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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 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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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동 폭탄은 물 위를 튀어 목표물을 타격하여 수중에서 폭발하는 무기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에서 개발되었다. 주로 댐과 같은 시설이나 선박을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업키프"와 "하이볼" 등의 암호명으로 불렸다. 업키프는 독일의 댐 공격에 사용되었으나, 하이볼은 실전에서 사용되지 못했다. 이후 독일과 소련에서도 반동 폭탄을 개발하여 사용하려 했으나,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계획이 중단되거나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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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 폭탄
개요
명칭Vickers Type 464
코드명Upkeep (업킵)
Imperial War Museum Duxford에 전시된
Imperial War Museum Duxford에 전시된 "Upkeep" 반동 폭탄
유형
종류재래식 폭탄 (심해 폭탄)
설계자반스 월리스
설계 시기1942년 4월
제조사Vickers-Armstrongs (비커스-암스트롱)
생산 시기1943년 2월
생산 수량120개 (비활성 62개, 고폭탄 충전 58개), 작전 투입 19개
파생형Highball (하이볼) 구형 반동 폭탄, 비활성 훈련용 폭탄
제원
중량9,250 lb (4,200 kg)
길이60 in (1.5 m)
50 in (1.3 m)
속도240–250 mph (390–400 km/h), 500 rpm 역회전
사거리400–500 yd (370–460 m)
구성
폭약토펙스
폭약 중량6,600 lb (3,000 kg)
기폭 장치수압식 신관 (30 ft (9.1 m) 깊이) 및 백업 화학 시간 신관
사용
사용 국가영국
사용 부대No. 617 Squadron RAF (영국 공군 617 비행대)
사용 시기1943년 5월 16–17일 (채리오트 작전)
참전제2차 세계 대전

2. 개발 경위

1997년 리컬버에서 회수된 하이볼 시험 프로토타입의 잔해. 현재는 허니 베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버니스 월리스는 전략 폭격을 적의 전쟁 수행 능력을 파괴하는 수단으로 여겼으며, "추축국 공격 방법의 노트"라는 제목의 논문을 작성했다. 그는 적의 전력 공급에 대해 언급하며 (공리 3) "만약 그들의 파괴 또는 마비가 달성된다면, 이는 적이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없도록 만드는 수단을 제공한다"고 적었다.[1]

1942년 4월, 바네스 월리스의 논문 "구형 폭탄 - 수면 어뢰"는 무기가 물 위를 튀어 목표물을 타격한 다음 수중으로 가라앉아 심해 폭뢰와 유사하게 폭발하는 공격 방식을 설명했다. 표면 위를 튀어오르게 하면 목표물을 직접 조준할 수 있고 수중 방어 시설을 피할 수 있으며, 표면 위의 일부 방어 시설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무기는 수중 폭발의 전형적인 "버블 펄스" 효과를 활용하여 효율성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월리스의 논문은 적절한 목표물로 수력 발전 댐과 "노르웨이 피오르와 같이 잔잔한 물에 정박된 부유 선박"을 식별했다.[1]

두 종류의 목표물 모두 월리스가 이 논문을 쓸 당시 이미 영국 군에게 매우 중요한 대상이었다. 독일 수력 발전 댐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부터 중요한 폭격 목표물로 확인되었지만, 기존의 폭탄과 폭격 방법으로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어뢰 그물이 기존 어뢰의 공격으로부터 댐을 보호했고, 댐을 파괴할 실용적인 수단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2년, 영국은 북대서양에서 연합군 선박에 위협이 되었고 여러 차례의 영국 공격에도 살아남은 독일 전함 티르피츠/Tirpitzde를 파괴할 수단을 찾고 있었다. 이 시기, 티르피츠는 노르웨이 피오르에 정박하여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으며, 이는 마치 "기동 함대"와 같은 효과를 냈다.[2]

결과적으로 월리스가 제안한 무기는 주목을 받았고 적극적인 시험과 개발이 진행되었다.[3] 1942년 7월 24일, 웨일스 라이아더 근처 난트-이-그로의 사용되지 않는 댐에서 폭약실험이 이루어져 이러한 무기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극적인 성공" 시연이 이루어졌다.[4]

A.R. 콜린스는 바네스 월리스 외에도 바운싱 폭탄과 목표물에 대한 전달 방법 개발에 광범위하게 기여한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1982년에 발표된 논문에서 콜린스 자신은 월리스가 이 프로젝트 개발에서 "전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으며, 특히, 예를 들어, 윌리엄 글랜빌 경, G. 찰스워스 박사, A.R. 콜린스 박사 등 도로 연구소의 다른 사람들이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분명히 밝혔다.[5]

개발 과정에서 추가된 이 무기의 독특한 특징은 역회전으로, 이는 비행의 높이와 안정성을 향상시키고 튀어오르는 능력을 향상시켰으며, 무기가 목표물에 도달했을 때 접촉하거나 최소한 근접하도록 돕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역회전은 클럽에 의해 맞는 방식 때문에 골프 공의 비행에서 일반적인 특징이며,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개발된 모든 형태의 무기는 일반적으로 "골프 지뢰"로 알려졌고, 일부 구형 프로토타입은 딤플이 특징이었다.

1942년 11월, 댐 공격용으로 월리스의 무기의 더 큰 버전을, 선박 공격용으로 더 작은 버전을 고안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각각 "업킵"과 "하이볼"이라는 암호명으로 명명되었다.[11] 세 번째 버전인 "베이스볼"이라는 암호명도 영국 해군 연안 부대의 어뢰정 또는 모터 건 보트에서 사용할 계획이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12] 업킵과 하이볼의 개발, 시험 및 사용은 동시에 수행될 예정이었는데, 이는 기습 효과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가 표적에 독립적으로 사용된다면, 유사한 표적에 대한 독일 방어 시설이 강화되어 다른 하나를 쓸모 없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13] 그러나 업킵은 마감 기한을 두고 개발되었는데, 이는 최대 효율성이 계절적 강우량으로 목표 댐이 최대한 가득 차는 것에 달려 있었고, 이에 대한 최신 날짜는 1943년 5월 26일로 설정되었다.[14] 결과적으로, 이 날짜가 다가오면서 하이볼은 개발 중이었지만, 업킵의 개발은 완료되었고, 업킵을 독립적으로 배치하기로 결정했다.[15]

1974년 1월, 영국의 "30년 규칙"에 따라 업킵과 하이볼의 비밀 정부 파일이 공개되었지만, 무기의 기술적인 세부 사항은 1963년에 공개되었다.

201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공학부의 휴 헌트 박사가 이끄는 프로젝트에서 반동 폭탄을 재현하고, 댐버스터 작전과 유사한 공습에서 시험했다. 버팔로 항공사(Buffalo Airways)가 더글러스 DC-4(Douglas DC-4)를 사용하여 임무를 수행할 회사로 선정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캐나다와 호주에서는 다큐멘터리 텔레비전 쇼 ''댐버스터즈 플라이 어게인(Dambusters Fly Again)''으로, 영국에서는 ''댐버스터즈: 바운싱 밤 만들기(Dambusters: Building the Bouncing Bomb)''으로, 미국에서는 노바(Nova) 에피소드 ''히틀러의 댐 폭격(Bombing Hitler's Dams)''으로 기록되었다.[50][51][52][53][54] 이 다큐멘터리의 촬영은 아이스 파일럿츠 NWT(Ice Pilots NWT) 리얼리티 텔레비전 시리즈의 일부로 기록되었으며, 버팔로 항공사의 이야기를 다룬 시즌 3 에피소드 2 "댐버스터"에서 방영되었다.[55]

1941년, 버니스 월리스는 19세기 영국 해군이 포탄이 수면에서 도약함으로써 사거리가 늘어나는 것을 알고 항만 방어용 포 등에 이용했고, 프랑스의 요새 공성 명수 보방은 도약 사격을 활용했다는 사실에서 힌트를 얻어 반동 폭탄을 생각해냈다.

3. 종류



1942년 4월 반스 월리스의 논문 "구형 폭탄 - 수면 어뢰"는 무기가 물 위를 튀어 목표물을 타격한 다음 수중으로 가라앉아 심해 폭뢰와 유사하게 폭발하는 공격 방식을 설명했다. 표면 위를 튀어오르게 하면 목표물을 직접 조준할 수 있고 수중 방어 시설을 피할 수 있으며, 표면 위의 일부 방어 시설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무기는 수중 폭발의 전형적인 "버블 펄스" 효과를 활용하여 효율성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월리스의 논문은 적절한 목표물로 수력 발전 댐과 "노르웨이 피오르와 같이 잔잔한 물에 정박된 부유 선박"을 식별했다.[1]

두 종류의 목표물 모두 월리스가 이 논문을 쓸 당시 이미 영국 군에게 매우 중요한 대상이었다. 독일 수력 발전 댐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부터 중요한 폭격 목표물로 확인되었지만, 기존의 폭탄과 폭격 방법으로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어뢰 그물이 기존 어뢰의 공격으로부터 댐을 보호했고, 댐을 파괴할 실용적인 수단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2년, 영국은 북대서양에서 연합군 선박에 위협이 되었고 여러 차례의 영국 공격에도 살아남은 독일 전함 티르피츠/Tirpitzde를 파괴할 수단을 찾고 있었다. 이 시기, 티르피츠는 노르웨이 피오르에 정박하여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으며, 이는 마치 "기동 함대"와 같은 효과를 냈다.[2]

결과적으로 월리스가 제안한 무기는 주목을 받았고 적극적인 시험과 개발이 진행되었다.

1942년 7월 24일, 웨일스 라이아더 근처 난트-이-그로의 사용되지 않는 댐에서 이러한 무기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극적인 성공" 시연이 이루어졌다. 이는 127kg의 폭약을 포함하는 기뢰를 사용하여 댐 측면에 수중에서 폭발시킨 시험이었다. 이 시험은 당시 하먼즈워스에 위치했던 도로 연구소의 과학 담당관인 A.R. 콜린스가 수행했다.[4]

A.R. 콜린스는 바네스 월리스 외에도 바운싱 폭탄과 목표물에 대한 전달 방법 개발에 광범위하게 기여한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1982년에 발표된 논문에서 콜린스 자신은 월리스가 이 프로젝트 개발에서 "전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으며, 특히, 예를 들어, 윌리엄 글랜빌 경, G. 찰스워스 박사, A.R. 콜린스 박사 등 도로 연구소의 다른 사람들이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분명히 밝혔다.[5]

개발 과정에서 추가된 이 무기의 독특한 특징은 역회전으로, 이는 비행의 높이와 안정성을 향상시키고 튀어오르는 능력을 향상시켰으며, 무기가 목표물에 도달했을 때 접촉하거나 최소한 근접하도록 돕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역회전은 클럽에 의해 맞는 방식 때문에 골프 공의 비행에서 일반적인 특징이며,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개발된 모든 형태의 무기는 일반적으로 "골프 지뢰"로 알려졌고, 일부 구형 프로토타입은 딤플이 특징이었다.

1942년 11월, 댐 공격용으로 월리스의 무기의 더 큰 버전을, 선박 공격용으로 더 작은 버전을 고안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각각 "업킵"과 "하이볼"이라는 암호명으로 명명되었다.[11] 세 번째 버전인 "베이스볼"이라는 암호명도 영국 해군 연안 부대의 어뢰정 또는 모터 건 보트에서 사용할 계획이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12]

업킵과 하이볼의 개발, 시험 및 사용은 동시에 수행될 예정이었는데, 이는 기습 효과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가 표적에 독립적으로 사용된다면, 유사한 표적에 대한 독일 방어 시설이 강화되어 다른 하나를 쓸모 없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13] 그러나 업킵은 마감 기한을 두고 개발되었는데, 이는 최대 효율성이 계절적 강우량으로 목표 댐이 최대한 가득 차는 것에 달려 있었고, 이에 대한 최신 날짜는 1943년 5월 26일로 설정되었다.[14] 결과적으로, 이 날짜가 다가오면서 하이볼은 개발 중이었지만, 업킵의 개발은 완료되었고, 업킵을 독립적으로 배치하기로 결정했다.[15]

1974년 1월, 영국의 "30년 규칙"에 따라 업킵과 하이볼의 비밀 정부 파일이 공개되었지만, 무기의 기술적인 세부 사항은 1963년에 공개되었다.

위에 나열된 두 종류 외에도, 1942년 12월 해군성은 어뢰정에서 사용할 더 작은 무기를 제안했다. "베이스볼"(Baseball)로 알려진 이 무기는 약 136kg의 무게에 절반이 폭발물로 채워진 튜브 발사형 무기였으며, 예상 사거리는 약 914m~1,097m였다.[41]

=== 대함 폭탄 (하이볼, Highball) ===

애보츠버리 스와너리(도싯)에 전시된 ''하이볼'' 바운싱 폭탄 프로토타입


최초로 고안된 반동 폭탄은 전함 공격용 코드네임 하이볼이었다. 하이볼 폭탄은 모스키토에 2발 장착 가능했다.

1942년 4월, 반동 폭탄 개발자인 반스 왈리스는 이 폭탄이 본질적으로 해군 항공대를 위한 무기라고 설명했다.[25] 1943년 2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의사록에서 티르피츠를 처리하기 위한 계획에 대해 언급하며 해군용 무기로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5] 그러나 하이볼은 ''티르피츠''를 포함한 다양한 목표물을 공격하기 위해 영국 공군 무기로 개발되었다.

1942년 11월부터 하이볼 개발과 테스트는 업키프와 함께 진행되었으며, 체실 해변과 리컬버에서 프로토타입 투하가 이루어졌다.

1943년 4월 중순 리컬버에서 실시된 테스트에서 하이볼의 구형 케이스는 업키프와 유사한 손상을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29] 강철판으로 강화된 케이스 설계를 변경했지만, 4월 30일에 투하된 불활성 충전재나 폭발물이 없는 프로토타입은 "전혀 손상되지 않은" 상태였다.[29] 5월 2일 추가 테스트에서 이 프로토타입 두 개는 의도한 대로 물 표면을 가로질러 튀어 올랐지만, 두 개 모두 찌그러진 것으로 확인되었다.[30]

추가 테스트는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의 기르반 북쪽에 있는 RAF 턴베리에서 로흐 스트리번에 정박해 있던 전 프랑스 전함 쿠르베를 목표로 수행되었다.[31] 그러나 여러 오류로 인해 프로토타입은 목표물을 너무 빠르고 세게 타격했다.[32]

이러한 상황에서 업키프는 하이볼과 독립적으로 배치되었다. 1943년 3월 말, 제618비행대대는 하이볼로 ''티르피츠''를 공격하는 "서번트 작전"을 위해 RAF 스키튼에서 창설되었다.[34] 그러나 1943년 9월, 하이볼과 발사 메커니즘의 지속적인 문제로 인해 제618비행대대의 대부분이 "다른 임무에 투입"되면서 서번트 작전은 사실상 포기되었다.[35]

1944년 5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위해 예비에 있던 말라야를 대상으로 한 테스트에서 하이볼 프로토타입이 배 측면에 구멍을 냈다.[37] 5월 17일, 처음으로 하이볼 프로토타입이 1초 간격으로 두 개씩 발사되었다.[37]

1944년 5월 말, 하이볼 발사 문제는 조준 문제와 함께 해결되었다. 하이볼은 극이 평평한 구체였으며, 폭발물은 토르펙스였다. 폭발은 약 8.2m 깊이에서 발사하도록 설정된 단일 수압 권총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무게는 580kg였고, 그 중 272kg가 토르펙스였다.

하이볼은 작전에 사용된 적이 없었다. 1944년 11월 12일, 케테키즘 작전에서 톨보이 폭탄을 장착한 랭카스터기가 ''티르피츠''를 침몰시켰다.[39] 하이볼 개발 및 이후에 다른 잠재적 목표물이 고려되었지만,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기각되었다.[39]

1945년 1월, USAAF의 더글러스 A-26 침입자 중형 폭격기가 하이볼을 탑재하도록 개조되었다.[40] 플로리다 에글린 필드 근처 초크토해치만 만에서 투하 테스트가 수행되었지만, 1945년 4월 28일 치명적인 추락 사고가 발생하면서 프로그램이 중단되었다.[40]

=== 대댐 공격용 폭탄 (업키프, Upkeep) ===

반동 폭탄의 원리 애니메이션. 폭탄은 호수 표면 근처에 투하되어 수평에 가깝게, 높은 속도로, 백스핀을 가하며 이동하기 때문에 가라앉는 대신 여러 번 튕긴다. 각 튕김은 이전 튕김보다 작다. "폭탄 투하"는 마지막 튕김에서 폭탄이 목표물에 가깝게 도달하여 가라앉도록 계산된다. 수압 피스톨은 적절한 깊이에서 폭발하여 파괴적인 충격파를 생성한다.


뫼네 댐이 Upkeep 폭탄에 의해 파괴됨


"업키프"(Upkeep)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공군이 독일의 수력 발전 댐을 파괴하기 위해 개발한 대형 반동 폭탄이다.[24] 반스 윌리스가 고안하였으며,[24] 1943년 초에 "댐에 대한 폭격(Air Attack on Dams)"이라는 보고서를 완성했다.

영국 공군은 독일의 수력 발전 댐이 전쟁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폭약과 높은 명중률이 필요했다. 독일이 댐 상류에 어뢰 방어망을 설치했기 때문에 어뢰 공격은 효과가 없다고 판단했다.

폭탄은 수면 위를 튕겨 어뢰 방어망을 넘어 댐에 도달하도록 설계되었다. 이를 위해 폭탄은 투하 전 분당 500회전의 백스핀이 걸렸고, 386~402 km/h의 속도와 18m의 고도에서 투하되었다.[24] 정확한 고도를 유지하기 위해 2개의 스포트라이트를 사용했다.[24] 댐 앞에서 가라앉은 폭탄은 수압 감응식 신관에 의해 수심 9.1m에서 폭발하도록 설계되었다.[24]

정식 명칭 "Upkeep store"라고 불리는 이 폭탄은, 길이 152cm, 직경 142cm의 원통형이었으며, 무게는 4,200kg이고, 이 중 3,000kg는 토펙스 장약이었다.

1942년 12월 도싯주 체실 해변에서 불활성 물질을 채운 프로토타입 시험이 수행되었고,[16] 1943년 4월과 5월에는 켄트주 레쿨버에서 비커스 웰링턴 폭격기를 사용한 시험이 이루어졌다.[16] 최종 시험은 1943년 5월 13일 켄트주 브로드스테어스 앞바다에서 실시되었으며, 폭탄은 약 731.5미터 거리를 7번 튕긴 후 가라앉아 폭발했다.[19]

Upkeep 폭탄은 1943년 5월 채스타이즈 작전에서 제617비행대가 사용했다. 작전 결과, 독일 공업 지대의 댐 2곳이 파괴되고 4곳에 피해를 입혔다.[23] 이 공로로 지휘관 가이 깁슨 중령은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23] 그러나 이 작전으로 영국군은 19대의 항공기 중 8대를 잃었고, 113명의 승무원 중 53명이 사망했다.[23] 또한, 이 파괴로 인해 약 16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여기에는 약 1000명의 수감자와 노예 노동자가 포함되었다.[23]

Upkeep은 이후 작전에서 다시 사용되지 않았고, 남은 폭탄들은 북해에 버려졌다.[24]

3. 1. 대함 폭탄 (하이볼, Highball)

1942년 4월, 반동 폭탄 개발자인 반스 왈리스는 이 폭탄이 본질적으로 해군 항공대를 위한 무기라고 설명했다.[25] 1943년 2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의사록에서 티르피츠를 처리하기 위한 계획에 대해 언급하며 해군용 무기로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5] 그러나 하이볼은 ''티르피츠''를 포함한 다양한 목표물을 공격하기 위해 영국 공군 무기로 개발되었다.

1942년 11월부터 하이볼 개발과 테스트는 업키프와 함께 진행되었으며, 체실 해변과 리컬버에서 프로토타입 투하가 이루어졌다. 1943년 4월 중순 리컬버에서 실시된 테스트에서 하이볼의 구형 케이스는 업키프와 유사한 손상을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29] 강철판으로 강화된 케이스 설계를 변경했지만, 4월 30일에 투하된 불활성 충전재나 폭발물이 없는 프로토타입은 "전혀 손상되지 않은" 상태였다.[29] 5월 2일 추가 테스트에서 이 프로토타입 두 개는 의도한 대로 물 표면을 가로질러 튀어 올랐지만, 두 개 모두 찌그러진 것으로 확인되었다.[30]

추가 테스트는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의 기르반 북쪽에 있는 RAF 턴베리에서 로흐 스트리번에 정박해 있던 전 프랑스 전함 쿠르베를 목표로 수행되었다.[31] 그러나 여러 오류로 인해 프로토타입은 목표물을 너무 빠르고 세게 타격했다.[32]

이러한 상황에서 업키프는 하이볼과 독립적으로 배치되었다. 1943년 3월 말, 제618비행대대는 하이볼로 ''티르피츠''를 공격하는 "서번트 작전"을 위해 RAF 스키튼에서 창설되었다.[34] 그러나 1943년 9월, 하이볼과 발사 메커니즘의 지속적인 문제로 인해 제618비행대대의 대부분이 "다른 임무에 투입"되면서 서번트 작전은 사실상 포기되었다.[35]

1944년 5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위해 예비에 있던 말라야를 대상으로 한 테스트에서 하이볼 프로토타입이 배 측면에 구멍을 냈다.[37] 5월 17일, 처음으로 하이볼 프로토타입이 1초 간격으로 두 개씩 발사되었다.[37]

1944년 5월 말, 하이볼 발사 문제는 조준 문제와 함께 해결되었다. 하이볼은 극이 평평한 구체였으며, 폭발물은 토르펙스였다. 폭발은 깊이에서 발사하도록 설정된 단일 수압 권총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무게는 였고, 그 중 가 토르펙스였다.

하이볼은 작전에 사용된 적이 없었다. 1944년 11월 12일, 케테키즘 작전에서 톨보이 폭탄을 장착한 랭카스터기가 ''티르피츠''를 침몰시켰다.[39] 하이볼 개발 및 이후에 다른 잠재적 목표물이 고려되었지만,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기각되었다.[39]

1945년 1월, USAAF의 더글러스 A-26 침입자 중형 폭격기가 하이볼을 탑재하도록 개조되었다.[40] 플로리다 에글린 필드 근처 초크토해치만 만에서 투하 테스트가 수행되었지만, 1945년 4월 28일 치명적인 추락 사고가 발생하면서 프로그램이 중단되었다.[40]

최초로 고안된 반동 폭탄은 전함 공격용 코드네임 하이볼이었다. 하이볼 폭탄은 모스키토에 2발 장착 가능했다.

3. 2. 대댐 공격용 폭탄 (업키프, Upkeep)



"업키프"(Upkeep)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공군이 독일의 수력 발전 댐을 파괴하기 위해 개발한 대형 반동 폭탄이다.[24] 반스 윌리스가 고안하였으며,[24] 1943년 초에 "댐에 대한 폭격(Air Attack on Dams)"이라는 보고서를 완성했다.

영국 공군은 독일의 수력 발전 댐이 전쟁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폭약과 높은 명중률이 필요했다. 독일이 댐 상류에 어뢰 방어망을 설치했기 때문에 어뢰 공격은 효과가 없다고 판단했다.

1943년 초, 반스 윌리스는 "댐에 대한 폭격(Air Attack on Dams)"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완성했다.

폭탄은 수면 위를 튕겨 어뢰 방어망을 넘어 댐에 도달하도록 설계되었다. 이를 위해 폭탄은 투하 전 분당 500회전의 백스핀이 걸렸고, 386~402 km/h의 속도와 18m의 고도에서 투하되었다.[24] 정확한 고도를 유지하기 위해 2개의 스포트라이트를 사용했다.[24] 댐 앞에서 가라앉은 폭탄은 수압 감응식 신관에 의해 수심 9.1m에서 폭발하도록 설계되었다.[24]

정식 명칭 "Upkeep store"라고 불리는 이 폭탄은, 길이 152cm, 직경 142cm의 원통형이었으며, 무게는 4,200kg이고, 이 중 3,000kg는 토펙스 장약이었다.

1942년 12월 도싯주 체실 해변에서 불활성 물질을 채운 프로토타입 시험이 수행되었고,[16] 1943년 4월과 5월에는 켄트주 레쿨버에서 비커스 웰링턴 폭격기를 사용한 시험이 이루어졌다.[16] 최종 시험은 1943년 5월 13일 켄트주 브로드스테어스 앞바다에서 실시되었으며, 폭탄은 약 731.5미터 거리를 7번 튕긴 후 가라앉아 폭발했다.[19]

Upkeep 폭탄은 1943년 5월 채스타이즈 작전에서 제617비행대가 사용했다. 작전 결과, 독일 공업 지대의 댐 2곳이 파괴되고 4곳에 피해를 입혔다.[23] 이 공로로 지휘관 가이 깁슨 중령은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23] 그러나 이 작전으로 영국군은 19대의 항공기 중 8대를 잃었고, 113명의 승무원 중 53명이 사망했다.[23] 또한, 이 파괴로 인해 약 16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여기에는 약 1000명의 수감자와 노예 노동자가 포함되었다.[23]

Upkeep은 이후 작전에서 다시 사용되지 않았고, 남은 폭탄들은 북해에 버려졌다.[24]

4. 실전 사용

채스타이즈 작전은 성공했지만, 19대 중 8대가 귀환하지 못했다. 이후 업키프 폭탄이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한편, 하이볼 폭탄은 제618비행대대의 모스키토에 의해 독일 전함 티르피츠 공격(서번트 작전)에 사용될 예정이었지만, 작전이 중지되었다. 이후 태평양에서 일본 함선에 사용하려 했지만, 종전으로 인해 사용되지 않았다.

업키프 폭탄과 하이볼 폭탄은 국가 기밀이었지만, 영국 공문서의 "30년 규칙(thirty year rule)"에 따라 1974년 1월에 공개되었다.

전후, 모든 업키프 폭탄은 처분되었고, 콘크리트가 채워진 폭탄은 켄트주 리컬버(Reculver)에서 시험 및 폭격 훈련에 사용된 후, 복원되어 각지에서 전시되고 있다.

4. 1. 채스타이즈 작전 (Operation Chastise)

채스타이즈 작전은 성공했지만, 19대 중 8대가 귀환하지 못했다. 이후 업키프 폭탄이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한편, 하이볼 폭탄은 제618비행대대의 모스키토에 의해 독일 전함 티르피츠 공격(서번트 작전)에 사용될 예정이었지만, 작전이 중지되었다. 이후 태평양에서 일본 함선에 사용하려 했지만, 종전으로 인해 사용되지 않았다.

업키프 폭탄과 하이볼 폭탄은 국가 기밀이었지만, 영국 공문서의 "30년 규칙(thirty year rule)"에 따라 1974년 1월에 공개되었다.

전후, 모든 업키프 폭탄은 처분되었고, 콘크리트가 채워진 폭탄은 켄트주 리컬버(Reculver)에서 시험 및 폭격 훈련에 사용된 후, 복원되어 각지에서 전시되고 있다.

4. 2. 기타 사용

채스타이즈 작전은 성공했지만, 19대 중 8대가 귀환하지 못했다. 이후 업키프 폭탄이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한편, 하이볼 폭탄은 제618비행대대의 모스키토에 의해 독일 전함 티르피츠 공격(서번트 작전)에 사용될 예정이었지만, 작전이 중지되었다. 이후 태평양에서 일본 함선에 사용하려 했지만, 종전으로 인해 사용되지 않았다.

업키프 폭탄과 하이볼 폭탄은 국가 기밀이었지만, 영국 공문서의 "30년 규칙(thirty year rule)"에 따라 1974년 1월에 공개되었다.

전후, 모든 업키프 폭탄은 처분되었고, 콘크리트가 채워진 폭탄은 켄트주 리컬버(Reculver)에서 시험 및 폭격 훈련에 사용된 후, 복원되어 각지에서 전시되고 있다.

5. 타국의 반동 폭탄



채스타이즈 작전 이후, 독일군은 Flt Lt 바로우가 지휘하는 랭커스터가 고압선에 부딪혀 Rees 근처 Haldern에서 추락한 잔해에서 온전한 상태의 업킵 폭탄을 발견했다. 폭탄은 투하되지 않았고 항공기는 육지에 추락했기 때문에 폭발 장치는 작동되지 않았다.[48]

독일군은 채스타이즈 작전 이후 불발된 업키프 폭탄을 숲 속에서 발견했다. 이것이 병기 전문가 등에 의해 분석되어 1943년 6월 17일,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보고되었다.[49] 코드명 "Kurt" 또는 "Emil"인 385kg 버전의 업킵이 나치 독일의 4개 시설 중 하나인 Luftwaffe의 ''Erprobungsstelle'', 즉 독일 발트해 해안의 트라페뮌데에 있는 "실험 기지"에서 제작되었다.[49] 그 후, 독일 공군에 의해 중량 385kg의 반동 폭탄이 시험되었다. 이것은 트라페뮌데에 있던 독일 공군 연구 센터에서 대 영국 함정 공격용으로 설계된 것이다.[49]

백스핀의 중요성은 이해되지 않았고, 포케불프 Fw 190를 이용한 시험은 폭탄이 투하된 속도와 일치하여 항공기에 위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부스터 로켓으로 이를 수정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이 프로젝트는 1944년에 취소되었다.[49] 독일군의 반동 폭탄은 투하 전 폭탄에 대한 백스핀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Fw 190에 의해 행해진 실험에서는, 투하한 항공기와 같은 속도로 폭탄이 도약하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판단되었다. 이 문제를 로켓 부스터로 해결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아 1944년에 프로젝트는 중지되었다.[49]

소련군도 제2차 세계 대전 중 반동 폭탄을 사용했다. 1944년 7월 16일, 핀란드의 코트카에서 독일군의 방공함 니오베를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다. 소련군의 A-20 폭격기에서 투하된 폭탄 중 2발의 반동 폭탄과 7발의 일반 폭탄이 명중하여 니오베는 격침되었다. 사용된 폭탄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며, 반동 폭격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1. 독일



채스타이즈 작전 이후, 독일군은 Flt Lt 바로우가 지휘하는 랭커스터가 고압선에 부딪혀 Rees 근처 Haldern에서 추락한 잔해에서 온전한 상태의 업킵 폭탄을 발견했다. 폭탄은 투하되지 않았고 항공기는 육지에 추락했기 때문에 폭발 장치는 작동되지 않았다.[48]

독일군은 채스타이즈 작전 이후 불발된 업키프 폭탄을 숲 속에서 발견했다. 이것이 병기 전문가 등에 의해 분석되어 1943년 6월 17일,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보고되었다.[49] 코드명 "Kurt" 또는 "Emil"인 385kg 버전의 업킵이 나치 독일의 4개 시설 중 하나인 Luftwaffe의 ''Erprobungsstelle'', 즉 독일 발트해 해안의 트라페뮌데에 있는 "실험 기지"에서 제작되었다.[49] 그 후, 독일 공군에 의해 중량 385kg(850 파운드)의 반동 폭탄이 시험되었다. 이것은 트라페뮌데(Travemünde)에 있던 독일 공군 연구 센터에서 대 영국 함정 공격용으로 설계된 것이다.[49]

백스핀의 중요성은 이해되지 않았고, 포케불프 Fw 190를 이용한 시험은 폭탄이 투하된 속도와 일치하여 항공기에 위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부스터 로켓으로 이를 수정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이 프로젝트는 1944년에 취소되었다.[49] 독일군의 반동 폭탄은 투하 전 폭탄에 대한 백스핀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Fw 190에 의해 행해진 실험에서는, 투하한 항공기와 같은 속도로 폭탄이 도약하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판단되었다. 이 문제를 로켓 부스터로 해결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아 1944년에 프로젝트는 중지되었다.[49]

5. 2. 소련

소련군도 제2차 세계 대전 중 반동 폭탄을 사용했다. 1944년 7월 16일, 핀란드의 코트카에서 독일군의 방공함 니오베를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다. 소련군의 A-20 폭격기에서 투하된 폭탄 중 2발의 반동 폭탄과 7발의 일반 폭탄이 명중하여 니오베는 격침되었다. 사용된 폭탄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며, 반동 폭격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6. 한국전쟁과의 연관성

참조

[1] 서적 2002
[2] 서적 2002
[3] 웹사이트 The Differential Analyser Explained https://web.archive.[...] Auckland Meccano Guild 2010-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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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웹사이트 Designing the UPKEEP Mine http://www.rafmuseum[...] Royal Air Force Museum 2010-08-13
[21] 웹사이트 Diagrams from document produced by Dr Wallis to explain how the bouncing bomb Upkeep worked http://www.nationala[...] The National Archives 2010-08-10
[22] 서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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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뉴스 The day the Dam Busters returned... in Canada https://www.telegrap[...] 2011-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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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웹사이트 "Bombing Hitler's Dams" https://www.pbs.org/[...] PBS, WGBH, Nova 2012-01-12
[55] 웹사이트 Ice Pilots NWT: Season 3, Episode 2: Dambusters http://www.icepilots[...] History Television 2011-11-11
[56] 서적 Flower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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