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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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자(微子)는 상나라 제을의 아들이자 주왕의 이복 형으로, 상나라 멸망 후 송나라의 초대 군주가 된 인물이다. 그는 주왕의 폭정에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주나라 무왕에게 상나라의 제사를 잇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송나라를 건국했다. 미자계는 상나라 왕위 계승의 적통을 지닌 장자였으며, 그의 후손들이 송나라를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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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11세기 출생 - 미중
미중은 현재 내용이 없는 빈 문서이다. - 기원전 11세기 출생 - 노 태공
노 태공은 주공 단의 아들이자 주 무왕의 동생으로, 기원전 1042년경 노나라의 군주가 되어 삼감의 난을 평정하고 노나라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3년상 등 풍습을 개정하고 기원전 998년경 사망 후 아들 고공에게 군주 자리를 물려주었다. - 중국의 왕자 - 풍도 (882년)
풍도는 중국 오대십국 시대에 다섯 왕조를 섬기며 11명의 군주를 모신 인물로, 후대에는 불충하다는 비판과 함께 백성 구휼 노력, 목판 인쇄술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중국의 왕자 - 고계흥
고계흥은 오대 십국 시대에 형남 절도사로 활동하며 후량, 후당, 오나라에 복종하며 세력을 유지했고, 형남의 발전에 기여했으나 말년에 후당과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928년에 사망했다. - 기원전 11세기 사망 - 주 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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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작위 | 송나라 공작 |
이름 | 미자계 |
원어 이름 | 宋微子啓 |
성 | 자(子) |
씨 | 송(宋) |
휘 | 계(啓) |
추증 시호 | 없음 |
생몰년 | 미상 |
통치 정보 | |
재위 기간 | 기원전 1038년 ~ 기원전 1025년 (추정) |
전임자 | 새로운 작위 |
후임자 | 미중 |
가계 | |
왕조 | 상나라 (기자(箕子)가 숙부) |
아버지 | 제을 |
어머니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미상 |
기타 | |
종교 | 천신 |
2. 생애
미자는 제을의 아들이고, 제신의 서형이며 기자는 숙부이다.[8] 미(微)는 영지의 이름으로, 아버지는 상나라 왕 제을이며 황제의 후손이자 제곡과 요임금의 직계 후손이다. 상나라 마지막 왕 주왕의 이복형이고 고조선을 통치했던 기자는 숙부이다. 미자계는 현명하고 올바른 사람이었으나, 후궁이었던 주왕의 생모가 정실이 되면서 권력에 밀려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게 되었다.[9]
처음에 미(微)나라에 봉해졌는데 정치를 현능하게 하니 백성들에게 인정받고 받들어졌다. 상나라가 혼란하여 장차 망하게 되니 미자는 여러 번 직접 제신에게 가서 간언하였으나 제신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9] 기자와 비간과 모의하였는데, 기자가 "정성을 다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으나 죽어도 끝내 그렇게 될 수 없으니 떠나감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이에 제신에게서 멀리 떠나 미나라로 돌아갔다.
주왕이 주지육림의 방탕한 생활과 폭정을 계속 하자 왕실의 맏형인 미자계는 실정을 멈추라고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매번 무시나 위협을 당했다. 주왕의 숙부 기자는 주왕에게 간언하다가 주왕의 진노를 사서 겨우 목숨을 건진 뒤 화를 피하려 광인 행세를 했으나 결국 투옥되었고 충신 비간은 간언하다가 주왕에게 처형되었다. 이에 미자계는 주왕에게 천명이 떠난 것을 알고 예악(禮樂)을 관장하는 관리들과 제사 도구 등을 가지고 왕실 가족들과 함께 본인의 봉지(封地)로 피했다.[10]
주나라군은 목야대전에서 상나라에 승리하고, 주왕은 스스로 궁궐에서 분신 자살했다. 미자계는 무왕에게 상나라의 사직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주왕의 아들 무경이 은나라를 계속 이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상나라가 다시 부활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형제인 관숙 선, 채숙 도, 곽숙 처를 감시자로 보냈다. 이들을 3인의 감시자라는 하여 삼감(三監)이라고 부른다.
주왕이 죽은 뒤에 상나라는 하늘에 드리는 제례 의식이 근본이라 제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무왕에게 요청했으며 이러한 의지는 송나라의 초대 왕에 봉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주 왕실과는 혈연관계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주왕의 폭정으로 민심을 잃어 일시적으로 영토를 빼앗겨 귀순했어도 당시 인식은 상나라 왕실과 천자의 후예들을 감히 함부로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10]
천제께 제사를 올리는 특권은 천자에게만 허락되는 게 통례지만 상 왕실은 성인의 혈통이라는 특별함이 주는 정신적 문화적 공감대와 후광이 커서 천자의 제례를 특별히 허락하는 게 당연할 만큼의 인식이 세간에 팽배했기 때문이다. 송은 제후국 중에서도 제후들 간에 상석에서 주관하는 주도국으로 예우받으며 전국시대에는 국력이 강한 패권국이 송나라 역할을 대신했다. 상나라의 도읍에서 송나라로 계속 이어가게 된 제례 의식은 제정일치 국가였던 상나라의 근본이자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제사라는 의식은 천신께 단순히 풍요를 기원하는 것 외에도 국가에 재앙이 있을 때는 그 재앙에 대해 왕이 직접 천신께 제사로 국가적 문제에 제사를 지내고 점을 쳐서 중대사를 결정했는데 제정일치 국가였던 상나라에서 제례를 내팽개치고 주색잡기에만 빠져서 나라를 망치는 주왕 같은 폭군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으며 왕실의 어른들이 고해도 듣질 않고 폭정을 계속하자 맏형인 미자계가 나서서 국가 종묘사직의 근본을 본인의 영토로 옮겨와 정상적으로 제례를 이어가 제정일치국가의 영속성을 지키고 더 이상의 죄악과 화를 피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10]
주나라는 천자국인 상나라의 종속국이었고 주왕의 민심이 기울어지자 신하가 왕을 쳐서 영토를 빼앗았을 뿐 모든 국가적 문물과 법제 등이 뒤처진 속국에 불과했다.[11] 주나라가 나라의 기틀을 다시 새로 짜기엔 정신적 문화적으로도 상나라의 속국이었으며 상나라의 법제와 문물을 새 왕조라는 명분만으로 부정하기엔 모든 면에서 주나라보다 우월했기에 주나라는 상나라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게 된다. 상 왕실 구성원 중 일부는 왕실의 옛 고향인 동북쪽 한반도 씨족 문명의 발원지로 돌아갔으며 미자계는 상나라 왕위 계승의 적통을 지닌 장자(長子)로 하늘에 상의 제례를 이어가고 주 왕실과는 혈연적으로도 이어져 있기 때문에 송나라 초대 왕에 봉해지게 된다.[11]
송나라는 옛 상나라 천자의 후예 국가로 예우받았으며 제례의 특권과 송왕으로 상나라를 보존하게 된다. 주무왕은 독자적인 통치철학으로 혁명을 하려는 게 아니었고 모든 면에서 우월했던 거대 통일 왕조 상나라의 문명을 대체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주왕, 달기 등 폭정의 원흉들만 제거하고 모든 걸 그대로 보존했으며 상나라의 거의 모든 걸 그대로 유지했다. 상 왕실의 일부 왕손들은 씨족의 옛 고향인 한반도로 돌아가고 주 왕실의 허용으로 미자계의 숙부 기자는 고조선의 왕이 되고 상 왕실에서 옛 고향으로 여기며 중요시하던 한반도 신산의 제례를 맡긴 건 상 왕실의 계속성을 인정하고 제례를 통해 천신과 화합을 도모하는 권한의 영속을 유지하게 한 것이며 이는 단지 주 왕실과의 혈연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왕실 간에 큰 정신적 사상적 공감대를 알 수 있고 주나라는 상나라를 모든 면에서 그대로 계승한다. 후에 미자계의 후손인 공자도 이 점을 높이사 주나라의 지위를 인정하고 주공을 호평했다. 주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주공단이 섭정했는데 무경은 이 틈을 노려 상나라 부활을 시도했고 삼감들도 주공단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이해 관계가 맞아 이들은 함께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무경과 관숙은 처형되었으며 채숙과 곽숙은 추방되었다. 난의 평정 후 미자계는 무경이 다스리던 상나라의 옛 도읍의 왕으로 봉해졌는데 이 나라가 송나라이다.
송나라 초대 왕 미자계의 아들은[12] 주나라의 왕실에 명목상은 관리로 데려갔으나 사실상 인질로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에는 왕위를 이을 세자의 부재로 인해 곤란을 겪었다. 그래서 상나라 왕실의 예법대로 동생 미중연이 제후직을 이어받아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 이후의 송나라 제후는 미중연의 후손들이 세습하게 된다.
2. 1. 상나라 왕족
제을의 아들이고, 제신의 서형이며 기자는 숙부이다.[8] 미(微)는 봉지의 이름으로, 아버지는 상나라 왕 제을이며 황제(黃帝)의 후손이자 제곡과 요임금의 직계 후손이다. 상나라 마지막 왕 주왕의 이복형이고 고조선을 통치했던 기자는 숙부이다. 미자계는 현명하고 올바른 사람이었으나, 후궁이었던 주왕의 생모가 정실이 되면서 권력에 밀려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게 되었다.처음에 미(微)나라에 봉해졌는데 정치를 현능하게 하니 백성들에게 인정받고 받들어졌다. 상나라가 혼란하여 장차 망하게 되니 미자는 여러 번 직접 제신에게 가서 간언하였으나 제신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9] 기자와 비간과 모의하였는데, 기자가 "정성을 다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으나 죽어도 끝내 그렇게 될 수 없으니 떠나감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이에 제신에게서 멀리 떠나 미나라로 돌아갔다.
주왕이 주지육림의 방탕한 생활과 폭정을 계속 하자 왕실의 맏형인 미자계는 실정을 멈추라고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매번 무시나 위협을 당했다. 이에 미자계는 주왕에게 천명이 떠난 것을 알고 예악(禮樂)을 관장하는 관리들과 제사 도구 등을 가지고 왕실 가족들과 함께 본인의 봉지(封地)로 피했다.[10]
주나라군은 목야 대전에서 상나라에 승리하고, 주왕은 스스로 궁궐에서 분신 자살했다. 미자계는 무왕에게 상나라의 사직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주왕의 아들 무경이 은나라를 계속 이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주왕이 죽은 뒤에 상나라는 하늘에 드리는 제례 의식이 근본이라 제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무왕에게 요청했으며 이러한 의지는 송나라의 초대왕에 봉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10]
주나라는 천자국인 상나라의 종속국이었고 주왕의 민심이 기울어지자 신하가 왕을 쳐서 영토를 빼앗았을 뿐 모든 국가적 문물과 법제 등이 뒤쳐진 속국에 불과했다.[11] 상 왕실 구성원 중 일부는 왕실의 옛 고향인 동북쪽 한반도 씨족 문명의 발원지로 돌아갔으며, 미자계는 상나라 왕위 계승의 적통을 지닌 장자(長子)로 하늘에 상의 제례를 이어가고 주 왕실과는 혈연적으로도 이어져 있기 때문에 송나라 초대왕에 봉해지게 된다.
무경이 주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주살되자, 주공 단은 옛 은나라 영토를 둘로 나누어 동부의 송에 미자계를 봉하여 은나라 유민을 다스리게 했다. 초대 송공이 된 미자계는 젊은 시절부터 현명했으므로 은나라 유민들도 이를 존경했고, 나라는 잘 다스려졌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어, 동생 송미중연이 뒤를 이었다.[12]
2. 2. 주나라 건국과 송나라 시조
미자는 제을의 아들이고, 제신의 서형이며 기자는 숙부이다.[8] 미(微)는 영지의 이름으로, 아버지는 상나라 왕 제을이며 황제의 후손이자 제곡과 요임금의 직계 후손이다. 상나라 마지막 왕 주왕의 이복형이고 고조선을 통치했던 기자는 숙부이다. 미자계는 현명하고 올바른 사람이었으나, 후궁이었던 주왕의 생모가 정실이 되면서 권력에 밀려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게 되었다.[9]주왕이 주지육림의 방탕한 생활과 폭정을 계속하자 왕실의 맏형인 미자계는 실정을 멈추라고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매번 무시나 위협을 당했다. 주왕의 숙부 기자는 주왕에게 간언하다가 주왕의 진노를 사서 겨우 목숨을 건진 뒤 화를 피하려 광인 행세를 했으나 결국 투옥되었고 충신 비간은 간언하다가 주왕에게 처형되었다. 이에 미자계는 주왕에게 천명이 떠난 것을 알고 예악(禮樂)을 관장하는 관리들과 제사 도구 등을 가지고 왕실 가족들과 함께 본인의 봉지(封地)로 피했다.[10]
주나라군은 목야대전에서 상나라에 승리하고, 주왕은 스스로 궁궐에서 분신 자살했다. 미자계는 무왕에게 상나라의 사직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주왕의 아들 무경이 은나라를 계속 이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상나라가 다시 부활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형제인 관숙 선, 채숙 도, 곽숙 처를 감시자로 보냈다. 이들을 3인의 감시자라는 하여 삼감(三監)이라고 부른다.
주왕이 죽은 뒤에 상나라는 하늘에 드리는 제례 의식이 근본이라 제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무왕에게 요청했으며 이러한 의지는 송나라의 초대 왕에 봉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주 왕실과는 혈연관계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주왕의 폭정으로 민심을 잃어 일시적으로 영토를 빼앗겨 귀순했어도 당시 인식은 상나라 왕실과 천자의 후예들을 감히 함부로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10]
천제께 제사를 올리는 특권은 천자에게만 허락되는 게 통례지만 상 왕실은 성인의 혈통이라는 특별함이 주는 정신적 문화적 공감대와 후광이 커서 천자의 제례를 특별히 허락하는 게 당연할 만큼의 인식이 세간에 팽배했기 때문이다. 송은 제후국 중에서도 제후들 간에 상석에서 주관하는 주도국으로 예우받으며 전국시대에는 국력이 강한 패권국이 송나라 역할을 대신했다. 상나라의 도읍에서 송나라로 계속 이어가게 된 제례 의식은 제정일치 국가였던 상나라의 근본이자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제사라는 의식은 천신께 단순히 풍요를 기원하는 것 외에도 국가에 재앙이 있을 때는 그 재앙에 대해 왕이 직접 천신께 제사로 국가적 문제에 제사를 지내고 점을 쳐서 중대사를 결정했는데 제정일치 국가였던 상나라에서 제례를 내팽개치고 주색잡기에만 빠져서 나라를 망치는 주왕 같은 폭군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으며 왕실의 어른들이 고해도 듣질 않고 폭정을 계속하자 맏형인 미자계가 나서서 국가 종묘사직의 근본을 본인의 영토로 옮겨와 정상적으로 제례를 이어가 제정일치국가의 영속성을 지키고 더 이상의 죄악과 화를 피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10]
주나라는 천자국인 상나라의 종속국이었고 주왕의 민심이 기울어지자 신하가 왕을 쳐서 영토를 빼앗았을 뿐 모든 국가적 문물과 법제 등이 뒤처진 속국에 불과했다.[11] 주나라가 나라의 기틀을 다시 새로 짜기엔 정신적 문화적으로도 상나라의 속국이었으며 상나라의 법제와 문물을 새 왕조라는 명분만으로 부정하기엔 모든 면에서 주나라보다 우월했기에 주나라는 상나라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게 된다. 상 왕실 구성원 중 일부는 왕실의 옛 고향인 동북쪽 한반도 씨족 문명의 발원지로 돌아갔으며 미자계는 상나라 왕위 계승의 적통을 지닌 장자(長子)로 하늘에 상의 제례를 이어가고 주 왕실과는 혈연적으로도 이어져 있기 때문에 송나라 초대 왕에 봉해지게 된다.[11]
송나라는 옛 상나라 천자의 후예 국가로 예우받았으며 제례의 특권과 송왕으로 상나라를 보존하게 된다. 주무왕은 독자적인 통치철학으로 혁명을 하려는 게 아니었고 모든 면에서 우월했던 거대 통일 왕조 상나라의 문명을 대체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주왕, 달기 등 폭정의 원흉들만 제거하고 모든 걸 그대로 보존했으며 상나라의 거의 모든 걸 그대로 유지했다. 상 왕실의 일부 왕손들은 씨족의 옛 고향인 한반도로 돌아가고 주 왕실의 허용으로 미자계의 숙부 기자는 고조선의 왕이 되고 상 왕실에서 옛 고향으로 여기며 중요시하던 한반도 신산의 제례를 맡긴 건 상 왕실의 계속성을 인정하고 제례를 통해 천신과 화합을 도모하는 권한의 영속을 유지하게 한 것이며 이는 단지 주 왕실과의 혈연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왕실 간에 큰 정신적 사상적 공감대를 알 수 있고 주나라는 상나라를 모든 면에서 그대로 계승한다. 후에 미자계의 후손인 공자도 이 점을 높이사 주나라의 지위를 인정하고 주공을 호평했다. 주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주공단이 섭정했는데 무경은 이 틈을 노려 상나라 부활을 시도했고 삼감들도 주공단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이해 관계가 맞아 이들은 함께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무경과 관숙은 처형되었으며 채숙과 곽숙은 추방되었다. 난의 평정 후 미자계는 무경이 다스리던 상나라의 옛 도읍의 왕으로 봉해졌는데 이 나라가 송나라이다.
송나라 초대 왕 미자계의 아들은[12] 주나라의 왕실에 명목상은 관리로 데려갔으나 사실상 인질로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에는 왕위를 이을 세자의 부재로 인해 곤란을 겪었다. 그래서 상나라 왕실의 예법대로 동생 미중연이 제후직을 이어받아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 이후의 송나라 제후는 미중연의 후손들이 세습하게 된다.
2. 3. 송나라 통치와 후계
미자는 제을의 아들이자 제신의 이복 형이다. 기자는 미자의 숙부이다.[8] 미자는 현명하고 올바른 사람이었으나, 주왕의 생모가 정실이 되면서 권력에서 밀려나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게 되었다.미자는 처음에 미(微)나라에 봉해졌는데, 정치를 현명하게 하여 백성들의 인정을 받았다.[9] 상나라가 혼란하여 장차 망하게 될 때, 미자는 여러 번 제신에게 간언하였으나 제신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자와 비간과 상의하였는데, 기자가 "정성을 다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으나 죽어도 끝내 그렇게 될 수 없으니 떠나감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미자는 제신에게서 멀리 떠나 미나라로 돌아갔다.
주왕이 주지육림의 방탕한 생활과 폭정을 계속하자, 미자는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매번 무시나 위협을 당했다. 기자는 주왕에게 간언하다가 투옥되었고, 비간은 처형되었다. 이에 미자는 주왕에게 천명이 떠난 것을 알고 예악(禮樂)을 관장하는 관리들과 제사 도구 등을 가지고 왕실 가족들과 함께 본인의 봉지(封地)로 피했다.
목야 전투에서 주나라 군이 상나라에 승리하고, 주왕은 스스로 궁궐에서 분신 자살했다. 미자는 무왕에게 상나라의 사직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무왕은 주왕의 아들 무경이 은나라를 계속 이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상나라가 다시 부활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형제인 관숙 선, 채숙 도, 곽숙 처를 감시자로 보냈다. 이들을 삼감(三監)이라고 부른다.
주왕이 죽은 뒤에 상나라는 하늘에 드리는 제례 의식이 근본이라 제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무왕에게 요청했으며 이러한 의지는 송나라의 초대왕에 봉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10] 천제께 제사를 올리는 특권은 천자에게만 허락되었지만 상 왕실은 성인의 혈통이라는 특별함이 주는 정신적, 문화적 공감대와 후광이 커서 천자의 제례를 특별히 허락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세간에 팽배했기 때문이다.
주나라는 상나라의 종속국이었고 주왕의 민심이 기울어지자 신하가 왕을 쳐서 영토를 빼앗았을 뿐 모든 국가적 문물과 법제 등이 뒤쳐진 속국에 불과했다.[11] 주나라가 나라의 기틀을 새로 짜기엔 정신적, 문화적으로도 상나라의 속국이었으며 상나라의 법제와 문물을 새 왕조라는 명분만으로 부정하기엔 모든 면에서 주나라보다 우월했기에 주나라는 상나라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게 된다. 상 왕실 구성원 중 일부는 왕실의 옛 고향인 동북쪽 한반도 씨족 문명의 발원지로 돌아갔으며 미자계는 상나라 왕위 계승의 적통을 지닌 장자(長子)로 하늘에 상의 제례를 이어가고 주 왕실과는 혈연적으로도 이어져 있기 때문에 송나라 초대왕에 봉해진다.
주공이 성왕이 어리자 섭정했는데, 무경은 이 틈을 노려 상나라 부활을 시도했고 삼감들도 주공단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이해 관계가 맞아 이들은 함께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무경과 관숙은 처형되었으며 채숙과 곽숙은 추방되었다. 난의 평정 후 미자는 무경이 다스리던 상나라의 옛 도읍의 왕으로 봉해졌는데 이 나라가 송이다.
송나라 초대왕 미자의 아들은[12] 주나라 왕실에 명목상 관리로 데려갔으나 사실상 인질로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에는 왕위를 이을 세자가 없어서 곤란을 겪었다. 그래서 상나라 왕실의 예법대로 동생 송미중연이 제후직을 이어받아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 이후의 송나라 제후는 미중연의 후손들이 세습하게 된다.
3. 이름과 칭호
미자의 이름은 '''계'''(啓)이며, 상 왕조의 '''자'''(子)'''씨'''를 이은 '''송'''(宋)씨족 출신이다. 미자는 그의 시호로, '미'(微)는 "겸손"을, '자'(子)는 "스승"(학식이 있는 사람) 또는 "자작"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의 칭호는 "송나라의 겸손한 자작" 또는 "송나라의 겸손한 스승"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의 남동생은 시호의 '미'(微) 부분을 이어받아 宋微仲|쑹웨이중중국어이 되었는데, '중'(仲)은 "둘째 아들"을 의미한다.[1] 제신 (주왕)의 맏형이었지만, 서장자였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2] 『여씨춘추』에 따르면, 생모가 아직 제을의 측실일 때 미자계와 중연을 낳았고, 후에 정실로 승격하여 주왕을 낳았다고 한다.[2]
4. 평가 및 영향
미자계는 현명하고 올바른 사람이었으나, 후궁이었던 주왕의 생모가 정실이 되면서 권력에서 밀려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게 되었다.[8] 상나라가 혼란하여 장차 망하게 되자, 미자는 여러 번 제신에게 간언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9] 기자와 비간과 모의하여 제신에게서 멀리 떠나 미나라로 돌아갔다.
주왕이 주지육림의 방탕한 생활과 폭정을 계속하자, 미자계는 주왕에게 천명이 떠난 것을 알고 예악(禮樂)을 관장하는 관리들과 제사 도구 등을 가지고 왕실 가족들과 함께 본인의 봉지(封地)로 피했다.[10]
주 군이 목야 대전에서 상나라에 승리하고 주왕이 자살한 뒤, 미자계는 무왕에게 상나라의 사직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주왕의 아들 무경이 은나라를 이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상나라가 다시 부활할 것을 우려하여 무왕은 자신의 형제들을 감시자로 보냈다.
주왕이 죽은 뒤 상나라의 제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무왕에게 요청한 결과, 송나라의 초대 왕에 봉해졌다. 상나라 왕실은 성인의 혈통이라는 특별함으로 인해 천자의 제례를 특별히 허락하는 인식이 있었고, 송나라는 제후국 중에서도 상석에서 주관하는 주장국으로 예우받았다.[10] 제정일치 국가였던 상나라에서 제례는 국가의 근본이자 정체성이었으며, 미자계는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10]
주는 상나라의 속국이었으나, 주왕의 민심이 기울자 상나라를 쳐서 영토를 빼앗았다.[11] 그러나 모든 면에서 상나라에 뒤떨어졌기 때문에 상나라의 법제와 문물을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11] 미자계는 상나라 왕위 계승의 적통을 지닌 장자(長子)로서 상나라의 제례를 이어가고 주 왕실과 혈연적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 초대 왕에 봉해졌다.
송나라는 옛 상나라 천자의 후예 국가로 예우받았으며, 제례의 특권과 함께 송나라 왕으로 상나라를 보존하게 되었다. 주무왕은 상나라의 문명을 대체할 수 없었기에 주왕 등 폭정의 원흉들만 제거하고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했다. 상 왕실 일부는 한반도로 돌아갔고, 기자는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 이는 상 왕실의 연속성을 인정하고 제례를 통해 천신과 화합을 도모하는 권한을 유지하게 한 것이다. 훗날 미자계의 후손인 공자도 이 점을 높이 사 주의 지위를 인정하고 주공을 호평했다.
무경이 삼감의 난을 일으켰으나 평정된 후, 미자계는 상나라의 옛 도읍의 왕으로 봉해졌다. 송나라 초대 왕 미자계의 아들은[12] 주 왕실에 인질로 있었기 때문에, 상나라 왕실 예법대로 동생 미중연(宋微仲衍)이 제후직을 이어받아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 이후 송나라 제후는 미중연의 후손들이 세습하게 된다.
5. 한국과의 관계
제을의 아들이자 제신의 서형이며, 기자는 숙부이다. 미(微)는 영지의 이름으로, 아버지는 상나라 왕 제을이며 황제(黃帝)의 후손이자 제곡과 요의 직계 후손이다. 상나라 마지막 왕 주왕의 이복형이고 고조선을 통치했던 기자는 숙부이다. 미자계는 현명하고 올바른 사람이었으나, 후궁이었던 주왕의 생모가 정실이 되면서 권력에서 밀려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게 되었다.[8]
주왕이 주지육림의 방탕한 생활과 폭정을 계속하자 왕실의 맏형인 미자계는 실정을 멈추라고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매번 무시나 위협을 당했다. 주왕의 숙부 기자는 주왕에게 간언하다가 주왕의 진노를 사서 겨우 목숨을 건진 뒤 화를 피하려 광인 행세를 했으나 결국 투옥되었고, 충신 비간은 간언하다가 주왕에게 처형되었다. 이에 미자계는 주왕에게 천명이 떠난 것을 알고 예악(禮樂)을 관장하는 관리들과 제사 도구 등을 가지고 왕실 가족들과 함께 본인의 봉지(封地)로 피했다.[9]
주나라군은 목야 대전에서 상나라에 승리하고, 주왕은 스스로 궁궐에서 분신 자살했다. 미자계는 무왕에게 상나라의 사직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주왕의 아들 무경이 은나라를 계속 이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상나라가 다시 부활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형제인 관숙(管叔) 선, 채숙(蔡叔) 도, 곽숙(霍叔) 처를 감시자로 보냈다. 이들을 3인의 감시자라는 하여 삼감(三監)이라고 부른다.[10]
주왕이 죽은 뒤에 상나라는 하늘에 드리는 제례 의식이 근본이라 제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무왕에게 요청했으며 이러한 의지는 송나라의 초대왕에 봉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주 왕실과는 혈연관계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주왕의 폭정으로 민심을 잃어 일시적으로 영토를 빼앗겨 귀순했어도 당시 인식은 상나라 왕실과 천자의 후예들을 감히 함부로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천제께 제사를 올리는 특권은 천자에게만 허락되는 게 통례지만 상 왕실은 성인의 혈통이라는 특별함이 주는 정신적, 문화적 공감대와 후광이 커서 천자의 제례를 특별히 허락하는 게 당연할 만큼의 인식이 세간에 팽배했기 때문이다.[10]
상나라의 도읍에서 송나라로 계속 이어가게 된 제례 의식은 제정일치 국가였던 상나라의 근본이자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제사라는 의식은 천신께 단순히 풍요를 기원하는 것 외에도 국가에 재앙이 있을 때는 그 재앙에 대해 왕이 직접 천신께 제사로 국가적 문제에 제사를 지내고 점을 쳐서 중대사를 결정했는데 제정일치 국가였던 상나라에서 제례를 내팽개치고 주색잡기에만 빠져서 나라를 망치는 주왕 같은 폭군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으며 왕실의 어른들이 고해도 듣질 않고 폭정을 계속하자 맏형인 미자계가 나서서 국가 종묘사직의 근본을 본인의 영토로 옮겨와 정상적으로 제례를 이어가 제정일치국가의 영속성을 지키고 더 이상의 죄악과 화를 피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10]
주나라는 천자국인 상나라의 종속국이었고 주왕의 민심이 기울어지자 신하가 왕을 쳐서 영토를 빼앗았을 뿐 모든 국가적 문물과 법제 등이 뒤처진 속국에 불과했다.[11] 상 왕실 구성원 중 일부는 왕실의 옛 고향인 동북쪽 한반도 씨족 문명의 발원지로 돌아갔으며 미자계는 상나라 왕위 계승의 적통을 지닌 장자(長子)로 하늘에 상의 제례를 이어가고 주 왕실과는 혈연적으로도 이어져 있기 때문에 송나라 초대왕에 봉해지게 된다.
주무왕은 독자적인 통치철학으로 혁명을 하려는 게 아니었고 모든 면에서 우월했던 거대 통일왕조 상나라의 문명을 대체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주왕, 달기 등 폭정의 원흉들만 제거하고 모든 걸 그대로 보존했으며 상나라의 거의 모든 걸 그대로 유지했다. 상 왕실의 일부 왕손들은 씨족의 옛 고향인 한반도로 돌아가고 주 왕실의 허용으로 미자계의 숙부 기자는 고조선의 왕이 되고 상 왕실에서 옛 고향으로 여기며 중요시하던 한반도 신산의 제례를 맡긴 건 상 왕실의 계속성을 인정하고 제례를 통해 천신과 화합을 도모하는 권한의 영속을 유지하게 한 것이며 이는 단지 주 왕실과의 혈연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왕실 간에 큰 정신적, 사상적 공감대를 알 수 있고 주나라는 상나라를 모든 면에서 그대로 계승한다. 후에 미자계의 후손인 공자도 이 점을 높이 사 주나라의 지위를 인정하고 주공을 호평했다. 주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주공이 섭정했는데 무경은 이 틈을 노려 상나라 부활을 시도했고 삼감들도 주공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이해 관계가 맞아 이들은 함께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무경과 관숙은 처형되었으며 채숙과 곽숙은 추방되었다. 난의 평정 후 미자계는 무경이 다스리던 상나라의 옛 도읍의 왕으로 봉해졌는데 이 나라가 송(宋)이다.
송나라 초대왕 미자계의 아들은[12] 주나라의 왕실에 명목상은 관리로 데려갔으나 사실상 인질로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에는 왕위를 이을 세자의 부재로 인해 곤란을 겪었다. 그래서 상나라 왕실의 예법대로 동생 미중연(宋微仲衍)이 제후직을 이어받아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 이후의 송나라 제후는 미중연의 후손들이 세습하게 된다.
참조
[1]
문서
Lucheng, Changzhi|Lucheng
[2]
서적
The Analects of Dasan: A Korean Syncretic Reading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6
[3]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http://www.guoxue123[...]
[4]
웹사이트
Weizi 微子
http://www.chinaknow[...]
[5]
서적
Confucius: A Guide for the Perplexed
https://books.google[...]
A&C Black
2012
[6]
문서
Analects
[7]
문서
공자
[8]
문서
산시성 (산서성)|산시성
[9]
문서
허난성
[10]
문서
서주 무왕
[11]
문서
주공 단|주공
[12]
문서
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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