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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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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흥주는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원군 출생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 시절 김재규의 전속부관을 거쳐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다. 1979년 10·26 사건에 김재규와 함께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재판이 종결되기 전에 처형되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진학으로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대령으로 진급하여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를 역임했다. 10·26 사건 당시 현역 군인 신분으로 연루되어 다른 관련자들보다 먼저 처형되었으며, 이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슬하에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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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박흥주
현지어 표기朴興柱
출생일1939년 11월 15일
태어난 곳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원군 평원면 장림리
사망일1980년 3월 6일
죽은 곳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본관밀양(密陽)
배우자김묘춘(金妙春)
정당무소속
자녀슬하 1남 2녀
군 복무 정보
복무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1962년 ~ 1979년
최종 계급육군 대령
직책 및 근무 정보
근무중앙정보부
지휘중앙정보부 부장 비서실 수행비서관
가족 관계
부모박천순(부), 여흥 민씨 부인(모)

2. 생애

박흥주는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고, 1944년 가족과 함께 경성부로 이주하여 1945년 광복 이후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1962년 육사 18기로 임관하여 육군 중위 시절 김재규의 전속부관이 되었으며, 이후 중앙정보부로 발령되었다. 1979년 김재규와 함께 10·26 사건을 주도하였으며, 당시 현역 군인이었으므로 다른 피고인들보다 먼저 처형되었다.[1] 재판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현역 군 장교 신분으로 기소되어 단심으로 사형이 집행된 것은 논란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학력

박흥주는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났고, 평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1944년 일가족과 함께 경성부로 이주하여 1945년 광복 이후 서울에서 성장하였다.[1]

원래 군인이 될 뜻은 없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등록금이 면제되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군인으로서 매우 유능하여 40살(1978년)에 이미 대령이었다.[1]

2. 2. 군 경력

1962년 육사 18기 육군 소위로 임관한 후 육군 중위 시절 김재규 장군의 전속부관이 되었으며, 이후 중앙정보부로 발령되었다.[1] 원래 군인으로서의 뜻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이 면제되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군인으로서 매우 유능해서 40세(1978년)에 이미 대령이었다.[1]

김재규와의 개인적 친분으로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할 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관이 되었다. 이때 박흥주는 육군 대령이었다.

연도내용
1962년육사 졸업, 소위 임관 (6사단 예하 전포대장 보직 역임)
1964년중위 진급 (1964년 8월부터 1년간 6사단장 전속부관 보직 수행)
1966년 10월 ~ 1968년월남전 파병 (9사단 제52포병대대 제3포대 전포대장)[2]
1967년대위 진급
1970년소령 진급
1973년12사단 예하 제65포병대대 대대장 (중령 진급예정자 신분)
1974년중령 진급
1978년 12월대령 진급 (1978년 4월부터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보직 수행)


2. 3. 10.26 사건

1979년 김재규와 함께 10·26 사건을 주도하였으며, 당시 현역 군인이었으므로 다른 피고인들보다 먼저 처형되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10·26 사건 당시 갑작스럽게 박정희 대통령 살해 계획을 밝히자, 박흥주 대령은 당황한 상태에서 가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된 후 신군부에 의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범행 당시 현역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1980년 3월 6일, 10·26 사건 연루자들 중 가장 먼저 총살형이 집행되었다.[1]

그의 사형 집행은 재판이 아직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사건 재판 관련 피고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현역 육군 장교 신분으로 복무 중 기소되었기 때문에 단심으로 집행되어 논란이 많았다. 사건에 대한 재판이 아직 진행 중인데도 사형을 집행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1]

2. 4. 가족 관계

김묘춘|金妙春한국어(1942년생)과 결혼하여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3. 평가 및 논란

(요약 및 참조할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박흥주' 문서의 '평가 및 논란' 섹션 내용을 빈칸으로 남겨둡니다.)

참조

[1] 문서 null null
[2] 웹인용 집중연재1 - 김재규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의 애잔한 삶과 죽음 https://www.chogabje[...] 20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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