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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히하우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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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뮌히하우젠》은 1943년에 개봉한 독일 영화로, 뮌히하우젠 남작의 모험을 다룬다. 남작은 러시아 궁정에서 음모에 휘말리고, 알레산드로 칼리오스트로에게 영원한 젊음을 얻어 러시아-터키 전쟁에 참전하며, 달나라 여행을 떠나는 등 기상천외한 모험을 겪는다. 영화는 나치 정권 시대의 검열과 통제 속에서 제작되었으며, 반유대주의적 요소가 포함되어 비판을 받기도 했다. 현대에는 젠더 역할, 성적 표현, 환상적인 주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며, 시각적 연출과 촬영 기법으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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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히하우젠 (영화) - [영화]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뮌히하우젠 영화 로고
영화 로고
원작루돌프 에리히 라스페의 뮌히하우젠 남작의 놀라운 여행과 러시아에서의 캠페인 이야기
감독요제프 폰 바키
제작자에버하르트 슈미트
각본에리히 케스트너
음악게오르크 헨체
촬영콘스탄틴 이르멘-체트
베르너 크린
편집
배급사우니베르숨 필름 AG
개봉일1943년 3월 3일
상영 시간132분 (초연)
105분
119분 (신판)
제작 국가독일
언어독일어
제작비650만 ℛℳ (2009년 €}} 상당)
흥행 수입800만 ℛℳ (2009년 €}} 상당)
출연
주연한스 알베르스
조연빌헬름 벤도우 (달 세계의 남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하르텐펠트 남작)
(조피 폰 리데젤, 하르텐펠트의 약혼자)
(포템킨 공작)
(뮌히하우젠 남작 부인)
(예카테리나 2세)
(그리고리 오를로프)
(준족의 남자)
페르디난트 마리안 (칼리오스트로 백작)
(안톤 울리히 공)
( 백작)
(프란체스코 데스테 공)
(요한)
(달 세계의 여자)
레오 슬레자크 (술탄 압둘 하미드)
(크리스티안 쿠헨로이터)
힐데 폰 슈톨츠 (루이즈 라 투르)
(카사노바)
(리뉴 공)
(공녀 이사벨라 데스테)
(뮌히하우젠의 아버지)
(그라운 악장)
(유수프 파샤)
(수석 사냥꾼 뢰제마이어)
(프랑수아 블랑샤르)
(환관 셀림)
(막을 내리는 사람 메트페셀)
(베네치아 총독)
(기절하는 관객)
(술탄의 대신)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의 집사)
(임무관)
( 경)
(스트로가노프)
기타 정보
일본 개봉일1952년 2월 9일 (프랑스어 더빙판 상영)

2. 줄거리

이 영화는 '허풍선이 남작'으로 알려진 히에로니무스 폰 뮌히하우젠의 삶을 다룬 이야기로, 부분적으로 고트프리트 아우구스트 뷔르거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다.[8]

영화는 현대(1940년대)의 가장 무도회에서 시작한다. 주인공 뮌히하우젠 남작은 다음 날 찾아온 손님들에게 자신이 바로 그 유명한 '허풍선이 남작'이라며 18세기에 겪었던 자신의 모험담을 들려준다. 이때 남작은 젊은 모습이지만, 그의 아내는 노부인의 모습이다.

남작의 이야기는 러시아 궁정에서의 모험, 마법사 알레산드로 칼리오스트로에게 영원한 젊음을 얻게 된 사연으로 이어진다. 이후 대 터키 전쟁에 참전하여 포탄을 타고 날아가 포로가 되지만, 기지를 발휘해 터키 술탄으로부터 아름다운 공녀를 구출하여 베네치아로 탈출한다.

베네치아에서 쫓기게 된 남작은 하인과 함께 열기구를 타고 달나라로 향한다. 그곳에서 기이한 경험을 하고 시간의 흐름 차이로 인해 하인을 잃고 홀로 지구로 돌아온다.

이야기를 마친 남작은 손님들에게 자신이 정말 이야기 속의 그 인물임을 밝힌다. 손님들이 떠난 후, 영원한 젊음에 지친 남작은 스스로 젊음을 포기하고 아내와 함께 평범하게 늙어가는 길을 선택한다.

2. 1. 도입부

이 영화는 '허풍선이 남작'으로 알려진 뮌히하우젠 남작의 일화를 다루며, 부분적으로 고트프리트 아우구스트 뷔르거의 작품에 기반한다.[8]

영화는 18세기 무도회 장면으로 시작한다. 뮌히하우젠 남작은 다른 남자와 약혼한 젊은 여성에게 구애를 받지만 정중히 거절하며, 그녀가 떠날 때 불을 켜달라고 부탁한다. 카메라는 그의 손을 따라 현대식 전등 스위치를 비추고, 젊은 여성은 자동차를 타고 떠난다. 이를 통해 과거처럼 보였던 장면이 사실 현대(영화 개봉 당시인 1940년대)의 가장 무도회였음이 드러난다.

다음 날, 남작은 현대적인 복장으로 젊은 여성과 그녀의 약혼자를 티타임에 초대한다. 손님들은 그를 유명한 뮌히하우젠 남작의 후손 정도로 생각하지만, 그는 자신이 바로 그 '허풍선이 남작'이라며 자신의 "진실된 역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때 함께 자리한 남작 부인은 노부인의 모습으로, 젊어 보이는 남작과 대조를 이룬다. 남작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영화의 배경은 18세기로 옮겨간다.

2. 2. 뮌히하우젠 남작의 모험

히에로니무스 폰 뮌히하우젠 남작은 고향 보덴베르더에서 하인 크리스티안 쿠헨로이터와 함께 러시아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한다. 그는 예카테리나 2세의 궁정에 합류하여 그녀의 부관으로 임명된다. 여제는 남작과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위해 자신의 방 아래에 남작의 방을 배치하고 비밀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것을 제안하며, 남작은 둘 중 한 명이 자유를 원할 때까지 머물기로 동의한다. 궁정에서 남작은 여제의 총애를 받는 포툠킨 공작과 충돌하게 된다. 두 사람은 어두운 방에서 서로 "뻐꾸기"를 외치면 상대방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총을 쏘는 '뻐꾸기 결투'를 벌이고, 남작은 이 결투에서 부상을 입는다.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남작은 마침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 있던 마법사 알레산드로 칼리오스트로를 찾아간다. 남작은 칼리오스트로에게 그의 체포가 임박했음을 경고해주고, 칼리오스트로는 감사의 표시로 남작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남작은 권력이나 돈이 아닌, 영원한 젊음을 원한다고 답하고 칼리오스트로는 그의 소원을 들어준다.

이후 남작은 여제에 의해 연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 터키 전쟁에 참전하여 오차코프 포위전에 나선다. 그는 그곳에서 놀라운 속도로 달리는 '데어 로이퍼'를 새로운 하인으로 맞이한다. 전투 중 포툠킨 공작이 남작이 앉아 있던 대포에 불을 붙이자, 남작은 발사된 대포알을 타고 터키 진영으로 날아간다. 그는 터키 궁전에 도착하지만 포로로 잡혀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가 술탄의 노예가 된다.

두 달간의 노예 생활 끝에 남작은 하인 크리스티안 쿠헨로이터와 데어 로이퍼와 재회한다. 그는 술탄과 자신의 자유, 그리고 함께 노예로 잡혀 있던 에스테 가문의 아름다운 공녀 이자벨의 자유를 걸고 내기를 한다. 내기 내용은 데어 로이퍼가 한 시간 안에 마리아 테레지아 궁정에서 토카이 와인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데어 로이퍼의 활약으로 내기에서 승리했지만, 술탄은 약속을 어기고 공녀를 넘겨주려 하지 않는다. 이에 분노한 남작은 칼리오스트로에게 받은 투명 반지를 사용하여 하렘에서 공녀를 구출한다. 남작은 공녀와 두 하인과 함께 배를 타고 베네치아로 탈출한다.[8]

2. 3. 달나라 여행

베네치아에서 공녀의 오빠와의 문제로 쫓기게 된 남작과 그의 하인 크리스티안 쿠헨로이터는 열기구를 타고 탈출하여 달로 향한다. 달에 도착한 그들은 지구와는 전혀 다른 초현실주의적인 세계와 마주한다. 특히 달에서의 시간은 지구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 달에서의 하루가 지구의 1년에 해당했다. 이 때문에 칼리오스트로에게 영원한 젊음을 선물 받은 남작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하인 크리스티안은 급격하게 늙어간다.

그들은 달에서 몸과 머리가 분리된 채 움직이는 달 주민을 비롯한 기이한 존재들을 만난다. 한 달 주민은 지구인은 달에서 하루 이상 머물 수 없으며, 그 이상 머물면 연기처럼 말라 사라져 버린다고 경고한다. 남작이 지구로 돌아가려 할 때, 이미 노쇠해진 크리스티안은 급격한 노화로 인해 심장마비로 쓰러져 남작의 품에서 연기처럼 사라지며 죽음을 맞이한다. 결국 영원한 젊음을 유지한 남작만이 홀로 지구로 돌아오게 된다.

2. 4. 결말

이야기를 모두 마친 뮌히하우젠 남작에게 젊은 손님들은 실제 남작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며 이야기의 진실성을 의심한다. 이에 남작은 자신이 바로 그 이야기 속의 인물, 즉 뮌히하우젠 남작 본인이라고 고백한다. 그의 충격적인 고백에 놀란 손님들은 서둘러 저택을 떠난다.

남작의 아내는 남편이 늘 그랬듯 상황이 곤란해지면 도망치라고 권유하지만, 남작은 이를 거부한다. 그는 영원한 젊음에 지쳐 있었기에, 칼리오스트로에게 받았던 영원한 젊음의 선물을 스스로 포기한다. 그 순간 남작은 급격히 나이를 먹어 자신의 아내와 비슷한 연배의 노인이 된다. 이로써 남작은 오랫동안 바라왔던 대로 아내와 함께 평범하게 늙어갈 수 있게 된다.

3. 역사적 배경

이 영화는 나치 독일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직접적인 지시로 기획되었다. UFA 영화 스튜디오 창립 25주년을 기념하는 동시에,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국민과 해외에 독일의 기술적, 예술적 우수성을 과시하고 전쟁의 공포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화려한 오락을 제공하려는 목적을 가졌다.[1][9] 이는 대중 오락을 통해 체제 선전을 강화하려던 폴크스필름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1]

특히 미국의 테크니컬러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성공에 영향을 받아[1], 독일의 자체 컬러 영화 기술인 아그파컬러를 사용하여 제작된 세 번째 장편 영화였다.[2] 제작에는 당초 예산을 훨씬 초과하는 약 660만 라이히스마르크가 투입되어, 제3제국 시기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정치색을 배제한 순수한 오락 영화를 표방했으나, 그 제작 배경에는 나치 정권 하에서의 여러 복잡한 상황이 얽혀 있었다. 집필 금지 처분을 받은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가 가명으로 각본을 집필하고[3], 정권 비판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사가 일부 포함되었으며[11][12], 반유대주의고정관념을 연상시키는 인물 설정이 나타나는 등[3] 단순한 선전 영화 이상의 다층적인 맥락을 지니고 있다. 캐스팅 과정에서도 일부 배우들의 개인적인 배경으로 인해 어려움이 따랐다.

영화는 1943년 3월 3일 베를린의 우파 팔라스트 암 조에서 UFA 창립 25주년 기념작으로 개봉했으며[13], 1944년 말까지 1,8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3. 1. 나치 선전 영화

나치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UFA 영화 스튜디오 창립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뮌히하우젠''의 제작을 명령했다.[1] 이 기념 영화는 괴벨스가 직접 의뢰했으며, 프리츠 히플러가 영화 제작을 감독하도록 선정되었다. 1939년 괴벨스에 의해 국가영화드라마투르크로 임명된 히플러는 영화를 포함한 모든 예술 분야가 게마이히샤프퉁 정책에 따라 정권이 강조하고자 하는 선전 주제를 반영하도록 "조정"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1]

''뮌히하우젠''은 대중을 즐겁게 하고 전쟁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선전의 폴크스필름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주며, 화려한 영상이 돋보이는 대규모 예산의 할리우드 영화 장르를 차용했다. 특히 미국의 테크니컬러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개봉은 괴벨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1] 1940년까지 독일 연구소 아그파는 자체 컬러 영화 버전인 아그파컬러를 생산했고, 괴벨스 일기에 따르면 괴벨스는 독일이 "색채 영화 촬영술에서 미국을 따라잡았다"고 평가했다.[2] ''뮌히하우젠''은 이 새로운 아그파컬러 네거티브-포지티브 재료를 사용하여 독일에서 제작된 세 번째 장편 영화였다.

제작 책임자는 에버하르트 슈미트였지만, 각본은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가 맡았다. 당시 케스트너는 집필 금지 처분을 받은 상태였으나, 제국 영화 총감독 프리츠 히플러는 요제프 괴벨스로부터 특별 허가를 받아 그에게 각본을 의뢰했다. 히플러와 괴벨스 모두 정부로부터 금지 처분을 받은 케스트너가 이 작품에 적합한 작가라는 데 동의했다. 케스트너는 "베르톨트 뷔르거 (Berthold Bürger)"라는 가명으로 각본을 썼는데, 이는 뮌히하우젠 전설의 창시자인 고트프리트 뷔르거와 1933년 제3제국에 의해 망명당한 케스트너의 동료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3] 영화 시작 부분 크레딧에는 이 가명이 표시되지 않았으며, 개봉 전 언론에는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 그리고 가명 베르톨트 뷔르거는, 지면에서 언급하지 않도록 한다[10]"는 명확한 지시가 내려졌다. 최종 시나리오는 1785년 출판된 원본 텍스트와 카를 레베레히트 임머만의 1839년 버전, 카를 헨젤의 1920년 버전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이 작품에는 막대한 비용, 호화로운 캐스팅, 아그파사의 최신 컬러 필름이 사용되었다. 제작비는 당초 예산 457만 라이히스마르크를 훨씬 초과한 약 660만 라이히스마르크에 달했으며, 이는 제3제국 시기 제작된 영화 중 가장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작품 중 하나이다. 단, 개봉 1개월 후에 11만 9000 라이히스마르크의 수익을 올렸다.

하인리히 데테링은 이 영화의 목적이 "창립 기념에 즈음하여, 또한 세계 대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인, 그리고 국외에 대해서도 화려하고 모험으로 가득 찬 […] 영화를 발표하는 것이었으며, 제국의 정치 상황도, 전쟁의 공포도 느끼게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치 독일의 기술, 예술에서의 공적을 더욱 설득력 있게 입증하려 했다"고 분석했다.[9]

본 작품은 오락 영화이며, 선전을 암시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놀랍도록 자유주의적이고 관대한 대사가 있었지만 일부는 삭제되었다. 정권에 대해 비판적으로 들릴 수 있는 대사도 있었다. 예를 들어 뮌히하우젠이 시계를 보면서 하인에게 "시간(=시대)이 망가졌군[11]"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카사노바가 공녀 이사벨라에게 "하지만 부디 조심하세요. 국가의 종교 재판에는 1만 개의 눈과 팔이 있고, 그 권력으로 정의도 부정의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12]."라고 경고하는 대사이다.

당시 러시아는 제3제국과 전쟁 상태에 있었지만, 놀랍게도 묘사는 부정적인 것이 없다. 독일인이 러시아를 통치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예카테리나 대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확하다.

그러나 칼리오스트로 백작에 대해서는 다르게 묘사된다. 뮌히하우젠은 이상을 품고, 모험심이 풍부하며, 거친 인물인 반면, 칼리오스트로는 권력욕과 음모가의 화신이며,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반유대주의고정관념을 무의식중에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 역할을 연기한 것은 페르디난트 마리안이었는데, 그는 본 작품 이전에 파이트 하를란 감독의 증오 영화 『유대인 쥐스』에서 타이틀 롤인 유대인을 연기했다. 독일인 관객에게 아직 기억이 생생했고, 『뮌히하우젠』에서도 『유대인 쥐스』를 연상시키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 영화의 제작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이례적으로 (당시 할리우드에는 엄격한 헤이스 코드가 적용되고 있었다), 간접적인 성적 표현, 상반신 노출 여성 장면이 여러 번 있었지만, 당시 독일 영화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이미 영화 『포스트마이스터』 (1940년)에서는 가슴을 드러낸 여성이 등장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웅대한 특수 효과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최고의 기술이 사용되었고, 콘스탄틴 일멘-체트가 총책임자였다. 본 작품은 주연 한스 알베르스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때때로 『뮌히하우젠』은, 본작 이전에 공개된 판타지 영화, 미국의 ''오즈의 마법사'' (1939년), 영국의 ''바그다드의 도둑'' (1940년)과 비교되어, 경쟁 관계에 있다고 말해지기도 한다. 호화로운 세트는 에밀 하슬러와 오토 귈스토르프가, 다종다양한 의상은 마논 한이 담당했다.

본 작품은 1943년 3월 3일 UFA 창립 25주년 기념 작품으로, "기업 점호 집회 (Betriebsappell)"라는 명칭으로, 베를린의 우파 팔라스트 암 조에서 개봉되었다[13]. 1944년 말까지 1,8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나치 시대를 통틀어 가장 성공을 거둔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3. 2. 제작 과정의 어려움

나치 독일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지시로 제작된 이 영화는 UFA 창립 25주년 기념작이었지만, 제작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특히 각본가 선정과 내용 검열 문제가 두드러졌다.[1][9]

제작 총괄을 맡은 프리츠 히플러와 UFA의 제작 그룹 매니저 에버하르트 슈미트는 각본가로 에리히 케스트너를 선택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었는데, 케스트너는 이미 1933년 나치 정권에 의해 작품이 금서로 지정되고 집필 금지 처분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3] 히플러는 괴벨스로부터 특별 허가를 받아 케스트너에게 각본을 의뢰했으며, 두 사람 모두 정부로부터 금지당한 케스트너가 오히려 이 작품에 적합한 작가라는 데 동의했다. 히플러는 나중에 케스트너 기용 때문에 해임되었다고 주장했지만, 괴벨스는 일기에서 히플러의 "불행, 알코올 중독, 가족 문제"가 해임 사유라고 반박했다.[2]

케스트너는 '베르톨트 뷔르거'(Berthold Bürger|베르톨트 뷔르거de)라는 필명으로 각본을 집필했다. 이 필명은 뮌히하우젠 전설의 창시자인 고트프리트 뷔르거와, 나치에 의해 망명해야 했던 케스트너의 동료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이름을 조합한 것이었다.[3] 영화 크레딧에는 이 필명이 명시되지 않았으며, 개봉 전 언론에는 케스트너의 이름과 필명을 일절 언급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10]

영화는 표면적으로 나치 선전 색채를 배제한 오락 영화를 표방했지만, 케스트너는 검열 하에서도 자유주의적이고 관대한 대사를 삽입하려 시도했다. 일부 대사는 정권에 비판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 삭제되기도 했지만, 다음과 같은 대사들은 영화에 포함되었다.

  • 뮌히하우젠이 시계를 보며 하인에게: "시간(시대)이 망가졌군."[11]
  • 카사노바가 공녀 이사벨라에게: "하지만 부디 조심하세요. 국가의 종교 재판에는 1만 개의 눈과 팔이 있고, 그 권력으로 정의도 부정의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12]


이처럼 나치 정권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도 작가의 저항 정신이 일부 반영된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캐스팅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있었다. 주연 배우 한스 알베르스를 비롯해 일부 출연진은 나치 정권 하에서 민감하게 여겨질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레오 슬레자크의 아내는 유대인이었고, 후베르트 폰 마이어링과 빌헬름 벤도우는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있었다. 브리기테 호르네이는 유대인 아내를 둔 문제로 나치와 갈등하다 직전에 자살한 배우 요아힘 고트찰크와 가까운 사이였다. 이러한 배우들을 기용하기 위해 제작진은 특별한 고려를 해야 했다.

3. 3. 반유대주의적 요소

주인공 뮌히하우젠 남작이 이상과 모험심을 가진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것과 달리, 칼리오스트로 백작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음모가로 묘사된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이러한 묘사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반유대주의고정관념을 연상시킬 수 있다.

특히 칼리오스트로 백작 역을 맡은 배우 페르디난트 마리안은 이 영화에 출연하기 전, 악명 높은 나치 선전 영화인 파이트 하를란 감독의 《유대인 쥐스》(1940)에서 주인공 유대인 역을 맡아 독일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따라서 마리안의 캐스팅은 관객들에게 《유대인 쥐스》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다시 떠올리게 하여 칼리오스트로 백작의 캐릭터를 더욱 부정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은연중에 반유대주의적 메시지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4. 제작 과정

UFA 창립 25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이 영화는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직접적인 지시 아래 1941년부터 제작이 시작되었다. 괴벨스는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고 모험 가득한 영화를 통해 나치 독일의 기술적, 예술적 우수성을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다.[9] 감독은 요제프 폰 바키가 맡았으며, 그는 할리우드 영화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에서 시각적 영감을 얻었다.[3]

각본은 당시 나치 정권에 의해 집필 금지 처분을 받은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가 '베르톨트 뷔르거'라는 가명으로 집필했다. 괴벨스는 케스트너가 오히려 이 작품에 적합한 작가라고 판단하여 프리츠 히플러 제국 영화 총감독을 통해 특별 허가를 내주었다.[10] 케스트너의 각본에는 선전 색채가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자유주의적이고 관대한 대사나 "시간(시대)이 망가졌군"[11], "국가의 종교 재판에는 1만 개의 눈과 팔이 있고, 그 권력으로 정의도 부정의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12]"와 같이 정권을 비판하는 듯한 대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화 개봉 전, 언론에는 케스트너나 그의 가명을 언급하지 말라는 명확한 지시가 내려졌다.[10]

주연 뮌히하우젠 남작 역은 한스 알베르스가 맡아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칼리오스트로 백작 역에는 페르디난트 마리안이 캐스팅되었는데, 그는 이전에 파이트 하를란 감독의 반유대주의 선전 영화 ''유대인 쥐스''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였다. 이 때문에 마리안이 연기한 권력욕에 찬 음모가 칼리오스트로의 모습은 독일 관객들에게 반유대주의고정관념을 떠올리게 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에밀 하슬러와 오토 귈스토르프가 세트 디자인을, 마논 한이 의상 디자인을 담당했으며, 콘스탄틴 이르멘-체트가 특수 효과를 포함한 영화의 편집 및 연출을 총괄했다.[3] 제작은 에버하르트 슈미트가 맡았다.

캐스팅 과정에서는 몇몇 특수한 상황이 고려되었다. 레오 슬레자크의 아내는 유대인이었고, 후베르트 폰 마이어링과 빌헬름 벤도우는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었으며, 브리기테 호르네이는 자살한 배우 요아힘 고트찰크와 깊은 관계였다. 이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영화에 캐스팅되었다.

또한 영화에는 당시 할리우드의 엄격한 헤이스 코드와 달리 간접적인 성적 표현이나 상반신 노출 장면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당시 독일 영화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1940년 영화 '포스트마이스터'에서도 가슴을 드러낸 여성이 등장했다.

영화는 1943년 3월 3일 베를린의 우파 팔라스트 암 조에서 UFA 창립 25주년 기념작으로 개봉하여[13] 1944년 말까지 1,8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나치 시대 가장 성공적인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독일 재통일 이후 동유럽 국가 공문서관의 협조로 원본에 가까운 복원이 이루어졌으며, 1991년 ZDF에서 롱 버전(편집: 위르겐 라벤스키)이 방영되었다. 방송 당시 해설은 출연 배우였던 일제 베르너가 맡았다. 하지만 최초 편집 과정에서 삭제된 약 15분 분량은 여전히 발견되지 않았다.

4. 1. 제작비와 기술

1941년에 시작된 이 영화의 제작 예산은 처음 450만 ℛℳ 이상이었으나,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알렉산더 코르다 감독의 테크니컬러 영화 ''바그다드의 도둑''의 "특수 효과와 색상 예술성을 능가"하려는 목표를 세우면서 650만 ℛℳ 이상으로 증액되었다.[3] 최종적으로 투입된 제작비는 약 660만 라이히스마르크에 달했으며, 이는 제3제국 시기 제작된 영화 중 가장 높은 제작비 중 하나였다. 이 영화는 UFA 창립 25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으로 기획되었고, 괴벨스의 직접적인 지시 아래 제작되었다.

막대한 예산 덕분에 감독 요제프 폰 바키와 제작진은 에리히 케스트너의 각본에 묘사된 뮌히하우젠 남작의 환상적인 모험을 시각적으로 풍부하게 구현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러시아 궁전의 저녁 식사 장면에서는 박물관에서 대여한 실제 금, 은 식기와 마이센 도자기가 사용되었고, 촬영 동안 SS 경비대원이 이를 보호했다.[3] 또한, 베니스 장면은 현지에서 촬영되었는데, 제작진은 촬영을 위해 하루 동안 그랜드 캐널 전체를 독점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3] 당시 제작에 참여했던 에버하르트 폰 바이스는 "귀중한 카니발 의상"을 포함한 방대한 세트와 소품들이 기차로 국경을 넘어 운반되었고, 현지 베네치아 주민들이 엑스트라로 참여했다고 기록했다.[3]

기술적으로는 당시 최신 기술인 아그파사의 컬러 필름을 사용하여 화려한 색감을 표현했다. 폰 바키 감독은 시각적 영감을 얻기 위해 할리우드 영화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참고했다.[3] 세트 디자인은 에밀 하슬러와 오토 귈스토르프가 담당했으며, 콘스탄틴 이르멘-체트는 편집, 연출과 함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특수 효과 제작을 총괄했다.[3] 이러한 기술적 성취는 이 영화가 종종 미국의 ''오즈의 마법사'' (1939년)나 영국의 ''바그다드의 도둑'' (1940년)과 같은 동시대 판타지 대작들과 비교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모든 촬영은 1942년 포츠담바벨스베르크에 위치한 UFA 촬영소 스튜디오와 야외 세트장에서 진행되었다. 하인리히 데테링은 이 영화의 제작 목적에 대해,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해외에 화려하고 모험 가득한 영화를 선보여 정치 상황이나 전쟁의 공포를 잊게 하고, 이를 통해 나치 독일의 기술적, 예술적 우수성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분석했다.[9] 다채롭고 화려한 의상은 마논 한이 디자인했으며, 주연 배우 한스 알베르스는 이 작품으로 36만 라이히스마르크의 출연료를 받았다.

4. 2. 촬영 장소와 엑스트라

러시아 궁전에서 열린 저녁 식사 장면 촬영에는 박물관에서 대여한 실제 금, 은 식기와 마이센 도자기가 사용되었으며, 장면 촬영 동안 의상을 입은 SS 경비원이 이를 보호했다.[3] 베니스 장면은 현지에서 촬영되었으며, 제작진은 하루 종일 그랜드 캐널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3] 또한, "귀중한 카니발 의상"을 포함한 수많은 세트 조각들이 기차로 국경을 넘어 이동했으며, 현지 베네치아인들이 영화 엑스트라로 동원되었다.[3] 그 외 대부분의 장면은 1942년 포츠담바벨스베르크에 있는 UFA 촬영소 스튜디오와 야외 세트에서 촬영되었다.

5. 평가

영화 ''뮌히하우젠''은 나치 독일 시대 선전 영화임에도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요제프 괴벨스는 대중적인 오락 영화를 의도했으나[4], 아돌프 히틀러는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 기용 등에 불만을 표했다.[3]

이 영화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 후 암울한 시기에 개봉되어, 전쟁에 지친 국민들에게 현실 도피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목적을 가졌다.[4] 개봉 후 논란 장면 삭제로 상영 시간이 단축되기도 했다.[3]

현대에는 영화의 환상적 요소나 특정 묘사가 나치즘에 대한 은유적 비판이라는 해석도 제기되지만, 총력전을 강조하던 당시 선전부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다는 반론도 있다.[4]

이러한 논쟁 속에서도 영화는 기술적 완성도와 오락성을 인정받아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으며[4],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영화 역사가 에릭 렌츨러는 "역대 가장 위대한 독일 컬러 영화" 중 하나로 꼽았다.[4]

5. 1. 개봉 당시 반응

아돌프 히틀러괴벨스는 제3제국 선전 영화 제작 방식에 대해 잘 알려진 의견 차이를 보였는데, 괴벨스는 민족영화 스타일을 선호했다. 그는 ''뮌히하우젠''을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적인 영화"라고 언급했다.[4]

이 영화는 나치 독일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6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어려운 시기에 개봉되었다. 이는 전쟁에 지친 독일 국민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시도였다. 영화는 전쟁의 참상으로부터 시각적인 안도감을 주었으며, 선전부가 제작한 몇 안 되는 환상적인 영화 중 하나로서 도피주의를 위한 드문 기회를 제공했다.[4] 하지만 히틀러는 영화의 일부를 본 후, 작가 카스트너에게 더 이상의 임무를 맡겨서는 안 된다고 괴벨스에게 지시했다.[3]

영화는 처음 개봉했을 때 상영 시간이 133분이었지만, 3개월 후 선전부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제거하기로 결정하면서 118분으로 재편집된 두 번째 버전을 개봉했다.[3] 오늘날에는 114분 버전이 무르나우 재단에 보존되어 있다. 현대의 언론인과 비평가들은 영화의 여러 측면, 특히 젠더와 성의 역할, 환상적인 주제를 나치 통치에 대한 반론으로 의도된 증거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히플러는 괴벨스가 1943년 스포르트팔라스트 연설에서 제시한 총력전 개념을 들어 이러한 해석을 반박했다. 그는 "국민의 삶은 무기가 된다"고 주장하며, 국가의 사기를 강화하는 것이 독일 전쟁 수행 성공의 열쇠라고 주장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과 이후 모두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상당한 정부 투자를 회수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 역사가 에릭 렌츨러에 의해 "역대 가장 위대한 독일 컬러 영화" 중 하나로 현대적인 찬사를 받았다.[4]

5. 2. 현대적 평가

이 영화는 처음 개봉했을 때 133분이었지만, 3개월 후 선전부에 의해 논란이 되는 부분을 제거하여 118분으로 재편집되었다.[3] 현재는 114분 버전이 무르나우 재단에 보존되어 있다.

현대의 언론인과 비평가들은 영화의 젠더와 성 역할, 환상적인 주제 등 여러 측면이 나치 통치에 대한 반론으로 의도되었을 수 있다는 증거로 보기도 한다. 이는 영화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6군이 큰 손실을 입은 후 독일 국민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전쟁으로부터 시각적인 안도감을 주려는 선전부의 의도[4]와는 다른 해석이다. 이 영화는 선전부가 제작한 몇 안 되는 환상적인 영화 중 하나로서 도피주의를 위한 드문 기회를 제공했다.[4] 실제로 아돌프 히틀러는 영화 일부를 본 후, 각본을 쓴 에리히 케스트너에게 더 이상의 임무를 맡기지 말라고 지시하기도 했다.[3]

이 영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중과 이후 모두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상당한 정부 투자를 회수했다.[4] 영화 역사가 에릭 렌츨러는 이 영화를 "역대 가장 위대한 독일 컬러 영화"라고 평가했다.[4]

독일의 '국제 영화 사전'(Lexikon des Internationalen Filmsde)은 이 영화가 UFA 창립 25주년을 기념하여 막대한 자금과 뛰어난 기술력으로 제작되었으며, 컬러 필름의 특성을 잘 살렸다고 평가했다. 또한 정치적으로 금지된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의 각본을 바탕으로 유쾌한 아이러니를 담고 있으며, 개별 에피소드를 통해 모험 자체를 인생 철학으로 승화시키면서도 이야기의 환상성이 압도적인, 멋지고 흐뭇한 코미디라고 분석했다.[14]

Andreas Friedrich는 이 영화를 "화려하게 완성된 영화 작품"으로, "막대한 자금을 자랑하며, 당시 최신 아그파 컬러를 미식가처럼 마음껏 사용했다"고 평했다.[15]

6. 출연진

wikitext

배우배역
한스 알베르스뮌히하우젠 남작
일제 베르너이자벨라 데스테
빌헬름 벤도우달의 남자
브리기테 호르네이예카테리나 여제
미하엘 보넨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페르디난트 마리안카글리오스트로 백작
한스 브라우제베터하르텐펠트 남작
헤르만 슈필만스크리스티안 쿠헨로이터
마리나 폰 디트마르조피 폰 리데젤
앤드루스 엥겔만포템킨 공
케테 하크뮌히하우젠 부인
발데마르 라이트게브오를로프 공
발터 리크주자
후베르트 폰 마이린크안톤 울리히 공
야스파 폰 외르첸란스코이 백작
베르너 샤르프프란체스코 공
아르민 슈바이처요한
레오 슬레작술탄 압뒬하미트
힐데 폰 슈톨츠루이즈 라 투르
루이 브로디하인 (크레딧 없음)
테오도르 욘자 미하엘


7. 영화의 유산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 서술을 피하기 위해 내용을 생략함)

7. 1. DVD 및 블루레이 출시

이 영화의 110분 버전은 2004년 7월 20일 키노 비디오(Kino Video)에서 NTSC (Region 1) DVD로 출시되었다.[5] 같은 버전은 2005년 7월 영국 유레카 비디오(Eureka Video)에서 PAL (Region 2) DVD로 출시되었다.[6] 132분 길이의 초연 버전과 117분 길이의 복원 버전은 독일에서 블루레이 디스크로 출시되었으며, 117분 복원 버전은 미국에서도 블루레이 디스크로 출시되었다.[7]

7. 2. 영화의 보존

이 영화는 여러 버전으로 출시되었다. 110분 버전은 2004년 7월 20일 키노 비디오(Kino Video)에서 DVD (NTSC, Region 1)로 출시되었다.[5] 동일한 버전은 2005년 7월 영국 유레카 비디오(Eureka Video)에서도 PAL (Region 2) DVD로 출시되었다.[6] 초연 당시 상영되었던 132분 버전과 117분 길이로 복원된 버전은 독일에서 블루레이 디스크로 출시되었으며, 117분 복원 버전은 미국에서도 블루레이 디스크로 출시되었다.[7]

참조

[1] 서적 Entertaining the Third Reich: Illusions of Wholeness in Nazi Cinema Duke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Film Minister: Goebbels and the Cinema in the "Third Reich" Axel Menges
[3] 서적 The Great German Films https://archive.org/[...] Citadel Press
[4] 간행물 The Ministry of Illusion: Nazi Cinema and Its Afterlife 1996
[5] 웹사이트 The Adventures of Baron Munchausen https://www.imdb.com[...] 1943-08-06
[6] 웹사이트 Münchhausen - Eureka http://eurekavideo.c[...]
[7] 웹사이트 The Adventures of Baron Munchausen http://dvdcompare.ne[...] 1943-08-06
[8] 문서 Gottfried August Bürger
[9] 문서 Heinrich Detering
[10] 뉴스 Vertrauliche Presse-Informationen
[11] 문서 Die Zeit ist kaputt
[12] 문서 Seien Sie trotzdem vorsichtig. Die Staatsinquisition hat zehntausend Augen und Arme; und sie hat die Macht, Recht und Unrecht zu tun – ganz wie es ihr beliebt …
[13] 서적 Klaus Kreimeier
[14] 문서 LdIF
[15] 문서 Andreas Friedrich
[16] 웹인용 The Adventures of Baron Munchausen http://dvdcompare.ne[...] 1943-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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