11] 히데모토는 개역 처분을 받지 않아 조슈 번의 지번이라는 형식으로 대명(大名)의 격을 유지했다.
이후 조슈 번은 막부의 양해를 얻어 36만 9천 석으로 고쳐졌고[12], 이와쿠니 영지도 6만 석으로 변경되었다. 도요토미 정권에서 다이묘로 인정받았던 조후 모리 가문은 다이묘, 인정받지 못했던 이와쿠니 기카와 가문은 배신으로 가격이 고정되었다. 이로써 조후 모리 가문과 이와쿠니 기카와 가문은 모리 종가를 지지하면서도 경쟁하는 관계로 변모했다.
4. 군사 배치
모리 료센은 각지에 일족을 배치하여 군사를 관리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방면 | 성/지역 | 담당자 |
---|---|---|
산인 | 돗토리성 | 깃카와 쓰네이에 |
산인 | 갓산토다성 | 깃카와 모토하루, 깃카와 모토나가, 깃카와 히로이에 |
산인 | 이와미 은광 | 깃카와 쓰네야스 (은거) |
산인 | 하마다 | 모리 모토우지 |
산요 | 빗추국(備中国)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모리 히데카네(毛利秀包) (고바야카와 수군) |
산요 | 나가토국(長門国) | 이치카와 츠네요시, 나이토 타카하루 |
산요 | 스오국(周防国) | 미나카타 나리마사 |
아키 | 요시다고리야마성 | 모리 모토나리, 모리 다카모토, 모리 데루모토 |
아키 | 사쿠라오성 | 가쓰라 모토즈미 |
아키 | 구사쓰성 | 고다마 나리타카 → 고다마 나리히데 |
4. 1. [[산인도|산인]] 방면군
4. 2. [[산요도|산요]] 방면군
지역 | 담당 무장 | 비고 |
---|---|---|
빗추국(備中国)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모리 히데카네(毛利秀包) | 고바야카와 수군 |
나가토국(長門国) | 이치카와 츠네요시, 나이토 타카하루 | |
스오국(周防国) | 미나카타 나리마사 |
4. 3. [[아키노쿠니|아키]] 직할령
5. 쇠퇴와 종말
1634년 모리 히데모토와 기카와 히로마사의 독립 시도가 좌절되면서 모리 료센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후 조슈 번은 번주와 가로 등 중신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는 정치 체제로 전환되었다.[15]
5. 1. 에도 막부 시대의 변화
기카와 히로이에가 번정에서 물러난 후, 모리 히데모토가 집정을 맡았지만 실제 번정은 모리 데루모토와 친기카와 파의 후쿠하라 히로토시가 주도했다.[13] 히로토시는 에도 막부의 중진 혼다 마사노부와 가까웠고, 그의 아래에서 번정은 안정을 찾았다.[13]1613년, 히데모토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를 후실로 맞이하자, 데루모토는 히데모토가 도쿠가와 씨와 연결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히데모토와 히로토시에게 공동으로 히데나리의 후견을 맡도록 명령했다.[13] 이후 히데모토는 히로토시에게 불만을 품은 중신들과 결탁하여 서로를 배척하려 했다.[13]
오사카 전투가 발생하자 히로이에와 히로토시는 데루모토에게 막부군 참가를 권했다. 그러나 히데모토는 데루모토와 극비리에 협의하여 도요토미 측이 승리할 경우를 대비해 나이토 모리모리를 오사카 성에 입성시켰다가 패전 후 처형했다.[14] 이는 히로이에가 세키가하라에서 했던 것과 같았지만, 중대한 계획을 소수의 측근들만으로 결정하고 히로이에와 히로토시 등 중신들에게는 알리지 않아 격분한 히로에는 이와쿠니 성에 은거하고 히로토시도 사퇴했다.[14]
히데모토는 이에야스와의 혼인 관계와 로주도이 도시카쓰와의 친분을 믿고 번정을 장악하려 했고, 겐나 9년 (1623년) 데루모토의 은거를 이유로 히데나리가 정식 당주로 취임, 히데모토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명령으로 시치오키를 수행하게 되었다.[15] 히데모토는 이를 방패 삼아 조후 번의 가격 상승과 기카와 씨 압박을 강화했다. 데루모토는 히데모토의 정치력에 기대하면서도 기카와 씨 및 지지 중신들과의 대립을 우려, 모리 나리타카에게 히데모토의 딸을 시집보내는 등 양가의 유지를 호소했다.[15] 그러나 데루모토 사후 간에이 2년 (1625년) 히데모토 주도로 대규모 가신 이봉이 강행되어 번주와 같은 권력을 행사했다.[15]
히데모토의 전횡은 히데나리의 반감을 샀고, 1631년 아들 모리 미쓰히로와 히데나리 딸의 혼례 파탄으로 전면 충돌 위기에 이르렀다. 히데모토는 집정을 사임했고, 1632년 기카와 히로마사가 새 집정이 되었다.[15] 그러나 실제 정무는 마스다 모토요시가 주도했고, 히데나리도 점차 마스다 등의 보좌를 받으며 정무를 맡게 되었다.[15] 1634년 히데모토, 히로마사의 독립 저지를 거쳐 조슈 번 모리 씨는 번주와 중신 중심의 번 운영 체제로 이행, "모리 료센" 시대는 사실상 종료되었다.[15]
5. 2. 료센 체제의 유산
1634년 모리 히데모토·기카와 히로마사의 독립 저지를 거쳐, 조슈 번 모리 씨는 번주와 가로 등 중신을 중심으로 한 번 운영에 의한 정치 체제로 이행하게 되었고, 당주가 친족 2가(家)에 의해 보좌되는 "모리 료센"의 시대는 사실상 종료하게 되었다.[15]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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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3]
서적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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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吉川広家をめぐる三つの転機
戎光祥出版
[6]
논문
吉川広家をめぐる三つの転機
戎光祥出版
[7]
논문
豊臣~徳川移行期における<取次>―公儀-毛利間を中心に―
戎光祥出版
[8]
서적
[9]
서적
[1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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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2]
문서
[1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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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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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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