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시 내친왕 (고우다 천황의 2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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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시 내친왕은 고우다 천황의 2황녀로, 1319년 내친왕 선하를 받은 후 고니조 천황의 적남이자 조카인 쿠니요시 친왕의 비가 되었다. 쿠니요시 친왕 사후에는 출가하여 그의 아들 야스히토 친왕을 양육했다. 1331년, 고다이고 천황이 폐위된 후 야스히토 친왕이 동궁으로 책봉되자, 바이시는 준삼궁 선지를 받고 여원호를 받았으나, 고다이고 천황 복귀 후 부정되어 내친왕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북조 고묘 천황에 의해 원호가 복원되었으며,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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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시 내친왕 (고우다 천황의 2황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바이시 내친왕 |
한자 표기 | 禖子内親王 |
로마자 표기 | Baishi Naishinnō |
존칭 | 스메이몬인 (崇明門院) |
신분 | 내친왕 |
가계 | |
아버지 | 고우다 천황 |
어머니 | 린시 여왕 |
배우자 | 쿠니요시 친왕 |
2. 약력
1319년(겐오 원년) 고우다 천황의 황녀로 태어나, 내친왕 선하를 받고 고니조 천황의 아들이자 조카인 구니요시 친왕의 비가 되었다. 1323년 (겐코 3년) 친왕비의 순산 기도가 이루어졌으며, 이 무렵 황태자비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과 구니요시 친왕 사이의 불화가 깊어지던 중, 1326년(가랴쿠 원년) 구니요시 친왕이 급사하자 출가하여 야스히토 친왕 양육에 전념했다.
1331년 겐코의 난으로 고다이고 천황이 폐위되고 고곤 천황이 즉위하자, 야스히토 친왕이 동궁으로 세워졌고, 바이시는 동궁의 어머니로서 준삼궁에 책봉되고 여원호 선하를 받았다. 그러나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이 복귀하면서 바이시는 내친왕으로 강등되었다. 겐무 정권 붕괴 후 북조 고묘 천황에 의해 원호가 복원되었으나,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2]
2. 1. 황태자비 시절
1319년(겐오 원년) 10월 28일, 내친왕 선하를 받은 뒤, 고니조 천황의 맏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인 구니요시 친왕과 혼인하여 황태자비가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바이시 내친왕은 자신의 숙모이자 구니요시 친왕의 양어머니였던 즈이시 여왕(에이카몬인)의 양녀가 되었다고 한다.[1] 1323년(겐코 3년)에 친왕비의 순산 기도가 행해졌는데, 이 무렵에는 바이시 내친왕이 황태자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황태자의 숙부인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계통이 다이카쿠지통의 서류로 자리매김한 것에 불만을 품고, 다이카쿠지통 적류의 지위를 주장하며 양위를 요구하는 구니요시 친왕과의 불화를 심화시켰다. 그러던 중, 1326년(가랴쿠 원년)에 구니요시 친왕이 급사하자, 바이시 내친왕은 신속하게 출가하여 구니요시 친왕의 남겨진 아이인 야스히토 친왕(생모는 곤다이나곤 카잔인 사다노리의 딸) 양육에 전념했다.2. 2. 남편의 죽음과 출가
가랴쿠 원년 (1326년) 남편 구니요시 친왕이 급사하자, 바이시 내친왕은 곧바로 출가하여 구니요시 친왕의 아들 야스히토 친왕(가잔인 사다노리의 딸이 생모) 양육에 전념했다.[1]2. 3. 겐코의 난과 준삼궁 책봉
1331년(겐코의 난) 고다이고 천황이 막부 타도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폐위되자, 지묘인통의 고곤 천황이 즉위했다. 이때 막부는 겐코의 변에 관여하지 않은 다이카쿠지통 적류인 쿠니요시 친왕의 계통과 지묘인통을 통한 양통질립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야스히토 친왕이 동궁으로 책봉되었다.바이시 내친왕은 동궁의 어머니에 준하는 지위로, 1331년 10월 25일 야스히토 친왕의 태자 책봉과 동시에 준삼궁 선지를 받았다. 곧바로 여원호 선하를 받아 센시몬인(宣示門院)이라는 원호를 받았다.[2]
2. 4. 겐무 정권과 원호 박탈
1333년 (겐코 3년)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고다이고 천황이 복귀하면서 겐무 정권이 시작되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폐위, 고곤 천황 즉위, 야스히토 친왕 책봉, 바이시의 준후 책봉 및 원호 수여를 모두 부정하였다. 이로 인해 겐코 3년 (1333년) 5월 17일, 바이시는 내친왕으로 강등되었다.[2]2. 5. 남북조 시대와 원호 회복
겐무 정권이 붕괴하고, 고다이고 천황이 요시노로 옮겨 남조를 세우면서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북조의 고묘 천황은 바이시의 원호를 복원시켰다.[2] 이후 바이시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참조
[1]
서적
永嘉門院
朝日新聞社
1994
[2]
서적
日本の歴史11 太平記の時代
講談社学術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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