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 노부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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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토 노부히로는 1769년 출생하여 1850년 사망한 에도 시대의 사상가이다. 그는 농학, 경제,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폭넓은 지식을 쌓았으며, 300부 8,000권에 달하는 저술을 남겼다. 그의 주요 사상으로는 일본의 통일 국가 구상, 대외 팽창론, 농업 생산력 증진을 위한 방안 제시 등이 있으며, 특히 『경제요록』, 『우내혼동비책』, 『수통비록』 등의 저서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펼쳤다. 그는 농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경세가로서도 평가받았지만, 그의 경력과 사상에 대한 비판과 논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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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노부히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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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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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사토 노부히로 (佐藤 信淵) |
다른 이름 | 햐쿠유 (百祐) 겐카이 (元海) 쇼안 (松庵) 반쇼사이 (万松斎) 유사이 (融斎) 쓰바키엔 (椿園) |
출생 | 메이와 6년 6월 15일 (1769년 7월 18일) |
사망 | 가에이 3년 1월 6일 (1850년 2월 17일) |
향년 | 82세 |
신분 | |
직업 | 무사 |
소속 | 데와국구보타번 고시 (향사) 아와국도쿠시마번 무쓰국모리오카번 |
가문 | |
씨족 | 후지와라 씨 |
부모 | 아버지: 사토 노부스에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사사오카 씨 와타나베 씨 |
자녀 | 4남 2녀 |
후손 | 적자: 사토 노부테루 |
2. 생애
사토 노부히로는 실학, 고쿠가쿠(国学), 신도(神道)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으며, 특히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에게서 고쿠가쿠(国学)를 배운 것은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14년 신도 문제로 에도에서 추방당하기도 했지만, 저술 활동을 계속하며 『우나이 콘동 히사쿠(宇内混同秘策)』, 『노세이 혼론(農政本論)』 등 많은 책을 썼다. 우와지마 번(宇和島藩), 사쓰마 번(薩摩藩) 등 여러 번에서 그의 학문을 주목했고, 만샤노 고쿠(蛮社の獄)에 연루되기도 했지만, 로쥬(老中) 미즈노 타다쿠니(水野忠邦)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막부 정책에 참여할 기회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미즈노 타다쿠니(水野忠邦)의 실각으로 그의 정책은 실현되지 못했다.
1850년 사망할 때까지 저술 활동을 계속했으며,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주요 연보
연도 | 사건 |
---|---|
1789년 | 일시 귀향함. |
1792년 | 에도 쿄바시 야나기초(柳町)에서 의업을 시작함. |
1793년 | 첫 번째 부인을 맞이함. |
1794년 | 어머니를 에도로 불러들임. |
1797년 | 어머니 사망. 카즈사 국(上総国) 야마베 군 다마에자쿠 촌(현 지바현(千葉県) 토가네시(東金市) 다마에자쿠)에 은거함. |
1807년 | 도쿠시마 번(徳島藩)에 출사. 2년도 채 되지 않아 에도로 돌아와 다마에자쿠로 돌아감. |
1811년경 | 에도 니혼바시 도미자와초(日本橋富沢町)에서 의업. 요시카와 겐쥬로(吉川源十郎)에게 입문. |
1813년 |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에게 입문. |
1814년 | 의업 중단. 기카와 겐쥬로 사건에 연좌되어 투옥 및 에도 추방. 시모우사 국(下総国) 후나바시 다이진구(현 지바현(千葉県) 후나바시시)로 이동. |
1817년 | 다마에자쿠 촌으로 이동. |
분세이(文政) 6년(1823년) | 『우나이 콘동 히사쿠(宇内混同秘策)』 저술. |
분세이(文政) 8년(1825년) | 『텐추키(天柱記)』 저술. |
분세이(文政) 10년(1827년) | 『케이자이 요로쿠(経済要録)』 저술. |
덴포(天保) 3년(1832년) | 에도 추방. 무사 국(武蔵国) 카데부쿠로 촌(현 사이타마 현(埼玉県) 사이타마시(さいたま市) 미나미구)으로 이동. 『노세이 혼론(農政本論)』 저술. |
덴포(天保) 4년(1833년) | 『나이요 케이이키(内洋経緯記)』 저술. |
덴포(天保) 10년(1839년) | 만샤노 고쿠(蛮社の獄)에 렌자(連座)되었으나, 죄는 면제. |
덴포(天保) 11년(1840년) | 아야베 번(綾部藩) 번주 쿠키 타카토(九鬼隆都)에게 초청되어 농업 정책 강구. |
덴포(天保) 12년(1841년) | 모리오카 번(盛岡藩)에 출사. |
카에이(嘉永) 2년(1849년) | 에도 추방 면제. |
카에이(嘉永) 3년(1850년) | 사망. |
2. 1. 출생과 가계
사토 노부히로는 메이와(明和) 6년(1769년) 6월 15일 데와 국 유쇼 군(현재의 아키타현)에서 태어났다.[2][3] 그의 가문은 횡수분지(横手盆地)에서 세력을 떨쳤던 전국대명(戦国大名) 오노데라씨(小野寺氏)를 섬겼으나, 민간에서 의업(医業)을 생업으로 삼았다고 한다.[2] 5대 조상인 칸안(歓庵, 신쿠니(信邦)) 이래로 겐안(元庵, 신에이(信栄)), 후마이켄(不昧軒, 신케이(信景)), 겐메이카(玄明窩, 신키(信季))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농학(農学)과 광산(鉱山)학 등 실학 연구에 종사했다.[2][3]노부히로의 생가에는 꽃이 피지 않는 등나무(藤)인 "바카후지(バカフジ)"가 있었고, 어린 시절 노부히로는 "바카후지 저택의 바카오지(バカフジ屋敷のバカオジ)"(이 경우 "오지(オジ)"는 "아우(弟)"를 의미한다)라고 불렸다.[2] 그러나 글 읽고 쓰기와 무예에는 뛰어났다고 한다.[2]
덴메이(天明) 원년(1781년), 아버지 겐메이카 신키가 여러 지역을 유람하는 여행을 떠나 에조지(蝦夷地)(현재의 홋카이도(北海道))에서 1년을 보낸 후, 도호쿠 지방(東北地方) 각지를 돌아다니며 실학을 배우고 가학을 사람들에게 강의하면서 1년을 더 보냈다.[3] 이 여행은 아버지 신키가 번정 비판 혐의로 쫓겨 피신한 것을 따라간 것이라는 말도 있다.[4]
2. 2. 유년기와 청년기
사토 노부히로는 1769년 6월 15일 쿠보타번(久保田藩) 영지인 데와 국 유쇼군(出羽国雄勝郡)에서 태어났다.[2][3] 그의 집안은 오노데라씨(小野寺氏)를 섬겼으나, 민간에서 의업(医業)을 생업으로 삼았다.[2] 5대 조상부터 4대에 걸쳐 농학(農学)과 광산(鉱山)학 등 실학 연구에 종사한 가문이었다.[2][3]어린 시절 노부히로는 "바카후지 저택의 바카오지(バカフジ屋敷のバカオジ)"라고 불리는 악동이었으나, 글 읽고 쓰기와 무예에는 뛰어났다.[2] 1781년 아버지 겐메이카 신키(玄明窩信季)가 여러 지역을 유람하는 여행을 떠나 에조지(蝦夷地)(현재의 홋카이도(北海道))에서 1년을 보낸 후, 도호쿠 지방(東北地方) 각지를 돌아다니며 실학을 배우고, 가학을 사람들에게 강의하면서 1년을 더 보냈다.[3] 이 여행은 아버지 신키가 번정(藩政) 비판 혐의로 쫓겨 피신하는 것을 따라간 것이라는 말도 있다.[4] 그는 이후에도 유람으로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지만, 특히 오슈우(奥羽)와 츄고쿠 지방(中国地方) 등의 여행에서 목격한 농촌의 비참한 간비키(間引き)에 마음 아파했다.[2][5]
1784년 닛코를 거쳐 시모쓰케 국(下野国) 아시오 동산(足尾銅山)을 방문하여 아버지와 함께 구리(銅) 제련과 주석(錫) 개발 등의 기술 지도에 종사했으나, 아버지 신키가 여기서 사망했다.[2][3][4] 아버지는 노부히로에게 에도(江戸)에 나가 학문 수업을 할 것을 유언(遺言)했다.[2][3][4]
에도에 나온 노부히로는 16세에 미사키 국(美作国) 쓰야마 번(津山藩)의 번의(藩医)였던 우타가와 겐즈이(宇田川玄随)에게 입문하여 동물학(動物学)·식물학(植物学)·의학·본초학(本草学) 등 랑학(蘭学)의 여러 학문을 배우고, 특히 키무라 타이조(木村泰蔵)에게서 천문학(天文学)·지리학(地理学)·역산(暦算)·측량술(測量術)을 배웠다.[2][3] 1785년 스승 겐즈이의 귀환에 따라 쓰야마에 가서, 번정개혁(藩政改革)을 위해 한 권의 책을 번주에게 바쳐 헌책에 성공하여 두터운 대우를 받았다.[3][4] 이듬해에는 쓰야마를 떠나 사이쿠(西国) 유람의 여행을 떠나, 사쓰마 국(薩摩国)에까지 이르렀다.[3] 1789년 일시 귀향하여 어머니를 찾아뵈었다.[2]
에도로 돌아온 후에는 폭넓게 여러 학문, 특히 병학(兵学)과 대외 정책에 대해 배우고, 카즈사 국(上総国) 야마베 군 다마에자쿠(大豆谷) 촌(현 지바현(千葉県) 토가네시(東金市) 다마에자쿠)에 은거하여 농업에 종사하며 농학(農学)의 여러 조사(調査)·실험(実験)·관찰(観察)을 반복했다.[2][6]
1792년 25세가 된 노부히로는 다시 에도에 나가 쿄바시 야나기초(柳町)에서 의업을 시작했다.[6] 이듬해에는 결혼하고, 그 다음 해에는 어머니를 에도로 불렀으나, 생활은 반드시 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6]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는 다마에자쿠에 은거하며 의업과 함께 농업을 경영했다고 한다.[6]
1807년 39세 때, 도쿠시마 번(徳島藩) 호스가가(蜂須賀氏)의 가신과 함께 아와 국(阿波国)에 가서, 병학 고문과 같은 역할을 맡아 해방(海防)에 대해 크게 헌책했다.[6] 이 무렵에 쓰여진 『철포궁리론(鉄砲窮理論)』에서는 화약(火薬)을 사용하여 달리는 "자주화선(自走火船)"[7](로켓 추진선·군함(軍艦))을 발안함으로써, 일약 명성이 높아져 그 문하에 모이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8] 아와 국에서 생활한 것은 2년도 채 되지 않아 에도 쿄바시 야나기초로 돌아와, 그 후 다마에자쿠 촌에 은거하여 저술 생활에 들어갔다.[3][6]
노부히로는 무사(牢人) 신분이었기에 출사를 강하게 희망했으나, 좀처럼 그 소망을 이룰 수 없었다.[6]
2. 3. 중년기 이후
분카 4년(1807년), 39세 때, 노부히로는 지인이었던 도쿠시마 번(徳島藩) 호스가가(蜂須賀氏)의 가신과 함께 아와 국(阿波国)에 가서 병학 고문 역할을 맡아 해방(海防)에 대해 크게 건의했다.[6] 이 무렵 쓰여진 『철포궁리론(鉄砲窮理論)』에서는 화약(火薬)을 사용하여 달리는 "자주화선(自走火船)"[7](로켓 추진선·군함(軍艦))을 제안하여 명성이 높아져 그의 문하에 모이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8] 그러나 아와 국에서의 생활은 2년이 채 되지 않았고, 이후 에도 쿄바시 야나기초로 돌아온 뒤 다마에자쿠 촌에 은거하여 저술 생활에 들어갔다.[3][6]노부히로는 무사(牢人) 신분이었기에 출사를 강하게 희망했으나, 좀처럼 그 소망을 이룰 수 없었다.[6] 여러 분야의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전문가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했고, 본업인 의학에 관해서도 주목할 만한 저서는 없었다. 노부히로가 말하는 사토가(佐藤家)의 가학(천문(天文)·지리(地理)·광산(鉱山)·토목(土木)·병학(兵学) 등)도 개별적으로 보면 선조들의 설을 그대로 받아 쓴 수준을 크게 넘는 것은 아니었다.[6] 그러나 여러 분야의 지식을 흡수·소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은 확실하며, 이러한 지식의 폭이 시대의 흐름과 전환점을 포착하게 하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45세 무렵, 노부히로는 다시 에도로 이주하여 막부 신도파(幕府神道方) 요시카와 겐쥬로(吉川源十郎)에게 입문하여 신도(神道)를 배우고, 분카 10년(1813년)에는 47세에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의 기후키샤(気吹舎)에 입문하여 고쿠가쿠(国学)을 배웠다.[3][6] 히라타 고쿠가쿠와의 만남은 노부히로의 학문에 국수주의적 성격을 짙게 만들었다.[6]
분카 11년(1814년), 신도 문제로 죄를 지어 에도 소발이(所払い)되었으나, 여전히 히라타 학당 등에 출입하여 금지를 어겼기 때문에, 덴포(天保) 3년(1832년)에는 에도 십리 사방 출입 금지가 되어, 무사 국(武蔵国) 카데부쿠로(鹿手袋) 촌(현 사이타마 현(埼玉県) 사이타마시(さいたま市) 미나미구)에 은거했다.[3]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분세이(文政) 연간에는 다마에자쿠에서 『우나이 콘동 히사쿠(宇内混同秘策)』, 『텐추키(天柱記)』, 『케이자이 요로쿠(経済要録)』를 저술하고, 카데부쿠로에서는 덴포(天保) 연간에 『노세이 혼론(農政本論)』, 『나이요 케이이키(内洋経緯記)』를 저술했으며, 그 명성은 크게 높아져 우와지마 번(宇和島藩)과 사쓰마 번(薩摩藩)에서는 출입을 허락받았다.[3] 그러나 기본적으로 무사 신분이었던 점에서 생활은 궁핍했던 것으로 보인다.[6]
덴포(天保) 10년(1839년)에는 친분이 있던 와타나베 가잔(渡辺崋山), 타카노 초에이(高野長英), 오제키 산에이(小関三英)과 함께 만샤노 고쿠(蛮社の獄)에 렌자(連座)했으나, 가까스로 죄를 면했다.[3] 이듬해 덴포(天保) 11년(1840년), 아야베 번(綾部藩)의 번주 쿠키 타카토(九鬼隆都)에게 초청되어 권농책을 강구했다.[3] 마침내 그의 학식은 로쥬(老中) 수좌였던 미즈노 타다쿠니(水野忠邦)의 눈에 들었고, 그의 죄도 용서되어, 타다쿠니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후코쿠호가이겐(復古法概言)』을 저술했다(코카(弘化) 2년(1845년) 간행).[3] 노부히로는 막부 전매(専売) 제도라고 할 수 있는 "후코쿠호(復古法)"를 실시하고, 유통(流通)을 막부의 손으로 직접 통제하여 유통 과정에 대한 조세에 의한 부국책을 제시했으나, 타다쿠니의 실각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3][9] 이후 노부히로는 전국 각지의 번(藩)에 초청되어 정치(政治), 경제, 산업(産業)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강연을 했다.[2]
노부히로는 "자신의 학설은 현세에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후세 뛰어난 군주(君主)가 나타나면 반드시 나의 가학으로 천하를 일신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생애에 걸쳐 저술을 계속했으나, 카에이(嘉永) 3년(1850년) 정월 6일, 병으로 에도에서 사망했다.[2] 향년 82세. 묘소는 아사쿠사(浅草) 쇼오지(현재는 스기나미구(杉並区) 코엔지(高円寺) 남2-29로 이전)에 있다. 고향인 니시바오닌(西馬音内)의 호센지에는 토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의 휘호(揮毫) "사토 고다이히(佐藤五代碑)"가 있다.[4][10]
3. 사상
사토 노부히로의 저작은 300부 8,000권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모두 전해지지는 않는다.[2] 생전에는 그의 저작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독자층도 제한적이었다.[2] 책 제목에 '비책(秘策)', '비록(秘録)' 등이 많은 것은 공개할 수 없는 성격 때문이었다.[2] 그의 저작은 메이지 시대 이후에 널리 읽히게 되었으며, 주요 저작은 다키모토 세이이치가 편찬한 『사토 노부히로 가학전집(佐藤信淵家学全集)』에 정리되어 있다.[3] 그의 저작은 농학, 병학, 병기 제조, 경제, 사회 정책, 교육, 행정에서 국가 경영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며, 실용적인 것부터 이론적, 관념적인 것까지 포함한다.[3]
노부히로는 에도 시대의 봉건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막번체제하에서 '통일 국가'로서의 일본의 모습을 구상하고, 이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회적, 경제적 내용을 담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3] 또한, 히라타 아쓰타네의 국학(国学)을 배워 실학 중심이었던 사토 가문의 학문에 '철학'을 도입했다고도 평가받는다.[4]
1827년에 완성된 『경제요록(経済要録)』에서 노부히로는 "우리 가문의 학문 원칙은 예로부터 화(和)·한(漢)·인도(印度)의 도학(道学)을 기본으로 하고, 고황산령신(高皇産霊神)이 천지를 창조하신 신의 뜻에 절충한 것이다"라고 썼다.[2] 히라타 아쓰타네가 주장한 산령신(産霊神)에 의한 만물 생성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그의 경제론은 생산력의 원리에 기반을 두었다.[2][15] 노부히로는 "경제란 국토를 경영하고 물산을 개발하여 영지를 풍요롭게 하고 만민을 구제하는 것"이라며, 경제의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창업(創業), 개물(開物), 부국(富国), 수통(垂統)의 4가지를 제시했다.[2]
1823년에 쓴 경세제민론인 『우내혼동비책(宇内混同秘策)』에서는 "대지는 모두 황조(皇朝)의 소유"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했다.[2][18] 에도를 수도로 삼아 왕성(王城)의 땅으로 하고 '도쿄'로 개칭해야 하며, 오사카(서경)와 함께 이도제(二都制)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6][18][19] 또한 지방을 14개 성(省)으로 나누는 행정 기구를 설치하고, 10학부제의 대학을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2][6][18][19]
노부히로는 가이호 세이료, 혼다 도시 மரியாதை와 함께 경세가로 불린다.[9] 그의 중상주의론은 이 두 사람, 특히 혼다 도시 மரியாதை의 중상주의론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6] 가이호 세이료가 한 번(藩) 중심의 중상주의를 주장한 반면, 혼다 도시 மரியாதை는 국가 중심의 중상주의를 제시했고, 노부히로는 이를 계승했다.[6] 무사 계급의 경세론에서 흔히 보이는 시장 경제보다 정치에 치우친 논리를 펼쳤다는 점, 대외 진출론에서도 혼다 도시 மரியாதை의 중상주의론을 계승했다는 점이 공통점이다.[6] 노부히로는 북쪽 지방과 오우(奥羽) 지방 농민들의 곤궁과 황폐해진 농촌을 구제하겠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6] 그는 통일 국가 구상을 세우고, 그 안에 농업, 상업, 광업을 포함시켜 논의를 전개했다.[6] 수학자였던 혼다 도시 மரியாதை가 서양 사정에 대한 얕은 지식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한 반면, 노부히로는 광산학과 농학 등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국내 생산력 증진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했다는 점이 큰 차이점이다.[6][9] 또한, 혼다 도시 மரியாதை는 평화적인 대외 진출을 주장한 반면, 노부히로는 전쟁을 동반하는 군사적 침략을 명확하게 제시했다.[6] 에도 막부 체제하에서 대내외적 시야를 가진 통일 국가를 구상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6] 해방, 통상과 관련하여 노부히로는 영국이 세계 각국과의 무역을 통해 부강해졌다고 보고, 통상 항해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공개적으로 개국론을 펼쳤다.[6][9] 그는 무역의 관영(官営), 산업 독점을 통해 에도 막부와 막번 체제의 경제적 난관을 타개하려 했다.[6][9]
한편, 노부히로는 일본 제일주의를 주장하고, 만주, 조선, 타이완, 필리핀 및 남양 제도 영유 등을 주장하여 근대 일본의 대외 팽창주의, 나아가 "대동아공영권" 구상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18][20] 이는 오늘날 명백한 침략 사상으로 비판받는다.[6]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에서는 노부히로를 대동아 공략을 예견한 인물로 칭송하며 군인을 중심으로 애독했다. 노부히로에 이르는 사토 가문 5대의 가학(家学)은 '5대의 고심(苦心)'이라는 제목으로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미담이었다. 그러나 모리 센조는 1942년에 노부히로의 이력에 거짓과 과장이 많으며, 출세를 위해 과장된 선전을 한 "사기꾼(山師)"이라고 비판하는 『사토 노부히로 - 의문의 인물(佐藤信淵 - 疑問の人物)』을 간행했다.[4] 노부히로의 고향에서는 이 책에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켰고, 당국도 이에 호응하여 전쟁 말기에는 재판(再版)이 불가능하게 되었다.[21] 다니자와 에이이치는 모리 센조의 설을 받아들여 노부히로를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과 허풍으로 일관한" 사기꾼이며, "5대에 걸쳐 학자를 배출한 가계"라거나 선조의 학문을 자신이 집대성했다는 것도 모두 거짓이라고 비판했다.[22]
그러나 허황된 말을 통해서라도 자신을 알리려는 자세는 출세를 강하게 원하는 사람에게 흔히 있는 일이 아니냐는 변론도 있다.[6][23] 처사(處士) 신분의 실업 지식인이 생활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지식을 발휘하기 위해 무사(牢人)의 경계를 벗어나 봉록(祿仕)을 구한 것을 비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23]
모리 센조의 『근세인물야화(近世人物夜話)』(1968년)에는 요시다 쇼인이 옥중에서 노부히로의 『경제요록(経済要録)』을 읽고 "자세히 살펴보니 매우 실익이 있다…민사(民事)에 있어 가장 부족해서는 안 된다"라는 감상을 남겼다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4] 요시다 쇼인은 노부히로를 농학 분야에서 최첨단을 달리는 사람으로 이해했지만, 과장된 공론(空論)으로 본 부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
나라모토 타쓰야는 노부히로가 히라타 아쓰타네파의 영향을 받아 "비과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점도 많다"면서도 "그가 그린 국가상은 메이지 유신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뛰어난 사상가였음을 증명한다"고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3] 또한, 농학에서 재평가되어야 할 점이 있으며, 간척이나 매립에 의한 도시 건설, 자주화선(自走火船) 등의 아이디어는 당시 일본인으로서는 비범했으며, 특히 도시론 등에서는 앞으로 재검토되어야 할 요소를 갖추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4]
3. 1. 농정사상
사토 노부히로는 "농업은 정치의 근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였다.[14] 그는 『초목육부경종법(草木六部耕種法)』에서 유용한 식물을 뿌리, 줄기, 껍질, 잎, 꽃, 열매의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재배하는 방법을 설명하였다.[11][12][13] 이러한 공헌으로 노부히로는 미야자키 야스사다, 오쿠라 나가쓰네와 함께 "에도 시대의 3대 농학자"로 불린다.[11][12][13]또한, 노부히로는 『농정본론(農政本論)』을 저술하여 부유한 농민과 상인들이 토지를 많이 소유하는 것을 농민 곤궁의 원인 중 하나로 보았다.[14] 그는 토지 겸병을 금지하고, 천재에 대한 구제책 등을 주장하며 모든 백성이 곤궁에서 벗어나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14]
3. 2. 중앙집권적 국가 구상
사토 노부히로는 『경제요록(経済要録)』, 『수통비록(垂統秘録)』 등에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구상했다.[2] 그는 정부가 주도하여 국토를 개발하고 산업을 육성하며, 질서 있는 교역을 통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16] 특히, 『수통비록(垂統秘録)』에서는 전국에 "삼대(三台)"와 "육부(六府)"를 설치하고, 백성을 "팔업(八業)"으로 나누어 분업화하는 등 국가사회주의적인 구상을 제시했다.[6][17]『경제요록(経済要録)』은 "수통(垂統)" 즉 "자손 대대로 영원히 국가를 번성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를 구상했다.[2][16] 정부가 중심이 되어 국토를 개발하고, 여러 산업을 일으켜 정부 통제하에 두며, 질서 있는 교역을 진흥시켜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국민 생활의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내용이다.[2][16]
『수통비록(垂統秘録)』은 노부히로가 1832년 경에 구술한 것을 아들 사토 노부테루와 제자 오쿠보 도오루가 필기한 것으로, 노부히로 사후에 완성되었다.[17] 일본 전국에 신祇台(신기다이)・교화대(敎化臺)・태정대(太政臺)의 "삼대(三台)"와 본사부(농업)・개물부(광업・임업)・제조부(공업)・융통부(상업)・육군부・수군부의 "육부(六府)"를 설치하고, 백성을 초(草)・수(樹)・광(鉱)・장(匠)・고(賈)・용(傭)・주(舟)・어(漁)의 "팔업(八業)"으로 나누어 육부에 분속시켜 겸업을 금지하는, 일종의 국가사회주의적으로 여겨지는 일본을 구상하였다.[6][17] 특히, "병양관(病養館)"이라는 현재의 국립보양소나 국민건강보험으로 이어지는 생각, "자육관(慈育館)", "유아관(遊児館)"이라는 빈곤 가정의 무상 보육 시설을 설치하라는 주장이 주목할 만하다.[6][17]
4. 평가와 비판
사토 노부히로의 사상은 독창적이고 방대한 내용으로 주목받았지만, 그의 경력과 가학 전승에는 모순된 부분이 많다는 지적이 있다.[4] 특히, 그가 스스로 밝힌 경력의 전승에는 모순점이 발견된다.
또한, 『우내혼동비책(宇内混同秘策)』에서 일본 제일주의를 주장하고, 만주, 조선, 타이완, 필리핀 및 남양 제도의 영유 등을 제창했기 때문에, 그의 대외 팽창론은 침략 사상으로 비판받는다.[6][18][20] 이는 근대 일본의 대외 팽창주의를 정당화하고, 대동아공영권 구상의 "아버지"로 여겨지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에서는 노부히로가 대동아 공략을 예견한 인물로 칭송받았고, 군인들이 그의 저서를 애독했다. 과거에는 사토 가문 5대의 가학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5대의 고심(苦心)"이라는 제목으로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1942년 모리 센조(森銑三)는 노부히로의 이력에 허위와 과장이 많으며, 그를 출세를 위해 과장된 선전을 한 "사기꾼(山師)"이라고 비판했다.[4] 그의 저서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전쟁 말기에는 재판(再版)이 불가능하게 되었다.[21] 타니자와 에이이치(谷沢永一)는 모리의 설을 지지하며, 노부히로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과 허풍으로 일관했다"고 비판했다.[22]
하지만, 출세를 위한 허풍은 흔히 있는 일이며, 처사(處士) 신분으로서 실업 지식인이 자신의 재능과 지식을 발휘하기 위해 봉록(俸祿)을 구한 것을 비난하기 어렵다는 변론도 있다.[6][23]
1968년 모리 센조(森銑三)의 『근세인물야화(近世人物夜話)』에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경제요록(經濟要録)』을 읽고 노부히로를 농학의 최첨단으로 이해했지만, 과장된 공론(空論)으로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4]
한편, 나라모토 타츠야(奈良本辰也)는 노부히로의 국가 구상이 메이지 유신을 예견했다는 점에서 그를 높이 평가했다.[3] 또한, 그의 농학, 간척 및 매립에 의한 도시 건설, 자주화선(自走火船) 등의 아이디어는 당시 일본인으로서는 비범하며, 특히 도시론 등은 재평가되어야 할 요소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4]
5. 주요 저서
참조
[1]
서적
The Invention of Religion in Japa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
문서
近世の秋田
[3]
문서
奈良本
[4]
문서
秋田人名大事典 第2版
[5]
문서
丸山
[6]
학술지
江戸期における重商主義論の展開 : 佐藤信淵と横井小楠
http://id.nii.ac.jp/[...]
[7]
학술지
佐藤信淵考案の自走火船 : ロケット推進船
日本航空宇宙学会
[8]
웹사이트
彌高神社「御祭神」
http://www.iyataka-j[...]
[9]
문서
逆井
[10]
문서
秋田のお寺
[11]
문서
賀川
[12]
웹사이트
草木六部耕種法
https://kotobank.jp/[...]
[13]
문서
(제목 없음)
[14]
웹사이트
農政本論
https://kotobank.jp/[...]
[15]
문서
桂島
[16]
웹사이트
経済要録
https://kotobank.jp/[...]
[17]
웹사이트
垂統秘録
https://kotobank.jp/[...]
[18]
웹사이트
宇内混同秘策
https://kotobank.jp/[...]
[19]
문서
(제목 없음)
[20]
문서
エルドリッジ
[21]
서적
森銑三
[22]
서적
新しい歴史教科書の絶版を勧告する
ビジネス社
[23]
문서
塚谷
[24]
서적
第二章 近世種子島の気候変動と地域社会
臨川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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