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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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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봉암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농림부 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1956년 진보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 30%의 지지율을 얻었으나,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이듬해 사형되었다. 이후 2011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그의 삶은 이념 갈등과 정치적 박해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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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봉암
이름조봉암
한자 표기曺奉岩
로마자 표기Jo Bong-am
출생일1898년 9월 25일
출생지인천, 대한제국
사망일1959년 7월 31일
사망지서대문 형무소, 서울, 대한민국
본관창녕 조씨
죽산 (竹山)
학력
대학교동방노력자공산대학 행정학과 중퇴
주오 대학 정치학과 중퇴
정치 경력
소속 정당진보당
국회의원인천
임기: 1948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농림부 장관임기: 1948년 8월 15일 ~ 1949년 2월 22일
국회부의장임기: 1952년 7월 10일 ~ 1954년 5월 30일
기타
관련 정보
관련 단체조선공산당
진보당

2. 생애

일제강점기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중앙위원장 및 고려공산청년회 간부를 지냈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를 경유하여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과[19]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1927년에는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어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1946년 5월 박헌영과의 갈등을 계기로 사상 전향하여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협상 노선을 걸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농지개혁을 주관하며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추진했으나 지주들과 한민당 세력의 반대로 절반만 성사되었다.[19] 1948년 이후 윤치영 등과 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 대통령 선거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2011년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2. 1. 생애 초기 (1898년 ~ 1919년)

1898년 9월 25일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서 창녕 조씨인 아버지 조창규(曺昌奎)와 어머니 유씨(劉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창녕 조씨 항렬상 환(煥)자 돌림이었으나, 두 아들을 일찍 잃은 아버지 조창규는 셋째 아들의 명이 길었으면 하여 바위(岩)에서 이름을 따와 수암(壽岩)이라 짓고, 이어서 넷째는 봉암(奉岩), 막내 아들 이름을 용암(龍岩)이라 지었다.[21]

1911년 강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업보습학교로 진학했다.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후 극심한 가난으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년을 허비하다가 학업을 포기하게 되었다. 경기도 강화군(현재의 인천광역시)에서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군청 직원으로 일했으나, 3·1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었다.

2. 2.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활동 (1919년 ~ 1945년)

일제강점기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중앙위원장 및 고려공산청년회 간부를 지냈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를 경유하여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과[19]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평안북도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었다.[23][27] 러시아연방국방성 비밀문서에 따르면, 1932년~1933년박헌영 등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어떠한 접촉도 가지지 않았다.[26] 수감 중 부인 김금옥이 병사했고, 조봉암은 옥중에서 부인의 병사 소식을 접하였다. 6년 동안 신의주 감옥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 겨울철 고문으로 상한 손가락 7개가 동상으로 잘려 나가는 고통을 겪었다.[28] 1939년 7월 만기 출소하여 경기도 인천부로 내려와 지하운동을 하다가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았다.

2. 2. 1. 3·1 운동과 망명

YMCA 중학부 재직 중 3·1 운동에 참여하여 1년간 투옥되었다가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 경무국 소속 직원으로도 활동했다.

상하이 체류 중 박헌영, 김규식, 여운형 등을 다시 만났다. 상하이 체류 중 그는 경무국장 김구의 휘하에 있었는데, 이후 그가 공산당에 참여하게 되면서 김구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921년 조봉암은 임시정부의 파벌 싸움에 실망과 염증을 느껴 일본으로 건너가, 7월 7일 도쿄의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주오 대학(中央大学)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했다. 정경학과 1학년 재학 중 박열 등이 조직한 흑도회라는 공산주의 계열 단체에 참가하여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그러나 흑도회가 해체되면서 그는 주오 대학을 1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1924년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일파인 화요회에 가입해 회원이 되었다.[6]

2. 2. 2. 공산당 조직 활동

1922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귀국하였다.[23] 그해 10월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고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에서 열린 베르흐네우딘스크 대회에 한국공산주의자 대표로 참석하였다.[23] 1923년 초 소련 공산당의 명으로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 속성과에 입학하였다.[23] 1923년 여름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속성과를 수료했고, 9월 조선 공산청년동맹과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비밀리에 국내에 잠입하였다.[23]

1925년 4월 17일 경성에서 열린 조선공산당의 조직에 참여하고, 4월 18일 서울에서 박헌영, 김단야 등과 박헌영의 집에서 비밀리에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간부가 되었다.[8] 그러나 1925년 11월 조선총독부 당국의 탄압으로 조선공산당 1차 조직이 와해되자 조봉암은 도주 피신하였고, 1925년 12월 박헌영 등과 제2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1926년 4월 제2차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자 만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滿洲總局)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23][24] 1926년 7월 코민테른 극동국 조선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코민테른 등에서 활동 경험을 가지고, 일국사회주의론(一国一党主義)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도 소속되어 활동했다.

2. 2. 3. 민족정당 통합노력, 노동·독립운동 단체 조직

1927년 4월 이동녕, 홍진, 조완구 등 독립운동 지도자 24명과 함께 상하이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을 맡았다.[23] 1927년 5월 중국공산당 한인지부를 조직하여 책임자로 활동했고, 1926년 6월에는 국제적색노동조합(프로핀테른) 주최의 범태평양노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해 조선의 노동운동 방침을 밝혔다.[23] 그러나 상하이에서의 활동 당시 애인 문제와 자금 문제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25] 이후 ML당(마르크스-레닌 당, 제3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는 데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 결성하는 데 앞장섰다.[23] 1931년 12월 만주사변을 계기로 상하이에서 한국인 교포들의 반제국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상하이 반제동맹 한인지회를 결성했다.[23]

2. 3. 광복 이후 정치 활동 (1945년 ~ 1959년)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고, 고려공산청년회 간부를 지냈다. 그해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 후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 소련, 중국, 만주 등에서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했다.[19] 1927년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 활동하다 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석방된 후,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했다. 1946년 5월 박헌영과의 갈등으로 사상 전향,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협상 노선을 걸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헌법 제정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48년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을 역임하고,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 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농지개혁을 주관하며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추진했으나 지주들과 한민당 세력의 반대로 절반만 성사되었다. 이는 이승만 정권 말 사법 살인의 도화선이 되었다.[19] 1948년 이후 윤치영 등과 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했고, 제2대 대통령 선거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2011년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1940년 이후 일제 총독부의 감시와 탄압으로 활동을 중지하였는데, '유휴분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25] 서대문 형무소 투옥 중 리승엽에게 전향을 권유했으나,[25]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지하활동을 하였다. 박헌영은 그를 공격했고, 프락치 의심도 받았다. 러시아 비밀문서에 따르면 1938 ~ 1941년 인천에서 암약하던 공산주의자는 조봉암에게 자신의 활동을 비밀로 했다고 한다.[26] 조봉암은 당시 일본인들의 비호를 받고 총독부 경찰의 보호 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26]

조봉암은 공식적으로 활동 중단을 선언했지만, 조선총독부 경찰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22] 1938년부터 1941년 박헌영은 인천에서 지하활동을 지도했는데, 조봉암에게 이 사실을 비밀로 했다. 조봉암은 일본인들의 비호를 받았고 경찰의 보호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22] 조봉암은 공산당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활동을 자제해 왔다. 그러나 지하 노동단체 활동에 은밀히 참여해 오던 그는 1945년 1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검거되었다.[23]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이 피난하자 신익희와 함께 경무대로 갔으나 이승만의 도피 소식을 접했다. 조봉암은 서류를 정리하고 동료 의원들을 피신시킨 뒤 윤길중 등과 남하했다. 아내 김조이는 실종되었다. 윤길중 등은 조봉암을 따르게 되었다.[45] 조선인민군 점령 하 서울에서 귀순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이승만은 조봉암을 공산당과 내통한 것으로 의심했다.

제2대 후반기 국회 의장단 선출, 1952년 7월 10일 새로 선출된 국회의장단. 좌로부터 윤치영 부의장, 신익희 의장, 조봉암 부의장


1952년 야당인사들과 이승만을 실각시키려는 내각제 개헌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고, 반(反) 이승만 정치인들 중 일부는 자유당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다. 조봉암은 장면에게 신당운동을 제안했으나, 장면은 조봉암의 정치노선과 시기상조를 이유로 거절하였다.

1956년 무소속으로 제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 민주당 신익희와 후보단일화를 협상했다. 1956년 3월 31일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서 대통령 후보로 조봉암, 부통령 후보로 박기출이 지명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 회의에 참석한 진보당추진위 대표들에게 협박, 공갈, 회유를 했고, 대회장에는 폭력단이 난입해 테러를 자행했다.[57]

신익희와 조봉암은 단일후보가 나와야 이승만을 이길 수 있다는 여론 때문에 협상해야 했다. 진보당은 4월 3일 후보지명을 백지화하고 연합후보를 내야한다고[57] 주장했으나, 민주당은 응하지 않았다.[58] 조봉암이 양보하는 조건으로 신익희가 3대 대통령을 하고 조봉암이 차기를 차지하기로 묵계했으나, 5월 5일 신익희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후보단일화 논의는 수포로 돌아갔다.

호헌동지회때부터 반감을 갖던 민주당에서는 조병옥 등이 신익희후보의 표를 다른 정당 후보에게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여 개표결과 신익희 추모표가 발생했다.

5월 15일 선거 결과 216만 4천여 표로 504만 6천여 표를 받은 이승만의 절반에 해당되는 득표를 했다. 그 후 진보당결성운동을 추진하였으나, 19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2. 3. 1. 광복 직후와 전향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수감에서 풀려났다. 여운형은 그의 출소를 직접 마중나가기도 했다.[25] 8월 16일 인천에서 치안유지회를 조직하고,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했다.[23] 이어 인천에서 노동조합 결성과 실업자대책위원회 인천지구를 조직하였으며,[23] 조선공산당 인천지구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소련에서는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으로 복귀한 조봉암을 비난하였다. 조선공산당 중앙당에서도 그에 대한 비판이 나왔고,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인천 조직에 조봉암을 직위해제할 것을 지시하였다.[22] 1945년 10월 인천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조선공산당 중앙간부를 거쳐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지구 위원장 등 공산주의계열에서 활동하였으나, 박헌영과 계속 갈등, 반목하였다. 박헌영1932년 무렵부터 조봉암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며,[25] 1940년 이후 공식 활동을 중단한 조봉암을 불신하였고, 공산당 일각에서는 조봉암을 유휴분자라며 비판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조봉암이 간부로 있던 조선공산당 인천지부에 일제 말 그의 소극적이거나 개별적인 활동을 문제삼았다. 조선공산당 본부는 일제 말 그가 혁명활동을 포기하고 일제 당국의 비호하에 있었다 하여 조봉암을 직위해제하였다.[26]

1946년 3월 박헌영을 비판하는 공개 편지를 보냈는데, '박헌영의 정치적 오류'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29] 그러나 이 공개 편지는 곧 민전 인천시 지구를 수색하던 미군 CIC 방첩대에게 빼앗겼다.[25] 6월말 미군방첩대는 일부를 개작하여 다시 발표했다.

1946년 5월 미군정에 끌려갔다 온 조봉암을 적극 지원하여 그의 전향을 유도한 것은 윤치영이었다. 조선공산당박헌영에게 보낸 조봉암의 편지가 미군 정보 기관에 압수되어 공개된 일이 있었다.[30] 윤치영은 그에게 미군정에 의해 공개될 것이라면 자발적으로 공개하라고 유도했다.

조선공산당을 장악하고 있던 박헌영의 당 운영에 불만을 품은 조봉암이 박헌영의 1인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편지를 신문에 공개 하게끔 은밀하게 주선한 것이 바로 윤치영이었던 것이다.[30] 미군정이 편지를 공개하기 전에 조봉암은 윤치영의 권고대로 선수를 쳐서 언론에 '박헌영에 대한 비판을 공개비판'으로 발표하고 전향을 선언하게 된다. 이는 조선일보안재홍의 한성일보에서는 특히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2. 3. 2. 좌우합작과 남북협상 참여

1946년 조봉암은 김규식과 여운형을 지지하며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려 했다. 이극로와 손잡고 제3전선인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들었으며,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고자 김규식에게 좌우합작운동 참가를 요청했다.[35] 그러나 김규식은 조봉암을 '공산주의자'로 인식하여 그의 참여를 거절하며, "한번 공산당 한 사람은 바뀌지 않아. 조봉암씨는 믿을 수 없어. 공산당 하던 사람을 어떻게 믿어"라며 면담 요청을 거부했다.[35]

당시 조봉암이 공산당을 탈당한 것이 아니라 박헌영이 이승엽을 인천지구당 책임자로 임명했기 때문에 반발했을 뿐이라는 소문이 있었다.[35] 김규식은 공산당이라면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았기에, 조봉암은 그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35] 결국 조봉암은 이극로와 함께 별도로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을 추진하게 되었다.

1946년 12월 좌우합작파를 중심으로 민족자주연맹이 결성되자 조봉암은 한글학자 이극로와 함께 조직한 민주주의독립전선의 간부로서 여기에 입당,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였다.[35]

이후 민주주의독립전선에서 활동하며 남북협상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좌파에서 전향한 이유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혀 1948년 4월 남북협상 때 북한에 갈 수 없었다. 민주주의독립전선의 대표로는 이극로 홀로 북한을 다녀왔다.[36]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이 실패로 끝난 뒤, 이극로는 북한에 남았고, 민주주의독립전선은 1948년 5·10 선거 참여 여부를 두고 논란을 벌이다 와해되었다. 이극로 계열은 북으로 가고, 조봉암과 그의 계열은 남한에 남게 되었다.[36]

남북협상의 실패를 인정한 조봉암은 선거 가능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좌우합작과 남북협상파의 5·10 총선거 참여와 통일독립정부 수립은 정부 수립 이후에 추진하자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하자 그는 민족자주연맹에서 배제, 강제 출당되었다.[37] 1948년 5월 10일 단독정부 수립 총선거에 참여 의사를 밝힌 뒤로는 협박과 테러 위협에 시달렸으며, 선거 기간 중 테러 위협을 피해 민가에 은신하기도 했다.[21]

2. 3. 3. 대한민국 정부 수립 참여와 농지개혁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6] 그해 8월 2일,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초대 농림부 장관(지금의 농림부 장관)에 임명되어 1949년 2월 22일까지 재임하였다.[6] 이후 1950년 제2대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조봉암은 남북협상이 실패하자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그는 좌우합작, 남북협상파의 5.10 총선 참여와 통일독립정부 수립은 정부 수립 이후에 추진하자고 주장했다.[37] 이러한 주장을 하자 그는 민족자주연맹의 중앙과 지방조직에서 배제되었고, 강제 출당 조치되었다.[37] 5.10 총선거 참여 의사를 밝힌 뒤로는 협박과 테러 위협에 시달렸는데, 선거 기간 중 테러 위협을 피해 민가에 은신하기도 했다.[21]

2. 3. 4. 제2, 3대 대통령 선거 출마와 진보당 창당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이 피난간 뒤, 조봉암은 신익희와 함께 경무대로 갔으나 이승만의 도피 소식을 접했다. 조봉암은 윤길중 등과 함께 남하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윤길중 등은 조봉암을 따르게 되었다.[45] 조선인민군서울을 점령한 뒤 조봉암에게 귀순을 권유했으나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조봉암을 공산당과 내통한 것으로 의심하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1952년 조봉암은 야당인사들과 이승만을 실각시키려는 내각제 개헌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고, 반(反) 이승만 정치인들 중 일부는 다시 자유당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다. 조봉암은 장면에게 신당운동을 함께 할 것을 제안했으나, 장면은 조봉암의 정치노선과 시기상조를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승만의 의지로 대통령 선거는 국민직선제로 바뀌었다. 조봉암은 이시영에게 출마 의향을 물었으나, 이시영은 출마를 권유했다. 조봉암은 자신이 나서겠다고 선언했고,[46] 민국당이시영을 출마하도록 했다.[46]

1952년 8월 5일 제2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은 평화통일, 국민의료제도, 국가보장교육제도,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농촌 고리채 지불 유예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낙선하였다.[47]

1954년 5월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정치 깡패들의 방해로 후보등록을 못하고 도정궁에 은거하였다.[48]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30%의 지지율을 기록하였다.

1954년 11월 30일 자유당의 연임에 저항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 했으나, 조병옥, 장면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신익희는 회피하였고, 김성수는 민주대동을 내세워 양쪽 모두를 비판하였다.[51][53]

1955년 1월 21일 호헌동지회 총회에서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논란이 일자,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낼 것을 부탁하였다.[50] 조봉암은 성명서를 발표했지만, 조병옥, 김도연, 김준연, 장면 등의 반대로 호헌동지회 참여는 좌절되었다.

1956년 11월 조봉암은 박기출 등과 '책임 있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민주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진보당을 창당하였다.

진보당이 정식 창당되지 않은 상태에서 1956년 제3대 대통령 후보로 무소속 출마, 민주당 신익희와 후보단일화를 협상했다. 1956년 3월 31일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서 대통령 후보로 조봉암, 부통령 후보로 박기출이 지명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 회의에 참석한 진보당추진위 대표들에게 협박, 공갈, 회유를 했고, 대회장에는 폭력단이 난입해 테러를 자행했다.[57]

신익희와 조봉암은 단일후보가 나와야 이승만을 이길 수 있다는 여론 때문에 협상해야 했다. 진보당은 4월 3일 후보지명을 백지화하고 연합후보를 내야한다고[57] 주장했으나, 민주당은 응하지 않았다.[58] 조봉암이 양보하는 조건으로 신익희가 3대 대통령을 하고 조봉암이 차기를 차지하기로 묵계했으나, 5월 5일 신익희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후보단일화 논의는 수포로 돌아갔다.

호헌동지회때부터 반감을 갖던 민주당에서는 조병옥 등이 신익희후보의 표를 다른 정당 후보에게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여 개표결과 신익희 추모표가 발생했다.

5월 15일 선거 결과 216만 4천여 표로 504만 6천여 표를 받은 이승만의 절반에 해당되는 득표를 했다. 그 후 진보당결성운동을 추진하였으나, 19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강원용미국 인사가 조봉암에게 접근, 대통령 출마를 권유했다고 증언하였다.[59] 조봉암은 미국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확신하였다.[59]

3월 31일 진보당추진대표자회의에서 평화통일이라는 말이 등장했는데, 민주당은 진보당 측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4월 25일 조봉암과 신익희는 비밀회동을 가졌고, 조봉암은 대통령 후보 양보의 뜻을 밝혔다.[60] 신익희는 고려해 보겠다고 했으나, 민주당 측은 부통령 후보도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조봉암은 자신이 이승만이 야당표 분산을 계산하고[58] 있었기 때문에 후보가 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61]

195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3배 가까운 득표를 얻었다.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을 결성하고, 평화 통일을 슬로건으로 이승만 정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2. 3. 5. 진보당 사건과 사형

1956년 대통령 선거 중 양명산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자유당 정부와 우익단체들은 조봉암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고 공격했다.[57] 1957년 9월에는 정우갑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혐의 없음으로 석방되었다.

1958년 1월 12일 새벽,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시작되었고, 조봉암은 피신했다가 자진 출두했다. 그는 해외 망명 권유를 받았으나, 혐의가 사실화되고 동지들이 희생될 것을 우려하여 거부했다.[57]

1958년 1월 말,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와 간첩죄로 체포되었다. 1심에서는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장택상은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27] 장택상윤치영은 조봉암이 간첩이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민주당과 조병옥 등은 조봉암의 이적행위 철저 수사를 주장하며 규탄했다.

1958년 진보당 사건 재판 당시.


장택상


2월 20일 육군특무부대는 양명산 사건을 발표, 조봉암이 양명산과 접선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접촉하고 정치자금을 받았으며, 북한의 지령에 따라 간첩행위를 했다고 발표하였다.[62]

장택상은 조봉암의 구명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으나, 이정재 수하들과 반공청년단원들이 법원에 난입하는 등 혼란이 있었다.[62] 1958년 5월 28일동아일보 기사에는 "죽산이 간첩 양명산에게 속았다는 진술을 했다."고 보도하였다.

김갑수 대법관은 "재판장이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잘못 읽었던 것 같으나 형량이 갑자기 변경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67]

3심에서 조봉암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미국이승만 정권에게 조봉암 사형 철회를 계속 주문하였으나, 자유당 강경파는 1959년 조봉암의 사형을 집행했다.[68] 조봉암은 "법이 그런 모양이니 별수가 있느냐...정치를 하자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한다."라며 담담하게 결과를 받아들였다.

1959년 7월 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집행 전, 조봉암은 목사에게 성경 구절을 읽어달라고 요청했다.[68] 그의 나이 61세였다.

조봉암의 죽음에 대해 장택상은 "죽산은 공산주의 테두리를 벗어났다고 믿고 있다...법무장관의 배신이었다."라며 비판하였다.[69] 1959년 7월 31일에 집행된 교수형 상황에 대해선 "양명산은 처형 직전 조선인민만세의 발악 언사를 하였지만 그에 비해 죽산은 창백한 표정으로 끝내 무표정하게 설교와 기도를 자청하였다."고 전했다.

재판 중인 조봉암

3. 사후

조봉암은 1959년 사형 집행 이후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72][73] 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1987년부터 장택상 등의 증언을 근거로 조봉암의 명예회복이 추진되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에게 명예회복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1999년 3월 25일 대한민국 국회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선생 명예회복 범민족 추진 주비위원회' 주최로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70] 2009년 이후 조봉암의 복권 노력과 독립유공자 신청이 진행 중이다.

2010년 11월 대한민국 대법원은 조봉암을 육군 특무대에서 수사한 것은 위법이라며 재심을 개시하기로 하였다.[71] 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은 재심에서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72][73] 이로써 조봉암은 52년 만에 복권되었고 이승만 정권의 대표적 사법살인 희생자로 기록되었다.[72][73]

2011년 12월 27일 서울중앙지법은 조봉암 선생의 유족에게 국가가 24억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74]

조봉암 추모비, 2011년 12월


조봉암 추모사업회는 2000년 5월 추모비 건립 모금 운동을 벌여,[76] 2001년 7월 6일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강화역사관 입구 진해공원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76]

그러나 2011년 국가보훈처는 조봉암이 1941년 일제에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심사를 보류하였다.[20]

2020년 발견된 구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조봉암은 진보당 설립과 대선 출마에 대해 북한에 조언을 구했으며, 북한은 조봉암에게 선거 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소련에 밝혔다.[75]

3. 1. 재심

1959년 2월 27일 선고된 4291형상559 판결에 대한 재심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1년 1월 20일에 원심판결과 제1심판결 중 유죄 부분을 파기하였다.(대법원2008재도11) 다만, 무기불법소지에 의한 군정법령 제5호 위반죄에 대해서는 형의 선고를 유예하였다. 공동피고인 관련 간첩 혐의는 무죄, 진보당 관련 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한 검사의 항소는 기각되었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도 유족은 감시 대상이었다.[10] 조봉암이 처형된 지 반세기 가까이 지나면서, 민주화 진전과 남북 관계 개선 등으로 그의 정치 노선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2007년 9월, 대통령 직속 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봉암의 유족에게 사과하고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그의 출신지인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는 동상 건립 등 재평가 움직임이 시작되었다.[11] 2010년 10월 29일, 대법원은 전원합의체를 열어 조봉암에 대한 재심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12] 합의체는 재심 이유로 “불법적인 수사에 의해 기소되었다”는 점과 “육군특무대가 군인·군속도 아닌 일반인인 조봉암을 피의자로 수사할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심문한 행위는 직권남용에 해당하며 불법이다”라는 견해를 제시했다.[13]

그러나 권고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대에는 재평가 움직임이 없었고, 2017년 7월 31일 조봉암 서거일에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으로 추모 화환을 보냈다. 2018년에도 대통령 추모 화환이 보내졌다.[10]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합의부는 재심 공판에서 52년 전 대법원 법정에서 유죄로 판단했던 진보당 강령 및 스파이 혐의 등을 모두 뒤집고, 대법원 판사 13명 전원 일치로 조봉암에게 무죄 판결을 선고했다.[14] 대법원은 판결에서 "진보당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자본주의 경제의 부작용과 모순점을 지적하며 개선하려 했을 뿐, 내란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고 볼 수 없다. 피고인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을 적용한 판결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스파이 행위를 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면서 조봉암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진 근거가 된 혐의를 부인했다.[15]

4. 논란

조봉암의 사형 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장택상은 구명 운동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되자 "죽산은 공산주의 테두리를 벗어났다고 믿고 있다"라며 법무장관의 배신을 비판했다.[69] 윤치영 등도 조봉암이 이적행위자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증언했지만,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8년 5월 28일동아일보 기사는 조봉암이 간첩 양명산에게 속았다고 진술했다고 보도했고, 1959년 7월 31일 교수형 당시 조봉암은 창백한 표정으로 설교와 기도를 자청했다고 전했다.

4. 1. 이적행위 및 친일 여부 논란

생전에 조봉암은 한국 전쟁 당시 반역자, 배신자, 변절자로 낙인찍혔으나, 사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애국렬사릉에 가묘가 설치되었고, 1990년대 이후에는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69] 이는 그의 명예회복에 걸림돌이 되었는데, 북한에서조차 '반역자'로 매도되었던 그가 복권되면서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게 되었다.[69] 독립유공자 표창 서훈도 진보당 사건과 애국렬사릉 가묘 문제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1987년부터 장택상 등의 증언을 통해 조봉암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근거로 명예회복이 추진되었다.[69] 1993년에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명예회복을 요청했으나 외면당했다. 1999년에는 국회에서 '죽산 조봉암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 대토론회'가 개최되었다. 2008년에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70]

2010년 11월 대한민국 대법원은 조봉암에 대한 재심을 개시했고,[71] 2011년 1월 20일 재심에서 국가변란 및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52년 만에 복권되었다. 이는 이승만 정권의 대표적인 사법살인 희생자로 기록되었다.[72][73] 2011년 12월 27일에는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유족들이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74]

그러나 2011년 국가보훈처는 조봉암이 1941년 일본에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매일신보 기사를 근거로 독립유공자 심사를 보류했다.[20] 유족은 독립유공자 훈장을 세 차례 신청했으나, 국가보훈처는 친일 의혹과 매일신보의 국방헌금 기사를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10][17] 2019년 조봉암의 손녀는 해당 기사를 부정하며 훈장 신청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으나,[16] 2023년 국가보훈부 장관 박민식(朴敏植)은 조봉암의 업적을 언급하며 재평가 가능성을 시사했다.[17]

2020년에는 조봉암이 진보당 설립에 대해 북한에 '해당 임무를 달라'고 요청했고, 김일성은 조봉암에게 합법 정당 설립을 제안했다는 내용의 구소련 외교문서가 발견되었다.[75] 또한 김일성은 조봉암의 대선 출마와 자금 지원에 대해서도 언급하여 북한의 지원 사실을 소련에 밝혔다.[75]

한편, 조봉암이 공산주의자인 양명산을 알 리 없다는 반론과, 양명산이 고문으로 진술을 번복했다는 주장도 있다.[80] 1940년 이후 소극적인 지하단체 활동으로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비판받았고,[86] 리승엽의 변절에 영향을 주었다는 비판도 있다.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 박진목은 그를 대인이지만 변절자라고 평가했다.[86]

5. 평가

조봉암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조선공산당 활동을 했으며,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농림부 장관, 국회 부의장 등을 역임했다.[19]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농지개혁을 주도하였으나 지주와 한민당의 반대로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좌절되었다.[19]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30%의 지지율을 얻었으나,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19] 그의 사형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2011년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었다.[19]

1954년 호헌동지회 참여를 시도했으나, 조병옥, 장면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49]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요구했고, 조봉암은 이를 수용했다.[50] 1956년 진보당을 창당하여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했다.[51]

윤치영은 조봉암이 용공분자가 아니며 이승만에게 도전한 것이 죽음의 원인이라고 평가했다.[81][82] 여운형은 조봉암을 감성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했다.[83] 조봉암의 장녀 조호정은 조봉암이 여운형과 가장 친했으며, 김구를 '테러리스트'라며 싫어했다고 회고했다.[83]

1993년 이후 조봉암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애국렬사릉에 가묘를 설치하고 조국통일상을 추서했다.[44]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보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인정하고 국가에 사과와 재심 등을 권고했다.[84]

1940년 이후 소극적인 지하활동으로 조선공산당의 비판을 받았고,[86] 리승엽의 변절을 도왔다는 비판도 있다.

6. 가족 관계

1941년 죽산 조봉암의 가족사진. 뒷줄 맨 오른쪽이 조봉암이다.


조봉암은 아버지 조창규와 어머니 유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들 둘이 요절하자 그의 부모는 아들이 오래 살라는 뜻에서 이름자를 바위 암(岩)으로 정하였다. 조봉암은 창녕 조씨 항렬상 환(煥) 자 돌림에 해당한다.

관계이름기타
아버지조창교(曺昌敎, 1848년 8월 9일 - 1914년 5월 10일)창녕 조씨 찬성공파보 3권 675page에는 족보이름이 항렬자를 따라 조병창(曺秉昌)으로 되어있다. 자(字)는 창교(昌敎)
어머니유씨(劉氏, 1858년 6월 11일 - 1921년 11월 3일)
조수암(曺壽岩, 1895년 8월 5일 ~ 1941년 3월 11일)
요절
동생조용암(曺龍岩, 1904년 10월 2일 ~ ?)
부인김금옥(1902 ~ 1934년)[87]
첫째 딸조호정(曺滬晶, 1928년 ~ 2022년 10월 26일)
첫째 사위이봉래(李奉來, 1922년 ~ 1998년, 영화 감독)
외손녀이성란(李聖蘭, 1960년~)[88]
외손서유수현
부인김조이(金祚伊, 1904년 ~ ?, 독립운동가[87], 한국 전쟁 당시 실종)
둘째 딸조임정
셋째 딸조의정(1950년[89] ~ )
아들조규호(1949년[69] ~ )
손자조광현
처남김송학 (김조이의 남동생)


7. 저서


  • 《공산주의 모순발견》
  • 《우리가 나아갈 길》
  • 《우리의 당면과업》

8. 어록

吾等|오등중국어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 1919년 3.1 독립선언서 중에서[19]

민주주의(民主主義)는 인민의 자유행복(自由幸福)을 보장하는 정치(政治)요, 공산주의(共産主義)는 인민의 자유행복(自由幸福)을 부인하는 정치(政治)입니다.

: 1946년 5월 공산당을 떠나며[19]

나는 대한민국 헌법(憲法)을 만드는 데 기초위원(基礎委員)의 한 사람으로서, 또 농림장관(農林長官)으로서 농지개혁(農地改革)을 하는 데 참여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사람으로서 죽는 것을 영광(榮光)으로 생각한다.

: 1959년 7월 31일 사형 집행 직전, 최후진술에서[19]

9. 묘소

2019년 7월 촬영


2019년 7월 촬영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는 서울특별시 망우리 공원 내 망우산 사색의길 동락천 약수터 근처에 있다. 1959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형되어 정부가 비문을 새기지 못하게[78] 했을 뿐만 아니라 창령 조씨 문중에서도 비문제작을 거부했기 때문에 비석 뒤에 비문이 없다. 그러나 2011년 대법원에 의하여 간첩죄 등에 대하여 무죄가 선고되고 나서 유족과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는 비문이 없는 상태 그대로 둘지 여부를 검토하였다.[79]

묘소 앞 돌에는 다음의 죽산 어록이 새겨져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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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뉴스 ▒ 경인일보 창간 50주년 '도약! 2010' ▒ http://www.kyeongin.[...] 경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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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웹사이트 조봉암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24]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역사비평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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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문서 러시아연방국방성 중앙보관문서 문서군 172, 목록 614631, 문서철 12 러시아연방국방성 중앙보관문서
[27] 웹사이트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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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학술지 역사비평(1990년 겨울) 역사비평사 1990
[35] 잡지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②)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http://www.donga.com[...] 신동아 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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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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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웹사이트 자작나무통신- 예산읽기 정책알기 :: 조봉암의 장녀가 말하는 '아버지' http://www.betulo.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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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뉴스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 통일운동가 박진목선생 "독립운동 목적 통일 달성못해"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5-05-09
[87] 뉴스 '여성 코뮤니스트' 김조이, 건국포장 받는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8-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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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뉴스 '진보당' 조봉암 막내딸 요리책 내다 - 조의정씨, <엄마처럼> 출간... 할머니와 시어머니의 손맛을 보고 싶다면?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8-05-04
[90] 뉴스 인천인물 100人·86 인천시의회 초대의장 이명호 - 구한국·왜정·미군정·대한민국… '파란만장''인천의 산 역사' 드높은 香이여! http://www.kyeongin.[...] 경인일보 2007-08-08
[91] 서적 옥창너머 푸른 하늘이 범우사
[92] 웹사이트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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