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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쓰쿠시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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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쓰쿠시마 전투는 1555년, 모리 모토나리가 스에 하루카타가 이끄는 오우치 군을 기습하여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모리 모토나리는 다양한 모략을 통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고, 무라카미 수군의 지원을 받아 이쓰쿠시마에 상륙한 스에 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모리 가문은 서일본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오우치 가문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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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쓰쿠시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이름이쓰쿠시마 전투 (厳島合戦)
로마자 표기Itsukushima Kassen
시기센고쿠 시대
날짜1555년 10월 16일
장소아키노쿠니 이쓰쿠시마 (현재 히로시마현 하쓰카이치시 미야지마)
결과모리 씨의 승리, 도 씨와 오우치 씨의 약체화
[[미야지마, 히로시마현|미야지마]] 해안의 모습. 왼쪽에는 [[이쓰쿠시마]] [[도리이]], 멀리 본토가 보인다 (2012년).
미야지마 해안 (2012년)
교전 세력
교전 1오우치 씨
교전 2모리 씨
지휘관 및 지도자
오우치 군오우치 요시나가, 스에 하루카타, 히로나카 다카카네
모리 군모리 모토나리, 모리 다카모토,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후쿠바라 사다토시, 구치바 미치요시, 이이다 요시타케, 고다마 나리카타, 무라카미 다케요시
병력 규모
오우치 군20,000 – 30,000명
모리 군4,000 – 10,000명
피해 규모
오우치 군~4,700명
모리 군경미

2. 배경

1551년 스에 다카후사(陶隆房)가 다이네이지의 변을 일으켜 오우치 요시타카를 죽이고 오우치 요시나가를 명목상의 군주로 내세워 오우치 씨를 괴뢰정권으로 만들어 사실상의 실권자가 되었다. 이 혼란을 틈타 모리 모토나리빗추빈고 방면으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스오 국 ・ 나가토 국을 본거지로 하는 오우치 씨는 아키 국이나 이와미 국의 고쿠진들도 휘하에 두고 있었는데, 이와미 국 산본마쓰 성의 요시미 마사요리가 스에 타도를 외치며 군사를 일으켰다. 1554년 3월에 일어난 산본마쓰 성 전투에서 마사요리는 오우치 ・ 스에 군세에 의해 포위되어 모토나리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이때 하루카타도 모토나리에게 마사요리 토벌을 위한 원군을 요청했다. 양쪽의 요청을 받은 모토나리는 고민 끝에 마사요리 측에 가담한다.

모토나리는 아키 일대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5월에 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사토카나야마 성, 아마쓰 성, 사쿠오 성 등 4개 성을 공략하고 이쓰쿠시마까지 점령한다. 그리고 스에 씨와의 결별에 대비하여 이쓰쿠시마 ・ 히로시마 만 주변의 여러 성이나 수군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5월 15일에는 스오 국 고가 군까지 침입해 고세 ・ 미소(이와쿠니 시)에서 스에 군과 교전하였다.[8]

1554년 6월 5일 오시키바타 전투에서 미야가와 후사나가가 이끄는 스에 군을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모토나리의 지휘로 대파했다.

모리와 스에의 공방은 바다로도 번졌다. 6월 중순에는 모리 측 수군이 스에 씨 본거지인 스오 국 도미타우라(와카야마 성 주변)를 습격했다.[8] 이에 대해 스에 측도 수군으로 이쓰쿠시마를 쳤는데, 미야오 성의 방비로 스에 군의 상륙은 막혔다. 7월이 되어 스에 측의 조략으로 구레 ・ 노미의 게고슈(경고중)가 모리로부터 이반하였는데, 9월에는 모리와 고바야카와의 게고슈가 양자를 쳤다.[8] 노미 섬을 점령했다.[9]

1554년 8월 하순(이르면 9월 2일)에 요시미 마사요리와의 화친이 성립되고, 이후 오우치 ・ 스에 군은 모리 대책에 집중하게 되었다.

2. 1. 다이네이지의 변과 스에 하루카타의 집권

1551년(덴분 20년) 스에 다카후사다이네이지의 변을 일으켜 주군 오우치 요시타카를 죽이고 반대세력을 제거한 후, 요시타카의 조카 오우치 요시나가를 명목상의 군주로 내세워 오우치 씨를 괴뢰정권으로 만들고 사실상 실권자가 되었다.[2]

2. 2. 요시미 마사요리의 거병과 산본마쓰 성 전투

1551년 스에 다카후사다이네이지의 변을 일으켜 오우치 요시타카를 죽이고 오우치 요시나가를 내세워 오우치 씨를 괴뢰정권으로 만들었다. 이 혼란을 틈타 모리 모토나리는 세력을 확대했다. 스오 국 ・ 나가토 국을 본거지로 하는 오우치 씨는 아키 국이나 이와미 국의 고쿠진들도 휘하에 두고 있었는데, 이와미 산본마쓰 성의 요시미 마사요리가 스에 타도를 외치며 군사를 일으켰다. 1554년 3월에 일어난 산본마쓰 성 전투에서 마사요리는 오우치 ・ 스에 군세에 의해 포위되어 모토나리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이때 하루카타도 모토나리에게 마사요리 토벌을 위한 원군을 요청했다. 양쪽의 요청을 받은 모토나리는 고민 끝에 마사요리 측에 가담한다. 그동안 맹약을 맺어왔던 하루카타에겐 모토나리의 배신은 충격이 컸었고, 이로써 모리 씨 토벌을 굳히게 된다. 하루카타와 마사요리의 싸움은 급히 종결되고, 대결은 모토나리와 하루카타로 좁혀지게 되었다.[8]

2. 3. 모리 모토나리의 결단과 보게이 분쟁

1551년 스에 다카후사가 다이네이지의 변을 일으켜 오우치 요시타카를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자, 모리 모토나리빗추빈고 방면으로 세력을 확대하며 지배력을 강화했다.

요시미 마사요리가 스에 타도를 외치며 군사를 일으키자, 1554년 3월 산본마쓰 성 전투가 벌어졌다. 마사요리는 모토나리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하루카타도 모토나리에게 마사요리 토벌을 위한 원군을 요청했다. 모토나리는 고민 끝에 마사요리 측에 가담하여 하루카타와 결별했다.

모토나리는 아키 국 남부를 공략하며 이쓰쿠시마까지 점령했다. 5월 15일에는 스오 국 고가 군까지 침입해 스에 군과 교전했다.[8] 6월 5일 오시키바타 전투에서 모리군은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미야가와 후사나가가 이끄는 스에 군을 대파했다.

이후 모리 군은 사사이 군 야마자토 지역을 공격했으나, 잇큐의 저항에 부딪혔다. 8월에 모토나리가 직접 출진했지만 공격에 실패했고, 10월 25일에야 잇큐 세력 일부를 회유하여 도모다 다카모리의 요해처를 함락시켰다.

6월 중순, 모리 측 수군이 스에 씨 본거지인 스오 도미타우라를 습격했다. 스에 측도 수군으로 이쓰쿠시마를 공격했으나 미아오 성의 방어로 상륙에 실패했다. 7월, 스에 측의 조략으로 呉 ・ 노미의 게고슈(경고중, 수군)가 모리로부터 이반했으나, 9월에 모리와 고바야카와의 게고슈가 이들을 공격하여 노미 섬을 점령했다.[8]

8월 하순(이르면 9월 2일), 요시미 마사요리와의 화친이 성립되자 오우치 ・ 스에 군은 모리 대책에 집중하게 되었다.

2. 4. 오시키바타 전투

1554년 6월 5일, 스에 하루카타는 가신 미야가와 후사나가를 파견하여 모리 모토나리를 공격하게 하였다. 하지만 미야가와 군은 오시키바타 전투에서 모리 군에게 대패하였다.[1] 이 전투에서 모리 군은 3,000명, 스에 군은 7,000명으로 병력에서 열세였으나, 모토나리의 지휘 아래 대승을 거두었다.

오시키바타 전투의 패배 소식에 하루카타는 오우치 요시나가의 힘을 모두 모아 모리 씨를 멸망시키기로 결심하고 전면전을 준비한다.[1]

『타나모리 후사아키 각서(棚守房顕覚書)』에 따르면, 이때 미야가와 후사나가는 야마시로슈(山代衆)와 보슈슈(防州衆)로 구성된 2,000~3,000명의 군세를 이끌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하루카타가 미야가와 후사나가에게 충분한 병력을 주지 않은 채 아키 국으로 진공하게 하여, 모리 씨와의 전투 초전에서 큰 패배를 겪게 되었다.

2. 5. 스오 국에서의 공방

1551년 스에 다카후사다이네이지의 변을 일으켜 오우치 요시타카를 제거한 후, 모리 모토나리빗추국빈고국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1554년 3월, 요시미 마사요리가 스에 타도를 외치며 거병하자, 모토나리는 마사요리를 지원하며 스에 씨와 대립하게 되었다.

1554년 5월, 모리 모토나리는 군사를 이끌고 아키 남부를 공략하여 사토카나야마 성, 아마쓰 성, 사쿠오 성 등 4개 성을 점령하고 이쓰쿠시마까지 진출했다. 5월 15일에는 스오 국 고가 군까지 침입하여 고세, 미소(이와쿠니 시)에서 스에 군과 교전했다.[8] 6월 5일, 오시키바타 전투에서 미야가와 후사나가가 이끄는 스에 군을 격파했다.

오시키바타 전투 이후, 모리 군은 사사이 군의 야마자토 지역을 공격했으나, 지역 주민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8월에 모리 모토나리가 직접 출진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은 실패했고, 10월 25일에 이르러서야 도모다 다카모리의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8]

모리 군과 스에 군의 공방은 해상에서도 이어졌다. 6월 중순, 모리 측 수군이 스에 씨의 본거지인 스오 국 도미타우라(와카야마 성 주변)를 습격했다.[8] 스에 측도 수군으로 이쓰쿠시마를 공격했으나, 미야오 성의 방어로 상륙은 저지되었다. 7월에는 스에 측의 계략으로 구레 ・ 노미의 게고슈(경고사)가 모리 측에서 이반했으나, 9월에 모리와 고바야카와의 게고슈가 이들을 공격하여 노미 섬을 점령했다.[8][9]

3. 전투의 경위

모리 모토나리스에 하루카타를 이쓰쿠시마로 유인하기 위해 가신 가쓰라 모토즈미를 시켜 거짓 서약서를 보내는 등 치밀한 모략전을 펼쳤다. 하루카타는 모토나리의 계략에 넘어가 해로를 통해 이쓰쿠시마 공격을 결정했다.

1555년 9월 21일, 하루카타는 대군을 이끌고 이쓰쿠시마에 상륙했다.[3] 9월 22일에는 2만 명의 군사를 500척의 배에 태워 이쓰쿠시마에 도착했고, 9월 24일에는 스에 군 2만이 이쓰쿠시마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토나리가 모리 다카모토, 깃카와 모토하루 등 직속 병력 3,500명을 이끌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합류하여 총 4,000명의 병력을 확보했다. 모토나리는 스에 군을 이쓰쿠시마에 유인한 뒤 후방 기습으로 전멸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무라카미 수군의 지원을 받기 위해 다카카게를 통해 그들을 회유했다.

9월 28일, 노지마, 구루시마 무라카미 수군 300척이 합류하면서 모토나리 측의 수군 전력이 보강되었다. 같은 날 오후 6시, 폭우 속에서 모리 군 4,000명을 태운 배가 출발하여 오후 10시에 이쓰쿠시마에 주둔한 스에 군의 후방인 쓰쓰미케우라에 도착했다. 모리 군은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 배수의 진을 치고 공격을 기다렸다.[3]

10월 1일 묘시일본어(오전 6시), 모리 군의 기습 공격이 시작되었다.[27] 모리 군 주력은 함성을 지르며 스에 군의 배후로 돌진했고, 고바야카와 부대와 미야오 성의 병사들도 스에 군 본진을 공격했다. 앞바다에 대기하고 있던 무라카미 수군은 스에 수군을 공격하여 배를 불태웠다.

좁은 섬 안에 갇힌 스에 군은 혼란에 빠졌고, 히로나카 다카카네, 미우라 후사키요 등이 방어에 힘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스에 하루카타는 섬 밖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자결했다.[27]

모리 군은 이쓰쿠시마 섬에 흩어져 있던 패잔병들을 소탕하고, 히로나카 다카카네 등 끝까지 저항하는 세력을 진압했다.[7] 모토나리는 전사자들의 시신을 오노로 옮겨 장례를 치르고, 전투로 더럽혀진 이쓰쿠시마 신사를 정화했다.[27]

3. 1. 모략전

모리 모토나리는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평생 모략과 암살을 빈번하게 실행하여,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 중 가장 뛰어난 모략가로 명성을 얻었다. 이쓰쿠시마 전투를 앞두고 그의 모략은 최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8]

모토나리는 아마고 가문의 신구토 주살, 에라 후사히데 암살 유도, 가쓰라 모토즈미를 이용한 위장 내통 공작 등 다양한 모략을 펼쳤다.

  • 신구토 주살: 신구토는 모리씨의 오랜 숙적 이즈모의 아마고씨의 주력 군사집단으로 당주 아마코 하루히사의 숙부 구니히사가 지휘하고 있었다. 모토나리는 간첩을 이용하여 구니히사가 모리씨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려 이를 믿고 그동안 구니히사를 의심하던 하루히사는 신구토를 모두 주살하였다. 이로 인해 아마고씨의 주력 군사집단이 사라지면서 세력이 급속히 쇠퇴하게 된다.[8]

  • 에라 후사히데 암살 유도: 스에가에는 에라 후사히데라는 지장이 있었는데, 그는 모토나리와 함께 전장에 나선 적이 있어 모토나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모토나리는 그를 자신의 진영에 끌어들이려 했으나, 후사히데는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그러자 모토나리는 하루카타에게 후사히데가 모리씨와 내통하고 있다는 정보를 흘려 이를 의심한 하루카타가 후사히데를 암살하게 만들어 후환을 없앴다.[8]

  • 가쓰라 모토즈미를 이용한 위장 내통 공작: 하루카타는 처음엔 육로로 전진하여 모토나리를 공격하려 했다. 육로에서 싸운다면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모토나리는 가신 가쓰라 모토즈미를 거짓으로 하루카타와 내통시켜, 해로로 하루카타가 이쓰쿠시마로 진격하면 자신이 모토나리의 거성을 빼앗겠다는 거짓 서약서를 보냈다. 이것을 믿고 하루카타는 해로로 공격할 것을 결정하고 이쓰쿠시마로 향하게 된 것이다.[8]


오리키바타 전투 직후인 6월 7일, 오우치 요시타카이와미의 마스다 후지카네에게 보낸 서신에는 이즈모국을 본거지로 하는 아마고 씨에 대한 기술이 있으며, 아마고 씨와 연합하여 모리 씨를 협공하는 것이 검토되었다.[8] 그러나 아마고 측에서 11월 1일에 신구토가 숙청되는 사건이 일어나 내분으로 인한 혼란 등으로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모리 모토나리는 아마고 씨와 적대 관계에 있던 미무라 씨나 후쿠야 씨를 지원함으로써 아마고 씨를 견제하는 움직임을 보였다.[8]

9월 10일, 모토나리는 규슈 히젠국쇼니 후유히사에게 밀서를 보내 거병을 촉구했다. 쇼니 씨는 오우치 씨에게 공격받아 규슈 북부의 영지(부젠국지쿠젠국)를 빼앗겼으며, 오우치 씨, 도 씨에 대한 견제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8]

모토나리의 계략에 의해, 도 측의 무장인 구바시 겐시게나 구바시 겐나오 등이 모리 측에 내응했다. 반대로, 시라이 가타쓰네의 계략으로 아키 국인인 노마 다카자네가 이반하여 도 측에 붙었지만, 이쓰쿠시마 전투를 기다리지 않고 모리 군에게 공격받아 장인인 구마가이 노부나오를 통해 항복했다.[8]

3. 1. 1. 아마고 가문의 신구토 주살

요약에는 모리 모토나리가 간첩을 이용해 아마고 구니히사의 신구토를 숙청하도록 유도했다는 내용이 있지만, 이는 주어진 원본 소스에 없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섹션에는 작성할 내용이 없다.

3. 1. 2. 에라 후사히데 암살 유도

모리 모토나리는 스에 하루카타 휘하의 지장 에라 후사히데가 자신과 내통하고 있다는 정보를 흘렸다. 후사히데는 모토나리와 함께 전장에 나선 적이 있어 그를 잘 알고 있었기에, 모토나리는 그를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후사히데가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자 이러한 모략을 사용했다.[8] 모토나리의 모략으로 인해 하루카타는 후사히데를 의심하여 1555년 3월 16일, 이와쿠니의 코하쿠인에서 히로나카 다카카네를 시켜 그를 주살했다.[8][9] 이는 후사히데가 아키 지역 사정에 밝아 모리 가문과의 대결에 신중론을 주장했기 때문으로, 하루카타는 그가 모리 가문과 내통한다고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9]

3. 1. 3. 가쓰라 모토즈미를 이용한 위장 내통 공작

모토나리는 가신인 가쓰라 모토즈미를 거짓으로 하루카타와 내통시켰다. 모토나리는 모토즈미를 시켜 하루카타가 해로로 이쓰쿠시마에 진격하면 자신이 모토나리의 거성을 빼앗겠다는 거짓 서약서를 보냈다. 이것을 믿고 하루카타는 해로로 공격할 것을 결정하고 이쓰쿠시마로 향하게 되었다.[8]

3. 2. 전초전

1555년 정월, 니보 성(현재의 히로시마 시미나미구)에서 쫓겨난 시라이 가타타네가 수군을 이끌고 구사쓰 성 등을 습격하며 모리 군과 교전했다.[8]

3월, 에라 후사사카에가 아키 국을 습격했으나, 다음날 히로나카 다카카네에 의해 주살되었다.[8] 스에 하루카타모리 모토나리와의 대결에 신중했던 후사사카에가 모리 씨에게 내통한다고 의심하여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노마 다카자네가 모리 측에서 이반하여 시라이 가타타네와 함께 가이타 포(모리 측 아소누마 히로히데 영지)와 니보 섬을 공격했다.[8][9]

4월 9일, 모리 모토나리가 이끄는 모리 군이 노마 다카자네에게 총공격을 가했다. 야노 성에서 저항하던 노마 군은 결국 항복했고, 다카자네는 구마가이 노부나오를 통해 항복을 신청했으나, 성 밖으로 나오자 성병들과 함께 토벌되었다.[9][10] 같은 시기 가마가리 섬과 구라하시 섬(모두 현재의 구레 시)의 다가야 씨도 공격했다.[9]

7월 7일, 시라이 가타타네가 미야오 성을 공격했지만, 고이 나오유키 등이 격퇴했다.[8][10]

3. 3. 양측의 출진 (9월 21일 ~ 27일)

스에 하루카타모리 모토나리의 계략에 따라 해로를 통해 이쓰쿠시마 공격을 결정했다. 9월 21일, 하루카타는 대군을 이끌고 이쓰쿠시마에 상륙했다.[3]

9월 22일, 하루카타는 2만 명의 군사를 500척의 배에 태워 이쓰쿠시마에 도착했다.

9월 24일, 스에 군 2만이 이쓰쿠시마에 상륙한 것을 안 모토나리는 모리 다카모토, 깃카와 모토하루 등 직속 병력 3,500명을 이끌고 구사쓰 성에 도착,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합류하여 총 4,000명의 병력을 확보했다. 모토나리는 스에 군을 이쓰쿠시마에 유인한 뒤 후방 기습으로 전멸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무라카미 수군의 지원을 받기 위해 다카카게를 통해 그들을 회유했다.

9월 28일, 노지마, 구루시마 수군 300척이 도착하여 모토나리 측의 수군 전력이 보강되었다.

3. 4. 무라카미 수군의 합류와 모리 군의 도해 (9월 28일 ~ 30일)

9월 28일, 모리 모토나리는 초조하게 기다리던 노지마, 구루시마 무라카미 수군 300척이 합류하면서 수군 전력을 보강했다. 당시 이쓰쿠시마의 미야오 성은 함락 직전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모토나리는 승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굳게 믿었다.[3]

같은 날 오후 6시, 폭우 속에서 모리 모토나리 군 4,000명을 태운 배가 출발했다. 오후 10시, 이쓰쿠시마에 주둔한 스에 군의 후방인 쓰쓰미케우라에 도착했다. 모리 군은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 배수의 진을 치고 공격을 기다렸다.[3]

3. 5. 본전 (10월 1일)

묘시일본어(오전 6시)에 모리 군의 기습 공격이 시작되었다.[27] 박타미를 넘어온 모리 군 주력은 함성을 지르며 스에 군의 배후(모미지다니 쪽)로 돌진했다. 이에 호응하여 고바야카와 부대와 미야오 성의 병사들도 스에 군 본진이 있는 탑의 언덕으로 향했다. 탑의 언덕에서 전투가 시작된 것을 보고, 앞바다에 대기하고 있던 무라카미 수군이 스에 수군을 공격하여 배를 불태웠다. 전날 밤의 폭풍우로 방심하고 있던 스에 군은 좁은 섬 안에 대군이 모여 있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큰 혼란에 빠졌다.

모리 군의 협공을 받은 스에 측 장병들은 앞다투어 섬에서 탈출하려 했고, 배를 차지하려다 침몰하거나 익사하는 자가 속출했다. 히로나카 다카카네, 미우라 후사키요 등이 병사들을 이끌고 방어에 힘썼지만, 혼란에 빠진 스에 군을 수습할 수 없었고, 스에 하루카타는 섬 밖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서쪽으로 도망치는 하루카타 등을 요시카와 부대가 추격했지만, 히로나카 다카카네와 다카스케 부자가 이끄는 500명이 이쓰쿠시마 신사 남쪽 폭포길을 막아섰다. 도중에 스에 측의 아오카게, 하타노, 마치노 등의 병사 300명이 요시카와 부대를 공격하여 히로나카 부대가 우세해졌지만, 요시카와 부대에 구마가이 노부나오, 아마노 다카시게 부대가 원군으로 달려와 결국 히로나카 부대는 다이세이인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모리 군의 추격을 막으려고 다카카네 등이 불을 질렀는데, 이쓰쿠시마 신사로 불이 번질 것을 우려한 모토하루의 명령으로 진화 작업을 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27]

스에 군이 상륙한 오모토우라까지 하루카타 등은 도착했지만, 탈출에 사용할 수 있는 배는 없었다. 다카카게의 부하들이 따라왔기 때문에, 후사키요가 전위가 되었다. 후사키요 부대는 격렬하게 저항하여 다카카게에게 부상을 입혔다고 하지만, 소화를 마치고 따라온 모토하루 부대가 가세하면서 결국 전사했다. 극소수의 측근들만이 지키는 하루카타는, 더욱 서쪽의 오오에우라까지 갔지만 배는 없었다. 이 오오에우라에서 하루카타는 이카가 후사아키의 개입으로 자결하여 죽었다. 하루카타를 최후까지 모신 측근으로는 후사아키 외에 카키나미 타카마사, 야마자키 타카가타의 이름이 남아 있으며, 산중에 하루카타의 목을 숨긴 후, 세 사람 모두 자결했다.[27]

야마토 오키타케는 가가와 미쓰카게와 싸운 후에 포로로 잡혔다. 결국 한 달 후에 모토나리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이쓰쿠시마에서의 전투는 히로나카 부대의 저항을 제외하고 오후 2시경까지는 거의 끝났다.[9]

3. 6. 전후 처리 (10월 2일 ~ 5일)

모리 군은 이쓰쿠시마 섬에 흩어져 있던 패잔병들을 소탕하고, 히로나카 다카카네 등 끝까지 저항하는 세력을 진압했다.[7] 모토나리는 전사자들의 시신을 오노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 또한, 전투로 더럽혀진 이쓰쿠시마 신사를 정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27]

4. 결과

8시간 동안의 전투는 모리 군의 기습으로 완벽한 대승리로 끝났다. '요시다 이야기'에 따르면 스에 군 전사자는 4,780명이라고 한다. 이 전투를 계기로 오우치 가문은 급속히 쇠퇴하고, 모리 가문은 주고쿠 지방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2] 1557년 오우치 요시나가가 자결하면서 오우치 가문은 멸망했다.

모리 모토나리는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본토로 옮기고, 섬을 깨끗하게 정화하도록 명령했다.[3] 이후 모리 가문은 섬의 여러 건설 및 개조 프로젝트를 후원했다. 스에 하루카타의 유해는 본토로 운반되어 불교 사찰 묘지에 매장되었다.[4]

이후 모리 가문은 북규슈를 둘러싸고 오토모 가문과 대립하게 되었고, 오토모 가문은 오우치 데루히로를 옹립하여 모리 가문을 여러 차례 공격했다. 또한, 아마고 가문 등과도 항쟁을 벌이며 세력을 확장했다.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양측의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모리 군은 4,000명에서 10,000명 사이, 스에 군은 20,000명에서 30,000명 사이로 추정되지만,[3][4] 모리 군이 수적으로 불리했다는 점은 분명하다.[2] 모리 군의 핵심 전력은 대대로 내려온 가신단 약 3,000명이었으며, 여기에 깃카와 가문, 고바야카와 가문 등 아키 국 국인들의 병력이 합세하여 4,000명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스에 군은 히로나카 다카카네를 비롯한 스오 국 동부 무사들과 일부 신령중(神領衆)으로 구성되었으며, 나이토 가문 등 오우치 가문의 주요 중신들은 참전하지 않아 총 10,000명에 미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모리 군의 수군은 모리 수군 50~60척과 고바야카와 수군 60~70척으로 구성되었다.[27] 스에 군의 수군은 오시마 군 야시로 섬을 거점으로 하는 500~600척 규모였으나,[27] 미야오 성 포위전에 투입된 병력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8][17][21]

이 전투에서 스에 군은 전사 4,700명, 포로 3,000명의 피해를 입었다.[20]
모리 군과 스에 군의 주요 인물

모리 군스에 군


5. 각 세력의 병력과 참전 인물

이쓰쿠시마 전투에 참전한 주요 인물과 병력은 다음과 같다.

모리 군스에 군
총대장모리 모토나리총대장스에 하루카타 (패전 후 자결)
주력
별동대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고바야카와 씨 당주)수군
무라카미 수군무라카미 미치야스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 당주)
미야오 성기타



이 전투의 기록은 다나모리 후사아키가 기록한 『다나모리 후사아키 각서』, 무라카미 수군의 무라카미 키헤이에게서 들은 내용을 정리한 『무가 만대기(미시마 해적가 군일기)』, 가와노우치 경고중의 가야 이치스케의 기록을 정리한 『만대기(이쓰쿠시마 합전기)』, 깃카와 가신의 니노미야 도시자네와 모리와키 하루카타가 기록한 『니노미야 도시자네 각서』와 『모리와키 각서』 등이 있다.[13]

일반적으로 알려진 전투 경위는 에도 시대에 가가와 가게쓰구가 편찬한 군기물 『음덕태평기』를 바탕으로 하는데, 모리 씨에게 유리하게 윤색되어 사료적 가치가 낮게 평가된다.

5. 1. 모리 군

모리 군의 병력은 약 4,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3]

총대장모리 모토나리
주력
별동대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모토나리의 삼남, 고바야카와 씨 당주)
무라카미 수군무라카미 미치야스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 당주)
미야오 성고이 나오유키, 신자토 미야우치 쇼후(후의 쓰보이 모토마사)
기타시시도 다카이에 (모리 산하 아키 국인, 모토나리의 사위), 가쓰라 모토즈미 (모리 가신)


  • '''모리 군 주력'''
  • * 모리 모토나리 - 모리 군 총대장.
  • * 모리 다카모토 - 모토나리의 적자. 모리 씨 당주.
  • ** 후쿠하라 사다토시 - 모리 가신.
  • ** 구니시 모토스케 - 모리 가신.
  • ** 가와가미 미쓰카게 - 모리 가신. 야마토 오키타케를 생포함.
  • ** 고다마 나리사다 - 모리 가신. 모리 수군(가와노우치 경고중)의 장.
  • ** 이다 요시타케 - 모리 가신. 모리 수군(가와노우치 경고중)의 장.

야마가타 나리사다 - 모리 수군(가와노우치 경고중).
후쿠이 모토노부 - 모리 수군(가와노우치 경고중).

  • * 깃카와 모토하루 - 모토나리의 차남. 깃카와 씨 당주.
  • ** 니노미야 도시자네 - 깃카와 가신. 미우라 후사키요를 쳐죽임.
  • * 구마가이 노부나오 - 모리 산하의 아키 국인. 미야오 성을 구원.
  • ** 구마가이 다카나오 - 구마가이 노부나오의 적자. 아버지에 따라 미야오 성을 구원.
  • ** 구마가이 히로마사 - 구마가이 노부나오의 삼남. 아버지에 따라 미야오 성을 구원.
  • * 히라가 히로스케 - 모리 산하의 아키 국인.
  • * 아마노 다카시게 - 모리 산하의 아키 국인.
  • * 아소누마 히로히데 - 모리 산하의 아키 국인.
  • * 데와 모토스케 - 모리 산하의 이와미 국인.

  • '''별동대 (고바야카와 수군)'''
  •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모토나리의 삼남. 고바야카와 씨 당주.
  • ** 노미 무네카쓰 - 고바야카와 가신. 누타 고바야카와 씨의 서류.

  • '''무라카미 수군'''
  • * 무라카미 미치야스 -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의 당주.

  • '''미야오 성'''
  • * 고이 나오유키 - 모리 가신.
  • * 신자토 미야우치 쇼후(후의 쓰보이 모토마사) - 모리 가신.

  • '''그 외의 모리 관계자'''
  • * 시시도 다카이에 - 모리 산하의 아키 국인. 모토나리의 사위. 아코 씨의 남하를 경계하여 요시다 고리야마 성을 수비.
  • * 가쓰라 모토즈미 - 모리 가신. 사쿠라오 성 재성.

5. 2. 스에 군

일반적으로 스에 하루카타스오국, 나가토국, 부젠국, 지쿠젠국에서 모은 20,000~3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이쓰쿠시마에 상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0][27][15] 그러나 이쓰쿠시마 전투에 참전한 스에 군은 히로나카 다카카네를 비롯한 스오국 동부의 무사, 신령중의 일부에 한정되어 있었고, 나가토 수호대인 나이토 씨나 부젠 수호대인 스기 씨 등 다른 오우치 씨의 중신들이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수는 10,0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 전투에서 스에 군의 피해는 『다나모리 후사아키 각서』에 따르면 전사 4,700명, 포로 3,000명이며, 군사사 연구가 고노 오사무는 이쓰쿠시마에 상륙한 스에 군이 8,000명 정도라고 한다.[20]

스에 군의 수군 전력은 스오국 오시마군의 야시로 섬을 거점으로 하는 수군(야시로 섬중, 야시로 섬 경호중)으로 500~600척이었다.[27] 그러나 스에 군이 포위한 미야오 성에 모리 씨 측의 선단 60~70척이 원군으로 입성한 점과, 히로나카 다카카네가 서장에서 수군의 부족을 한탄하고 있는 점[8][17]으로 미루어, 미야오 성 앞바다를 메울 정도의 스에 수군이 투입되었다는 기존의 일화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21]

; 스에 군 주력

  • 스에 하루카타 - 스에 군 총대장. 패전으로 인해 자결.
  • * 미우라 후사키요 - 스에 가신. 오우치 수군의 장. 전투에서 전사.
  • * 야마토 오키타케 - 스에 가신. 붙잡힌 후 살해당함.
  • * 시게미 도루타네 - 스에 가신. 붙잡힌 후 모토나리의 등용을 거절하고 자결.
  • * 이카가 후사아키 (또는 다카마사) - 하루카타 측근. 패전으로 인해 자결. 하루카타의 개작을 맡았다.
  • * 가키나미 다카마사 (가키나미 사도노카미) - 하루카타 측근. 패전으로 인해 자결.
  • * 야마자키 다카카타 (야마자키 간카게유) - 하루카타 측근. 패전으로 인해 자결.
  • * 에라 진로쿠 - 하루카타 피관. 포로가 되었지만 후카노 후사시게의 손자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짐.
  • 히로나카 다카카네 - 오우치 가신. 아들 다카스케와 함께 전사.
  • * 히로나카 다카스케 - 히로나카 다카카네의 아들. 아버지와 함께 전사.
  • 마치노 다카치카 - 오우치 가신. 아들 다카하루와 함께 전사.
  • * 마치노 다카하루 - 마치노 다카치카의 아들. 아버지와 함께 전사.
  • 하타노 아리시게 - 오우치 측의 이쓰쿠시마 신령중. 동생이자 양자인 후지나오와 함께 전사.
  • * 하타노 후지나오 - 형이자 양부인 하타노 아리시게와 함께 전사.


; 수군(야시로지마 경고중)

  • 우가지마 다다시게 (주로자에몬) - 야시로지마 경고중의 대장. 패전 후, 모리 군의 소탕으로 인해 사망.
  • 구와바라 다카스케 - 야시로지마 경고중의 장. 전투에서 전사.

5. 3. 무라카미 수군

무라카미 수군은 약 200~300척의 선단으로 모리 군을 지원했다.[8][27][20]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의 무라카미 미치야스는 참전이 확실시되나, 이노시마 무라카미 씨와 노시마 무라카미 씨의 참전 여부는 불분명하다.

  •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 9월 28일 (혹은 29일)에 원군으로 온 무라카미 수군에 대해, 모리 모토나리가 "구루시마의 원군으로 인해 우리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취지의 서장(『모리 가문 문서 579호』)이 있어, 무라카미 3씨 중 유일하게 참전이 명시되어 있다.
  • 이노시마 무라카미 씨: 무라카미 요시미쓰를 당주로 하는 이노시마 무라카미 씨는 이쓰쿠시마 전투 때 모리 측이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실제로 이쓰쿠시마 전투에 참전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료는 없기 때문에, 이쓰쿠시마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고, 도(陶) 측에 속하는 노시마 무라카미 씨의 경계에 임했다고 생각된다.
  • 노시마 무라카미 씨: 무라카미 다케요시가 이끄는 노시마 무라카미 씨의 원군에 대해서는, 에도 시대에 편찬된 『무가만다이기』, 『로오 모노가타리』, 『게이큐엔 가쿠쇼』 등의 군기물과 각서에서 언급되고 있다.[19] 그러나, 덴분 23년 (1554년) 6월경으로 추정되는 도 하루카타의 서장[23]에는, 노시마에서 이마오카 모 씨와 무라카미 구라토노다이후가 사자로서 도 하루카타에게 착진하여, 빈고 국(備後国)과 아키 국(安芸国)의 전황을 보고하고 있어, 이 시점에서는 노시마 무라카미 씨가 오우치 씨(大内氏)와 도 씨의 진영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에이로쿠 4년 (1561년) 이전에 무라카미 타케요시가 모리 측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사료가 없으므로, 이쓰쿠시마 전투 시기에도 노시마 무라카미 씨는 도 측에 속해 있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노시마 무라카미 씨가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모리 측으로 원군했다는 사실은 없고, 그렇다고 도 측으로 참가했다는 흔적도 없기 때문에, 노시마 무라카미 씨는 이쓰쿠시마 전투 자체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6. 검증

이쓰쿠시마 전투에 대한 주요 사료로는 다나모리 후사아키 각서가 있다.[24] 이 문서에는 1554년 시점에 이미 미야오 성이 존재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전투 이전부터 미야오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리 모토나리스에 하루카타를 유인하기 위해 미야오 성을 축조했다는 이야기는 음덕태평기나 요시다 이야기 등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모토나리의 지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창작으로 보인다.[24]

이쓰쿠시마는 종교, 교통, 경제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17][24] 여러 차례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 1524년 사토 은산성 전투에서는 오우치 군의 본진이 설치되었고, 1540년 요시다 고리야마성 전투 직전에는 오우치 군이 이쓰쿠시마를 거쳐 즈사키성으로 출진했다. 다이네이지의 변이나 보게이 히키와케에서도 이쓰쿠시마는 점령 대상이었다. 따라서 아키로 진군하는 길목에서 이쓰쿠시마 탈환을 시도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6. 1. 스에 군 유인설 (미야오 성 미끼성 설)

1555년 5월 13일, 스에 하루카타의 수군 100척이 이쓰쿠시마를 공격하여 미야오 성이 있는 아리노우라에서 모리 군과 교전했다.[9][10] 모리 모토나리는 6월에 이쓰쿠시마로 건너가 미야오 성 등을 시찰하고 코이 나오유키와 츠보이 모토마사에게 군사 500명을 주어 성에 배치했다.[9] 7월 7일에는 시라이 카타타네가 미야오 성을 공격했지만, 코이 나오유키 등이 격퇴했다.[8][10]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모리 모토나리가 미야오 성을 미끼로 스에 하루카타를 유인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모리 가문의 가신에게 보내진 서장[25]에 따르면, 모토나리가 스에 가문의 중신 에라 후사사카에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후사사카에가 과도한 가증을 요구하여 모토나리가 그를 제거하려 했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이 서장에 등장하는 '에라'는 후사사카에가 아닌 그의 동족 에라 신로쿠를 가리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후사사카에가 모리 가문에 내통했다는 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며, 미야오 성을 미끼로 사용했다는 설도 근거가 부족하다.

6. 2. 에라 후사히데 내응설

1555년 3월, 스에 하루카타의 대관이자 이쓰쿠시마 신사의 신관을 담당하던 중신 에라 후사사카에가 히로나카 다카카네에게 살해당했다.[8] 후사사카에는 아키 국 영주들의 지휘관 (요리 친)으로서 모리 가문과의 대결에 신중론을 폈고, 이 때문에 하루카타에게 내통 의심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8]

하지만, 모리 다카모토의 서장에 따르면, 후사사카에와 별개로 "에라"라는 인물이 모리 가문에 영지나 봉록을 늘려주는 가증(加增)을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다.[8] 이 "에라"는 후사사카에의 동족인 에라 신로쿠로 추정되며, 따라서 후사사카에가 모리 가문과 내통했다는 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8]

6. 3. 구루시마 수군과의 혼인

1554년경, 모리 씨는 무라카미 수군의 일족인 무라카미 미치야스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고 알려졌다.[8][26] 모리 가문의 일문(一門) 중 하나인 시시도 다카이에의 장녀 텐유 에이쥬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양녀로 삼은 다음 미치야스에게 시집보낸 것이 모리 측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예주 코노 도노·고바야카와 연변"이라고 기록된 서류에는 텐유 에이쥬의 혼인 상대가 무라카미 미치야스가 아닌 코노 미치노부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혼인에 대한 প্রচলিত의 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6. 4. 가쓰라 모토즈미의 위장 내통

가쓰라 모토즈미가 스에 측에 내통하는 척했다는 이야기는 군기물에 전해지지만,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1차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9] 모토즈미는 과거 모리 모토나리의 가독 상속 과정에서 숙청된 이복 동생 아이오이 모토쓰나와 관련된 인물로, 모토나리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명분으로 도씨 측에 내통을 제안했다. 이는 모리 군 본대가 엄 island 방어에 나설 때 모토즈미 군세가 요시다 코리야마 성을 공격한다는 계획으로 도 군을 유인하기 위한 모략으로 여겨진다.[9] 그러나 모토즈미는 사쿠라오 성에 머물며 엄 island에는 출진하지 않았고(아들들은 참전), 형식적으로나마 의리를 지켰다고도 한다.[27]

6. 5. 병력 차이

전통적인 설에서는 소수의 모리 군이 5배 이상의 대군을 거느린 도 군을 상대로 다양한 계략과 이쓰쿠시마의 기습전을 통해 격파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 군의 병력이 1만 명에 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양측의 전력이 대등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17]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실시된 다이코 검지에 따르면, 스오 국, 나가토 국, 이와미 국 반국 등 구 오우치 영지의 고쿠다카는 60만 석에서 70만 석으로, 여기서 추론되는 동원 가능 병력은 대략 2만 명 정도이다. 그러나 당시 도 요시타카의 불안정한 입지와 영지 경비 필요성, 일부 가신과 국인의 불참 등으로 인해 실제 동원 병력은 2만 명 이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역사학자 야마무로 쿄코는 이쓰쿠시마 전투 전후에 다량의 감상을 발급하던 모리 씨가 이 전투에서는 한 통의 감상도 발급하지 않은 점에 주목했다. 그녀는 모리 씨에게 감상을 줄 만한 활약을 한 무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며,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 수군의 도움으로 승리했기에 이쓰쿠시마 전투는 모리 씨의 승리라기보다는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반면 역사학자 아키야마 노부타카는 야마무로 쿄코의 주장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모리 군에 활약한 무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야마다 민부노조나 와타나베 나가 등이 있었다고 반박했다. 그는 모리 씨가 이쓰쿠시마 전투를 계기로 감상 발급을 억제하게 된 것은 은상으로 지급해야 할 토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며, 공을 세운 무장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6. 6. 전투 주도자 논쟁

역사학자 야마무로 쿄코는 이쓰쿠시마 전투 전후에 다량의 감상을 발급하던 모리 가문이 이쓰쿠시마 전투에서는 한 통의 감상도 발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모리 가문에게는 감상을 줄 만한 활약을 한 무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또한, 모리 모토나리가 굳게 의지했던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의 수군 덕분에 도 군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쓰쿠시마 전투는 모리 가문의 승리라기보다는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의 승리라고 주장하며, 통설에 대한 재검토를 제기했다.[1][2]

야마무로 쿄코는 모리 모토나리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보낸 서장 중,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가 원조하지 않으면 만사가 휴지라고 하소연한 9월 26일의 서장이 『모리가 문서』에 남아 있고,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가 원조하지 않으면 가와노우치 경고중과 고바야카와 수군으로 싸우겠다고 적힌 9월 27일의 서장이 『고바야카와가 문서』에 남아 있는 것은,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 덕분에 이길 수 있었던 이쓰쿠시마 전투를 모리 가문의 힘으로 이긴 것으로 만들기 위해 9월 26일의 서장을 다카카게로부터 회수한 것이라고 보았다. 에도 시대의 군담에서 이쓰쿠시마 전투의 승인이 모토나리의 전술이라고 되어 있고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에 대한 언급이 적은 것은 모리 가문에 의한 "역사의 위조"의 결과라고 주장했다.[1][2]

한편, 역사학자 아키야마 노부타카는 야마무로 쿄코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모토나리나 다카모토의 감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리 군에 활약한 무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도 가신 3명을 쳐 죽인 야마다 민부노조나 와타나베 나가 등이 있었다고 하였다.[2] 그러나 와타나베 나가의 각서에는 "이쓰쿠시마에서 수급 3, 총무와 감상 없음(嚴島にて頸三、惣並ニ御感狀無之事)"이라고 적혀 있어,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모토나리와 다카모토는 감상을 발급하지 않는 방침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모리 가문에서는 이쓰쿠시마 전투를 계기로 "이에 감상 이와 같이(仍感狀如件)"로 끝나는 서식의 감상 발급을 억제하게 되었지만, 이것은 은상으로 지급해야 할 토지가 부족하고, 가신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는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감상을 발급하지 않은 것은 결코 공을 세운 무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2]

또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앞으로 보낸 9월 26일의 서장을 모토나리가 회수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모토나리의 서장 중에는 "이 서장은 즉시 이쪽으로 반환하도록(此狀則此方へ返し可給候)"이라는 문구를 포함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 해당 서장에 대해서도 다카카게로부터 모토나리에게 반송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였다. 『모리가 문서』에는 다카카게 앞으로 보낸 서장이 여러 통 포함되어 있고, 다카카게의 서위 임관의 문서처럼 다카카게 사후에 『고바야카와가 문서』를 맡게 된 가타타 모토요시의 가타타가에서 보관된 후 모리 가문에 헌상된 서장임이 판명된 문서도 있기 때문에, 해당 서장도 에도 시대에 가타타가에서 모리 가문에 헌상된 다카카게 관련 문서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아키야마 노부타카는 야마무로 쿄코의 주장은 『고바야카와가 문서』의 전래나 『모리가 문서』 안에 다카카게 앞으로 보낸 서장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무시한 것이어서 납득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2]

아키야마 노부타카는 구루시마 무라카미 수군의 원조가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모리 측 승인 중 하나였지만, 후에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는 하시바 히데요시의 책략에 의해 모리 가문으로부터 이반하였고, 반대로 이쓰쿠시마 전투에서는 도 측이었던 노시마 무라카미 씨는 에도 시대에는 하기 번사가 되었기 때문에, 노시마 무라카미 씨도 이쓰쿠시마 전투에 원조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의 활약에 대해서는 거의 무시되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2]

참조

[1] 문서 Miyajima (宮島) means "shrine island"
[2]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3] 서적 The Samurai: A Military History MacMillan Publishing Co.
[4] 간행물 Samurai Archives http://wiki.samurai-[...] 2011-01-19
[5] 서적 Gakken-M-Bunkou
[6]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7] 웹사이트 弘中三河守の墓 http://sentokuji.min[...] Sentoku-ji Temple 2021-10-30
[8] 서적 戦争の日本史12 西国の戦国合戦 吉川弘文館
[9] 간행물 防長経略 陶晴賢を撃破、有名天下に轟く! 学習研究社
[10] 서적 戦国合戦史事典 新紀元社
[11] 뉴스 おもしろ山口学 大内氏・陶氏VS毛利氏 厳島の戦い 第1回:兵力差の真実と、手紙が残した真実 https://warp.da.ndl.[...] 山口きらめーる 2013-07-26
[12] 간행물 人道主義に根ざした合理性の追求 学習研究社
[13] 간행물 毛利軍の渡海は『二十九日』 学習研究社
[14] 웹사이트 わがふるさとと愛媛学V ~平成9年度 愛媛学セミナー集録~ 厳島合戦と村上水軍 http://www.i-manabi.[...] 愛媛県生涯学習センター データベース『えひめの記憶』
[15] 웹사이트 厳島合戦 http://www.miyajima.[...] 宮島観光協会ウェブサイト
[16] 문서 現地説明版「龍ヶ馬場(駒ヶ林)」
[17] 뉴스 おもしろ山口学 大内氏・陶氏VS毛利氏 厳島の戦い 第2回:陶晴賢らの渡海と、渡海に反対した弘中隆兼の最期 https://warp.da.ndl.[...] 山口きらめーる 2013-08-23
[18] 웹사이트 宮島の歴史 http://www.miyajima.[...] 宮島観光協会ウェブサイト
[19] 간행물 '"厳島"を制した毛利直轄水軍' 学習研究社
[20] 간행물 鳥瞰戦国講座『戦国三大奇襲戦』勝利の条件 学習研究社
[21] 뉴스 ひろしま歴史回廊 第9部・再考 厳島合戦(5) 警固衆の役割 攻防繰り返した水軍 中国新聞 2007-05-26
[22] 웹사이트 わがふるさとと愛媛学V ~平成9年度 愛媛学セミナー集録~ 日本史の中の水軍 http://www.i-manabi.[...] 愛媛県生涯学習センター データベース『えひめの記憶』
[23] 문서 益田家文書
[24] 간행물 神意を湛える瀬戸内の要衝 学習研究社
[25] 문서 毛利家文書
[26] 서적 戦国期の権力と婚姻 清文堂
[27] 간행물 厳島合戦 学習研究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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