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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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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요는 1122년 요나라의 천조제가 금나라의 압박으로 도주한 후, 야율대석과 야율순에 의해 건국된 정권이다. 천석황제로 즉위한 야율순이 통치했으며, 천조제 치하의 요나라가 여전히 존재했기에 북요로 불렸다. 이후 야율정, 야율아리, 야율출렬 등이 황제로 즉위했으나, 1123년 야율주렬의 죽음으로 멸망했다. 1124년 야율대석은 서요를 건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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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요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토착 이름大遼
통용되는 긴 이름Great Liao
일반 이름북요
정부 형태군주제
시작 연도1122년
종료 연도1123년
시작 사건야율춘 황제 즉위
종료 사건금나라에 의한 야율정 생포
선행 국가1요나라
후행 국가1금나라
수도서경부
공용어거란어
종교텡그리 신앙
불교
도교
유교
중국 민간 신앙
통화중국 전
중국 주화
구리 동전 등
지도자1야율춘
지도자 연도11122년
지도자2야율정
지도자 연도21122년~1123년
지도자 직함황제
현재 국가중국

2. 역사

요나라 말기, 금나라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천조제가 수도를 버리고 도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1122년, 금 태조에게 패배한 천조제가 장춘으로 피신하자, 요나라의 황족 야율대석 등은 연경(현재의 베이징)에서 천조제의 종부(從父, 아버지의 사촌 형제)인 야율순을 '천석황제'(天錫皇帝중국어)로 옹립하고 독자적인 정권을 세웠다.[1][2][6] 이 정권은 기존의 요나라와 구별하여 후대에 '''북요'''(北遼중국어)라 불리게 되었다.[7]

그러나 북요는 건국 초기부터 불안정했다. 같은 해 6월 천석제 야율순이 병사하자, 천조제의 아들인 야율정이 명목상 황제로 추대되고 천석제의 미망인인 덕비(德妃) 소보현녀(蕭普賢女)가 섭정을 맡았다.[8] 1123년 초, 금나라 군대가 연경으로 진격하자 섭정 소보현녀는 야율정과 함께 천조제에게 합류하려 했으나, 오히려 천조제에게 처형당하는 비극을 맞았다.[3][9]

이후 연경에서는 천조제의 다른 아들인 야율야리가 잠시 황제로 옹립되었으나 곧 병사했고, 뒤이어 추대된 야율술렬[10] 역시 내부 분열로 살해되면서 북요는 1123년 말 완전히 멸망했다.[4] 북요는 약 2년이라는 짧은 기간 존속했으며, 여러 황제가 교체되는 혼란을 겪었다.

북요 멸망 후, 야율대석1124년 일부 세력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건너가 서요를 건국했으며, 천조제가 이끌던 본래의 요나라도 1125년 금나라에 의해 최종적으로 멸망했다.

2. 1. 건국 배경

거란 둔기들


요나라 천조제 재위 기간 동안, 여진의 추장 완안아구다요나라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다. 1115년, 완안아구다는 금나라를 세우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1122년, 금나라 군대의 압박을 받은 천조제는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투메드좌기 북쪽에 위치한 가산(夾山)으로 도망쳤다.

같은 해 3월 17일, 천조제가 입래산(入來山)에서 금 태조에게 크게 패하고 장춘(長春)으로 도주하자, 요나라의 황족이자 유수관(留守官)이었던 야율대석은 이처온(李處溫) 등과 함께 천조제의 종부(從父, 아버지의 사촌 형제)인 야율순을 황제로 옹립했다. 이들은 야율순에게 '천석황제'(天錫皇帝중국어)라는 존호를 올리고, 기존 황제였던 천조제를 '상음왕'(湘陰王)으로 강등시켰다.[1][2][6] 이 정권은 국호를 '요'라 하였으나, 천조제가 이끄는 요나라가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후대에 '북요'(北遼중국어)라고 불리게 되었다. 북요는 금나라에 대항하는 자세를 취했다.[7]

그러나 1122년 6월 24일, 천석제 야율순이 61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의 뒤를 이어 천조제의 다섯째 아들이자 태자였던 진왕(晉王) 야율정이 명목상 황제로 옹립되었고, 천석제의 미망인인 덕비(德妃) 소보현녀(蕭普賢女)가 섭정이 되어 국정을 이끌었다.[8] 소보현녀는 금나라에 야율정을 황제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123년 정월, 금나라 군대가 북요의 수도였던 연경(燕京, 현재의 베이징)으로 진격해오자, 소보현녀와 야율대석 등은 야율정을 데리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천조제가 머물던 운중(雲中, 현재의 산서성 대동시)의 음산(陰山)으로 가서 합류하려 했다. 하지만 천조제는 이들의 옹립 행위에 분노하여 숙모인 소보현녀를 처형하고, 야율순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야율대석은 목숨을 건졌다.[3][9]

같은 해 5월 8일, 금군에게 항복했던 남경(南京, 연경)의 요나라 대신들은 다시 한번 북요를 세우고, 천조제의 둘째 아들이자 야율정의 동복 형인 양왕(梁王) 야율야리를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야율야리는 그해 10월에 병사했다. 그의 뒤를 이어 소덕렬(蕭德烈) 등은 천석제 야율순의 사촌 동생인 야율술렬[10]을 황제로 추대했다. 하지만 11월, 금나라 군대에 포위된 상황에서 내부 분열이 일어나 야율술렬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4] 이로써 1123년 말, 북요는 완전히 멸망했다.

이후 1124년, 야율대석은 요나라 궁정의 일부 세력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여 서요(카라 키타이)를 건국했다. 한편, 요나라 천조제가 이끌던 요나라는 1125년 금나라 장군 완안루사(完顔婁室)에게 사로잡히면서 최종적으로 멸망했다.

2. 2. 멸망 과정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 재위 기간, 여진족의 추장 완안아구다가 요나라의 통치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1115년, 완안아구다는 금나라를 세우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 금나라의 군사적 압박이 거세지자, 1122년 천조제는 금나라 태조에게 크게 패배하고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투메드좌기 북쪽에 위치한 가산(夾山)으로 도망쳤다.

같은 해 3월, 요나라의 황족이자 유수관(留守官)이었던 야율대석은 이처온 등과 함께 천조제의 종부(從父, 아버지의 사촌 형제)인 야율순을 황제로 옹립했다. 이들은 야율순을 '천석황제'라 칭하고, 도망친 천조제를 '상음왕'(湘陰王)으로 강등시켰다.[1][2][6] 이 정권은 공식 국호는 '요'였으나, 천조제가 이끄는 요나라가 여전히 존재했기에 후대에 '북요'(北遼)라고 불리게 되었다.[7]

그러나 북요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1122년 6월, 천석제 야율순이 61세의 나이로 병사하자, 천조제의 다섯째 아들인 진왕(晉王) 야율정이 명목상으로 황위를 계승했다.[8] 하지만 야율정은 당시 천조제와 함께 망명 중이었기에, 천석제의 미망인인 소보현녀(蕭普賢女)가 섭정을 맡아 국정을 운영했다. 소보현녀는 금나라에 야율정을 황제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1123년 정월, 금나라 군대가 북요의 수도 연경(당시 요나라의 남경)으로 진격해오자, 소보현녀와 야율대석 등은 야율정을 데리고 서쪽으로 피신하여 음산에 머물던 천조제에게 의탁했다. 그러나 천조제는 자신을 배신하고 야율순을 황제로 옹립했던 것에 분노하여 숙모인 소보현녀를 처형하고, 야율순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야율대석은 처형을 면했다.[3][9]

같은 해 5월, 연경에 남아 있던 요나라 관리들은 다시 한번 북요 정권을 세웠다. 이들은 천조제의 둘째 아들이자 야율정의 형인 양왕(梁王) 야율야리를 황제로 추대했다. 하지만 야율야리 역시 10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소덕렬(蕭德烈) 등이 천석제 야율순의 사촌 동생인 야율술렬[10]을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11월, 금나라 군대가 연경을 포위하자 북요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고, 야율술렬은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북요는 완전히 멸망했다.[4]

북요 멸망 후, 야율대석은 1124년 요나라 궁정의 일부 세력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여 서요(카라 키타이)를 건국했다. 한편, 서하로 도망치려던 천조제는 1125년 금나라 장군 완안루사(完顏婁室)에게 사로잡히면서 요나라는 최종적으로 멸망했다.

2. 3. 멸망 이후

1123년 야율주렬이 자신의 군대에게 살해당하면서 북요는 사실상 멸망했다.[4] 같은 해, 금나라 군대는 요나라의 남쪽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했다. 금나라 군대가 천조제의 피난처였던 청중(현재의 후허하오터 남쪽)까지 공격해오자, 천조제는 서하로 피신하려 했다.[4]

북요가 멸망한 이듬해인 1124년, 야율대석요나라의 남은 세력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여 서요를 건국했다. 이는 거란족의 국가를 재건하려는 노력이었다. 한편, 서하로 망명하려던 천조제는 1125년 금나라 장군 완안루사에게 사로잡혔고, 이로써 요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3. 역대 황제

(宣宗)효장황제(孝章皇帝)
천석황제(天錫皇帝)[5]야율순
(耶律淳)열리
(涅里)건복(建福)1122년[5]영안릉
(永安陵)섭정-덕비
(德妃)소보현녀
(蕭普賢女)-덕흥(德興)1122년[5]-제2대-소황제(少皇帝)
(진왕(秦王))
(명목상 즉위)[5]야율정(耶律定)-덕흥(德興)1122년1123년[5]-야율아리 계열(서북요)제3대-유황제
(幽皇帝)
(양왕(梁王))-아리
(雅里)신력(神歷)1123년-제4대-회황제
(懷皇帝)-출렬
(朮烈)-1123년-


4. 연호

참조

[1] 서적 Liao Shi, vol. 80
[2] 서적 Biran (2005), pg 20
[3] 서적 Biran (2005), pg 23
[4] 서적 Biran (2005). pp 24-25
[5] 서적 契丹钱树鉴赏与投资 https://books.google[...] Beijing Book Co.
[6] 서적 『遼史』巻30:保大二年,天祚入夾山……放進士李宝信等一十九人,遙降天祚為湘陰王。
[7] 서적 『遼史』巻30:耶律淳者,世号為北遼。
[8] 서적 『遼史』巻30:遺命遙立秦王定以存社稷,徳妃為皇太后,称制,改建福為徳興元年,放進士李球等百八人。
[9] 서적 『遼史』巻30:而金兵大至,徳妃奔天徳軍,見天祚。天祚怒,誅徳妃,降淳庶人,除其属籍。
[10] 서적 宋史紀事本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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