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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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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민관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완공된 건물로, 처음에는 경성부민을 위한 다목적 강당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행위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1945년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폭파 의거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 국립극장, 대한민국 국회 의사당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1991년부터 현재까지 서울특별시의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2002년에는 등록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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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부민관
로마자 표기Bumingwan
한자 표기府民館
다른 이름경성부민관
상세 정보
주소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25
착공일1934년 7월 30일
완공일1935년 12월 10일
소유주서울특별시
용도다목적
문화재 정보
국가대한민국
유형국가등록문화재
지정 번호11
지정일2002년 5월 31일
주소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25 (태평로1가)
시대일제강점기
소유서울특별시
면적7,097.3m2
수량1동
사진
건물 (2009년)
웹사이트
공식 웹사이트서울특별시의회

2. 역사

부민관은 완공 이후 여러 기관을 거쳐 1991년부터 서울특별시의회에서 사용하고 있다.[6] 일제강점기에는 모윤숙, 이광수 등이 이곳에서 일제 전쟁 협력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는 등 일제의 전쟁 독려를 위한 정치 집회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미군 사령부가 사용하였고, 한국전쟁 서울 수복 이후부터 1975년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이용되다가 1991년부터 서울특별시의회가 사용하게 되었다.

1945년 7월 24일,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등은 친일파 박춘금의 강연회를 막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 폭파한 부민관 의거를 일으켰다.

1980년 정문과 현관이 철거되었고, 2002년 등록문화재 제11호 '''서울 구 국회의사당'''으로 등록되었다.[7][8]

일제강점기 당시의 부민관


부민관의 용도 변경 내역은 다음과 같다.

시기용도
1934년~1950년경성부민관
1954년~1975년국회의사당
1975년~1990년세종문화회관 별관
1991년~서울시의회 의사당 및 사무처


2. 1. 건립 배경 및 초기 역사 (일제강점기)

부민관은 본래 대한제국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위패를 모신 덕안궁이 있던 터에 건립되었다. 경성전기회사는 서울의 전기사업 독점 대가로 50만 엔을 납부했고, 이 돈을 바탕으로 경성부민을 위한 5600m2 규모의 다목적 강당이 건설되어 문화공연장으로 사용되었다.[1][2]

1934년 7월 30일 착공, 1935년 12월 10일에 완공되었다. 설계는 하기와라 코이치(萩原孝一)가 담당하였다. 지상 3층, 지하 1층, 철근 콘크리트조 건물로, 높이 45m, 연면적 5676m2 였다.[4] 대강당(1,800석), 중강당(400석/1,000명), 소강당(160석) 외에도 식당, 이발소, 귀빈 접대실 등을 갖춘 당시로서는 드문 현대식 시설이었다.[1] 총공사비는 약 61만였다.(1935년 기준)[4]

부민관 시설 (1935년 완공 당시)[4]
시설규모
대홀정원 1,800명
중강당정원 1,000명
소강당정원 160명
기타소교실, 화실, 식당, 이발소 (전관 냉난방 완비)



건물은 다양한 목적으로 대여되었는데, 결혼식, 추모식, 기념행사 등이 개최되었다.[2] 최승희다카라즈카 가극단(宝塚歌劇団)의 공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 개선 보고회, 헬렌 켈러 강연회 등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 및 강연이 개최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일제의 선전 활동 및 한국인 강제 동원을 조직하는 중심지가 되었다.[2] 모윤숙, 이광수 등 친일 인사들은 부민관에서 일제 전쟁 협력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다.

2. 2. 부민관 의거 (1945년 7월 24일)

1945년 7월 24일, 부민관에서는 친일파 박춘금이 주도하는 '아시아민족의 해방' 강연회와 '남녀청년 분격웅변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9]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등은 이러한 친일 행사를 저지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여 폭파하였다.[9] 이 사건으로 친일파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부민관 폭탄 의거 터 표석


1995년, 서울특별시 중구에는 부민관 폭탄 의거 터 표석이 설치되어 그날의 의거를 기리고 있다.[9]

2. 3. 해방 이후 역사

해방 후 미군정이 이 건물을 사용했다.[1] 미군정청 수장인 존 R. 호지 장군은 1945년 9월 이 건물에서 일련의 회의를 개최했다.[3]

1949년 서울특별시 소유가 되었고, 1950년 4월 29일 국립극장이 설립되어 이 건물을 본부로 사용했다. 그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극단은 안전을 위해 대구로 피난했다.[1]

2. 4. 국회의사당 시절 (1954년 ~ 1975년)

1954년 6월부터 대한민국 국회의 회의장으로 사용되다가 1975년 여의도에 새로운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이 완공될 때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1]

2. 5. 서울특별시의회 이전 (1991년 ~ 현재)

1991년 지방자치제 실시와 함께 서울특별시의회가 이전하여 현재까지 사용 중이다.[6] 이전에는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사용되었다.(1975년~1990년)[7][8]

2. 6. 등록문화재 지정 (2002년)

1980년 정문과 현관이 철거되었고, 2002년 등록문화재 제11호 '''서울 구 국회의사당'''으로 등록되었다.[7][8]

3. 건물 구조 및 특징

이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조 3층 건물로, 연면적은 5,676m2, 높이는 45m였다.[4] 건물 내에는 대홀(정원 1,800명), 중강당(정원 1,000명), 소강당(정원 160명)을 비롯하여 소교실, 화실, 식당, 이발소 등이 있었으며, 전관에 냉난방이 완비되어 있었다.[4]

4. 같이 보기

참조

[1] 논문 부민관 (府民館)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3-12
[2] 웹사이트 경성부민관 http://contents.hist[...] 2024-03-12
[3] 간행물 孫世一의 비교 傳記 (76) http://monthly.chosu[...] 2024-05-24
[4] 문서 年鑑[1942]
[5] 문서 年鑑[1943]
[6] 웹인용 시의회 건축물 http://www.smc.seoul[...] 2016-02-14
[7] 웹인용 서울 구 국회의사당 - 문화유산정보 http://www.cha.go.kr[...] 2016-02-14
[8] 간행물 문화재청고시제2002-24호(문화재등록) http://gwanbo.mois.g[...] 관보(정호) 2002-05-31
[9] 웹인용 부민관 폭탄 의거 터 표석 위치 https://www.googl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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