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신종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북송 신종은 1067년부터 1085년까지 재위한 북송의 제6대 황제이다. 1066년 황태자에 책봉된 후 이듬해 19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며, 왕안석을 등용하여 신법 개혁을 추진했다. 신종은 재위 기간 동안 외교 및 군사 정책을 펼쳤으며, 서하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1085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철종이 즉위했으며, 신종은 왕안석의 개혁을 통해 북송의 중흥을 이끌었으나, 개혁을 둘러싼 당쟁 격화와 군사적 실패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085년 사망 - 곽희
북송 시대 화가 곽희는 신종의 총애를 받으며 독창적인 화법으로 웅장하고 깊이 있는 산수화를 그렸고, 이곽파를 형성하여 중국 산수화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신종 사후에는 잊혀졌다. - 1085년 사망 - 정호
정호는 북송 시대의 유학자로서 동생 정이와 함께 '이정'으로 불리며 신유학의 선구자로 여겨지고, 인을 중심 사상으로 성경의 마음가짐을 강조하며 우주의 이치를 직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후대 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048년 출생 - 알렉시오스 1세
알렉시오스 1세 콤네누스는 콤네누스 왕조를 창시하여 동로마 제국을 안정시키고 영토를 회복했으며, 제1차 십자군을 이용하여 셀주크 제국의 위협을 억제했으나, 십자군과의 복잡한 관계와 만년의 족벌주의, 후계 문제로 비판받았다. - 1048년 출생 - 망누스 2세 (노르웨이)
망누스 2세는 하랄 3세의 아들로 1066년부터 1069년까지 노르웨이 국왕이었으며, 이복 동생 올라프 3세와 공동 통치하며 노르웨이 동부를 주로 다스렸고, 1058년 아일랜드해 원정과 1062년 덴마크 원정에도 참여했다.
북송 신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황제 |
휘 | 조중침 (1048–1067) 조욱 (1067–1085) |
묘호 | 신종(神宗) |
시호 | 체원현도법고입헌제덕왕공영문열무흠인성효황제 (體元顯道法古立憲帝德王功英文烈武欽仁聖孝皇帝) (1113년 추증) |
생년월일 | 1048년 5월 25일 |
몰년월일 | 1085년 4월 1일 (향년 36세) |
능묘 | 영유릉 (永裕陵, 현재의 궁이, 허난) |
아버지 | 영종 |
어머니 | 선인황후 |
재위 | |
재위 기간 | 1067년 1월 25일 – 1085년 4월 1일 |
즉위 | 1067년 1월 25일 |
이전 | 영종 |
이후 | 철종 |
연호 | 희녕 (熙寧): 1068–1077 원풍 (元豐): 1078–1085 |
가계 | |
배우자 | 흠성황후 향씨 (1066–1085) 흠성황후 주씨 (1068–1085) 흠자황후 진씨 (1085) |
자녀 | 철종 조비 휘종 조우 조시 조채 함목공주 함소공주 함경공주 |
황위 계승 | |
황태자 책봉 | 1067년 1월 10일 |
이전 황태자 | 인종 조침 |
이후 황태자 | 철종 조후 |
작위 | |
영왕 책봉 | 1064년 7월 21일 |
회양군왕 책봉 | 1063년 10월 7일 ~ 1064년 7월 21일 |
광국공 책봉 | 1063년 5월 16일 ~ 1063년 10월 7일 |
기타 정보 | |
왕조 | 송 (북송) |
가문 | 조 |
2. 생애
1066년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영종이 죽자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태자 시절부터 왕안석의 명성을 들어온 신종은 즉위하자마자 그를 조정에 불러들였고 1069년 왕안석을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했다.[8] 국방비의 증가와 대상인, 대지주 증가로 일어난 세수 감소 등에 대해 개혁이 촉구된 시기였기에 신종은 왕안석을 등용하여 국정 개혁에 나섰고, 왕안석은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를 세워 신법(新法)을 제정해 반포하였다.[9]
이 신법은 주로 영세 농민의 보호와 대상인, 대지주의 억제를 목표로 한 것이기에 신법은 지주, 상인세력과 그곳 출신인 관료들의 엄청난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이들 반대파들을 가리켜 구법파(舊法派)라고 불렀다.
이 신법파와 구법파의 다툼은 나날이 격렬해져 갔다. 신법파의 왕안석에 대해 구법파의 대표자는 사마광이었다. 이 두 사람이 살아있던 기간에는 당파의 다툼은 높은 이념에 의한 것이었으나,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당리에 의한 이념 다툼으로 추락했다. 신법파가 이기면 구법파의 관료는 한꺼번에 중앙에서 멀어졌고, 법률을 모두 개정하였지만, 그 후에 구법파가 득세할 때에는 오히려 반대의 일이 벌어지는 상황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러한 다툼은 국가체제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서서히 송나라의 국력은 기울어져갔다.
1085년 북송 신종이 붕어하고 철종이 즉위하였다.
1068년 재위 기간 동안, 신종 황제는 왕안석의 정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왕안석을 재상으로 임명했다. 왕안석은 농민과 실업자들의 상황 개선을 목표로 하는 유명한 신법을 시행했다. 이 조치는 신종 황제 통치의 대표적인 개혁이 되었다.
신종이 1067년 즉위하기 전, 송나라는 경제 개혁에 대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송나라의 엄격한 과거 제도는 인문주의적 성향의 유교 엘리트 문화를 부활시켰으며, 특히 문인들은 백성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고자 했다. 또한, 1040년대 서하와의 굴욕적인 패배 (그리고 전연의 맹약의 불리한 조건)는 "영구적인 전시 재정 체제"를 만들었다. 신종은 특히 연운 16주를 회복하려는 미수복 의지에 의해 추진되었다.
1067년 즉위 직후, 신종 황제는 송나라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 사마광을 수장으로 하는 지출 절감 사무소를 설립했다. 사마광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왕조의 재정 문제의 심각성을 논하는 신랄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실제로, 국방은 왕조 현금 수입의 83%를 소비했고, 팽창하는 이미 대규모의 관료 체제는 유지 비용이 매우 높았다. 1069년, 관료 부필로부터 개혁에 대한 지지를 얻는 데 다시 실패한 후, 신종은 왕안석을 정부 수반으로 임명하고 그의 권력 강화와 신법을 지지했다.
신종은 1076년 왕안석이 은퇴할 때까지 대부분의 권한을 그에게 위임했다. 예외적인 경우로, 1069년 초겨울 신종은 왕안석과 진승지에게 재정 기획 위원회(왕안석이 그해 초에 설립)를 폐지하고 대신 중서성의 권한에 의존하여 경제를 관리하도록 조언했다. 왕안석은 위원회가 중서성과 추밀원 사이의 재정 문제를 조정하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거부했다. 그는 왕안석이 직접 위원회를 이끌도록 하려는 신종의 제안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또 다른 예로, 신종은 균전제 ( 북위에서 시작되어 당나라를 거쳐 사용된 토지 재분배 시스템)의 부활을 제안했지만, 왕안석은 그 아이디어가 비현실적이라고 일축했다. 신종은 이자에 대한 수익 창출 가능성에 매료되어 상인과 소비자들의 정부의 괴롭힘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가격 통제 정책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신종과 왕안석은 또한 직접적인 군사 개혁을 추진했다. 이론적으로 각 군은 5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지만, 실제로는 부패로 인해 그 수가 훨씬 적었고 많은 노약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신종은 과도한 병력 수를 줄여 전체 군대가 90만 명 미만이 되게 했으며, 통신, 규율, 병력 징집 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해 경략사 제도를 도입했다. 한편, 국내 안보를 강화하고 정규군을 추가 지원하기 위해 마을 방어 시스템으로 보갑법이 도입되었다.
신법은 신종에게 막대한 예산 흑자를 안겨주었지만, 송나라 군대를 개선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서하는 계속해서 송나라에게 패배를 안겨주었고, 요나라에 대한 공격은 여전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지속적으로 낮은 군대 질, 열악한 물류, 전반적인 부실한 지도력에 기인했다. 예를 들어, 보갑법은 황실 군대를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병력을 생산하지 못했다. 신종이 막대한 에너지를 쏟았던 개혁의 군사적 실패는 결국 그의 질병과 죽음에 기여했다. 신법이 중앙 권력에 대한 견제를 회피한 것은 처음부터 논란이 되었으며, 부비와 사마광 모두 신종에게 정부 기능을 균형 있게 유지하고, 관료적 절차를 존중하며, 왕안석을 지지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상소를 올렸다.
1066년에 황태자가 되었고, 이듬해 영종의 붕어(崩御)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 지방에서 정무 실적이 있던 왕안석을 등용하여 국가 재건에 나섰다. 왕안석에 의한 개혁은 "정(政)·관(官)·재(財)·군사(軍事)"의 체계를 재편하여 조정을 효율화하고, 결과적으로 부세 부담을 경감함으로써 국가의 발전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고, 신종(神宗)도 왕안석의 이념에 동의하여 전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개혁은 대지주나 대상인을 비롯해 황족 등 기득권익을 침해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수파로부터 큰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관가에서도 그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그룹(후에 '''구법당'''이라 칭해짐)이 탄생하여, 정무 포기를 통해 왕안석에게 대항했다.
왕안석은 재상의 권한을 활용하여 이러한 반대 세력을 철저하게 억눌렀다. 그리고 사마광, 문언박 등 반대파 그룹에 잇따라 처벌을 가했다. 이때, 도서관 사서장이라는 한직으로 좌천된 사마광은, 반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치통감』 편찬을 했으며, 다른 구법당 관료도 민간에서 문학, 시문, 회화, 교육 등 문인으로서 활동하며, 사회에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냈다. 이는 신종과 왕안석이, 구법당의 정치 외 사회적 지위에 대해 보장하고 활동의 자유를 부여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왕안석 시대를 구법당이 탄압받았던 시대라고 부정적인 측면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구법당도 활동하는 시대였다.
신종은 이 구법당의 세력에 동요했지만, 왕안석에 의한 설득도 이루어졌고, 신법 운동은 계속되었다. 또한 신법 실시 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더욱 개혁이 이루어졌다. 또한, 구법당에 대항하기 위해 왕안석파의 여혜경과 증포 등 실무 관료들을 잇따라 발탁했다.
그러나 희녕 7년 (1074년) 천재지변이 잇따르고, 또 신법당 내부에서 정책 의견의 불일치가 발생했기 때문에, 신종은 왕안석을 해임했다. 그럼에도 왕안석의 동료였던 한강과 측근인 여혜경이 정권을 담당하여, 신법 운동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다음 해 여혜경이 상사에 해당하는 한강과 불화하게 되었고, 독선적인 정책 결정을 하고, 신법 활동을 무력화하려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항하기 위해, 다시 왕안석을 등용하여, 정권 운영을 맡기게 되었다.
재차 임용된 왕안석은 주변 제국과의 외교 교섭과 무역 진흥을 통해 변경의 안정을 추구하고, 군사비를 대폭 삭감하는 데 성공한다. 국내에서는 구법당을 억누르고 신법의 실시 지역을 확대한 것과 동전 대량 발행 효과가 나타나 국가 재정도 호전되었고, 또 부세의 부담을 줄임으로써 농촌 공동체의 재생에 성공하여, 치안도 개선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왕안석을 지지하는 신법당에 내부 분열이 발생하여,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또한, 후계자인 아들 왕방이 병사한 것과, 신종 자신이 왕안석의 평화 외교나 정권 운영 방법에 불만을 나타내게 되면서, 왕안석은 신법에 대한 의욕을 잃고,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 1. 왕안석의 신법(新法) 추진과 그 영향
1068년 재위 기간 동안, 신종 황제는 왕안석의 정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왕안석을 재상으로 임명했다. 왕안석은 농민과 실업자들의 상황 개선을 목표로 하는 신법을 시행했다. 이 조치는 신종 황제 통치의 대표적인 개혁이 되었다.즉위 후 지방에서 정무 실적이 있던 왕안석을 등용하여 국가 재건에 나섰다. 왕안석에 의한 개혁은 "정(政)·관(官)·재(財)·군사(軍事)"의 체계를 재편하여 조정을 효율화하고, 결과적으로 부세 부담을 경감함으로써 국가의 발전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고, 신종도 왕안석의 이념에 동의하여 전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개혁은 대지주나 대상인을 비롯해 황족 등 기득권익을 침해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수파로부터 큰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관가에서도 그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그룹(후에 '''구법당'''이라 칭해짐)이 탄생하여, 정무 포기를 통해 왕안석에게 대항했다.
왕안석은 재상의 권한을 활용하여 이러한 반대 세력을 철저하게 억눌렀다. 그리고 사마광, 문언박 등 반대파 그룹에 잇따라 처벌을 가했다. 이때, 도서관 사서장이라는 한직으로 좌천된 사마광은, 반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치통감』 편찬을 했다. 다른 구법당 관료도 민간에서 문학, 시문, 회화, 교육 등 문인으로서 활동하며, 사회에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냈다. 이는 신종과 왕안석이, 구법당의 정치 외 사회적 지위에 대해 보장하고 활동의 자유를 부여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종은 이 구법당의 세력에 동요했지만, 왕안석에 의한 설득도 이루어졌고, 신법 운동은 계속되었다. 또한 신법 실시 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더욱 개혁이 이루어졌다. 또한, 구법당에 대항하기 위해 왕안석파의 여혜경과 증포 등 실무 관료들을 잇따라 발탁했다.
그러나 희녕 7년 (1074년) 천재지변이 잇따르고, 또 신법당 내부에서 정책 의견의 불일치가 발생했기 때문에, 신종은 왕안석을 해임했다. 그럼에도 왕안석의 동료였던 한강과 측근인 여혜경이 정권을 담당하여, 신법 운동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다음 해 여혜경이 상사에 해당하는 한강과 불화하게 되었고, 독선적인 정책 결정을 하고, 신법 활동을 무력화하려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항하기 위해, 다시 왕안석을 등용하여, 정권 운영을 맡기게 되었다.
재차 임용된 왕안석은 주변 제국과의 외교 교섭과 무역 진흥을 통해 변경의 안정을 추구하고, 군사비를 대폭 삭감하는 데 성공한다. 국내에서는 구법당을 억누르고 신법의 실시 지역을 확대한 것과 동전 대량 발행 효과가 나타나 국가 재정도 호전되었고, 또 부세의 부담을 줄임으로써 농촌 공동체의 재생에 성공하여, 치안도 개선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왕안석을 지지하는 신법당에 내부 분열이 발생하여,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또한, 후계자인 아들 왕방이 병사한 것과, 신종 자신이 왕안석의 평화 외교나 정권 운영 방법에 불만을 나타내게 되면서, 왕안석은 신법에 대한 의욕을 잃고,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 2. 원풍개혁(元豊改革)
1076년 왕안석의 영구적인 은퇴 이후, 신종은 개혁 의제를 직접 관리하고 원풍 개혁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자신의 개인적 권력을 크게 확대했고, 많은 보수파들이 조정에 초청되었지만, 그들을 황제의 지침에 따르게 하기 위해 권위적인 관리인 채확을 이용했다. 원풍으로 개원되자, 개혁은 신종이 주도하면서 단속적으로 지속되었다(원풍의 개혁). 내부 분열했던 신법파도, 신종이 직접 통치를 실시하고 채확이라는 실무 관료가 등장하면서 의견의 집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신종은 기존의 신법에 더하여, 개혁으로 발생한 재정적 여유를 활용한 정책을 실시해 나갔다. 국내 정부를 더욱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관료의 정원을 대폭 삭감했고, 조정에 의한 관료 관리도 진척되었다. 또한 청묘법이나 시역법 등을 더욱 개선하여, 민간 경제에 조정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시책이 취해졌다. 왕안석과의 상이점으로는, 군사 방면에 주력했다는 점이 꼽힌다. 삼사와 사농사 (신정책 이전에 존재했던 기관)는 해산되고 호부로 대체되었다. 신종은 서하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원풍사를 만들었다. 비록 공세는 패배했지만, 원풍사는 신정책과 국영 독점으로부터의 수입을 위한 보관소로 남았다. 호부와 원풍사 모두 송나라의 재정 자원에 상당한 통제력을 행사했다.
1082년, 신종은 관료 제도를 재구성하고 서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비서성, 참지성, 추밀원을 만들어 육부를 중심으로 중앙 정부를 조직하는 당나라 모델을 복원했다. 그러나 설계 결함으로 인해 비서성이 다른 두 부서를 빠르게 지배하게 되었다. 더욱이, 모든 정책 계획이 승인되기 위해 복잡한 경로를 거쳐야 하는 관료 제도의 엄격한 분리는 비효율적이었다. 신종 자신이 가장 적극적인 정책 입안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비효율성은 대체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어린 황제 철종과 무능한 황제 휘종의 통치는 그러한 시스템의 중복성을 드러냈다.
원풍 시대의 정책은, 신종 독자적인 것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있지만, 군사면 이외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왕안석의 정책과 유사한 것이며, 이 시기의 개혁은 신법을 실정에 맞춰 수정한 것이다. 그리고 신종 치세 후반에는 신법이 전국에 적용되어, 북송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국내 개혁에 성공한 신종은, 서하에 대한 침공을 계획한다. 그러나 이 군사 행동은 실패로 끝났다. 신법은 신종에게 막대한 예산 흑자를 안겨주었지만, 송나라 군대를 개선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서하는 계속해서 송나라에게 패배를 안겨주었고, 요나라에 대한 공격은 여전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2. 3. 외교 및 군사 정책
신종은 선대 황제들의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정복을 통해 송나라의 위신을 높이고자 했다.[1] 이는 재정 문제의 중앙 집권화를 향한 열망과도 관련이 있었다.[1] 그는 문제에게 "변방의 군대를 일으키려면 우리 국고가 가득 차야 한다."라고 말했다.[1] 또한 재상 한치를 비롯한 대신들의 권력이 커지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신종의 이러한 팽창주의적 정책은 부필, 사마광 등 보수파의 반대에 부딪혔는데, 이들은 신종의 군주 권력 확장에 우려를 표하며 서하 및 요나라와의 평화 유지를 주장했다.[1]신종은 거란족의 요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부하라 출신의 무슬림 용병을 고용했다. 1070년, 5,300명의 부하라 출신 무슬림들을 북동부의 요나라와 싸우고 전투로 황폐화된 지역을 재건하기 위해 중국으로 이주하도록 장려하고 초청했다.[2] 이들은 요나라에 대한 원정에서 용병으로 활용되었으며, 이후 송나라 수도 변량(오늘날의 개봉)과 연경(오늘날의 베이징) 사이에 정착했다. 1080년에는 10,000명의 무슬림이 추가로 중국에 초청되어 북부와 북동부 로에 정착했다.[2][3]
1076년, 리 왕조의 베트남 통치자 리 인종에 대항하여 원정을 보냈다.[5]
13세기 이전 유럽과의 접촉은 거의 없었으나, 미카엘 7세 두카스가 보낸 비잔틴 제국의 외교 사절단이 1081년 송나라에 도착했다.[6]
탕구트가 이끄는 서하를 약화시키기 위해 칭주(慶州, 오늘날 칭양, 간쑤 성)에서 서하군을 침략하려 했으나, 1082년 융러 성(永樂城) 전투에서 패배했다.
2. 4. 죽음과 평가
신종은 서하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을 계기로 건강을 해쳤으며, 1085년에 38세의 나이로 붕어(崩御)하였다. 융러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 신종은 자신이 추진했던 개혁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좌절하였다. 그는 죽기 직전, 후사를 사마광과 여공저에게 맡겼다. 신종의 사후, 그의 어머니 고황후가 철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을 하였고, 이 시기에 정치적 투쟁이 벌어져 보수파가 신법을 폐지하고 개혁파를 숙청하였다.신종은 왕안석을 등용하여 신법 개혁을 추진, 송나라를 일시적으로 중흥시킨 점은 높이 평가받는다. 그러나 개혁을 둘러싼 사대부 간의 당쟁 격화와 신법 개혁의 "계승" 실패는 비판받기도 한다. 남송 시대에는 북송 멸망의 원인이 신종의 왕안석의 변법으로 여겨져 후세의 비판을 받았다.
3. 연호
wikitable
신종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
서력 (西曆) | 1068년 | 1069년 | 1070년 | 1071년 | 1072년 | 1073년 | 1074년 | 1075년 | 1076년 | 1077년 |
간지 (干支) | 무신(戊申) | 기유(己酉) | 경술(庚戌) | 신해(辛亥) | 임자(壬子) | 계축(癸丑) | 갑인(甲寅) | 을묘(乙卯) | 병진(丙辰) | 정사(丁巳) |
연호 (年號) | 희녕(熙寧)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신종 | 11년 | 12년 | 13년 | 14년 | 15년 | 16년 | 17년 | 18년 | ||
서력 (西曆) | 1078년 | 1079년 | 1080년 | 1081년 | 1082년 | 1083년 | 1084년 | 1085년 | ||
간지 (干支) | 무오(戊午) | 기미(己未) | 경신(庚申) | 신유(辛酉) | 임술(壬戌) | 계해(癸亥) | 갑자(甲子) | 을축(乙丑) | ||
연호 (年號) | 원풍(元豊)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4. 존호, 시호, 묘호
1071년 6월 쯤에 소천법고문무인효황제(紹天法古文武仁孝皇帝)라는 존호를 받았고, 1074년 7월 쯤에 존호를 개정하여 소천헌고문무인효황제(紹天憲古文武仁孝皇帝)를 받았으나 신종이 불허하였다. 1077년 7월 쯤에 소(紹)대신 봉(奉)으로 고쳐서 다시 올렸으나 신종이 다시 불허 하였다.
사후 시호는 영문열무성효황제(英文烈武聖孝皇帝)이며, 철종 때인 1095년에 시호를 가상하여 소천법고운덕건공영문열무흠인성효황제(紹天法古運德建功英文烈武欽仁聖孝皇帝)로 추시되었다. 휘종 때인 1104년에 개정되어 체천현도제덕왕공영문열무흠인성효황제(體天顯道帝德王功英文烈武欽仁聖孝皇帝)로 재추시되었고, 1113년에 시호가 재개정되어 '''체원현도법고입헌제덕왕공영문열무흠인성효황제'''(體元顯道法古立憲帝德王功英文烈武欽仁聖孝皇帝)로 최종 추시되었다. 묘호는 '''신종'''(神宗)이며, 능은 영유릉(永裕陵)이다.
5. 가계
조서는 신종의 부친이며, 모친은 선인성렬황후 고씨이다. 조부는 복안의왕(濮安懿王) 조윤양(趙允讓)이고, 조모는 복안의왕부인(濮安懿王夫人) 임씨(任氏)이다.
북송 신종에게는 황후 1명과 여러 후궁들이 있었다. 정실 황후는 흠성헌숙황후 상씨이며,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후궁으로는 흠성황후 주씨, 흠자황후 진씨 등이 있었다.
북송 신종에게는 아들 14명과 딸 10명이 있었다.
- | 봉호 | 시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자식 | 별칭 | 비고 |
---|---|---|---|---|---|---|---|---|
1 | 성왕(成王) | 조일(趙佾) | 1069년 | 귀비 송씨 | 요절 | |||
2 | 혜왕(惠王) | 조근(趙僅) | 1071년 | 의목귀비 형씨 | 요절 | |||
3 | 당왕(唐王) | 애헌(哀獻) | 조준(趙俊) | 1073년 ~ 1077년 | 귀비 송씨 | 요절 | ||
4 | 포왕(褒王) | 조신(趙伸) | 1074년 | 향씨 부인(向氏 夫人) | 요절 | |||
5 | 기왕(冀王) | 충효(沖孝) | 조한(趙僩) | 1074년 ~ 1076년 | 의목귀비 형씨 | 요절 | ||
6 | 황태자(皇太子) | 조후(趙煦) | 1077년 ~ 1100년 | 흠성황후 주씨 | 1남 4녀 | 북송의 7대 황제 | ||
7 | 예왕(豫王) | 도혜(悼惠) | 조가(趙價) | 1077년 ~ 1078년 | 의목귀비 형씨 | 요절 | ||
8 | 서왕(徐王) | 충혜(沖惠) | 조척(趙倜) | 1078년 ~ 1081년 | 의목귀비 형씨 | 요절 | ||
9 | 오왕(吳王) | 영목(榮穆) | 조필(趙佖) | 1082년 ~ 1106년 | 혜목현비 무씨 | 3남 | ||
10 | 의왕(儀王) | 조위(趙偉) | 1082년 | 재인 곽씨(才人 郭氏) | 요절 | |||
11 | 단왕(端王) | 조길(趙佶) | 1082년 ~ 1135년 | 흠자황후 진씨 | 38남 34녀 | 북송 제8대 황제 | ||
12 | 연왕(燕王) | 조우(趙俁) | 1083년 ~ 1127년 | 현비 임씨 | 4남 2녀 | 정강의 변 때 사망 | ||
13 | 초왕(楚王) | 영헌(榮憲) | 조사(趙似) | 1083년 ~ 1106년 | 흠성황후 주씨 | 1남 | ||
14 | 월왕(越王) | 조시(趙偲) | 1085년 ~ 1129년 | 현비 임씨 | 3남 3녀 | 금나라에서 사망 |
- | 봉호(공주) | 봉호(제희) | 시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부마 | 별칭 | 비고 |
---|---|---|---|---|---|---|---|---|---|
1 | 주국장공주 (周國長公主) | 숙회장제희 (淑懷長帝姬) | 숙회(淑懷) | 1067년 ~ 1078년 | 흠성헌숙황후 향씨 | ||||
2 | 초국장공주 (楚國長公主) | 현각장제희 (賢恪長帝姬) | ? ~ 1072년 | 순비 장씨(淑妃 張氏) | 요절 | ||||
3 | 당국장공주 (唐國長公主) | 현목장제희 (賢睦長帝姬) | 현목(賢睦) | ? ~ 1111년 | 영해군승선사(瀛海軍承宣使) 한가언 | ||||
4 | 담국장공주 (潭國長公主) | 현효장제희 (賢孝長帝姬) | 현효(賢孝) | ? ~ 1108년 | 귀비 송씨 | 왕우(王遇) | |||
5 | 운국장공주 (鄆國長公主) | 현강장제희 (賢康長帝姬) | ? ~ 1085년 | 요절 | |||||
6 | 노국장공주 (潞國長公主) | 현목장제희 (賢穆長帝姬) | ? ~ 1084년 | 흠성황후 주씨 | 요절 | ||||
7 | 형국장공주 (邢國長公主) | 현령장제희 (賢令長帝姬) | ? ~ 1084년 | 현비 임씨 | 요절 | ||||
8 | 빈국장공주 (邠國長公主) | 현의장제희 (賢宜長帝姬) | ? ~ 1085년 | 요절 | |||||
9 | 연국장공주 (兗國長公主) | 현화장제희 (賢和長帝姬) | ? ~ 1090년 | 혜목현비 무씨 | 요절 | ||||
10 | 서국장공주 (徐國長公主) | 현정장제희 (賢靜長帝姬) | 1085년 ~ 1115년 | 흠성황후 주씨 | 반의 |
신종의 황후와 후궁은 다음과 같다.
- 흠성현숙황후 향씨
- 흠성황후 주씨
- 흠자황후 진씨
- 의목귀비 형씨
- 혜목현비 무씨
- 현비 임씨
- 귀비 송씨
- 순비 장씨(淑妃 張氏)
- 재인 곽씨(才人 郭氏)
- 의정귀비 양씨
- 덕비 주씨(德妃 朱氏)
- 소의 구씨(昭儀 仇氏)
- 지유 주씨(婕妤 朱氏)
- 미인 전씨
- 부인 향씨(夫人 向氏)
- 고채노(高采盧)
- 경씨(耿氏)
5. 1. 부모
조서는 신종의 부친이며, 모친은 선인성렬황후 고씨이다. 조부는 복안의왕(濮安懿王) 조윤양(趙允讓)이고, 조모는 복안의왕부인(濮安懿王夫人) 임씨(任氏)이다.5. 2. 배우자
북송 신종에게는 황후 1명과 여러 후궁들이 있었다.[10][11][12][13][14] 정실 황후는 흠성헌숙황후 상씨이며,[10]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후궁으로는 흠성황후 주씨,[11][12] 흠자황후 진씨[13][14] 등이 있었다.5. 3. 자녀
북송 신종에게는 아들 14명과 딸 10명이 있었다.[15][16][17][18][19][20][21][22][23][24][25][26][27][28][29][30][31][32][33]- | 봉호 | 시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자식 | 별칭 | 비고 |
---|---|---|---|---|---|---|---|---|
1 | 성왕(成王) | 조일(趙佾) | 1069년 | 귀비 송씨 | 요절 | |||
2 | 혜왕(惠王) | 조근(趙僅) | 1071년 | 의목귀비 형씨 | 요절 | |||
3 | 당왕(唐王) | 애헌(哀獻) | 조준(趙俊) | 1073년 ~ 1077년 | 귀비 송씨 | 요절 | ||
4 | 포왕(褒王) | 조신(趙伸) | 1074년 | 흠성현숙황후 향씨 | 요절 | |||
5 | 기왕(冀王) | 충효(沖孝) | 조한(趙僩) | 1074년 ~ 1076년 | 의목귀비 형씨 | 요절 | ||
6 | 황태자(皇太子) | 조후(趙煦) | 1077년 ~ 1100년 | 흠성황후 주씨 | 1남 4녀 | 북송의 7대 황제 | ||
7 | 예왕(豫王) | 도혜(悼惠) | 조가(趙價) | 1077년 ~ 1078년 | 의목귀비 형씨 | 요절 | ||
8 | 서왕(徐王) | 충혜(沖惠) | 조척(趙倜) | 1078년 ~ 1081년 | 의목귀비 형씨 | 요절 | ||
9 | 오왕(吳王) | 영목(榮穆) | 조필(趙佖) | 1082년 ~ 1106년 | 혜목현비 무씨 | 3남 | ||
10 | 의왕(儀王) | 조위(趙偉) | 1082년 | 재인 곽씨 | 요절 | |||
11 | 단왕(端王) | 조길(趙佶) | 1082년 ~ 1135년 | 흠자황후 진씨 | 38남 34녀 | 북송 제8대 황제 | ||
12 | 연왕(燕王) | 조우(趙俁) | 1083년 ~ 1127년 | 현비 임씨 | 4남 2녀 | 정강의 변 때 사망 | ||
13 | 초왕(楚王) | 영헌(榮憲) | 조사(趙似) | 1083년 ~ 1106년 | 흠성황후 주씨 | 1남 | ||
14 | 월왕(越王) | 조시(趙偲) | 1085년 ~ 1129년 | 현비 임씨 | 3남 3녀 | 금나라에서 사망 |
- | 봉호(공주) | 봉호(제희) | 시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부마 | 별칭 | 비고 |
---|---|---|---|---|---|---|---|---|---|
1 | 주국장공주 (周國長公主) | 숙회장제희 (淑懷長帝姬) | 숙회(淑懷) | 1067년 ~ 1078년 | 흠성현숙황후 향씨 | ||||
2 | 초국장공주 (楚國長公主) | 현각장제희 (賢恪長帝姬) | ? ~ 1072년 | 의정숙비 장씨 | 요절 | ||||
3 | 당국장공주 (唐國長公主) | 현목장제희 (賢睦長帝姬) | 현목(賢睦) | ? ~ 1111년 | 영해군승선사(瀛海軍承宣使) 한가언(韓嘉彦) | ||||
4 | 담국장공주 (潭國長公主) | 현효장제희 (賢孝長帝姬) | 현효(賢孝) | ? ~ 1108년 | 귀비 송씨 | ||||
5 | 운국장공주 (鄆國長公主) | 현강장제희 (賢康長帝姬) | ? ~ 1085년 | 요절 | |||||
6 | 노국장공주 (潞國長公主) | 현목장제희 (賢穆長帝姬) | ? ~ 1084년 | 흠성황후 주씨 | 요절 | ||||
7 | 형국장공주 (邢國長公主) | 현령장제희 (賢令長帝姬) | ? ~ 1084년 | 현비 임씨 | 요절 | ||||
8 | 빈국장공주 (邠國長公主) | 현의장제희 (賢宜長帝姬) | ? ~ 1085년 | 요절 | |||||
9 | 연국장공주 (兗國長公主) | 현화장제희 (賢和長帝姬) | ? ~ 1090년 | 요절 | |||||
10 | 서국장공주 (徐國長公主) | 현정장제희 (賢靜長帝姬) | 1085년 ~ 1115년 | 흠성황후 주씨 | 반의 |
신종의 황후와 후궁은 다음과 같다.
6. 재상
북송 신종 시기 재상(동중서문하평장사)으로는 1067년에 임명된 한기를 시작으로, 증공량(1067년~1070년), 부필(1069년), 진욱(1069년~1070년)이 있었다. 한강은 1070년부터 1071년까지, 그리고 1074년부터 1075년까지 두 차례 재상을 역임하였다. 왕안석 또한 1070년부터 1074년, 1075년부터 1076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재상직을 수행했다. 오충은 1076년부터 1080년까지 재임하였고, 왕규는 1076년부터 1082년까지 재상으로 있었다. 1082년부터는 상서복야 겸 시랑 체제가 도입되어, 왕규가 상서좌복야 겸 문하시랑(1082년~1085년)으로, 채확이 상서우복야 겸 중서시랑(1082년~1085년)으로 임명되었다. 이 외에도 한진, 여혜경 등이 참지정사를 역임했다.
순서 | 이름 | 재임기간 | 칭호 | 자(字) | 봉호 | 시호 |
---|---|---|---|---|---|---|
1 | 한기 | 1067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 치규(稚圭) | 위군왕(魏郡王) | 충헌(忠獻) |
2 | 증공량 | 1067년 ~ 1070년 |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 소문관대학사(昭文館大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 명중(明仲) | 노국공(魯國公) | 선정(宣靖) |
3 | 부필 | 1069년 | 소문관대학사(昭文館大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 언국(彦國) | 한국공(韓國公) | 문충(文忠) |
4 | 진욱 | 1069년 ~ 1070년 |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 양숙(暘叔) | 수국공(秀國公) | 성숙(成肅) |
5 | 한강 | 1070년 ~ 1071년 | 소문관대학사(昭文館大學士) 참지정사(參知政事) | 자화(子華) | 강국공(康國公) | 헌숙(獻肅) |
6 | 왕안석 | 1070년 ~ 1074년 | 감수국사(監修國史) 참지정사(參知政事) | 개보(介甫) | 형국공(荆國公) | 문(文) |
7 | 한강 | 1074년 ~ 1075년 | 감수국사(監修國史) | 자화(子華) | 강국공(康國公) | 헌숙(獻肅) |
8 | 왕안석 | 1075년 ~ 1076년 | 소문관대학사(昭文館大學士) | 개보(介甫) | 형국공(荆國公) | 문(文) |
9 | 오충 | 1076년 ~ 1080년 | 감수국사(監修國史) | 충경(沖卿) | - | 정헌(正憲) |
10 | 왕규 | 1076년 ~ 1082년 |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참지정사(參知政事) | 우옥(禹玉) | 기국공(岐國公) | 문공(文恭) |
11 | 왕규 | 1082년 ~ 1085년 |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문하시랑(門下侍郎) | 우옥(禹玉) | 기국공(岐國公) | 문공(文恭) |
12 | 채확 | 1082년 ~ 1085년 |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 중서시랑(中書侍郎) | 지정(持正) | - | 충회(忠懷) |
참조
[1]
서적
Wen-hsien t’ung-k’ao
1308
[2]
간행물
Xi'an Daxuexi Alley Mosque: Historical and Architectural Study
https://ejars.journa[...]
2019-06-01
[3]
서적
Islam in China: religion, ethnicity, culture, and politics
Lexington Books
2002
[4]
웹사이트
Song-Period Political History
http://www.chinaknow[...]
[5]
서적
The Champa Kingdom: The History of an Extinct Vietnamese Culture
https://books.google[...]
White Lotus Press
[6]
서적
نصوص ودراسات من مصادر صينية حول البلدان الاسلامية
https://books.google[...]
Institute for the History of Arabic-Islamic Science at the Johann Wolfgang Goethe University
[7]
서적
The Seven Military Classics of Ancient China
https://books.google[...]
Westview Press
[8]
서적
중국 역사 이야기 9
일송북
2005
[9]
문서
[10]
문서
안국부인(安國夫人)/황태후(皇太后)/융우궁태후(隆祐宮太后)
[11]
문서
황태비(皇太妃)/성서궁태비(聖瑞宮太妃)
[12]
문서
본성은 최씨이나 모친의 재가로 주씨로 바뀜. 사후 황후로 추존.
[13]
문서
황태비(皇太妃)/황태후(皇太后)
[14]
문서
흠종 즉위 후 황후로 추존.
[15]
문서
영국공(永國公)/연왕(兗王)
[16]
문서
균국공(均國公)/연안군왕(延安郡王)
[17]
문서
건국공(建國公)/위왕(衛王)
[18]
문서
운왕(鄆王)
[19]
문서
의국공(儀國公)/대령군왕(大寧郡王)/진왕(陳王)
[20]
문서
영국공(甯國公)/수령군왕(遂甯郡王)
[21]
문서
성국공(成國公)/함녕군왕(咸寧郡王)/신왕(莘王)
[22]
문서
화국공(和國公)/보령군왕(普寧郡王)/간왕(簡王)
[23]
문서
기국공(祈國公)/영녕군왕(永寧郡王)/정왕(定王)
[24]
문서
연희공주(延禧公主)/연국공주(燕國公主)
[25]
문서
보경공주(寶慶公主)/오국공주(吳國公主)
[26]
문서
숙수공주(淑壽公主)/온국공주(溫國公主)/연국공주(燕國公主)
[27]
문서
강국공주(康國公主)/운국공주(鄆國公主)
[28]
문서
혜국공주(惠國公主)
[29]
문서
신국공주(莘國公主)
[30]
문서
신국공주(申國公主)
[31]
문서
기국장공주(沂國長公主)/등국장공주(鄧國長公主)
[32]
문서
가국장공주(嘉國長公主)/채국장공주(蔡國長公主)
[33]
문서
경국공주(慶國公主)/익국장공주(益國長公主)/유혜제희(柔惠帝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