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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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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동완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목사, 언론인이다.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배재학당 대학부에 재학 중 개신교에 입문했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활동했으며, 이로 인해 투옥되었다. 출소 후 신간회 간사, 《기독신보》 주필, 《신생명》 주간 등으로 언론 활동을 펼쳤고, 재만동포옹호동맹을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하와이에서 목사로 12년간 재직하며 《한인기독교보》를 창간하고 한글학교를 운영했다. 1941년 사망 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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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
기본 정보
출생1902년 3월 7일
사망1963년 10월 25일 (61세)
본관함양(咸陽)
직업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
배우자김정혜
자녀4남 2녀
학력
학력경성고등상업학교 졸업
경력
경력조선직물주식회사 사장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민주당 중앙상무위원
참의원
주요 이력
1954년제3대 민의원 당선 (종로구 갑)
1960년제5대 참의원 당선 (전국구)
가족 관계
배우자김정혜
자녀슬하 4남 2녀
친척박두병 (사촌)

2. 생애

박동완은 경기도 양평포천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근대 교육을 받았다. 배재학당 재학 중 개신교에 입문하여 정동제일교회 전도사, 기독교신보사 서기, 《기독신보》 편집위원, 조선중앙YMCA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2년간 복역했다. 출소 후에는 신간회, 흥업구락부 등에서 활동하며 언론 및 정치 분야에 참여했고, 재만동포옹호동맹을 결성하여 만주 동포 보호에도 힘썼다. 1928년부터 하와이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41년에 사망했다. 3·1 운동 이후 일본과 같은 시간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시계를 30분 앞당겨 사용할 정도로 반일 의식이 강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박동완은 경기도 양평 양서면 도곡리[3] 향리의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에서 아버지 박형순 선생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포천 신읍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그의 부친 박형순은 통훈감목관을 역임하였다. 다섯 살 때까지 한문을 배우다가 소학교에 입학하였고, 한성중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하였다. 1911년 학교가 폐쇄되자 배재학당 대학부에 전입했다. 배재학당 재학 중 개신교에 입문했다. 정동제일교회의 감리교 전도사로 일하면서 감리교와 장로교가 함께 설립한 기독교신보사 서기 및 《기독신보》(1915년 12월 7일 창간) 편집위원으로 근무했다. 그 무렵 조선중앙YMCA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2. 2. 3·1 운동 참여와 투옥

1919년 2월 하순 박희도의 권유로 3·1 운동에 참여했으며, 2월 27일에 열린 기독교계 대표자회의에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3] 정동제일교회의 목사 이필주와 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당시 35세로, 박희도, 이갑성, 김창준과 함께 청년 대표격이었다.

2. 3. 출소 후 활동: 언론, 정치, 그리고 만주 동포 보호

박동완은 출소 후 신간회 간사, 《기독신보》 주필, 《신생명》 주간을 맡아 언론 활동을 했다. 1925년 4월 《신생명》이 폐간되자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했다. 1927년 1월 이상재, 안재홍과 함께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본부 상임 간사를 맡았다.[3]

1927년 12월 9일 중국 동삼성(만주)에 거주하는 한인이 중국 관헌으로부터 귀화를 강요받고 박해를 받자 재만동포옹호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3] 1928년 1월 봉천성과 길림성 일대를 돌며 재만 동포의 상황을 살폈다.[3]

1928년 중반 하와이로 파견되어 오아후섬에서 12년간 목사로 재직하면서 《한인기독교보》를 창간하는 등 목회 활동을 하면서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확장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다.[3]

2. 4. 하와이 목회 활동과 사망

1928년 중반 하와이주로 파견되어 오아후섬에서 12년간 목사로 재직하면서 《한인기독교보》를 창간하는 등 목회 활동을 했다.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확장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도 가르쳤다.[2]

1941년 초에 큰 병에 걸려 2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57세였다.[3]

3. 사후

사망한 다음 달에 시신이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함태영 목사의 집례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1]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1] 1966년 현재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하였다.[1]

4. 일화

3·1 운동 이후 일본과 같은 시간을 쓰지 않기 위해 시계를 30분씩 늦춰놓고 사용할 정도로 반일 의식이 강했다는 일화가 있다.[2]

참조

[1] 웹사이트 박동완(朴東完) http://encykorea.aks[...] 2022-08-24
[2] 뉴스 [이달의 독립운동가 >>> 박동완 선생] 기독교계 3・1운동 민족대표 나라사랑 2009-01-29
[3] 뉴스인용 [이달의 독립운동가 >>> 박동완 선생] 기독교계 3·1운동 민족대표 나라사랑 2009-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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