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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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목야 전투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한 전투로, 은나라의 멸망과 주나라의 건국을 가져왔다. 은나라 말기 폭군 주왕의 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의 지지를 얻은 주나라는 목야에서 은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는 동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정확한 연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기원전 1046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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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11세기 중국 - 상나라
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경부터 기원전 1046년까지 중국을 지배한 왕조로, 갑골문 발견을 통해 역사적 사실이 증명되었으며, 발달된 청동기 문화와 문자 체계를 가졌고, 주나라에 의해 멸망한 후에도 일부 잔재가 이어졌다. - 기원전 11세기 중국 - 채숙 도
주 문왕과 태사의 아들이자 주 무왕의 동복 형제인 채숙도는 무왕에 의해 채에 봉해졌으나, 주공 단의 섭정에 불만을 품고 삼감의 난을 일으킨 후 유배되어 사망했다. - 상나라 - 기자조선
기자조선은 기원전 12세기경 기자가 은나라 유민을 이끌고 세웠다고 전해지는 고조선의 한 갈래로, 역사적 실존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민족의 시조로 숭상받았다. - 상나라 - 상제
상제는 고대 중국에서 숭배된 최고의 신이자 하늘의 통치자로, 갑골문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천과 혼용되기도 하고 도교의 옥황상제와 혼합되기도 했으며, 현대 유교 신학에서는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목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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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 이름 | 목야 전투 |
![]() | |
시기 | 기원전 1046년경 |
장소 | 목야 (현재 허난 성 중부) |
결과 | 주나라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1 | 상나라 |
교전 2 | 주나라 |
지휘관 및 지도자 | |
상나라 지휘관 | 제신 |
주나라 지휘관 | 희발 강태공 |
병력 규모 | |
상나라 병력 | 50,000–70,000명 |
주나라 병력 | 보병 45,000명 정예병 3,000명 전차 300대 연합군 전차 3,700대 |
피해 규모 | |
상나라 피해 | 심각한 피해 |
2. 역사적 배경
기원전 11세기 중국 은 왕조 말기, 주왕은 폭정을 일삼아 백성과 제후들의 원성을 샀다. 주의 서백 창은 은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힘을 키웠으나, 은과의 결전 직전 사망했다. 그의 아들 무왕은 강태공의 조언에 따라 때를 기다리며 반란을 준비했다.
2. 1. 은나라 말기의 상황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은 왕조 말기 폭군 주왕(제신)은 무거운 세금을 거두고 간언하는 신하들을 죽였으며, 조상 제사에 많은 사람을 산제물로 바쳤다. 이 때문에 백성은 은의 지배를 혐오했고, 제후들은 은을 전복시킬 계획을 세웠다.주왕은 은 왕조 전복을 꾀한 제후들을 거짓으로 불러모아 죽이고 젓갈로 담갔다. 서백 창은 비밀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주왕의 의심을 사 노예가 되었다. 주왕은 서백 창의 장남 백읍고를 죽여 죽으로 만들어 서백 창에게 먹였다. 서백 창의 가신이 주왕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고서야 서백 창은 혐의를 풀고 풀려났지만, 아들을 죽인 은 왕조에 복수할 결심을 굳혔다.
서백 창은 가까운 나라들을 병합해 국력을 늘리고 은 왕조에 원한을 품은 제후들을 규합해 은에 맞설 힘을 키웠다. 그러나 은과의 결전을 앞두고 노환으로 죽고, 차남 발(무왕)이 주의 태자가 되어 제후들을 모아 은 왕조와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은 왕조에 반발했던 제후들도 가담해 대병력으로 늘어났지만, 발은 "아직은 아니다."라며 군을 돌려 주로 돌아왔다.
12세기경, 상(商)의 영향력은 서쪽으로 위수 계곡까지 확장되었는데, 이곳은 주라는 씨족들이 점령한 지역이었다. 주나라 문왕은 주의 지배자이자 상 왕의 봉신으로서, 상의 상의 제신(주왕)으로부터 "서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제신은 남동쪽 원정에 참여하는 동안 문왕에게 후방을 지키도록 했다.
제신은 문왕의 커져가는 힘을 두려워하여 그를 투옥했다. 문왕은 나중에 풀려났지만, 상과 주 사이의 긴장은 더욱 커졌다. 문왕은 군대를 준비하고 상에 충성하는 몇몇 소국을 정복하여 상의 동맹을 서서히 약화시켰다. 문왕은 주의 상에 대한 실제 공세가 시작되기 전인 기원전 1050년에 사망했다.
제신은 위수 계곡에서의 주의 지역 정복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그는 스스로를 신성한 조상들이 임명한 정당한 통치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다른 기록에서는 그가 그의 첩 달기와 술, 성관계에 과도하게 탐닉했다고 묘사한다.
문왕의 아들인 주나라 무왕은 몇 년 후 주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지연의 이유는 무왕이 상을 정복하라는 천상의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강태공의 조언에 따라 적절한 기회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제신에 대한 여론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후대의 역사들은 정당하게 그리고 문화적으로 주를 정복한 주와 일치했으며, 제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악화되었다. 초기 자료에서는 그는 무지하고 무능력한 인물로 묘사되었지만, 몇 세기 후에는 끔찍한 고문자로서 모든 사람이 경멸하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2. 2. 주나라의 성장
문왕은 주의 지배자이자 상 왕의 봉신으로서, 상의 제신(주왕)으로부터 "서백"(西伯|서백중국어)이라는 칭호를 받았다.[1] 제신은 남동쪽 원정에 참여하는 동안 문왕에게 그의 후방을 지키도록 했다.결국 제신은 문왕의 커져가는 힘을 두려워하여 그를 투옥했다.[1] 문왕은 나중에 풀려났지만, 상과 주 사이의 긴장은 더욱 커졌다.[1] 문왕은 군대를 준비하고 상에 충성하는 몇몇 소국을 정복하여 상의 동맹을 서서히 약화시켰다.[1] 기원전 1050년, 문왕은 상에 대한 실제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사망했다.[1]
제신은 위수 계곡에서의 주의 지역 정복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그는 스스로를 그의 신성한 조상들이 임명한 정당한 통치자로 여겼기 때문이다.[1] 다른 기록에서는 그가 그의 첩 달기와 술, 그리고 섹스에 과도하게 탐닉했다고 묘사한다.[1]
문왕의 아들인 무왕은 몇 년 후 주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1] 이 지연의 이유는 무왕이 상을 정복하라는 천상의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강태공의 조언에 따라 적절한 기회를 기다렸기 때문이다.[1]
3. 전투의 전개
은나라 군대는 수적으로 주나라 군대보다 훨씬 많았지만, 사기가 낮았고 훈련도 부족했다. 반면 주나라 군대는 강태공의 지휘 아래 잘 훈련되었고 사기도 높았다. 시경에는 당시 전투 상황이 "은나라 병사들은 숲처럼 모여들었고, 목야의 들판에 정렬했다.... 목야의 들판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고... 대사부 상부는 날개를 펼친 독수리 같았고, 무왕을 도왔으니, 한 번의 공격으로 위대한 상나라를 쳤네."라고 묘사되어 있다.[1][2][3]
전투에서 주나라 군대는 전차를 활용하여 상나라 군대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제신은 궁궐로 도망쳤고, 남은 상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결국 주나라가 승리했고, 상나라 군대는 궤멸되었다.
3. 1. 거병과 진군
몇 년 뒤, 발은 다시 군대를 일으켜 은나라를 공격했다. 이 무렵 주나라에서는 여러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다고 한다. 주나라 군대는 맹진(孟津)이라는 나루에서 황하를 건너려 했지만, 벼락을 동반한 비와 폭풍우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했다. 이에 발은 분노하여 황하의 신에게 "천명이 이미 내려졌는데, 어째서 나를 방해하느냐?"라고 외쳤고, 그러자 폭풍이 가라앉았다. 또한 강을 건너는 도중 배 위로 흰 물고기가 뛰어올랐는데, 흰색은 은나라의 상징이었다.[1][2][3]주나라 군대와 은나라 군대는 은나라의 수도인 조가 근처의 목야에서 전투를 벌였다. 《사기》 주본기(周本紀)에 따르면, 목야 전투에서 은나라는 70만 대군을 동원해 주나라 군대를 공격했고, 이에 맞서는 주나라 군대는 제후들의 군대를 합쳐 40만 정도였다고 한다. 결전 전에도 황하에서와 같은 뇌성폭우가 몰아치자, 발은 과거 탕왕이 하나라의 걸왕을 치고 은나라를 세운 명조 전투에서의 전례를 들어 이는 주나라가 승리할 전조라며 전군을 독려했다.[1][2][3]
은나라 군대는 숫자로는 주나라 군대보다 훨씬 많았지만, 전장에서 불길한 점괘를 얻었고, 은나라에 복속된 소국의 군사들과 노예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 또한 폭력적인 주왕의 지배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 도중에 창끝을 돌려 자신들의 아군을 공격하여 은나라 군대는 궤멸되었다.[1][2][3]
주나라는 4만 5천 명의 병력과 수백 대의 수레를 보유하여 처음에는 수적으로 열세였다. 상나라 군대의 대부분이 동쪽에서 전쟁 중이었지만, 상나라의 제신은 약 17만 명의 병력을 조직했다. 그러나 제신은 그의 병사들 중 다수가 노예였고, 낮은 군사 사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군대의 우세한 병력이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반군을 늦출 수 있다고 생각하여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생각은 틀렸는데, 상나라 군대의 대다수가 도망치거나 주나라에 합류했고, 남은 소수 병력은 주나라 군대에게 쉽게 압도당했다.[1][2][3]
주나라 군대는 훈련이 훨씬 잘 되어 있었고 사기가 높았다. 전차 돌격 중, 무왕은 상나라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제신은 궁궐로 도망쳐야 했고, 남은 상나라 군대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주나라는 승리했고 패배한 상나라에게 자비를 거의 베풀지 않아 "통나무를 띄울" 만큼 충분한 피를 흘렸다.[1][2][3]
3. 2. 목야에서의 격돌
몇 년 뒤, 발은 다시 군대를 일으켜 은나라를 공격했다. 이 무렵 주나라에서는 여러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다고 한다. 주나라 군대는 맹진(孟津)이라는 나루에서 황하를 건너려 했지만, 벼락을 동반한 비와 폭풍우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했다. 이에 발은 분노하여 황하의 신에게 "천명이 이미 내려졌는데, 어째서 나를 방해하느냐?"라고 외치자 폭풍이 가라앉았다고 한다. 또한 강을 건너는 도중에 배 위로 흰 물고기가 뛰어올랐는데, 흰색은 은나라의 상징이었다.[1]주나라 군대와 은나라 군대는 은나라의 수도인 조가 근처의 목야라는 곳에서 பெரும் 전투를 벌였다. 사마천의 《사기》 주본기(周本紀)에 따르면, 목야 전투에서 은나라는 70만 대군을 동원해 주나라 군대를 공격했고, 이에 맞서는 주나라 군대는 제후들의 군대를 합쳐 40만 정도였다고 한다. 결전 전에도 황하에서처럼 뇌성폭우가 몰아치자 발은 과거 탕왕이 하나라의 걸왕을 치고 은나라를 세운 명조 전투의 전례를 들어 이는 주나라가 승리할 징조라며 전군을 독려했다.[2]
은나라 군대는 숫자로는 주나라 군대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 수는 전장에서 불길한 점괘를 얻었고, 은나라에 신속된 소국의 군사들과 노예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 또한 폭력적인 주왕의 지배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 도중에 창끝을 돌려 자신들의 아군을 공격했고, 결국 은나라 군대는 궤멸되었다.[3]
4만 5천 명의 병력과 수백 대의 수레를 보유한 주나라는 처음에는 수적으로 열세였다. 비록 상나라 군대의 대부분이 동쪽에서 전쟁 중이었지만, 상나라의 제신은 약 17만 명의 병력을 조직했다. 그러나 제신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병사들 중 다수가 노예였고, 낮은 군사 사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대의 우세한 병력이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반군을 늦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틀렸다. 상나라 군대의 대다수는 도망치거나 주나라에 합류했고, 남은 소수 병력은 주나라 군대에게 쉽게 압도당했다. 전투 후 제신은 자살했다.[1][2][3]
시경의 시에는 당시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殷商之旅、其會如林、矢于牧野、……牧野洋洋、檀車煌煌、駟騵彭彭、維師尚父、時維鷹揚、涼彼武王、肆伐大商、會朝清明|은상의 병사들은, 숲처럼 모여들었고, 목야의 황야에 정렬했다. ... 목야의 황야는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고, 모래나무의 수레가 밝게 빛났고, 검은 갈기와 흰 배를 가진 말들이 질주했고, 대사부 상부는 날개를 펼친 독수리 같았고, 무왕을 도왔으니, 한 번의 공격으로 위대한 상나라를 쳤네.중국어
주나라 군대는 훈련이 훨씬 잘 되어 있었고 사기가 높았다. 전차 돌격 중, 무왕은 상나라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제신은 궁궐로 도망쳐야 했고, 남은 상나라 군대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주나라는 승리했고 패배한 상나라에게 자비를 거의 베풀지 않아 "통나무를 띄울" 만큼 충분한 피를 흘렸다고 한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목야 전투는 문헌에 따르면 대규모 전투였다고 하지만, 청동기 명문이나 갑골문(甲骨文)에는 「대읍(大邑) 상(商)을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어, 은나라의 읍을 주나라가 기습했던 것으로 생각된다.[2] 전투 후, 디 신은 녹대 궁전에서 자살했다.[2] 무왕은 달기를 발견한 후 처형했는데, 처형 명령은 강태공이 내렸다.[3] 상나라 관료들은 기소 없이 석방되었고, 일부는 나중에 주나라 관료로 일했다. 전투 직후 굶주린 백성을 먹이기 위해 황실 곡창이 즉시 개방되었다. 이 전투는 상나라의 멸망과 주나라의 시작을 알렸다.[3]
4. 1. 은나라 멸망과 주나라 건국
주나라 군대가 주왕을 쫓아 조가에 이르자, 주왕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고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무왕은 주왕의 시신을 찾아내어 세 대의 화살을 쏘고 월(鉞)로 목을 베었다.[1] 《상서》(尙書) 목계(牧誓)편에 따르면 이 날의 간지는 갑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출토된 청동기 명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4] 이로써 600년을 이어온 은 왕조는 멸망했고 무왕은 주 왕조를 세웠다.목야 전투는 문헌에 따르면 대규모 군대끼리의 전투였다고 하지만, 청동기 명문이나 갑골문(甲骨文)에는 「대읍(大邑) 상(商)을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어 전투는 은나라의 읍을 주나라가 기습했던 것으로 생각된다.[2] 전투 후, 디 신은 녹대(鹿臺) 궁전에서 자살했다.[2] 무왕은 달기(妲己)를 발견한 후 처형했는데, 처형 명령은 강태공(姜子牙)이 내렸다.[3] 상나라 관료들은 기소 없이 석방되었고, 일부는 나중에 주나라 관료로 일했다. 전투 직후 굶주린 백성을 먹이기 위해 황실 곡창이 즉시 개방되었다. 이 전투는 상나라의 멸망과 주나라의 시작을 알렸다.[3]
4. 2. 동아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
목야 전투는 상나라의 멸망과 주나라의 시작을 알렸다. 전투 후, 디 신은 녹대 궁전에서 자살했다.[1]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디 신은 자살하기 전에 귀한 옥으로 몸을 덮었다고 한다.[2] 무왕은 강태공에게 달기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나라 관료들은 기소 없이 석방되었고, 일부는 나중에 주나라 관료로 일했다. 전투 직후 굶주린 백성을 먹이기 위해 황실 곡창이 개방되었다.5. 전투의 연대
목야 전투가 벌어진 날짜와 달은 확실하지만, 연도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상주단대공정 이전의 연대기에서는 기원전 1130년부터 1018년까지 최소 44가지의 다른 날짜를 제시할 정도였다. 가장 널리 알려진 연도는 한나라의 천문학자 유흠이 계산한 기원전 1122년과, 서주(종점이 기원전 770년으로 알려짐)가 257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고문" ''죽서기년''의 진술에서 추론한 기원전 1027년이었다.
몇몇 문서들은 천문 관측을 이 사건과 관련짓고 있다.
- 사라진 ''상서''의 ''무성''(武成) 장에 나온 인용문은 무왕의 원정이 시작되기 직전에 발생한 월식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날짜와 무왕의 승리 날짜는 달과 육십갑자로 표시되어 있다.[1]
- ''국어''의 한 구절은 무왕이 상나라를 공격한 날의 해, 달, 목성 및 두 별의 위치를 제공한다.[1]
- "현문" ''죽서기년''은 주나라 정복 전후에 다섯 행성의 합(천문학)이 발생했다고 언급한다. 한나라 시대의 텍스트는 첫 번째 합이 마지막 왕의 통치 32년에 발생했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행성 합은 드물지만, 실제로 다섯 행성이 모두 기원전 1059년 5월 28일과 기원전 1019년 9월 26일에 다시 모였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의 하늘에서 기록된 위치는 실제 발생한 위치와 정반대였는데, 이는 처음 기록이 나타났을 당시에는 소급하여 계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
하상주단대공정에서는 고고학 조사를 통해 천문 데이터와 비교하여 날짜 범위를 좁히는 전략을 채택했다. 무왕의 원정에 대한 고고학적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섬서성 펑시에 있는 정복 이전 주나라의 수도가 발굴되었고, 현장의 지층은 왕조 이전의 주나라와 동일시되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과 지그재그 정합 기술을 사용하여 늦은 은허와 초기 주나라 수도에서 채취한 시료를 분석한 결과, 정복 연도는 기원전 1050년과 1020년 사이로 산출되었다. 모든 천문 데이터와 일치하는 해당 범위 내의 유일한 날짜는 기원전 1046년 1월 20일이었다. 이 날짜는 이전에 클래식에서 상기 구절과 동일한 천문 현상을 일치시킨 데이비드 팽케니어가 제안한 것이었지만, 하상주단대공정에서는 더 광범위한 증거를 철저히 고려하여 이 날짜를 채택했다.[1]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이 과정에 대해 여러 비판을 제기했다. 고고학 유적의 지층과 정복 사이의 연관성이 불확실하다는 점,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의 좁은 범위가 표준 요건인 95%보다 덜 엄격한 신뢰 구간(68%)으로 인용되어 훨씬 더 넓은 범위를 생성했을 것이라는 점, 관련 천문 현상을 설명하는 텍스트가 극도로 모호하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 예를 들어, 정복 연대 측정에 사용된 주요 텍스트인 이 ''귀''의 비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다른 해석은 기원전 1044년 1월 9일이라는 날짜로 이어진다.[1]
6. 역사적 평가 및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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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World History Encyclopedia: [21 volumes]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USA
2011-03-23
[2]
서적
China at War: 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USA
2012-01-10
[3]
서적
1001 Battles That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
https://books.google[...]
Book Sales
2017-10-24
[4]
문서
夏商周年表プロジェクトの結果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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