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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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목포부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존재했던 행정 구역으로, 여러 차례 행정 구역 개편을 거쳐 목포시로 변경되었다. 1896년 무안군에서 시작하여 1906년 무안부로 승격되었고, 1910년 목포부로 개칭되었다. 1914년에는 도시 지역만 목포부로 남고 주변 지역은 무안군으로 편입되었다. 1947년에는 일본식 동명이 한국식으로 변경되었으며, 1949년 목포시는 목포부에서 개칭되었다. 1897년 개항 이후 해상 교통과 호남선 철도 개통으로 급격히 발전했으며, 일제의 수탈 기지 역할을 했다. 1926년에는 인구가 3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고, 1932년에는 무안군 일부를 편입하여 6대 도시로 성장했다. 목포항은 김, 면화, 쌀, 소금의 집산지였으며, 특히 목면 수출항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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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부 | |
---|---|
개요 | |
위치 | 대한민국 전라남도 |
행정 | |
종류 | 부 |
설치 | 1897년 10월 12일 |
폐지 | 1949년 8월 14일 |
승격 | 목포시 |
역사 | |
1897년 | 목포항 개항 및 목포부 설치 (10월 12일) |
1914년 | 부내면과 목포면 통합, 목포면을 목포부로 개칭 (4월 1일) |
1939년 | 무안군 이로면 편입 (10월 1일) |
1949년 | 목포부를 목포시로 개칭 (8월 15일) |
인문 환경 | |
특징 | 전라남도 서남부 지역의 중심 도시 |
2. 행정구역 변천
1896년 나주부 무안군이 무안군으로, 1906년 무안군이 '''무안부'''로 승격되었으며, 1910년 무안부가 '''목포부'''로 개칭되었다.[1][2][3] 1914년에는 도시 지역인 부내면만 목포부로 남고, 나머지 지역은 무안군 등으로 개편되었다.[4] 1947년에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일본식 정(町)명이 한국식 동명으로 변경되었다.[4] 1949년 목포부는 '''목포시'''로 개칭되었다.[5]
2. 1. 조선시대 ~ 일제강점기
1896년 8월 4일 조선시대 23부제 중 하나인 나주부 무안군이 13도의 무안군으로 개편되었다.[1] 1906년 10월 1일 무안군이 '''무안부'''로 승격되었다.[2] 1910년 10월 1일 무안부가 '''목포부'''로 개칭되었다.[3] 1914년 4월 1일 도시 지역인 부내면만 '''목포부'''로 남고, 부내면을 제외한 목포부의 나머지 면과 지도군 전역, 완도군 팔금면, 진도군 도초면이 무안군으로 개편되었다.[4]구 행정구역 | 신 행정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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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부 현화면(玄化面), 다경면(多慶面) | 무안군 현경면 일원 |
목포부 진하산면(珍下山面) | 무안군 해제면 일부 |
목포부 이서면(二西面), 일서면(一西面) | 무안군 청계면 일원 |
목포부 엄다면, 신로면(新老面) | 함평군 엄다면 일원 |
목포부 금동면(金洞面), 진례면(進禮面), 좌촌면(佐村面) | 함평군 학교면 일원 |
2. 2. 해방 이후
1947년 4월 1일 일본식 정(町)명이 한국식 동명으로 개정되었다. (죽동, 온금동, 양동, 대성동, 남교동, 북교동은 동명 유지)[4]구 행정구역 (법정동) | 신 행정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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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부 금정(錦町)1·2정목, 영정(榮町)1·2정목, 서정(曙町)1~3정목, 축정(祝町)1~3정목, 상반정(常盤町)1·2정목, 수정(壽町)1·2정목, 보정(寶町)1~3정목, 행정(幸町)1·2정목, 본정(本町)1~3정목, 중정(仲町)1·2정목, 경정(京町)1·2정목, 대화정(大和町)1~3정목, 해안통1~4정목 | 목포부 금동1·2가, 영해동1·2가, 광동1~3가, 축복동1~3가, 상락동1·2가, 수강동1·2가, 보광동1~3가, 행복동1·2가, 중앙동1~3가, 중동1·2가, 경동1·2가, 대의동1~3가, 해안동1~4가 |
목포부 앵정(櫻町), 욱정(旭町), 명치정(明治町), 대정정(大正町), 송도정(松島町), 산수정(山手町), 하정(霞町), 항정(港町), 복산정(福山町), 호남정, 창평정, 유정 | 목포부 금화동, 서산동, 대안동, 명륜동, 동명동, 유달동, 측후동, 항동, 복만동, 호남동, 창평동, 유동 |
[4]
1949년 8월 15일 목포부가 '''목포시'''로 개칭되었다.[5]
3. 도시의 발전
1897년 10월 1일 목포가 개항하면서 완도를 잇는 뱃길과 목포-제주 간 정기 항해 기선이 생겨나는 등 해상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921년에는 순항선조합 선박을 비롯해 인천, 부산, 여수를 오가는 배들이 목포를 중간 기착지로 삼았다.[2]
1914년 호남선 철도 개통으로 대전-목포 간 철로가 개설되면서 목포는 육상 교통의 요지로도 떠올랐다. 일제는 목포항을 곡물 수탈 기지로 삼고 1920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을 설치했는데, 이 건물은 현재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철도, 조선, 수산가공업 발전과 함께 각지에서 몰려든 조선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일본인 거주 지역 근처 공동묘지에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이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2] 목포극장을 비롯한 각종 시설이 들어섰고, 1926년에는 인구가 33,244명으로 급증하여 그중 일본인이 1/4가량을 차지했다.[3][4]
1932년 무안군 일부 지역 편입으로 목포의 면적이 늘어나고 인구 6만의 6대 도시로 성장했다. 당시 목포항은 '''一黑'''(김), '''三白'''(면화, 쌀, 소금)의 집산지로 유명했다. 일본인들은 전라도 북부에 쌀을 생산하는 군산이 있다면, 전라도 남부에는 면화를 생산하는 목포가 있다고 할 정도로 목포는 조선 제일의 목면 수출항이었으며, 목면은 주로 일본 한신 지역으로 수출되었다.[5]
3. 1. 개항과 해상 교통의 발전
1897년 10월 1일 목포가 개항한 이후 완도를 통해 이어지던 뱃길에 항상 목포가 포함되었고, 목포-제주 사이를 정기적으로 항해하는 기선이 생겨났다. 1921년 설립된 순항선조합의 선박을 비롯해 인천, 부산, 여수를 오가던 배들은 목포를 중간 기착지로 삼아 항해를 이어나갔다.[2]
3. 2. 일제강점기 수탈과 성장
1914년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대전-목포 간 철로가 개설되었다. 일제는 목포항의 기능을 곡물 수탈로 설정하고 1920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을 설치했는데, 이 건물은 지금까지 남아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철도, 조선, 수산가공업이 본격화되면서 조선인들은 각지에서 몰려들어 일거리를 찾았다. 일본인 거주지역에 가깝게 자리를 잡기 위해 작은 움막 등을 지어 좁은 골목을 이루며 지냈다고 한다. 그 자리는 옛 공동묘지로서 조선총독부가 허가하면서 겨우 거주가 허락된 곳이었다.[2] 각종 시설이 들어서는 한편 목포극장이 생겨났다. 당시 서울을 비롯해 대도시에서 내국인이 소유하고 있던 극장은 서울의 단성사와 광주의 광주극장, 목포극장 세 곳뿐이었다.[3] 1926년에는 인구가 33,244명으로 급증하여 대도시로 성장했는데, 그중 일본인이 1/4가량 되었다.[4]
3. 3. 무안군 편입과 6대 도시 성장
1932년 무안군 일부 지역 편입으로 목포의 면적이 늘어났으며, 인구는 6만 명을 넘어 6대 도시로 성장했다. 당시 목포항은 '''一黑'''(김), '''三白'''(면화, 쌀, 소금)의 집산지로 널리 알려졌다.[5] 일본인들은 전라도 북부에는 쌀을 생산하는 군산이 있다면, 전라도 남부에는 면화를 생산하는 목포가 있다고 하였다. 1930년대 초 목포에는 목면공장이 20여 곳이나 있어 조선 제일의 목면 수출항이었다. 목면은 주로 일본 한신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참조
[1]
간행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1913-12-29
[2]
논문
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
[3]
서적
한양이야기
가람기획
[4]
서적
목포부사(木浦府史)
[5]
웹사이트
목포역사문화관광 홈페이지 중 연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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