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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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리섬은 인도네시아의 섬으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 거주했던 기원전 2000년경부터 역사가 시작되었다. 11세기에는 발리 왕조가 동부 자바의 쿠디리 왕국과 관계를 맺었고, 16세기에는 마자파힛 왕조의 쇠퇴로 힌두 자바 문화가 유입되었다. 19세기 말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를 거쳐, 1942년 일본군 점령, 인도네시아 독립 후 1950년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통합되었다. 1970년대부터 관광 개발이 시작되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이슬람 과격파의 테러 공격을 겪기도 했다. 발리섬은 화산 지형, 사바나 기후를 보이며, 발리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 관광, 농업, 공예가 주요 경제 활동이며, 가믈란 음악, 춤, 그림자극, 공예 등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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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섬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섬 이름 | 발리섬 |
주 | 발리주 |
위치 | 소순다 열도 |
최대 도시 | 덴파사르 |
지리 정보 | |
면적 | 5,632.86 |
최고 고도 | 3,142 |
인구 정보 | |
인구 (2020년) | 4,317,404명 |
인구 (2010년) | 3,891,428명 |
인구 밀도 | 690.8 |
언어 정보 | |
발리어 사용 비율 | 89% |
자바어 사용 비율 | 7% |
기타 정보 | |
시간대 | GMT+8 |
공식 웹사이트 | 발리 주 공식 웹사이트 |
로마자 표기 | Bal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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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기원전 2000년경에는 대만에서 기원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 거주하고 있었다.[9] 기원전 1세기경부터 교역을 통해 인도와 중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동손 문화의 영향을 받은 구리 북(銅鼓)이 발견되는 등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면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문명이 시작하고 있었다.
11세기에 발리 왕조는 동부 자바의 쿠디리 왕국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수박 등 현재까지 이어지는 전통 문화 및 관습은 이 시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카양간 티가 사원 건립은 자바에서 건너온 힌두 승려 쿠트란에 의해 확장되었다.[10] 1284년, 발리는 신가사리 왕조(Kerajaan Singhasari)의 쿠루타나가라 왕에게 정복되어 속국이 되었으나, 8년 후 마자파힛 왕조에 의해 신가사리 왕조가 멸망하면서 다시 자유를 얻었다.
1343년, 발리는 마자파힛 왕국의 침입으로 와르마데와 왕조가 멸망하고, 젤젤 왕국이 건설되어 마자파힛 왕국의 간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11]
16세기에 마자파힛 왕국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쇠퇴하면서, 왕국의 신하, 승려, 공예사들이 발리로 피난하여 힌두 자바 문화가 유입되었다. 고전 문학, 그림자극, 음악, 조각 등이 발전하였고, 자바에서 건너온 고승 댄 할 니라르타는 타나 롯 사원과 울루와뚜 사원 등 여러 사원을 건립하여 종교적인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1651년 겔겔 왕이 신하의 반란을 계기로 클룽쿵으로 천도하자, 그 실권은 각지에 거점을 둔 귀족들의 손으로 넘어갔다.[12][13]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각지의 귀족들은 자신이 마자파히트 정복 시대 귀족의 정통 후손임을 자칭하였고,[12][13] 클룽쿵 왕국 외에 7개의 소국(타바난 왕국, 바두 왕국, 기아냐르 왕국, 카랑아슴 왕국, 반리 왕국, 문위 왕국)이 난립하여, 발리 섬은 군웅할거의 시대를 맞게 된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비롯한 유럽 세력의 진출이 보였지만, 특산품이 없는 발리 섬은 식민지 통치상 특별히 중요시되지 않고, 각 지역 왕족의 지배에 의한 발리인 자치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발리 섬에 처음 상륙한 유럽인은 1597년 네덜란드 상선 승무원이었다.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는 발리 왕국의 권력 구조를 "극장 국가"의 은유로 그려냈다. 기어츠에 따르면, 발리 국가는 왕과 군주가 흥행주, 승려가 감독, 농민이 조역과 무대 장치 담당과 관객인 듯한 극장 국가였다.[14] 그러나 이러한 기어츠의 극장 국가론은 이후 "세련된 상징 세계의 해독은 시간 없는 고정된 세계를 그려내고, 실천이 만들어지는 역사 과정을 상실"[15]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21세기 초, 의례 세계와 권력 세계의 이항 대립을 극복한 분석을 통해 왕국의 역사 과정에는 큰 유동성이 존재했던 것이 밝혀졌고, "왕국의 유동성을 제압하기 때문에 왕의 존재와 그 힘이 명확해지고, 그 힘에 의해 계층 질서가 지탱되고 있다"[15]는 것이 그려졌다.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풍에 따라 네덜란드는 발리섬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1846년 발리 북동부의 부레렝과 젬브라나를 점령하고(발리 전쟁), 1894년에는 롬복 전쟁을 일으켜 롬복국과 카랑가숨 왕국을 병합했다. 1908년에는 마지막 남은 클룽쿵 왕국을 멸망시키면서 발리섬 전체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발리 왕족과 귀족들이 보여준 ‘푸푸탄’(무저항 집단 자결)은 네덜란드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전통 문화를 보존하는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16]
이러한 정책은 1917년 발리섬 남부 대지진 이후의 재난과 맞물려 더욱 강화되었다. 지진, 스페인 독감, 쥐의 대량 발생 등으로 인한 피해는 발리인들에게 신의 분노로 받아들여졌고,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바론 행렬과 상향 드다리와 같은 주술적 의례가 성행했다.[16] 네덜란드는 이러한 현상을 발리의 전통 문화로 이해하고 보호 정책을 추진했다.[17] 건축가 모엔은 발리의 전통 문화를 보존하려 했으나, 결국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8]
네덜란드의 문화 보호 정책을 배경으로 발리는 "마지막 낙원"으로 서구에 소개되었고,[19] 그레고어 크라우제의 사진집에 매료된 서양 예술가들이 발리를 방문하기 시작했다.[20] 1932년 찰리 채플린도 발리를 방문하여 발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글을 남겼다.[20] 1920년대 연간 1,200~3,000명 수준이던 관광객은 1930년대 중반에는 연간 3만 명에 달했다.[21]
1930년대 발리는 "발리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여 가믈란, 레공, 케착 등 현재 발리 관광의 중심이 되는 예술 양식이 탄생했다. 독일인 화가이자 음악가인 발터 스피스는 우붓의 영주 초코르다 스카와티 일족의 초청을 받아 발리에 머물며, 미겔 코바루비어스, 콜린 맥피, 마가렛 미드, 그레고리 베이트슨, 비키 바움 등과 교류하며 "발리의 발리화"를 추진했다.[22]
한편, 네덜란드는 카스트 제도를 고정화하고 왕족을 통한 간접 지배를 실시하며, 농업 시설 정비, 상업 작물 재배 장려, 학교 설립, 나체 금지 등의 근대화 정책을 시행했다. 귀족과 평민 간의 격차는 커졌지만, 노예제 폐지로 평민 간의 신분 차이는 줄어들어 "평등한 농촌 사회"라는 특성이 자리 잡게 되었다.[23]
1942년 2월, 일본군이 발리를 침공하여 발리 해전에서 승리하였고, 20일 만에 네덜란드 군은 항복했다.[24] 처음에는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고 환영받았지만,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와 다를 바 없는 통치 체제가 구축되었고, 전쟁으로 인한 징발로 인해 불만이 커졌다.[77] 구스티 응우라 라이는 발리인들과 함께 자유군을 결성했다.[77] 1944년 중반부터 자바와 연계한 항일 운동이 전개되었고,[24] 같은 해 9월, 인도네시아 독립을 용인하는 코이소 성명이 발표되었다.[77] 1945년 4월 수카르노가 발리에 찾아와 인도네시아 독립의 필요성을 연설하였고, 7월에 "소순다 건국 동지회"가 결성되었다.[77] 미우라 죠(三浦襄)는 이 동지회에 참여하여 사무총장에 취임,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활동했으나, 곧 패전을 맞이하여 독립 계획은 중단되었다. 1945년 9월 7일, 미우라 죠(三浦襄)는 일본의 국책을 강요하여 무리한 협력을 시켰던 것을 사죄하며 자결했다.
1945년 8월 17일, 수카르노가 자카르타에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했다.[77] 발리에서는 친공화국파에 의한 통치 체제 확립이 계획되었으나, 1946년 3월 네덜란드가 다시 상륙하면서 실패로 끝났다.[77] 네덜란드의 상륙으로 격렬한 게릴라전이 전개되었고, 1946년 11월 20일, 구스티 응우라 라이 중령이 전사하고 그가 이끌던 게릴라 부대도 전멸했다.[77] 이 전투에는 잔류 일본군도 가세했으며, 조선인 양칠성도 독립영웅으로 안장되었다.[77]
1946년 12월, 네덜란드는 발리를 "동인도네시아"에 귀속시키고 자치령으로 선언하여 간접 통치를 재개했다.[77] 그러나 공화국파와 친네덜란드파의 항쟁은 계속되었고, 1949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주권을 이양한 후 공화국파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77] 1950년 발리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통합되었다.[77] 수카르노 시대의 발리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이 심화되었다.[78] 1965년 9월 30일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 학살이 발생하여 발리에서만 10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전해진다.[78]
수하르토의 개발 독재 시대에 접어들면서 발리섬은 평온을 되찾았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관광을 통한 외화 획득을 목표로 관광 개발을 시작했고, 발리섬은 1970년대 이후 세계적인 관광지로 성장하게 되었다.[27]
1963년, 일본으로부터의 전쟁 배상금으로 사누르에 발리 비치 호텔이 건설되어 1966년에 개업했다. 1967년에는 응우라라이 공항이 개항하여 사누르는 대규모 관광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사누르와 꾸따는 무계획적인 개발로 인프라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자카르타 중앙 정부는 누사두아를 고급 리조트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석유 파동 등의 영향으로 개발이 지연되어 1983년에 누사두아 해변이 개장되었다. 이후 누사두아는 세계적인 호텔들이 있는 리조트로 발전했다.
발리섬의 관광 개발은 중앙 정부 주도로 진행되어 관광 관련 세수 대부분이 중앙으로 흡수되었다.[29] 그러나 현지 주민들은 중앙 정부 주도의 "만들어진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전통 가치를 자각하며, 단일적인 이미지와 "관광의 시선"에 맞서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30]
1989년, 발리 주 정부는 독자적인 관광 개발 마스터플랜을 검토, 가자마다 대학교의 제안을 채택하여 종합 관광 마을 형태의 개발을 시작했다. 풍글리프란, 자티루이 등이 "관광 마을"로 정비되었다.
수하르토 정권 말기에는 중앙 주도의 대규모 개발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아닷트에 뿌리를 둔 환경 보호 운동이 전개되었다.[32] 1998년 수하르토 정권의 붕괴 이후, 1999년 지방분권을 통해 지역 자치 운동이 거세지고 있다.
발리는 유럽 선진국에서 부유한 백인 관광객이 모이는 동시에, 이교도인 힌두교 영역이었기 때문에 2001년 9.11 테러 이후 이슬람 과격파에 의한 국제테러리즘의 표적이 되었다.[32] 2002년 10월 12일 꾸따 지역에 있는 디스코 클럽을 겨냥한 자살 폭탄 테러로 202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2005년 10월 1일에는 짐바란 지역과 꾸따 지역의 레스토랑을 겨냥한 동시 다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23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32] 이 두 테러 사건은 이슬람 과격파의 소행으로, 발리의 관광 산업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32]
이후 관광 산업은 회복되었지만, 현지에서는 자바에서 유입되는 무슬림 이민 노동자의 증가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높아지고 있다.[32]
2. 1. 선사 시대
기원전 2000년경에는 대만에서 기원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 거주하고 있었다.[9] 기원전 1세기경부터 교역을 통해 인도와 중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동손 문화의 영향을 받은 구리 북(銅鼓)이 발견되는 등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면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문명이 시작하고 있었다.2. 2. 자바 왕조의 영향 (11~16세기)
11세기에 발리 왕조는 동부 자바의 쿠디리 왕국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수박 등 현재까지 이어지는 전통 문화 및 관습은 이 시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카양간 티가 사원 건립은 자바에서 건너온 힌두 승려 쿠트란에 의해 확장되었다.[10] 1284년, 발리는 신가사리 왕조(Kerajaan Singhasari)의 쿠루타나가라 왕에게 정복되어 속국이 되었으나, 8년 후 마자파힛 왕조에 의해 신가사리 왕조가 멸망하면서 다시 자유를 얻었다.1343년, 발리는 마자파힛 왕국의 침입으로 와르마데와 왕조가 멸망하고, 젤젤 왕국이 건설되어 마자파힛 왕국의 간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11]
16세기에 마자파힛 왕국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쇠퇴하면서, 왕국의 신하, 승려, 공예사들이 발리로 피난하여 힌두 자바 문화가 유입되었다. 고전 문학, 그림자극, 음악, 조각 등이 발전하였고, 자바에서 건너온 고승 댄 할 니라르타는 타나 롯 사원과 울루와뚜 사원 등 여러 사원을 건립하여 종교적인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2. 3. 군웅할거 시대 (17~19세기)
1651년 겔겔 왕이 신하의 반란을 계기로 클룽쿵으로 천도하자, 그 실권은 각지에 거점을 둔 귀족들의 손으로 넘어갔다.[12][13]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각지의 귀족들은 자신이 마자파히트 정복 시대 귀족의 정통 후손임을 자칭하였고,[12][13] 클룽쿵 왕국 외에 7개의 소국(타바난 왕국, 바두 왕국, 기아냐르 왕국, 카랑아슴 왕국, 반리 왕국, 문위 왕국)이 난립하여, 발리 섬은 군웅할거의 시대를 맞게 된다.17세기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비롯한 유럽 세력의 진출이 보였지만, 특산품이 없는 발리 섬은 식민지 통치상 특별히 중요시되지 않고, 각 지역 왕족의 지배에 의한 발리인 자치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발리 섬에 처음 상륙한 유럽인은 1597년 네덜란드 상선 승무원이었다.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는 발리 왕국의 권력 구조를 "극장 국가"의 은유로 그려냈다. 기어츠에 따르면, 발리 국가는 왕과 군주가 흥행주, 승려가 감독, 농민이 조역과 무대 장치 담당과 관객인 듯한 극장 국가였다.[14] 그러나 이러한 기어츠의 극장 국가론은 이후 "세련된 상징 세계의 해독은 시간 없는 고정된 세계를 그려내고, 실천이 만들어지는 역사 과정을 상실"[15]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21세기 초, 의례 세계와 권력 세계의 이항 대립을 극복한 분석을 통해 왕국의 역사 과정에는 큰 유동성이 존재했던 것이 밝혀졌고, "왕국의 유동성을 제압하기 때문에 왕의 존재와 그 힘이 명확해지고, 그 힘에 의해 계층 질서가 지탱되고 있다"[15]는 것이 그려졌다.
2. 4. 네덜란드 식민 지배와 발리 르네상스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풍에 따라 네덜란드는 발리섬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1846년 발리 북동부의 부레렝과 젬브라나를 점령하고(발리 전쟁), 1894년에는 롬복 전쟁을 일으켜 롬복국과 카랑가숨 왕국을 병합했다. 1908년에는 마지막 남은 클룽쿵 왕국을 멸망시키면서 발리섬 전체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발리 왕족과 귀족들이 보여준 ‘푸푸탄’(무저항 집단 자결)은 네덜란드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전통 문화를 보존하는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16]이러한 정책은 1917년 발리섬 남부 대지진 이후의 재난과 맞물려 더욱 강화되었다. 지진, 스페인 독감, 쥐의 대량 발생 등으로 인한 피해는 발리인들에게 신의 분노로 받아들여졌고,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바론 행렬과 상향 드다리와 같은 주술적 의례가 성행했다.[16] 네덜란드는 이러한 현상을 발리의 전통 문화로 이해하고 보호 정책을 추진했다.[17] 건축가 모엔은 발리의 전통 문화를 보존하려 했으나, 결국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8]
네덜란드의 문화 보호 정책을 배경으로 발리는 "마지막 낙원"으로 서구에 소개되었고,[19] 그레고어 크라우제의 사진집에 매료된 서양 예술가들이 발리를 방문하기 시작했다.[20] 1932년 찰리 채플린도 발리를 방문하여 발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글을 남겼다.[20] 1920년대 연간 1,200~3,000명 수준이던 관광객은 1930년대 중반에는 연간 3만 명에 달했다.[21]
1930년대 발리는 "발리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여 가믈란, 레공, 케착 등 현재 발리 관광의 중심이 되는 예술 양식이 탄생했다. 독일인 화가이자 음악가인 발터 스피스는 우붓의 영주 초코르다 스카와티 일족의 초청을 받아 발리에 머물며, 미겔 코바루비어스, 콜린 맥피, 마가렛 미드, 그레고리 베이트슨, 비키 바움 등과 교류하며 "발리의 발리화"를 추진했다.[22]
한편, 네덜란드는 카스트 제도를 고정화하고 왕족을 통한 간접 지배를 실시하며, 농업 시설 정비, 상업 작물 재배 장려, 학교 설립, 나체 금지 등의 근대화 정책을 시행했다. 귀족과 평민 간의 격차는 커졌지만, 노예제 폐지로 평민 간의 신분 차이는 줄어들어 "평등한 농촌 사회"라는 특성이 자리 잡게 되었다.[23]
2. 5. 제2차 세계대전과 독립
1942년 2월, 일본군이 발리를 침공하여 발리 해전에서 승리하였고, 20일 만에 네덜란드 군은 항복했다.[24] 처음에는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고 환영받았지만,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와 다를 바 없는 통치 체제가 구축되었고, 전쟁으로 인한 징발로 인해 불만이 커졌다.[77] 구스티 응우라 라이는 발리인들과 함께 자유군을 결성했다.[77] 1944년 중반부터 자바와 연계한 항일 운동이 전개되었고,[24] 같은 해 9월, 인도네시아 독립을 용인하는 코이소 성명이 발표되었다.[77] 1945년 4월 수카르노가 발리에 찾아와 인도네시아 독립의 필요성을 연설하였고, 7월에 "소순다 건국 동지회"가 결성되었다.[77] 미우라 죠(三浦襄)는 이 동지회에 참여하여 사무총장에 취임,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활동했으나, 곧 패전을 맞이하여 독립 계획은 중단되었다. 1945년 9월 7일, 미우라 죠(三浦襄)는 일본의 국책을 강요하여 무리한 협력을 시켰던 것을 사죄하며 자결했다.1945년 8월 17일, 수카르노가 자카르타에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했다.[77] 발리에서는 친공화국파에 의한 통치 체제 확립이 계획되었으나, 1946년 3월 네덜란드가 다시 상륙하면서 실패로 끝났다.[77] 네덜란드의 상륙으로 격렬한 게릴라전이 전개되었고, 1946년 11월 20일, 구스티 응우라 라이 중령이 전사하고 그가 이끌던 게릴라 부대도 전멸했다.[77] 이 전투에는 잔류 일본군도 가세했으며, 조선인 양칠성도 독립영웅으로 안장되었다.[77]
1946년 12월, 네덜란드는 발리를 "동인도네시아"에 귀속시키고 자치령으로 선언하여 간접 통치를 재개했다.[77] 그러나 공화국파와 친네덜란드파의 항쟁은 계속되었고, 1949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주권을 이양한 후 공화국파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77] 1950년 발리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통합되었다.[77] 수카르노 시대의 발리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이 심화되었다.[78] 1965년 9월 30일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 학살이 발생하여 발리에서만 10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전해진다.[78]
2. 6. 수하르토 정권
수하르토의 개발 독재 시대에 접어들면서 발리섬은 평온을 되찾았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관광을 통한 외화 획득을 목표로 관광 개발을 시작했고, 발리섬은 1970년대 이후 세계적인 관광지로 성장하게 되었다.[27]1963년, 일본으로부터의 전쟁 배상금으로 사누르에 발리 비치 호텔이 건설되어 1966년에 개업했다. 1967년에는 응우라라이 공항이 개항하여 사누르는 대규모 관광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사누르와 꾸따는 무계획적인 개발로 인프라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자카르타 중앙 정부는 누사두아를 고급 리조트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석유 파동 등의 영향으로 개발이 지연되어 1983년에 누사두아 해변이 개장되었다. 이후 누사두아는 세계적인 호텔들이 있는 리조트로 발전했다.
발리섬의 관광 개발은 중앙 정부 주도로 진행되어 관광 관련 세수 대부분이 중앙으로 흡수되었다.[29] 그러나 현지 주민들은 중앙 정부 주도의 "만들어진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전통 가치를 자각하며, 단일적인 이미지와 "관광의 시선"에 맞서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30]
1989년, 발리 주 정부는 독자적인 관광 개발 마스터플랜을 검토, 가자마다 대학교의 제안을 채택하여 종합 관광 마을 형태의 개발을 시작했다. 풍글리프란, 자티루이 등이 "관광 마을"로 정비되었다.
2. 7. 지방 자치
수하르토 정권 말기에는 중앙 주도의 대규모 개발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아닷트에 뿌리를 둔 환경 보호 운동이 전개되었다.[32] 1998년 수하르토 정권의 붕괴 이후, 1999년 지방분권을 통해 지역 자치 운동이 거세지고 있다.발리는 유럽 선진국에서 부유한 백인 관광객이 모이는 동시에, 이교도인 힌두교 영역이었기 때문에 2001년 9.11 테러 이후 이슬람 과격파에 의한 국제테러리즘의 표적이 되었다.[32] 2002년 10월 12일 꾸따 지역에 있는 디스코 클럽을 겨냥한 자살 폭탄 테러로 202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2005년 10월 1일에는 짐바란 지역과 꾸따 지역의 레스토랑을 겨냥한 동시 다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23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32] 이 두 테러 사건은 이슬람 과격파의 소행으로, 발리의 관광 산업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32]
이후 관광 산업은 회복되었지만, 현지에서는 자바에서 유입되는 무슬림 이민 노동자의 증가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높아지고 있다.[32]
3. 지리
3. 1. 개요
3. 2. 지형
발리섬 북쪽에서 본 조감]]발리섬의 면적은 5,633km2이다.[2] 섬의 북부는 동서로 화산맥이 뻗어 있으며, 발리 힌두교에서 신성한 산으로 여겨지는 아궁산(해발 3,142m)과[1] 킨타마니 고원으로 알려진 바투르산(해발 1,717m) 등 많은 화산을 가지고 있다. 바투르산 주변에는 온천이 용출한다. 이 화산대의 활동으로 발리섬의 토양은 매우 비옥해졌지만, 때로는 사람들에게 재해를 가져오기도 했다.
발리섬 남부에서는 화산맥에 위치한 브라탄 호 등의 호수에서 흘러나온 물이 하류 지역으로 분기한다. 이 물은 수박(Subak)이라 불리는 전통적인 수리 시설에 의해 관리되어 섬의 남쪽 전체를 비옥하게 만들었다.[2]
북부는 강수량이 적지만, 코프라와 커피(킨타마니 커피 등)가 재배되고 목축도 이루어진다. 섬의 서부는 대부분 1,000m 전후의 깊은 숲으로 덮인 구릉 지대이며, 해안가 어촌을 제외하면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다. 바두안 반도는 건조 지대였으나, 현재는 대규모 관광지로 발전했다.
발리의 마을 대부분은 농촌이며, 토지의 농업 이용률이 매우 높다. 농업은 수경 재배가 중심이며, 특히 계단식 논으로 유명한 발리섬 중남부 사면 일대에서는 안정적인 물 공급으로 이모작에서 삼모작이 가능하다.[2]
3. 3. 기후
발리섬 주변은 사바나 기후에 속하며, 계절은 북서 계절풍이 부는 우기(10월~3월)와 남동 계절풍이 부는 건기(4월~9월)로 명확하게 나뉜다.[79] 이 계절풍에 의한 거센 파도는 해상 교통에 지장을 주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외침으로부터의 보호막이 되기도 하여 독립성을 유지한 역사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79] 건기에는 동부와 북부를 중심으로 물 부족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며, 우기에는 하루에 2~3시간 스콜이 내린다.[79] 심할 때에는 30 cm의 집중호우가 내릴 때도 있으며, 도로가 침수되기도 한다.[79]연중 기온의 변화는 거의 없고, 연간 최저 평균 기온은 약 24℃, 최고 평균 기온은 약 31℃, 평균 습도는 약 78%이다.[4] 덥고 습도도 높지만, 체감 온도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완화된다.[5] 그러나 최근에는 건기와 우기의 구분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온난화의 영향을 받아 연중 높은 기온을 나타내고 있으며 우기 중 한낮의 최고 기온이 34℃ 이상을 웃도는 뜨거운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3. 4. 생태
발리의 동식물 대부분은 아시아 대륙에서 유입된 것으로, 발리 고유의 것은 드물다. 아시아에 특징적으로 보이는 동물상, 식물상이 일반적으로 존재하며, 동쪽 롬복섬과는 생물지리구의 경계를 나타내는 월리스 선이 지나간다.[6]동물은 예전부터 호랑이, 들소, 원숭이, 딱따구리, 비단뱀, 도마뱀 등이 많이 서식하고 있고, 300 가지 이상의 조류를 관찰할 수 있다.[7] 1940년 경에는 발리호랑이가 멸종되었고,[5] 조류 유일의 발리 고유종인 발리 스타틀링(흰목도요)도 멸종 위기에 놓여있다.[8] 근대 농업의 진전과 리조트의 농약 살포 등으로 인해 생태계의 변화도 볼 수 있다. 발리에서 유일한 벌판이 남아 있는 서부 국립 공원은 회색 원숭이나 다람쥐, 이구아나 등 야생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발리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토케이게코(도마뱀붙이)라는 대형 도마뱀은 울음소리를 7번 연속으로 들으면 행복이 찾아온다는 전설이 있으며, 해충을 잡아먹기 때문에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4. 행정
발리 섬은 발리주를 이루고 있으며 주도는 덴파사르이다. 발리 주는 8개의 군(kabupaten)과 1개의 시(kota)로 구성된다.
- 시(kota)
- 군(kabupaten)
- 바둥(Badung) - 군도 망구푸라
- 방리(Bangli) - 군도 반글리
- 부레렝(Buleleng) - 군도 싱아라자(Singaraja)
- 기아야르(Gianyar) - 군도 기안야르(Gianyar)
- 젬브라나(Jembrana) - 군도 네가라(Negara)
- 까랑가셈(Karangasem) - 군도 암라푸라(Amlapura)
- 끄룽꿍(Klungkung) - 군도 세마라푸라(Semarapura)
- 따바난(Tabanan) - 군도 따바난(Tabanan)
주도 덴파사르(Denpasar)는 현지 사회의 상업 중심 지역이며, 현지 주민들이 이용하는 쇼핑몰(발리 몰, 마타하리 등), 시장(수공예품, 직물 시장인 파사르 쿰바사리와 중앙 식품 시장인 파사르 바둔 등), 레스토랑, 공원이 많이 있다. 그 외에도 발리 주립 박물관과 푸푸탄(Puputan) 광장 등의 관광 명소도 있다.
5. 경제
예술과 문화의 섬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찍부터 해변 리조트가 개발되어 온 발리섬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고, 동남아시아 각지의 해변 리조트의 모델이 되고 있다. 선진국의 경제적 가치를 기준으로 비교하면 물가 수준이 상당히 저렴하며, 비교적 젊은 층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인기 요소 중 하나이다. 과거에는 일본인 관광객이 가장 많았지만, 현재는 호주인이 가장 많다.[51] 2012년 통계에 따르면, 1위는 오스트레일리아 799,897명, 2위 중국 317,165명, 3위 일본 188,711명이다. 유럽에서는 635,301명이었다. 2004년 통계에 따르면, 1위 일본 325,849명, 2위 오스트레일리아 267,338명, 3위 대만 183,624명이었다.[52] 따라서 발리 섬의 화폐 경제는 관광 수입으로 성립하며, 재정적으로도 발리 주 수입의 3분의 2가 관광 관련 수입이다. 하지만, 『발리 포스트』(Bali Post)의 조사에 따르면, 실제로는 관광 수입의 80%가 섬 밖으로 유출되고 있다고 한다.[53]
발리 섬은 오래전부터 농업 중심이었지만, 발리 주의 산업 부문별 고용 인구 추이를 살펴보면, 1971년에는 농림어업이 66.7%, 상업·음식·호텔·서비스업이 18.8%였고, 1980년에도 농림어업이 50.7%, 상업·음식·호텔·서비스업이 29.8%였던 것이, 2004년에는 농림어업이 35.3%로 감소하고, 상업·음식·호텔·서비스업이 36.4%에 달한다.[54] 농민의 평균 월수입이 50달러(약 5,000원) 미만인 반면, 관광업 종사자의 월수입은 50~150달러(약 5,000~15,000원)에 달한다.[55] 발리 주 전체 지역 내 총생산액을 보면, 농업은 여전히 전체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관광업도 발리 주의 공식적인 경제 활동의 40%를 차지하고 있으며, 공예품 수출액은 연간 15억 달러를 넘는다.[56]
1963년 수카르노 정권 당시, 덴파사르의 사누르 해변에 발리 비치 호텔을 건설하면서 발리의 관광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발리 비치 호텔 건설 전에는 관광용 호텔이 겨우 3개 뿐이었다. 1970년 응우라라이 국제공항이 개장한 이후 발리 관광은 더욱 증가했다.
2019년 기준 국가별 발리 관광객 현황을 보면 오스트레일리아가 1,225,425명으로 1위를 차지했고, 중국이 1,185,764명으로 2위, 인도가 371,850명으로 3위를 기록했다.[80] 대한민국은 213,324명으로 7위를 기록했다.[80]
순위 | 국가 | 관광객 (명) |
---|---|---|
1 | 22px 오스트레일리아 | 1,225,425 |
2 | 22px 중국 | 1,185,764 |
3 | 22px 인도 | 371,850 |
4 | 22px 영국 | 283,539 |
5 | 22px 미국 | 273,317 |
6 | 22px 일본 | 257,897 |
7 | 22px 대한민국 | 213,324 |
8 | 22px 프랑스 | 206,814 |
9 | 22px 독일 | 194,773 |
10 | 22px 말레이시아 | 184,477 |
5. 1. 관광업
1963년 수카르노 정권 당시, 덴파사르의 사누르 해변에 발리 비치 호텔을 건설하면서 발리의 관광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발리 비치 호텔 건설 전에는 관광용 호텔이 겨우 3개 뿐이었다. 1970년 응우라라이 국제공항이 개장한 이후 발리 관광은 더욱 증가했다.발리는 예술과 문화의 섬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찍부터 해변 리조트가 개발되어 온 세계적인 관광지이다. 동남아시아 각지의 해변 리조트의 모델이 되고 있다. 선진국의 경제적 가치를 기준으로 비교하면 물가 수준이 상당히 저렴하며, 비교적 젊은 층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인기 요소 중 하나이다. 과거에는 일본인 관광객이 가장 많았지만, 현재는 호주인이 가장 많다. 2019년 기준 국가별 발리 관광객 현황을 보면 오스트레일리아가 1,225,425명으로 1위를 차지했고, 중국이 1,185,764명으로 2위, 인도가 371,850명으로 3위를 기록했다.[80] 대한민국은 213,324명으로 7위를 기록했다.[80]
순위 | 국가 | 관광객 (명) |
---|---|---|
1 | 1,225,425 | |
2 | 1,185,764 | |
3 | 371,850 | |
4 | 283,539 | |
5 | 273,317 | |
6 | 257,897 | |
7 | 213,324 | |
8 | 206,814 | |
9 | 194,773 | |
10 | 184,477 |
발리 섬의 화폐 경제는 관광 수입으로 성립하며, 재정적으로도 발리 주 수입의 3분의 2가 관광 관련 수입이다. 1971년에는 농림어업이 66.7%, 상업·음식·호텔·서비스업이 18.8%였고, 1980년에도 농림어업이 50.7%, 상업·음식·호텔·서비스업이 29.8%였던 것이, 2004년에는 농림어업이 35.3%로 감소하고, 상업·음식·호텔·서비스업이 36.4%에 달한다.[54] 농민의 평균 월수입이 50달러 미만인 반면, 관광업 종사자의 월수입은 50~150달러에 달한다.[55]
6. 사회
발리의 지역 사회는 발리 힌두교에 근거한 유일한 전통 양식 (아닷트)에 따라 생활이 영위되고 있으며, 네덜란드 식민지 이후에도 현대 행정 (디나스)과 병존하는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반자르와 데사라는 지역 사회를 기반으로 다양한 노동 작업 (고통 로용)이나 종교 의례가 공동으로 거행되었으며, 반자르에서 추방은 "죽음"과 사형선고와 마찬가지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발리 사람들은 특정 목적에 대해 "스카" 내지 "스카하"이라는 그룹을 형성하고 대응하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가믈란 연주단, 청년단, 무용단, 자경단, 합창단 등 상황에 따라, 스카는 반자르 이상 형성되어, 많은 반자르와 달리 가입 탈퇴가 자유롭다. 이러한 공동체를 "다원적 집단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반자르 등 지역 조직에 속해서, 어릴 때부터 이웃과 품앗이를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한 배경도 있고, 주민의 성격은 매우 온화하다.
발리섬은 2005년 통계에 따르면 3,151,162 명의 사람이 살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과 달리 주민의 92%가 발리 힌두교를 믿는다. 그 뒤로는 이슬람교(5.7%), 기독교(1.4%), 불교(0.6%) 순이다.(2003년 통계)
"신들의 섬"이라고 일컬어지는 발리에서는 발리 토착 신앙과 인도 불교 및 힌두교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발리 힌두교를 인구의 약 90%가 믿는다. 발리 전통 마을 (데사, 아닷트)에서는 토지와 조상신에 대한 믿음을 신봉하며, 사람들은 데사 아닷트 위치를 깨끗이 하고 더러움을 방지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관습(아닷트)이 짙게 남아, 상점이나 집 앞에는 매일 아침 챠난이라는 제사를 지내는 등 종교 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따라서 매일 발리섬 어딘가에서 축제가 행해지고 있으며, 발리 사람들에게 축제(우파차라)는 종교 의식과 같다.
발리 힌두교의 세계관은 방향에 따라 "카쟈"(산쪽)와 "쿠롯도"(바다쪽)의 조합이 중요하다. 카쟈과 쿠롯도 대비는 위와 아래, 우세와 열세, 깨끗함과 더러움과 같은 상징적인 가치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사원의 위치와 장례식 장소, 저택의 구조 등이 대비 따라 정해진다. 또한 질서관에서 사람의 머리를 만지거나, 머리에 손을 대는 것, 왼손으로 돈을 취급하거나, 식사를 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에는 판차실라에 따라 아친탸 또는 상향위디와사 신을 최고신으로 믿는 교리가 강화되었다.
1990년대 이후 자바섬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관광 산업에 종사할 목적으로 이주를 시작하여 관광업에 종사하는 무슬림이 급증하고 있다.
발리어는 발리섬의 전통 언어이며 많은 사람들이 사용해왔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인도네시아어가 인도네시아의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학교 교육과 주요 언론에서도 인도네시아어가 사용된다. 도시 지역에서는 인도네시아어를 주로 사용하는 계층이 증가하고 있다.
2000년대부터 지방 분권화를 배경으로 발리 문화 부흥 운동(아제그 발리)의 일환으로, 의무 교육에서 발리 문자를 가르치고 있다. 2006년부터 발리 포스트에서 "오루티 발리"라는 발리어 신문이 주간으로 복간되어 발리 문학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하고, 발리어 라디오 방송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발리어로 된 가요도 유행하고 있다.
대부분의 발리 사람들은 언어를 두 개 이상 구사할 수 있다. 관광 사업 때문에 영어가 세 번째로 많이 쓰이는 언어가 되었다.
6. 1. 지역 사회
발리의 지역 사회는 발리 힌두교에 근거한 유일한 전통 양식 (아닷트)에 따라 생활이 영위되고 있으며, 네덜란드 식민지 이후에도 현대 행정 (디나스)과 병존하는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34]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반자르와 데사라는 지역 사회를 기반으로 다양한 노동 작업 (고통 로용)이나 종교 의례가 공동으로 거행되었으며,[35] 반자르에서 추방은 "죽음"와 사형선고와 마찬가지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발리 사람들은 특정 목적에 대해 "스카" 내지 "스카하"이라는 그룹을 형성하고 대응하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가믈란 연주단, 청년단, 무용단, 자경단, 합창단 등 상황에 따라, 스카는 반자르 이상 형성되어, 많은 반자르와 달리 가입 탈퇴가 자유롭다. 이러한 공동체를 "다원적 집단성"이라고 부르고 있다.[36]
이처럼 사람들은 반자르 등 지역 조직에 속해서, 어릴 때부터 이웃과 품앗이를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한 배경도 있고, 주민의 성격은 매우 온화하다.
6. 2. 종교
발리섬은 2005년 통계에 따르면 3,151,162 명의 사람이 살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과 달리 주민의 92%가 발리 힌두교를 믿는다. 그 뒤로는 이슬람교(5.7%), 기독교(1.4%), 불교(0.6%) 순이다.(2003년 통계)"신들의 섬"이라고 일컬어지는 발리에서는 발리 토착 신앙과 인도 불교 및 힌두교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발리 힌두교를 인구의 약 90%가 믿는다. 발리 전통 마을 (데사, 아닷트)에서는 토지와 조상신에 대한 믿음을 신봉하며, 사람들은 데사 아닷트 위치를 깨끗이 하고 더러움을 방지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관습(아닷트)이 짙게 남아, 상점이나 집 앞에는 매일 아침 챠난이라는 제사를 지내는 등 종교 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따라서 매일 발리섬 어딘가에서 축제가 행해지고 있으며, 발리 사람들에게 축제(우파차라)는 종교 의식과 같다.
발리 힌두교의 세계관은 방향에 따라 "카쟈"(산쪽)와 "쿠롯도"(바다쪽)의 조합이 중요하다. 카쟈과 쿠롯도 대비는 위와 아래, 우세와 열세, 깨끗함과 더러움과 같은 상징적인 가치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사원의 위치와 장례식 장소, 저택의 구조 등이 대비 따라 정해진다. 또한 질서관에서 사람의 머리를 만지거나, 머리에 손을 대는 것, 왼손으로 돈을 취급하거나, 식사를 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다.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에는 판차실라에 따라 아친탸 또는 상향위디와사 신을 최고신으로 믿는 교리가 강화되었다.
1990년대 이후 자바섬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관광 산업에 종사할 목적으로 이주를 시작하여 관광업에 종사하는 무슬림이 급증하고 있다.
6. 3. 언어
발리어는 발리섬의 전통 언어이며 많은 사람들이 사용해왔다.[37]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인도네시아어가 인도네시아의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학교 교육과 주요 언론에서도 인도네시아어가 사용된다.[37] 도시 지역에서는 인도네시아어를 주로 사용하는 계층이 증가하고 있다.[37]2000년대부터 지방 분권화를 배경으로 발리 문화 부흥 운동(아제그 발리)의 일환으로, 의무 교육에서 발리 문자를 가르치고 있다.[38] 2006년부터 발리 포스트에서 "오루티 발리"라는 발리어 신문이 주간으로 복간되어 발리 문학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하고, 발리어 라디오 방송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발리어로 된 가요도 유행하고 있다.[38]
대부분의 발리 사람들은 언어를 두 개 이상 구사할 수 있다. 관광 사업 때문에 영어가 세 번째로 많이 쓰이는 언어가 되었다.
7. 문화
발리 요리도 독특하며,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과 달리 바비 굴링(Babi Guling)과 같은 발리 요리에서는 돼지고기가 흔히 사용된다.
섬 남부를 중심으로 토지가 비옥했기에, 예부터 발리 사람들은 여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아침저녁 각각 2~3시간 일하고, 남은 시간에는 그림, 조각, 음악, 무용 등의 창작 활동에 힘쓰는 등 예술 활동에도 열중했다.
발리의 예술에는 옛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도적인 성격이 남아 있으며, 시대가 새로워짐에 따라 발리섬 고유의 토착적인 성격이 강해진다. 인도 색채가 짙은 유물로서, 예를 들어, 페준(Pejeng)에서 출토된 점토로 만든 봉납판(8세기경)에는 인도 팔라 왕조(パーラ朝) 미술을 연상시키는 불교 존상이 그려져 있다. 또한 인도 힌두교의 석조 두르가(ドゥルガー)상(11세기경)이 걸작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오늘날 발리에서 볼 수 있는, 특히 관광객을 위한 예능·예술의 대부분은 1920년대 이후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 이후 발리를 방문한 서구인들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40] 그리고 이러한 문화 예능은 당시 서구인들에 의해서도, 또 전후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서도, 나아가 대중 관광객에 의해서도 발리의 「전통문화」로 표상되어, 「관광 공연이 이제 발리의 전통으로 인정받고 있다」.[41] 오늘날 발리의 「전통문화」는 「관광문화」와 다름없는 것이다.[42]
더욱이 수하르토(Suharto) 정권 붕괴 이후에는 분권화의 흐름 속에서 지역 자치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 인도네시아 사회 전체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발리에서는 그 일환으로 지역 문화의 진흥이 내걸리면서, 『발리포스트(バリポスト)』를 중심으로 발리TV가 설립되는 등 아제그 발리(アジェグ・バリ)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43]
7. 1. 음악과 춤
가멜란 음악은 발리섬에서 매우 발달하였다.[44] 힌두교 서사시를 표현한 춤도 있는데, 펜뎃, 레공, 바리스, 토팽, 바롱, 께짝 등이 유명하다.[44]발리의 제례와 의례에는 항상 춤이 따르며, 께짝, 레공, 바롱 댄스, 빙의 무용인 상향 드다리와 이 춤들의 반주에 사용되는 가믈란과 쥬고구 (대나무 가믈란)가 잘 알려져 있다.[44] 이들은 본래 공동체의 종교 의례였지만, 지금은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공동체의 제사에서 분리된 창작 예술이 되었다.[44]
네덜란드 식민 통치 시대 싱아라자에서 쿠비야르라는 무용, 음악, 가믈란 편성이 탄생했다.[44] 1920년대 후반 관광객을 안내하던 운전사를 통해 남부에도 퍼졌고, 관광을 위한 창작 활동이 왕성해져 무용 예술이 종교적 맥락에서 분리되었다.[44]
예를 들어 바롱과 랑다의 싸움을 모티브로 한 챠로나란 극은 원래 종교 의식으로 19세기 말에 성립되었지만, 트랜스 상태에 빠진 남자가 크리스로 가슴을 찌르는 장면을 볼 수 있는 오늘 날의 오락성이 가미된 형태는 1930년대 전후에 "관광객들에게 알기 쉽게 보여주기 위해" 추가된 요소이다.[45]
오늘날 발리의 무용 예술은 종교적인 중요성에 따라 타리 왈리(tari wali), 타리 베발리(tari bebali), 타리 발리(tari balih - balihan)의 3 단계로 구분된다.[44] 타리 왈리는 공동체의 종교 의식, 타리 베발리는 종교 의식에 대한 반주, 타리 발리는 관상용, 오락용으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44]
오늘날 발리 예술은 관광 사업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고유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7. 2. 그림자극

그림자극(와양)은 발리의 사람들에게 시공을 초월한 지식과 교양의 원천이다. 즉, 예능으로서 와양, 그것을 감상하는 인간의 의식의 바닥에 점점 쌓여가서 잠재적인 가치 체계가 된다. 와양 스토리는 주로 고대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 마하바라타이고, 인형을 조정하는 다랑은 산스크리트의 지식을 가진 특별한 승려인 프단다가 맡는다.[46] 또한 1990년대 후반 무렵부터 와양 첸 브론으로 불리는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가민된 와양이 젊은이들의 인기를 끌게 되어, 전통적인 와양은 쇠퇴 추세에 있다.[47] 2003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에 지정을 받았지만, 세계 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2009년 9월 1일이었다.
7. 3. 공예

발리 전통 공예의 기원은 화장 등의 종교 제례 때 바치는 제물로부터 시작되었다.[48] 따라서 정교함이 엿볼 수 있는데, 목각은 장식 공예로 문이나 기둥 등의 건축물, 동상, 소품, 연극 가면 등으로 일상적으로 이용되어 왔다.[48] 오늘날 볼 수 있는 동물의 사랑스러운 조상은 "발리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난 것이다.[48] 천 공예로는 이불과 수건 등 폭넓게 사용되는 민속 의상 사롱(sarong), 직물에서는 "자바 더"라고 불리는 바틱(Batik 및 이캇트 천)이 잘 알려져 있다.[48] 그 밖에 추르크 마을의 은제품 역시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48]
목조각이 특히 성행한다. 목조각은 장식 공예로서 문이나 기둥 등 건축물, 조상, 소품, 연극의 가면 등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어 왔지만, 오늘날의 귀여운 동물 조각상은 역시 "발리 섬 르네상스" 시대에 탄생한 것이다.[48]
그 외에도 목제 가구, ろうけつ染め의 바틱(일본에서는 자와견직이라고도 함)과 絣인 이캇(투가난 마을의 "그린신" 등) 각각의 직물과 그것을 사용한 제품이 유명하다.[48] 또한 훌룩 마을의 은세공, 퉁가난 마을의 아타제 바구니 공예, 젠가라 세라믹스 사의 도자기 등도 잘 알려져 있다.[48]
발리 섬에서는 기념품으로 공예품이 대량으로 판매되고 있지만 경쟁이 치열하다. 특히 목조각에 관해서는, 공예품 제작자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창의성을 살린 창작 활동에 힘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방 유사품도 많고, 그 작품은 값을 깎아 사는 경우가 많다.[48]
목조각 공예품이나 목제 가구는 싸게 구입할 수 있지만, 일본에 가져왔을 경우, 연중 고온다습한 현지와 기후가 다르므로, 휨, 갈라짐, 깨짐 등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7. 4. 회화

발리의 회화는 색채가 풍부하고 치밀한 묘사가 특징이다.[49] 발리 회화의 기원은 16세기 후반 마자파힛 왕조 무렵으로, 왕궁을 장식하기 위한 회화로 발전하여 '라마야나', '마하바라타'와 힌두교의 많은 신들이 소재가 되어 왔다.[49] 당시부터 전해지는 발리 회화의 기법은 〈카마산 스타일〉이라 하고, 기본적으로 5색 (검정, 흰색, 노랑, 파랑, 갈색)을 사용하여 원근을 이용하지 않고 평면적으로 그려진 것들이 많다.[49] 카마산 마을에서는 전통적인 기법의 계승과 함께 새로운 감성을 가미해 발전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배 시대였던, 1920년대에 섬에 왔던 발터 슈피스와 네덜란드의 화가 루돌프 보네 등과, 구스티 뇨만 렌 패드로 대표되는 발리 작가와의 교류를 계기로 ‘예술가 협회’ (피타 마하 협회)가 탄생해, 원근법 등 새로운 기법을 추가 발전시켜, 발리 회화는 국제적인 수준으로 탈바꿈하였다.[49] 1930년대 절정기에는 100명 이상의 예술가가 피타 마하 협회에 소속되어 있었다.[49] 묵화와 같은 세밀화를 특징으로 하는 〈바투안 스타일〉과 보네의 지도로 탄생한 일상의 풍경을 소재로 하는 〈우붓 스타일〉 등이 있다.
또한 상거래에 의한 발리 회화 작품의 외부 유출을 막자는 움직임도 현지에서 시작되고 있다.[49] 그 원조가 된 것이 우붓의 회화 판매상 와양 스테조 네카이며, 우붓에는 그의 설립한 네카 미술관이 운영되고 있다. 그 밖에 한때 루돌프 보네 등이 1956년에 세웠던 〈우붓 회화 미술관〉, 《덴파사르 발리 박물관》, 《발리 문화 센터》, 그리고 1932년부터 사누르 해안에 살았던 벨기에 화가 르 메이요르의 작품을 직접 전시한 《르 메이요르 회화 미술관》 등이 있다.[49] 그러나 일부 미술품 상점에서 유명한 화가의 작품으로 젊은 화가에 위작을 만들게 관광객에게 파는 경우도 있다.[49]
8. 관광
응우라라이 공항 개항 이후 발리섬의 관광 개발은 단체 관광을 위한 대규모 개발로 시작되었으며, 처음에는 사누르와 꾸따가 관광의 중심이었다. 1980년대에는 누사 두아에 고급 리조트 건설이 진행되었고, 1990년대에는 개발이 꾸따 남북으로 확산되어 세미냑, 레기안, 짐바란, 탄중 베노아에 이르는 해안에 넓은 관광 지대가 형성되었다. 세미냑 북쪽에는 타나 롯 사원이 있다.
발리섬 남쪽 해안은 서핑의 메카로, 건기와 우기에 관계없이 양질의 파도를 찾아 세계 각국의 서퍼들이 방문한다. 서핑 포인트와 파도의 성질도 다양하며, 최근에는 서핑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과 프로 서퍼도 많아졌다.
주도인 덴파사르는 현지 사회의 상업 중심지며, 현지 주민이 다니는 발리 쇼핑 센터, 마타하리 등의 쇼핑몰과 수공예품, 직물 시장인 파사르 쿤바사리와 중앙 식품 시장인 파사르 바둔 등의 시장, 레스토랑, 공원이 많이 있다. 기타, 발리 주 국립 박물관과 푸푸탄 광장 등의 관광지가 있다. 발리에서는 고층 건물 건설이 엄격하게 규제되기 때문에 주도에서도 푸른 하늘이 한눈에 펼쳐진다.
산의 측면으로 가면, 산중턱의 리조트 지역이 있는 발리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지역이 우붓이다.[59] "예술 마을" 우붓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부터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양질의 발리 댄스와 발리 예술, 바틱 등 염색 기술, 대나무 제품 등 전통 문화와 민예품 등 여러 가지를 볼거리를 제공한다.[59] 우붓 남쪽에는 목조 마을 데사 마스도 번창하고 있다.[59]
물질 문명과 현대 문명의 굴레에 지친 서양인과 일본인들이 장기 체류를 하면서 발리의 문화를 배우고 가는 경우도 많고, 몇 개월에서 몇 년까지 발리에 머물면서 회화, 음악, 조각, 춤 등을 배우고, 또 자신의 예술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도 볼 수 있다.[59] 우붓은 우붓 원숭이 숲과 네카 미술관 등 미술관이 세워져 있다.[59]
바투르산이 우뚝 솟아있는 발리 중부 산악 지대는 낀타마니 고원, 브라탄 호수, 탐블린간 호수와 자틸루위의 계단식 논 등 발리의 아름다운 자연이 잘 드러나는 지역이다.
섬의 동부와 북부 해안 지역은 1970년대 이후 비치 리조트로 개발되고 있다. 동부의 다사, 아메드(Amed), 북부의 로비나 해변(Lovina Beach), 북서쪽의 쁘무트란(Pemuteran) 등이 대표적이다. 이 지역들은 스쿠버 다이빙, 스노클링 명소로 유명하다. 특히 동부 뚤람벤(Tulamben)에는 일본군의 공격으로 좌초된 후 화산 폭발로 해저에 침몰한 미국 수송선 리버티 호가 있어 다이버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발리 동부에는 아궁산(Mount Agung)과 브사키 사원(Besakih Temple)이 있고, 섬 북부에는 오래된 도시 싱아라자(Singaraja) 항구가 있다.
8. 1. 남부 해변 리조트
응우라라이 공항 개항 이후 발리섬의 관광 개발은 단체 관광을 위한 대규모 개발로 시작되었으며, 처음에는 사누르와 꾸따가 관광의 중심이었다. 1980년대에는 누사 두아에 고급 리조트 건설이 진행되었고, 1990년대에는 개발이 꾸따 남북으로 확산되어 세미냑, 레기안, 짐바란, 탄중 베노아에 이르는 해안에 넓은 관광 지대가 형성되었다. 세미냑 북쪽에는 타나 롯 사원이 있다.발리섬 남쪽 해안은 서핑의 메카로, 건기와 우기에 관계없이 양질의 파도를 찾아 세계 각국의 서퍼들이 방문한다. 서핑 포인트와 파도의 성질도 다양하며, 최근에는 서핑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과 프로 서퍼도 많아졌다.
8. 2. 주도 덴파사르
주도인 덴파사르는 현지 사회의 상업 중심지며, 현지 주민이 다니는 발리 쇼핑 센터, 마타하리 등의 쇼핑몰과 수공예품, 직물 시장인 파사르 쿤바사리와 중앙 식품 시장인 파사르 바둔 등의 시장, 레스토랑, 공원이 많이 있다. 기타, 발리 주 국립 박물관과 푸푸탄 광장 등의 관광지가 있다. 발리에서는 고층 건물 건설이 엄격하게 규제되기 때문에 주도에서도 푸른 하늘이 한눈에 펼쳐진다.
8. 3. 우붓 산악 지대
산의 측면으로 가면, 산중턱의 리조트 지역이 있는 발리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지역이 우붓이다.[59] "예술 마을" 우붓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부터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양질의 발리 댄스와 발리 예술, 바틱 등 염색 기술, 대나무 제품 등 전통 문화와 민예품 등 여러 가지를 볼거리를 제공한다.[59] 우붓 남쪽에는 목조 마을 데사 마스도 번창하고 있다.[59]
물질 문명과 현대 문명의 굴레에 지친 서양인과 일본인들이 장기 체류를 하면서 발리의 문화를 배우고 가는 경우도 많고, 몇 개월에서 몇 년까지 발리에 머물면서 회화, 음악, 조각, 춤 등을 배우고, 또 자신의 예술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도 볼 수 있다.[59] 우붓은 우붓 원숭이 숲과 네카 미술관 등 미술관이 세워져 있다.[59]
바투르산이 우뚝 솟아있는 발리 중부 산악 지대는 낀타마니 고원, 브라탄 호수, 탐블린간 호수와 자틸루위의 계단식 논 등 발리의 아름다운 자연이 잘 드러나는 지역이다.
8. 4. 섬 동부, 북부
섬의 동부와 북부 해안 지역은 1970년대 이후 비치 리조트로 개발되고 있다. 동부의 다사, 아메드(Amed), 북부의 로비나 해변(Lovina Beach), 북서쪽의 쁘무트란(Pemuteran) 등이 대표적이다. 이 지역들은 스쿠버 다이빙, 스노클링 명소로 유명하다. 특히 동부 뚤람벤(Tulamben)에는 일본군의 공격으로 좌초된 후 화산 폭발로 해저에 침몰한 미국 수송선 리버티 호가 있어 다이버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발리 동부에는 아궁산(Mount Agung)과 브사키 사원(Besakih Temple)이 있고, 섬 북부에는 오래된 도시 싱아라자(Singaraja) 항구가 있다.
9. 교통
발리의 관문인 덴파사르 국제공항이 섬 남부 (꾸따 바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카르타, 인천, 싱가포르, 시드니, 런던 등 각지와 연결되어 있다. 개항 당시에는 발리까지 직항이 없었지만, 곧 해금되어 많은 관광객이 직항 노선과 자카르타 경유 항공편을 이용하게 되었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섬들을 연결하는 국내선 항공편의 편수도 많다.
바다로는 자와섬(기리마누쿠 - 쿠타빤), 롬복섬(빠당바이, 베노아 - 렌바루 항구) 등 인도네시아의 각 섬으로 페리로 연결되며, 편수도 많다. 인도네시아 동부 제도에 장거리 항로의 선박이 운항되고 있다.
발리섬 내부에서는 철도가 운행되지 않아 대부분 자동차를 이용하여 이동한다. 발리는 해안을 따라 주요 지역을 연결하는 일주 도로가 있으며, 내륙에는 남북으로 깊은 골짜기를 따라 남북 방향 도로가 발달해 있다. 동서 방향 도로는 많지 않다. 마을 간 도로와 마을 내 도로는 대부분 포장되어 있어 자동차 통행에 문제가 없다. 덴파사르에는 아시아 고속도로 2호선의 기점이 있으며, 해로로 자와섬과 연결된다.
중산층 이하 현지 주민들은 주로 오토바이나 베모를 이용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오토바이 택시인 오제와 조랑말 마차인 돗카루도 볼 수 있다.
장거리 이동 시에는 주요 지역 간 버스가 운행되며, 요금은 베모보다 저렴하지만 에어컨은 없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덴파사르 터미널을 경유해야 한다. 관광객을 위한 에어컨 셔틀버스가 매일 여러 대 운행되며, 베모를 하루 단위로 전세 낼 수도 있다. 덴파사르, 꾸따, 사누르, 누사두아 등 남부 주요 관광지에서는 미터기 택시가 운행된다.
9. 1. 지역 교통
발리섬 내부에서는 철도가 운행되지 않아 대부분 자동차를 이용하여 이동한다. 발리는 해안을 따라 주요 지역을 연결하는 일주 도로가 있으며, 내륙에는 남북으로 깊은 골짜기를 따라 남북 방향 도로가 발달해 있다. 동서 방향 도로는 많지 않다. 마을 간 도로와 마을 내 도로는 대부분 포장되어 있어 자동차 통행에 문제가 없다. 덴파사르에는 아시아 고속도로 2호선의 기점이 있으며, 해로로 자와섬과 연결된다.중산층 이하 현지 주민들은 주로 오토바이나 베모를 이용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오토바이 택시인 오제와 조랑말 마차인 돗카루도 볼 수 있다.
장거리 이동 시에는 주요 지역 간 버스가 운행되며, 요금은 베모보다 저렴하지만 에어컨은 없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덴파사르 터미널을 경유해야 한다. 관광객을 위한 에어컨 셔틀버스가 매일 여러 대 운행되며, 베모를 하루 단위로 전세 낼 수도 있다. 덴파사르, 꾸따, 사누르, 누사두아 등 남부 주요 관광지에서는 미터기 택시가 운행된다.
발리섬의 관문은 응우라라이 국제공항(덴파사르 국제공항)으로, 섬 남부 꾸따 바로 남쪽에 있다. 자카르타, 나리타, 싱가포르, 시드니, 런던 등 여러 지역과 항공편으로 연결된다. 인도네시아 각 섬을 잇는 국내선 항공편도 많다.
해상 교통으로는 자와섬(길리마눅 - 쿠타빤), 롬복섬(파당바이, 베노아 - 렘바르 항), 렘봉안섬 등 인도네시아 각 섬과 페리로 연결되며, 운항 편수가 많다. 인도네시아 동부 제도로 가는 장거리 항로 선박도 운항된다.
10. 치안
발리는 서구권 국가나 호주에 비해 치안이 양호한 편이지만, 관광객을 노린 범죄가 많이 발생한다.[65] 꾸따(Kuta), 레기안(Legian) 해변 등지에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절도, 사기, 날치기 등이 자주 발생한다.[65] 마약 관련 범죄도 발생하며, 코카인 반입으로 체포된 영국 여성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진 사례도 있다.[67] "비치 보이"라 불리는 지고로에 의한 일본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도 발생하고 있으며, 2003년에는 일본 영사관이 현지 경찰에 수사 강화를 요청하기도 했다.[69]
이러한 범죄는 발리인보다는 주변 섬에서 온 젊은이들에 의해 주로 발생하며, 발리 사람들은 이에 대해 피해 의식을 느끼고 있다.[70]
2002년 10월 12일 꾸따 해변에서 차량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202명이 사망하고 209명이 부상당했다. 2005년 10월 2일에는 꾸따와 짐바란 해변에서 연쇄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26명이 사망하고 127명이 부상당했다.
섬 안에는 크로보칸 교도소가 있는데,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수감자들에 의한 폭동이 자주 발생한다. 2012년 2월 폭동에서는 수감자들이 교도소를 점거하고 교도관들이 철수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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