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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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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고는 후한 시대의 역사가이자 문장가로, 《한서》의 저술을 주도했다. 그는 학자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 반표의 뒤를 이어 《한서》 편찬을 시작했으나, 정치적 문제로 투옥되어 사망했다. 반고는 《백호통의》, 《양도부》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그의 지리학적 저술은 중국 지리지 유행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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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반고
로마자 표기Ban Gu
맹견(孟堅, Mèngjiān)
출생32년
출생지한나라 부풍군 안릉 (현재의 산시성 셴양시)
사망92년
생애
직업역사가, 시인, 정치가
주요 업적한서 편찬
가족아버지: 반표
고모: 반첩여
형: 반초
누이: 반소
아들: 반웅
손자: 반시
한자 정보
간체자班固
병음Bān Gù
웨이드-자일스Pan¹ Ku⁴

2. 가계 배경

반씨 가문은 후한 시대의 가장 저명한 가문 중 하나였다. 반씨 가문은 원래 전국 시대초나라에 살았지만, 진 시황제 통치 기간 동안 반이(斑|반중국어)라는 사람이 북쪽으로 도망쳐 현재 산시성 북부에 있는 얀먼 관 근처의 루판(정체자 樓煩|루번중국어, 간체자 楼烦|루번중국어)으로 갔다. 전한 초기에 반고의 조상들은 수천 마리의 소, 황소, 말을 키우는 사람들로 북서 변경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를 통해 강력한 사업을 벌였으며 다른 가문들도 변경으로 이주하도록 장려했다. 반표는 나중에 가족을 안릉(현재의 시안 근처, 산시성)으로 이주했다.

반고의 고모할머니 반첩여는 학자이자 시인이었고, 아버지 반표는 저명한 역사가였다. 반고의 아버지 쪽 할머니는 흉노 출신이었고 흉노 왕 휴도왕의 후손이었다. 이러한 반고의 일부 흉노 기원은 중국의 역사 및 외교와 관련된 그의 기술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2. 1. 가족 관계


  • 반표(3~54년): 아버지
  • '''반고'''(32~92년): 첫째 아들
  • 반초(32~102년): 둘째 아들, 쌍둥이 형제. 중앙아시아의 유명한 군사 지도자이자 탐험가.
  • 반소(45년경~117년경): 딸.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성 학자 중 한 명.
  • 반웅(?~107년 이후): 반초의 장남
  • 반시(?~130년): 반웅의 아들
  • 반용(?~128년경): 반초의 막내 아들

3. 생애

반고는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반표(班彪)로부터 독서와 학문을 배웠다. 아홉 살에 문장에 능했고 16세에 낙양의 태학(太學)에 들어가 여러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54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반고는 태학에서 돌아와 삼년상을 치렀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서》(漢書) 1백 편의 저술을 계속했지만, 이 때문에 사사로이 나라의 역사를 짓는다는 고발을 당해 체포되어 구금당한다.[8] 동생 반초가 황제에게 반고가 《한서》를 짓는 목적은 한 왕조의 공덕을 찬양하고 후세 사람들에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하여 교훈을 남기고자 함이지 조정을 비방하거나 할 뜻은 없음을 변론했다. 훗날 반고의 무고함이 밝혀지자 명제(明帝)는 반고의 집에 금과 전을 지급하고 역사책을 계속 저술하도록 허락했다.

명제는 반고의 재능을 높이 사서 그를 난대령사(蘭台令史)로 삼고, 조를 받들어 진종(陳宗), 윤민(尹敏), 맹이(孟異) 등과 함께 《세조본기》(世祖本纪) 및 여러 전기(傳記)를 짓게 했다. 반고는 후에 낭(郎)으로 옮겨지고, 전교비서(典校秘書)로서 다시 공신(功臣), 평림(平林), 신시(新市), 공손술(公孙述) 등의 열전을 짓게 되었다.

장제(章帝)는 반고를 현무사마(玄武司馬)로 임명했다. 79년 장제는 선제(宣帝)의 석거각(石渠閣)의 고사를 본받아 여러 왕(王)과 조박(趙博), 이육(李育) 등의 유생들을 백호관(白虎觀)에 불러모아 오경(五經)의 다르고 같음을 강론하게 했는데, 이 대대적인 유학(儒學) 세미나의 토론 내용을 반고가 기록하여 지은 것이 바로 《백호통의》(白虎通義)였다. 82년에 반고는 《한서》의 내용 대부분을 완성했다.

화제(和帝) 89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반고는 관직을 사임하고 집에 있었는데, 마침 두헌(竇憲)이 병사를 거느리고 흉노를 치게 되자 반고도 두헌의 군에 종군하여 중호군(中護軍)으로서 중랑장(中郎將)의 임무를 수행했다. 흉노를 크게 쳐부순 뒤 늑석연연산(勒石燕然山)에 그 공적을 새기는 명문을 짓고 쓴 것이 바로 반고였다. 반고는 또한 《두장군북정송》(竇將軍北征頌)을 지어 두헌이 북쪽으로 흉노를 정벌한 사실을 크게 찬양하였다. 2017년 8월 14일 중국에서 보도된 바에 따르면, 중국 내몽골 대학교 몽골학 연구센터와 몽골의 칭기스 칸 대학교가 공동으로 그해 7월 27일부터 2주간 진행한 실지 조사를 통해, 이 석비가 항가이 산맥에 현존하는 것이 확인되었다[9]

그러나 예전에 반고의 집안 노비에게 술에 취해 모욕을 당한 일로 앙심을 품은 낙양령(洛陽令) 충경(种競)이, 92년두헌이 실각하여 자살에 이른 뒤 두헌의 측근으로서 관직에서 면관되었던 반고를 잡아다 태형을 쳤고, 반고는 옥사했다. 나이 61세였다. 이때 《한서》의 표(表)8과 천문지(天文志)는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였다. 화제는 그 여동생 반소(班昭)에게 명하여 황실 도서관인 동관(東觀)의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되어 있던 자료를 갖고 반고가 하던 일을 마무리 지어 완수하도록 했지만, 반소 역시 일을 마치지 못한 채 사망한다. 황제는 반고와 같은 군에 살던 마속(馬續)이 그의 문하 사람이었고 고금의 일에 두루 밝다 하여 그에게 《한서》의 반고가 완성하지 못한 부분을 완성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결국 《한서》(漢書)는 반표로부터 아들 반고, 그리고 딸인 반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족이 참여하여 집필되었다. 유일하게 반초는 언급되지 않는데, 반초는 평생 서역을 지키며, 흉노족과 서역을 개척하는 데 일생을 바쳤기 때문이다.

4. 『한서』 편찬

반고는 아버지 반표(班彪)의 뒤를 이어 《한서》 1백 편의 저술을 계속했지만, 이 때문에 사사로이 나라의 역사를 짓는다는(私修國史) 고발을 당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8] 동생 반초가 황제에게 반고가 《한서》를 짓는 목적은 한 왕조의 공덕을 찬양하고 후세 사람들에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하여 교훈을 남기고자 함이지 조정을 비방하거나 할 뜻은 없음을 변론했다. 훗날 반고의 무고함이 밝혀지자 명제는 반고의 집에 금과 전을 지급하고 역사책을 계속 저술하도록 허락했다.

명제는 반고의 재능을 높이 사서 그를 난대령사(蘭台令史)로 삼고, 조를 받들어 진종(陳宗), 윤민(尹敏), 맹이(孟異) 등과 함께 《세조본기》(世祖本纪) 및 여러 전기(傳記)를 짓게 했다. 반고는 후에 낭(郎)으로 옮겨지고, 전교비서(典校秘書)로서 다시 공신(功臣), 평림(平林), 신시(新市), 공손술 등의 열전을 짓게 되었다. 반고는 반초에게 보낸 글에서 "무중(武仲)은 속문(屬文)에 능해서 난대령사가 되었는데 그 붓이 종이에 한 번 닿으면 쉬는 법이 없다"고 평했다. 반고 또한 조칙을 받들어 그 아버지가 해왔던 저술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장제는 반고를 현무사마(玄武司馬)로 임명했다. 건초 4년(79년) 장제는 전한 선제의 석거각(石渠閣)의 고사를 본받아 여러 왕과 조박(趙博), 이육(李育) 등의 유생들을 백호관(白虎觀)에 불러모아 오경의 다르고 같음을 강론하게 했는데, 이 대대적인 유학 세미나의 토론 내용을 반고가 기록하여 지은 것이 바로 《백호통의》였다. 건초 7년(82년)에 반고는 《한서》의 내용 대부분을 완성했다.

화제 영원 원년(89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반고는 관직을 사임하고 집에 있었는데, 마침 두헌이 병사를 거느리고 흉노를 치게 되자 반고도 두헌의 군에 종군하여 중호군(中護軍)으로서 중랑장(中郎將)의 임무를 수행했다. 흉노를 크게 쳐부순 뒤 늑석연연산(勒石燕然山)에 그 공적을 새기는 명문을 짓고 쓴 것이 바로 반고였다. 반고는 또한 《두장군북정송》(竇將軍北征頌)을 지어 두헌이 북쪽으로 흉노를 정벌한 사실을 크게 찬양하였다.

그러나 예전에 반고의 집안 노비에게 술에 취해 모욕을 당한 일로 앙심을 품은 낙양령(洛陽令) 충경(种競)이, 영원 4년에 두헌이 실각하여 자살에 이른 뒤 두헌의 측근으로서 관직에서 면관되었던 반고를 잡아다 태형을 쳤고, 반고는 옥사했다. 이때 《한서》의 표(表)8과 천문지(天文志)는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였다. 화제는 그 여동생 반소에게 명하여 황실 도서관인 동관(東觀)의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되어 있던 자료를 갖고 반고가 하던 일을 마무리 지어 완수하도록 했지만, 반소 역시 일을 마치지 못한 채 사망한다. 황제는 반고와 같은 군에 살던 마속(馬續)이 그의 문하 사람이었고 고금의 일에 두루 밝다 하여 그에게 《한서》의 반고가 완성하지 못한 부분을 완성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결국 《한서》는 반표로부터 아들 반고, 그리고 딸인 반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족이 참여하여 집필된 것이다. 반초는 평생 서역을 지키며, 흉노족과 서역을 개척하는 데 일생을 바쳤기 때문에 유일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본기(本紀) 12편에 표(表) 8편, 지(志) 10편, 열전(列傳) 70편으로 되어 있던 원래의 《한서》 체제는 훗날 다시 120권으로 나뉘어, 《사기》의 체제와는 달리 세가(世家)는 모두 빠지게 되었다.

5. 기타 작품 활동


  • 「양도부」 - 전한장안과 후한의 낙양 두 수도 중 어느 쪽이 우수한지를 비교하여 낙양에 군대를 배정한다. 『문선』의 서두에 실려 있다. 『문선』에는 「유통부」, 「답빈희」 등 반고의 작품 8편을 싣고 있다.
  • 「영사」 시 - 순우의에 대해 노래한 시. 작가가 분명한 오언시(五言詩)로 가장 오래되었다.

6. 평가 및 영향

반고는 학자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 반표의 영향을 받아 역사가로 성장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서》를 저술했으나, 이로 인해 모함을 받아 투옥되기도 했다. 동생 반초의 변호와 명제의 신임으로 풀려난 후, 난대령사(蘭台令史) 등 관직을 거치며 《한서》 저술을 계속했다. 유학 세미나의 내용을 기록한 《백호통의》를 저술하고, 흉노 정벌에 종군하여 공적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두헌의 실각 후 옥사하여 《한서》를 완성하지 못했다. 이후 여동생 반소와 마속(馬續)에 의해 《한서》가 완성되었다.

《한서》는 반표로부터 아들 반고, 딸 반소에 이르기까지 온 가족이 참여하여 집필한 역사서이다. 반초는 평생 서역을 지키며 흉노족과 서역을 개척하는 데 일생을 바쳤기 때문에 유일하게 언급되지 않는다.[5]

현대 역사가 쉬메이링(Hsu Mei-ling)은 반고의 지리학 저술이 역사서의 지리 섹션 설립의 시초가 되었으며, 고대 중국의 지리지 유행에 불을 지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6]

중국과 서양 학자들이 중국 역사를 왕조 체제로 보는 경향은 반고가 《한서》를 집필한 방식의 직접적인 결과로 여겨진다.[7]

참조

[1] 간행물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the Qin, Former Han, and Xin Periods (221 BC – AD 24 Brill 2018-01-12
[2] 문서 Yü, 8.
[3] 논문 Two Notes on the Xiongnu Ancestry of the Authors of "Han-shu" https://www.jstor.or[...] 2011
[4] 서적 Ban Gu's history of early China https://books.google[...] Cambria press 2008
[5] 논문 Two Notes on the Xiongnu Ancestry of the Authors of "Han-shu" https://www.jstor.or[...] 2011
[5] 서적 Ban Gu's history of early China https://books.google[...] Cambria press 2008
[5] 서적 Ban Gu's history of early China https://books.google[...] Cambria press 2008
[6] 문서 Hsu, 98.
[7] 간행물 Companion to Historiography. Chapter 1; The Evolution of Two Asian Historiographic Traditions Routledge 2002
[8] 문서 班彪の『後伝』の篇数を65とするのは[[唐]]の[[劉知幾]]『[[史通]]』外篇・古今正史による。『後漢書』では数十篇、[[王充]]『[[論衡]]』超奇篇では百篇以上とする
[9] 웹사이트 後漢が北匈奴に勝利記した石碑、モンゴルで発見―中国紙 https://www.recordch[...] Record China 2017-08-16
[10] 문서 『[[史記]]』扁鵲倉公列伝 につけられた『[[史記正義]]』に引用されている。また『文選』巻36の[[王融]]「永明九年策秀才文」の[[李善 (唐)|李善]]注にも引く。「詠史」の題は鍾嶸『[[詩品]]』に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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