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욱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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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욱은 당나라 말기에 호남 지역을 장악하고 흠화군 절도사를 지낸 인물이다. 강서도 장수 출신으로 882년 호남관찰사 이유를 축출하고 담주를 점령하여 유후를 자칭했다. 당 희종으로부터 호남 지배를 승인받고 절도사 승격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강서의 종전과 대립하게 되자 조정은 민욱을 진남군 절도사로 임명하려 했지만, 민욱은 이를 거부했다. 883년 호남관찰사가 절도사로 승격되면서 흠화군 절도사가 되었고, 886년 부하 장수였던 황호에게 배신당하여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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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욱 (당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민욱 |
원어 이름 | 閔勗 |
출생일 | 불명 |
출생지 | 중국 당나라 |
국가 | 당나라 |
사망일 | 886년 |
사망지 | 담주(潭州, 현 후난성 창사 시) |
사망 원인 | 암살 |
국적 | 중국 당나라 |
민족 | 한족 |
경력 | |
경력 | 강서도 장군(江西道將軍, 881년? ~ 882년) |
직업 및 활동 | |
직업 | 당나라 군벌, 흠화군 절도사 |
직책 | 흠화군 절도사 |
활동 기간 | 881년 ~ 889년 |
2. 생애
민욱의 생애는 당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호남도(湖南道, 현재의 후난성 일대)를 장악하고 절도사가 되었으나, 결국 부하의 배신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원래 강서도(江西, 현재의 장시성 난창시 일대) 출신의 장수였으나,[6] 882년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 이유(李裕)를 축출하고 호남도를 장악하며 세력을 키웠다.[6] 이후 당 희종으로부터 관찰사로 임명받았고,[7][3] 여러 과정을 거쳐 883년에는 흠화군(欽化軍) 절도사로 승격되었다.[7][3][5] 그러나 886년 부하였던 주악의 공격과, 그 과정에서 끌어들인 황호(黃皓|황호중국어)의 배신으로 살해당하며 그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9][4]
2. 1. 출신 배경과 호남 장악
민욱의 출신 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당나라의 정사인 《구당서》와 《신당서》에도 그에 관한 열전이 없을 정도이다.[6] 다만 그가 원래 강서도(江西, 현재의 장시성 난창시 일대) 출신의 장수였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6]881년경, 민욱이 지휘하는 군대는 인근 호남도(湖南道, 현재의 후난성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다.[6] 882년 초, 맡은 임무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민욱은 군대를 이끌고 원래 소속인 강서도로 돌아가려 했다.[6] 돌아가는 길에 호남도의 중심지인 담주(潭州, 현재의 후난성 창사 시)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당시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였던 이유(李裕)를 몰아내고 호남도를 차지하였다.[6] 이후 스스로 유후(留後)를 칭하며 호남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했다.[6]
2. 2. 호남 통치와 절도사 승진
882년 5월, 당 희종 치세의 조정은 민욱의 호남 지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때 그는 정식으로 임명된 관찰사였다.[7][3] 관찰사에 취임한 민욱은 자신의 지위를 더 강력한 권한을 지닌 절도사로 승격시켜 줄 것을 조정에 여러 차례 요구하였다. 하지만 조정은 민욱의 요구를 들어줄 경우, 다른 도(道)의 관찰사들까지 절도사 승격을 요구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7][3]이 무렵, 강서(江西) 관하의 무주자사(撫州刺史, 현 장시성 푸저우시) 종전이 강서관찰사 高茂卿|고무경zho을 축출하고 강서도의 중심지인 홍주(洪州, 현 장시성 난창 시)를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종전은 과거 농민 반란군 수령 왕선지가 강서를 침공했을 때 관군에 협력한 공으로 조정으로부터 무주자사에 임명되었던 인물이다.[7][3]
조정은 민욱과 종전이 서로 대립하여 충돌하기를 기대했다. 민욱이 본래 강서아장(江西牙將) 출신이었던 점을 이용하여, 강서도를 진남군(鎭南軍)으로 승격시키고 민욱을 진남군 절도사로 임명하였다. 그에게 강서로 돌아가 종전을 축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두 세력이 서로 싸워 힘이 약화되기를 바라는 계책이었다.[7][3] 그러나 민욱은 이러한 조정의 의도를 파악하고 진남군 절도사 부임을 사양했으며, 군대를 움직이는 것조차 거부하였다.[7][3]
결국 883년 8월, 당 희종은 호남관찰사를 절도사로 승격시키고 흠화군(欽化軍)이라는 군호(軍號)를 하사하였다. 이로써 민욱은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절도사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7][3] 이와 함께 조정으로부터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라는 명예 재상 직함을 추가로 받았다.[5] 민욱은 절도사가 된 후, 강서 장수 시절부터 자신을 섬겨왔던 부하 장수 등처눌을 소주자사(邵州刺史, 현 후난성 사오양 시)로 임명하였다.[5]
2. 3. 배신과 최후
886년 7월[8](혹은 여름[4]), 표면상 민욱의 부하였던[8] 형주(衡州, 현 후난성 헝양 시) 자사 주악이 군대를 이끌고 담주를 공격해 왔다. 당시 채주(蔡州, 현 허난성 주마뎬 시)에서 황제를 자칭했던 군벌 진종권의 부하 장수 중 한 명인 황호(黃皓|황호중국어)가 그 지역에 있었다. 사서에 이유는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으나, 민욱은 주악의 공격을 막기 위해 황호를 담주성으로 초청하여 함께 성을 지키기로 하였다.[9][4]그러나 황호는 담주성에 들어오자마자 민욱을 배신하여 살해하고 담주를 점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주악은 즉시 군대를 움직여 담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주악은 황호를 사로잡아 처형하고, 흠화군 번진 지역을 장악하였다. 이후 흠화군은 무안군(武安軍|우안쥔중국어)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주악은 초대 무안군 절도사가 되었다.[9][4]
참조
[1]
서적
New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신당서
https://zh.wikisourc[...]
[6]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7]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8]
문서
당시 형주(衡州)는 그 편제상 흠화군 절도사의 관하에 있었으나, 당시의 형주자사 주악 (중국)|주악은 민욱이 담주를 점거한 882년에 자력으로 형주를 점거하고 자사가 되어 있었다. 또, 그는 민욱에 의해 자사로 임명된 것도 아니었고 이미 그 이전부터 할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주는 사실상 반독립 상태나 다름없었다.
[9]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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