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모토오리 노리나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모토오리 노리나가(1730–1801)는 일본의 에도 시대의 국학자, 의사, 문헌학자이다. 이세국 마쓰사카(현재 미에현 마쓰사카시)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혔으며,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로 활동하면서 고전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특히 《고사기》 연구를 통해 일본 고유의 사상과 문화를 탐구했으며, '모노노아와레'라는 미학 개념을 정립했다. 주요 저서로는 《고사기전》, 《겐지모노가타리 타마노오구시》, 《다마가쓰마》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일본 국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그의 복고주의적 사상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극단적인 국수주의로 이어졌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슈번 사람 - 아사노 미쓰아키라
    아사노 미쓰아키라는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로, 히로시마번의 2대 번주를 지내며 번정 개혁을 통해 번의 기틀을 다지고 장남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 기슈번 사람 - 하나오카 세이슈
    에도 시대 일본의 의사이자 외과의인 하나오카 세이슈는 세계 최초로 전신 마취를 이용한 수술을 성공했으며, 마취제 '통선산' 개발 및 춘림헌 설립을 통해 일본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 국학자 - 사토 노부히로
    사토 노부히로는 에도 시대 후기의 실학자이자 의사로, 농업 중심 경제 정책과 교육 개혁을 주장하며 자주화선 등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지만 국수주의적 성향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 국학자 - 야마가 소코
    야마가 소코는 에도 시대 초기의 유학자이자 병법가로, 주자학을 비판하며 고학을 주창하고 무사도를 재정립했으며, 《무가사기》와 《중조사실》 등의 저서를 통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모토오리 노리나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모토오리 노리나가 자화상
모토오리 자화상
이름모토오리 노리나가
다른 이름본거이 선장
출생일1730년 6월 21일
사망일1801년 11월 5일
사망 장소마쓰사카, 미에현
국적일본
직업의사
국학자
문헌학자
배우자가쓰
자녀장남: 하루니와
차남: 하루무라
장녀: 히다
차녀: 미노
삼녀: 노토
부모아버지: 오즈 사다토시
어머니: 가쓰
학문
분야동양 철학
일본 철학
시대에도 시대
영향보안
게이추
오규 소라이
가모노 마부치
다니가와 시세이
주요 저서고사기전
주요 아이디어라이먼의 법칙
관심사일본 문학
문법
연구 기관스즈노야
주목할 만한 개념모노노아와레
한시
영향을 준 인물호리 게이잔
오규 소라이
게이추
가모노 마부치
다니가와 시세이
영향을 받은 인물히라타 아쓰타네
반 노부토모
나가세 마사키
센게 도시노부
하나와 호키이치 외 다수
기타 정보
시란
슌안
슌안
통칭야시로
겐조
수상증 정4위
증 종3위
국학 4대인국학의 4대인

2. 생애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에도 시대 중기의 국학자이자 의사이다. 이세국 마쓰사카(현 미에현 마쓰사카시)의 목면 상인 가문인 오즈(小津)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상업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 그의 조상은 본래 사무라이였으나 에도 시대 초기에 상인이 되었다.

젊은 시절 교토로 유학하여 의학을 공부하는 한편, 성리학자 호리 게이잔(堀景山)에게 고전학을 배웠다. 이 시기 오규 소라이와 게이추의 학문에 영향을 받아 일본 고유의 문화를 연구하는 국학(国学)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57년 고향 마쓰사카로 돌아와 의원으로 개업하였으며, 평생 의술 활동을 이어갔다. 동시에 국학 연구에 매진하여, 1763년 가모노 마부치를 만나 그의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특히 《고사기》(古事記)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약 35년에 걸쳐 방대한 주석서인 《고사기전》(古事記伝)을 완성하였다.[17] 이 외에도 《겐지모노가타리 타마노코구시》(源氏物語玉の小櫛) 등 다수의 저술을 남겼다.

그의 연구는 고대 일본의 언어와 사상을 실증적으로 탐구하여 국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후대 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1801년 마쓰사카에서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성장

모토오리 노리나가 (1790)


1730년 6월, 이세국 마쓰사카(현 미에현 마쓰사카시)의 목면 중개상 오즈(小津) 가문에서 오즈 사다토시(小津定利)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0] 아명은 도노스케(富之助)였다. 그의 조상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세국의 기타바타케 가문의 가신이었으나, 에도 시대 초기에 사무라이 신분을 버리고 성을 오즈(小津)로 바꾸어 마쓰사카로 이주해 목면 도매상이 되었다. 가문은 한때 번성하여 에도에도 점포를 두었으나 점차 가세가 기울었다. (영화 감독 오즈 야스지로는 같은 혈통의 후손이다.) 형 소고로 사다하루(宗五郎定治)는 양자였으므로, 노리나가는 친자로는 장남이었다.[21]

어려서부터 글자를 익혀 한문 서적을 읽었으며, 직접 글을 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7세 때인 1737년에는 서당(寺子屋)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11세에는 노가쿠유학 경전을 암송할 정도였다. 그러나 같은 해인 1740년 아버지가 에도의 가게에서 병사했다.[20] 이후 13세에 요시노 신사를 방문하고, 16세에는 궁술을, 18세에는 일본 다도를, 19세에는 유학 고급 과정을 수련하는 등 학문과 교양을 쌓았다.

1745년(엔쿄 2년), 16세 때 상업 수습을 위해 에도 오덴마초(大伝馬町)에 있는 숙부의 가게에서 1년간 머물렀다. 이때 에도까지 오가는 길의 지도 자료가 부정확하다고 느껴, 성과 항구, 명소, 유적 등의 위치와 방향을 바로잡고 여정과 역참을 상세히 기록한 지도 자료집 『대일본천하사해화도(大日本天下四海画図)』 집필을 시작하여 1752년(호레키 원년) 12월 초에 완성했다. 또한 이 시기의 견문을 바탕으로 개인 자료집인 『도고발서(都考抜書)』를 1746년부터 1751년 무렵까지 집필했다.

1748년(칸엔 원년), 19세 때 이세 야마다(山田, 현 이세시)의 지물포(종이상)이자 오시(御師)였던 이마이타(今井田) 가문의 양자가 되었으나, 책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상업에 맞지 않아 1750년(칸엔 3년) 파양되어 마쓰사카의 본가로 돌아왔다. 이 무렵부터 와카(和歌)를 짓기 시작했다.

가업을 잇는 대신 독서에 열중하여 상업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어머니의 권유로, 22세가 되던 1752년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교토로 갔다. 교토에서는 의학 공부와 더불어 성리학자 호리 게이잔(堀景山)에게서 한학과 일본 고전학을 배웠다. 이 시기 일본 고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특히 오규 소라이와 게이추의 학문에 영향을 받아 국학(国学) 연구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당시에는 언어 변화로 인해 에도 시대 사람들이 고대 일본의 고전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으므로, 문헌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고증학적 연구가 필요했다.) 교토에서의 생활은 젊은 노리나가에게 전통적인 일본 궁정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2. 2. 의학 연구

1751년(보력 원년) 가업을 잇던 의형이 사망하자 노리나가는 오즈 가문을 이었으나, 상업에는 뜻이 없어 에도의 가게를 정리하였다. 1752년(보력 2년), 22세의 노리나가는 어머니의 권유로 의사가 되기로 하고 교토로 유학을 떠났다. 교토에서 그는 호리 모토아쓰(堀元厚)와 무카와 고준(武川幸順)에게서 의학을 배웠고, 호리 게이잔(堀景山, 1688~1757)에게서는 유학을 배웠다. 같은 해, 그는 선조의 성씨였던 모토오리(本居)로 성을 바꾸었다.

200px


유학 스승이었던 호리 게이잔은 히로시마번의 유의(儒医)로서 주자학을 따랐지만, 반주자학파 학자인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의 학문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게이추(契沖, 1640~1701)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노리나가는 교토 유학 중 게이추의 저술을 접하고 그의 실증적인 연구 방법에 감명받았으며,[22] 스승 게이잔의 영향으로 오규 소라이와 게이추의 학문에 점차 몰두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일본 고유의 고전학(古典学) 연구, 즉 국학(国学)에 뜻을 두게 되었다. 또한 교토 생활을 통해 그는 왕조 문화에 대한 동경심을 더욱 키우게 되었다. 이 무렵 서점에서 『선대구사본기』와 『고사기』를 구입한 것으로 보인다.

1757년(보력 7년), 노리나가는 학비 부족 등의 이유로 고향인 마쓰사카로 돌아와 의원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주로 유아를 대상으로 진료했으며, 진료 외 시간에는 『겐지 이야기』 강의나 『일본서기』 연구에 몰두했다. 훗날 국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지만, 의원으로서의 활동 역시 평생 이어가 1801년 사망하기 열흘 전까지 환자를 돌보았다.

2. 3. 국학 연구



교토 유학 시절 성리학자 호리 게이잔(Hori Keizan) 밑에서 중국과 일본의 고전학을 공부하며 오규 소라이와 계추의 학문에 접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국학(国学)에 뜻을 두게 되었다. 특히 계추의 저서를 접하고는 폭넓은 조사와 인용을 특징으로 하는 실증적인 방법론을 높이 평가했다.[22] 또한 교토의 왕조 문화에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1757년 교토에서 마쓰사카로 돌아와 소아과 의원을 개업했고, 한편으로는 자택에서 《겐지모노가타리》 강의나 《일본서기》 연구에 힘썼다. 같은 해 간행된 가모노 마부치의 저서 《관자고》(冠辞考)를 접하고 큰 영향을 받아 국학 연구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게 되었다.[23]

가모노 마부치(賀茂真淵)
《관자고(冠辞考)》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노리나가는, 단 하룻밤의 만남을 통해 마부치에 사사하였다.


1763년 음력 5월 25일(호레키 13년), 이세 신궁 참배차 마쓰사카를 방문한 마부치를 처음 만났다. 이 만남은 후일 '마쓰사카의 하룻밤'으로 알려지게 된다. 노리나가는 마부치에게 《고사기》 주석에 대한 지도를 청하며 입문을 희망했다. 마부치는 먼저 만요가나(万葉仮名) 용법에 익숙해지도록 《만요슈》(万葉集) 주석부터 시작할 것을 권했다. 그 해 말 노리나가는 입문을 허락받았고, 이듬해 정월에 입문 서약서를 마부치에게 보냈다.

이후 두 사람의 직접적인 만남은 이것이 유일했지만, 서신 교환을 통해 마부치의 지도를 받았다. 마부치의 격려 속에서 노리나가는 《고사기》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약 35년에 걸쳐 당시 『고사기』 연구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주석서 《고사기전》(古事記伝)을 완성했다.[17] 《고사기전》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전까지 정사(正史)인 《일본서기》의 보조 읽기 자료 정도로 여겨지던 《고사기》가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사서로 재평가받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8]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고사기전》 외에도 《겐지모노가타리 타마노코구시》(源氏物語玉の小櫛), 《타마가쓰마》(玉勝間), 《구계개언》(馭戒慨言) 등이 있다.[19] 노리나가는 평생 의사로 활동하면서도 국학 연구에 매진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국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2. 4. 저술 활동

1757년 교토에서 돌아와 의사로 일하면서 겐지 모노가타리 강의와 일본서기 연구 등에 힘쓰는 한편, 《자문요령》(紫文要領), 《이소노카미노사사메고토》(石上私淑言) 등을 집필하며 활발한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가모 마부치의 《관자고》(冠辞考)에 자극받아 국학 연구에 본격적으로 매달렸으며,[23] 1763년 마부치를 만난 이후로는 그의 지도를 받아 《고사기》 연구에 착수했다.

1771년에는 복고사상(復古思想)의 핵심 내용을 담은 《나오비노미타마》(直毘靈)를 출판했다. 1786년부터 이듬해까지는 우에다 아키나리(上田秋成)와 음편(音便) 등 언어 문제 및 일본 신화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으며, 그 결과를 《가카이카》(呵刈葭)라는 책으로 정리했다.[45] 이 논쟁은 당시 학계에서 주목받았다.

1793년에는 61세의 나이로 산문집 《다마가쓰마》(玉勝間)를 쓰기 시작했다. 이 책에는 스승 가모 마부치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 노리나가 자신의 학문과 사상, 신념 등이 담겨 있으며, 일본의 방언이나 지리, 지명 고증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24]

1797년, 65세의 나이로 필생의 역작인 《고사기전》(古事記伝)을 완성했다. 집필을 시작한 지 34년 만의 일이었다.[17] 이 책은 당시 《고사기》 연구의 집대성으로 평가받았으며, 이전까지 정사(正史)인 《일본서기》의 보조 자료 정도로 여겨지던 《고사기》가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역사서로 인정받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18]

1800년에는 《지명자음전용례》(地名字音転用例)를 간행했다. 이 책은 《고사기》, 《풍토기》(風土記), 《화명초》(和名抄) 등에 나타난 지명의 글자와 발음 변화 사례 약 200건을 모아 분류하고 정리한 것이다.

이 외에도 대표적인 저서로는 《겐지모노가타리 타마노코구시》(源氏物語玉の小櫛), 《구계개언》(馭戒慨言)[19] 등이 있다.

2. 5. 만년과 죽음

노리나가는 한때 기이 번에 봉직하기도 했으나[24], 평생의 대부분을 평민 학자로서 보냈다. 특히 덴메이 연간(1781년~1789년) 말 무렵부터 제자가 크게 늘어나, 덴메이 8년(1788년) 말 164명이었던 제자 수는 노리나가가 사망할 무렵에는 487명에 달했다. 제자들은 이세 지역(약 200명)뿐 아니라 오와리 등 전국 각지에 퍼져 있었으며, 직업별로는 평민(약 34%)과 농민(약 23%)이 다수를 차지했다.

만년에도 고향인 마쓰사카에서 의사 활동을 계속했으며, 1801년 사망 10일 전까지 환자를 진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주로 밤 시간을 이용해 연구와 제자 교육에 힘썼다.

1801년 향년 72세로 사망한 후, 그의 유언에 따라 마쓰사카 시의 묘라쿠지(明楽寺) 뒤편 야마무로산(山室山) 정상에 묻혔다.[9] 묘소는 마쓰사카 시가지와 이세만 너머 미카와국의 구릉과 멀리 후지산까지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노리나가는 생전에 직접 이곳을 찾아 산벚나무를 심고 묘소의 배치를 설계했으며, 묘비에는 『만요슈』의 시가 새겨져 있다. 1875년 야마무로야마 신사(山室山神社)가 건립되면서 주변 경관은 다소 변했지만[10], 묘소 옆에는 그의 사상적 계승자로 평가받는 히라타 아쓰타네와 제자 우에마쓰 아리노부(植松有信)의 추모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묘소와 주변 지역은 1936년에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11], 1999년에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또한 마쓰사카 시내 주쿄지(寿教寺)의 모토오리 가문 묘지에도 그의 두 번째 묘소가 있으며, 이 묘소는 아들 모토오리 하루니와(本居春庭)의 묘소와 함께 1936년 별도의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12]

3. 학문 경향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자신의 고학(古學)이 오규 소라이의 고문사학(古文辞学)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세간의 평가를 글에서 반박했지만, 실제로는 소라이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52] 소라이가 《논어징(論語徴)》을 통해 다진 문헌학적 방법론, 즉 현재의 언어 이미지로 고전을 해석하지 않고 텍스트 비교를 통해 역사적 차이와 이질 문화를 이해하려는 접근 방식은 노리나가가 《고사기전(古事記伝)》을 집필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53] 그는 옛 시대를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언어 체계, 즉 담론을 알아야 하며, 현재의 담론을 과거에 투영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53]

교토 유학 시절 접한 계추(契沖)의 저작 역시 노리나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계추의 폭넓은 조사와 인용을 바탕으로 한 실증적 방법론을 높이 평가했으며[22], 이는 국학(国学) 연구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교토에서의 생활은 왕조 문화에 대한 그의 동경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선대구사본기』와 『고사기』를 서점에서 구입한 것도 이 시기로 추정된다.

노리나가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약 35년에 걸쳐 집필한 《고사기전》이다.[2] 이 책은 간세이 10년(1797년) 6월 13일에 완성되었으며[15], 같은 해 9월 13일에는 완성을 축하하는 가회(歌会)가 열렸다.[15] 그는 국학(国学)과 고증학(考證学)의 방법론을 적용하여 《고사기》(古事記)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임을 주장하고, 이를 통해 일본 고유의 사상을 탐구하고자 했다.[2] 《겐지모노가타리》에 대한 주석 역시 그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이다.[2]

그의 사상에는 인간이 선악을 구별하는 자연스러운 직관적 능력을 지녔다고 본 중국 지식인 왕양명(王陽明)의 영향도 엿보인다.

노리나가는 고대 일본어의 문헌 분석, 특히 클리틱(clitic), 조사(助詞), 조동사(助動詞) 분석을 통해 일본어 고유의 문법 연구 전통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이 과정에서 후에 라이먼의 법칙(Lyman's Law)으로 명명된 연탁(連濁) 현상의 규칙성을 약 100년 앞서 발견하기도 했다.

간세이 5년(1793년)부터 쓰기 시작한 산문집 《탐승간(玉勝間)》에는 자신의 학문, 사상, 신념뿐만 아니라 방언, 지리, 지명 고증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글이 담겨 있다.[12]

3. 1.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고대 일본의 유산이 감정과 정신의 자연스러운 자발성에 있다고 보았으며, 외부에서 들어온 유교 사상은 이러한 자연스러운 감정과 상반된다고 여겼다.[2] 1763년에 쓴 저서 石上私淑言|이소노카미 사사메고토일본어(개인적인 시 견해)에서 그는 와카(和歌)가 이러한 자연스러운 감정에 초점을 맞추어 일본인의 ‘마음’ 속에 진실되고 순수한 본성을 길렀다고 주장했다. 이는 중국 시인들의 “인위적으로 영리한 마음”과 대조되는 것이었다.[3] 그는 오규 소라이가 중국 문명과 사상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다고 비판했지만[31], 그의 문헌 연구 방법론은 소라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도 지적된다.[31]

과거 유교 학자들은 만엽집(万葉集) 시의 장엄함과 남성적인 면을 선호하며, 여성적이고 남성적이지 않다고 여겨진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와 같은 작품을 꺼렸다. 불교 학자들은 이 작품을 인도의 법화경(法華経)을 문학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았다.[4] 그러나 노리나가는 겐지모노가타리가 일본 고유의 정서인 物の哀れ|모노노아와레일본어[5]를 표현한 작품으로 중요하게 다루었다. '모노노아와레'는 사라짐에 대한 슬픔이라는 독특한 일본적 감성을 의미하며, 이는 가모노 마부치가 언급한 '마고코로'(まごころ, 참마음)와 관련된 개념이다. 노리나가는 이 '모노노아와레'야말로 일본 문학의 본질을 형성한다고 주장했다.[6] 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진정한 마음"인 '마고코로'(まごころ)를 가지고 있으며, 고대 일본 문학이 이를 가장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보았다.[6] 노리나가는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자연스러운 정서와 정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외래 사상인 유교의 가르침(漢意|칸카라 고코로일본어, 한의)을 "자연에 거스르는 생각"이라고 비판했다.[30]

3. 2. 언어 연구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언어 연구'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는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공부하고 강의했던 장소에 대한 정보만 담고 있습니다.

3. 3. 복고 사상과 신토(神道)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유교나 불교의 관점, 즉 "한의(漢意)"를 빌려 신전(神典)을 해석하던 기존의 신불습합(神佛習合)이나 유가신도(儒家神道)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신토(神道)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사기(古事記)와 같은 고대 문헌을 실증적이고 문헌학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리나가는 고대 일본은 유교나 불교 같은 외래 사상 없이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자손인 천황 아래에서 평화롭게 다스려졌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상태를 명확한 말로 규정하거나 논쟁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언거(言挙)를 하지 않는 참된 도(道)"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유교와 불교는 나라가 혼란스러워 다스리기 어려울 때, 통치자들이 백성을 억지로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낸 인위적인 도(道)라고 비판했다.[32]

또한, 중국의 천명(天命)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천명론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통해 기존 군주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33] 주자학(朱子学)의 핵심 이론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역시 유학자들이 머릿속으로 꾸며낸 허황된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노리나가는 세상의 모든 일은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며, 세상의 이치를 인간의 논리로 해석하려는 것은 신들에 대한 불경이라고 주장했다.[34]

이처럼 현실의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노리나가는 당대의 사회 제도 역시 신의 뜻에 따른 것이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한의(漢意)"에 물든 잘못된 현실 사회라 할지라도 그것 역시 신의 섭리 안에 있으므로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고도(古道)"를 현재 사회에 강제로 적용하려 하거나, 이를 명분으로 현실 정치를 바꾸려는 시도는 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철저히 부정했다. 그는 "도(道)는 위에서 행하고 아래에 베푸는 것이므로, 옛 시대의 방식과 같다고 하여 세상과 다른 행동을 하거나 시대의 규칙을 어기는 것은 잘못이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정한 규칙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 바로 고도(古道)를 따르는 길이다"라고 주장하며 현실 질서에 순응할 것을 강조했다.[35]

4. 주요 저서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평생에 걸쳐 일본 고전 연구에 매진하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학문은 국학(国学) 연구의 기초를 다졌으며,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고사기전》(古事記伝): 약 35년에 걸쳐 집필하여 1797년에 완성한 고사기의 주석서이다. 노리나가의 가장 중요한 저서 중 하나로 꼽힌다.[2] 국학(国学)과 고증학(考證学)의 방법론을 적용하여 《고사기》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임을 주장하고, 이를 통해 고유한 일본의 종교와 법 개념을 발전시키려 했다. 이는 훗날 국가 신토(神道)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2] 총 4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방대한 분량과 깊이 있는 내용으로 유명하다.
  • 《겐지모노가타리 타마노오구시》(源氏物語玉の小櫛): 겐지모노가타리에 대한 주석서이다. 노리나가는 이 작품에서 일본 고유의 정서인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5]를 발견하고, 이것이야말로 문학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라짐에 대한 슬픔이라는 이 감성이 일본 문학의 핵심을 이룬다고 보았다.
  • 《다마가쓰마》(玉勝間): 1793년부터 쓰기 시작한 산문집이다. 스승 가모노 마부치와의 만남, 자신의 학문 방법, 사상, 신념 등에 대해 서술하였다.[24] 또한 일본의 방언, 지리, 지명 고증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 《나오비노미타마》(直毘靈): 1771년에 출판된 저서로, 노리나가의 복고 사상(復古思想)의 핵심을 담고 있다.[46] 그는 고대 일본인의 순수한 정신('마고코로', まごころ)을 강조하며, 외래 사상인 유교(儒敎)의 인위적인 가르침('한의', 漢意)을 비판했다.
  • 《자문요령》(紫文要領): 《겐지모노가타리》 연구서로, 《이소노카미노사사메고토》와 비슷한 시기에 집필을 시작했다.
  • 《이소노카미노사사메고토》(石上私淑言): 1763년에 저술된 와카(和歌) 연구서이다. 노리나가는 와카가 일본인의 진실되고 순수한 본성('마고코로')을 기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으며, 기교적인 중국 시와 대조된다고 주장했다.[3]
  • 《가가이카》(呵刈葭): 1786년에 간행된 책으로, 우에다 아키나리와의 논쟁 내용을 담고 있다. 주로 음운 변화 등 언어 문제와 일본 신화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기록되어 있다.[45]
  • 《지명자음전용례》(地名字音転用例): 1800년에 간행되었다. 《고사기》, 《풍토기》(風土記), 《화명초》(和名抄) 등 고대 문헌에 나타난 지명의 한자 표기와 발음이 변화한 사례 약 200건을 모아 분류하고 정리한 책이다.
  • 《우히야마 부미》(うひ山ぶみ): 국학 입문서로,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위해 저술되었다.


이 외에도 노리나가는 언어학, 역사,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작들은 《모토오리 노리나가 전집》(本居宣長全集) 등으로 정리되어 출판되었다.

'''주요 저서 목록'''
분야저서명
국학『고사기전』(古事記伝)
『겐지 모노가타리 연기고(源氏物語年紀考)』
『시분 요료』(紫文要領)
『겐지 모노가타리 타마노코구시』(源氏物語玉の小櫛)
『직비령(直毘霊)』[46]
『옥봉백수(玉鉾百首)』
『옥쿠시게(玉くしげ)』
『스즈노야 문답(鈴野屋問答)』
『우히야마 부미』(うひ山ぶみ)
『고킨슈 엔쿄』(古今集遠鏡)
평론『배로소선(排蘆小船)』[47]
어학『칸지 산온코』(漢字三音考)
『테니하 히모카가미』(てにをは紐鏡)[48]
『지온 카지요 가쿠』(字音仮字用格)[49]
『시노 타마오』(詞の玉緒)[50]
『지묘지온 텐요레이』(地名字音転用例)
수필・가론『타마카치마』(玉勝間)
『이시카미 시슈쿠겐』(石上私淑言)
『쿠즈바나(くず花)』
경제『비혼 옥쿠시게(秘本玉くしげ)』[51]
역사『구카이게이겐』(馭戒慨言)
가집(와카집)『스즈야슈(鈴屋集)』
기타 (자료집 등)『대일본천하사해화도(大日本天下四海画図)』
『도코밧쇼(都考抜書)』


5. 평가 및 영향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가장 중요한 저서로는 약 35년에 걸쳐 집필한 『고사기전』(古事記伝)과 겐지 이야기에 대한 주석이 있다. 그는 국학(国学)과 고증학(考證学)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고사기가 가장 오래된 일본 문헌이라고 주장했으며, 이를 통해 고유한 일본의 종교와 법 개념을 발전시켜 후대 신토(神道)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2]

노리나가는 고대 일본 문화의 핵심이 인위적인 제약 없이 감정과 정신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데 있다고 보았으며, 외래 사상인 유교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감정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763년 저서 石上私淑言|이소노카미 사사메고토일본어에서 그는 와카(和歌)가 일본인의 '마음'(心) 속에 담긴 진실되고 순수한 본성을 길러준다고 주장하며, 기교를 중시하는 중국 시와는 다르다고 보았다.[3] 그는 오규 소라이가 중국 문명과 사상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했다고 비판했지만, 노리나가 자신의 문헌 연구 방법론은 소라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그의 사상에는 '본능적 인식'을 중시한 중국의 왕양명 사상의 영향도 보이는데, 이는 인간이 선과 악을 구별하는 자연스러운 직관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노리나가는 자신의 사상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 敷島の大和心を人問はば,朝日に匂ふ山桜花일본어
: 만약 진정한 일본인의 정신에 대해 묻는다면, 아침 햇살에 향기로운 산벚꽃을 가리키세요.
: - 모토오리 노리나가, 敷島の歌|시키시마노 우타일본어

기존의 유교나 불교 학자들이 낮게 평가했던 겐지 이야기에 대해, 노리나가는 이 작품이 일본 고유의 미의식인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5](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슬픔과 공감)를 잘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가모노 마부치가 언급한 '마고코로(まごころ, 참된 마음)'와도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4][5] 그는 이 '모노노아와레'야말로 일본 문학의 본질이라고 주장했으며,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진정한 마음"인 '마고코로'가 고대 일본 문학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고 생각했다.[6]

또한 노리나가는 고대 일본어 문헌을 면밀히 분석하여 일본어 고유의 문법 체계를 세우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특히 조사(助詞)나 조동사(助動詞) 등 문법 요소 분석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으며, 복합어에서 뒤따르는 단어의 첫 자음이 탁음으로 변하는 현상인 연탁(連濁, rendaku)에 대한 규칙(라이먼 법칙)을 약 100년 앞서 발견하기도 했다.

5. 1. 긍정적 평가

계충(契沖)의 문헌 고증과 가모 마부치(賀茂真淵)의 고도설을 계승하여 국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7] 스승 마부치의 격려를 받아 『고사기』 연구에 착수하여 약 35년의 긴 시간에 걸쳐 주석서 『고사기전』을 완성했다.[17] 『고사기전』은 당시 일반적으로 정사인 『일본서기』를 읽을 때 참고 자료 정도로 여겨졌던 『고사기』의 독자적인 가치를 밝혀내어, 중요한 사서로 재평가받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18] 그는 국학(国学)과 고증학(考證学)의 방법론을 통해 『고사기』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임을 주장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본 고유의 종교와 법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켜 후대 신토(神道) 사상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2]

노리나가는 고대 일본 문화의 핵심이 꾸밈없는 감정과 정신의 자연스러운 발현에 있다고 보았으며, 외래 사상인 유교(儒敎)는 이러한 일본 고유의 감성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3] 그는 1763년 저서 石上私淑言|이소노카미 사사메고토일본어에서 와카(和歌)가 일본인의 진실하고 순수한 본성, 즉 '마음'(心)을 잘 드러내고 길러준다고 주장하며, 기교를 중시하는 중국 시와는 다르다고 강조했다.[3] 또한, 기존의 유교나 불교 학자들이 여성적이라며 낮게 평가했던 『겐지 이야기』의 가치를 재조명했다. 노리나가는 이 작품이 일본 특유의 미의식인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일본어,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슬픔과 공감)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일본 문학의 정수라고 주장했다.[4][5] 이는 가모 마부치가 말한 '마고코로'(まごころ, 참된 마음)와도 연결되는 개념으로[5], 노리나가는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이 '마고코로'가 고대 일본 문학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고 보았다.[6]

일본어 연구 분야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고대 일본어 문헌을 면밀히 분석하여 일본어 고유의 문법 체계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조사(助詞)나 조동사(助動詞)와 같은 문법 요소 분석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또한, 복합어에서 뒤따르는 단어의 첫 자음이 탁음으로 변하는 현상인 연탁(連濁)(rendaku)에 대한 규칙(후에 미국의 언어학자 라이먼의 이름을 따 '라이먼 법칙'으로 불림)을 약 100년이나 앞서 발견하기도 했다. 그의 일본어학 연구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성과를 포함한다.

  • 상대어 연구: 『고사기전』 저술 과정에서 상대특수 가나 표기법을 발견했다.
  • 한자음 연구: 『자음가자용격』 등을 통해 일본어 음운 체계를 정리하고, 자여(字余り, 정형시에서 음절 수가 넘는 현상) 법칙 및 탁음이 후대에 발생한 현상임을 밝혀냈다. 또한 『지명자음전용례』, 『한자삼음고』 등을 통해 지명 표기나 한자음의 한음, 오음, 당음 등의 대응 관계를 연구했다.
  • 문법(文法) 연구: 『테니와히모카가미』에서 의존격(係り結び) 법칙을 발견하고, 『고국시활용초』에서 일본어 동사의 활용 체계를 정리했다.


이러한 연구들은 방대한 용례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귀납적 방법론에 기반한 것이 특징이며, 그의 제자들인 이시즈카 타츠마로(石塚龍麿), 스즈키 아키라, 모토오리 하루니와뿐만 아니라 토죠 기몬(東条義門), 후가시 히로카게(富樫広蔭) 등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일본어학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5. 2. 비판적 평가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그의 고사기 연구를 통해 제시된 고유한 일본 종교 및 법 개념은 이후 국가 신토(State Shinto) 사상 발전에 활용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2] 이러한 복고주의적 경향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회가 극단적인 국수주의로 나아가는 데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으며,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노리나가는 일본 고유의 감성인 '物の哀れ|모노노아와레일본어'와 'まごころ|마고코로일본어'를 강조하며, 외래 사상인 유교는 일본인의 자연스러운 감정과 배치된다고 보았다.[3] 그는 와카(和歌)가 일본인의 순수한 본성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며, 중국 시인들의 기교를 "인위적으로 영리한 마음"이라고 평가 절하했다.[3] 또한 오규 소라이가 중국 문명을 과대평가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 중심적이고 배타적인 시각은 일본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타 문화를 배척하는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아카호 기시에 대한 노리나가의 비판 역시 그의 사상이 가진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된다. 그는 아카호 기시들이 주자학적 충의 관념에 얽매였다고 보아 "어리석은 짓", "가짜 마음" 등으로 강하게 비난했다.[38]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주자학에 대한 학문적 비판을 넘어, 대상에 대한 주관적인 폄훼와 감정적인 비난에 가깝다는 지적이 있다. 이는 그의 학문이 때로는 객관성을 잃고 편협한 시각으로 흐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6. 관련 유적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집, 박물관으로 보존됨


어류정(魚町)의 구택 터(국가지정 사적)

  • 모토오리 노리나가 구택(本居宣長旧宅|모토오리 노리나가 규타쿠일본어): 마쓰사카 시내에 위치한다. 이 집은 노리나가의 할아버지 오즈 산시에몬 사다하루(尾州三右衛門貞治)가 1691년 은퇴 후 휴식처로 지은 건물이다. 원래 마쓰사카시 우오마치(魚町)에 있었으나, 1909년 현재의 위치인 마쓰사카 성 부지로 옮겨졌다. 노리나가는 12세 때 어머니와 형제자매들과 함께 이곳으로 이사했으며, 교토에서 의학을 공부한 7년을 제외하고는 72세로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7] 노리나가는 이 집을 진료소로 사용하며 의사로 활동하는 한편, 일본 고전 문학 연구에 몰두하여 『고지키덴(古事記伝)』 등을 저술했다. 53세 때에는 2층 창고를 개조하여 서재를 만들고, 기둥에 종(鈴, 스즈)을 달아 '스즈노야(鈴屋)'라고 이름 지었다. 그의 후손들은 메이지 시대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메이지 정부가 그의 저술을 국가 신토와 국학 연구의 기초로 중시하면서 건물을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1909년 이전 후 노리나가 시대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려 노력했다. 1953년 건물과 원래 있던 우오마치의 터는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7]

  • 모토오리 노리나가 기념관(本居宣長記念館|모토오리 노리나가 기넨칸일본어): 모토오리 노리나가 구택의 일부를 포함하여 일반에 공개되는 시설이다. 노리나가의 서재 '스즈노야'를 볼 수 있으며, 그의 저술 원고 일부와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소장된 유물 중 다수가 일본의 중요 문화재[8]로 지정되어 있으나, 일부만 순환 전시된다.

  • 모토오리 노리나가 묘(本居宣長墓|모토오리 노리나가 하카일본어): 노리나가의 묘는 두 곳에 있다.
  • 야마무로산 묘소: 마쓰사카시 명락사(明楽寺) 뒤 야마무로산(山室山) 정상에 있다.[9] 이곳은 노리나가가 생전에 직접 지정한 장소로, 마쓰사카 시내와 이세만 너머 미카와국후지산까지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그는 사망 전 이곳을 방문하여 산벚나무를 심고 묘소 배치를 설계했으며, 묘비에는 『만요슈』의 시가 새겨져 있다. 1875년 야마무로야마 신사(山室山神社) 건립으로 주변 경관은 다소 변했다.[10] 묘소 옆에는 그의 스승인 히라타 아쓰타네 등의 추모비가 있다. 이 묘역은 1936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고[11], 1999년에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 주쿄지 묘소: 마쓰사카 시내 주쿄지(寿教寺)에 있는 모토오리 가문 묘지에도 노리나가의 묘가 있다. 이 묘소는 아들 모토오리 하루니와의 묘와 함께 1936년 별도로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12]

참조

[1] 웹사이트 国学の四大人(こくがくのしたいじん)の意味 https://dictionary.g[...] goo国語辞書 2021-04-12
[2] 서적 The Invention of Religion in Japa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2
[3] 학술지 The Poetics of Nativism: Motoori Norinaga and the Sacralization of Japanese Literature. 2019
[4] 서적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http://worldcat.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5
[5] 서적 The Poetics of Motoori Norinaga: A Hermeneutical Journe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7-01-01
[6] 학술지 Études Anciennes et Études Nationales dans le Japon du XVIIIème siècle : la Nature, l'Artifice et le Mal chez Ogyû Sorai et Motoori Norinaga https://www.persee.f[...] 1994
[7] 웹사이트 本居宣長旧宅 同 宅跡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0-08-20
[8] 웹사이트 本居宣長稿本類並関係資料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0-08-20
[9] 웹사이트 Grave of Motoori Norinaga https://www.city.mat[...] Matsusaka City
[10] 서적 (国指定史跡事典) National Historic Site Encyclopedia 学生社 2012
[11] 웹사이트 本居宣長墓(山室山)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0-08-20
[12] 웹사이트 本居宣長墓(樹敬寺)附 本居春庭墓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0-08-20
[13] 웹사이트 山室山神社 -本居宣長記念館 http://www.norinagak[...] 1883
[1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5-11-20
[15] 서적 日本古典文学大辞典 1986
[16] 웹사이트 国学の四大人(こくがくのしたいじん)の意味 https://dictionary.g[...] goo国語辞書 2020-07-22
[17] 서적 必携日本史用語 実教出版 2009-02-02
[18] 서적 本居宣長記念館 2001
[19] 서적 日本古典文学大辞典 1986
[20] 서적 本居宣長記念館 2001
[21] 서적 本居宣長記念館 2001
[22] 서적 本居宣長記念館 2001
[23] 서적 本居宣長記念館 2001
[24] 서적 日本古典文学大辞典 1986
[25] 서적 こよみと天文・今昔
[26] 뉴스 「鈴屋学会」のこと 松阪に「宣長」敬愛深く 中部読売新聞 1985-05-17
[27] 뉴스 「鈴屋学会」が発足 本居宣長を総合的に研究 「宣長学」の確立目指さうと 神社新報 1985-01-28
[28] 서적 心力をつくして ─本居宣長の生涯─
[29] 뉴스 戦後、遠ざけられたもの 産経新聞 2018-04-01
[30] 서적 本居宣長記念館 2001
[31] 서적 本居宣長記念館 2001
[32] 서적 直毘霊・玉鉾百首 岩波書店 1936
[33] 서적 直毘霊・玉鉾百首 岩波書店 1936
[34] 서적 直毘霊・玉鉾百首 岩波書店 1936
[35] 서적 うひ山ぶみ 講談社学術文庫 2009
[36] 논문 地名字音転用例 本居宣長記念館 2001
[37] 웹사이트 端原氏城下絵図 http://www.norinagak[...]
[38] 서적 本居宣長全集 筑摩書房
[39] 서적 ケンペルと徳川綱吉 ドイツ人医師と将軍との交流 中央公論社 1994
[40] 서적 本居宣長全集 第16巻 1974
[41] 웹사이트 http://www.norinagak[...]
[42] 논문 本居宣長「在京日記」にみる行楽地としての東山景域の構成 2007
[43] 웹사이트 https://www.norinaga[...]
[44] 웹사이트 『日本書紀の誕生: 編纂と受容の歴史』(八木書店) - 編集:遠藤 慶太,河内 春人,関根 淳,細井 浩志 - 河内 春人による本文抜粋 | 好きな書評家、読ませる書評。 https://allreviews.j[...] ALL REVIEWS 2020-11-18
[45] 서적 本居宣長全集
[46] 논문 直毘霊 日本古典文学大辞典編集委員会 1986
[47] 논문 排蘆小船 日本古典文学大辞典編集委員会 1986
[48] 논문 てにをは紐鏡 日本古典文学大辞典編集委員会 1986
[49] 논문 字音仮字用格 日本古典文学大辞典編集委員会 1986
[50] 논문 詞の玉緒 日本古典文学大辞典編集委員会 1986
[51] 논문 秘本玉くしげ 日本古典文学大辞典編集委員会 1986
[52] 문서 지쿠마쇼보 판 『모토오리 노리나가 전집』 제9권에 《소라이슈(徂徕集)》라는 자필 소책자가 있는데, 오규 소라이의 문장을 발췌한 것이다. 모토오리 노리나가 소라이 학설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53] 서적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20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