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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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순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23년에 태어나 1586년에 사망했다. 1553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며, 명종 대에 사림 운동을 주도하며 훈구 세력과 대립했다. 1565년에는 을사사화의 원흉인 윤원형을 탄핵했고, 이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으며, 만년에 서인의 영수로서 탄핵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저서로는 『사암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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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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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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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박순 |
원어 이름 | 朴淳 |
출생일 | 1523년 음력 2월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포천 |
사망일 | 1589년 |
국적 | 조선 |
본관 | 충주 |
별명 | 사암, 청허자 |
학력 | 1553년(명종8년) 계축(癸丑) 친시(親試) 갑과(甲科) 장원급제 |
직업 | 문관, 시인, 학자, 정치인, 외교관 |
종교 | 성리학 |
부모 | 父: 대사헌 박우(朴祐) 母: 해남(海南) 김씨(金氏) |
배우자 | 장흥 고씨 |
상훈 |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 영의정 |
자녀 | 1남 1녀, 아들은 서자로 박응서, 적통 승계는 조카 박응이 이음 |
친척 | 中父: 이조판서 박상(朴祥) 兄: 연파처사 박개(朴漑) |
2. 유소년기
1523년(중종 17년) 박순은 서울에서 아버지 박우와 어머니 당악 김씨(棠岳 金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우는 당시 홍문관 교리(校理-정5품)였다. 박순은 박우가 45세에 얻은 늦둥이였는데, 어린 나이에도 문리를 터득하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8세에 다니던 서당 훈장이 '내가 감히 너의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2] 동국삼박[3](東國三朴)의 하나였던 아버지 박육봉 역시 차남이 지은 글을 보고 '이 늙은이가 무릎을 꿇어야 하겠다'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2]
1540년(중종 35년) 18세에 소과에 응시하여 진사 3등(三等) 51위로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다. 서경덕의 문하생인 홍인우, 허엽, 남언경 등과 함께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547년 25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형 박개(朴漑)와 함께 3년간 여묘살이[4]를 했다. 시묘를 극진히 하여 건강을 해쳐 소상[5] 후에도 죽을 먹어야 했다.
1553년(명종 8년) 31세의 나이로 대과에 응시했다. 해당 시험은 명종이 특히 갑과를 직접 주관했는데, 그의 답안을 보고 감탄한 왕이 직접 몇 가지 질문을 하자 뛰어난 답을 제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했다. 갑을병 세 등급의 과거에서 갑과 1등이었던 그는 이조좌랑(吏曹佐郞, 6품), 홍문관 수찬(修撰, 정6품), 교리(校理, 정5품) 등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고, 당시 젊은 신진 관료들에게 주어졌던 안식년에 궁궐 도서관인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었다.[7]
1562년(명종 17년), 박순은 부친 박우의 고향인 광주 송정리에서 1년간 책을 읽으며 지내다 명종의 부름을 받고 한산 군수(정4품 외직)에 임명되었다.[13] 그는 이 지역에서 사림을 육성하기 위해 공무가 끝난 후에도 정사(亭舍)에서 그날그날 학습 계획을 세워 강론하고, 이웃 고을 선비들과 글을 읽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3. 청년기
1549년 시조묘(始祖廟)가 있는 대전에 '사암'이란 서실(書室)을 짓고 글을 읽었는데, 이때부터 주로 사암(思菴)이라는 호를 썼다. 근처 유생들과 벼슬아치들이 그를 사암선생(思庵先生)이라 불렀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등을 찾아다니며 학문의 폭을 넓혔다.
특히 성균관 학사로서 서울에 있을 때, 경상우도 창녕에 살던 남명에게 자신의 견해나 질문을 담은 서간을 자주 주고받았으며, 남명이 상경할 때마다 곁에 다니며 의문점을 물었다. 조식이 귀향할 때에는 항상 한강 나루까지 배웅했다고 한다. 조식 사후 그를 애도하는 애시(哀詩) 1수가 남아있다[6].
4. 출사
당시 일화가 남아있는데, 어느 날 명종이 호당의 학사들을 불러 경전의 뜻을 강론하라 명령하고 글을 짓게 한 후 주연을 베풀었고, 술병을 직접 들고 술을 가득히 따라 권하고는 금련촉의 고사를 본떠 학사들에게 왕실 전용의 촛불을 들려 돌려보냈다.[7] 이튿날 우의정 상진(商震)이 학사들을 데리고 명종 앞에서 감사 인사를 했는데 매우 성대했다고 한다.
1556년(명종 11년) 의정부 검상(檢詳, 정5품)[8], 사인(舍人, 정4품)[9]으로 승진한 후 어사가 되어 충청도를 돌았고, 홍문관 응교(應敎, 정4품)[10]로 승진하여 부마(왕의 사위)가 밀수한 물목을 압수하기도 하는 등, 권력의 높이에 굴하지 않고 잘못된 점을 시정하려 노력했다. 1540년에 과거 진사에 급제하여 서경덕에게 학문을 배웠고, 1553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제수받았다.
5. 사림 운동
1563년(명종 18년) 성균관 사성(정3품)[14]으로 임명되어 중앙 관직에 복귀한 박순은 시강원 보덕(종3품), 사헌부 집의(종3품), 홍문관 직제학(정3품 당하관)을 역임하며 국왕에게 상소문(차자)을 올려 시사를 논하였다. 이후 승정원 동부승지(정3품 당상관)로 승진하였다.
왕의 비서실장 역할을 했던 박순은 이조참의(정3품 당상관)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정3품)으로 옮겼다. 대사간으로 재직하면서 요승 보우의 죄를 논하여 처벌할 것을 요청하고, 윤원형을 탄핵하여 축출하였다.
5. 1. 을사사화와 훈구 세력과의 갈등
1561년(명종 16년) 왕명으로 홍문관에서 임백령의 시호를 정해 올리라는 명이 떨어졌다. 임백령은 1546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다 도중 사망했는데, 그는 생전에 윤원형, 정순붕(鄭順朋), 허자(許磁), 이기 등과 함께 명종을 추대하여 공을 세우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사림 선비들을 죽였다. 그들은 명종 추대에 반대하고 윤원형 등을 탄핵했던 문충공 송인수 등은 물론이고 신진 사림들까지 누명을 씌워 숙청하고 자신들의 공훈을 멋대로 했다. 대비의 친오빠였던 윤원형이 영의정이었고, 명종을 추대했던 소위 소윤(少尹) 일파인 훈구공신들이 요직에 포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죽은 임백령에게 큰 명예가 주어질 것은 누가 봐도 뻔했다.
이 때문에 홍문관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시호는 임금이 내리는 이름으로 신하의 공을 따져 붙이기 때문에 명종 즉위에 공이 있던 임백령에게 '충(忠)'자가 내려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박순이 사림에게 누명을 씌웠던 임백령의 잘못을 지적하여 이를 반대하고 시호를 '소이(昭夷)'[11]로 폄하시켜 관철시켰다. 보고를 받은 영의정 윤원형이 혀를 차며 “임공(林公)은 나라의 원훈(元勳)인데 시호에 충(忠) 하나를 못 넣는단 말인가?”라고 못마땅해 했다.[12]
훈구공신들이 흥분하여 박순을 국문하자 혹은 죽이자 주장했고, 지켜보는 자들마다 염려했으나 박순은 태연했다. 훈구대신들의 눈치도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즉위에 공이 있었던 임백녕이었으므로, 명종이 박순을 중죄로 다스리려고 하다가 조정과 사림들의 여론 때문에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파직시켜 축출시켰다. 송시열의 글에 따르면 박순이 너무도 아무 일 없는 듯 행동하였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한다. 사단이 난 날 어린 딸이 반갑게 마중 나오자, 박순이 딸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하기를, “자칫하면 너를 다시 못 볼 뻔했구나”고 했다 한다. 그 이튿날 파직된 박순은 아버지의 고향인 전라남도 광주로 내려갔다.
5. 2. 보우와 윤원형 탄핵
1561년(명종 16년) 왕명으로 홍문관에서 임백녕(林百齡)의 시호를 정해 올리라는 명이 떨어졌다. 임백녕은 1546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다 도중 사망했는데, 그는 생전에 윤원형, 정순붕(鄭順朋), 허자(許磁), 이기(李芑) 등과 함께 명종을 추대하여 공을 세우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사림 선비들을 죽였다.[11] 그들은 명종 추대에 반대하고 윤원형 등을 탄핵했던 문충공 송인수 등은 물론이고 신진 사림들까지 누명을 씌워 숙청하고 자신들의 공훈을 멋대로 했다. 대비의 친오빠였던 윤원형이 영의정이었고, 명종을 추대했던 소위 소윤(少尹) 일파인 훈구공신들이 요직에 포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죽은 임백녕에게 큰 명예가 주어질 것은 누가 봐도 뻔했다.
이 때문에 홍문관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시호는 임금이 내리는 이름으로 신하의 공을 따져 붙이기 때문에 명종 즉위에 공이 있던 임백녕에게 '충(忠)'자가 내려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박순이 사림에게 누명을 씌웠던 임백녕의 잘못을 지적하여 이를 반대하고 시호를 '소이(昭夷)'로 폄하시켜 관철시켰다.[11] 보고를 받은 영의정 윤원형이 혀를 차며 “임공(林公)은 나라의 원훈(元勳)인데 시호에 충 하나를 못 넣는단 말인가?”라고 못마땅해했다.[12]
훈구공신들이 흥분하여 박순을 국문하자 혹은 죽이자 주장했고, 지켜보는 자들마다 염려했으나 박순은 태연했다. 훈구대신들의 눈치도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즉위에 공이 있었던 임백녕이었으므로, 명종이 박순을 중죄로 다스리려고 하다가 조정과 사림들의 여론 때문에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파직시켜 축출시켰다. 송시열의 글에 따르면 박순이 너무도 아무 일 없는 듯 행동하였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한다. 사단이 난 날 어린 딸이 반갑게 마중 나오자, 박순이 딸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하기를, “자칫하면 너를 다시 못 볼 뻔했구나”고 했다 한다. 그 이튿날 파직된 박순은 아버지의 고향인 전남 광주로 내려갔다.
1562년(명종 17년), 부친 박우의 고향인 광주 송정리에서 1년간 독서 중 명종이 다시 그를 불러 한산(韓山) 군수(郡守)에 임명했다.[13] 그는 사림 운동의 연장선에서 그 지방의 사림 육성책으로, 공무가 끝난 후에도 정사(亭舍)로 가 그날그날 커리큘럼을 정하여 강론하고 이웃 고을 선비들과 글을 읽었다. 이것이 점점 소문이 나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1563년(명종 18년)에 성균관 사성(司成[14])으로 불려 들어가 시강원(侍講院-조선 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 보덕(輔德), 사헌부 집의(執義),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면서 차자(箚子-국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였고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승지로서 왕의 비서실장 역할을 했던 그는 그 후 이조참의(吏曹參議)에서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으로 옮겼다. 그 뒤 대사간에서 한 번 교체되었다가 다시 임명되어 요승(妖僧) 보우의 죄를 논하여 치죄할 것을 요청하고 또 윤원형을 탄핵하여 축출하였다.
6.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1553년(명종 8년) 31세의 나이로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했다. 명종이 직접 주관한 시험에서 그의 답안을 보고 감탄한 왕의 몇가지 질문에 뛰어난 답을 제시하여 갑과 1등을 하였다. 이조좌랑(6품), 홍문관 수찬(정6품), 교리(정5품) 등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고, 젊은 신진 관료들에게 주어졌던 안식년에 궁궐 도서관인 호당에서 글을 읽었다.
명종이 호당의 학사들을 불러 경전의 뜻을 강론하고 글을 짓게 한 후 주연을 베풀었고, 술병을 직접 들고 술을 가득히 따라 권하고는 왕실 전용의 촛불을 들려 돌려보낸 일화가 있다. 다음날 상진이 학사들을 데리고 명종 앞에서 감사인사를 하는 등 매우 성대했다고 한다.
1556년(명종 11년) 의정부 검상(정5품), 사인(정4품)으로 승진한 후 어사가 되어 충청도를 돌았고, 홍문관 응교(정4품)로 승진하여 부마(왕의 사위)가 밀수한 물목을 압수하기도 하는 등 권력에 굴하지 않고 잘못된 점을 시정하려 노력했다. 1565년 대사례로서 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죄를 추궁하여 을사사화의 원흉을 제거했다. 그후, 1572년 우의정을 거쳐 1579년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6. 1. 외교 활동
1572년(선조 5년) 우의정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만력제의 즉위를 축하했다.[1] 이듬해 귀국하여 양명학을 비판했다.[1]6. 2. 학문적 활동
1540년(중종 35년) 18세에 소과에 응시하여 진사 3등(三等) 51위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홍인우, 허엽, 남언경 등과 함께 성균관에서 글을 읽으며 공부하였다.[4]1549년에는 시조묘(始祖廟)가 있는 대전에 '사암'이란 서실(書室)을 짓고 글을 읽었는데, 스승 서경덕의 방법론 그대로 독자적인 학문 연구를 시작하여, 근처 유생들과 벼슬아치들이 그를 사암선생(思庵先生)이라 높여 불렀다. 이때부터 사암(思菴)을 주로 썼다. 박순은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등을 찾아다니며 배웠다.[6]
특히 성균관 학사로서 서울을 지켜야 했던 시절, 경상우도 창녕에 살던 남명에게 자기의 견해나 질문을 담은 서간을 자주 주고 받았으며, 남명이 상경할 때마다 곁에 붙어다니며 의문나는 점을 집요하게 물었다. 조식이 귀향할 때에는 항상 한강 나루까지 배웅했다. 조식의 사후 그를 애도하는 애시(哀詩) 1수가 남아있다.[6] 1540년에 과거 진사에 급제하여 서경덕에게 학문을 배웠다.
7. 저서
8.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부인 | 장흥 고씨 |
장녀 | 전주 이씨 양녕대군의 후손 이희간(李希榦, 1553 ~ ?) |
외손자 | 이광(李茪, 1571 ~ ?) |
외손자 | 이택(李澤, 1574 ~ ?) |
서자 | 박응서(朴應犀) |
비고 | 제사 및 적통은 조카 박응(朴應)이 이음 |
9. 평가
1561년(명종 16년), 홍문관에 임백녕(林百齡)의 시호를 정해 올리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임백녕은 1546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다 사망했는데, 생전에 윤원형 등과 함께 명종을 추대하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숙청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당시 윤원형이 영의정이었고, 명종 추대에 공을 세운 소위 소윤(少尹) 일파 훈구공신들이 요직에 있어 임백녕에게 큰 명예가 주어질 것은 뻔했다.
홍문관은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시호는 임금이 내리는 이름으로 신하의 공을 따져 붙이기 때문에 명종 즉위에 공이 있던 임백녕에게 '충(忠)'자가 내려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박순은 사림에게 누명을 씌웠던 임백녕의 잘못을 지적하며 반대했고, 시호를 '소이(昭夷)[11]'로 폄하시켜 관철시켰다. 영의정 윤원형은 “임공(林公)은 나라의 원훈(元勳)인데 시호에 충(忠) 하나를 못 넣는단 말인가?”라며 못마땅해 했다[12].
훈구공신들은 박순을 국문하거나 죽이자고 주장했고, 명종 역시 박순을 중죄로 다스리려 했다. 그러나 조정과 사림들의 여론 때문에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파직시켜 쫓아냈다. 송시열의 글에 따르면, 박순이 너무도 아무 일 없는 듯 행동하여 가족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1565년 대사간으로서 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죄를 추궁하여 을사사화의 원흉을 제거했다.
참조
[1]
웹사이트
思菴先生集. 詩集,文集合部 / 朴淳 [撰]
https://www.wul.wase[...]
2023-02-11
[2]
네이버
국조인물고 사암 박순편
https://terms.naver.[...]
[3]
문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인 [[소순]]과 [[소동파]] 그리고 아우 [[소철]]의 삼소(三蘇)에 빗대 호남 선비들이 일컬음. 요절한 큰 형 하촌(荷村) 박정(-禎), 둘째 눌재(訥薺) 박상(-祥), 막내 육봉(六峰) 박우(-祐) 형제를 이름
[4]
문서
여묘살이: 부모 산소 옆에 움막을 짓고 곡을 하거나 글을 읽으며 3년상을 모시는 일
[5]
문서
소상(小祥): 사람이 죽어 제사를 지낸지 1년이 되는 날. 이 날이 될때까지 제사를 모시는 사람은 죽을 먹는데, 소상이 지나면 부모상일지라도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었다.
[6]
서적
『德川師友淵源錄』, 卷4,「門人續集」, 朴淳
[7]
문서
금련촉(金蓮燭)의 고사(故事): 당(唐)의 영호도(令狐綯)가 한림 승지(翰林承旨)로서 밤에 금중(禁中)에 입대하였다가 초가 다 타자 황제가 그를 한림원으로 돌려보내면서 승여(乘輿)에다 황제가 쓰는 금련촉을 밝혀 돌아가게 했다함.
[8]
문서
검상(檢祥): 의정부(議政府) 검상조례사(檢詳條例司)의 책임자로서 녹사(錄事)를 거느리고 입법(立法)의 일을 관장. 오늘날 검사의 일을 하면서도 입법의 영역까지 관여하는 자리였다.
[9]
문서
사인(舍人): 정원은 2인이다. 하위의 검상(檢詳, 정5품)과 사록(司錄, 정8품)을 지휘하면서 실무를 총괄하였다. 그 밖에 중요 국사에 왕명을 받아 삼의정(三議政)의 의견을 수합하고 삼의정 또는 의정부당상의 뜻을 받들어 국왕에게 아뢰는 등 국왕과 의정부의 사이에서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였다.
[10]
문서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는 홍문관의 한 분장(分掌)인 공방(工房)을 관장하였으며 부제학 이하 부수찬에 이르기까지의 관원과 함께 옥당(玉堂)이라고 불리었으며 또한 지제교(知製敎)를 예겸하였다.
[11]
문서
우암 [[송시열]]은 공이 '공소(恭昭)'로 주장했다고 박순의 묘비에 썼는데 착오가 있었던 거 같다. 소이(昭夷)가 맞다.
[12]
문서
윤원형의 여동생인 대비 문정왕후가 좋지 않다고 거절하여 결국 문충(文忠)으로 다시 정해졌다
[13]
역사기록
《조선왕조실록》 명종 28권, 17년(1562년) 2월 6일 2번째기사
[14]
문서
1392년(태조 1년)에 좨주(際酒), 1401년(태종 1년)에 다시 사성(司成)으로 고쳤다. 경국대전에는 정원 2원으로 증원되었으나, 1658년(효종 9년)에 1원을 감원하고, 좨주(際酒) 1원을 새로 두었다. 문묘(文廟) 외 제례(祭禮)가 있을 때는 이를 주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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