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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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자조선은 고대 한국사에서 논란이 많은 주제로, 중국 은나라의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건너와 세운 나라로 여겨졌으나, 실존 여부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사기에 따르면 기자는 은나라의 현인이었으며, 주나라 무왕에게 조선에 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동시대 사료의 부재로 기자조선의 실체는 불분명하다. 중국 측 기록에서는 기자동래설을 통해 기자가 조선의 군주가 되었다고 언급하며, 한국 측 기록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기자 숭배가 이루어졌고, 고려, 조선 시대에 걸쳐 기자조선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나타났다. 그러나, 기자조선의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하며, 고고학적 증거 부족과 문헌 기록의 모순 등을 근거로 전설로 치부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기자동래설이 부정되었으며, 광복 이후 한국 역사 교과서에서 점차 언급이 줄어들다가 현재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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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릉은 고조선 시대 기자(箕子)를 숭배하기 위해 세워진 능묘로,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숭배되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쇠퇴했고 북한에서 파괴되었으며, 기자와 기자 신앙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적 시각이 공존한다. - 상나라 - 목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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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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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국가명 | 기자조선 |
한자 국명 | 箕子朝鮮 |
로마자 표기 | Gija Joseon |
역사 | |
성립 시기 | 기원전 1120년 (추정) |
멸망 시기 | 기원전 194년 (추정) |
이전 국가 | 은나라 |
계승 국가 | 마한, 위만조선 |
정치 | |
정치 체제 | 왕국 |
국왕 | 기자 |
2. 역사 기록과 전승
근대 역사학 이전에는 고조선의 역사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세 시기로 구분하였다. 기자조선은 중국 상나라의 왕족인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시작되며, 관련 기록은 대체로 한나라(기원전 2세기) 이후의 문헌에서 상세해진다.
한나라 이전 문헌에는 기자가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은둔하였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이후의 삶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기자조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상서대전(尙書大全)》과 《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서대전》은 《상서》에 주석과 본문을 추가한 유교 경전으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 추가되어 있다. 《상서대전》에서는 기자가 주나라 지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였고,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한다.[18] 반면, 《사기》 〈송미자세가〉에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기자가 조선에 가서 나라를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다.[19] 이러한 차이는 이후 기자가 스스로 조선을 세웠는지, 아니면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세웠는지에 대한 논쟁의 원인이 되었다. 이후 《위략(魏略)》, 《한서》, 《삼국지》 등에서 기자동래설을 계속 기록하면서, 기자 이후의 고조선 역사에 대해서도 부왕과 준왕을 기자의 40여 세손으로 기록하였다.[20]
기자 동래설에 대한 기본 문헌들이 등장한 이후, 기자동래설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기자를 조선의 군주로 숭상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삼국시대 고구려가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고, 신라 최치원도 기자동래설을 긍정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굳어지면서, 한국 유교 문화의 시원적 존재로 기자 숭배가 강화되었다. 1102년 평양에 기자사당이 건립되어 국가 제사를 받았으며, 기자의 묘까지 만들어졌다. 조선 초기에는 단군과 기자가 나란히 국조로 숭상되었고, 《동국사략》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삼조선 체계가 정립되면서 기자조선이라는 왕조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성리학 발달과 함께 사림에 의해 기자 존숭 의식은 더욱 발전하였고, 이이의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같은 기자 관련 서적이 편찬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종휘의 《기자세가》, 정인기의 《기자지》 등에서 역대 왕의 명칭과 재위 연도 등 구체적인 내용이 등장하기도 한다.
기자는 상나라 왕족으로, 상나라가 주 무왕에 의해 멸망하자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상나라 멸망 후 기자가 주나라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자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18]과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해서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는 상반된 기록[19]이 모두 존재한다. 기자는 기묘년(기원전 1122년)에 5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조선으로 와서 백성들에게 문명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는 기자가 건너오자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겨 갔다고 나타난다. 기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8조 법금을 베풀어 나라를 다스렸고,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고 농사법과 양잠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기자 이후 기원전 323년 연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빚을 때까지 기자조선의 역사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 진개에게 서쪽 영토 2000여 리를 빼앗겼고,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기원전 214년 몽염이 만리장성을 쌓자 부는 진나라에 복속하였다고 한다. 부는 기자의 40여 세손이라고 전해지며,[20]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준이 즉위하였다. 준은 기원전 194년 위만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여 기자조선은 멸망하였다.
기자조선에 대한 관점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21] 고려 시대 《삼국유사》에는 주나라에서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계승 의식이 체계화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기자를 상나라와 주나라의 태사로서, 기자조선은 두 나라의 스승의 나라로 인식하였다. 단군과 함께 기자에게 매년 제사를 지냈고, 행적을 칭송하는 가묘를 세웠다. 《동국통감》, 《동국문헌비고》 등 거의 모든 사서에 기자조선이 기록되었다. 안정복은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국호 사용을 제시하였고, 《동국사략》, 《삼국사절요》에도 동일한 체계가 사용되었다. 17세기에는 기자조선-마한-신라의 계승만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단군-부여-고구려-백제의 북방계와 기자-마한-신라의 남방계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안정복은 한국 역사를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삼한으로 정리하였고, 대한제국 이후 계몽기 사서들은 단군-기자-마한-삼국-통일신라-고려의 계승을 수록하였다.
"조선"에 대해 기록한 사기 등의 중국 사료는 고조선(실제로 존재했다면)보다 훨씬 후대의 문헌이며, 기자조선의 실존이나 기자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확증할 만한 동시대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기 기록에서 한(漢)대까지 기자조선 전승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10] 일설에는 전한(前漢)대에 행해진 무제에 의한 조선 정복과 그 후의 한사군(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 설치를 계기로 이 전승이 형성되었다고도 한다.[9] 이러한 사료적 상황 때문에, 그 역사나 실상을 아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현대 중국 베이징과 요서 지방에서 "기(其)", "기후(㠱侯)"라는 명문이 있는 청동기가 발견된 것으로부터, 이것을 기자조선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설도 있지만,[11] 이것들이 그대로 기자조선의 영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판단할 수도 없다.[11]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에 걸쳐, 현대 베이징 주변을 거점으로 한 연이 세력을 확대했던 시대, 그 동쪽에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력이 존재했던 것은 확실하지만, 이 "조선"의 왕이 기자의 후예라는 사실도 인정되지 않는다.[13]
2. 1. 중국 측 기록
근대 역사학 이전에는 고조선의 역사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세 시기로 구분하였다. 기자조선은 중국 상나라의 왕족인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시작된다.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한나라(기원전 2세기) 이후의 문헌에서 상세해진다.기자조선이 나타나는 최초의 문헌은 《상서대전(尙書大全)》과 《사기》이다. 《상서대전》은 중국 최초의 역사서로 평가되는 《상서》에 주석과 본문을 추가한 유교 경전으로, 한나라 이전의 《상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 추가되어 있다. 《상서대전》에 따르면 기자는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였고, 주나라 무왕은 이를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한다.[18] 한편 《사기》 〈송미자세가〉에도 기자가 조선의 군주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상서대전》과 반대로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기자가 조선에 가서 나라를 일으켰다고 한다.[19] 이러한 두 문헌의 차이는 이후 기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조선을 세웠는지, 아니면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조선을 세웠는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위략(魏略)》, 《한서》, 《삼국지》 등에서 기자동래설을 계속 기록하는 한편, 기자 이후의 고조선 역사에 대해서도 기자와 연관시켜 부왕과 준왕은 기자의 40여 세손 기부(箕否), 기준(箕準)으로 기록되었다.[20]
기원전 진나라 이전의 중국 기록은 기자(箕子)를 상나라 마지막 왕인 폭군 주의 숙부(혹은 다른 기록에서는 형제)로 묘사하지만, 주왕과 고조선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없다. 기자는 상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폭군에게 갇혀 있었고, 주 무왕이 그를 풀어주었다.[1][2]
《사기》에 따르면, 시조 기자(서여)는 중국의 은 왕조 28대 문정의 아들이며, 태사가 되었고, 조카 제신(주왕)의 폭정을 간했던 현인이었다. 은나라가 멸망한 후, 주의 무왕은 기자를 숭상하여 신하로 삼지 않고 조선에 봉했다. 그 후 기자(箕子)는 은나라 유민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예의, 농사, 양잠, 베 짜는 기술을 널리 보급하고, 범금팔조를 실시하여 백성을 교화했으므로 이상적인 사회가 유지되었다고 한다.
《사기》를 중심으로 한 고대 문헌에 따르면, 전한 성립 직후인 기원전 2세기 초에 연나라 사람 만이 정쟁으로부터의 안전을 구하여 무리를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가 나라를 건설했다고 한다(위만조선). 전설에 따르면 위만은 조선왕 준에게 섬기며 신뢰를 얻었지만, 한나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거짓으로 속여 도리어 조선왕 준을 쳐서 쓰러뜨렸고, 패배한 준은 한의 땅으로 도망가 한왕을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13]
2. 2. 한국 측 기록
근대 역사학 이전에는 고조선의 역사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세 시기로 구분하였다. 기자조선은 중국 상나라의 왕족인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시작된다.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한나라(기원전 2세기) 이후의 문헌에서 상세해진다.삼국시대 고구려는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신라의 최치원도 기자동래설을 긍정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점차 굳어지면서 한국 유교 문화의 시원적 존재로 기자에 대한 숭배가 강화되었다. 그 결과 1102년 평양에 기자사당이 세워져 국가 제사를 받았으며, 기자의 묘까지 만들어졌다. 조선 초기에는 단군과 기자가 나란히 국조로 숭상되었으며, 《동국사략》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삼조선 체계가 정립되면서 기자조선이라는 왕조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성리학 발달과 함께 사림에 의해 기자 존숭 의식은 더욱 발전하였고, 이이의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같은 기자에 대한 전기적 서적이 편찬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종휘의 《기자세가》, 정인기의 《기자지》 등에서 역대 왕의 명칭과 재위 연도 등 구체적인 내용이 등장하기도 한다.
기자는 5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조선으로 와서 조선 백성들에게 문명을 가르쳤다고 한다. 한국 기록 《삼국유사》에는 기자가 건너오자 원래 조선의 군주였던 단군이 기자를 피해 장당경으로 옮겨갔다고 나타난다. 기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8조의 법금을 베풀어 나라를 다스렸다. 또한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고 농사짓는 법과 누에 치는 법을 가르쳐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 들어 기자에 대한 내용이 《삼국유사》에 소개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주나라에서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전한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계승 의식이 체계화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기자를 상나라와 주나라의 태사로서, 기자조선은 두 나라의 스승의 나라로 인식하였다. 단군과 더불어 기자에 매년 제를 지냈으며, 행적을 칭송하는 가묘를 세우기도 했다. 세조 때 편찬된 《동국통감》, 영조 때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등 거의 모든 사서에는 기자조선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여러 학자들은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을 모아 책으로 저술하였고, 만주 중심의 사관을 가졌던 안정복은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국호 사용을 제시하였다. 이후 출간된 《동국사략》, 《삼국사절요》에도 동일한 체계를 사용하였다. 16세기 이후 등장한 사림파의 영향으로 17세기에는 중국의 하·은·주 3대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이와 연관된 기자조선-마한-신라의 계승만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단군-부여-고구려-백제의 북방계와 기자-마한-신라의 남방계, 두 주류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조선 후기 안정복은 한국 역사를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삼한으로 정리하여, 조선 초기 체계를 따랐다. 대한제국 이후 계몽기 사서들은 단군-기자-마한-삼국-통일신라-고려의 계승을 수록하였다.
기자조선에 대한 현존하는 한국 측 자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에서 제작된 가장 오래된 자료는 고려 시대의 자료이다. 기자조선에 대한 가장 초기의 한국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 후에 단군이 도읍을 아사달로 옮겨 태백산에 자리잡고 1500년 동안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전통적 추정 기원전 1122년),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는데, 그의 나이는 1908세였다.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을 대체하여 한반도에 위치했다고 널리 믿어졌다. 하지만 일부 한국 학자들은 ''한서'' 지리지의 기록과 기자조선이 기자의 이주 후에도 단군조선과 공존했음을 시사하는 한국의 ''삼국유사''를 근거로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의 서쪽에 정착했다고 믿었다. 이 학자들은 기자의 영향력이 단군조선의 서부 지역에 국한되었다고 여겼다.
''청주 한씨 세보''는 기자조선의 73명의 왕의 이름과 재위 기간을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 한국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위만조선은 준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기자로부터 이어진 왕조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3. 기자조선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쟁
근대 역사학 이전에는 고조선의 역사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세 시기로 구분했다. 기자조선은 중국 상나라의 왕족인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시작된다.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한나라(기원전 2세기) 이후의 문헌에서 상세해진다. 한나라 이전의 문헌에는 기자가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은둔하였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으며, 그 이후 기자의 삶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18][19]
기자조선에 대한 최초의 문헌은 《상서대전(尙書大全)》과 《사기》이다. 《상서대전》에 따르면 기자는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였고, 주나라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한다. 《사기》 〈송미자세가〉에도 기자가 조선의 군주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상서대전》과 반대로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기자가 조선에 가서 나라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러한 두 문헌의 차이는 이후 기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조선을 세웠는지, 아니면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조선을 세웠는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기자동래설 관련 기본 문헌들이 등장하면서 기자동래설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기자를 조선의 군주로 숭상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삼국시대 고구려가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신라 최치원도 기자동래설을 긍정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굳어지면서 한국 유교 문화의 시원적 존재로 기자에 대한 숭배가 강화되었다. 1102년 평양에 기자사당이 세워져 국가 제사를 받았으며 기자의 묘까지 만들어졌다. 조선 초기에는 단군과 기자가 나란히 국조로 숭상되었으며, 《동국사략》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삼조선 체계가 정립되면서 기자조선이라는 왕조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성리학 발달과 함께 사림에 의해 기자 존숭 의식은 더욱 발전하였고, 이이의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같은 기자 관련 전기 서적이 편찬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종휘의 《기자세가》, 정인기의 《기자지》 등에서 역대 왕의 명칭과 재위 연도 등 구체적인 내용이 등장하기도 한다.
기자는 상나라 왕족으로 상나라가 주 무왕에 의해 멸망하자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상나라 멸망 후 기자가 주나라에 복종하지 않고 조선으로 망명하자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과, 반대로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해서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는 상반된 기록이 함께 존재한다.
기자는 기묘년(기원전 1122년)에 5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조선으로 와서 백성들에게 문명을 가르쳤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기자가 오자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겨 갔다고 나타난다. 기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8조의 법금을 베풀어 나라를 다스렸다. 또한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고 농사법과 양잠법을 가르쳐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기자 이후 기원전 323년 연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빚을 때까지 기자조선의 역사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 진개(秦開)에게 서쪽 영토 2000여 리를 빼앗겨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하며,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기원전 214년 몽염(蒙恬)이 만리장성을 쌓자 당시 기자조선의 왕 부(否)는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복속하였다고 한다. 부는 기자의 40여 세손이라고 전해진다.[20] 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준은 기원전 194년 한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였고, 이로써 기자조선은 멸망하였다.
기자조선에 대한 관점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21] 조선 시대에는 주로 사서 내용 불일치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주의 무왕을 피해 조선에 자리 잡은 기자는 주나라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장유, 홍직필 등)[22]
기자동래설은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에 의해 부정되기 시작했으며, 삼국시대 이전 역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추측되기도 한다.[22]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1964년 교과서에서 기자조선이 삭제되었다.[23] 1974년 교과서 개편을 앞두고 고조선 논쟁에서 기자조선 실재성이 논의되었고,[24] 교과서에 기자조선이 각주로 언급되었다.[25] 1990년부터 발행되는 역사 교과서에서도 각주로 언급되었으나,[26] 2010년 현재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에서는 기자조선이 언급되지 않는다.[27]
현재 기자조선의 존재는 학계에서 대체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북한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날조된 역사로 여겨 인정하지 않는다.[28]
3. 1. 긍정론
고려 시대에는 《삼국유사》에 기자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주나라에서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전한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계승 의식이 체계화되었다.조선 시대에는 기자를 상나라와 주나라의 태사로, 기자조선은 두 나라의 스승의 나라로 인식하였다. 단군과 더불어 기자에게 매년 제를 지냈으며, 행적을 칭송하는 가묘를 세우기도 했다. 세조 때 편찬된 《동국통감》, 영조 때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등 거의 모든 사서에 기자조선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여러 학자들은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을 모아 책으로 저술하였고, 만주 중심의 사관을 가졌던 안정복은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기도 하였다.[21]
조선 초기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국호 사용을 제시하였다. 이후 출간된 《동국사략》, 《삼국사절요》에도 동일한 체계를 사용하였다. 16세기 이후 사림파의 영향으로 17세기에는 중국 하·은·주 3대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이와 연관된 기자조선-마한-신라의 계승만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단군-부여-고구려-백제의 북방계와 기자-마한-신라의 남방계, 두 주류 모두를 인정하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조선 후기 안정복은 한국의 역사를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삼한으로 정리하여 조선 초기의 체계를 따랐다. 대한제국 이후 계몽기 사서들은 단군-기자-마한-삼국-통일신라-고려의 계승을 수록하였다.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와 성리학자들은 기자가 동래하여 조선을 세운 것을 근거로 중국을 부모국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는 후에 기자조선에 대한 악평이 내려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현재 제시되어 있는 기자조선에 대한 여러 관점들은 다음과 같다.
몇몇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와 성리학자들은 기자가 동래하여 조선을 건국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기자가 오기 이전에도 토착계 조선은 존재했었다. 문헌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으나, 기자가 이끄는 상나라 유민들이 조선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 실제에 바탕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기자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는지 여부, 한반도와 만주에 위치하였는지 여부, 그 세력의 크기에는 각기 다른 주장이 있다.
발해만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기후방정에 나타난 기후(㠱侯)를 한자가 다른 기자(箕子)로 해석하였다. 이에 대하여 명문의 해석을 잘못한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29]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기원전 323년 경에 불조선(番韓)의 임금이 기자의 후손이 된 후에 자칭 왕이라 칭한 번조선을 기자조선이라 불렀다고 주장하였다.[30] 기원전 진나라 이전의 중국 기록은 기자(箕子)를 상나라 마지막 왕인 폭군 주왕의 숙부(혹은 다른 기록에서는 형제)로 묘사하지만, 주왕과 고조선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없다. 기자는 상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폭군에게 갇혀 있었고, 주 무왕이 그를 풀어주었다.[1][2]
진나라 이후, 한나라와 고조선이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 쓰여진 기록은, 기자가 현재의 베이징 동쪽으로 5,000명을 이끌었다고 덧붙였으며, 이는 ''한서''의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기자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언급된다.
''무왕은 기자에게 조선을 봉했는데, 그는 (주나라의) 신하가 아니었다.''
기자조선에 대한 현존하는 한국 측 자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에서 제작된 가장 오래된 자료는 고려 시대의 자료이다. 기자조선에 대한 가장 초기의 한국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 후에 단군이 도읍을 아사달로 옮겨 태백산에 자리잡고 1500년 동안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전통적 추정 기원전 1122년),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는데, 그의 나이는 1908세였다.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을 대체하여 한반도에 위치했다고 널리 믿어졌다. 하지만 일부 한국 학자들은 ''한서'' 지리지의 기록과 기자조선이 기자의 이주 후에도 단군조선과 공존했음을 시사하는 한국의 ''삼국유사''를 근거로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의 서쪽에 정착했다고 믿었다. 이 학자들은 기자의 영향력이 단군조선의 서부 지역에 국한되었다고 여겼다.
''청주 한씨 세보''는 기자조선의 73명의 왕의 이름과 재위 기간을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 한국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위만조선은 준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기자로부터 이어진 왕조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신채호는 기자조선(기원전 323년-기원전 194년)이 위략의 기록에 나타난 바와 같이, 기씨 조선의 후손인 기자(箕子)가 연나라의 침략을 받은 후 고조선 삼한 중 하나인 번조선의 추정 기간을 지칭한다고 말했다. 중국 전통 기록에 따르면 기자의 조상인 기후는 기자(箕子)와 동일 인물이었다고 한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번조선은 기원전 323년경 왕이 연나라의 반란군에게 살해된 후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번조선의 다섯 대신들이 왕위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기씨 조선의 제후가 이 다툼에 참여하여 새로운 번조선의 왕으로 등극, 왕위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그는 자신의 조상인 기자를 기려 기자조선을 건국했다. 기자조선 동안 왕은 강력한 주권을 누렸다. 결국, 기원전 94년에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나고 위만이 그 자리에 위만조선을 세우면서 기자조선은 멸망했다.
사기에 따르면, 시조 기자(서여)는 중국의 은 왕조 28대 문정의 아들이며, 태사가 되었고, 조카 제신(주왕)의 폭정을 간했던 현인이었다. 은나라가 멸망한 후, 주의 무왕은 기자를 숭상하여 신하로 삼지 않고 조선에 봉했다. 조선후 기자(箕子)는 은나라 유민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예의, 농사, 양잠, 베 짜는 기술을 널리 보급하고, 또한 범금팔조를 실시하여 백성을 교화했으므로 이상적인 사회가 유지되었다고 한다.
"조선"에 대해 기록한 사기 등의 중국 사료는 고조선(실제로 존재했다면)보다 훨씬 후대의 문헌이며, 기자조선의 실존이나 기자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확증할 만한 동시대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기의 기록에서 한(漢)대까지 기자조선의 전승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10], 일설에서는 전한(前漢)대에 행해진 무제에 의한 조선의 정복과 그 후의 한사군(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 설치를 계기로 이 전승이 형성되었다고도 한다[9]。 이러한 사료적 상황 때문에, 그 역사나 실상을 아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현대의 중국 베이징과 요서 지방에서 "기(其)", "기후(㠱侯)"라는 명문이 있는 청동기가 발견된 것으로부터, 이것을 기자조선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설도 있다[11]。 이러한 청동기는 서주 초라는 기자조선에 대응하는 시대의 것이기 때문에, 어떤 관련성이 존재할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것들이 그대로 기자조선의 영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판단할 수도 없다[11]。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에 걸쳐, 현대의 베이징 주변을 거점으로 한 연이 세력을 확대했던 시대, 그 동쪽에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력이 존재했던 것은 확실하지만, 이 "조선"의 왕이 기자의 후예라는 사실도 인정되지 않는다[13]。
사기를 중심으로 한 고대 문헌에 따르면, 전한 성립 직후인 기원전 2세기 초에 연나라 사람 만이 정쟁으로부터의 안전을 구하여 무리를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가 나라를 건설했다고 한다(위만조선). 전설에 따르면 위만은 조선왕 준에게 섬기며 신뢰를 얻었지만, 한나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거짓으로 속여 도리어 조선왕 준을 쳐서 쓰러뜨렸고, 패배한 준은 한의 땅으로 도망가 한왕을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13]。 만약 조선왕 준이 기자의 후예라고 한다면, 이것이 기자조선의 멸망이 되지만, 그것도 자세하지 않다. 조선왕 준이 한왕이 되었다는 설화는 사기보다 후세에 만들어진 위략에만 나타나며, 현대에는 한씨가 자신들의 출자(出自)를 조선왕과 관련시키기 위해 창작한 신화라고 여겨진다[14]。
이처럼 기자조선은 그 건국에서 멸망에 이르기까지 전설에 싸여 있으며,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후세에 기자조선의 전설은 한반도에 흥기한 여러 나라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자의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1392년에 고려를 대신하여 조선 왕조 (이씨 조선)가 건설되었을 때, 국호를 정함에 있어 신왕조는 "조선"과 "화령"이라는 두 개의 국호안을 명에 제시하여 재가를 구했다[15]。 이는 처음부터 "조선"이 선택되는 것을 전제로 한 제안이었지만, 명 측으로서는 홍무제를 기자를 조선왕으로 봉한 위대한 주의 무왕에 비유하는 것이었고[16], 조선 측으로서는 동쪽의 오랑캐 가운데서 처음으로 "천명"을 받은 단군과 "교화"를 일으킨 기자의 나라인 "조선"이라는 국호를 채택함으로써, 고조선이라는 고(古)의 권위를 계승하는 것이었다[17]。 이는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임을 지배의 정당성으로 삼았던 것(더욱이 고구려를 거쳐 낙랑군, 고조선에 그 권위의 근원을 설정하고 있었다)으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의 채택에 의해 고려보다 더 직접적으로 고조선의 권위와 결부되려는 의도였다[16]。
3. 2. 부정론
기자조선에 대한 부정론은 주로 다음과 같은 근거를 바탕으로 제기된다.- 문헌학적 근거:
- 초기 기록 부재: 논어, 상서, 죽서기년 등 한나라 이전의 문헌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내용이 없다. 기자동래설은 한나라 이후의 기록에서부터 등장한다.[33]
- 기록의 모순: 기자가 주 무왕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한 기록과 기자조선의 기록은 서로 모순된다. 기자가 조선에 있었다면 홍범구주의 전래가 불가능하다.[33]
- 중국 중심적 역사관: 중국 사학자들이 주변 이민족의 시조를 모두 중국의 고대 성현으로 기록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28]
- 고고학적 근거:
- 유물 불일치: 황하 유역과 요동 지역의 신석기·청동기 문화는 큰 차이를 보인다. 기자가 상나라 왕족이었다면 상나라와 관련된 유물이 나타나야 하지만, 실제 발굴 결과는 그렇지 않다.[32]
- 유적 조작: 1102년(숙종 7년) 고려에서 발견된 기자묘와 사당, 정전(井田) 등 관련 유적은 모두 고려·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31][28] 익산의 무강왕릉 역시 백제 무덤 양식으로 확인되었다.
- 기후(㠱侯) 명문: 발해만에서 발견된 '기후(㠱侯)'명 청동기는 '기자(箕子)'와 한자가 다르며, 명문 해석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29] 또한, 이 청동기는 요서가 아닌 산둥성 등지에서 출토되어 교역 등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지정학적 근거:
- 이동의 어려움: 상나라 멸망 당시 중국 세력은 황하 유역에 불과했고, 기자가 조선까지 가려면 먼 거리와 다른 이민족 영역을 거쳐야 했다.
- 토착 세력 존재: 당시 조선에는 단군조선으로 알려진 토착 세력이 존재했으므로, 망명자에 불과한 기자가 왕이 되기 어려웠다.[31]
이러한 부정론은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으며,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였다는 주장도 있다.[22]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1964년 교과서에서 기자조선이 삭제되었고,[23] 현재 역사 교과서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27] 북한 학계 역시 기자조선을 날조된 역사로 간주한다.[28]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와 성리학자들은 기자가 동래하여 조선을 세운 것을 근거로 중국을 부모국이라 부르기도 했다. 뒤에 기자조선에 대한 악평이 내려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근에는 발굴된 유적을 근거로 상나라 후예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발해 근방에 정착했고, 고조선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4.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의 관점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기자동래설을 부정하며, 이는 한국 역사를 축소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학계는 기자조선을 교과서에서 삭제하거나 각주로 처리하는 등 신중한 태도를 보였고, 북한 학계는 날조된 역사로 간주한다. 이처럼 기자조선에 대한 관점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다.
4. 1.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시라토리 구라키치, 이마니시 류 등)은 기자동래설은 후대에 꾸며낸 허구이며, 실제로 존재했더라도 중국인이 세운 나라이므로 조선과는 관계없다고 주장했다.[22] 이는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추측되기도 한다.4. 2. 광복 이후
광복 이후 기자조선에 대한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64년 교과서에서 기자조선을 삭제하기로 결정하였다.[23] 1974년에는 교과서 개편을 앞두고 고조선에 대한 논쟁에서 기자조선의 실재성이 논의되었고,[24] 교과서에 기자조선이 각주로 언급되었다.[25] 1990년부터 발행되는 역사교과서에서도 각주로 언급되었으나,[26] 2010년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에서는 기자조선이 언급되지 않는다.[27]현재 기자조선의 존재는 학계에서 대체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발굴된 유적을 근거로 상나라의 후예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발해 근방에 정착했고, 고조선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날조된 역사로 여겨 인정하지 않는다.[28]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와 성리학자들은 기자가 동래하여 조선을 세운 것을 근거로 중국을 부모국이라 부르기도 했다. 뒤에 기자조선에 대한 악평이 내려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기자조선에 대한 현존하는 한국 측 자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에서 제작된 가장 오래된 자료는 고려 시대의 자료이다. 기자조선에 대한 가장 초기의 한국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부 한국 학자들은 ''한서'' 지리지의 기록과 기자조선이 기자의 이주 후에도 단군조선과 공존했음을 시사하는 한국의 ''삼국유사''를 근거로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의 서쪽에 정착했다고 믿었다. 이 학자들은 기자의 영향력이 단군조선의 서부 지역에 국한되었다고 여겼다.
''청주 한씨 세보''는 기자조선의 73명의 왕의 이름과 재위 기간을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 한국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5. 현대적 의의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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